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권진영(權鎭濚) 조선 말기
조선후기의 한학자.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익산군 팔봉면(益山郡 八峰面) 출신으로 황해감사(黃海監司) 추(錘)의 후손이며 교관(敎官) 재정(在政)의 아들이다. 고종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김계종(金啓鍾) 조선 말기
본관은 김해(金海)로 김일손(金馹孫)의 조부인 효절공(孝節公) 극일(克一)의 후손으로 운성(雲成)의 아들이다. 효성과 예의가 뛰어나고 문장과 필법(筆法)이 이름났다.
김용덕(金容悳) 1864(고종 1) ~ ?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당시의 여산현(礪山縣) 출신이다. 서포 만중(萬重)의 후손이며, 참봉(參奉) 종수(宗洙)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를 지냈다.
김용태(金溶泰) 1858(철종 9) ~ 1934
근대의 문장가로 호는 가석(可石)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전주시 동문밖 출신으로 서예가이기도 하며, 기독교 장로로 계문학교(啓文學校)설립자이다. 전 이리중학교장(裡里中學校長) 하정(荷汀) 김한규(金翰圭)의 아버지이며 서예가 소정(小汀) 김병용(金炳用)의 할아버지이다. 정치․경제․문화에 해박했고, 시문과 글씨로 당대를 풍미했다. 경성대동시사(京城大東詩社) 주최 현상시에 응모해 수상하였다. 성격이 후덕호탕하고 다정다감하며, 대인관계도 폭이 넓어 박기순(朴基順), 박성중(朴性重), 서동준(徐東俊), 백남주(白南住), 김화형(金和炯) 등과 예의 바른 친구교제를 하였다. 부모 생전에 곁을 떠나지 않았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식음을 전폐한 채 45일간을 슬피 울었다. 만년에는 나라 잃은 통한을 술로 달래며 살았다. 유고『가석시문집(可石詩文集)』이 있다.
김용태(金溶台) 1863(철종 14) ~ 1913
통정대부 의성(意聲)의 아들로 함열읍 남당리 출신이다. 본관은 금녕(金寧)이며 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다. 평소에 말이 적으며, 성품이 강직했고 의(義)를 소중히 여겼다. 외직(外職)에 나갔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지역민들이 함열읍 남당리에 혜사불망비(惠思不忘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는 찾을 수 없다.
김종호(金鍾昊) 1874(고종 11) ~ 1949
현대의 유학자. 자는 윤청(允淸), 호는 패현(佩弦)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고 익산군 고현리(古縣里; 현 익산시 모현동)출신이다. 성균관 박사(成均館 博士)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투신 순사한 매하(梅下) 김근배(金根培)의 아들이며, 통정대부 현교(顯敎)의 손자이다.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약재(約齋) 송병화(宋炳華),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고, 시와 글에도 뛰어난 저술을 하였으며, 많은 후학을 가르쳤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공의 유고는 다섯 권이 전해지고 이 가운데 『성학십도설집주(聖學十圖說集註)』1권과 『금강산유람기(金剛山遊覽記)』1권이 포함되어 있다.
김취장(金就章) 현종조
조선후기 유학자. 자는 수경(粹卿), 호는 양한당(養閒堂),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여산(礪山)군 출신이다. 현종조의 학자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숙종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남교희(南敎熙) 1865(고종 2) ~ 1945
근대의 사관(仕官). 호는 죽촌(竹村),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익산군 금마면 신용리(金馬面 新龍里) 출신이다. 조선 말기에 여러 고을의 군수(郡守)를 지냈다. 문집으로『죽촌집(竹村集)』필사본 2권 1책이 있다. 시(詩)와 여러 양식의 산문이 들어있다.
남궁제(南宮濟) 효종 ~ 현종
호는 동강(東岡)이며 첨정(僉正) 우(禑)의 아들이다. 우계(牛溪) 성혼(成婚)의 문인으로 본관은 함열이다. 현종조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도학과 효행으로 의금부(義禁府)의 관직(官職)과 교관(敎官)을 제수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현종조에 남대지평(南대持平)을 증직하였고 김제 만경의 남산사(南山詞)에 제향되었다.
■남산서원(南山書院)
전북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에 있는 조선 전기 서원이다. 1574년(선조 7)에 창건하였다가 1890년(고종 7)에 철폐되었던 것을 1970년에 이 지방에서 유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다시 지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였던 유지화(柳志和 : 1599~1680)를 모시고 있었으나 그 뒤 순조 때에 남궁석제(南宮石齊)를 추가 배향하였다. 유지화는 1633년(인조 11) 효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근친하는 일로 귀향하였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이어 통진현감·회덕현감 등에 제수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 뒤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반구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명류들과 경전을 토론하며 만년을 지냈다. 1680년(숙종 6) 호종공신에 추록되고 통정대부에 승서(陞敍)되었으나 조정의 명이 하달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현재 사당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유지화와 남궁제를 기리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향이 모셔진다.
남정식(南廷植) 1838(순조 4) ~ 1906
근대의 한학자. 호는 춘강(春江),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익산군 금마면 신용리(金馬面 新龍里)에 거주하였다. 한학자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문집으로는 『춘강집(春江集)』필사본 7책이 있는데 그 내용은 시(詩)․논(論)․기(記)․서(序) 등이다.
노경호(盧敬鎬) 1848(헌종 14) ~ 1909
자는 치영(致泳)으로 함라면 진목리 출신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대항(大恒)의 증손이다. 영희전 참봉(永禧殿 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선략장군 행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 行龍驤衛副司果), 통정대부 행장릉참봉(通政大夫 行莊陵參奉),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 ,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兼 五衛將), 좌부승지겸 공조참판(左副承旨兼 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고 하나 그 근거는 분명치 않다.
수연(秀演) 1651(효종 2) ~ 1719(숙종 45)
조선중기의 승려. 성은 오씨(吳氏)이며 호는 무용(無用)이다. 고려의 명신인 오연총(吳延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첨사(僉使) 섬무(暹武)이고 당시 용안현(龍安縣) 출신이다. 8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읽었으며, 13세에 부모가 죽자 형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19세에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하여 혜관(惠寬)의 제자가 되었고, 혜공(慧空)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불경을 공부하다가 1673년(현종 14)에 마음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 참선과 교리의 연구에 있음을 느끼고 참선수행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선암사(仙巖寺)의 침굉(枕肱)을 찾아가서 선의 진수를 물어 대오(大悟)하였다. 침굉의 인가를 얻은 다음 1년 동안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여 수행하였고, 1676년(숙종 2)에 침굉과 함께 조계산 은적암(隱寂庵)의 백암(柏庵)을 찾아가서 다시 깨달음을 인정받았다.
그때부터 수년 동안 불경을 열람하다가 신불암(新佛庵)·선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특히 팔영산(八影山) 제칠봉(第七峯) 밑에 초암을 짓고 고행하면서 선정(禪定)을 닦았다.
1688년에 다시 백암을 찾아가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공부하였고, 1689년 봄에는 백암을 도와 『화엄경연의(華嚴經演義)』·『간정기(刊定記)』·『정토서(淨土書)』 등의 간행에 동참하였다. 1692년에는 선암사에서 화엄회(華嚴會)를 열었으며, 1700년 7월에는 백암의 뒤를 이어 조실(祖室)이 되었다.
그 뒤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704년에는 용문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겨 스스로 경작하고 추수하면서 수도하였다. 그 때 호남과 영남의 승려 300여 명이 『화엄경』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의 강의를 청하므로 이에 응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아미타불 염불에 전념하다가 나이 68세, 승랍 51세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다비(茶毘)한 뒤 유골을 모아 부도를 세웠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무용집(無用集)』 3권이 전한다.
■무용집(無用集) 《無用集》은 수연(秀演 1651∼1719)의 문집이다. 수연의 호는 무용(無用)이며, 백암성총(栢庵性聰)의 제자이다. 《무용집》은 2권1책으로, 옹정2년 (雍正 1724) 조계산 송광사 유판본이 전한다. 권上에는 장시·5언절구·7언절구·5언율시·7언율시가, 권下에는 書·序·募緣文·記·疏 등이 있다.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보낸 書가 여러 편이며, 記와 疏가 많다. 序는 찬국옹(餐菊翁)이 쓰고, 門人 약탄(若坦)이 행장을 썼다.
박문웅(朴文雄) 1642(인조 20) ~ 1720(숙종 46)
조선시대 후기의 무신이다. 자는 사위(士偉)이고, 본관은 충주(忠州)로 기수(麒壽)의 현손(玄孫)이며 익산군 용안면(龍安面:당시의 용안현 북구 은입산리龍安縣 北面 銀入山里) 출신이다.
1676년(현종 7)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681년(숙종 7년) 어영청초관(御營廳哨官)이 되었다. 1681년 12월 23일의 삭사시(朔射試)에서 입격하지 못하여 김기훈(金起勳) 등과 함께 전례대로 태형을 받았다. 1703년(숙종 29년) 7월 18일 정방산성별장(正方山城別將), 이후 절충장군으로 승진, 호군 등을 역임했다. 1705년(숙종 31년) 5월 11일 경덕궁가위장(慶德宮假衛將)이 되었다가 이후 병조참의, 병조참지, 비변사당상 등을 역임하였다. 1707년(숙종 33년) 7월 13일 경복궁가위장(景福假衛將)이 되었다가 이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1712년(숙종 40년) 6월 12일 경복궁가위장(景福宮假衛將)이 되었다. 1714년(숙종 40년) 6월 22일 군산첨사(群山僉使)로 부임했다. 관직은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박영수(朴榮壽) 1837(헌종 3) ~ 1893(고종 30)
조선후기의 한학자․서예가. 호는 학하(鶴下)이며 익산군 용안면 중신리(龍安面 中新里) 출신이다.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로 서예(書藝)에 능하였다. 그의 필첩(筆帖)이 전하는 바 내용은 수양론(修養論)으로 그 필력(筆力)이 뛰어났다는 중평이었다.
박재욱(朴載郁) 영조 ~ 정조
호는 성암(誠巖)으로 정숙공(貞肅公) 안신(安臣)의 후손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도량이 크고 효우(孝友)가 뛰어났다. 윤병계(尹屛溪)에게 수업하고 성리학을 강구하였다. 정조 때에 왕의 특명을 받아 송환기(宋煥箕) ․ 맹진벽(孟鎭壁) ․ 이현민(李顯民)등과 함께 죽림서원(竹林書院)에서 우암집(尤庵集)을 교정하였다. 현량(賢良)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선문주(宣聞周) 1790(정조 14) ~ ?
조선후기의 사관(仕官). 자는 성국(聖國), 본관은 보성(寶城)으로 익산군 여산(礪山) 출신이다. 덕운(德運)의 아들로 58세 때인 1847년(헌종 13)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올랐다.
소성집(蘇成集) 1711(숙종 37) ~ 1766(영조 42)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수졸재(修拙齋)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으로 문집『수졸재유고(修拙齋遺稿)』 필사본 1책이 전한다.
소승규(蘇昇奎) 1844(헌종 10) ~ 1908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왕궁면 발산리(王宮面 鉢山里) 출신이다. 저서 『난곡유고(蘭谷遺稿)』가 전한다. 그 내용은 시(詩)․서(序)․기(記)․설(說)․제문(祭文)․가장(家狀)․부록(附錄)등으로 이루어졌다.
■난곡유고(蘭谷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소승규(蘇昇奎)의 시문집. 4권 2책. 활자본. 1937년에 증손 병택(秉澤)·진정(鎭貞)과 삼종질 진환(鎭晥) 등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소규정(蘇奎正)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전태춘(全泰春)의 발문이 있다. 전주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3은 시 368수, 권4는 서(序) 5편, 기 2편, 설 1편, 제문 3편, 가장 4편, 부록으로 가장 1편, 묘갈명 1편, 제문 2편, 장례원입안문(掌禮院立案文) 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주로 망국의 한을 달랜 강개한 시로, 때를 잘못 만나 뜻을 펴지 못함과 나라가 기울어져도 자기가 바로잡을 수 없음을 한탄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는 정유년(1897) 4월 14일부터 30일까지 부안의 변산반도에 있는 명승고적 등을 두루 답방하면서 느끼고 겪은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선인들이 느낀 풍취를 회상하며 그의 문학적 재질을 구가한 기행문이다.
「몽유변산기(夢遊邊山記)」는 꿈속에서 신선을 따라 변산의 설경을 돌아보고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실제로 본 것처럼 표현한 글이다.
「성선설(性善說)」에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착하다고 지적, 순자의 성악설과 기독교의 원죄설을 부정하면서 공자의 도와 양립하지 못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소진남(蘇鎭南) 1869(고종 6) ~ 1939
근대의 사회운동가. 자는 윤백(允伯),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왕궁면 흥암리 출신이다. 태규(泰奎)의 아들이며 돈영(墩永)의 아버지로 문량공(文良公) 소휘면(蘇輝冕)의 문인이다. 구한말 동장(洞長)을 역임했다. 본성이 강의(剛毅)하고 재질이 출중하여 불의를 보면 충고 또는 규탄(糾彈) 설복(說服)하여 사회풍속 순화에 공이 많았다. 완주군 이서면 이문리에 있는 종산(宗山; 일명 벌명당) 120정보(町步)가 관리 소홀한 틈에 불초자손(不肖子孫) 소만화(蘇萬化)가 일인좌백(日人佐伯)에게 저당하고 소유권까지 좌백(佐伯)에게 넘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진남(鎭南)은 족숙(族叔) 병규(昺奎)와 종회(宗會)를 소집하고 좌백(佐伯)과 재판 끝에 승소하였다. 소씨들은 재판 날이면 말과 나귀를 타고 혹은 도보로 전주재판소에 수백 명씩 몰려가 시위방청(示威傍聽)을 하였다. 사람들은 벌집을 건드려 벌떼가 몰려왔다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일인재판장도 경탄하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소씨 문중에서는 이 사실을 족보(族譜)에 기재하고 대대로 칭송하고 있다.
소진덕(蘇鎭德) 1869(고종 6) ~ 1943
근대의 한학자. 자는 명숙(明淑), 호는 지산(遲山)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왕궁면 동촌리(王宮面 東村里) 출신이다. 문집『지산유고(遲山遺稿)』인쇄본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詩)․부(賦)․서(序)․제문(祭文)․묘지(墓誌)․행장(行狀)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진석(蘇鎭碩) 1869(고종 6) ~ 1910
근대의 한학자. 호는 일암(一菴), 본관은 진주(晉州)로 소휘면(蘇輝冕)의 문인이며 익산군 삼기면 용연리(三箕面 龍淵里) 출신이다. 덕행과 문장으로 알려졌다. 문집으로는『일암유고(一菴遺稿)』인쇄본 3권 1책이 있다. 내용은 시(詩)․서(序)․제문(祭文)․부록(附錄) 등이다. 전사자 형태의 목활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소진원(蘇鎭元) 1873(고종 10) ~ 1942)
근대의 한학자. 호는 소송(小松),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왕궁면 동촌리(王宮面 東村里) 출신이다. 저서로는『소송유고(小松遺稿)』인쇄본 4권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詩)․논(論)․부록(附錄)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수중(蘇洙中) 1753(영조 29) ~ 1802(순조 2)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숙행(叔行),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이다. 대사간(大司諫) 세량(世良)의 9대손으로 성천(聖天)의 아들이고 공술(公述)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이다. 1774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숭능참봉(崇陵參奉)을 거쳐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였다. 선정목민(善政牧民)을 하여 군민이 입비송덕(立碑頌德)하였다. 종9대조인 문정공 양곡(文靖公 陽谷)의 졸후(卒後) 241년인 1803년에 7권의 문집을 중간(重刊) 한 바 있으며 대제학 박사원이 서(序)하고 종후손(從後孫) 수중(洙中)이 발(跋)하였다.
소시만(蘇始萬) 1734(영조 10) ~ 1761(영조 31)
조선후기의 학자. 자는 원보(元甫), 호는 국헌(菊軒)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이다. 성집(成集)의 아들로 일찍이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달하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력(星歷)․병술(兵術)․음률(音律)에도 능했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문집으로『국헌집(菊軒集)』인쇄본 2권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수리저설(數理箸設)․서(書)․책(策)․시(詩)․부록(附錄)으로 이루어졌다.
■국헌집(菊軒集)
조선 후기의 학자 소시만(蘇始萬)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808년(순조 8) 손자 환술(煥述)이 편집한 것을 1835년(헌종 1)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홍석주(洪奭周)와 이득일(李得一)의 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상권에 「수리저설(數理著說)」, 하권에는 시 2수, 서(書) 3편, 책(策) 1편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하권 부록으로 증시(贈詩) 5수, 제문 5편, 아우 시운(時運)이 쓴 가장(家狀) 1편이 있다.
「수리저설」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있는 소옹(邵雍)의 수리설을 비롯하여 기수설(朞數說)·음양설 및 일행월행(日行月行)의 역법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설명하고, 또한 정호(程顥)·장재(張載) 등의 설도 많이 원용하고 있다. 이밖에도 이탈리아 학자 샤바틴(Shabathin de Ursis)이 설명한 풍(風)·운(雲)·상(霜)·노(露)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인용하여 선유들의 설과 비교해서 설명한 부분도 보인다.
이 글은 모든 현상을 수리로 다루어 원회운세(元會運世)로 천지소장(天地消長)의 이치와 태고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설명하고, 이어 천체·지구·회삭(晦朔)·조석(潮汐)·율력·절후·일월식(日月蝕) 등의 조항으로 나누어 그 실태와 원인을 수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 「답송무숙덕수(答宋茂叔德秀)」라는 책에서는 경전에 관한 견해와 학문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책은 단전(丹田)에 나라가 있는데 그 임금은 천군(天君)이라고 시작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서 결정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소영규(蘇英奎) 1843(헌종 9) ~ 1878(고종 15)
조선후기의 한문학자. 호는 남파(南坡),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이다. 36세에 객지에서 죽었으나 학문으로 알려졌다.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쓴 『연안김씨 유훈(延安金氏 遺訓)』이 전하는바 그 내용은 혈육도 없이 남편이 객사한 지극한 원한과 자신이 죽은 후의 얼을 조카에게 부탁한 것으로 한글본이다.
소후산(蘇后山) 1630(인조 8) ~ 1698(숙종 24)
조선후기의 사관(仕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금마면 서고도리(金馬面 西古都里) 출신이다. 동도(東道)의 아들로 음사(陰仕)로 장예원 사평(掌隸院 司平)을 지냈다. 저서로『사평공유고(司平公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송관휴(宋觀休) 1746(영조 22) ~ 1825(순조 25)
조선후기의 관인. 자는 자명(子明), 본관은 진천(鎭川)으로 익산 출신이다. 우(愚)의 13세손으로 아버지는 학손(學孫)이다.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고 학행이 높아 벼슬길에 올라 여러 요직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묘는 익산군 왕궁면 동봉리(王宮面 東鳳里)에 있다.
송병우(宋炳雨) 1874(고종 11) ~ 1944
본관은 진천(鎭川)으로 자는 사형(士亨)이며, 민식(珉植)의 아들이다. 일찍이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역임하고, 국운이 기울자 귀향하여 사회사업과 치산(治産), 자질(子姪)의 교육에 힘썼다. 함벽정(涵碧亭)을 건립하고 왕궁저수지를 구축하였다.
■함벽정(涵碧亭)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의 왕궁저수지(王宮貯水地) 수문 옆에 있는 누각으로 전북유형문화재 제127호이다. 1930년 왕궁저수지의 제방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이 고장의 부호였던 송병우(宋炳宇)가 건립하였다. 왕궁저수지는 금마면에서 동쪽으로 약 5km 들어간 곳에 있는 우북산(紆北山)과 도순산 계곡에 있는 저수지로, 몽리 면적이 넓은 큰 저수지이다. 주변의 연지(蓮池)는 중국에서 처음 가져온 백련(白蓮)을 심어 조성한 것이다. 저수지 수문 옆에 높이 50m 정도의 바위가 있어 함벽정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함벽정 주변의 바위 위에 흙을 쌓고 그 주위를 돌로 둘러싼 다음 여기에 벚꽃나무를 심어 놓음으로써 봄이 되면 저수지의 물 위로 만발한 벚꽃 그림자가 드리워져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정자는 이익공계(二翼工系)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정각으로는 큰 규모에 속한다. 특히, 기둥 위의 공포(拱包)는 이익공계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평주(平柱)위 공포의 쇠설〔牛舌〕이 전면으로만 돌출되는 데 비해 이 건물에서는 좌우 대각선 방향으로도 돌출시켜 마치 귀 기둥에서의 공포결구수법(貢包結構手法)과 같이 짜여 져서 특이한 형태를 이룬다.
송기호(宋基鎬) 철종 ~ 고종
근대의 한학자. 호는 현곡(玄谷),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익산군 출신이다. 송례(松禮)의 후손으로 좌승지(左承旨) 성일(成一)의 7세손이다. 고종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평생 안빈낙도하며 유유자적하였다.
송창(宋昌) 1633(인조 11) ~ 1706(숙종 32)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우곡(藕谷)으로 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출신이다. 영진(英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흥시(興詩)이고, 아버지는 유전(有銓)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정(李瀞)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에 사략을 읽고, 12세에 고문진보(古文眞寶) 등에 능통했다. 1657년(효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658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으며, 그 뒤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과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에는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1663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166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668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1672년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1674년 사간원사간을 지냈다. 같은 해 가을 숙종 즉위 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바 있다. 1675년(숙종 1) 승지로 있을 때 파직당한 김만중(金萬重)을 비호하다가 파직 당하였다. 1680년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686년 대사간이 되었다. 1697년 도승지, 1702년 한성판윤, 1704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706년 좌참찬으로 있다가 죽었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는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를 주관하게 하였다. 운명하기 전에 세 가지 유언을 남겼는데, 첫째는 시호를 받지 말 것이며, 둘째는 만사를 받지 말 것이며, 셋째는 묘소 앞에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우지 말도록 하였으니 그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관이 평하기를 “내외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뚜렷이 드러난 바는 없으나, 성품이 본시 고요하고, 벼슬에 임해서는 마음을 작게 가지니,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고 하였다.
▣국조보감 제53권 숙종 31년(1705) 2월
○판부사 서문중(徐文重), 평천군(平川君) 신완(申琓), 좌의정 이여(李畬), 우의정 이유(李濡), 호조 판서 조태채(趙泰采), 형조 판서 강현(姜鋧), 사직 민진후(閔鎭厚), 우참찬 송창(宋昌), 예조 판서 윤세기(尹世紀), 병조 판서 유득일(兪得一), 좌윤 김석연(金錫衍),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 동지중추 이우항(李宇恒), 공조 판서 이광적(李光迪), 예조 참판 유집일(兪集一)이 빈청(賓廳)에 다 모여 중묘(中廟)ㆍ선묘(宣廟) 양조에서 이미 행한 예전을 따라 칭경(稱慶)과 진하(陳賀)를 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전에 초야에서 올린 상소가 이 일을 가지고 요청한 것이기에 나의 속마음을 다 토로하여 유시하였다. 이어서 작년에 써 두었던 것을 보여 주었는데, 대개 시(詩)는 뜻을 표현한 것이니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따를 뜻이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글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또 글을 지었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서 보여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자가 세 차례나 상소하여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경들이 이런 것을 통하여 나의 뜻이 확고한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터인데도 오히려 계속 요청하고 있으니, 나는 서로 뜻이 부합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긴다.
또 아뢴 말 중에 중묘ㆍ선묘 양조의 고사를 인용한 것은 더욱이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아,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왕업을 중흥하고 사직을 보존한 공업(功業)이 빛나시는 분이다. 그러나 나같이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스스로 존대하게 하고 또 칭경하는 것을 태연히 받아들인다면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요청이 나오고부터 침식을 잊고 거의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오늘날 하늘이 경계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또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누가 알겠는가. 경들은 나의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본받아 속히 무익한 요청을 정지하여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신만엽(申萬葉) 순조~ 철종
조선후기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 출생으로 고창에서 거주하였다. 송흥록·모흥갑․염계달의 후배이고, 김제철·박유전과 동년배(同年輩)인 신만엽은 당대 8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명창이다. 석화제라는 경쾌한 소리제를 잘했기 때문에 사풍세우(斜風細雨) 신만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만엽의 특장은 토별가(兎鱉歌)이고, 후세에 전하는 그의 더늠은 토별가 중 토끼 배 가르려는 대목이다. 수궁가 중 토끼가 세상에 나오는 대목을 잘했다. 중중모리장단에 "석화제로 가자 어서가"로 시작하는 '소지노화'(笑指蘆花)라는 대목은 경쾌하고 화창한 석화제가 되어 가야금병창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에서 취과양주(醉過楊州) 두목지(杜牧之)로 비유한 그의 소리가 구천은하(九天銀河)에서 떨어지는 백로와 같이 경쾌하고 화창했음을 이른 것이다. 박만순이 방창(倣唱)하고 전도성이 전창(傳唱)한 대목은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에 전한다. 송흥록(宋興祿)·주덕기(朱德基)·신만엽·김계철(金啓喆)·송계학(宋啓學) 관련 기사는 안민영(安玟英)의 『금옥총부』(金玉叢部 1885) 권141에 이렇게 전한다."임인년(1842) 가을에 우진원(禹鎭元)과 함께 호남 순창(淳昌)에 내려갔다가, 주덕기의 손을 잡고 운봉(雲峰)의 송흥록을 찾아갔다. 신만엽·김계철·송계학 등 일대의 명창들이 마침 그 집에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함께 머물며 수십 일을 질탕하게 보낸 뒤에 다시 남원으로 향했다."
신민집(辛旼集) 고종 ~ ?
호는 학재(學齋)이고 익산시 춘포면에서 태어났다. 영원군(寧原君) 경영(慶英)의 9세손으로 통정대부 세락(世洛)의 아들이다. 효우(孝友)가 빼어나고, 의학을 강구(講究)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담월사(潭月詞)
종 목 비지정문화재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 담월마을 뒤쪽 대나무 숲 안에 있다. 1909년, 조선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신경진의 후손 신민집이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1926년 현재의 사당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건물은 동남쪽으로 삼문이 나 있고,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처음에는 영월신씨 집안의 가묘로 출발하였으나, 이후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모시고 여기에 인조 때의 무신 신경영을 추가하면서 1947년부터 지역 내 유림들이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제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지낸다.
오명증(吳命增) 1659(효종 10) ~ ?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익보(益甫), 본관은 함양이며 이조참판 치선의 9세손으로 두환(斗煥)의 아들이다. 여산현(礪山縣) 출신이며 1684년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99년(숙종 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강진현감(康津縣監),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24년(1698) 10월 15일
<관학 유생에게 강경하여 시험하고 오명증․이후에게 급제를 내리다.>
임금이 친히 관학(館學) 유생(儒生)에게 강경(講經)을 시험하고, 오명증(吳命增)·이후(李垕)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유공열(劉公烈) 1864(고종 1) ~ 1927
조선후기의 판소리 명창으로 익산 출신이다. 겨우 9살 때 가요에 능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 성악의 신동(神童)으로 알려졌다. 15세 때 박만순의 문하에서 수년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소리를 익힌 후, 독공으로 연마하다가 운봉(雲峰)과 남원(南原)간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5년 동안 정진했다.
30세 때 전주 통인청(通引廳) 대사습장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세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도성, 송만갑과 동배이며, 김세종, 이날치, 정창업은 그의 선배이다. 이들 선배와 동료들을 추종하면서 실제적 기량을 닦고 견문을 넓혀 점차 소리가 완숙해졌고 명성이 원근에 쟁쟁해졌다. 40세를 전후하여 상경하여 원각사(圓覺社), 광무대(光武臺) 등에서 김창환, 송만갑과 어깨를 같이 하여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고종, 순종 양대에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가한 생활로 만년을 보냈다. 그는『춘향가』,『심청가』에 능하였고 『춘향가』 중에서도 이별하는 대목의 이별가가 그의 특장이었다.
유문원(柳文遠) 조선 중기
황등면 도촌리 출신으로 호(號)는 삼우당(三友堂)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재종제로 학문(學問)이 뛰어났다. 유도(儒道)를 철저히 지키고 교육에 힘썼다.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배향되었다.
■동림서원(東林書院)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동림마을에 있었던 서원이다.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형원(柳馨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2년(숙종 38) 김서경(金瑞慶)과 유문원(柳文遠)을 모셨으며, 그 뒤 김회신(金懷愼)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유허지에 ‘동림사지(東林祠址)’라는 비석만 남아 있다.
윤광보(尹光普) 19C ~ 20C
죽재(竹齋) 인함(仁涵)의 11세손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을사조약(1905)때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1910년 국권 피탈(被奪)후 간도(間道)로 망명하였다.
윤희병(尹羲炳) 1872(고종 9) ~ 1936
조선말기의 한학자. 호는 운초(雲樵),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익산군 낭산면 호암리(朗山面 虎岩里) 출신으로 고종 때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문집『운초집(雲樵集)』1책이 전한다. 내용은 주로 시(詩)다.
이기한(李起漢) 1630(인조 8) ~ ?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여정(汝挺), 본관은 전주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현손이며 창선대부 진한부정(彰善大夫 晋漢副正) 윤경의 아들이다. 익산군 출신으로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71년(숙종 12)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봉사(奉事), 사간원(司諫院)과 예문관(藝文館)의 직강(直講)을 지냈다.
이석(李錫) 1769(영조 45) ~ ?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정지(精之), 본관은 전주로 익산군 출신이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의 8세손으로 생원 득일(得一)의 아들이다. 1795년(정조 19)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01년(순조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청송부사(靑松府使),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역임했다.
이석우(李碩禹) 조선후기
조선말기의 한학자. 호는 옥강(玉岡), 본관은 전주로 익산군 출신이며 문정공(文正公) 승길(承吉)의 후손으로 순기(順基)의 아들이다. 음직(陰職)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향리에 은거하여 교육과 구휼(救恤)에 힘썼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옥강거사(玉岡居士)라 하였다.
이우상(李愚祥) 고종 ~ ?
조선후기의 무신. 호는 갈은(葛隱), 본관은 전주(全州)로 익산군 출신이다. 회안대군(懷安大君)의 후손이고,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회신(會新)의 아들이다.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전 수문장(慶基殿 守門將)으로 있었는데 갑오동학혁명 때 태조의 영정(影幀)을 경기전에서 옮기던 중 날이 저물어 법사산(法史山) 회안대군 묘각(墓閣)에서 날을 세워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일시 모셨다가 후에 다시 본전(本殿)으로 옮겼다.
이중영(李重榮) 1639(인조17) ~ 1721(경종1)
자는 화중(華仲)으로 진사 광한(光漢)의 아들이며, 금마면 신용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1669년(현종 10년) 진사시(進仕試)에 급제하여 진사(進仕)가 되고 벼슬이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이르렀다.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하였다.
이희선(李羲善) 1874(고종 11) ~ 1945
근대의 한학자. 자는 양호(養浩), 호는 미산(彌山) 또는 소초(小樵)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충무위 부사과(忠武衛 副司果) 봉구(鳳九)의 아들이며, 창로(昶魯)의 아버지로 익산군 금마면 산북리(金馬面 山北里) 출신이다. 용양위 부사용(龍驤衛 副司勇)을 지냈으나 국말(國末)의 혼란기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 나가지 않았다. 문집 『미산시고(彌山詩稿)』 인쇄본 1책이 전하는 바 모두 시(詩)다.
정관식(鄭寬植) 1845(헌종 11) ~ 1901(고종 38)
근대의 한학자. 자는 화국(華國), 호는 은곡(隱谷)으로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익산군 북일면 출신으로 판서 덕성(德成)의 후손이며, 백주(伯周)의 7세손으로 제구(濟九)의 아들이다. 효우(孝友)가 돈독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그는 문묘유사(文廟有司)로 전주에 와 있었는데, 때마침 동학군이 전주에 돌입하여 홍계훈(洪啓薰)이 거느린 관군과 대전하여 쌍방에서 퍼부은 탄환이 비 오듯 하자 문묘유사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달아났으나 오직 홀로 끝가지 성전(聖殿)을 지켰다.
정상두(鄭祥斗) 1651(효종 2) ~ 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영일(迎日)로 자는 헌서(軒瑞)이며 병조좌랑 숙주(叔周)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유학을 공부하여 큰 뜻을 펴려 하였으나 그의 형 상룡(祥龍)이 항소(抗疏)하여 유현(儒賢)의 무(誣)를 받아 북변(北邊)에 찬배(竄配)됨에, 그는 붓을 던져버리고 궁마(弓馬)를 익혀 무과에 급제하였다.
관료생활 30년에 내직으로는 비변사낭청· 도총부도사를 역임한 뒤 훈련원부정 ․ 금군장· 사복내승(司僕內乘)· 총융청초관(摠戎廳哨官)· 금위영천총· 훈련도감천총· 금위영별장· 어영청별장· 훈련도감별장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전라병마우후(全羅兵馬虞候)· 해미현감과 장흥· 평산· 춘천· 회령의 부사와 전라우수사· 경상우병사 등을 역임하고 가선(嘉善)으로 승계하여 회령의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몸가짐은 유사(儒士)와 같이하여 조의(朝議)에서 심히 중히 여겼으며, 여러 차례의 청선(淸選)으로 주진(州鎭)에 나가서 그 치적이 컸으며, 특히 변방방위에 그 능력이 인정되었다.
정상룡(鄭祥龍) 1643(인조 21) ~ 1709(숙종 35)
조선후기의 문신. 별명은 상룡(尙龍)이고 자는 인서(麟瑞), 호는 백봉(栢峰),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익산군 북일면 출신으로 통훈대부 숙주(叔周)의 아들이고 상린(祥麟)의 아우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6세 때 이미 문자를 해득했다. 1669년(현종 10)에 진사가 되고, 숙종 때 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직언을 하여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가 되었다. 전주 인봉사(麟峰祠)에 제향되었다.
정상린(鄭祥麟) 1637(인조 15) ~ 1698(숙종 24)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인서(仁瑞), 호는 배산(盃山)으로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익산군 북일면 모인리 출신이다. 통훈대부 숙주의 아들이며 국빈의 아버지이고 상룡의 형이다. 1669년(현종 10)에 성균생원이 되었다. 1675년(숙종 1) 을묘사화 이후 관계(官界)에 나아가기를 단념하고 배산 밑에 은거하며 배산거사(盃山居士)라 하며 날마다 선비들과 도의를 강구하고 연마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정종식(鄭琮植) 1863(철종 14) ~ 1930
근대의 문신, 자는 경도(敬道), 호는 가은(稼隱)으로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익산군 북일면(北一面) 출신이다. 판서 덕성(德成)의 후손으로 지평(持平) 제호(濟鎬)의 아들이며 모은(慕隱) 동식(東植)의 아우로 효우가 극진했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이 되었다하나 확실치 않다.
정헌규(鄭憲圭) 19세기
호는 학운(學雲)으로 백봉(栢峰) 상룡(祥龍)의 8세손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아버지는 찬선(燦善)으로 입제(立齊) 송근수(宋近洙)의 문인이다. 심명(心名) 송병순(宋秉珣)과 교유하였다.
차언보(車彦輔) 1712(숙종 38) ~ 정조
조선후기의 문신. 호는 성암(性菴),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익산군 출신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양징(亮徵)의 아들로 영조(英祖) 35년(17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775년(영조 51) 64세의 나이에 정시 문과(庭試 文科)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을 지냈다.
최우락(崔禹洛) 1869(고종 6) ~ 1936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사범(士範), 호는 송사(松史), 본관은 강화이다. 평창군수 인규(寅奎)의 손자이며 통덕랑(通德郞) 종황(鍾黃)의 아들로 익산 출생이다. 1892년(고종 29)에 별시문과(別試 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이듬해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1899년(광무 3) 홍문관(弘文館) 시독(侍讀), 용안(龍安)과 이원(利原)군수를 지내고 1910년 정3품으로 승차(陞次)하였으나 그해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향리에 은둔하였다. 구한말 불모의 땅을 개간하여 전답을 일구고 익산 일대에서 만석지기의 부(富)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농토를 모두 일본인 농장지주에게 빼앗기고 울분을 머금은 채 살다가 죽었다.
한전(韓典) 1647(인조 25) ~ ?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중후(仲厚),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익산군 출신으로 의길(宜吉)의 아들이다. 1679년(숙종 5)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익교(韓翊敎) 1868(고종 5) ~ 1956
근대의 한학자. 호는 간은(艮隱), 익산 왕궁면 광암리(王宮面 光岩里) 출신으로 한말에 경학원(經學院) 강사를 지냈다.『간은유고(艮隱遺稿)』필사본 5권 1책이 문집으로 전한다. 내용은 시(詩)․서(序)․기(記)․제문(祭文)․묘지(墓誌)․행장(行狀) 등이다. 문집에는 경학원 강사로 재직 중 정부 요인들과 주고받은 문답도 기록되어 있다.
홍시연(洪時淵) 1769(영조 45) ~ 1843(헌종 9)
조선후기의 서예가. 자는 덕현(德顯), 호는 유무재(有無齋)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익산 출신으로 철종 때 생원(生員)이 되었고 서예에 능했다.
홍재하(洪在厦) 1846(헌종 12) ~ 1869(고종 6)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유죽(庾竹)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익산군 금마면(金馬面) 출신으로 영상(領相) 서봉(瑞鳳)의 후손이며 상호군(上護軍) 병제(秉濟)의 아들이고, 소휘면(蘇輝冕)의 문인이다. 24세에 요절했으나 문명(文名)이 있고 서예에도 능했다고 한다. 문집 『유죽유고(庾竹遺稿)』 필사본 1책이 전한다.
근현대인물
강병식(康秉植) 1953∼1988
대한민국 육군장교. 오산면 신지리 출신으로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오산남초등학교, 이리 동중학교를 거쳐 이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75년 육사 31기로 장교로 임관하였다.
1988년 대대장으로 최전방 승리부대에서 근무할 때 적의 초소에서 1.2km떨어진 철책선 보강작업 중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조경보 보조물 빈병이 지뢰위로 넘어지자 대대장인 그는 ?엎드려!?하고 소리치고는 지뢰 위로 몸을 덮쳐 부하 14명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뒤따르던 이동진 중위도 함께 산화하였다. 위험한 지경에서 병사들에게만 작업을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대대장인 그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부하들을 구함으로서 강인한 군인정신과 남다른 희생정신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리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부하들을 구하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거룩한 희생을 높이 기리고자 모교인 이리고등학교 서편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989년 육군 승리부대에서도 각계의 성금으로 높이 4.5m의 시멘트 탑에 화강암을 붙여 고인들의 생전 모습을 재현하였고, 후면에는 부하사랑의 비문을 새긴 추모비를 세웠다. 국군묘지에 안장되고 대령으로 추서되었으며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강성주(姜盛周) 고종 ~ ?
치백(致伯)의 아들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여 3년형을 받았다.
강세형(姜世馨) 1899 ~ ?
현대의 정치인, 철학자. 익산군(益山郡) 출신.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 및 동경 상지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베를린(伯林)대학 철학과를 졸업(철학박사)한 후, 동국대학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독일통신사(OCB)부사장, 국방부 정훈국장을 지내고 대한학술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익산을 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며 외무위원장을 역임했다.
강세형 전 의원은 세 명의 처남이 있었는데 ?담양삼형제?의원으로 유명하다. 둘째 처남 김문용 씨가 전남 담양에서 제헌의원 때 먼저 입후보했으나 고배를 마시자 큰처남 김홍용 씨가 2대 때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 홍용 씨는 북한군에 학살당하고 보궐 선거에서 동생 문용 씨가 당선돼 남은 임기를 이어갔다. 문용 씨는 3대 때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는데 셋째 처남 김성용 씨가 두 형의 뒤를 이어 정계에 입문했고 6, 7, 9대에 당선된다. 강세형 전 의원의 처인 김삼순 여사(1909~2001 균학자)의 동기는 3남 4녀인데 7남매 중 4명이 ?의원 가정?을 이룬 셈이 되었다. 또 김삼순 여사의 동생인 김사순 여사의 아들이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15, 16, 18대 의원)여서 이회창 총재는 결국 외삼촌 세 명과 이모부를 국회의원으로 둔 셈이 되었다.
김양복(金良福) 조선말기
웅포면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은장식(銀裝飾) 세공(細工)솜씨가 뛰어나 궁중에 들어가 왕비, 후궁, 궁녀들의 은장식품만을 전문으로 만든 명은장(名銀匠)이었다. 함열 구읍지(舊邑誌)에 함열 삼기(三奇)로 명필(名筆) 서홍순(徐弘淳), 명창(名唱) 송흥록(宋興祿), 은장(銀匠) 김양복(金良福)을 꼽았다.
김용국(金容國) 고종 ~ 1920
대한제국시기의 의병이며 승려이다. 법명은 경봉(鏡峰), 익산군 출신으로 1908년 무주군 적상면(茂朱郡 赤裳面)에 있는 적상산(赤裳山)에서 의병장 노원섭(盧元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여명을 거느리고 수치의 전투에서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했다. 후에 패전하여 피신하던 중, 그 해 11월에 인천 오산리(仁川 梧山里)에서 노원섭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때 노원섭은 영동(永同)에 압송되어 총살당했으나 김용국은 탈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치옥(金致玉) 1889 ~ 1927
근대독립운동가. 익산군 오산면(五山面) 출신. 1918년 배은희(裵恩希)목사와 협의하여 종교인과 일반인을 규합, 지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월 10일 익산에서 이정(李挺)․이병석(李秉釋)․박사국(朴士國)․정영모(鄭永模)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대한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어 선두에 세우고 2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 해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하여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찌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고 반박하며 고등법원까지 상고 항쟁하였으나,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처하게 되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와 정신이상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에 별세하였다.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김학순(金學純) 1876 ~ 1949
근대의 한학자. 호는 후송(後松),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익산군 팔봉면 용제리(八峰面 龍堤里; 현 익산시) 출신이다. 문집 『후송유고(後松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詩)․서(書)․서(序)․잡저(雜著)이다.
김한규(金翰圭) 1891 ~ 1981
현대의 교육가, 서예가. 호는 하정(荷汀),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용태(溶泰)의 아들로 17세까지 한문학을 배웠다.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서 출생하였으나 1916년에 이리(裡里)로 이사하여 익산시 동산동(銅山洞)에서 오래 살았다. 1920년 익산군 북일면 신리(北一面 新里)에서 북신서당(北新書堂)을 세워 교육에 힘쓰다가 다음 해 북신서당을 사립계문학교(私立啓文學校)로 승격시켜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1944년까지 교장직을 맡았다. 1948년 이원용(李源鏞)과 함께 이리동문중학교(裡里東門中學校; 裡里商業學校 前身으로 현재는 裡里中學校)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1년에는 유지들과 더불어 북창교회 내에 대성학원(大成學院)을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 해 이리 농과대학(현 전북대 농과대학)설립위원회 회장직도 맡았다. 한문과 서예에 능하여 다섯 차례나 서예전을 가졌다. 삼백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저서에 『하정문집(荷汀문집)』,『하정설교집(荷汀說敎集)』이 있다. 김한규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작품에는 전혀 종교적 풍취가 없고 오히려 전통적인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적인 취향이 보인다.
김화곤(金華坤) 1899 ~ 1944
근대의 독립운동가.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 일본 동경 정측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재학 중에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서울과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군자금 모금운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1980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노승국(盧承國) 1879(고종 16) ~ 1942
자는 응순(應順)으로 함라면 진목리 출신이고 경호(敬鎬)의 아들이다. 본관은 교하(橋下)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를 지냈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노승렬(盧承烈) 1887(고종 24) ~ 1940
함라면 진목리 출신으로 본관은 교하(橋下)이다. 1902년(광무 6)에 통신사궁내부주사(通信司宮內府主事)가 되었고 뒤에 판임관(判任官) 9등에 서품(敍品)되었다고 하는데 분명치 않다.
문용기(文鏞祺) 1878 ~ 1919
근대독립운동가. 호는 관재(寬齋),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익산군 오산면(五山面) 출신이다.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취규(聚奎)의 아들이다. 그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목포의 짠 와킨스중학을 졸업하고 김성수(金性洙), 김구(金久)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군산영명학교(群山永明學校)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이리 지방에는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상의하고 사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고, 이날 이미 일제가 헌병과 보병부대 병력을 강화하여 대비하고 있어서 양측의 필사의 대결이 불가피 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자,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 군중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시 일본의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했으나 시위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이날 거사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의 거룩한 독립정신은 4월 5일 이후 군내 각지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의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고자 1949년 4월 29일 이리시민 일동의 이름으로 그의 순국현장인 익산시 주현동(珠峴洞) 115번지에 <殉國烈士碑>가 세워졌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직접 비문을 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77년 건국포창을 추서하였다.
박기상(朴岐爽) 1888 ~ 1934
근대의 독립운동가. 이명(異名)은 사국(士國), 본관은 밀양(密陽), 익산군 출신으로 병돈(秉敦)의 아들이다. 1919년 3월 10일 이정(李挺)․이병석(李秉釋)․정영모(鄭永模) 등과 함께 여산면(唳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이정, 이병석과 함께 여산면 원수리(源水里) 정영모의 집으로 주민들을 불러놓고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한 뒤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어 세우고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이해 5월 19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을 했다.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도현(朴道賢) 고종 ~ 1919
독립운동가, 기독교인으로 익산군 오산면(五山面) 출신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 시장(市場)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된 큰 시위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고 총검을 들고 돌격하여, 주동자급인 박도현을 비롯한 문용기(文鏞祺)․박영문(朴泳文)․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이 현장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이 때 시위는 매우 치열해서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에 ?한 사람(문용기)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배병언(裵炳彦) 고종 ~ 1919
무열공(武烈公) 현경(玄慶)의 후손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919년 3․1운동 때 강경에서 시위하다가 왜경에게 붙잡혀 참살당하였다.
배병훈(裴炳勳) 고종 ~ 1919
아버지는 윤흥(允興)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919년 3․1운동 때 강경에서 시위하다가 왜경에게 맞아 사망하였다.
배헌(裵憲) 1896 ~ 1955
정치가. 국회의원으로 익산 출신이다. 1913년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소재하는 신흥학교(新興學校)에 입학하여 독립성취를 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고 1917년부터는 신흥무관학교 학우단(學友團) 토론부장이 되어 혁명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군자금 조달과 무기구입 등에 활동하던 중 1924년에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였다. 동아일보 기자가 되어 민족지의 언론창달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전북기자대회(全北記者大會)와 신간회 운동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가 불기소 출옥하였다. 그 후 상업을 경영하였고 전북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지내다가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초대 국회의원(제헌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제헌국회의원이다.
서상선(徐尙善) 1888(고종 25) ~ 1937
현대의 한학자. 자는 봉규(奉圭), 호는 우당(藕塘), 본관은 부여(扶餘)로 익(益)의 후손이며 기홍(基鴻)의 아들이다. 익산군 왕궁면 발산리(王宮面 鉢山里) 출신으로 소진석(蘇鎭碩)의 문인이다. 경학(經學)에 밝고 학행이 돈독하여 사람들이 익산향교에 전교(轉校)로 천거하였다. 여러 문하생을 길러냈다.
서승일(徐承一) 1900 ~ 1979
현대의 애국투사. 자는 성일(聖日), 호는 일호(一湖), 본관은 부여(扶餘)로 익산군 용안면 송산리(龍安面 松山里) 출신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거사하여 혹형을 받았다.
서정만(徐廷萬) 1889(고종 26) ~ 1919
근대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달성으로 익산군 출신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정오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던 중 일본 헌병대와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군중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했지만, 시위 대열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독립만세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이에 일제는 수백 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을 동원하여 총․창검․곤봉․갈구리 등을 마구 휘두르며 진압하다가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이 같은 발포로 인하여 선두에 앞장섰던 서정만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功)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소병원(蘇秉元) 1890(고종 27) ~ 1966
근대의 독립운동가. 자는 중열(仲悅), 호는 삼은(三隱),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금마면 용순리(金馬面 龍脣里)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에 군산(群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자금을 제공했고, 그 후 임시정부요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연락과 자금 모집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해방 후 임시정부 때의 동지였던 신익희(申翼熙),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한민당(韓民黨)을 발기했으나, 당시의 정치 세태에 실망하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소진문(蘇鎭文) 1890(고종 27) ~ 1954
근대의 사회운동가. 자는 성장(聖章), 호는 단산(丹山으로 익산군 팔봉면(八峰面) 출신이다. 흥양현감(興陽縣監) 세득(世得)의 13대손이며 성규(性奎)의 아들이고 무영(茂永)의 아버지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천성이 인후하고 재질이 영호(英豪)하여 능변하였다. 위선사업(爲先事業)과 숭조돈목(崇祖敦睦)을 위하여 1920년 화종회(華宗會)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여 숭조돈목에 공(功)이 지대(至大)하였으며 다년간 면장직을 역임하고 전라북도 도평의원(道評議員)에 재선하여 지방발전과 사회사업에 공헌한 바가 지대하였다.
소진우(蘇鎭佑) 1887(고종 24) ~ 1950
근대의 한학자. 자는 성문(性文), 호는 모암(慕菴),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왕궁면 왕궁리(王宮面 王宮里) 출신이다. 세량(世良)의 후손으로서 학문과 효우로 호남에 널리 알려졌다.
소진형(蘇鎭亨) 1886(고종 3) ~ 1946
근대의 독립운동가. 자는 덕장(德章)으로 익산군 왕궁면 광암리(王宮面 光岩里) 출신이다. 본관은 진주(晋州)로 흥양현감(興陽縣監) 세득(世得)의 13대손이고 성규(誠奎)의 아들이며 철영(喆永)의 아버지이다. 이민식(李敏軾) 등 11명의 동지와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주비단(籌備團)을 조직, 단장이 되고 충남․북과 경기 등지에서 암약(暗躍)하며 독립기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7년간의 옥고를 겪으며 옥중에서 병을 얻어 출감 후 생을 마감했다. 독립유공자 포상과 훈장을 받았다.
소홍규(蘇洪奎) 1882(고종 19) ~ 1952
독립운동가. 자는 기범(箕範), 본관은 진주(晉州)로 휘백의 아들이며 익산군 망성면 어량리(望城面 漁梁里)출신이다. 3․1운동 때 강경(江景)․공주(公州)․대전(大田)․군산(群山)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지극한 형벌을 받았다.
소화영(蘇華永) 1893(고종 30) ~ 1966
현대의 한학자. 호는 난정(蘭汀),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왕궁면 동촌리(王宮面 東村里) 출신이다. 유학(儒學)과 시문(詩文)에 뛰어 났으며 저서로『난정유고(蘭汀遺稿)』가 전하는 바 내용은 시(詩)․부(賦)․서(序)․제문(祭文)․묘지(墓誌)․행장(行狀) 등이다.
송병옥(宋炳玉) 1883(고종 20) ~ 1976
자는 진국(振國), 호는 화곡(花谷)으로 표옹(瓢翁) 송영구의 후손이며, 판서 우곡공(藕谷公) 창(昌)의 9대손이다. 본관은 진천(鎭川)이며 효자 정식(廷植)의 아들로 왕궁면 서벌에서 태어나 왕궁면 용화리 화곡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일재(逸材)가 남달리 뛰어났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다. 나라의 국운이 다하자 학문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은거하였으며, 송씨의 종중일을 여러 해 맡아 보면서도 사심이 없었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야승(朝鮮野承)』상권과 『화곡유고(花谷遺稿)』가 전한다.
송영식(宋英植) 1883(고종 20) ~ 1948
근대의 독립운동가, 한학자. 호는 석당(石堂)으로 익산군 왕궁면 동룡리 학현(王宮面 東龍里 鶴峴) 출신이다. 항일독립운동에 공을 세워 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는『석당유고(石堂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詩)․서(序)․제문(祭文)․묘지(墓誌)․행장(行狀) 등이다.
송태식(宋泰植) 1881(고종 18) ~ 1946
근대의 독립운동가, 의병. 자는 응오(應五), 본관은 진천(鎭川)이며 익산군 왕궁면 동봉리(王宮面 東鳳里) 출신으로. 순욱(淳郁)의 아들이다.
청일전쟁에 이어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을사조약, 정미7조약에 이어 1907년 8월 1일 한국군의 강제해산을 강행하였다. 이에 송태식은 더 이상 일제의 만행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고 의병운동의 대열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처족(妻族)인 고흥 유씨(高興柳氏) 집안의 유치복(柳致福), 유지명(柳志明), 유영석(柳瑛錫)과 함께 당시 고산군(현 완주군 完州郡) 비봉면 불당골(高山郡 飛鳳面 佛堂)에 군기(軍器)제작소를 설치하고 백여 명의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천호산(天壺山)을 근거로 고산, 익산, 여산, 은진, 연산, 금산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와 맞서 싸웠다.
그는 1907년 의병장 유치복(柳致福) 휘하에서 참전했고, 동지 3명과 함께 10월 10일 우북면(紆北面)장암의 이화순(李化順)의 집에서 군자금 30원을 조달하였다. 이어서 송태식(宋泰植) 등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미력면(美力面) 도내리(道內里)의 최순표(崔順杓)의 집에서 군자금으로 엽전 15전을 조달하였다. 후에 피신하여 지내던 중 신태인(新泰仁)에서 체포되어 7년형을 복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익산시 삼기면 장항동에 창의묘비(倡義墓碑)를 건립하였다.
신석태(申碩泰) 고종 ~ ?
조선후기의 술객(術客)으로 익산군 황등(黃登) 출생이다. 그는 세상에서 미친 사람이라고 할 만큼 광인취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익산지방에는 그에 관한 기행과 일화가 구전되고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황등 산정(山頂)에 올라가 빈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있어 그러한 모습을 보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얼마가 지나면 황등산 아래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질을 할 수 없을 터이니 이렇게 빈 낚시를 드리우고 있노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 산의 맥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 후 나라가 망하고 일제가 황등 근처의 호수(황등제)를 모두 개간하여 전답을 만들었으며, 또 일제가 황등산의 돌을 캐기 시작하여 산허리가 잘리게 되었다. 후일 사람들이 그의 예언이 적중하였다고 감탄하였다. 그는 또 국상(國喪, 고종의 죽음)이 일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도 하였다고 한다.
양병현(楊秉賢) 1887(고종 24) ~ 1965
근대의 한학자. 자는 사문(士文), 호는 춘정(春汀), 본관은 남원으로 석중의 손자이고 홍순의 아들이다. 익산군 왕궁면 동촌리(王宮面 東村里) 출신으로 학문에 뛰어났다. 문집『춘정유고(春汀遺稿)』1책이 전한다.
엄근섭(嚴槿燮) 고종 ~ ?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월(寧越), 참봉 계환의 아들로 익산군 웅포면(熊浦面) 출신이다. 3․1운동 때 강경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3년 형을 받았다.
엄두은(嚴斗恩) 고종 ~ ?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월(寧越), 감찰 일구의 후손으로 동지중추 석희의 아들이며 익산군 웅포면(熊浦面) 출신이다. 3․1운동 때 강경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2년 형을 받았다.
엄창섭(嚴昌燮) 1892(고종 29) ~ 1973
독립운동가. 익산군 웅포면(熊浦面) 출신(일설에는 충청남도 부여 출신). 강경의 사립 창영학교(昌永學校) 교사로 있을 때인 1919년 3월 5일 익산군 웅포면 대붕리(大鵬里)에서 군산의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인 강금옥(姜金玉)으로부터 3·1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7일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창영학교(昌永學校)내에서 계책을 세우기를, 3월 10일 강경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고상준, 추병갑과 상의하였다. 이튿날 강경읍에 나아가 태극기 제작에 필요한 종이와 물감을 사가지고 돌아와 고상준, 추병갑 그리고 김종갑과 추성배가 가담하여 태극기 2백여 매를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아침에는 그 태극기를 서삼종으로 하여금 가마니에 넣어 옥녀봉(玉女峰)으로 운반해 놓게 하였다. 이날 오후 3시경 옥녀봉에 모인 독립만세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강경 장터로 내려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7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민족사상 계몽대(啓蒙隊)를 조직하여 대장으로 군산, 만경, 김제등지를 순회하다가 부안에서 체포되었고, 또 1929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선전대원으로 활동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윤치병(尹恥炳) 1890(고종 27) ∼ 1979
목사. 당시 익산군 황화면 출신. 윤상엽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주병(柱炳)이고 호는 비당(非堂)이다. 1908년 중앙중 ․ 고등학교 전신인 기호학교에 입학한 윤치병은 학감 유일선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일본의 고베신학교를 졸업했다. 고베 신학교 졸업 후 일본인 마스토미씨가 세운 오산학교와 오산교회에서 교사와 목회를 하다가 8년 만에 그만 두고, 일본 세이쇼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목사로서 여러 지역의 교회를 거쳐 1947년부터 30여년을 금마의 복음교회에 재직하면서 일시 익산중학교에서 교편을 들기도 했다. 청백하고 민족적 지조가 남달리 굳어 일제 식민지 생활이 부끄럽다 하여 이름과 호에 (恥)와 (非)자를 넣었다. 만년에는 서예에 몰두하였는데 주로 팔분체(八分體)를 즐겼다.
이규홍(李圭弘) 1881(고종 18) ~ 1929
독립운동가, 의병.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로 익산군 팔봉면 석암리 관동(八峰面 石岩里 冠洞) 출신이다. 중추원의관(中樞院 議官) 기영(琪榮)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20세에 중추원 의관에 이른 수재(秀才)였다.
1905년 을사강제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이 태인군의 종성리(현 정읍시 산내면)의 임병찬(林炳瓚)의 집에 머물면서 거사를 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임병찬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겠다는 예(禮)를 행한 후 최익현을 만나 자기도 의병활동에 참여할 것을 맹세하였다.
집에 돌아와 부친에게 이 일을 알리니 집에 있는 양곡을 모두 팔아 의병활동의 경비로 쓰도록 하였다. 그래서 1906년 4월 친구 박이환․문형모 등과 항일 투쟁할 것을 맹약하고 그들을 각 고을로 파견하여 포수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동지를 모으게 되었다. 그가 수십 명의 동지들을 이끌고 최익현이 주둔하는 순창을 향하여 전주를 거쳐 임실 갈담에 이르렀을 때 순창의 의병이 이미 패하고, 최익현, 임병찬 등 11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뒷날을 기약하고 의병대원들을 일단 해산하였다. 그 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재물을 팔고, 또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으로부터 군자금을 희사 받아 군사(軍士)와 군기(軍器)를 준비하니 총기 3백여 정과 탄약 20여 되, 군도 50여 자루, 화약 10여 되를 준비하게 되었고 의병 257명을 규합하여 1907년 11월 15일 고산 가금리(高山 架琴里)에서 적과 첫 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12월 5일까지 왜병 44명을 사살하였고 의병은 7명이 전사하였다.
이어 진안(鎭安)․장수(長水)․용담(龍潭)․무주(茂州)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한때 충남 대덕군 산내면 이사리(忠南 大德郡 山內面 二沙里)에 피신하였는데 왜경이 그것을 탐지하고 습격하였으므로 이사리의 뒷산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왜경과 교전하였다. 1918년에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요원(臨時政府要員)인 신익희(申翼熙),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및 김규식(金奎植)을 만나게 되어 활동하였고, 1920년에는 간도(間島)에 가서 그곳의 사관학교인 연성소(鍊成所)에 들러 김좌진(金佐鎭) 등을 만나 군자금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귀국하여 송창재(宋昌在)의 집에서 숨어 살다가 1924년 2월 8일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정미의거(丁未義擧)는 18년이 지나 시효가 지났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死境)에 이르러 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5년 후인 1929년 6월 6일 49세의 나이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이재환(李載煥) 1889(고종 26) ~ 1961
근대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방응(邦應)의 아들로 익산군 금마면 용순리(金馬面 龍脣里) 출신이다. 1910년 1천석 거리의 가산을 팔아 동지 우이견(寓利見)․안종운(安鍾雲) 등과 함께 서울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1915년에는 만주로 가서 길림성(吉林省)에서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활약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폈다. 1920년에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였고, 그 해 12월 충남 강경(江景)에서 체포되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22년 경성 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 받았다. 1927년 미결 기간 2년을 합쳐 7년의 실형을 받고 출옥했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이집천(李集阡) 1900(광무 4)∼1959
사업가. 함라면 출신. 일본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하였는데 서예에 뛰어나 선전(鮮展:조전전람회)에 서예부문에서 입선하였다. 해방 이후 함열중학원장(현 함열중학교)과 이리농대 설립위원장을 역임하고 전주방직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유묵으로 현재 웅포면 숭림사의 현판이 남아 있다.
이창로(李昶魯) 1890(고종 27) ~ 1963
근대의 한학자․한의사.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전주(全州)로 용양위 부사용(龍驤衛 副司勇) 희선(羲善)의 아들이다. 익산군 금마면 산북리(金馬面 山北里) 출신으로 이리시에서 오래 살았다. 한의로 명성이 높았으며 저서『죽헌실험방(竹軒實驗方)』은 오랜 경험에 의한 의약서(醫藥書)이다.
장경춘(張京春) 1877(고종 14) ~ 1919
근대의 독립운동가이며 기독교인으로 익산시 오산면 출신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 문용기(文鏞基), 박도현(朴道賢) 등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이곳에서는 3월 26일 만세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보병연대의 1개 중대가 주둔하면서 경비가 삼엄하였다. 그는 오산면의 문용기, 박도현 등 기독교 간부들과 여러 차례 숙의한 끝에 이리장날인 4월 4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4일 정오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이리장터에 모이자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과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기세가 더욱 높아지자, 일제는 수백 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들까지 동원하여 총, 창검, 곤봉, 갈구리 등을 마구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다가 마침내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그는 일제가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장석주(張錫周) 고종 ~ ?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919년 3․1운동 때 지사(志士) 이강년(李康年), 한봉서(韓鳳瑞) 유장열(柳章烈) 등과 함께 의거하였다.
전봉철(全鳳喆) 고종 ~ 1919
희관(熙琯)의 아들로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다가 잡혀 극형을 받았다.
전재철(全在喆) 고종 ~ ?
희관(熙琯)의 아들로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김제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잡혀 극형을 받고 죽었다.
조재영(趙載榮) ? ~ 1909
근대의 독립운동가, 의병. 호는 춘파(春坡)로 익산 출신이다. 1908년 둘째아들 승호(承鎬)와 함께 향리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켜 동지를 규합하였다. 홍주(洪州)의 민종식(閔宗植)이 패전한 뒤 그 패잔병 40여명을 수하에 모으고 각지의 의사(義士)와 연락하여 익산의 이규홍(李圭弘), 임실(任實)의 이석용(李碩庸), 무주(茂州)의 문태서(文泰瑞), 고산(高山)의 유지명(柳志明), 청주(淸州)의 신명선(申明善), 공주(公州)의 노인섭(盧仁燮) 등을 각기 두령으로 한 도지휘(都指揮)가 되었다. 그는 1909년 1월 용담 대불리(龍潭 大佛里)에 위의 6진(六鎭) 장병 1,500여명을 모아 훈련 중 왜병의 습격을 받아 패전하고 심화(心火)로 병이 되어 집에 돌아와 둘째아들에게 계속 투쟁할 것을 유언하고 죽었다.
최대교(崔大敎) 1901 ~ 1992
전라북도 익산 출생. 192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를 거쳐 1929년 같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시험에 합격하여 사법관시보를 거쳐 1935년 평양지검 검사로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45년 전주지검 검사장, 1948년 서울지검 검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1949년 임영신(任永信) 장관사건으로 사퇴한 뒤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그 후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붕괴된 뒤 1960년 다시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복귀하였다. 1964년 개업하여 변호사로 활동, 재임 시절 대쪽 같은 검사로서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 있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검찰의 독립을 지키려고 노력한 법조인으로 유명하다.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있을 당시 일본인 순사의 한국인 절도피의자 고문치사사건에서 사표를 던져 가며 총독부의 압력을 물리친 일화는 널리 퍼져 나가 한국 법조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였다.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다른 유명한 사건이 있다. 1949년 4월 초 정인보(鄭寅普) 감찰위원장이 상공부장관 임영신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270만 원을 받았다며 사기와 수뢰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을 통하여 기소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임영신 장관을 배임 및 배임교사, 수뢰 등의 혐의로 전격 기소하였다. 1심인 서울형사지법은 이례적으로 특별 재판부를 구성하여 심리한 결과 임영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그는 사표를 냈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검찰로 돌아온 뒤에도 3·15부정선거 사범과 4·19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들을 기소할 때 주위의 회유와 잡음을 물리치고 엄격한 입장을 지켰다. 오랜 공직생활로 가난했으면서도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청렴하고 강직하게 검찰의 양심을 지킨 진정한 법조인의 모범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경덕(河敬德) 1897 ~ 1951
근대의 학자, 언론인.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 춘포면(春浦面) 출신이다. 전주 신흥학교․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녔고, 미국 하버드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학 조교가 되었다가 1929년 귀국하였다. 조선 기독교 청년회 사회조사위원회 총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 후진양성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1945년‘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그 뒤 서울신문사․합동통신사 사장을 지냈으며, 잡지 『신천지(新天地)』를 발행했다. 1947년 과도정부 입법의회 의원, 이듬해 뉴델리 범아문화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그 뒤 국제문화협회장․조선축구협회장․한미문화협회장을 역임했다. 6․25 때 북한군에게 옥고를 겪고, 9․28 서울 수복 후 풀려나 미 국무성 특별촉탁으로 동경연합군사령부에 부임했다가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사회법칙(社會法則)』,『사회학입문(社會學入門)』이 있다.
한정옥(韓廷玉) 고종 ~ ?
충정공(忠靖公) 응인(應寅)의 후손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잡혀 극형을 받았다.
홍순갑(洪淳甲) 1896 ~ 1929
근대의 독립운동가. 호는 우당(愚堂),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익산군 금마면 신룡리(金馬面 新龍里) 출신이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귀국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활약 중, 일경에 체포되어 1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해 활약했다. 1929년 초에는 신민부 산하 고려국민당 중앙검사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군자금 모금 차 입국하였다가 신의주에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체포된 후 일경의 고문과 혹형으로 쇠약해진 그는 1929년 10월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8년 지방민이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東古都里)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고, 1977년에는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홍순채(洪淳采) 1899 ~ 1961
현대의 한학자. 호는 백당(白堂).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익산군 금마면 신룡리(金馬面 新龍里) 출신이다. 전북대학교 전신인 명륜대학(明倫大學) 시절부터 전북대학교 초창기까지 한문학 강사로 재직했다.
홍순태(洪淳太) 1896 ~ 1967
현대의 한학자․교수. 호는 시공(是空),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익산군 금마면 신룡리(金馬面 新龍里) 출신이다. 1919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보성전문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1924년 일본 명치(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사서, 경성여자사범학교 사무부장,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귀향하여 1950년에 익산군 금마면 초대 면장과 함께 익산군 초대 교육위원을 지냈다. 저서로『광언(狂言)』 필사본 2책이 전해지다가 1995년에 인쇄본으로 출판되었다.
홍영섭(洪永燮) 1855 ~ 1922
현대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익산군 출신이다. 서봉(瑞鳳)의 후손으로 도사(都事) 운섭(雲燮)의 아우이다. 1919년 3월 익산군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익산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이해 3월 1일 전주 천도교구실로부터 독립선언서 500여 매와 만세운동에 구체적인 방법을 전달받은 익산 천도교 교구장 박영진(朴永鎭)이, 즉시 교구임원과 홍영섭 등 진실한 교인들을 모아 놓고 만세운동에 대해 협의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기독교측과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측에서는 각 면의 연락지도 및 동원 책임자를 정하는 등 치밀하게 거사계획을 진행시켰다. 3월 2일 저녁, 홍영섭은 익산군의 성당면(聖堂面)과 낭산면(郎山面)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50여 장의 선언서를 받아 들고 담당지역에 몰래 배포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었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이해 3월 28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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