독서록

다시쓰는 택리지 1

청담(靑潭) 2011. 11. 21. 11:06

 


 

다시 쓰는 택리지 1 

신정일 저


♧우리 전북지방의 향토 문화사학자로서 놀라운 활동을 펴시는 신정일 선생의 《신 택리지》를 도서관에 구입하였다. 그러나 신 택리지는 학생들이 읽도록 양보하고 나는 2004년에 발간된 이 책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읽으면서 이 책에서 소제목으로 잡은 지역의 역사적 변천을 조사해보고 나의 기억도 더듬어가며 정리하고자 한다. 


제 1권 경기․충청편

경기도(京畿道)

1. 남한강 주변의 고을

1. 여주군 : 1읍 9면 1출장소 - 인구 11만명

 1895년(고종 32) 23부제의 시행에 따라 목에서 군으로 개편되어 충주부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이때 원주군 강천면이 새로이 편입되었다. 1896년 13도제의 시행으로 다시 경기도로 환원되어 3등군이 되었다. 1914년 읍·면 통폐합 조치에 따라 15개면에서 9개면으로 정비 되었으며, 이때 주내면을 중심으로 근동면·수계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여주면이 성립되었다. 1941년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 개군면이 양평군으로 편입되었다. 1970년 금사면에 산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9년 산북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1992년에는 북내면에 오학출장소가 설치되어 1읍·9면·1출장소 체제로 정비되었으며 200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내면 오학출장소가 여주읍 오학출장소로 개편되었다.

●영릉

 1976년에 처음 과답사를 다녀오고 그 뒤 학생들의 설악산 수행여행 시 몇 차례 찾은 기억이 있다.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군이신 세종의 능은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2007년 정치성 강한 유홍준 문화재 청장이 이곳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가 큰 구설수에 올랐었다.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한 행동이니만큼 나는 그리 크게 불쾌하게 생각지는 않았으나 그는 본래부터 상당히 엉뚱하고 왜곡된 인간으로 비쳐졌다.

●신륵사

 역시 영릉과 함께 가게 되는 유명한 사찰이다. 절 앞의 남한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전탑이 있다.


2. 성남시 : 3개구 48개동-인구 100만 명

1895년(고종 32) 한성부에 속한 광주군이 되었고, 1896년 경기도 광주부가 되었다가, 1906년 광주군으로 강등되어 광주군수를 두었다.

1946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城南出張所)가 설치되고, 1964년 광주군수 직할 지휘감독 체제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 말 서울이 계속 팽창하자 인구와 공장 그리고 부족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있는 농촌지역계획도시를 만들었다. 1969년 주택지 조성사업 착수에 따라 급증하는 인구에 대비하여 경기도 직할 출장소로 개편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하였다.

  1989년 4월 27일 성남시 '남단녹지'를 중심으로 분당지역 일대 540여만 평의 규모에 10만 6000호의 주택을 건설하여 42만 명 인구를 수용하는 신도시 건설 계획이 공식 발표되어 착수되었다. 같은 해 5월 1일에 수정출장소, 중원출장소 2개 출장소가 각각 수정구와, 중원구로 승격 설치되었다.

1991년 9월 17일 분당구가 신설되었다.

  1993년 분당구 분당동에서 서당동·수내동·내정동이, 이매동에서 매송동·하탑동·야탑동·중탑동이 분동되었다. 1995년 분당구 내정동에서 정자동을 분동하고, 1996년 정자동을 다시 신기동불정동으로, 금곡동구미동으로 분동하였다.

2001년 1월 1일 성남시 조례에 의해 분당구의 초림동·내정동·수내동이 수내 1·2·3동으로, 신기동·정자동·불정동이 정자 1·2·3동으로, 서현동·서당동이 서현 1·2동으로, 이매동·매송동이 이매 1·2동으로, 야탑동·하탑동·중탑동이 야탑 1·2·3동으로 각각 명칭이 바뀌었다.

  2003년 현재 현재 수정구(壽井區)의 신흥1~3동·태평1~4동·수진1~2동·단대동·산성동·양지동·복정동·신촌동·고등동·시흥동, 중원구(中院區)의 성남동·중동·금광1~2동·은행1~2동·상대원1~3동·하대원동, 분당구(盆唐區)의 분당동·수내1~3동·정자1~3동·서현1~2·이매1~2동·야탑1~3동·판교동·금곡동·구미동·운중동 등 3구 4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 

  병자호란의 아픔이 서린 곳. 1976년경에 광주읍지역이 완전 시골이었을 적에 남한산성을 답사한 바 있는데, 1990년대 후반에 고양에서 이곳 분당구로 이사한 숙희네 집에 가서 윤서방과 함께 다시 찾았을 때 남한산성과 성안의 아름다움을 새삼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35년 전 삼전도비는 광주에서 서울 가는 먼지 나는 신작로 옆에 초라하게 서 있었는데 그곳이 현재는 송파구 잠실동이 되었다.

●분당 

  나의 사랑하는 셋째 동생인 숙희네는 지금도 광주에서 독립한 성남시에 속한 아름다운 신도시 분당구에 살고 있다. 우리 숙희와 영환이는 마치 소설같은 사랑(70년대 초등학교 1년 선후배로 성적이 최고로 우수하고 품행이 최고로 방정하고 당시 가장 강력하게 전개되던 자유교양 독서대회 군 대표들인 독서광들)을 통해 결혼하여 아주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엘리트 가정을 만들어 간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분당에서 중산층 가정에 어울리는 평형에 자알 살고 있는데 요즘 가장 거품이 심했다하여 집값이 크게 떨어져도 별로 개의치 않는단다. 왜냐구요? 오래 오래 편안하게 살기 위해 장만한 집이니까요. 집값 오르면 팔기 위한 투기목적이 없으니까요.


2. 역사와 한의 고장 강화

1. 강화군 : 1읍 12면 - 인구 6.7만 명

 행정상의 지위는 고려시대 이래 군·부(府)·도호부(都護府)·도(都) 등으로 여러 번 변경되다가 1906년 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교동군(喬洞郡)을 편입시켰으며, 1973년 강화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2003년 현재 강화읍 및 선원(仙源)·불은(佛恩)·길상(吉祥)·화도(華道)·양도(良道)·내가(內可)·하점(河岾)·양사(兩寺)·송해(松海)·교동·삼산(三山)·서도(西島)면 등 1읍 12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니산 참성단

  마니산에는 두 번 오른 듯하다. 1970년대 과 답사때 한번, 그리고 직원여행시 한번 마니산에 올랐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제 5위의 큰 섬이다. 몽고침입시 1232년부터 1260년까지 40여년간 임시수도였고 몽고의 6차례에 걸친 침략을 끈질기게 물리쳤는데 그럴 수 있었던 주 요인의 하나는 섬이라는 지형적 유리함이라고 배운 때문인지 육지와의 거리에 유난히 관심이 컸던것 같다. 사실 강화도와 육지와의 거리는 지척이라서 섬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을 정도라 아무리 내륙의 기마병단이라해도 저 좁은 바다때문에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했을까하는 의문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오늘날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까지 놓이고 무시로 왕래하니 어디 섬이라고 부를수나 있을까 싶다.

  60-70년대에는 전국체전시 참성단에서 성화를 점화한 것으로 기억되나 이젠 전국체전은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국민들은 거의 알지조차 못할 정도로 우리의 국력이 커졌다. 88서울 올림픽과 2002 월드컵을 치르고 세계의 여성 골프계를 장악하고 황영조와 박찬호와 김연아가 있어 우리들의 간덩이가 너무 커졌다. 국가와 자신을 위해 올림픽 우승을 바라보며 인기종목에서부터 비인기종목까지 피땀 흘리며 연습한 만 수천 명의 선수들이 벌이는 경기는 거의 중계조차 안하는 TV는 이승엽이 속한 일본의 오릭스가 벌이는 경기는 이승엽이 출전하든 말든 계약에 의해 모두 중계하는 이상한 상업주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이를 시정하려하지 않고 시정할 수도 없다. 내가 지나친 원칙주의자인가? 지나친 인도주의자인가? 지나친 애국주의이거나 국가주의자인가? 아무튼 서운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 참 1963년 제 43회 전주체육대회에 아버지와 함께 가서 관전했던 아름다운 기억, 전고에서의 야외 권투경기, 공설운동장에서의 야구경기....

●전등사

  1970년대 후반에 과답사를 다녀온 뒤 1990년대 초에 내 차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바 있고 그 후 직원여행을 다녀온 기억이 있으며 2009년에 기숙형고교 관리자 연수가 이곳에서 열려 오랜만에 다녀온 바 있으나 이때는 일정관계로 전등사만 들렸다. 오랫동안 넷째인 난희 신랑 김서방이 이곳 강화수협에 근무하였으나 살림은 서울에서 하는 고로 사무실을 찾아본 일은 없고 지금은 서울에서 근무중이다.


3. 남북으로 통하던 중요한 길목

1. 안산시 :  2구 25동 - 인구 76만 명

  1895년(고종 32) 인천부에 속한 오등군(五登郡)이었다가 1896년 경기도 사등군(四登郡)이 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변화를 겪다가 1914년 안산군·과천군·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1976년 시흥군 군자면과 수암면, 화성군 반월면 일대를 포함하는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 발표 이후 반월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승격하였다. 1994년 12월에는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옹진군 대부면 전체를 편입하였다.

  1995년 4월 시흥시화정동 일부와 장상동·장하동·수암동이 편입되어 안산동이 신설되었다. 1996년 사동이 사1동과 사2동으로, 본오2동이 본오2동과 본오3동으로 각각 분리되었으며, 1998년 10월 공단동초지동으로 통합되었다. 2002년 11월 1일단원구(檀園區)와 상록구(常綠區)가 신설되었다.

  2004년 현재 단원구의 와동, 고잔동, 원곡본동, 원곡동, 초지동, 선부동, 대부출장소(대부동)와 상록구의 일동, 사동, 본오동, 부곡동, 월피동, 성포동, 반월동, 안산동 등 2구 2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화호 

  10여 년 전 제부도에 놀러 갔다가 대부도를 거쳐 시화호와 시화방조제를 답사한 바 있다. 안산시는 개인적으로 찾을 일이 없어 간 적이 없다가 작년에 친구인 송명용 선생의 딸 결혼식을 이곳에서 올리게 되어 시내에 처음으로 들린 바가 있다.

●덕적도

  분명치는 않으나 10여년 전 쯤 덕적도로 직원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예쁜 꽃을 한 그루 가져와 시골집에 심었던 기억이 난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영흥도를 거치면서 덕적도를 찾으며 시간을 거슬러 역사의 현장에 들린 느낌을 받았다. 임오군란시 원세개가 청군을 이끌고 왔던 곳이며, 청일전쟁시 격전의 현장이며 일본의 운요호가 침략을 개시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평택시 :  3읍 6면 13동 - 인구 42만 명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1914년 경기도 진위군에 병합, 1924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7월 송탄읍(松炭邑)이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1983년 2월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안성군원곡면(元谷面) 용이리(龍耳里)·죽백리(竹柏里)·청룡리(靑龍里)·월곡리(月谷里)와 공도면(孔道面)의 소사리(素砂里)가 평택읍에, 용인군남사면(南四面) 진목리(眞木里) 일부와 봉명리(鳳鳴里) 일부가 진위면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1986년 평택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5월 평택군·평택시·송탄시가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2010년 현재 관할구역팽성읍·안중읍·포승읍· 진위면·서탄면·고덕면·오성면·청북면·현덕면의 3개 읍 6개 면과 장당동·칠괴동·도일동·장안동·지산동·신장동·유천동·비전동·통복동·세교동·신대동·용이동·청룡동의 13개 동이다.

●평택항과 서해대교

  2001년에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10년이란다. 앞으로 10년 후면 내가 칠순잔치를? 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하여 평택항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아름다운 서해대교는 우리의 자랑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평택보다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날 때의 평택항이 확연하게 다가온다.


3. 안성시 :  1읍 11면 3동 - 인구 만 명

1914년 3월 안성(安城)·양성(陽城)·죽산(竹山)의 3개 군을 병합하여 안성군이라고 하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인군고삼면(古三面)이 안성군으로 편입되어 l읍 12면으로 편성되었으나, 1983년 2월 15일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원곡면의 용이(龍耳)·죽백(竹栢)·청룡(靑龍)·월곡(月谷)의 4개 리와 공도면소사리(素沙里)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편입되었다.

  1992년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1997년 보개면 2개 리와 대덕면 3개 리가 안성읍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 안성군이 안성시로 승격되어 도농복합형의 시가 되면서 안성읍이 안성1·2·3동으로 분할 변경되었다.

  2001년 6월 공도면이 공도읍으로 되어 2003년 현재 행정구역은 공도읍과 원곡면·양성면·고삼면·삼죽면·죽산면·일죽면·보개면·금광면·서운면·미양면·대덕면, 안성1~3동의 1읍 11면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성장

 대구 전주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으로 유명했다는데 이곳이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관문에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하여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는데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맞춤은 남여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부부맞춤』이 아닐까?

 

완당(阮堂)은 71세에

 

 “최고 훌륭한 요리는 두부와 오이ㆍ생강ㆍ나물을 차린 것이요, 가장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ㆍ딸ㆍ손자가 모인 것이다[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라고 하여 평범한 행복이 최고의 행복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막내처제의 외동딸 조카가 이곳에 있는 동아방송대에 다니고 있다. 가수가 꿈이라는데 노래는 아주 잘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고 나로서는 가수보다는 연예가에서 무엇인가 다른 전문직업을 찾아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어 조카에게 부러 크게 관심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4. 이천시 :  2읍 8면 4동 - 인구 21만 명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충주부 이천군,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되어 이천군에 합병됨으로써 면적이 넓어졌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이천군의 읍면·둔면(일부)이 읍내면으로, 신면·둔면(일부)이 신둔면으로, 사면·백면이 백사면으로, 부면·발면이 부발면으로, 대면·월면·초면이 대월면으로, 모면·가면이 모가면으로, 호면이 호법면으로, 마면·장면이 마장면으로 통합되었다. 음죽군의 8개면은 청미면·설성면·율면의 3개면으로 폐합되어 이천군에 편입되었다. 1938년에 읍내면이 이천읍으로, 1941년에 청미면이 장호원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에 부발면이 부발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이천군이 이천시로 승격했다. 이때 이천읍은 폐지되고 창전동·관고동·중리동 등 3개 행정동으로 분할되어 11개 법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천의 쌀

대월면 장평리에서 나던 자채쌀이라 한다. 또 이천읍 갈산리에서 나던 게걸무도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천 쌀은 지금도 우리 호남미보다 값 비싸게 거래된다고 하는데 정말 밥맛이 그리 좋은 건가?


5. 용인시 :  3구 1읍 6면 24동 - 인구 91만 명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충주부 용인군, 1896년에 경기도 용인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양지군 일원과 죽산군 일부가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용인군의 수여면·포곡면·모현면은 그대로, 동변면·읍내면이 읍삼면으로, 수진면·지내면이 수지면으로, 기고면·판내면·구흥면이 기흥면으로, 서촌면·도촌면·남촌면·현내면이 남사면으로, 상동면·하동면이 이동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양지군이 폐지되고 양지군의 주동면·주북면·읍내면·주서면이 내사면으로, 고북면·고동면·고사면이 고삼면으로, 죽산군의 근삼면·근일이면, 양지군의 박곡면·고안면이 외사면으로, 죽산군의 원삼면·원일면이 원삼면으로 폐합되었다. 1931년에 읍삼면은 구성면으로, 1937년에 수여면은 용인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고삼면은 안성군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에 용인면이, 1985년에 기흥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96년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되면서 수지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용인읍은 폐지되어 중앙동·유림동·역삼동·동부동 등의 4개 행정동으로 분할되어 10개 법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내사면이 양지면으로, 외사면이 백암면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2000년에 구성면에서 구성읍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에 처인구·기흥구·수지구로 3개 구청이 설치되었다

●애버랜드

  학생들이 즐겨 가고 싶어하는 곳이라서 자주 따라가게 되는 곳이다. 몇 번 갔는지 잘 알 수도 없다. 그런데 롯데 월드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언제 가보나 롯데월드?

●민속촌

  1966년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 간 곳이다. 그 날 김희갑씨와 황정순씨를 보는 행운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 뒤 두 번 정도 더 다녀온 것 같다. 한참동안 사극 촬영장소로 유명했더니만 요즈음은 부자나라가 되어서 방송국들이 각양각지에 사극촬영장을 조성하고 있는데다, 민속촌도 세월이 흘러서인지 요즈음은 그리 각광받는 관광지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누가 잘 가지도, 어디에 잘 보도되지도 않는다.

●죽전 

  우리아들이 군대에 있는 동안에 단국대가 용산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옴에 따라 이곳에서 2년간 학교에 다녔다. 용인은 이제 인구 10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어제 어느 일간지에 학교가 이곳으로 온 후 아주 발전적이라는 보도가 나서 읽으니 비록 In서울에서 Out서울이 되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 거주하던 동사무소 바로 뒤편의 원룸에 자주 갔었다. 서울에 차를 끌고 갈때  죽전휴게소에서 쉬게 될라치면 ‘우리 차 놓고 아들에게 다녀올까?’하고 농담을 한다. 아들은 이미 2년 전에 이곳을 떠났지만  자식사랑의 표현을 내 방식으로 해보는 거다.

 

 

4. 수원에서 인천까지

1. 수원시 :  4구 39동 - 인구 110만 명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군이 되어 1895년에 인천부에 속했으며, 1896년 도제(道制) 실시로 경기도 수원군이 되었다. 이때 경기도 관찰부 소재지가 되어 도의 행정중심지가 되었으나, 1910년에 서울로 옮겨갔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남양군이 폐지되어 합속되고, 광주군·안산군의 일부가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수원군 26개면, 남양군 18개면, 광주군 2개면, 안산면 3개면이 21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수원군의 남부면·북부면이 통합된 수원면이 1931년에 수원읍으로, 1949년에 수원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7년에 경기도청이 옮겨옴에 따라 수원은 명실상부한 경기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8년 구제 실시로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했다. 1995년 화성군 태안읍 영통리가 팔달구로, 화성군 반월면 당수리·입북리가 권선구로 편입되어 시역이 확장되었다. 2003년 영통구를 설치했다.

●수원화성 : 수원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정조가 만든 도시이며 1784년부터 1786년까지 수원성을 쌓고 도시가 만들어 진다. 이때 유수부가 되고 수원성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조의 효성심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 크게 본받고 나도 더욱 반성할 일이다. 두어 달 전에 서울의 고등학생들이 수원성 축조 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거중기가 무거운 돌을 높이 올려 실제 성벽을 쌓는데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일정한 높이만큼만 올려주는데 그친 기계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낸 쾌거가 있었다. 대단한 학생들이며 역사교사인 나 자신부터가 부끄럽다. 나도 일직이 박물관에서 거중기를 접하고 그 크기 때문에 의아심을 품은 적이 있지마는 워낙이 기계에 문외한인데다 어느 박물관에는 상당한 크기모양으로 전시되어있어 그러려니 했는데 그 학생들은 그 실제 보다 큰 규모의 크기도 검증 없이 제멋대로 제작되었음을 밝혀냈다. 수원이 현재 경기도 도청소재지이나 내가 평소에 방문할 일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에 수원성 답사를 한 이후 20년도 더 지난 뒤인 1990년대 말 우리 막내가 평촌에 살게 되면서 김서방과 함께 수원성을 다시 찾았다. 수원성을 직접 한참을 걸어도 보고 수원화성의 전체적인 윤곽도 잡아 낼 수 있었다. 그 뒤 우리 아들이 이곳 향토사단의 헌병대에 근무할 때 여러 차례 수원을 들리게 되고 따라서 수원성도 자주 보게 되었다.

  수원에서 한마을 소꿉동무 기도가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천안으로 옮겨갔고 역시 초등학교 동창인 덕순이가 살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전학을 갔던 그 녀를 내가 기억(특히 하이얀 원피스를 입고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던)하고 있었기에 동창회를 재건하면서 찾아냈고 이후 여러 차례 전주까지 내려와 참석하여 주었다. 경양식집을 운영한다고 하는데 참 따뜻한 여자 동창이다. 또 다른 초등학교 동창인 귀일이가 살고 있다고 들었으며 광석이도 부근에서 식당을 운영한다고 한다. 마음과는 달리 평소에 가까이 할 수 없을 뿐더러 그곳에 갈 일이 있어도 전화 한번 못하기에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 할 수 없다.


2. 안양시 :  2구 31동 - 인구 62만 명

  1895년(고종 32)에는 금천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금산(衿山)·안산(安山)·과천(果川) 3군을 통합하여 시흥군이 되었다.

그후 금천이 서이면(西二面)으로, 서이면이 안양면(安養面)으로 개칭되고, 1949년 안양읍으로 승격하였다. 1963년에 동면(東面) 신안양리와 서면(西面) 박달리(博達里)가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1992년 10월 1일만안구동안구가 설치되었다. 1994년 7월에 박달동을 박달 1,2동, 평안동을 평안동과 귀인동으로 분리하였다.

2003년 현재 만안구(안양 1~9동·석수 1~3동·박달 1~2동)와 동안구(비산 1~3동·부흥동·달안동·관양 1~2동·부림동·평촌동·평안동·호계 1~3동·범계동·신촌동·갈산동·귀인동)의 2구 3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촌

  우리 막내가 사는 평촌이 안양시에 있으며 1990년대 중엽 주거지로 조성된 깨끗한 도시이다. 지금도 우리 막내가 살고 있고 부근에 조카딸 지은이네가 어울려 의지하며 살고 있다. 작은 집의 향숙이 고모도 안양에 산다는데 지난 번 당숙모 장례식에서 뵙지 못했다. 20세 처녀시절 우리집에 오면 여기저기서 책을 빌려 읽었다. 당시(1950년대 중반)에 여자가 중학교 진학이란 시골에서 거의 꿈 같은 얘기였고 고모는 유난히 책을 찾았다.나는 예쁜 고모를 귀찮게도 따라 다녔었다. 다아 그리운 시절이고 보고 싶은 얼굴이다. 이제 70이 넘으신 고모인데 내 기억에는 스무 살 예쁜 모습만 어른거리누나.


3. 부천시 :  3구 37동 - 인구 89만 명

  1413년(조선 태종 13)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며, 1914년 군부(郡府) 폐합령에 따라 넓은 지역이 인천부(仁川府)에 속하게 되고, 나머지 지역과 주변 일부 지역을 합쳐서 부천군으로 발족하였다.

  그후 인천과 서울의 팽창으로 주읍(主邑)인 부평이 인천에, 9개 리가 서울에 편입되어 소사(素砂) 1읍과 9면을 관할에 두었다가 1973년 7월 1일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9면이 옹진군·시흥군·김포군에 이관되고 소사읍부천시로 승격되었고, 1975년 김포군의 오정면이 부천시에 편입되었다.

  1993년 중동 신시가지 개발에 따른 인구증가로 중구를 원미구(遠美區)와 오정구(梧丁區)로 나누고, 역곡동·중동·상동을 제외한 남구는 소사구(素砂區)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5년 인천광역시부평구서운동 일부가 오정구 삼정동에 편입되었고, 원미구 중1동이 중1동과 3동으로 나뉘어졌다.

  2009년 현재 원미구·소사구·오정구의 3개 구가 있으며, 원미구는 심곡1동·심곡2동·심곡3동·원미1동·원미2동·소사동·역곡1동·역곡2동·춘의동·도당동·약대동·중동·상동·중1동·중2동·중3동·중4동·상1동·상2동·상3동 등 20개동, 소사구는 심곡본1동·심곡본동·소사본1동·소사본2동·소사본3동·범박동·괴안동·역곡3동·송내1동·송내2동 등 10개동, 오정구는 성곡동·원종1동·원종2동·고강본동·고강1동·오정동·신흥동 등 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사읍

 먼 시절 초등학교 때 우리는 읽을 책이 많지 않았기에 전라도 사투리로 꺼떡허면(느닷없이 자주 때때로)지리부도를 꺼내 놓고 지명 찾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 때 경기도<소사읍> 전라남도 <학교)같은 작은 도시들을 알게 되었다. 소사가 복숭아로 이름이 높은 것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기억이 난다. 내 고향 깁제읍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읍이었던 소사읍이 오늘날 90만 명의 대도시 부천시가 되었다. 서울에서 인천 가는 길에 있는 부천시에 도대체 가볼 일이 없던 차(서울에서 인천을 가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영종도 인천공항 가는 길도 다르고, 중국에 가는 배를 타는 경우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경유하니 말이다)에 작년 가을에 작은 외삼촌 큰딸인 소영이가 결혼식을 부천에서 올리게 되어 마포 우리 집에서 내차로 직접 여의도를 거쳐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서울과 인천이 마치 한 도시처럼 이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금년 봄에도 큰 아들 종관이가 또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삼촌네는 인천에 살고 계시지만 삼촌의 처제가 운영하는 예식장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원미동 사람들

《원미동 사람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양귀자씨는 유명작가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중엽에 발표된 이 소설을 나는 대충 넘겨보고 말았던 것 같다. 내가 평범한 한국영화와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데 나는 내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어서 픽션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애써 자위하며 양드리와 자주 영화 보러 가지 못함을 변명하는 자료로 활용한다. 양귀자 씨는 대학에 함께 다닌 분으로 학교신문사에서 본 기억이 있다.


4. 인천광역시 :  8구 2군 1읍 19면 124동 - 인구 280만 명

  1883년(고종 20) 개항되었으며, 개항 당시의 인천부는 부내· 원우이· 주안· 남촌· 조동· 신개고· 황등천· 전우· 이포· 다소 등 10개면이 있었으며, 문학산에 있던 치소가 개항과 함께 다소면의 작은 어촌이던 제물포로 옮겨짐에 따라 제물포가 근대 인천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인천은 조미수호통상조약, 한일간의 제물포조약, 조·영 및 조·독 수호조약 체결의 무대가 되었고, 유럽과 미국 각국과의 통상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 근대적 항만시설이 축조되어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정에서는 인천항을 관장하는 감리서를 설치하였으나 을사조약과 함께 폐지하고 그 대신 일본이 이사청을 신설하였다가, 국권피탈 후 1895년 이래 인천의 행정기구인 인천부에 통합하였다. 1910년 조선총독부 관제에 의한 부가 되었고, 부세확장에 따라 부평의 대부분을 포함하였다.

  1914년 인천의 관할구역이 구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축소되고 구인천읍과 부평이 통합되어 부천군이 되었다. 이 해 월미도가 인천부에 편입되었으며, 1936년에 부천군 다주면과 문학면 각 일부가, 1940년에 부천군 문학·남동·부내·서곶의 4개 면이 각각 편입되어 시역을 확장하였다.

  8·15광복 이후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천시로 개칭되었고, 1963년 부천군 작약도를 편입하였으며, 1968년부터 구제가 실시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독립하였다. 1989년 김포군 계양면,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등이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개칭되었고, 같은 해 3월 경기도 강화군 전역과 김포시 검단면,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전역이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중구· 동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부평구· 계양구· 서구의 8구와 강화군·옹진군의 2군으로 행정구역을 이룬다.

●인구 300만의 제3의 대도시

  유행가 가사에 ꡐ서울 부산 대구 찍고ꡑ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우리나라 제3의 도시였던 대구가 그 영광을 인천에 넘겼다. 대구보다 30만 명이나 인구가 많다. 서울이 1천만이요, 경기도가 1천 2백만이다. 서울경기에 2천 5백만 명이 모여사니 인구의 절반이 서울에 사는 셈이 되었다. 셋째 외삼촌네가 살고 계시나 나는 인천 시내 나들이가 별로 없어 잘 알지 못할뿐더러 송도 유원지등 관광지에도 가본 일이 없는 생소한 도시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1992년에 완공된 인천국제 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전 세계가 인정한다. 그 규모의 엄청남도 세계적이겠지만 시설과 운영시스템 등 제반여건의 우수함에서 최근 5년간 부동의 세계1위를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산층만 되면 해외나들이가 예전의 서울나들이보다 심하니 나 역시 최근엔 1년에 한번씩은 인천공항을 드나든다.


 5. 김포시 :  3읍 3면 4동  - 인구 25만 명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군이 되고, 1896년에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하여 통진군과 양천군이 김포군에 병합되어 영역이 크게 넓어졌다. 이때 옛 김포군의 군내면·석한면·고현내면을 통합하여 만든 군내면이 1934년에 김포면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이후 서울 시내버스가 연장 운행되면서 서울의 통근권으로 포함되어 급속히 성장하면서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옛 양천군 지역이었던 양동면·양서면이 서울시의 팽창에 따라 1963년에 서울로 이관되었다.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어 오정면·계양면을 편입했으나, 1975년에 오정면은 다시 부천시로 옮겨갔으며, 1989년에 계양면은 인천직할시 북구로 편입되었다. 1983년에 양촌·월곶·대곶면의 일부를 통합, 통진면을 신설했다. 1995년에는 인천시에 인접해 있던 검단면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1998년 김포시로 승격되면서 김포읍이 폐지되고 행정동인 김포1동·김포2동·김포3동으로 분할되었다. 2004년 통진면이 통진읍으로 승격되었다.

●애기봉 

  쑥갓머리 산이라는 애기봉의 사연은 그야말로 전설인 듯싶다. 어쨌든 간에 전쟁을 당하여 헤어지고 이별하는 슬픈 사연을 담아낸 전설일 것이니 전쟁의 비극을 사람들은 너무 남의 일로만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오늘 뉴스에는 1년 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장애자가 되거나 부상으로 고통 받는 해병대원들의 피눈물 나는 사연과,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퇴출혁명을 이루고도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군부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져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는 안타까운 보도를 접한다. 언제인가? 이 지구상에 모든 인간들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때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처럼, 인간에게 죽어가는 저 슬픈 동물들의 불행한 운명처럼, 인간사회도 투쟁과 침략과 살육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럼 <인간>이란 말은 왜 <동물>과 구분 짓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인가? 욕심과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들이 기껏 만들어낸 자신들의 문명을 스스로 파괴할진대 동물과 다름이 무엇이뇨? 아아...욕망이 있기에 문화가 창조되고 문명이 건설되고 또 이를 파괴해야만 또 다른 문명이 창조된다고요? 말 되는 군요.

  저 권력을 탈취하려고 악다구니 쓰는 정치인들을 비웃지만 말고, 우리 보통사람들만이라도 스스로 나와 내 식구들과 내 직장가족들과 내 이웃과 서로 화내지 말고 서로 웃고 서로 타협하고 서로 양보하며 서로 도와가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그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군요.

●김포국제공항

  김포하면 공항이란 말이 자연스레 붙어버리지요. 그러나 이젠 공항의 대명사격인 그 명예는 인천에 넘기고 마치 국내선 비행장처럼 되어 버렸네요. 아니 몇 년 전 일본 갈 때 김포 비행장에서 간 것도 같아 찾아보니 일본과 중국만 이곳에서 일부가 출발하기는 하는군요. 왠지 아직도 정감이 가시지 않는 김포공항입니다.

 

5. 한강변에 자리 잡은 서울 공화국

 서울특별시 : 25구 424동 - 인구 1060만 명

 지방제도 개편으로 1895년 한성부는 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896년 다시 한성부로 개칭되었고, 1906년에는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명칭이 바뀌면서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고, 성내를 5부, 성외를 8면으로 하는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물러가고, 경성은 '서울'이 되어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서울시'로 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10월에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것으로 바꾸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수도로 결정되었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되면서 136.06㎢였던 시역을 268.35㎢로 확장하고 성북구를 신설, 9개구를 가진 대도시로 새 출발했다. 6·25전쟁 때는 임시 수도가 부산으로 이전했고, 1953년 환도했을 때의 서울은 그야말로 전쟁이 남긴 폐허였다. 곧 복구사업에 착수하여 제 모습을 갖출 무렵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하여 대도시 중심의 불균형 성장전략을 밀어 부쳤다. 이때부터 서울은 거대도시를 향해 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는 내무부장관의 감독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됨으로써, 다른 지방행정구역과 구별되는 특별시가 되었다. 1963년에는 주로 한강 이남과 동북부에서 시역이 2배나 될 만큼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10년 뒤인 1973년에는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어 모두 11개구가 되었고, 경기도 지역의 일부가 편입되어 시역이 다시 늘어났다. 이 무렵 한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급속히 진전되어 1975년에 강남구, 1977년에 강서구, 1979년에 은평구·강동구·동작구·구로구가 신설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송파구·중랑구·노원구·서초구·양천구를 신설하여 관할구가 22개에 이르렀다. 1991년에는 지방의회가 구성되었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가 비로소 이루어져 지방자치의 시대를 열었다. 선거를 앞두고 성동구에서 광진구, 도봉구에서 강북구,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되어 관할구가 25개로 늘어났다.

●투금단

  두 형제와 황금덩어리 이야기의 전설이 깃든 곳이 양천 공암나루라 한다.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GDP 1만 달러까지는 돈이 행복의 절대조건이 되지만 이를 넘어서면 돈과 행복의 관계는 느슨해지고 개인의 자유감이 중요 조건이 된다고 한다. 즉 어느 정도의 경제가 이루어지면 돈은 일상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바로 늘어난 자유 때문에 행복이 상승한다고 한다. 크게 일리 있는 말이다. 인간답게 살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조건만 갖추면 그 때부터는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 가기 나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인간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가 행복의 가장 소중한 관계라는 지적도 옳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비교와 경쟁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영원히 돈의 노예 상태를 면치 못하는 것은 아닌가? GDP 2만 달러의 선진국이 되었어도 여전히 부동산 투기와 증권 투기와 로또 복권 투기가 가실 줄을 모른다.

●한강의 다리

  한강에 다리가 처음 놓인 것은 1900년이며 바로 한강철교이다. 1917년에야 한강인도교(한강구교)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내가 서울에 가끔씩 다녀도 한강에 놓인 다리들이 하도 많아 도대체 무슨 다리인지 알 수가 없어 자주 가는 길 주변의 다리는 외워보기도 한다. 오늘 정리하여 보겠다. 많기도 하다. 얼마나 살면 이 많은 다리를 모두 알 수 있겠느뇨?

1. 일산대교(일산서구)

2. 김포대교(외곽순환도로․고양)

3. 행주대교

4. 방화대교(행주산성) 

5. 가양대교(난지도)

6. 성산대교(목동․마포구청)

7. 양화대교(합정동)

8. 당산철교(지하철 2호선)

9. 서강대교(여의도 상․밤섬)

10. 마포대교(여의도 중)

11. 원효대교(여의도 하)

12. 한강철교(노량진역․용산역)

13. 한강대교(노량진-용산, 노들섬)

14. 동작대교(현충원)

15. 반포대교(예술의전당․서울교대)

16. 한남대교(고속도로)

17. 동호대교

18. 성수대교(강남구청)

18. 영동대교

20. 청담대교

21. 잠실대교((송파구-광진구)

22. 잠실철교

23. 올림픽대교(강동구․올림픽공원)

24. 천호대교(풍납토성)

25. 광진대교(광나루유원지)

26. 강동대교(중부고속도로)

27. 미사대교(서울춘천대로)

28. 팔당대교(하남시청)

●망원정

  학우선(鶴羽船)에 대한 글을 보니 우습기 보다는 서글프다. 학의 깃털로 배를 만든다고 하는 비과학적 무식이나, 전국의 학을 잡아들이라는 몰상식한 공출령을 보면 비록 대원군의 애국심과 부국강병의 열망은 인정하되 조선이 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슬픈 우리의 과거사가 아닌가?

  과학기술을 천시하고 허망한 성리철학에만 매몰되어 공리공담과 붕당투쟁만 일삼다가 서양의 침입 앞에서 졸지에 강력한 전투함을 제작하려니 제대로 되겠는가? 어제 FTA를 한나라당이 야당과의 협상에 실패하고 졸속처리방식으로 국회비준을 성사시켰는데 훗날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내 판단으로는 긍정적 평가가 내려질 것으로 전망한다. 왜냐구요? 야당의 비준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이기에 그 어떤 대책으로 정부가 대응해도 또 다른 과제를 요구하며 끝없이 반대할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반대 아닌 야당과 시민세력의 결집을 통한 권력쟁취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FTA를 성사시키고 한미간에 협력체제가 더 구축되면 야권의 통합이 어려워지고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불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어떤 의원은 최루탄을 터뜨리고 가루를 의장석에 뿌리는 망동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장한 일인 듯 큰소리치니 또 다시 한국국회가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데 저런 몰상식한 행동을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 저지르고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비준을 반대하는 상당한 수의 국민들이 저런 행동에 대해 오히려 변호하거나 인정하여 주거나 적어도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름도 거론하기 싫은 그 의원과 당대표는 그런 행동을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비교했다고 한다.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위한 충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런 불법행동에 죄송하다는 표현은 커녕 나라를 위해 숭고한 목숨을 바친 분들과 비교하는 저들의 뻔뻔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투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지만 정말 이해가 안되는 인간들이다. 국회법에 따라 처벌받기를 원한다.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일인 170만 명을 학살한 킬링필드의 주역중 하나인 어느 살인마는 어제(2012. 11. 23) 재판에서 자기 변호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오히려 애국적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애국심을 강조하고 자신의 행동은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베트남과 미국의 침략위협 때문에 나쁜 인간들을 죽인것이라고 변호했다고 한다. 다름 아니다.

  법을 지키지 않아 검거되거나 고발되거나 하여 기소되어도 지지하는 대중의 힘으로 처벌을 못하는 할 수 있게 되어버린 이 나라 법치실태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이름 없는 서민들은 작은 범법행위에도 벌금을 군말 없이 물고 처벌을 받고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하건만 정치하는 인간부류들은 범법행위가 곧 훈장이 되고 명예가 되고 완장이 된다. 부끄러움도 없이(전혀 부끄러움 없는 파렴치하나 확신범들이라고 나 역시 확신한다) 자랑스럽게 떠들고 박수 받는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정말 불공평한 사회라는 가슴 아픈 증거다.

●염리동과 애오개

  염리동은 소금장수들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가 공덕동이지만 바로 뒷길에 염리동성당이 있고 애오개(아현동)재개발지역에 접해 있다. 공덕2동의 끝머리에 위치하여 염리동과 아현동 경계선에 있는 것이다.

  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포 사람들은 새우젓 장수가 많았는지 아침에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오면 아침 햇빛을 앞으로 안고 오기에 얼굴이 까맣게 타서 얼굴만 보고도 마포사람임을 금방 알아냈다고 한다. 넌센스 같은 얘기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시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다들 까맸었다.(나는 유난히도 더 까만 얼굴이라서 친구들이 놀렸다)그러나 서울에 올라가 불과 몇 달만 지내다 와도 그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예뻐져서 돌아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는 확신하였다. 서울의 물은 분명 우리 시골의 물과는 화학적으로 다르다고 굳게 믿었다.

  오늘날은 서울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피부 빛으로 구분이 안 된다. 선진국이 되어 모두 수돗물을 쓰고 모두 햇빛 보기를 꺼려하고 모두 잘 씻고 모두 옷도 잘 입어 잘 가꾸니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나라가 지금도 가난하고 내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면 나는 아직도 얼굴이 까만 촌놈모습을 면치 못했을 게라.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 잘 살게 되었음에 감사하고 이만큼이나마 까만 얼굴 면케 해준 내 인생에 감사해야겠네요? 허나 3년뒤부터는 적어도 오전 한나절은 고향마을 텃밭 지어가며 살고자하니 다시 얼굴 타서 까매지는 것은 능히 감수해야지요.

●종로

  지난 11월 12일 토요일에 우리 양드리 친구인 서 선생님 따님 결혼식이 종로3가의 어느 교회에서 열려 함께 가게 되었다. 예식 시작하기 전 시간 여유가 있어 지근거리에 위치한 사적 3호인 파고다 공원(탑골공원)을 거의 20여년 만에 다시 찾았다. 국보 2호인 원각사 10층석탑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도 잘 기억해 두었다. 3.1 운동당시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팔각정에 올라 두 손을 내 저으며 당시의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도 느껴 보았다. 또 잠간 부근의 어느 미술관에 들러 중앙대 미술과 학생들의 졸업작품전도 구경하였다. 예식을 마친 뒤에 양드리를 모시고(?) 우선 먼저 오랫동안 다시 가보고 싶었던 후원(금원․비원)을 찾았으나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매를 받고 일정 인원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일면 서운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그들에게 관람을 양보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라 여기며 창덕궁(사적 122호)과 창경궁(사적 123호)을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돌아보며 늦가을 고궁의 정취를 실컷 만끽하였다. 나도 창경궁은 매우 오랜만에 가게 된 것인데 놀랍게도 양드리는 처음이라고 한다. 1909년에 세워진 식물원 온실이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어 35년 전 창경궁을 처음 찾았던 젊은날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6. 한반도의 중심부 경기도

1. 교하읍 :  16개 동리 - 인구 4.4만 명

  

 읍소재지는 교하리이다. 교하면이 2002년 4월 1일 교하읍으로 승격 되었다. 남서쪽에 심학산(193m)이 솟아 있을 뿐 대부분이 낮은 평지로서 논으로 이용되는 지역이 많다. 점차 도시화가 진전되어 상업과 서비스 기능이 증가하고 있으며, 근교농업과 화훼재배가 활발하다. 교하리 선사유적, 다율리 지석묘군 등의 유적이 있다. 교하(交河)·하지석(下支石)·상지석(上支石)·당하(堂下)·와동(瓦洞)·목동(木洞)·야당(野塘)·동패(東牌)·서패(西牌)·문발(文發)·산남(山南)·신촌(新村)·송촌(松村)·연다산(煙多山)·오도(吾道)·다율(多栗) 등 16개 동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58개)

 

  앞 장에서는 역사적으로 군현지역이었던 곳들이라 모두 현재는 시나 군이었는데, 느닷없이 이 장에서는 처음으로 읍이 소개되고 있다. 교하는 광해군때 천도물망에 올랐다고하며 근래에는 최창조교수가 통일수도의 적지로 지명하여 유명한 곳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처제 착한 양선생이 언젠가 근무했던 교하중학교 뒷산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인 최경창과 홍랑의 묘가 있다고 한다.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함경도에 있을 때 기생 홍랑과 정이 들었고 그가 서울로 귀환하게 되자 그녀는 이별을 서러워하며 시를  남겼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예 새님곳 나거든 나린가도 여기소서

 

  같은 16C에 부안의 기생으로 유희경과의 가슴아픈 사랑을 나눈 매창을 기억나게 한다. 그녀는 이별한지 두 해 뒤에 최경창이 병이 나자 일곱 밤 일곱 낮을 걸어 서울로 찾아 왔으나 함경도인 금지령이 내려 있는데다 두사람의 애정행각에 대한 소문이 나서 최경창은 면직이 되고 홍랑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다.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이 죽어서라도 이루어지도록 묘를 한데 써주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사실인지 아닌지, 기억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잘 모르겠다.)

 

 조리읍 :  7개 동리 - 인구 3.3만 명

 

  읍소재지는 봉천로이다. 조리면이 2002년 4월 1일 조리읍으로 승격되었다. 대체로 1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구릉지를 이루며, 읍의 남서부를 흐르는 곡릉천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했다. 쌀생산과 근교농업이 활발하다. 최근에는 도시화가 진전됨에 따라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고 있다. 유적으로 공순영릉(사적 제205호)이 있으며, 장곡리의 공릉저수지는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서울-문산 간 국도가 읍내를 지난다. 봉일천(奉日川)·죽원(竹院)·노조(弩造)·오산(梧山)·장곡(獐谷)·등원(登院)·능안(陵案) 등 7개 동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27개).

 

  어쩌다 교하읍이 나온김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조리읍도 찾아본 것이다. 조리읍은 원래 중심지가 봉일천(봉일천리)으로 봉일천이 대표적인 지명이었더니 조리면이 읍으로 승격하자 봉일천 대신 조리읍이 대표적 명칭이 되어버린 듯하다.

  우리 양드리가 처음 발령받은 곳이 이곳 봉일천초등학교이니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봉일천초등학교에서 2년을 근무하고 나와 결혼하기 위해 저 먼 고향땅 전라도의 고창까지 내려오신 열녀님이시니 내가 어찌 나의 영혼과 육신을 다바쳐 충성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홍랑이 최경창을 사랑한 만큼이나 나를 사랑한 것인지 확인을 좀 받아야겠다. 그리고 나는 최경창이 홍랑을 사랑한 것보다 아주 아주 훨씬 더 많이 사랑했노라고 좌우간 말해 주겠다. 유희경과 매창이, 최경창과 홍랑이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 비운의 사랑이었으나 우리는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으니 행복함을 오래 오래 자알 지켜나갈 지니라. 작년 봄 2학년때 우리학교에 다니던 서준호가 봉일천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소식이 궁금하여 수능 잘 보았는지 안부 메시지를 띄워본다.

 

2. 양 주 시 :  1읍 4면 6동 - 인구 21만 명    의정부시 : 15동 - 인구 43만 명  

   동두천시 :  8동 - 인구 10만 명               남양주시 :   5읍 4면 6동 - 인구 58만명 

   구 리 시 :  8동 - 인구  20만 명

   조선시대 양주목은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한성부 양주군, 1896년에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두입지인 신혈면을 고양군에, 산내면과 청송면을 포천군에 이관하고, 광주(廣州)의 비입지인 초부면을 편입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백석면·이담면·장흥면은 그대로, 읍내면·고주내면이 주내면으로, 천천면·회암면·어등산면이 회천면으로, 현내면·묵은면·석적면(일부)이 은현면으로, 석적면(일부)·광석면이 광적면으로, 시북면·둔야면이 시둔면으로, 내동면·별비면(일부)이 별내면으로, 진벌면·접동면·별비면(일부)이 진접면으로, 건천면·진관면이 진건면으로, 하도면·상도면이 화도면으로, 화공면, 오부면, 광주군 동부면 일부가 와부면으로, 미음면·금촌면·상도면이 미금면으로, 망우리면·구지면이 구리면으로, 해등촌면·노원면이 노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8년 군청을 주내면에서 시둔면으로 옮기면서 양주면으로 개칭하고, 1942년에 양주면을 의정부읍으로 승격시켰다. 1946년에는 파주군의 남면을 편입했으며, 1963년 이담면을 동두천읍으로 승격하고, 수동면을 새로 설치했으며, 의정부읍을 시로 승격시켜 양주군에서 독립했다. 또 같은 해에 서울에 연접한 노해면과 구리면의 5개리를 서울특별시로 이관했다. 1973년에는 구리면이 읍으로, 1979년에 미금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으며, 1980년에 구리읍·미금읍과 별내면·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와부면을 분리하여 남양주군을 신설했다. 1981년에 동두천읍도 시로 승격·분리되면서 면적이 크게 축소되는 등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 위치로 서울 및 수도권의 도시화에 따라 행정구역의 잦은 변화를 겪어왔다. 1985년 회천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87년 파주군 광탄면 기산리 일부가 양주군 백석면으로 편입되었다. 2000년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했고, 2001년 백석면이 백석읍으로 승격했다. 2003년 10월 양주군에서 양주시로 승격했다. 오늘날 경기도가 얼마만큼 큰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지 양주가 여실히 증명하는 듯 하다.

●양수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두물머리라 하며 한자어로 양수두(兩水頭)인데 유명한 양수리로 되었다. 이곳에 정약용 생가가 있고 선생의 묘가 있다. 빼어난 풍광으로 관광객이 많고 선생의 고택을 찾는다. 나는 10여 년 전 가족 모임이 분당에서 있을 때 모두 함께 찾아 본 적이 있고 또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곳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이자 관리로 오직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신 다산 정양용 선생은 세종대왕과 함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존경스런 분이다.  

●의정부

  왜 의정부라는 이름인가?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와 회암사에 들어갔을 때 태종이 자주 찾았다. 이 때 의정부를 이곳으로 옮겨 나랏일을 보았으므로 이곳의 지명이 의정부가 되었고 1942년에 정식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3. 하남시 :   10동 - 인구 15만 명

     

  지금의 하남시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부(廣州府) 관내 동부면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한성부(漢城府) 광주군, 1896년에 다시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이 되었다. 서울의 계속된 도시화와 인구증가, 수도권의 개발과 성장, 중부고속도로의 개통 등으로 1980년에 동부면이 동부읍으로 승격되고, 1989년에 동부읍과 서부면, 중부면 일부가 하남시로 승격, 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미사리

  20여 년 전 서태지 이후 댄스뮤직이 대중음악의 중심이 되면서 이곳 미사리에 포크 라이브 카페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미사리 카페촌에서 가장 비싼 커피는 한잔에 수 만원에서 만원 정도까지이고, 음식값도 수만원씩이요 맥주 한 병에 1만 5천원이라나요? ‘비싼 커피 값’은 가수들의 공연이 이뤄지는 밤 8시부터 새벽1시까지 적용되는데 공연료가 포함된 셈이라고 한다. 미사리 카페촌에는 사랑을 받은 추억의 가수들 이름이 즐비한데 최백호, 송창식, 전인권, 인순이, 조관우, 박강성, 윤시내, 심수봉, 유익종, 남궁옥분, 김종환, 김범수 같은 사람들이란다. 내가 한때 미사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컸고 친구인 신 교수 부부와 언젠가 한번 꼭 같이 가자고 했으나 미루던 차에 친구네는 둘이서만 살짝 다녀왔다고 한다.

  나는 이제 가고픈 마음이 많이 가셔 버렸다. 혹 뚜아에 무아(이필원․박인희), 이장희, 은희, 이연실, 트윈 풀리오(송창식․윤형주), 김세환, 김추자, 펄 씨스터즈 같은 가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하룻밤이 새도록 노래를 함께 부른다면 10만원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고 기꺼이 찾아가 보련다.


●도미설화

  도미설화의 지리적 배경이 이곳 하남시 북동쪽임은 이 책에서 처음 안 것이다.

 도미(都彌)는제(百濟) 사람이다. 비록 소민(小民)이라도 의리는 알았다. 그 아내가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개루왕(蓋婁王)이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되 "대개 부인의 덕이 정결(貞潔)하다 하나 만약 으슥한 곳에서 잘 꾀기만 하면 마음이 변할 이 많다." 도미 가로대 "사람의 마음은 헤일 수 없사오나 신의 아내는 죽을망정 딴 뜻은 없소이다."

 왕이 시험하고자 하여 도미를 멈추어 두고, 한 근신(近臣)으로 하여 왕의 의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그 집에 이르러 그 집 사람에게 먼저 왕이 왔다 하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내 오랫동안 네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더불어 내기를 하고 왔노라. 내일은 너를 들여 궁인(宮人)을 삼아 이후로는 나의 소유가 되리라." 하고 드디어 어지러이 하려 한대, 그 아내가 가로되 "왕의 말씀을 내 어찌 어기리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드소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오리라." 그리고 한 비자(婢子)를 단장(丹裝)하여 들이었다.

 왕이 그 뒤 속은 줄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의 두 눈을 빼어 내 보내어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는 그 아내를 붙들고 놀려 하매 가로되 "내 이제 남편을 잃고 다만 한 몸으로서 누구를 의지하리까. 더구나 대왕에게 어찌 어기리까. 마침 몸이 더러웠으니 다음에 목욕을 하고 오리이다." 왕이 믿고 말았다. 그 아내는 문득 밤에 도망하여 강에 이르러 통곡하였다. 별안간 배 하나가 이르러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가서 그 남편을 만나 고구려(高句麗)로 가 살았다. 이후는 도미를 만나 풀뿌리로 연명하다가 고구려에 이르러 걸식(乞食)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아내의 정절을 상징하는 설화요, 두 부부의 불행한 삶과 비극적 운명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하남시 미사리 부근의 한강이 아닌가? 도미의 아내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7. 경기 북부의 땅

1. 포천시 : 1읍  11면  2동- 인구 17만명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한성부 포천군, 1896년에 경기도 포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양주의 두입지인 산내면과 청송면이 편입되고, 1914년 군면 폐합 때 영평군이 폐지되어 포천에 병합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포천군의 서면은 그대로, 청량면(일부)·군내면이 군내면으로, 청량면(일부)·가산면이 가산면으로, 내동면·동촌면이 내촌면으로, 외소면·내소면이 소흘면으로, 외북면·내북면이 신북면으로, 청송면·산내면이 청산면으로 통합되었다. 옛 영평군 지역의 일동면·이동면은 그대로, 읍내면·군내면이 영중면으로, 하리면·남면·서면이 창수면으로, 북면이 영북면으로 통합 또는 개칭되어 포천군에 편입되었다. 1937년에 서면이 포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8·15해방으로 38˚선 이북에 속하는 군의 북부가 북한지역에 편입되었다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6·25전쟁 후 모두 수복되었다. 1979년에 포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에는 연천군에서 관인면이 편입된 대신 청산면이 연천군으로 이관되고, 내촌면 화현출장소가 화현면으로 승격되었다(→ 영평군). 2003년 10월 19일 도농복합시로 승격되면서 포천읍이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되었으며, 창수면 일부지역(신흥리, 고소성리 일부)은 군 작전상 입주를 허용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천 막걸리

 1980년대 말경 직원여행을 의정부-동두천-연천-철원-포천으로 다녀온 바 있다. 도대체 왜, 무엇을 보고자 그곳으로 간 것인지 지금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기억에 남는 것은 석양이 깃든 쓸쓸한 철원평야와 그 유명하던 포천 막걸리뿐이다. 우리는 이동막걸리 공장에 가서 큰 술통 하나를 사서 차에 싣고는 실컷 퍼 마셨는데 막걸리가 아니라 아예 꿀맛이었다.

  그러나 유명세와는 달리 전국의 수퍼에서 판매하는 포천막걸리(이동, 일동)는 방부제를 섞어서인지 도대체 맛이 없어 거의 먹지 않았고 오히려 지역에서 제조하는 막걸리 맛이 훨씬 나았다.

  오늘날 2000년대 들어 우리 막걸리가 전주에서부터 붐이 일어나 삼천동 효자동 일대에는 대단한 막걸리 타운이 형성되었다. 막걸리 3되들이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탁자에 그득한 안주 한 상이 1만 5천원이다. 이후로는 막걸리 한 병씩 추가하면 먹는 대로 안주가 나온다. 식당인지 횟집인지 분간이 안가고 술 마시다 보면 이미 배가 불러 식사비가 따로 필요 없으니 막걸리 를 계속 더 마시다 보면 그 누구라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이서 3만원이면 맛좋은 최고급 막걸리(완주 봉동산 <천둥소리>는 전국 막걸리 품평회에서 최우수 막걸리로 선정된 바 있다.)와 최고의 안주로 배를 채우며 두 세시간 대화의 즐거움에 흠뻑 취할 수 있나니 이런 인생의 향기를 결코 내던질 수는 없는 일이다.  

  수 년전 부터 익산도 다름 아니어서 수많은 막걸리 주점이 생겨났고 내가 우리 아파트 근처새로 생긴 막걸리 집에 친구인 전교장과 자주 들렸더니 요즈음 술로 인한 후유증이 걱정되어 오늘까지 16일째 일체 한잔도 마시지 않고 있고 그러다 보니 왠지 또 술 생각이 전혀 나지도 않고 있다. 만일 내가 그 좋은 술을 완전히 끊으면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 인생을 반은 포기하는 건 아닌가? 우리 양드리와의 기분 좋은 프랑스산 와인 한잔도, 김호길 선생과의 맛있는 참이슬 소주도, 전경욱 교장과의 신나는 천둥소리 막걸리도, 최진만 부장과의 단란한 하이트 맥주도 단절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하여간에 우선 술로 인해 무너지고 일그러지고 초췌해져 볼품없는 내 얼굴 웬만큼 복구나 시켜놓고 술 생각을 해도 할 일이다.

 

2. 연천군 : 2읍  8면 - 인구 4.5만 명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한성부 연천군, 1896년에 경기도 연천군이 되었다. 1906년의 월경지 정리로 철원군의 두입지인 관인면을 편입했으며, 1914년 군면 폐합 때 삭녕군·적성군·마전군·양주군의 일부를 편입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45년 8·15해방 이후 설정된 38°선이 군의 남부를 지남에 따라 연천군은 남북으로 나누어졌으며, 38°선 남쪽의 적성면·남면 전역, 백학면·전곡면의 일부를 파주군에 이관했다. 그러나 6·25전쟁 후 38°선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수복함에 따라 연천군이 다시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에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이 연천군에 편입되고, 1979년에 연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 관인면 일원을 포천군에 이관했다. 1985년에 전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에 백학면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었다.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

 연천에 대해서는 국사시간에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에 대해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지방 사람들이 알 만한 것이 없다. 내가 이 나이에 아직도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전곡리 유적은 사적 제268호로 유적을 둘러싸고 한탄강이 흐른다. 유적지는 해발 40~50m 되는 곳에 있으며 1978년에 발견되었고, 1979~83년에 6차례, 그리고 1986, 1991년에 발굴되었다. 석기는 전곡현무암층 위에 쌓인 퇴적층에서 나온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김화군·철원군(남), 경기도 연천군을 지나 임진강에 흘러드는 강으로 임진강의 제1지류라고 한다. 내가 80년대 말 직원 여행시 한탄강을 처음 구경하였으나 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큰 기억이 없는데 찾아보니 한탄강의 아름다운 경치는 상류인 철원군지역에 있다 한다.


 ●전곡고등학교

 우리 셋째 숙희가 1987년 전북사대를 졸업하고 발령을 경기도로 신청하여 처음으로 교직의 첫발을 디딘 곳이다. 당시는 자가용이 없고 서울에서도 먼 곳이라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곳으로만 여겨졌고 동생도 굳이 고생스러우니 오시지 말라는 말에 자취를 시작했음에도 한 번도 찾아가보지 못했다. 오빠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그 곳에서 2년을 근무하고 일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물 다섯에 운명적인 만남이요, 소설 같은 사랑으로 영환이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주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잘도 꾸려간다. 이제 일반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단 25년째 중견교사가 되었고 큰 딸이 벌써 대학 2학년인 어른이 되었다.  

 

3. 가평군 : 1읍  5면 - 인구 6만 명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혁 때 경기도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896년 가평군으로 독립되었다. 1942년 양평군 설악면이 가평군에 편입되고, 내서면·남면은 가평면으로 통합되었다. 1973년 군의 중심지인 가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4년 외서면이 청평면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청평유원지

  재작년 여름방학 때 서울마포에서 출발하여 퇴계원을 빠져 화진포를 향해갈때에 그 유명한 청평유원지와 남이섬을 꼭 들려보리라 했다. 정작 가평의 청평유원지는 차안에서 보니 굳이 내려서까지 보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지나쳤더니만 후일 찾아보니 유원지는 북한강의 또 하나의 작은 지류에 있고 청평호는 본류에 있다. 짐작컨대 예부터 청평면 소재지 부근의 유원지가 유명한건 맞으나 오늘날에는 댐을 쌓아 커다란 호수가 된 청평호수가 더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큰 호수는 미처 잘 알지 못하는 고로 그냥 지나치게 되었고 춘천시에 속한 남이섬에 들렸는데 남이섬은 바로 청평호에 가깝고 행정구역만 춘천시일 뿐 가평군 소재지 바로 아래에 있었다.

 

8. 임진강에 강물은 흐르고

1. 고양시 : 3구 39동- 인구 95만 명

  1895년 한성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에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양주의 두입지(斗入地)인 선혈면이 편입되었다. 이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부의 서강면·용강면은 용강면으로, 숭신면·인창면이 숭신면으로, 두모면과 양주군의 고양주면이 뚝도면으로 통합되어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성부의 연희면·은평면·한지면 등의 8개면과 양주군의 1개면이 편입되어 관할구역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발달로 1936년에는 용강·연희·한지면이 경성부로, 1949년에는 은평·숭신·뚝도면이 서울시에 이관됨으로써 면적이 축소되었다. 동시에 서울의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도시 팽창에 따른 인접 고양군에로의 거주지 확산과 교통로의 확충 등으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1973년 신도면과, 1979년 원당면이 읍으로, 1980년에는 중면이 일산읍으로, 벽제면이 읍으로, 1985년 지도면이 읍으로, 신도읍 화전출장소가 화전읍으로 승격하는 등 서울 생활권으로의 편입이 가속화되었으며, 1992년 2월에는 군 전체지역이 행정동 26개의 시로 승격되었다. 2005년 일산구가 일산동구·일산서구로 분구되었다.

 ●일산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모두들 서울로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울은 만원이 아니라 포화상태가 되고 경기도에도 인구대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과거의 京畿道 영역에 서울특별시(1천만 명)와 인천광역시(300여만 명)가 있고 행정구역은 27개시 4개 군에 인구는 1,200만 명이다.

  199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신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일산과 분당이다. 이 두 도시는 이미 1백만의 대도시가 되고 오늘날 가장 살기 좋고 아름다운 전원도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1990년대 초에 일산신도시가 건설되었을 적에 우리 막내처제와 셋째 여동생이 이곳에 살았다. 두 사람은 내가 모두 경기도에 발령신청을 하도록 권하였고 처제는 처음부터 파주로 발령이 나고, 동생은 전곡에서 근무하고 일산으로 옮겼다. 이때 우리 부부가 일년에 한 두 번씩은 일산을 찾았다.

당시 우리는 40대 초중반이었고 그들은 막 30대가 된 시절인데 참 기분 좋은 젊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생은 잠시 후 분당으로 이동하고 처제는 지금 일산에 살고 있으니 이런 모습들이 우리나라 발전상과 인구이동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벽제 화장장

  서울시립승화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서울 시민들의 사망시 화장을 하는 곳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나는 20여년 전 양드리를 예뻐해주신 처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뜨시어 장례시 이곳에 가본 기억이 있다.

 

2. 파주시 : 5읍 9면 3동 - 인구 30만 명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1895년에 한성부 파주군, 1896년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교하군이 폐지되어 파주에 병합됨으로써 임진강 하구인 서쪽으로 면적이 넓어졌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파주군의 광탄면·조리면·파평면은 그대로, 주내면·백석면이 주내면으로, 천현외패면·천현내패면이 천현면으로, 지곡면·오리면이 월롱면으로, 칠정면·마정면·운천면·신속면이 임진면으로 통합되었다. 교하군에 속했던 지석면·와동면이 와석면으로, 석관면·청암면이 청석면으로, 현내면·탄포면·신오리면이 탄현면으로, 아동면·현내면이 아동면으로 통합되어 파주군의 일부가 되었다. 1934년 와석면과 청석면이 합해져 교하면으로 개칭되었다. 1972년에는 장단군에 속했던 군내면·장단면·진서면·진동면이 파주군에 편입되었으나 이곳은 임진강 북쪽에 위치하고 휴전선이 지나는 이북지역으로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 1973년에 임진면이 문산읍으로, 1951년 군의 행정중심지가 된 아동면이 같은 해에 금촌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주내면이 주내읍으로 승격된 후 1983년에 파주읍으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에는 천현면이 법원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파주시로 승격되면서 금촌읍이 폐지되고 행정동인 금촌1동·금촌2동으로 분할되었다. 2002년 교하면이 교하읍으로, 조리면이 조리읍으로 승격되었다.

●파주시

  파주는 아주 크게 발전하여 가 볼만한 곳도 많다는데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60곡 가운데 아마도 50년대 곡인 이곳 파주출신 최무룡이 부른 《단둘이 가보았으면》이란 노래가 있다. 운전하면서 자주 듣는데 가사도 예쁘고 아름다운 사랑과 아름다운 그림이 떠오르는 서정시다.


    《단둘이 가보았으면》

  

  흰 구름이 피어오른 수평선 저 너머로

  그대와 단둘이서 가보았으면...

 

  하얀 돛단배 타고 물새를 앞세우고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을 찾아서

  아담하게 집을 짓고 그대와 둘이서

  사랑의 보금자리 만들었으면...


  저녁노을 곱게 물든 수평선 저 너머로

  그대와 단 둘이서 가보았으면...

 

  갈매기 사공삼아 별빛을 등대삼아

  늘 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섬 찾아서

  꽃을 심고 새도 길러 맑은 샘 파놓고

  그대와 단 둘이서 살아 봤으면...

 

 


 <꿈은 사라지고>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뭉게구름 피어나듯 사랑이 일고

끝없이 퍼져나간 젊은 꿈이 아름다워


귀뚜라미 지새 울고

낙엽 흩어지는 가을에

아아 꿈은 사라지고 꿈은 사라지고

그 옛날 아쉬움에 한없이 웁니다.


  이 노래는 더 유명한 노래이다. 잘 생긴 얼굴과 뛰어난 연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인 그는 말년에 국회의원도 지냈지만 결국 그는 갔다. 쓸쓸히 갔다고 한다. 강효실과의 사이에 태어난 최민수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외모에 아버지의 지적인 미와는 정반대로 야성적 매력이 넘치는 대단한 배우인데 왠지 구설수가 많다.

●파평윤씨의 본향인 파평면

●판문점 가는 길 마지막 큰 마을 문산읍

●사촌동생이 개업했던 법원읍

외사촌 동생인 문선생이 정형외과의로 이곳에서 5-6년 전에 개업했던 곳이다. 성품이 곱고 바른 그는 군의관으로서 요직에서 20여 년 간 훌륭하게 근무하다 예편한 후 군사도시로 유명한 이곳에 개업하였으나 최근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아주 훌륭한 인텔리 의사이다. 정치에 뛰어든 무슨 원장이니 무슨 시골의사니 하는 그런 부류가 아닌 참인간이고 참 의사로 나에게 비춰지는 자랑스러운 동생이다.

●처제와 양드리가 근무했던  교하읍과 조리읍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다.

●판문점

  임진강을 건너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에 두 번 다녀왔다. 2000년 통일연수 때 처음으로 다녀왔다. 당시만 해도 상당한 긴장감속에서 견학했는데 두 번째인 작년 연수시 다녀올 때는 마치 즐거운 수학여행 하는 기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수 십년 동안 남북간의 회담은 고작 이곳 판문점에서의 회담이 거의 전부였으나 이젠 남북간의 갖가지 회담과 교류와 왕래로 판문점의 역할도 거의 없어지고(남북 군사전정위원회 정도) 2만 명이 넘는 탈북인들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살아가니 그 무슨 긴장감이 있을리나 있나?

  작년에 우리가 방문한 날, 판문각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북한병사가 보이는 판문점 전경사진이 중앙지에 크게 났는데 아마도 대통령의 통일비용 언급기사 때문인 것으로 기억된다. 언제인가? 한물간 이념을 붙잡고 2천 4백만 동포를 볼모로 3대 세습을 이어가며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동포들이 기아와 개인숭배 사이비종교의 광신도적 믿음의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그 날은? 

 

 

충청도(忠淸道)

 

●내가 비록 전라도의 김제 땅에서 태어나고 익산과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지금은 무주에서 근무하는 전라북도 토박이지만 충청도는 항상 가까운 이웃이다. 내가 본시 신평이씨라 본관이 당진군 신평면이요, 내 삶의 본거지인 익산은 충남의 부여군, 논산군과 접해 있으며

금강을 건너면 바로 충청도다. 논산군의 강경지역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익산으로 진학하여 열차로 통학하였는데 소설가 박범신이나 고고학교수인 최완규 교수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논산의 대건고 출신이라 그가 기숙사에 있는 3년 동안 거의 매주 데려다 준 곳이 논산이요, 우리 익산에서 자가용으로 불과 30분 거리이니 他道라는 생각이 별로 없을 정도로 거리로나 마음으로나 전혀 멀지 않다. 자주 등산하는 함라산에 오르면 금강 저편에 서천군 화양면 들녘이 한 눈에 잡히고 1980년대 이후 금강하구둑을 비롯한 다리가 철도를 포함하여 무려 네 개인데 또 다시 군산과 장항을 잇는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군산과 장항 두 지역을 묶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제기 되고 있다. 하긴 5.16 군사정변 후 본래 우리 전라북도에 속하던 금산군을 충남에 빼앗기고, 익산군의 황화면도 빼앗겼으니 본래 저 두 지역은 전라도 땅이라. 유진산 당수나 임영신 총장은 본디 전라도 사람이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무주는 금산군과 영동군이 접해있고 소재지까지 20분이면 금방이다. 학생들이 직행으로 40분 거리인 대전으로 쇼핑나들이를 하고 대학진학도 많이 한다.


1. 내포땅에 얽힌 사연

●내포(內浦)란 본시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들어간 곳을 일컬음이나 이제 여기서 말하는 내포는 고유명사가 되어 충청남도 가야산의 앞뒤에 있던 10고을, 지금으로 말하면 예산, 당진, 서산, 홍성군 지역을 말한다.


1. 예산군 : 2읍 10면 - 인구 8.8만 명

  조선 시대에는 계속 현으로 존재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부제가 실시되어 홍주부 예산군이 되었고, 1896년(건양 1)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남도 예산군이 되었다. 1914년 예산군 · 대흥군 · 덕산군이 예산군으로 통합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김정희 : 고택을 찾은 일이 있다. 우리는 그의 위대한 <추사체>만 생각하지만 그는 천재다. 그가 중국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면 그 이상의 유산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  나는 글자 하나 하나가 예술 그 자체인 그의 추사체 글씨에 흠뻑 반해 있다. 언젠가 흉내를 내서라도 그런 글씨를 한번 써 보고 싶다.

 

2. 당진군 : 3읍 9면 - 인구 15만 명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 32)에 당진군으로 승격해 군내·동면·남면·상대·하대·고산·외맹·내맹의 8개 면을 관할하였다. 합덕현은 세조 때 홍주군의 합남면·합북면이 되었다. 신평현은 조선 초기에 없어지고 현내면·신남면·신북면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당진군과 면천군이 당진군으로 통합되면서, 면천군 22개 면을 7개 면 98개리로, 당진군 8개 면을 3개 면 25개리로 정비하여 총 10개 면 123개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1957년 서산군 대호지면정미면 전체를 편입하여, 12개 면 150개리가 되었다, 1963년 당진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73년 정미면 여미리(餘美里)가 서산군 운산면(雲山面)으로 이관되고, 합덕면이 합덕읍으로 승격하였다. 2010년 1월 송악면송악읍으로 승격하였다.

  2010년 현재 당진읍·합덕읍·송악읍과 고대면, 석문면, 대호지면, 면천면, 순성면, 우강면, 신평면, 송산면, 정미면 등 3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평면(新平面)

  신평은 본래 백제 때 "사평"으로 천지개벽을 하여 한진포가 터질 때 산으로 형성되었던 지역이 넓은 평야 또는 갯벌로 변한 데서 "새롭게 생긴들"이란 뜻을 문자로 전하여 "사평"이라 하였다.

  백제시대에는 사평현, 신라시대에는 신평현에 속하였으며 고려 현종 1018년에는 홍주목에 속하였다. 근세조선 1623년 인조시에 신평현이라 칭하였다가 지리적 변화에 따라 현제를 폐지하고 홍주군(현재 홍성)에 속하였으며 1895년 고종시에 면천군에 편입 되었고 서기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진군에 편입되어 현재까지 신평면으로 칭한다.

  지금은 서해대교 못 미쳐 오른편이 바로 신평면이요, 삽교방조제가 있는 곳이다. 20여년전 친족들과 함께 단 한번 여러 중시조묘를 찾은 일이 있고, 삽교호 관광차 들려본 정도이다. 하지만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곳을 지날라치면 괌심을 가지고 당진의 발전상을 관심 있게 바라보곤 한다.


3. 서산시 : 1읍 5동 - 인구 16만 명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안군·서산군·해미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셋이 합쳐져 서산군이 되었다.

  1989년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고 태안군이 서산군에서 분리되었으며, 서산은 서산시와 서산군으로 나누어졌다. 1995년 1월 서산군과 서산시가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2003년 현재 대산읍석남동·부춘동·동문동·활성동·수석동지곡면·팔봉면·성연면·음암면·해미면·고북면·인지면·부석면·운산면의 1읍 5동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미읍성 : 여러 차례 찾은 바 있는 아담한 읍성이다. 고창읍성이나 낙안읍성처럼 고을을 둘러싼 성이며 충청병영이 있던 자리다. 자주 가보고 싶지만 그러기가 쉽지는 않다. 세 번쯤 찾았다. 

●서산마애삼존불상 : 낮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이른바《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이 삼존불이 1959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나도 미처 몰랐다. 홍사준 전 부여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되었다는데 1970년대 중반 미륵사지와 왕궁탑지 발굴시 홍선생님이 자주 오셔서 백제 문화재 사랑을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백제 미술사의 대가로 존경받으신 분이다. 언제나 또 한번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보원사지 : 사적 제316호. 절에 대한 역사는 전혀 전하지 않으며 현재 넓은 절터만이 있다. 북위(北魏)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5층석탑(보물 제104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석조(石槽:보물 제102호)·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다. 오래전 양드리와 함께 이곳 내포문화답사 계획을 세워 다시 마애삼존불 부근에 있는 보원사지를 찾았을 때 없어진 절터가 반드시 흉물스럽고 쓸쓸한 것이 아니라 주변 경관과 함께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우리에게 잔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음을 알았다.  

 

4. 태안군 : 2읍 6면 - 인구 6.3만 명

  조선시대인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 태안군으로 불리다가 1914년 해미군(海美郡)과 함께 서산군에 통합되었다. 1973년 태안면이 태안읍으로 승격, 이북면(梨北面) 청산리(靑山里)마산리(馬山里)가 원북면(遠北面)에, 안면면(安眠面) 간월도리(看月島里)가 부석면(浮石面)에 각각 편입되었다.

  1980년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86년 안면읍 고남출장소(古南出張所)가 고남면으로 승격하였으며, 1987년 이북면이 이원면(梨園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9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산군 관할 중, 태안읍·안면읍·고남면·남면(南面)·근흥면(近興面)·소원면(所遠面)·이원면 일원을 분할하여 태안군을 설치하는 동시에, 안면읍 죽도리(竹島里)를 홍성군서부면(西部面)에 편입, 제외시켜 2읍 6면이 되었다. 2003년 현재 태안읍·안면읍과 고남면· 남면· 근흥면· 소원면· 이원면· 원북면의 2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면도 : 안면도가 언제부턴가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여러 차례 모임에서 여행을 다녀오고 우리 가족 모임도 어느 펜션에서 가졌다. 이곳을 찾으면서 느낀 바로는 나 자신이 서해안에 살아서인지는 모르나 동해나 남해의 섬처럼 아름다운 경치도 아름다운 바다도 보기가 힘들어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다. 광천에서 좌회전하여 서산방조제를 지나 안면도로 가는 드라이브는 썩 괜찮다.

 

2. 홍성에서 보령에 이르는 길

1. 홍성군 : 2읍 9면 - 인구 8.8 만 명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목과 결성현은 1895년에 홍주부 소속 홍주군과 결성군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 도제 실시로 충청남도에 소속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홍주의 비입지였던 합남면·합북면·신북면·신남면·현내면이 면천군으로, 운천면과 두입지(斗入地)인 고북면이 해미군으로 이관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914년의 군면 폐합에 의하여 결성군이 폐지되어 병합됨으로써 다시 면적을 확대하고, 결성군의 이름을 합하여 홍성군으로 바꾸었다. 이때 대폭적인 면의 통폐합도 이루어져 홍성군의 16개면이 6개면으로, 결성군의 12개면이 5개면으로 통합되었다. 1941년에 홍성면이 홍성읍으로, 1942년에는 광천면이 광천읍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차령산맥 이북의 충청도 서북부의 중심지역이며, 충청도 4대 고을 중의 하나였던 이 지역은 이후 대전(大田)의 성장 등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광천까지 들어오는 내륙 수로 기능의 약화, 안면도의 육지 연결로 인한 도서 지방의 서산 쪽으로의 연계 관계의 증가, 천수만 방조제로 인한 토사 퇴적의 증가와 해양 생태계의 변화로 광천을 중심으로 했던 항구 상업 기능이 쇠퇴했으나, 서해안고속도로의 건설 등으로 새로운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홍성읍을 지나면서 보기에는 상당한 도시모습을 보이는데도 아직 읍이다. 도농통합도시가 아니다 보니 읍의 규모가 시 승격을 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것인가? 하긴 서천읍, 부여읍, 청양읍, 예산읍, 조치원읍 등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2. 보령시 : 1읍 10면 5동  - 인구 10.7만 명

 1895년에 홍주부 보령군, 1896년에 충청남도 보령군이 되었다. 1901년에 전에 수영이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오천군을 신설해 금신면을 이관했다. 그러나 1914년 군면 폐합 때 보령군의 주포면 일원과 장척면·목충면의 일부를 합하여 주포면으로, 청소면·장척면을 청소면으로, 우라면·목충면을 대천면으로, 청라면·오삼전면을 청라면으로, 남포군의 군내면·신안면·북내면을 남포면으로, 웅천면·고읍면을 웅천면으로, 불은면·습의면을 주산면으로, 북외면·심전면을 미산면으로, 오천군의 천북면은 그대로, 천동면·하남면·하서면을 오천면으로 통폐합하여 면적이 크게 넓어진 새로운 보령군이 되었다. 1963년에 대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에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1986년에 성주출장소가 성주면으로, 1989년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보령군과 도시기능을 담당했던 대천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보령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대천시 : 이미 1995년에 대천시가 없어져버렸는데도 아직도 나는 대천으로 부른다. 옛 대천시를 말함이다. 대천해수욕장은 일찍부터 서해안의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최근 20여년동안 눈부신 발전을 해 왔다. 우리는 충남에는 대천해수욕장을, 전북에는 변산해수욕장을 대표적인 해수욕장으로 보고 자랑으로 삼았지만 오늘날은 두 해수욕장의 비교조차 불필요하다. 대천해수욕장은 수많은 식당과 호텔과 리조트와 팬션들로 하나의 도시가 형성되고 서해안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특히 항구에서는 활어판매시장이 있어 누구나 직접 골라 산 다음 부근 식당에서 조리비를 주고 먹을 수 있게 먹자시스템이 잘 짜여져 있다.

  나는 원체 활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고급 일식집에서 메인활어(광어, 도다리, 돔 등) 외에 술안주로 주는 낙지니 소라니 오징어니 굴이니 전복이니 대합이니 피조개니 하는 갖가지 맛있는 부대류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맛있는 것 하나 없이 오직 메인활어를 상추에 싸서 우걱우걱 먹어대는 방식은 그리 달갑지 않다. 남들은 활어회 그 자체의 맛을 중시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입이 좀 거르고 가진건가? 아무튼 그렇다.

  변산해수욕장은 사실상 폐허가 되고 오히려 부근의 작고 아담한 격포 해수욕장에 2010년 대명콘도가 들어섬에 따라 관광객이 제법 모여들며 활기를 띠고 있어 우리 전북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성주사지 : 보령(대천)에서 큰 고개를 넘어 부여로 통한다. 고개를 넘으면 성주면에 다다르고 이곳에는 유명한 절터가 있다. 바로 성주사지로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塑造佛頭)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최치원의 4산비명의 하나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聖住寺址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규모 폐사지로는 경주의 황룡사지와 익산의 미륵사지가 있지마는 이곳 성주사지는 서산의 보원사지와 함께 귀한 유적을 많이 보유하고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아름다운 충남의 대표적인 폐사지이다. 우리 양드리도 아주 좋아하므로 자주가고 싶은 곳이다. 부근의 무량사도 함께 보고 올 수 있어 하루 여행이 상당히 즐거운 곳이다.


3. 서천군 : 2읍 11면 - 인구 6.1만 명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홍주부 서천군, 1896년에 충청남도 서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한산군과 비인군이 폐지되어 서천군에 합속되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서천군의 서부면·남부면이 서남면으로, 시왕면·초처면·문장면이 시초면으로, 개곡면·판산면·장항면이 남양면으로, 마길면·동부면이 마동면으로, 두산면·문장면이 문산면으로 통합되었다. 비인군은 내면·북면·일방면 일부가 비인면으로, 이방면·일방면 일부가 종천면으로, 서면과 동면은 그대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한산군은 북부면·동상면이 한산면으로, 상남면·남상면·동하면·남하면이 화양면으로, 서상면·서하면이 기산면으로, 상북면·하북면이 마산면으로 통합되어 서천군 소속이 되었다. 1917년에 남양면이 서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0년 장항항의 개항, 1931년 천안과 장항을 잇는 장항선의 개통, 1936년 장항제련소의 건설 등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마주보고 있는 장항이 급속히 성장했다. 이에 따라 1938년에 서남면의 장항리 등 3개리와 마동면의 산서리 등 2개리를 합하여 장항읍으로 승격하고, 서남면과 마동면의 나머지 18개리를 합하여 마서면으로 개칭했다. 1942년에는 동면을 판교면으로 개칭하고, 1979년에는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장항읍 : 초등학교시절 사회교과서에는 장항제련소 사진이 실려 있고 나는 비록 충청도 땅이긴 하지만 우리 군산 앞에 있는 장항제련소가 마치 우리 고장의 상징적인 공장인양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일본강점기인 1936년에 세워진 이 공장은 동과 구리를 제련한 곳이다. 당시만 해도 충주비료공장과 함께 우리나라 산업의 상징적인 공장이었으나 이제 대부분의 제련은 울산의 온산제련공장으로 넘어가고 현재는 사실상 동만 제련한다고 한다. 군산에서도 잘 보이는 언덕위의 높은 굴뚝은 내내 위풍이 당당하였다. 최근에는 근처에 가게되어 보노라면 마치 폐쇄된 공장처럼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아주 문을 닫은 건가?  

●한산면 : 한산은 모시의 고장이다. 한산 모시전시관에 가서 구경할라치면 ꡐ나도 저 한산모시로 여름 모시옷 한 벌 쭉 빼 입어 볼까?ꡑ하다가도 정작 여름이 되면 ꡐ이 날 더위에 그냥 반바지에 T셔츠 입고 말지 무슨 모시한복은?ꡑ하면서 포기하고 만다.

●비인면 : 70년대초 작은 집 형이 동아리(당시에는 써클이라 했다.) MT로 비인해수욕장을 다녀와서 자랑하였다. 나는 비인을 가 본적이 없지만은 어쩌면 그리도 이름이 아름답게 들렸던지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바닷가이겠지 하며 그 이름을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아마도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음악도시이자 수도인 비인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자가용을 구입한 1989년부터는 가까운 충청도에도 드나들게 되고 이때 비인해수욕장과 춘장대 해수욕장을 가보게 된다. 비인해수욕장은 이제 아예 폐장되었고 아름다운 동백정 동백나무숲과 마량항, 홍원항, 춘장대 해수욕장 그리고 부사방조제로 가끔씩 드라이브를 다니고 있다.

●화양면 : 전남강진에서 출발하여 충남서산에 이르는 국도29번은 정읍 부안백산 김제 대야를 지나 금강하구둑을 건너 부여로 향하면서 이곳 화양면을 지나게 된다. 나는 벗들과 가끔씩 금강너머 화양면을 찾아보며 옛 정취(타도의 작은 마을을 찾아본다는)느껴보려 하였다. 2009년에 이곳에서 공주로 가는 서천공주고속도로 개통되었고 이곳 화양면에 출발 인터체인지가 있으니 언젠가 한번 서해안 고속도로로 들어선 뒤 이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달려 보겠다.    


3. 무량사에서 김시습을 만나다.

1. 부여군 : 1읍 15면 - 인구 8만 명

  1895년 공주부 부여군, 1896년 충청남도 부여군이 되었다. 지금의 부여군은 1914년의 군면 폐합 때 옛 부여현·홍산현(鴻山縣)·임천군(林川郡) 전역과 석성현(石城縣) 일부가 통합되어 이루어졌다. 옛 부여현 지역은 부여읍·은산면·규암면·초촌면 등 동북부, 홍산현 지역은 홍산면·외산면·내산면·구룡면·남면·옥산면 등 서북부, 임천군 지역은 임천면·장암면·세도면·충화면·양화면 등 남부, 석성현 지역은 동부인 석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1960년에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부여읍

  부여는 성왕때 공주에서 천도한 이후 120여년동안 백제의 수도다. 무왕때는 출생지인 익산으로의

천도를 위해 익산을 경영하였으므로 그리 오랜 시기는 아니나 그래도 <백제의 수도>하면 누구나 부여를 쉽게 떠 올린다. 부소산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부여는 아직도 작은 소읍에 지나지 않으나 백제탑의 정수인 아름다운 정림사지 석탑과 고란사와 능산리 고분이 있어 왕성임을 실감나게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시절부터 백마강과 고란사와 낙화암과 삼천궁녀를 너무 실감나게 배워서인지 부여에 가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직접 찾아본 듯 하였다. 2006년 SBS TV연속극 <서동요>의 세트장을 지을 때 부여와 익산이 서로 다투매 두 곳에 각각 다른 세트장을 짓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서동이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모호한 내용을 놓고 두 지자체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었다. 익산시는 이 기록에서 `서울'은 당시 백제의 수도 부여이고 그 남쪽은 익산을 뜻하며, 익산에 집터인 연못 마룡지와 서동이 마(麻)를 캐고 금을 얻었다는 오금산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 문제로 부여와 다투기 보다는 우리 익산도 마룡지를 개발하고 관광지화하여 역사적 사실을 널리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부여의 궁남지는 볼품있게 잘 개발되어 나도 연꽃을 보기 위해 자주 찾는다.
●성흥산성과 대조사

  금강하구둑에서 27번 도로를 따라 부여방면으로 가다보면 임천면에 다다른다. 면소재지에 성흥산이 있고 산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20여년 전 후배인 최완규교수팀이 발굴하고 복원작업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동성왕이 501년에 쌓았다 하며 금강입구로부터의 적의 칩입을 막아내고부여를 지켜내기 위한 아주 중요한 성(가림성)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금강 줄기가 멀리 환히 보이고 저 멀리 익산의 미륵산까지 손에 잡히는 듯 군사 방어기지로서 가장 중요한 조망이 뛰어나다.

  중턱에 대조사가 있어 들리게 되는데 성왕때(527) 창건되었다. 석조미륵보살은 마치 은진미륵인듯 너무나 흡사하다. 은진미륵불과 함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이 석불은 보물 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 익산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가을이면 가끔씩 찾게 되지만 문화재에 관심이 적거나 전주권에 사는 분들은 이곳에 대해 전혀 모르므로 기회가 닿으면 안내하기도 한다. 나와 가까운 지인들은 대부분 이곳을 알고 있다.  

●무량사

  무량사는 유명한 사찰이며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움에도 내가 찾음이 늦었다. 10여년 전 양드리와 성주사지와 아울러 이곳 답사를 기획하여 가게 되어 되었는데 두 곳을 너무 늦게 찾았음에 스스로 약간 부끄러웠다. 이 절은 우선 김시습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절의 뒷편 작은 건물에 김시습의 초상화가 있어 찾은이들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그의 사리를 안장한 부도가 있다.

  15세기 고승인 진묵대사(우리 고향 김제 만경출신)가 무량수불에 점안하였다고 하며 그의 일화는 완주 봉동의 서방사와 만경 고향에도 전해온다. 서방사는 두어 번 찾은 적이 있는데 친구인 강거희교감이 재수하면서 예비고사 공부를 하기 위해 서방사에 두어 달 살았다고 하는 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 석등, 5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이 매우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데 양드리가 좋아하여 다시 찾은일이 있다.

 


2. 청양군 : 1읍 9면  - 인구 3.3만명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홍주부 청양군·정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청양군·정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에 의해 청양군의 읍내면·남상면이 읍내면으로, 북상면·북하면이 운곡면으로, 서하면·서상면과 홍주군 얼방면이 비봉면으로, 남하면과 홍주군 상전면이 사양면으로, 화성면·흥구향면이 화성면으로, 동상면·동하면이 대치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정산군이 폐지되고 목면은 그대로, 읍면·대면·잉면이 정산면으로, 청면·장면이 청장면으로, 적면·관면이 적곡면으로 폐합되어 청양군에 편입되었다. 1917년에 읍내면을 청양면으로, 1942년에 청장면을 청남면으로, 1987년에 사양면을 남양면, 적곡면을 장평면으로 개칭했으며, 청양면은 1979년에 읍으로 승격했다


●칠갑산

 1978년에 발표되었다는 이 노래는 1990년 주병진이 불러 대히트 했다. 노래방에서 많이들 불렀다. 나는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 어느 더운 여름날 칠갑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별로 아름답지도 그다지 높지도 않은 이 산이 뜨거운 태양아래 매우 쓸쓸하고 외롭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랫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느냐.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옛 여인네들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밭고랑에 쪼그리고 않아 기어가다시피하며 한나절 밭을 매었다. 더운 여름날 삼베옷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는 못했다. 가난한 서민 농투성이 남편의 따뜻한 사랑의 말 한마디 들어보는 일 없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일어나면 일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방아 찧고 잠을 자고나면 새벽같이 일어나 또 일을 해야만 하는 그 일상의 반복 속에 여인네들은 늙어만 갔다. 이 땅의 슬픈 여인들의 삶이었다.

  어머니가 그리 살았듯이 여인도 또 그리 살아간다. 여름날 콩밭은 무지 덥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다 안다. 여름날 콩밭 매는 여인의 땀과 고독과 슬픔을... 친정의 홀어머니는 어찌 사시는지.... 한해 한번이나 겨우 찾아 얼굴을 뵙는 보고픈 엄마를 그리워하며 여인은 눈물짓는다. 땀인지 눈물인지 가슴에 서린 커다란 한은 풀길이 없다. 한없이 눈물지며 살아간 이 땅의 여인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 슬픈 시절은 이제 이 땅에서는 갔다. 논밭에 우리 젊은 여인들은 없다. 그 자리엔 베트남에서 인도네시아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시집온 여인네들이 섰다. 아무리 이 땅의 농촌총각 결혼이 문제가 되고 농촌에 아이들이 없다 해도 슬픈 외국여인이 단 한사람이라도 생겨서는 안 된다. 한국에 시집온 행복한 여성이어야만 한다.

●청양고추 : 매운맛을 내는 청양고추야 말로 이곳 청양을 가장 잘 알려주는 특산물이다. 나는 청양고추를 잘 이겨내지 못하나 콩나물 해장국을 먹을 때 청양고추를 적당히 넣은 맛은 매우 좋아한다. 

●특별한 문화재 및 인물 : 특별히 보고 싶은 문화재도 유명한 역사적 인눌도 찾을 수 없어 한번도 관심을 두거나 찾거나 한 일이 없이 다른 곳을 찾아가면서 지나친 기억밖에 없다.

 

4. 산천이 아름다운 계룡산 아래 공주

 

1. 공주시 : 1읍 10면 5동- 인구 12.7만 명

 

  475년(문주왕 1) 백제가 북한산으로부터 이곳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겨 538년(성왕 16) 사비성(泗沘城:부여)으로 천도할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문화의 꽃을 피운 중심지이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공주군이 되면서 공주부가 설치되어 27개군을 관할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충청남도 공주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공주군의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자 공주는 백제 이래 지녀왔던 충청 지역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대전에 넘겨주고 성장이 위축되었다. 1931년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공주읍이 시로 승격, 공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민선자치단체장이 선출되는 지방자치시대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으로 공주군이 공주시에 통합되어 도농 복합형태의 새로운 공주시가 되었다.

 ●공주는 불과 60여년 간 백제의 수도였으나 왠지 고도(古都)임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아름다운 금강이 흐르고 예부터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과공주교육대학이 있어 교육도시로 유명하다. 또한 백제의 역사가 깃든 도시답게 갑사와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있어 유명하다. 수 년 전 만 하여도 공주나들이가 그리 쉽지 않았는데 논산-천안간 민자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이제는 고속버스나 자가용으로 서울에 갈라치면 대전을 거치지 않고 항상 공주를 거치게 되고 으레 정안휴게소에서 쉬게 됨으로써 비록 공주시내에 직접 들르지는 못할망정 공주 땅을 밟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박찬호가 공주에서 태어난 가장 유명한 인사인 듯. 갑사는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 코스에 들어 있어 처음 가본 이후 동학사까지 등산을 하는 등 세 번 정도 다녀온 듯하고 무령왕릉은 두 번, 공산성은 몇 년 전 양드리와 일부러 답사차 찾은 일이 있다. 같은 금강이지만 부여의 백마강과는 달리 공주의 금강은 맑고 푸른 기억이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 전북에는 과거부터 중등에 공주사대 출신들이 많다. 전북사대가 1973학년도에 생겼으므로 그 이전에 공주사대로 간 사람들이다. 친한 친구인 김병근 선생,황덕구 교장. 지금 토요일임에도 자기주도학습 지도중인 박성용 선생이 그런 사람들이다. 금년부터 주 5일제 전면 시행인데 토요일인데도 나는 교무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기숙사생들과 3학년들과 토요스포츠데이 참가학생들 때문에 학교장과 교감은 격주로 토요일 근무를 하니 주 5일제 참 허망하다.

 

2. 연기군 : 1읍 7면 - 인구 8.5만명

조선시대에 들어 1406년(태종 6)에 별도로 감무를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연기현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전의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했으며, 1416년에 다시 분리하여 조선시대 동안 연기현을 유지했다. 그러나 1680(숙종 6)~85년에 이 고을 사람의 모반 사건으로 읍이 혁파되기도 했다. 전의현 지역은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인데, 이후 구지현(久遲縣)·금지현(金池縣) 등을 거쳐 고려시대에 전의로 개칭되어 조선시대까지 이름을 유지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공주부 연기군·전의군, 1896년에 충청남도 연기군·전의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 때 연기군은 전의군 전역과 공주군의 일부를 병합함으로써 면적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연기군의 동이면·동일면이 동면으로, 서면·북이면(일부)이 서면으로, 남면·군내면 및 공주군 삼기면이 남면으로, 북이면(일부)·북일면이 북면으로 조정되고, 공주군의 명탄면·양야리면·반포면(일부)이 금남면으로, 전의군의 북면·군내면·대서면·덕평면이 전의면으로, 동면·남면·소서면이 전동면으로 통합되어 연기군에 편입되었다. 경부선·충북선 등 철도와 국도의 통과지점으로 교통의 요지가 된 조치원리가 나날이 발전하자 1917년에 북면 중 조치원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서면에 넘겨주고 조치원리만으로 조치원면을 신설했으며, 1931년에 조치원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동면 갈산리가 충청북도 청원군에 편입되었다.

■백 여개가 넘는 이씨 본관중에 全義이씨가 있는데 전의가 바로 연기군에 있음을 알게 되다. 나는 新平이씨로 본관인 신평은 충남 당진군에 있다. 이 연기군이 드디어 금년에 세종시로 탄생한다.

 

세종시

1. 편입행정구역 세종시 전체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개발되는 예정지역을 포함하여 연기군 전체, 공주시 일부 및 청원

   군 일부를 편입하여 "세종특별자치시"로 출범하게 됩니다.

2. 법적지위 : 정부직할 특별자치시

3. 출범시기 : 2012년 7월 1일

4. 편입구역 : 3개 시ㆍ군, 1읍 11면, 119개리(465.23㎢,서울시의 3/4규모)

5. 예정지역 편입 행정구역표

◯연기군 전지역

◯공주시

장기면 송문리,평기리,대교리,하봉리,도계리,봉안리,제천리,은용리,산학리,당암리,금암리 일원,

반포면 원봉리,도남리,성강리,국곡리,봉암리 일원,

의당면 태산리,용암리,송학리,용현리,송정리 일원

◯청원군

부용면 산수리, 행산리, 갈산리, 부강리, 문곡리, 금호리, 등곡리, 노호리 일원

 

 

 

 

  5. 강경포구엔 빈 배만 매어 있고

1. 논산시 : 2읍 11면 2동- 인구 13만 명

  논산시는 조선시대의 은진현(恩津縣)·연산현(連山縣)·노성현(魯城縣) 등 3개의 현이 있던 곳이어서 풍부한 문화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지금의 강경읍·연무읍·은진면·채운면·가야곡면·취암동·부창동 등 서남부는 옛 은진현 지역에, 연산면·두마면·부적면·벌곡면·양촌면 등의 동남부는 옛 연산현 지역에, 노성면·상월면·광석면 등 북부는 옛 노성현 지역에 해당한다. 성동면은 본래 석성군 원북면 지역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3현이 군이 되어 공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도제 실시로 충청남도에 속했다. 1906년 월경지정리 때 여산군의 두입지(斗入地)인 채운면이 은진군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은진군·연산군·노성군의 소사면을 제외한 전역과 석성군·공주군·진잠군의 일부 등이 통합되어 논산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1년 강경면이, 1938년 논산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후기 3대 시장의 하나로 서해 최대의 포구였던 강경포를 중심으로 상업도시로 발전한 강경읍은 군산항 개항, 경부선 개통, 호남선 개통 등으로 그 기능이 점차 축소되다가 6·25전쟁 이후 결정적으로 쇠퇴했다. 6·25전쟁 이후 육군 제2훈련소가 들어섬에 따라 성장한 구자곡면이 1963년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일원을 편입, 연무읍으로 승격했다. 1996년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되면서 논산읍이 11개동으로 분할되었다. 2003년 두마면이 계룡시로 분리되었다


●논산시

  어린시절에 훈련소 때문에 알게 된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께서 군에 입대하시게 되었다. 고교 때 조혼하신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시고서야 입대하시게 되니 나이는 스물다섯 이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나는 훈련 중 면회가 허용된 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연무대에 있는 논산 훈련소를 찾았다. 아버지를 만나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헤어지고는 오후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어느덧 어두운 밤이 되었고 할아버지께서 지나가는 군용 지프를 얻어 타시고 여산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지프에서 어느 지역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내렸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무슨 차를 타고 또 어느 경로로 깜깜한 밤에 익산까지 도착했는지 아니 김제까지 왔었는지 그 날 밤은 어디서 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계심에 감사드리며 방금 1958년에 군에 가신 것이 맞는지 확인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얘기를 쓰자니 괜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아니 날 때가 거의 없다 )

  논산은 비록 충남이지만 익산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여산에 속했던 채운면이 1906년에 은진군으로 넘어가고 1963년에는 황화면을 논산군에 순 억지로 빼앗기게 된다. 익산과 접한 충청도의 시군으로는 논산과 부여와 서천이 있는데 서천은 군산과 밀접하고 부여와는 금강으로 인하여 거의 직접교류가 없다. 그러나 논산시의 강경읍은 조선시대 후기 농업생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한 포구로서 익산과 23번 국도와 호남선 철도로 연결되어 있어 교육도시인 익산으로 고교진학을 한 사람들이 많다. 강경에는 유명한 강경상고가 있으나 익산의 명문고인 남성고, 이리공고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 후배인 최완규교수가 강경출신이고 선배인 박범신 교수가 황화면 출신이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 나논산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어 항상 논산군과 그 이름이 연상되었다. 그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되고 실제로 논산이는 얌전하고 예뻤다. 1학년때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동생인 두 살배기 은희가 변을 싸서 우리 엄마가 치우는 모습을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던 논산이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다. 지난 달 서울에서 있었던 성재아들 결혼식장에서 만난 논산이는 무려 나이가 예순 둘의 할머니이지만 아직도 얌전하고 예쁘다.

●강경포구

  강경은 옛부터 호서와 호남을 잇는 가운데 위치한 금강의 포구이자 가장 유명한 상업도시다. 한강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갈라치면 그 배들이 강경에 들러 물건이나 사람들을 싣고 떠났다. 우리 익산에서 20분이면 강경인데 논산시보다 더 일찍 읍이 되고 중심도시였으나 이제 더 커진 논산시에 모든 것을 내어 주고 경찰서와 법원지원만 남은 듯하다. 그러나 강경은 다시금 젓갈시장으로 유명해졌고 나와 양드리는 가끔 잘 정비된 포구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한다. 1980년대 말 김호길, 채수환 가족과 함께 웅포에서 고깃배를 빌려 부여까지 금강탐사를 시도하다 강경에서 모래톱에 걸려 중단하고 돌아오던 시절만 해도 강경포구엔 몇 채의 집과 배들이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없이 그저 강물만 흐른다.

●대건고등학교

  우리 아들 승수가 당연히 내가 다닌 남성고에 갈 줄 알았더니만 논산 대건고에 간다하여 깜짝 놀랐다. 사실 내가 잘 모르는 학교요, 더욱이 대도시 아닌 이웃 작은 도시에 소재하기 때문이었다. 직접 찾아가서 학교를 둘러보고 교감도 만나 설명을 듣고는 이내 허락하였다.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이며 지금까지의 어느 학교와 달리 자율적 학생활동을 중시하고 다양한 체험학습을 하게하며, 수준별학습을 통한 창의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아들은 남성고에 가서 공부만 하느라 힘들고 존재감 없이 다니느니 새로운 모습의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찾아보고자하는 기특한 생각이었다. 아들은 자신의 뜻대로 훌륭한 대건고에 입학하고 방송국장을 하면서 행복한 고교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다니는 동안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이미 앞서 시행하는 수준별 학습과 학생활동을 중시하는 교육과정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학교의 하나가 되었고 매스콤과 교육계의 주목을 받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수없이 소개되었고 전국의 많은 교사들이 방문하는 유명학교가 된다. 토요일이면 엄마인 양드리가 30분 걸려 찾아가 집으로 데려오고 일요일 오후면 내가 차를 몰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는 양드리와 나는 연산, 벌곡, 진산, 대둔산코스로 오거나 가야곡, 양촌, 운주 코스로 오면서 드라이브와 아름다운 자연을 한껏 즐겼다. 무려 3년간의 긴 세월이었고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오늘날 더욱 발전한 대건고는 충남 제1의 최고학교로 인정받고 있으나 남성고는 자율형고로 지정받고도 전북 10위권의 학교로 전락(?)해 버린 상태다. 우리 아들 언제나 파이티! 항상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네 뜻을 크게 펼쳐라!

 

6. 충청도와 경상도의 길목

1. 옥천군 : 1읍 8면 - 인구 만 5.3 명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공주부 옥천군, 1896년 충청북도 옥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인 양내면·양남면을 영동군으로 이관해 면적이 줄어들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에 따라 청산군이 폐지되어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넓어졌다. 이때 군면 폐합도 이루어져 옥천군의 이내면·안내면·안남면은 그대로, 이남일소면이 이남면으로, 군내면·군남면이 내남면으로, 이남이소면·군동면이 동이면으로, 군서일소면·군서이소면이 군서면으로, 군북일소면·군북이소면이 군북면으로 폐합되고, 청산군 남면이 청남면으로, 서면이 청서면으로, 동면·군내면·북면이 청산면으로 통합되어 옥천군에 폐합되었다. 1917년 내남면이 옥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29년 이내면·이남면이 이원면으로, 청서면·청남면이 청성면으로 통합되었다. 1949년 옥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옥천은 여행경험이 없다. 정지용이 태어난 곳이니 한 번 가보고 싶어진다. 누구나 좋아하는 아름다운 시 <향수>는 내가 김호길 선생과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에서 수없이 함께 불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내마음)파란 하늘빛이 그리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졸음에 겨운 아버지, 얼룩배기 황소의 게으른 울음, 함부로 쏜 화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저리도 애잔하게 그릴 수 있다니...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의 극치다.

 

2. 보은군 : 1읍 10면 - 인구 3.5만 명

  1895년에 공주부 보은군, 1896년에 충청북도 보은군이 되었다. 1906년의 월경지 정리로 청산군의 비입지(飛入地)인 주성면이 보은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보은군 읍내면·산내면·서니면·사각면이 읍내면으로, 내북면·주성면이 내북면으로, 삼승면·서니면이 삼승면으로, 탄부면·마로면·사각면이 탄부면으로, 마로면·왕래면이 마로면으로 통합되고, 산외면과 속리면·수한면은 그대로, 그리고 회인군(懷仁郡)이 폐지되고 읍내면·서면·동면이 회북면으로, 남면·강외면·서면이 회남면으로 통합되어 보은군에 흡수되었다. 1947년 속리면이 내속리면과 외속리면으로 분할되었으며 1973년에 보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7년 내속리면을 속리산면으로 외속리면을 장안면으로 회북면을 회인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법주사

  중학교 2학년 가을 수학여행은 속리산으로 갔다. 그리고 신탄진 연초제조창과 당시 개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민속촌에 간 기억이 난다. 민속촌에서 <팔도강산>촬영차 온 김희갑씨와 황정순 씨를 본 것은 나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당시로는 나에게 머나먼 장거리 여행이자 두 번째 수학여행이었다. 구불구불 99고갯길을 버스로 오르고 정2품송을 지나면서 바라보던 기억, 법주사의 위용과 아름다움이 놀라웠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불상도 크게 인상적이었다. 여관에서 자던 날 밤 우리는 한 방에 7-8명씩 자게 되었다.

  저녁을 먹은 뒤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같은 방 친구들이 왁자지껄하며 쇼핑을 다녀오더니 이구동성으로 새비치기(훔침)자랑을 한다. 목걸이 등 선물용 악세사리들을 훔쳐온 거다. 아이들이 하도 많아 주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훔치는 거는 식은 죽 먹기라고 한다. 나도 덩달아 다시 따라 나가서 난생 처음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된다. 당시에는 나도 처음으로 해 본 신바람 나는 도둑질이 매우 큰 자랑거리였지만, 이후 평생 동안 부끄러움으로 삼아 잊지 않고 있으며 나의 삶에 늘 큰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두 번째는 고백하건대 고교시절 동네 친구들과 별 죄의식 없이 수박사리와 닭사리를 했고 주인에게 고발당하여 합동으로 배상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세 번째는 대학시절 어머니가 보관하시며 생활비로 쓰시는 아버지의 월급봉투에서 몰래 몇 천원씩(지금으로는 몇 만원) 꺼내 쓴 부끄러움도 있다. 필요한 돈을 말씀드리면 반드시 마련해주시는 어머니이시지만 조금은 형편 이상으로 용돈을 쓰게 되는 경우에 취한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모자란 돈에 대해 말씀 한번 안하시던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참으로 컸고 한참동안 어머니께 죄송하였고 하늘같은 사랑에 늘 고마울 뿐 이었다.

 

3. 금산군 : 1읍 9면 - 인구 만 명

  1895년 지방제도개편으로 전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북도에 소속되었다. 1906년 월경지정리로 두입지(斗入地)인 부남면이 무주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하여 진산군이 폐지되어 금산군에 통합되었다. 1940년 금산면이 금산읍으로 승격되고, 그 후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 도, 군, 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 이관

  금산은 본디 전라도이거늘 지난 1963년 제 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금산군을 지역구로 출마한 길재호가 충청도로 빼앗아간 땅이라고 알려져 왔다. 당시만 해도 금산은 대전에서 가깝고 전주와는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임영신 박사는 기전여고를 졸업했고 거물급 정치인인 유진산 선생이 바로 금산출신이다. 그런 분들이 지금은 모두 충청도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내 본인이 아니로되 전라도인으로서 허망하기 그지없다. 본디 황화면 출신인 박범신 교수도 마찬가지다.

● 진산사건

  1791년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신해진산의 변이라고도 한다.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양반 출신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폐제분주(廢祭焚主)를 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1791년 5월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와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은 천주교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의식으로 상을 치렀다. 그 사실이 유림(儒林)들 사이에 알려져 관가에 고발되었다. 이것이 조정에 알려져서 천주교를 공격하려는 공서파(功西派)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려는 신서파(信西派) 사이의 심한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공서파는 윤지충의 행위에 대해 유교사회의 제례질서를 파괴하는 패륜(悖倫)이며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효불충이라면서 신서파를 공격했다. 특히 홍낙안(洪樂安)은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두 사람을 체포하라고 독촉하는 한편, 좌상(左相) 채제공(蔡濟恭)에게는 두 사람의 처형과 천주교탄압을 요청하는 장서를 보냈다. 이외에도 천주교 배척상소가 끊이지 않아 조정에서도 신사원에게 두 사람을 체포할 것을 명했다. 이에 두 사람은 체포되었는데, 윤지충은 제사가 허례라며 끝까지 교리의 타당함을 역설하다가 불효불충 역모죄로 권상연과 함께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대둔산에 위치한 태고사와 수락계곡을 한 해면 수차례 찾게 되고 진산면을 지나칠 때면 진산사건이 생각나고 빼앗긴 금산이 아쉽기 그지없다. 90년대 초에는 우리 서민이 비싼 가격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소고기를 이 곳 백수면에서 자체적으로 직접 잡아서 거의 반 가격으로 판매하여 자주 찾기도 한 추억이 있다. 요즈음은 한우건 미국산이건 주어도 안 먹고 싶은 게 소고기요, 수입 쇠고기는 돼지고기보다 싼 고기가 되었으니 세상은 오래 살 고 볼 일이다? 오늘 아침 양드리가 미역국에 쇠고기를 잔뜩 넣었기로

“60-70년대 옛 어려운 시절엔 명절과 제사 때 일년에 몇 번 겨우 소고기국 맛을 보는데 그것도 한 근으로 온 식구가 맛보니 소고기는 몇 첨 입에 넣어보지도 못했는데 웬 고기가 이리도 많소?”하며 농을 걸며 또

“우리 집은 가족의 생일 때면 미역국에 닭고기를 넣어 먹었어“하니 양드리는

“우리는 여러 집이 큰 울안에 모여 살아서 다른 집의 눈치 보느라 닭은 삶아 먹기도 쉽지 않았어”한다.  잘사는 나라가 되어 다들 잘 먹게 되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들보다 키가 10cm도 더 커서 일본사마들보다 터 크고 아시아에서 키가 제일 큰 나라가 되었다. 물론 우리 아들도 나보다 딱 10cm큰데 우리 딸은 엄마보다 기껏 4cm 더 큰 정도니 많이 아쉽다.                                 2012. 3.26

 

 

7. 마호천변의 고을들

1. 진천군 : 1읍 6면 - 인구 6.3만명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진천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진천의 별호는 상산(常山)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충주부 진천군, 1896년에 충청북도 진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만승면·초평면·백곡면은 그대로, 남변면·북변면·행정면·서암면이 군중면으로, 덕문면·방동면·산정면·소답면이 덕산면으로, 문방면·백락면이 문백면으로, 이곡면·월촌면이 이월면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에 군중면이 진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에 진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4년에 만승면이 광혜원면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김유신 장군과 이상설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즈음에 친구인 이완수 사장의 공장 준공식에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기억이 있다. 작은 중소기업으로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인데 이를 바탕으로 친구는 조립식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팬션 사 업까지 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다.

 

2. 음성군 : 2읍 7면 - 인구 9.7만명

1895년에 충주부 음성군, 1896년에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충주의 두입지였던 금목면·생동면·맹동면·법왕면·소탄면·지내면·대조곡면·두의곡면·사다산면·천기음면·가미동면·거곡면과 음죽의 두입지였던 무극면을 편입하여 군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맹동면은 그대로, 동도면·근서면이 군내면으로, 원서면·남면이 원남면으로, 금목면·법왕면이 금왕면으로, 천기면·지내면·두의면이 삼성면으로, 소곡면·대조면·사다면이 대소면으로, 생동면·무극면이 생극면으로, 감미면·거곡면이 감곡면으로, 충주군 소파면·사이면이 소이면으로 폐합되었다. 1956년에 군내면이 음성읍으로, 1973년에 금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원남면에서 태어났다. 작년 10월 유엔 회원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연임에 성공하여 두 번째 임기를 수행중인 반총장은 우리 한민족 역사상 가장 많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세계평화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며 가장 존경받는 최고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내가 작년 5월 친구들과 설악산에 갈 적에 지름길로 간다며 청주를 거쳐 충주로 가는 중에 반기문 총장의 고향마을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온화한 미소로 세계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조정자로서의 소임을 다 하시는 반총장은 대통령보다도 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분이자 실질적으로 미국대통령 다음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제2의 인물이다.

 

3. 연기군 : 1읍 7면 - 인구 8.5만명

조선시대에 들어 1406년(태종 6)에 별도로 감무를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연기현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전의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했으며, 1416년에 다시 분리하여 조선시대 동안 연기현을 유지했다. 그러나 1680(숙종 6)~85년에 이 고을 사람의 모반 사건으로 읍이 혁파되기도 했다. 전의현 지역은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인데, 이후 구지현(久遲縣)·금지현(金池縣) 등을 거쳐 고려시대에 전의로 개칭되어 조선시대까지 이름을 유지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공주부 연기군·전의군, 1896년에 충청남도 연기군·전의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 때 연기군은 전의군 전역과 공주군의 일부를 병합함으로써 면적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연기군의 동이면·동일면이 동면으로, 서면·북이면(일부)이 서면으로, 남면·군내면 및 공주군 삼기면이 남면으로, 북이면(일부)·북일면이 북면으로 조정되고, 공주군의 명탄면·양야리면·반포면(일부)이 금남면으로, 전의군의 북면·군내면·대서면·덕평면이 전의면으로, 동면·남면·소서면이 전동면으로 통합되어 연기군에 편입되었다. 경부선·충북선 등 철도와 국도의 통과지점으로 교통의 요지가 된 조치원리가 나날이 발전하자 1917년에 북면 중 조치원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서면에 넘겨주고 조치원리만으로 조치원면을 신설했으며, 1931년에 조치원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동면 갈산리가 충청북도 청원군에 편입되었다.

■전의이씨

백 여개가 넘는 이씨 본관 중에 全義이씨가 있는데 전의가 바로 연기군에 있음을 알게 되다. 나는 新平이씨로 본관인 신평은 충남 당진군에 있다.

■세종시로 출발

연기군은 금년 2012년 7월 1일 세종시가 된다. 이번 4.11총선에서 세종시의 시장과 교육감도 선출되었다. 연기군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하겠다.

 

4. 청주시 : 2구 30동 - 인구 67만명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했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67년, 1681~89년, 1804~13년, 1826~34년, 1862~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청주의 별호는 낭성(琅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공주부 청주군,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비입지인 주안면이 회덕군으로, 덕평면이 전의군으로, 두입지 수신면이 목천군으로 이관되어 청주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1908년에 충청북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북도의 행정중심지가 되었으며, 1914년 군면폐합에 의해 문의군이 폐지되고 청주군에 병합됨으로써 면적이 확장되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청주군의 26개면이 13개면으로, 문의군의 7개면과 회인군 1개면이 5개면으로 폐합되어 총 18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동주내면(일부)·북주내면(일부)·남주내면(일부)의 통합된 청주면이 1931년에 청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에 청주읍이 청주부(府)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에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청주시의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63년에 사주면, 1983년에 강서면이 청원군으로부터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 상당구와 흥덕구 2개구가 신설되었다.

■직지심체요절 : '직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는 고려 우왕 3년(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 낸 책으로, 지금껏 세계 최초로 알려져 있던 독일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나온 금속활자인쇄본임이 공인됨으로써 청주는 세계인쇄문화의 요람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상·하권 중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유네스코 직지상이 제정되었다

 

5. 괴산군 : 1읍 10면 - 인구 3.8만 명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되었고 1456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읍의 별호는 시안(始安)이었다. 청주의 영역이었던 청천면 화양동계곡에는 조선 후기에 만동묘·화양서원 등이 건립되어 유림(儒林)의 집결지로 이름을 떨쳤다. 1896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충청북도에 속했다. 1906년 지방행정구역 조정으로 충주의 두입지(斗入地)였던 불정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괴산군과 연풍군 일원 및 청안군의 일부가 합병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형성했다. 교통의 요지인 증평면이 1949년에 읍으로 승격했고, 괴산면이 1979년 읍으로 승격했다.

 

6. 증평군 : 1읍 1면 - 인구 3.4만명

  조선시대 들어 1405년(태종 5) 도안현과 청당현을 병합하여 청안현(淸安縣)이라 칭하고 감무(監務)를 두어 관장케 했다. 1895년(고종 32) 청안군으로 승격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안군을 증평면과 도안면으로 나누고 괴산군에 편입했다. 1949년 8월 증평면이 증평읍으로 승격했다. 1990년 12월 증평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증천·장평·도안 등 3개 지소를 관할하였다. 2003년 8월 30일 지금의 군으로 승격하면서 증천지소와 장평지소를 합병해 증평읍으로, 도안지소를 도안면(都安面)으로 개칭하였다.

■대한민국에는 69개의자치구와 75개의 자치시, 86개의자치군이 있는데 행정구역이 1읍 1면, 단 두 개의 읍과 면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군이 아닐까?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도 인구는 우리 무주보다 훨씬 많다. 무주는 1읍 5면인데 인구는 2.5만이다.

 

7. 청원군 : 3읍 11면 - 인구 15.5만 명

조선에 들어서도 청주목과 문의현을 유지했다. 청주는 충청도라는 도(道) 이름을 대표했던 충청도의 중심적인 고장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兵營)도 위치했던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별호는 낭성(琅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공주부 청주군·문의군,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문의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비입지인 주안면이 회덕군으로, 덕평면이 전의군으로, 두입지 수신면이 목천군으로 이관되어 청주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1914년 군면폐합에 의해 청주군 동주내면(일부)·북주내면(일부)·남주내면(일부)이 청주면으로, 동주내면·서주내면·남주내면·북주내면의 각 일부가 사주면으로, 산외일면·북강내일면이 북일면으로, 산외이면·북강내이면과 청안군 서면이 북이면으로, 내일면·산내이상면 일부가 미원면으로, 산내이하면·산내이상면(일부)이 낭성면으로, 남일상면(일부)·남일하면이 남일면으로, 남이면·남차이면이 남이면으로, 서강내일상면·서강내일하면이 강서면으로, 서강내이상면·서강내이하면이 강내면으로, 서강외일상면·서강외일하면이 강외면으로, 서강외이상면·서강외이하면이 옥산면으로, 북강외일상면·북강외일하면·북강외이면이 오창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문의군이 폐지되고 동면과 회인군 북면, 청주군 남일상면(일부)이 가덕면으로, 남면이 용흥면으로, 삼도면이 부용면으로, 읍내면·북면이 양성면으로, 일도면·이도면이 현도면으로 통합 또는 개칭되었다. 1930년에 용흥면·양성면이 문의면으로 통합되었으며, 1931년에는 청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에 청주읍이 청주부(府)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에 청주시로 개칭됨에 따라 나머지 지역은 청원군으로 명명했다. 청주시의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63년에 사주면, 1983년에 강서면이 청주시로 편입되었으며, 1977년에는 문의면에 대청댐이 완공되었다. 1995년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갈산리가 부용면에 편입되었다. 2000년 북일면이 내수읍으로 승격및 명칭이 변경되었다.

 

※ 세종시

1. 편입행정구역 세종시 전체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개발되는 예정지역을 포함하여 연기군 전체, 공주시 일부 및 청원군 일부를 편입하여 "세종특별자치시"로 출범하게 됩니다.

2. 법적지위 : 정부직할 특별자치시

3. 출범시기 : 2012년 7월 1일

4. 편입구역 : 3개 시ㆍ군, 1읍 11면, 119개리(465.23㎢,서울시의 3/4규모)

5. 예정지역 편입 행정구역표

◯연기군 전지역

◯공주시 장기면 송문리, 평기리, 대교리, 하봉리, 도계리, 봉안리, 제천리, 은용리, 산학리, 당암리, 금암리 일원, 반포면 원봉리, 도남리, 성강리, 국곡리, 봉암리 일원, 의당면 태산리, 용암리, 송학리, 용현리, 송정리 일원

◯청원군 부용면 산수리, 행산리, 갈산리, 부강리, 문곡리, 금호리, 등곡리, 노호리 일원

 

6. 예정지역 : 2개 시ㆍ군, 5개 면, 3개리(72.91㎢)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봉기리, 석교리, 석삼리, 전지역,대평리, 부용리, 성덕리, 신촌리, 영곡리, 용포리, 장재리, 호탄리, 황용리 일부 지역

남면 갈운리, 고정리, 나성리, 방축리, 송담리, 송원리, 양화리, 월산리, 종촌리, 진의리 전지역, 보통리, 연기리 일부 지역

동면 용호리 전지역 및 문주리, 합강리 일부 지역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전지역, 금암리, 산학리, 제천리 일부 지역

반포면 원봉리 일부 지역

 

7. 세종특별자치시 관할구역

 

 

 

 

 

 

 

 

 

 

 

 

 

 

 

 

 

 

 

 

 

 

 

 

 

 

 

 

 

 

 

 

 

 

 

8. 교통의 요지 천안

1. 천안시 : 4읍 8면 16동 - 인구 59만 명

  1895년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천안부가 영산군(寧山郡)으로 개칭되었다가 1416년에 천안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공주부 천안군, 1896년에 충청남도 천안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천안의 비입지인 돈의면·덕흥면·모산면이 아산군으로, 신종면이 예산군으로, 우평면이 면천군으로 이관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목천군이 폐지되고 목천군 북면·갈전면·수신면은 그대로, 읍내면·서면이 목천면으로, 일동면·이동면이 동면으로, 세성면·남면이 성남면으로 폐합되어 천안군에 편입되었다. 직산군도 폐지되고 동변면·서변면·일서면이 성산면으로, 이서면·삼서면·이북면이 성환면으로, 삼동면·이동면이 입장면으로, 이남면·이동면이 성거면으로 폐합되어 천안군에 편입되었다. 천안군은 면의 폐합이 이루어져 상리면·하리면·북일면·북이면이 영성면으로, 군남면·군서면이 환성면으로, 소동면·대동면·원서면이 풍세면으로, 원일면·원이면이 광덕면으로 통합되었다. 1916년에 성산면을 직산면으로, 1920년에 영성면을 천안면으로, 1942년에 갈전면을 병천면으로 개칭했다. 1931년에 천안면이 천안읍으로 승격했다가, 1963년에 환성면 일대를 병합하여 천안시로 승격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농촌지역이던 천안군과 중심도시 기능을 담당해왔던 천안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천안시를 이루었다. 2002년 직산면·목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천안-삼거리 흥--- 능수야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 서---- 축늘어졌구나 흥-----

에루-화에루화- 흥--- 성화가 났구나 흥-----

 

■천안삼거리 명칭의 유래.

천안시 삼룡동에 위치한 '천안삼거리'는 옛부터 충청·경상·전라도의 삼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가 천안삼거리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길은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문경 새재로 넘어 상주로 통해 영동, 김천을 지나 대구감영, 경주, 동래로 통하는 길이요, 한 길은 공주감영을 거쳐 논산, 강경,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등지로 통하는 대로이다. 이 길은 지리적인 요인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며 여러 가지 전설과 민요를 낳았다. 삼거리에는 유난히 버드나무가 많은데 이에 따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조선조 중엽 영남지방에 유봉서란 선비가 어린 딸과 홀로 살다가 변방의 군사로 뽑혀가게 되었다. 그는 임지를 향해 가다가 천안 삼거리에 이르자

어린 딸을 더 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주막에 딸을 맡겨 놓기로 했다. 그리곤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딸 능소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가 잎이 피거든 다시 이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능소는 심성도 착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을 하였고.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박씨는 그 후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를 제수 받고 이곳에서 능소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어사는 유봉서가 심어놓은 지팡이가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는 그 곳에 못을 파고 창포를 심으면서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

하며 글을 읊었는데 그 글이 지금의 흥타령이 되었으며, 전쟁에 나갔던 부친도 살아서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은 것은 헤어질 때 부친이 꽂은 지팡이가 자라서 퍼졌기 때문이라고 전하며 이러한 사연으로 이 버드나무를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안은 서울에서 내려오다 경상도와 전라도 길이 갈리는 곳, 반대로 말하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올라오면 서로 만나게 되는 곳. 말 그대로 역사가 있는 삼거리다. 논산 천안간 민자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오늘날에도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만나는 삼거리가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교통도시로 대전과 이리와 천안과 영주를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천안은 교통의 요지일 뿐 만 아니라 경기도와 가장 가까운 충청도의 대도시로 부상하였다. 이리와 비슷하던 천안이 인구가 60만인 대도시가 되고 단국대와 상명대의 캠퍼스가 있고 백석대가 있는 교육도시가 되었다. 내 친구인 기도가 바로 백석대학교 앞에서 생맥주홀을 운영하고 있고 지금은 찾는 이가 줄어버린 엄청난 규모의 독립기념관이 있고 병천면의 아우내 장터는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를 부르던 곳이다. 병천면의 순대가 유명해져서 두어 번 먹어본 일도 있다.

■目支國과 稷山

  삼한시대 마한 54개국의 맹주인 목지국의 지배자는 진왕(辰王)이라 불렸고, 마한연맹체의 맹주일 뿐만 아니라 진한과 변한의 일부 소국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직산면이 2002년 1월 1일 직산읍으로 승격되었다. 서남부에 용와산(238m)이 솟아 있을 뿐, 읍 전체가 대체로 1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벼농사와 포도·사과·배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며, 목축업이 발달했다. 부송리에는 농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경부선과 서울-대전을 잇는 국도가 읍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한다. 중학교 때부터 목지국은 직산에 있었다고 배워왔고 또 가르쳤지만 실제 가본 일이 없다.

 

2. 아산시 : 2읍 6동 9면 - 인구 28만 명

  조선초인 1413년(태종 13)에 아산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으나, 1458~64년에 읍이 혁파되기도 했다. 아산의 별호는 영인(寧仁)이었다. 아산만 공세곶은 공진창(貢津倉)으로 불렸던 조창(漕倉)이 1478년(성종 9)에 설치되어 충청도 14개 고을, 뒤에는 7개 고을의 조세를 수납했던 해운상의 요지였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1895년에 홍주부 아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아산군이 되었다. 1907년 월경지 정리로 아산의 비입지(飛入地)였던 이서면을 면천군에 넘겨주고, 천안의 비입지인 돈의면·덕흥면·모산면 등과 수원의 비입지인 신홍포·신성포 등을 편입하여 면적이 넓어졌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아산군의 현내면·이북면이 영인면으로, 일동면·일북면·이동면이 음봉면으로, 신흥면·일서면·이서면과 삼서면 일부가 인주면으로, 근남면·원남면과 삼서면 일부가 염치면으로, 삼북면·모산면이 둔포면으로 합해졌다. 이때 온양군과 신창군이 폐지되어 온양군(溫陽郡)의 동상면·동하면과 군내면 일부가 배방면으로, 군내면 일부와 서면·읍내면이 온양면으로, 남상면·남하면이 송악면으로, 이북면·일북면이 탕정면으로, 신창군(新昌郡)의 대서면·북면, 아산군의 덕흥면이 초정면으로, 남상면·남하면이 도고면으로, 군내면·대동면·소동면이 학성면으로 폐합되어 아산군 관할이 되면서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1917년에 초정면이 선장면으로, 학성면이 신창면으로 각각 개칭되고, 1941년에 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 아산만방조제, 1979년에 삽교천방조제가 건설되어 지역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온양읍이 시로 승격되어 아산군에서 분리되었으며, 1990년 염치면이 염치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아산시를 이루었다.

■온양온천과 도고온천

  가장 유명한 것은 온양온천이 아닐까? 우리 전라도에 온천이란게 없을 때 가장 신혼여행을 많이 간 곳이 아마도 온양온천이었을 게다. 그리고 유성온천과 도고온천이 있었다. 30년전인 1981년 10월 11일 결혼식을 마치고 절친 후배인 한대희(현 교수)가 짜준 스케줄대로 나는 신혼여행을 도고온천으로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믾이 많이 부끄럽다. 도고까지는 당시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중형자가용으로 잘 갔으니 됐고…구태여 버스를 타고 온양읍으로 나가서 직행버스를 타고 청주로 가서는 다시 속리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그 먼 속리산까지 갈게 무어람! 신혼여행 티가 팍팍나는 양복을 입고 여행가방을 들고 버스로 이동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히 촌스러움의 극치라.... 하긴 나만 그런 건 아니고 다들 그렇던 시절이다. 돈을 아끼고자 제주도로 가지는 못하고(당시 내 월급이 십오만원정도 되었는데 제주도는 신혼여행비가 40만원 이상 든다하여 포기 하였다. 요즈음 신규교사의 월급이 월 200정도인데 500만원 들여서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다는 건 상상이 안된다. 오늘날 400만원이면 아시아나 오세아니아 지역에는 초호화롭게 3박 4일동안 실컷 다녀올 수 있다. 요즘 제주도 신혼여행은 특급호텔로 간다해도 2박 3일에 150만원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말 우리나라 대한민국 좋은 세상 된게다) 어쩔 수없이 정해진 온천 여행이었기에 빚어진 에피소드다. 속리산에서는 아담하고 작고 조용한 여관의 온돌방에서 잤는데 호텔이 아니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그냥 도고에서 하루 더 묵으며 쉬다오면 좀 좋았을까? 온양온천엔 언젠가 꼭 한 번 가본 기억이 있다.

현충사가 있다. 우리 조상 중 가장 위대하신 이순신 장군님을 모신 사당이다. 세 번 정도 찾았다. 삽교 방조제를 경유하여 당진으로 통한다.

 

 

9. 천하의 으뜸가는 물맛

1. 충주시 : 1읍 12면 12동 - 인구 21만 명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충주목이 되어 조선시대에도 충주목이었다. 그러나 명종·광해군·인조·숙종·영조 등 여러 시기에 모반 등으로 인해 유신현(維新懸) 또는 충원현(忠原懸)으로 개칭되면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충주의 별호는 대원(大原)·태원(太原)·예성(蘂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충주부 충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충주부가 폐지되고 충청북도 소속의 충주군이 되어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그러나 1906년 월경지 정리로 금목면·생동면·맹동면·법왕면·소탄면·지내면·대조곡면·두의곡면·사다산면·천기음면·감미동면·거곡면을 음성군으로, 불정면을 괴산군으로 이관하여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1908년 도청소재지가 청주로 옮겨갔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20개면이 13개면으로 통합되고, 일부 면은 제천군과 괴산군에 이관되었다. 1931년 충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56년에 충주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으며, 이때 충주군도 중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중원군과 충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도농통합시인 새로운 형태의 충주시를 이루었다

십 수년 전 양드리와 충주 단양일대 여행을 가서 탄금대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을 보고 충주호를 거쳐 단양에 가서 하루 묵은 기억이 난다.

■탄금대

명승 제 45호인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이라고 불리워 오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지금부터 1400여 년 전(AD 536년경) 신라 진흥왕 때에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라고 불리어졌다. 우륵선생은 가야국 가슬왕 당시의 사람으로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며 신라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는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선생은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 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 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 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 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 두대라고 한다.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인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고구려 최성기인 5세기경 장수왕때로 추정되는데, 단양의 적성비에 의하면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빼앗을 수 있었고 비문에 보이는『개로』는 백제의 개로왕을 말하며『신유년』은 장수왕 69년(481) 으로 보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이 비의 성격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여러 성을 빼앗고 개척한 척경비로 보이지만 앞면과 왼쪽 측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앞면 상단의 비명을 비롯하여 비문의 판독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여서 확실한내용은 계속적인 조사연구를 요하고 있다. 대학시절 새롭게 발견되어 조명된 중원고구려비와 단양적성비는 국사학계의 대단한 발견이자 삼국시대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였던 중요한 사료다.

■중원 탑평리 7층석탑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확 트인 위치에 하늘로 치솟는 듯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주 잘 생긴 탑으로 기억된다.

 

10. 남한강변의 나루들

1. 단양군 : 2읍 6면 - 인구 3.2만 명

조선시대에도 단양군으로 있었다. 단양군과 영춘현은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이 되어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춘군이 단양군에 통합되었다. 오지였던 이곳도 1970년대 이후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개발이 진전되었다. 1979년 단양면이, 그리고 1980년 매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5년 충주 댐 건설로 단양군의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되자 도전리·별곡리에 신단양이 새로 건설되어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

■적성비

1978년에 발견 된 이 비석은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 진흥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단양 적성일대의 영토를 편입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전승비겸 척경비이다. 자연석을 사용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씨가 뚜렷하다. 가로세로 맞춘 글자새김이 정교하고, 그 가운데 288자를 알아볼 수 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적성출신의 장군 등을 포상하면서 그와 같은 충성을 지역민들에게 유도하고자 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라의 율령제도, 즉 형벌과 행정법규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당시의 법률제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비석이다. 2001년, 양드리와 함께 차를 주차하고 적성비를 찾아 걸어 올라가니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인 길 너머 산기슭에 위치하여 직접 찾아 만져보지 못하고 돌아온 기억이 생생하다. 그 공사 중이던 고속도로는 중앙고속도로(2001년 완공)였는데 적성비는 잘 보존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도를 찾아보니 역시 산위에 있으므로 직접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듯싶다.

■단양 8경

11년 전 처음 찾은 단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남한강이 흐르는 강변 산기슭으로 펼쳐진 읍내는 마치 달력 속에 보이는 서부유럽의 어느 도시를 연상하게 하였다. 강변의 어느 깨끗한 모텔에서 묵고 이튿날 찾은 삼도봉과 석문은 아직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단양을 찾아 예쁜 호텔에서 한 이틀 머물면서 단양 8경 모두 찾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싶다.

 

2. 제천시 : 읍 면 - 인구 만 명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제천현이 되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제천의 별호는 대제(大堤)·의천(義川)·의원(義原)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 제천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북도 제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근좌면·근우면은 그대로, 현우면·현좌면·동면이 읍내면으로, 서면이 백운면으로, 남면이 성산면으로, 북면이 송학면으로 통합 또는 개칭되었다. 또 청풍군이 폐지되고 청풍군의 8개면이 5개면으로 통합되어 제천군에 편입되고, 충주군 덕산면도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이때 현우면·현좌면·동면이 통합된 읍내면이 1917년 제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0년에 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중앙선과 태백선이 통과하여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강원도와 충청북도 내륙을 연결하는 제천의 역할이 더욱 커져 제천읍은 1980년 시로 승격, 분리되고 나머지 지역은 제원군으로 바뀌었다가 1991년에 다시 제천군으로 환원했다. 1983년 제천시는 당시 제원군의 금성면 일부를 편입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제천군과 제천시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제천시를 이루었다

■의림지

삼한시대부터 존재한 저수지로 첫 번째 손꼽는 곳이 내 고향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 등이다. 벽골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컸다고는 하지만 현재에는 모두 논이 되어 있는 상태이며 오직 관광지화 하여 박물관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정도이다. 2001년에 처음 의림지를 찾았고 2004년에 우리 딸 승원이의 입시 문제로 제천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이왕에 간 김에 추운 겨울임에도 또 다시 의림지를 찾았었다. 현재에도 규모가 대단하고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놀라웠고 부럽기까지 하였다. 벽골제도 최근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위해 노력하면서 원래의 벽골제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제천과 한파

우리나라 기후구로 볼 때 중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하는 이 지역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해양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내륙으로 한서의 차가 심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0.1℃ 내외, 1월평균기온은 -5.6℃ 내외, 8월평균기온은 23.9℃ 내외로 기온의 연교차가 매우 크다. 내가 겨울이면 이 추운 무주에서 기온에 매우 관심이 고조되는데 여차하면 아침 기온이 영하 15도 내외인데 우리 전라북도에서는 대체적으로 가장 추운 순서로 최근의 내 경험상으로 1위 임실 2위 장수 3위 진안과 무주이다. 이 곳 무주도 작년 겨울에는 1월 아침 기온이 영하 15도 내외여서 무지 추웠고 지난 겨울은 대개 영하 8도 내지 10도 정도였다. 그런데 기상 뉴스를 들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보도되는 곳이 거의 대부분 바로 제천이다. 분지로 둘러싸인 제천은 대개 20도 안팎으로 보도되고 있어 아직도 초등학교시절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은 중강진이며 영하 23도 운운”하던 기억이 남아 있긴 하지만 우리와 별 관계없는 중강진은 이젠 잊어도 좋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은 제천”이라고 가르쳐야 맞는데 지리시간에 그렇게 가르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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