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박만식 시집 - 푸른 간격

청담(靑潭) 2012. 10. 22. 11:47

 

 

 

한 마리의 공룡

박만식

 

그랑께 그게 언제더냐

눈 내리는 토요일 해질 무렵 이었던가

개업 집 수건에 다이알 비누 돌돌 말아 끼고

철도 기관고 목욕탕에 갔다.

누가 뭐라 하면 전기분소에 다니는

아버지 이름을 대라는 말씀을 큰 빽으로 믿고

형과 함께 털레털레 목욕탕에 갔다

기적소리 털어내며 들어서는 기관사

열차에 매달려 빨강기와 녹색기를 흔들며

입환 작업을 하던 너 댓 명의 김씨 아저씨들

우리는 석탄가루 씻어낸

김도 나지 않는 탕에 들어가 텀벙댔다

온통 회색 빛 땟물만 잘름거렸다

빼빼 마른 몸에 비누칠도 하기 전에

보일러 아저씨한테 쫓겨났다

아버지 이름을 대도

아부지 전기분소 댕기는디요 해도

그런 사람 모른다며 막무가내로 쫒아냈다

내복바람으로 도망 나온 우리는

기관사 합숙소 처마 밑에 쪼그려 앉은

맨드라미 앞에서 덜덜 떨며 바지를 입었다

하늘은 여전히 시커면 눈송이를 털어 내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목욕탕은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한 마리의 공룡이었다

 

 

  박만식 선생(이일여중 교감)께서 당신의 시집을 보내 왔습니다. 박만식 선생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낯이 익은 후배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어 우리 아파트에 함께 살면서도 인사도 나누어 보지 못한 사이였습니다.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대로 얼굴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어 어쩌다 지나칠 때면 그저 저 사람이 분명 고교후배이거니 만 했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270세대의 규모가 작은 동네라서 내가 잘 아는 고교 선후배 동문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재 1년 선배 세 분이 살고 계시고, 친구인 신교수는 4년 전에 나를 버리고 물 좋은 동네로 도망가 버렸고, 박교감은 2년 후배입니다. 내가 지난 번 익산시 교감 모임시 만나게 되어 먼저 아는 체를 해서 그가 선생인줄도, 교감인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시집을 받게 되었습니다.

 

 《푸른 간격》이라는 그의 시집에는 우리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 우리가 살고 있는 향토의 소박한 이야기들이 간결하면서 명쾌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인 제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제가 그 중 <한 마리의 공룡>을 선택하여 적어 보았습니다. 제게도 박만식 선생처럼 이리역 철도 기관고 목욕탕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두 달간 버스 통학을 하니 키가 작은 내가 만원버스에 시달려서인지 입술이 부르트고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5월부터 철도기관사인 재당숙 집에서 다니게 됩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1학년인 삼기아재와 함께 수건에 비누를 들고 철도목욕탕에 가게 되었고 나로서는 이처럼 큰 공동목욕탕은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펼쳐진 재건운동의 일환으로 마을에 지어진 작은 공동목욕탕을 이용것만도 자랑이었지요. 우리는 박교감과는 달리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즐겁고 감동적인 목욕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보일러 아저씨 기분이 좋은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 이리시는 인구가 6만 5천명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철도역과 역광장은 굉장히 컸습니다. 전라선과 호남선이 교차하는 이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통도시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고 「낮에는 10만, 저녁에는 6만>이라 할 정도로 아침 저녁으로 이리역 광장은 시커면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만큼 이리시에서 철도와 이리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나의 절친인 김호길 선생님의 부친께서도 이리역에 근무하셨고 김승환 교육감님의 부친께서도 이리역에 근무하셨다고 합니다. 벌써 47년이 지난 아련한 추억입니다. 새벽녘에 온 시내에 울려 퍼지던 시커먼 증기기관열차의 요란한 기적소리가 그립습니다. 역전 광장에서 사먹던 팥떡맛도 매우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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