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산문 산책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안대회 지음
우리 고등학교 국사교육사상 최고의 교과서였던 고등학교 국사〈교육과학기술부 국사편찬위원회 국정도서편찬위원회, 2002-2009〉는 8년간 현장에서 가르친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의 구성 체제는 다음과 같다.
Ⅰ 한국사의 바른 이해 Ⅱ 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Ⅳ 경제 구조와 경제생활 Ⅴ 사회 구조와 사회생활 Ⅵ 민족문화의 발달
민족문화의 발달 단원의 4. 근대 태동기의 문화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박지원은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현실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로 혁신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2006년판부터는 주 2시간으로는 분량이 너무 많아 가르치기에 벅차다는 일선교사들의 의견에 따라 교과서가 축소되면서(388p→335p) 문학부문은 아예 삭제되는 아픔이 있었다. 고교에서 자연계의 경우는《문학》을 배우지 않으므로 자연계 학생들은 우리의 고전문학사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폐지하고 2010년부터 배우기 시작한 새로운 검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는 전적으로 근현대사에 치중(80%)하여 구성됨으로써 문학은커녕 아예, 우리역사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여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통탄할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졸속 교육과정 개편에 의해 한국사 교과서는 참으로 허술하게 편찬되어 버린 것이다. 더욱 통탄할 일은 이에 대한 큰 반성과 비판은 없고 편찬자들과 그들에 의한 현대사 일부의 내용에 대한 이념과 사상논쟁만 벌이다가 이제는 그나마 잠잠해진 상태이다.
한문학자인 편자가 조선후기의 천재작가 23명의 160편을 담은 반가운 이 책을 읽게 되어 늦게나마 다행스럽고 매우 기쁘다. 이 책의 서문에 이런 글들이 있다.
<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시도는 제도와 체제의 지원을 받은 권위적 문체인 고문의 힘에 눌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다가 근대와 더불어 사라졌다. 소품문이 그게 위세를 떨친 18~19세기 문단에서도 명가들은 문단의 실세 권력을 장악하였다. 소품문은 평자들의 입에서 대체로 비난을 받거나, 아예 논의의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비평가의 비평대상도 되지 못한 채 이류의 문장으로 취급당하였다.
......고문은 조선의 사대부가 받아들인 그 특유의 이데올로기와 주제를 표현한다. 고문은 조선 우가사상의 범주를 거의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조선 선비의 사유와 정서, 논리와 윤리를 충실하게 지향한다.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를 문체와 내용 면에서 충실하게 투사하는 문장이다.
반면에 소품문은 그 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대체로 탈 이데올로기 적이어서, 정치나 윤리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기호와 소시민주의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고, 정치혐오증과 같은 태도를 표명한다. 국가와 백성, 윤리와 심성과 같은 보편적 가치, 거대담론에 억눌려 발산하지 못한, 개별적이고 작은 가치에 시선을 던진다. 고문이 진리를 말하고자 했다면 소품문은 구체적인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전형적인 선비들은 말하려 하지 않았던 현실세계의 다양한 진실을 말하여 들었고, 당대의 현실을 당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당대의 문체로 묘사하려 하였다.>
내가 고전번역원이 번역한 많은 국학관련 저서들을 인터넷을 통하여 자주 접하고 있으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편자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 책을 통하지 않고는 접하기 힘든 작품들이 많은 듯싶다. 역사교사인 내가 아직까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아 모르는 이들과의 만남이 신선하고 기대가 크다. 글이 게재된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01 개성 충만한 사회비판, 허균 - 5편
02 일침견혈(一針見血)의 산문, 이용휴 - 9편
03 좌절한 영혼의 독설, 심익윤 - 5편
04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 박지원 - 3편
05 냉소와 자의식의 산문, 노긍 - 7편
06 섬세한 감성 치밀한 묘사, 이덕무 - 14편
07 지사의 비애와 결벽의 정서, 이가환 - 7편
08 벽(癖)에 빠진 사람들, 유득공 - 6편
09 강개한 정서와 예리한 시각, 박제가 - 5편
10 언어 밖으로 넘쳐난 사상과 감정, 이서구 - 5편
11 결함 세계의 품격, 유만주 - 3편
12 저잣거리의 이야기꾼, 이옥 - 8편
13 소외와 일탈의 인생, 남공철 - 6편
14 상처받은 인생 불편한 심기, 김려 - 4편
15 무명의 불량선비. 강이천 - 4편
16 살아남은 자의 슬픔, 심로승 - 4편
17 마음의 열망, 정약용 - 4편
18 고담한 산문미학, 유본학 - 5편
19 여항문단의 편집자, 장혼 - 1편
20 비탄과 인고의 정서, 이학규 - 7편
21 가난한 서생의 고단한 삶, 남종현 - 6편
22 천하의 지극한 문장, 홍길주 - 6편
23 유쾌한 위트의 문장, 조희룡 - 4편
현대문학의 장르로는 수필이다. 에세이와 미셀러니를 다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수필이라 보면 되겠다.
내게 어울리는 인생예찬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예찬1 진짜의 확립
예찬2 운명의 관찰
예찬3 미혹(迷惑)의 거부
인간의 큰 근심은 혼돈이 뚫린 태초부터 발생하여 꾸미고 수식함은 넘쳐나고 진실과 소박함은 사라졌다.
색(色)에 곯고 재물을 탐하며, 눈짓으로 말하고, 이마로 꿈쩍이며, 혀로 부드럽게 굴려 달콤한 말 꾸며내고, 뱃속과는 반대의 말로 칼날을 숨긴다.
앞에서는 절을 하고 뒤에서는 비판하며, 벗이라고 끌어다가 면전에서 망신주니 빼어난 기상은 허물을 잉태하고 화려한 재능은 횡액을 불러들인다.
선비가 장사치의 돈궤미를 탐내고, 사나이가 아녀자의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째서 품성의 배양을 잊는 것일까? 복록(福祿)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예찬4 훼방으로부터의 도피
예찬5 영혼의 즐거움
예찬6 진부함의 제거
표범이 말을 낳고 말이 사람을 낳은 일도 있듯이 변화의 계기는 매인데 없고, 계승과 혁신은 늘 새롭게 일어선다.
구속받는 선비는 좁은 문견으로 옛사람이 밷어 놓은 말만을 귀하게 여기지만, 한 단계를 뛰어넘기는커녕 얼마쯤 뒤떨어져 있다.
남의 걸음걸이를 배우다 보면 오히려 절뚝거리게 되고, 서시(西施)를 흉내 내려 이맛살을 찌푸린다.
위대한 작가는 진실을 꿰뚫어보고서 썩은 것과 낡은 것을 씻어 던지니
말의 외양을 무시하여 천리마를 얻은 구방고(九方皐)처럼 옛 것과 지금 것을 저울질하는 그의 눈동자는 크고도 진실하다.
예찬7 벗의 선택
예찬8 우주의 희롱
내 앞에도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무(無)에서 왔다가 다시 무로 되돌아 간다.
많지도 않은 오직 나 혼자일뿐이러니 얽매일 것도 구속될 것도 없다.
젖을 먹던 내가 갑자기 어느 사이 수염이 자라고, 어느 사이 늙어버리더니 또 어느 사이 죽음을 맞는다.
큰 바둑판을 앞에 두고 호기롭게 흑백의 돌을 던지는 듯, 큰 연회무대 위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꼭둑각시인 듯, 조급해하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하늘을 따라서 즐기리라.
기원기(綺園記)
이가환(李家煥; 1742~1801)
※綺園은 아름다운 화원을 말한다.
자연의 빛깔을 빌려 쓰는 사람 가운데 가장 모자란 자가 바로 비단을 짜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 비단을 가져다 옷을 만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무튀튀하게 색깔이 바랜다. 만들기는 너무도 힘이 들건만 망가지기는 쉽다. 그래서 실 잣는 여인은 괴롭기만 하다.
(중략)
자연의 빛깔을 빌려 쓰는 사람 가운데 약간 약은꾀를 가진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를 잘 쓰기는 하지만 곤궁한 처지가 되기는 쉽다. 그래서 시인은 괴롭기만 하다.
(중략)
그러니 누가 기원(綺園)의 주인보다 낫겠는가? 기원의 주인은 몇 이랑의 땅을 개간하여 이름난 화훼(花卉)를 심었다. 붉은 색, 녹색, 자줏빛, 옥색, 담황색, 단항 목색, 흰색, 얕은 멋, 깊은 멋, 성글게 심은 꽃, 빽빽하게 심은 꽃, 새로운 꽃, 묵은 꽃, 일찍 피우는 꽃, 저물 때 피는 꽃, 새벽에 피는 꽃, 갠 날 피는 꽃, 비 올 때 피는 꽃 등등. 온갖 꽃이 어우러져 빛깔을 뽐낸다. 이렇게 진짜 빛깔을 대하므로 그 무엇과 우열을 다투겠는가?
그렇지만 주인은 화훼의 위치를 안배하고, 심고, 접붙이고, 물을 뿌리고 물길을 터주며, 흙을 북돋고 가지를 쳐내는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원 주인조차도, 멍청하고 완고한 들 늙은이가 한 해 내내 목 뻣뻣하게 베개높이고 누웠다가, 기원동산에 꽃이 한창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흔연히 찾아가서는 온종일 마음 편하게 앉아 꽃구경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으랴?
서른 두 폭의 꽃그림에 부친다
유득공(柳得恭;1748~1807)
(생략)
아! 멋들어진 정자를 한 채 지어놓고, 그곳에 미인을 데려다놓은 다음, 병에는 공작새 깃털을 꽃고 정원에는 꽃을 심고, 난간에 기대어 석양의 노을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천하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미인은 늙기 쉽고 오래된 깃털은 시들기 쉬우며 생생한 꽃은 떨어지기 쉽고 지는 노을은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차라리 나는 김군에게 이 화첩(畵帖)을 빌려서 근심을 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