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2박 3일
들어가는 말
전주제일고에서 근무하면서 함께 등반을 같이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학교 옆에 기린봉이 있어 명칭은 <기린봉회>라 하고 지금까지 10여 년간 모임을 지속하고 있는데 정회원은 10명으로 굳어졌다. 해외여행을 추진하여 작년에는 일본 큐슈에 다녀왔는데 나는 개인사정상 참여치 못했고, 이번에는 짧은 2박 3일인데다 일정이 1월 말이라 인사업무가 끝나는 시기여서 학교근무에 큰 지장이 없고 또 다행히 교장께서 근무하는 주간이어서 가능하였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깊은 역사적 관계를 맺어온 땅이라 반드시 한번은 다녀와야 하는 곳이다. 양드리 역시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기꺼이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회원 10명 전원이 참가하고 4명은 부부가 참가하게 되니 일행은 14명이 되었다. 참가자는 다음과 같다.
이용만 김희자 부부-이영희 송이수 부부-고병남 정상식 부부-이석한 양순옥 부부-은정표-이재천-주정만-우덕희-이인근-최덕호 선생이다.
대마도 2박 3일 일정표
일자 |
지 역 |
교 통 편 |
시 간 |
세 부 일 정 |
비 고 |
1/24 (목) |
전 주
부 산
히타카츠
|
전용버스
오션플라워
전용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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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08:00 09:3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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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집결지출발(벽계가든앞04:30분/아중리고려병원맞읁편04:40분) 부산 국제 여객 터미널 집결 부산항 출항 (오션플라워- 소요시간 1시간 10분) 대마도 히타카츠 항 도착 입국수속 (차량탑승) ▶미우다 해수욕장 ▶도노자키(설명) ▶한국전망대 (역관사순난비 ․ 무궁화)▶오우라(임진왜란출항지) ▶대마도판 나바론요새(대형차 진입 불가) ▶원통사 (대마도를 조선에 바친 도주보리사)▶카이진신사 ▶“에보시타케 전망대 (대마도판 하롱베이)” ▶와타즈미신사 ▶소선월(이종무장군전승지)-(차중) ▶만제키바시 (조선정복 / 정노환, 러․일 전쟁) ▶대선월(대마도 최초 운하) -(차중) 석식 후 호텔 이동, 룸 배정 후 휴식 |
조 : ○ 한정식 중 : ○ 현지식 석 : ○ 현지식 BBQ 특식 + 생선회 1인분 |
HTL : 나기 또는 동급(2인1실 기준) | |||||
1/25 (금) |
히타카 츠 |
전용버스 |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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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후 숙소 출발 (차량탑승) ▶소학교적(차중) ․ 카미자카 전망대 ▶이시야네 ․ 백제 미녀총(차중) ․ 쯔즈자키(대형차 진입불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 오후나에 ░░ 오 후 투어 ░░ ▶시내 자유시간 ▶면세점 등 쇼핑센터 쇼핑 ▶석식 후 호텔 체크인 |
조 : ○ 호텔식
중 : ○ 현지식
석 : ○ 가마메시 |
HTL : 나기 또는 동급(2인1실 기준) | |||||
1/26 (토) |
이즈하라 부 산 전 주 |
오션플라워
전용버스 |
08:30
15:00 17:10 22:00 |
조식 후 숙소 출발 (시내 역사 투어) ▶이완용 친필 매국비(碑)▶나카무라적 ▶수선사 (최익현 순국비 ․ 수야마토츠안 ․ 카스마쵸켄 ․ 김학진)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방화벽 ▶ 표민옥적 ▶조선침략 준비 이즈하라 한글학교 ▶화양관적 ▶대마 역사자료관․ 조선통신사비․ 우삼방주와성신지교린․ 고려문 ▶조선통신사접우노지비(碑)와 금석성 ▶마리아신사 (하치만궁 신사 ㆍ 일본의 신사문화) ▶나카라이토슈 문학관 ▶대마도 사무라이 저택과 거리 대마도 이즈하라항 출발 (오션플라워 - 소요시간2시간 10분) 부산 도착 후 입국수속 이동중 석식후 전주도착 및 해산 (^-^) 안녕히 가십시오. |
조 : ○ 호텔식 중 : ○ 현지식 석 : ○ 한정식 |
★ 포함내역 |
▶전 일정 숙식, 선박료, 부두세, 차량비, 입장료,가이드 & 기사 TIP,유류할증료,여행자보험 ▶1월24일(조식1회)),1/26일(석식1회),특식1회-(BBQ+생선회1인분) ▶전주-부산간교통비포함(전용차량이용) | ||||
★ 불포함 |
개인경비 | ||||
★ 특이사항 |
▶일정은 선박 및 현지 사정에 의해 다소 변경될 수도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천재지변 및 기상악화로 인한 선박결항 시 추가 체재 경비는 고객개인이 부담하셔야 합니다. ▶숙박은 2인 1실 기준이며 현지사정과 팀에 의해 룸이 조정될 수도 있습니다. ▶대마도는 원화를 사용 할 수 없으므로 엔화를 미리 준비하십시오. (국제터미널 1F 환전가능) ※선택옵션 : ①온천-1인당 1,000엔 (타올 및 개인세면도구를 지참바랍니다.) ? 선택옵션은 출발전 예약 및 입금해 주셔야 사전예약이 가능합니다. ※ 준비물 → 식사 時 - 밥과 반찬의 양이 적으므로 간식 및 밑반찬(김, 김치 등) 준비. ※ 준비물 → 온천옵션(1인당 1,000엔) 선택 時 - 수건 및 개인 세면도구를 지참해 주십시오. ▶본 일정에는 대마도 전문 가이드가 동행 또는 부산 센딩 후 현지 대기합니다. | ||||
★ 대마도는 일본 대도시와 비교해서 도로, 대중교통, 음식, 숙박 시설이 많이 부족하고 열악한 실정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대마도에서 많은 이해와 협조 부탁드립니다. ★ |
답사로
개요
소속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 시.
면적 : 708㎢(울릉도의 약10배, 제주도의 약40%, 섬 전체 89%가 산림지대)
거리 :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
인구 : 약 3만 5천명(2011년 집계)
동서 폭은 18㎞, 남북의 길이 82㎞이며 본 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고 그 중 5개 섬이 유인도이다. 본섬은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고, 이를 만제끼 다리가 연결하고 있다.
행정을 살펴보면 1市 6町 (쓰시마市,이즈하라마치, 미츠시마마치, 토요타마마치, 미네마치, 카미아가타마치, 카미쓰시마마치)이다.
쓰시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자, 고려말(1389) 박위가 정벌하고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유책·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세종 때에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뒤에 쓰시마도주(島主) 소오[宗]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1426)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을 독점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산촌에서는 숯구이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으나 조림이 이루어졌다. 오징어·도미잡이와 전복·소라·성게·천연김을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오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그 시주사 등이 남아 있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1주일에 6차례 운항되고 있다.
역사
삼국시대 초에는 대마도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한국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 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국과 일본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오(宗)씨는 가마쿠라시대(1192-1333)중기부터 무로마치 막부(1338-1578)를 거쳐 에도막부(1603-1867) 말기까지 약 600년간 대마도를 통치하여 왔다.
무로마치시대에는 대체로 일본과 조선은 평화로운 관계에 있었다. 이때 대마도주 소오 사다모리(貞盛)는 거처를 사가(峰町 ; 현 대마도 미네마치)에 두고 조선과 활발한 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쓰시마를 토벌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조선의 세종이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쓰시마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무로마치막부의 장군 아시카가(足利)를 일본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1428년 이래 수차례에 걸쳐 정식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이것이 통신사의 시초이다.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1426)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쓰시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 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했으나 중종때의 삼포왜란(1510)이나 명종때의 을묘왜변(1555)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일시 단절된다. 이후 부산포만 부활되었다가 1590년 완전히 중단된다. 그러나 임란 후 1607년 기유약조를 맺고 부산에 다시 왜관개시를 열고 이후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낸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되었고, 쓰시마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에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 후추 번이 폐지되고,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에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편입되었으며, 소 가문은 일본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는 일본 제국의 강요로 소 가문과 정략 결혼을 하기도 했다.
쓰시마 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구 해군이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제키세토(万関瀬戸)라 불리는 운하를 만들게 되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섬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른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 섬을 넘본다"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분쟁화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산케이 신문에서는 "쓰시마가 위험하다"라는 쓰시마 위기론을 기사로 써 넣었다.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 관련한 자국 영토 주장을 하기로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한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최고의원 허태열은 2008년 7월 16일 한나라당 지도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유권 주장의 예와 B형간염유전자의 유사성을 예로 들며 쓰시마 섬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제1일(2013. 1.24 목)
새벽 4시 30분에 전주 출발이라 잠을자다가 미처 깨지 못하는 실수를 할까 걱정되어 아예 TV를 보며 지내다 3시 20분에 집을 나서다. 종합경기장에 차를 주차하게 되니 택시비는 절약이다. 전주 코끼리 여행사가 직영하는 건 아니고 대행이라 하며 부산까지 차편을 제공한다. 물론 교통비(5만원)는 별도다. 담당 여행사는 하나투어로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30명의 여행단이 되다. 쾌속선인 오션 플라워호로 겨우 1시간 10분이면 북섬의 히타카츠항에 도착한다. 세상에 아무리 가까운 대마도라지만 1시간 10분이라니....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조금 먼 섬에 가는듯한 느낌이다. 겨우 49.5km이니 군산에서 70km떨어진 어청도보다 가깝다.
○미우다 해수욕장에 가다. 쓰시마에서는 아름다운 곳인데 규모는 작다.
○도노자끼에 도착하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곳으로 일·러 우호기념비가 있다.
○1500년 된 은행나무도 구경한다.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라 하며 백제인들이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원통사에 들리다. 통신사 李藝(1373-1445)의 공적비가 있고 9대 대마도주의 묘역이 있다.
이예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계급 아전 출신이다. 8세에 왜구에 의해 어머니를 납치당한 이후 평생 동안 어머니를 찾아다닌 그는 고려 말부터 횡행했던 왜구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1396년 왜구에 붙잡혀간 자신의 군수를 구하기 위해 자진하여 대마도까지 잡혀간 후, 결국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고,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신분을 올려주고 벼슬을 하사하였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군수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왜구의 배에 올라탄 일이 외교관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예는 이후로 40여 차례가 넘게 교토, 큐슈,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었는데, 71세의 노년에도 대마도에 붙잡혀간 조선인 귀환 협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대마도)에 출입한 신(臣)이 가는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할 만큼 깊은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지식과 유창한 외국어 능력 및 협상력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지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교란 곧 국제 관계를 지휘하는 지략이다.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지략을 통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예가 1401년에 50명, 이후 1410년까지 매년 일본을 왕래하며 500여 명, 1416년 40여 명 등 15차례에 걸쳐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시킨 사례는 대일외교에 대한 경험과 전문지식에 기반한 그의 지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왕록실록에 따르면, 태조~세종 시대 60년간 184회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중 조선 초기 18년간에는 총 127회(연평균 7회)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마저도 계해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444년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다. 이 시기는 고려말(공민왕 22년)에 출생하여 1445년(세종 27년)에 별세한 이예의 활동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왜구의 침입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일 강경책과 함께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긴밀한 대일 외교의 결과였으며, 대일 외교의 핵심에는 이예가 있었다. 그는 43년간 외교관으로서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때로는 원칙과 강경책을 앞세우고 때로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대일 외교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이예의 노력은 1443년(세종 25년)에 조일 통교(通交)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매년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渡航)선은 문인(文引, 도항 허가증)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명시함으로써 조선초 대일관계 안정화에 기여했다. 또한, 이예는 왜인의 체류 문제, 입국 허용 조건 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감으로써 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체제 수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울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유구, 대마도 등지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사수할 수 있었다.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오르다. 일본판 하롱베이라 하는데 장관이다.
○와타츠미 신사에 가다. 해궁으로 바다신을 모신 신사로는 일본에서 가장 크다.
○만제키바시(만강교)를 걷다. 러일전쟁시 일본함대가 숨었다가 이 운하를 이용하여 발틱함대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대선월을 보았는데 대마도 최초의 운하라 한다.
이즈하라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는 공항호텔에서 하는데 고기가 푸짐하고 개인별로 회까지 충분히 주어서 술안주가 넉넉하다. 일본 여행에서 처음 보는 만찬이라서인지 꽤나 마시고 졸려서 즉시 잠에 떨어졌다. 숙소는 하마유호텔인데 그저 장급 여관이며 방은 2평이 채 안되는 듯 싶은데 침대가 둘이요 화장실에도 있을 건 다 있다. 축소지향적 일본이란 말이 딱 맞다. 이튿날 아침 재천형으로부터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일찍 잠을 잔 죄로 잔소리 좀 듣다.
제2일(2013. 1.25 금)
오늘은 쓰시마 남섬여행이다.
○이즈하라에서 가까운 카미자카 전망대에 오르다. 러일전쟁시 포대가 주둔한 곳으로 연병장과 병사들의 숙소가 남아 있다.
○이시야네라는 시골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농경지가 있어 일찍부터 부촌인데 지배층이 아니어서 기와를 올리지 못하므로 소중한 양식을 저장하는 창고만큼은 지붕에 돌로 이어 화재에 대비하였는데 현재까지도 돌집이 남아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미녀총은 없고 비석만 있다. 배제 미인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쓰쓰자키에 가다. 대마도의 최남단으로 등대가 있다. 20여분을 도보로 걸어 운동하면서 구경한다. 작은 섬들과 암초가 많다. 대한해협과 쓰시마 해협의 경계에 위치하는데 주변은 조류가 빠르기 때문에 거친 수로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산속에 있는 통나무 식당에서 벤또 점심이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이다. 시원한 시내 주변은 완전한 널따란 돌마당처럼 되어 있어 장관이다. 더운 여름날 캠핑하는 곳이라 한다.
○온천탕에 가다. 이즈하라 시에서 개발한 온천으로 물의 양이 적어 해수를 끌어들여 섞어 쓰므로 물맛이 조금 짜다. 피로를 풀어 상쾌하다.
저녁에는 은교장님을 제외한 팀원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다. 주정만선생의 개그에 웃다가 취해 버렸다. 취한 탓에 또 실컷 잤다.
제3일(2013. 1.26 토)
○오늘은 시내 관광인데 처음으로 들린 곳은 국분사이다.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세워지는 사원이다. 작은 종각이 아름답다. 절의 입구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있는데 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거니와, 최근 급증한 한국관광객을 염두에 두고 조선통신사 일행의유숙소 일대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카라이 도스이(1860-1926)생가에 지어진 문학관에 가다. 근대 소설가로 이곳 이즈하라 태새으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며 춘향전을 최초로 일본에 소개한 사람이다.
○하치만궁 신사를 찾다. 宮이 붙는 신사는 격이 높다. 이 신사는 소위 삼한을 정벌하였다는 신화속의 인물 신공황후를 모시는 신사이다. 즉, 일본 서기에 의해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고 있는 그 인물이다
바로 옆에 마리아신사가 있다. 임진왜란 전,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는 조선지리를 잘 아는 대마도번주 요시토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부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를 요시토시에게 시집보낸다. 불과 15살에 가족과 떨어져 대마도로 온 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도인이었고 그나마 그 곳에서 남편의 애정을 받아(남편 역시 그녀의 감화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0년간 생활하였는데,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임란이 종결되어 히데요시파와 도꾸가와 이에야쓰파 사이의 격렬한 권력투쟁과 그에 따른 전투끝에 친정아버지 고니시가 살해당하고, 이에야쓰가 권력을 잡자 요시토시는 대마도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부인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를 나가사키로 돌려 보낸다. 마리아는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떴고, 대마도 주민들은 권력싸움에 희생된 그녀를 기려 이 신사에 합사하여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일본에 유수로 끌려가 쓰시마 도주 가문의 사람인 소 다케유키(동경대 출신)와 결혼하였으나, 어머니 복녕당 양씨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이래 우울증과 신경쇠약,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딸인 마사에가 실종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정신질환은 심해졌고, 1945년 일본 패망 이후로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소 다케유키와 이혼 후 일본에 체류하다가 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고국의 옹주가 대마도로 시집을 오게 됨을 기뻐하며 대마도방문시 한인들이 세운 비이다.
○대마도 역사자료관을 방문하다. 초량왜관 그림과 조선국왕이 대마도주에게 내린 도서인이 있어 사진에 담아 오다. 이 도서인을 소지한 사람만이 왜관과 대마도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 왜관에 대한 기록을 적어와서 기록한다.
■왜관 : 450여명의 대마도인 상주
-1409년 내이포=제포(진해), 부산포에 설치 삼포개항(1426)으로 염포(울산)에도 설치, 각 60명의 왜인 거주
-두모포 왜관 (1543) : 왜란으로 철폐
-영도왜관(1601-1607)
-도모포왜관(1607-1678)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수선사를 방문하다. 최익현(1833-1906) 선생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선생은 을사조약후 1906년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6월에 임병찬선생과 함께 붙잡혀 쓰시마로 끌려오고 그해 12월에 순국하셨다. 고국으로 유해가 돌아가기 전 3일 동안 이 절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동국대 총장을 역임하신 황수영 박사, 단국대 정영호 교수 등이 일본 관계자들과 함께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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