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이덕무-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청담(靑潭) 2013. 6. 26. 15:27

 

 

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태학사 이승수 편역

 

1.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네(박지원 : 1737-1805)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다. 나는 그때 갓 여덟 살이었다. 장난으로 누워 발을 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의젓하게 말을 하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며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을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달래며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믈 여덟 해 전의 일이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다.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이냐?

 

2. 우리 형제는 넷이었는데(이덕무 : 1741-1793)

쑥으로 빚은 보리떡과 나물을 버무린 죽을 겨우 목으로 넘겼고, 누런 된장국과 멀건 죽밖에 없었지. 먹다 남은 듯한 비린내 나는 물고기를 계집종이 배에서 주어오면 머리를 맞대고 먹으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단다.

너희들이 그리우면 곧 가서보곤 했는데, 가엾게도 근래 너는 굶주리고 헐벗어 화로에는 불을 피우지 못하고 소반에는 밥그릇이 오르지 못하였구나. 나는 비록 태연한 척하였으나 얼굴에는 부황기가 있었다.

내가 너희집에 가면 너는 늘 반가이 맞았었다. 바느질 품 팔아 모아 두었던 돈으로 종을 시켜 술을 받아다가 웃으면서 내 앞에 술상을 놓아주곤 했지. 내가 그 술을 다른 그릇에 조금 따라 너에게 권하면, 너는 그 술을 받곤 했고, 안주는 조금씩 나누어 아증(조카 딸)을 먹였지.

너의 생사를 겪으니 나는 원통할 뿐이란다. 너는 비록 이제 편해졌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 것이냐? 컴컴한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 같은 너를 묻으랴? 아 슬프다!

 

3. 우리 딸이 시집갈 땐(김종직 : 1431-1492)

벼슬을 그만두고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으며 늘그막에 서로 의지하며 여생을 보내려는 계획이 이제 다 이루어져 가는데 이게 웬 일이오?

아아 슬프오! 적막한 서쪽 당신이 살던 곳이오. 이부자리며 세숫대야며 빗 등속은 마치 당신이 살아있을 때처럼 벌려 있고, 식기들 또한 그대로 두려하오.

 

4. 가난했던 시절의 한 장면(허균 : 1569-1618)

부인은 신미년(1571)에 태어나 나이 열 다섯에 우리 집으로 시집오니 성품이 조심스럽고 성실하며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길쌈에 힘써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은 반드시 맛을 보고서야 드렸으며 제철 음식을 넉넉하게 마련했다.

조금이라도 방탕해지면 군자의 처신은 엄해야 합니다. 엣 사람 중에는 술집이나 다방에 출입도 안한 분이 있는데 이보다 심한 일이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라고 번번이 나무랐다. 나는 듣고 무끄러워 곧 그만두곤 했다.늘 내게 학문을 권하며 말했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르면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영광입니다. 당신 집은 가난하고 어머니는 늙으셨는데, 재주만 믿고 아무렇게나 세월을 보내니 세월은 빠릅니다. 뒤에 후회한들 뭐하겠습니까? ”

도사공께서 급히 명하여 임시로 뒷산에 묻었으니 그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우리가 가난할 때 당신과 함께 등 심지를 돋우며 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며 글을 읽엇지요. 그러다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면 당신은 반드시 장난으로

게으름을 피워 내 부인첩을 늦추지 마십시오.”라고 했는데, 8년 뒤에 한 장 공허한 교지를 부인 영전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사람은 나와 마주 앉아 귀밑머리를 푼 사람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소?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또한 반드시 한숨 쉬며 슬퍼할 것이오.

 

5. 이 아픔 당신도 알게 하리다(김정희 : 1786-1856)

예전에 장난으로 말하기를 부인은 나보다는 늦게 죽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부인은 크게 놀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하며 즉시 귀를 막고 멀리 달아나 듣지 않으려 하였소. 이는 참으로 세속 부녀자들이 크게 꺼린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경우가 많았으니 내 말이 다 장난만은 아니었소. 이제 끝내 부인이 먼저 죽어 나로 하여금 홀아비로 살게 하였으니, 푸른 바다 넓은 하늘에 한이 끝없이 사무치오!

월하노인을 통해 명부에 하소연해서

내세에는 부부의 입장을 바꿔달라고 하리다.

나는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살아남아

당신으로 하여금 이 슬픔을 맛보게 하리다.

 

6. 이 마음은 네가 알 것이다(상진 : 1493-1564)

지난해엔 네가 자식을 잃더니 올해는 내가 너를 잃으니 부자간의 정이야 네가 먼저 알 것이다. 너는 내가 묻어주었지만 내가 죽으면 주가 나를 묻어줄 것이며, 너의 죽음을 내가 슬퍼했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곡해줄 것이냐! 늙은이가 통곡하니 청산도 찢어지려하는구나!

 

7. 두려워하지 말거라(송준길 : 1606-1672)

돌이켜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해보니 내 속이 갈라지는 듯하구나. , 사람의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나는 모르겠구나. 수명의 길고 짧음이 기를 받을 때에 한 번 결정되면 하늘도 또한 바꾸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면 의약으로 고치고 잘 보호하지 못하는 등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냐? 알지 못하겠다.

며느리와 경아는 네가 병중에도 늘 보고 싶어 했지만 결국 보지 못햇는데, 너는 이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눈물이 글자를 적셔 말을 하려다가도 목이 매여 자꾸 막히는구나. 네가 이를 안다면 또한 차마 내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여, 하늘이시여!

 

8. 한 번만 웃어보렴(홍세태 : 1653-1725)

아아, 나는 행실에 선업이 없어 하늘에 죄를 얻어 젊어서부터 연이어 아들 여덟과 딸 하나를 잃었다. 뒤늦게 너의 형제를 얻어 깊이 사랑하였으니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단다.

하늘의 노여움이 다하지 않아 거듭 남은 재앙을 내려, 에 아우를 빼앗아가더니 이제 또 너마저 앗아갔구나.

아아, 사람이 자식을 곡함에 누군들 슬프지 않으랴만, 내가 너를 곡하는 데에는 실로 남과는 다른 것이 있단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바탕이 매우 아름다워,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붓을 쥐면 글자를 알아 춘첩도 쓰곤 했으니, 내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단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예로부터 글에 능했던 부인들은 대부분 운명이 기박하였기에 글공부를 그치고 더 이상 배우지 못하게 하였지. 너는 수려한 용모와 아름다운 덕성이 무리에서 빼어나, 밖으로는 너그럽고 온화하여 조금도 거스르는 기색이 없었고, 안으로는 총명하고 사리가 밝아 일을 처리하거나 사람을 응대함에 모두 마땅함을 얻었단다. 부모를 섬김에는 효성스러웠고, 지아비에게는 순종하였으며, 비복을 거느림에는 은의가 있고, 집안일에는 능하지 못함이 없었단다.

네 어미에게 듣자니, 너는 병이 위중해지자 어미에게 발하기를

아버지를 못보고 죽으려니 눈이 감기지가 않아요.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죽으려 하실 텐데, 그러면 저 어린 다섯 아이들은 어떡해요. 어머니 죽지 마세요.”

라고 했다지. 아아, 이 말을 들으면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눈물을 떨굴 텐데, 하물며 어미와 아비임에랴!

 

9. 바림이 문풍지를 흔들던 날(이하곤 : 1677-1724)

이듬해 갑신년에 할아버지께서 강화유수로 부임하시어, 나와 너희들은 모두 따라갔는데, 가을에 봉석이 갑자기 찬바람을 맞아 앓다가 죽었단다. 부모의 참혹한 심정이야말로 말로 할 수 없지만, 너도 더욱 슬픔에 잠겨 매양 말하기를,

아아 봉석아, 너는 어찌하여 부모님의 사랑을 버리고 중었니? 너는 왜 혼자 무서움도 없이 빈 산에 버려져 있니?”

라 하였는데 그 말이 처절해서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너는 또 부모가 지나치게 슬퍼할까 걱정하여 좋은 말로 위로하고 또 재롱을 떨며 우리를 한 번 웃기려고 했지. 우리는 봉석이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네가 앞에서 온갖 정성을 다하는 까닭에 조금이라도 슬픈 마음을 달랠 수가 있었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너마저 우리를 버리고 떠나갈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아아, 예전에 네가 봉석을 슬퍼했는데, 우리가 또 너를 슬퍼하게 되었구나. 너는 이를 아느냐, 모르느냐?

아아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구나.

, 네가 아버지와 딸로 인연을 맺은 세월이 6년 밖에 되지 않으니, 언제 지하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봄바람이 한번 스치면 만물은 다시 살아나는데, 너의 혼백은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이 아픔에 어디 끝이 있을까. 감정이 격해져 말에 차례가 없지만 이 모두는 네 아비의 간장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를 안다면 지하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아아 슬프구나!

 

10. 소라 껍질의 추억(정약용 : 1762-1836)

네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 겨우 세 해 뿐인데, 나와 헤어져 산 것이 2년이나 된다. 사람이 60년을 산다고 할 때, 40년 동안이나 부모와 헤어져 산 것이니, 이야말로 슬픈 일이라 하겠다. 얼마 후 집안의 화가 근심하던 대로 닥쳤기에 너에게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려 하였더니 이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으면 기꺼이 황령을 넘고 열수를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이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11. 나의 일생(상진 : 1439-1564)

시골구석에서 일어나, 세 번이나 재상의 관부에 들었도다. 늘그막엔 거문고를 배워 늘 感君恩 한 곡조를 타다가 천수를 마쳤노라.

 

12. 땅 속 개미들 내 입에 들어오고(남효온 : 1454-1492)

누구나 가난하고 천한 것을 싫어하여

죽도록 벼슬과 봉록 얻기에 골몰하네

하지만 생사의 관문에 이르는 것은

아무리 잘나도 면치 못하늕 일이네

(중략)

살았을 적 입 벌리고 웃었던 일을

이제 누가 이 즐거움을 같이 할까

다만 한스러운 건 세상에 살았을 적

처참한 여섯 액운이 있었던 것이니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못한 것

집이 가난해 술을 충분히 못 마신 것

행실이 거칠어 미친놈 소리를 들은 것

허리가 곧아 높은 분을 화나게 한 것

신발이 뚫어져 뒤꿈치가 돌에 닿은 것

집이 낮아 이마를 대들보에 부딪친 것

 

13. 내 마음 얻을 이 있으리(이황 : 1501-1570)

배운 것이 얼마나 된다고, 늘그막에 벼슬을 탐했던가? 배우기를 구하였으나 길은 멀기만 하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주렁주렁 달렸어라.

시름 가운데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이 있는 것 아니냐? 죽으면 남김없이 돌아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고전번역원에서 보내온 글을 하나 싣는다. 

                                            

떠나간 아내를 그리며(悼亡室)

오원(吳瑗, 1700∼1740)

내 그대 버리지 않았는데 그대 나를 버렸으니

좋은 충고 신실한 맹서가 다 부질없게 되었구료.

저세상에서 어버이 모실 테니 그대는 즐겁겠지만

나를 위해 왜 조금 더 있다 가지 않았단 말이오.

吾不負君君負余

良箴信誓一成虛

歸侍重泉君則樂

爲吾何不少躊躇

 

  이 시는 오원이 1715년 16세 때 맞이한 첫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보낸 슬픔을 애도한 것이다. 오원은 생부가 오진주(吳晉周)인데, 아들이 없었던 그의 형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오태주는 현종(顯宗)의 따님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어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지기도 했는데 1716년 49세에 별세하였다. 바로 안동 권씨가 시집온 지 한 해 남짓 지난 때로, 안동 권씨는 상례를 치르면서 병을 앓다가 한 해 뒤 연제(練祭)를 지내고 병이 더 심해져 결국 해를 넘긴 1718년 1월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동 권씨는 오원과 동년생으로, 슬하에 딸 하나만을 남기고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만 3년도 되지 않아 사별하게 된 것이다.

  아, 그대 이 세상에 온 지 겨우 이십 년에서조차 한 해를 채우지 못하였으니 이 얼마나 짧단 말이오. 그대 떠나면서 세 살배기 아이 하나 남겨 놓았는데 또한 사내자식이 아니니 이 얼마나 박복하단 말이오. 그대 친정 부모를 떠나 격조한 세월이 오래되었는데 수일이나 걸리는 먼 곳에 있어 병중에는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임종 때는 얼굴 보며 영결하지 못하여 끝내 한을 품고 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아, 심하구려, 이 참담함이! 아, 슬프구려.  부부의 의리가 또한 귀중하다 할 것이니 이는 두 몸이 합하여 한 몸이 되고 나서 백 년을 해로하여 길이 무궁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오. 그런데 그대가 내 아내가 된 지는 실로 네 해가 되지 못하였구려. 지금 그대의 죽음은 바로 인생의 지극한 슬픔과 천하의 지극한 곤궁을 품고 있소. 그 가련한 정상(情狀)이 행인들도 슬픔에 빠지게 하는데 하물며 나는 어떤 마음이겠소. 아, 슬프구려.  그대가 평소 내 완악함을 모르고 내가 숨이 끊어질까 걱정하고 내가 몸이 상할까 근심하여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노라니 아마 지금 아득한 저 명부(冥府)에서도 그대 자신이 죽은 것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를 슬퍼할 것이 분명하오.

  오원이 1718년 안동 권씨를 위해 지은 제문(祭文) 중의 일부로, 이 글을 읽으면 아내를 잃은 절절한 슬픔이 행간에 넘쳐난다.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부부가 사별하였으니 감정이 북받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미가 어디 간 줄 모를 딸아이의 해맑은 표정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안동 권씨는 효성이 깊고 남편에게 충고할 줄 아는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어 오원 자신 인생의 벗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제문의 다른 부분에서 부친 해창위 오태주가 평소 과묵하고 칭찬하는 일이 적었는데 며느리를 얻은 것을 기뻐하며 현부(賢婦)라고 칭찬하면서 며느리의 효순(孝順)한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사람들에게 자랑하여 오원 자신보다 며느리를 더 아끼는 듯했다고 하고, 부친이 식사할 때는 며느리를 반드시 곁에서 모시며 식사하게 하고 앉아있을 때는 반드시 모시고 앉아있게 하였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또 오원이 1719년 안동 권씨를 위해 지은 행록(行錄)에는 부인이 딸 다섯 중에 가장 어질고 친부모도 부인을 가장 사랑했으며 성품이 효순해서 어린 시절부터 어버이 곁을 잠시도 떠나지 못했다고 하는 안동 권씨의 모친 송씨(宋氏)의 술회(述懷)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오원은 부인과 사별한 지 3년 뒤인 1721년 한식 하루 전날 안동 권씨의 묘에서 곡하면서 묘 앞에 석상(石床)과 석주(石柱)를 세울 때 다시 한 편의 제문을 지어 아내를 추모한다.

  그대 이곳에 묻힌 지도 어느덧 훌쩍 해가 몇 번 바뀌어…… 다시 아내를 맞게 되고 ……곱게 자란 딸아이는 뜰에서 뛰놀게 되었소.…… 야속한 인정은 떠나간 사람을 점점 잊게 만들어 눈물은 마르고 마음은 굳어져 가오. 가버린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는 슬픔이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슬픔보다 더 큰 것은 아닐지. 그대의 얼굴과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꿈에서조차 자주 나타나지 않는구려. 저세상에서 그대 억울한 마음에 구천을 떠돌고 있지나 않을는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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