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 세상의 아름다움
지은이 정약용(1762-1836) 옮긴이 박무영
우리 민족의 역사에 훌륭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분들이 많으나 나는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정약용 선생, 김구 선생님, 김수환 추기경님을 내심 생각한다.
역사교사로서 정약용 선생이 남긴 여유당 전집, 그중에서도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의 저서이름이나 그 기본 내용, 선생이 실학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업적, 천주교 박해로 19년 동안 이루어진 강진의 유배 생활정도에 대해서 그저 피상적으로밖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느낀 부끄러움이다. 그가 뛰어난 실학자임을 넘어 진정한 철인으로 이 땅의 대표적인 君子요, 또한 따뜻한 감성을 지닌 아버지요, 뛰어난 수필가이자 아름다운 시인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게 해준 우리 딸과 태학사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국사교사들의 필독도서로 추천하고 싶기도 하다. 모아놓고 싶은 글만 간추려 적어 보았다.
1. 지금 여기서
○ 내가 지니지 않은 사물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해 자세히 보고는 <이것>이라고 한다. <이것>이라는 것은 이미 얻어서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손에 넣은 것이 나의 욕구를 채우기에 부족하다면 만족시켜줄 만한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것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근심거리다.
○ 지구는 둥글고 땅은 사방으로 평탄하니 하늘 아래 내가 앉아 있는 자리보다 높은 곳은 없다. 그러나 백성들 중에는 곤륜산에 올라가고, 형산과 곽산에 올라가며 높은 것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 이미 가버린 것은 뒤쫓을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 하늘아래 지금 누리고 있는 처지처럼 즐거운 것은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 중에는 가마와 말을 다 없애고 전답을 탕진하며 즐거움을 구하는 자가 있다.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평생 동안 미혹되어 오직 <저것>만을 바라보고 <이것>을 누릴 줄 모르는 지가 오래다.
○ 불가에서는 스스로 욕심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소위 <바라밀>이라는 것은 彼岸, 즉 저 언덕에 오른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목탁을 울리면서 <저것>만을 선망하니 역시 어리석지 않은가?
2. 隱者의 거처
지역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강을 끼고 있는 산보다는 시냇물을 끼고 있는 산이 낫다. 골짜기 입구에는 높은 암벽이 있고 조금 들어가면 환하게 열리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는 곳, 이런 곳이 福地이다.........(집과 방안 풍경 생략)
뜰 앞엔 높이 두어 자 되는 가림벽을 하나 둘러두고 담 안에는 갖가지 화분을 놓아둔다. 석류, 치자, 백목련 같은 것들을 각기 종류대로 갖추는데, 국화를 가장 많이 갖추어서 모름지기 마흔 여덟 가지는 되어야 겨우 구색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뜰 오른편엔 조그마한 연못을 파는데, 사방이 수십 걸음을 넘지 않을 정도로 한다. 연못에는 연꽃 몇 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기른다. 따로 대나무를 쪼개 홈통을 만들어서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 연못에 대고, 연못에서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을 통해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
채마밭은 수면처럼 고르게 갈아야 한다. 그런 다음 밭두둑이 네모 반듯해지게 밭을 구획해서 아욱, 배추, 파, 마늘 등을 심되, 종류별로 나누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한다. 씨를 뿌릴 때는 반드시 고무래를 사용하여, 싹이 났을 때 보면 아롱진 비단물결 같은 무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채마밭>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채마밭 둘레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도 심지만, 장미 수천 그루를 울타리로 심어 놓는다. 그러면 늦봄과 초여름이 교차되는 때 짙은 향기가 채마밭을 둘러보러 나온 사람의 코를 찌를 것이다.
뜰의 왼편에 사립문을 세우는데 흰 대나무를 엮어서 문짝을 만든다. 사립문 밖에서 산 언덕을 따라 오십 걸음 남짓 가서 바위 위를 흐르는 시냇가에 초가 한 간을 세워두는데, 난간은 대나무로 만든다. 집 주위는 온통 쭉쭉 뻗은 대나무들로 빽빽한 숲이니, 가지가 처마로 들어와도 꺾지 않고 그대로 둔다.
시내를 따라 백 걸음 남짓 걸을 즈음에 좋은 전답 수 백묘(1묘는 삼십평)를 마련해 놓는다. 늦은 봄마다 지팡이를 끌고 밭두둑에 나가보면 볏모가 파랗게 돋아나 푸름이 사람까지 물들이니, 한 점 속세의 기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소 논일을 하지는 말라. 다시 시내를 따라 조금 가면 큼 방죽의 한쪽 면과 만나는데, 방죽의 둘레가 오륙리나 된다. 방죽 안쪽은 온통 연꽃과 가시연으로 덮여 있다. 거룻배 한 척을 띄워 놓고, 달밤이면 시인 묵객들을 이끌고 배를 띄운다. 퉁소를 불고 거문고를 타며 방죽을 서너 바퀴 돈 다음 취해서 돌아온다.......(절에 대한 묘사 생략)
집 뒤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용과 호랑이가 서로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고, 소나무 아래에는 흰 학 한 쌍이 서 있다.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작은 남새밭 하나를 마련해 인삼, 도라지, 천궁, 당귀 따위를 심는다.
소나무 북쪽으로는 작은 사립문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누에를 치는 세 칸짜리 잠실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누에를 얹어 기르는 잠박을 칠층으로 설치해 둔다. 낮차를 마시고 나서는 잠실로 간다. 아내에게 松葉酒를 따르게 하여 두어 잔 마신뒤, 양잠법이 적힌 책을 가지고 누에를 목욕시키고 실을 잣는 방법 따위를 아내에게 가르쳐주며, 서로 바라보고 싱긋 웃는다. 문 밖에 나라에서 부르는 글이 도착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빙그레 웃을 뿐 나아가지 않는다.
3. 우물 바닥에서 본 별빛
어린 딸은 건륭 임자년(1792) 2월 27일에 태어났다.......(중략)태어난 지 24개월 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발진을 시키지 못하여 검은 사마귀가 되더니 하루 만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가 갑인년(1794) 초하룻날의 밤 사경이었다.......(생략)
네 모습은 타서 숯처럼 검으니
다시는 옛날의 귀여운 얼굴 없네.
반짝 보이던 귀여운 얼굴 기억하기 어려우니
우물 바닥에서 본 별 빛 같아라.
네 혼은 눈처럼 깨끗해
나르고 날아 구름 가운데로 들어가네.
구름 사이는 천리만리
부모는 눈물이 줄줄 흐르누나.
4. 回婚詩
다산은 15세 되던 1776년 2월 22일에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만 60년을 해로하였다. 다산은 부부의 회혼일인 1836년 2월 22일에, 회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일가와 제자들 가운데서 서거한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이다.
육십 년 세월, 눈 깜빡 할 사이 날아갔으니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노래 소리 유난히도 좋으니
옛날의 하피첩은 먹 흔적이 아직 남았소.
나뉘었다 다시 합함은 참으로 우리의 모습
한 쌍의 표주박을 남겨 자손에게 주노라.
♣霞帔帖 : 부인의 낡은 치마에 쓴 서첩
5. 귀족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형님께
남자란 모름지기 맹금이나 맹수같이 사납고 살벌한 기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주물러 부드럽게 교정해 법도에 맞도록 만들어야만 쓸 만한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선량하기만 한 사람은 단지 자기 혼자 착하게 사는 정도에 맞을 뿐입니다.
6. 꽃피자 바람이 부니-형님께
玄免는 셋이 있습니다. 한 무제 때에는 함흥을 현토라 했고, 소제 때에 지금의 흥경 땅으로 현토를 옮겼으며, 그 후에 다시 지금의 요동으로 옮겼습니다. 이런 사적들이 모두 얽히고 설키어 헝클어져 있으니, 앞 시대의 소위 <동국의 역사>라는 것들을 알 만 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한 통을 개작해서 사마천이 <사기>를 명산에 수장했던 것처럼 면산에 감추어 두어야 옳을 것입니다.
7. 마음속 계산-형님께
금년 다섯 번의 대사면에는 온갖 탐관오리며 살인강도들도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臺啓중에 있는 자는 거론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엄하게 막고자 하여 그런 것이 아니니 마음을 넓게 먹고 잊어버릴 따름입니다. 권세가의 냉정한 사람들이야 본래부터 서로를 잊은 사이이니 한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돌아간다 하여도 집에는 네 벽만 서 있고, 곡식은 해를 넘기기도 전에 떨어지고, 늙은 처는 추위에 얼고 굶주리며 아이들의 얼굴빛은 처량한 것입니다. 두 형수님들은 “ 그이만 오시면 그이만 오시면 했는데 와도 별 수 없구나.”하실 겝니다. 태산이 등을 누르고 넓은 바다가 앞에 가로놓였으니 掛와 孝를 연구하던 일은 전생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고 음악을 연구하던 것도 한바탕 봄꿈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무슨 조그마한 즐거운 일이라도 있겠습니까?
하늘이 나에게 다산을 터전으로 주셨고 보은산방아래 몇 묘의 밭을 원포로 삼아주셨습니다. 해가 다하도록 아이 우는 소리, 부녀자의 한숨 쉬는 소리가 없으니 복이 이처럼 두텁고 지위는 이처럼 존귀합니다. 그런데 이 신선세계를 버리고 시중의 阿鼻叫喚속으로 몸을 던지고자 하다니, 천하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억지로 지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속의 계산이 정말 이렇습니다.
그러나 한편 돌아가고픈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으니,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못나고 약해서 그런 것일 따름입니다. 간음이 잘못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의 처첩을 훔치기도 하고, 살림이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조나 강패 따위의 도박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일 뿐입니다. 어찌 본심이겠습니까?
8. 自暴自棄하지 말아라-아이들에게
○문장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여러 대에 걸쳐 문장에 종사한 후에야 글을 잘 짓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재주가 너희들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 수 있겠다.
○독서는 반드시 먼저 기본이 서야 한다.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할 수 없다. 기본이란 무엇이냐? 학문에 뜻을 두려면 오직 효도와 우애가 그것일 뿐이다. 반드시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여 기본을 확립하면 학문은 저절로 몸에 흡족히 스며들게 된다.
나는 천지간에 홀로 서서 오직 저술하는 일에다 생명을 의지하고 있다.너희들이 끝내 배우지 않고 자포자기해 버린다면, 내가 저술하고 가려 뽑은 것들을 누가 수습하여 편차를 정하고 남길 것과 뽑을 것을 정하여 책으로 편찬할 것이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내 책은 끝내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오로지 사헌부에서 올린 장계와 심문기록으로만 나를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반드시 여기까지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거라.
○반드시 먼저 經學으로 근본을 다지고 난 후에 앞 시대의 역사를 섭렵하여 그 정치적 득실과 세상이 태평하거나 어지러운 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실용의 학문에 유념하여 옛사람들이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하는 것에 대해 적어놓은 서적을 즐겨보고, 항상 만민에게 은택을 베풀고 만물을 잘 육성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독서한 군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혹 안개가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 짙은 녹음이나 보슬비 내리는 좋은 경치를 만나면 갑자기 감흥이 일고 표연히 시상이 떠올라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詩歌의 살아있는 경지다. 나를 고지식하다고 여기지 말아라.
9.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아이들에게
○모든 일은 다 가정 내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유념하고 조치하여 마음속에서 남의 은혜를 바라는 뜻을 잘라내 버리도록 하여라. 그러면 자연히 마음이 평온하고 기가 호평해져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는 병통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10. 游아 보아라
○지금은 내가 유배지로 흘러다니며 남쪽 끝, 풍토병이 창궐하는 땅에 몸을 부치고 있으면서, 외롭고 고덕한 가운데 낮이나 밤이나 너희들에게 기대를 걸고 때때로 가슴에 가득한 끓는 피로 써서 부치는 것인데 너희들은 한 번 보고 상자속에 던져 버리고는 마음에 두지 않으니 이래서야 되겠느냐?
들으니 너는 닭을 기른다고 하니 양계는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닭을 기르는 것에도 우아하고 비속한 것, 맑고 착한 것의 구별이 있다. 농서를 숙독하여 좋은 방법을 시험하되 혹은 색깔별로 구분하기도 하고 혹은 횟대를 다르게 해 보기도 하고, 또 살지고 윤기가 흐르며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낫게 하고, 또 한 시로 닭의 정경을 그려내어 사물로써 사물을 풀어 보기도 하는 것, 이것이 독서한 사람의 양계다. 만약 이익만 생각하고 의리를 생각지 않는다든가, 기를 줄만 알았지 운치는 몰라서 부지런히 골몰하여서 이웃 채마밭 노인과 밤낮 다투는 자라면, 이것은 서너 집 모여 사는 시골의 못난 사내의 양계법이다.
○주자의 格物공부도 이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한 물건을 연구하고 내일 한 물건을 연구한다>는 것도 또한 이처럼 착수하는 것이다. 格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한다는 뜻이니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중략)
나는 태어난 이래 몹시 마셔본 적이 없어서 내 주량을 모른다.(중략)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만 적시는데 있는 것이다. 저 소 물마시듯 하는 자들은 혀를 적실 사이도 없이 곧장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을 알겠는가?(중략)
너처럼 배우지 못하여 아는 것도 없는 폐족의 사람에게 술주정뱅이라는 이름까지 붙는다면 장차 어떤 등급의 사람이 되겠느냐?
11. 가을 매가 날아오르듯 – 학유에게 노자 삼아주는 훈계
○도량의 근본은 남의 처지를 자신의 입장으로 미루어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만 있다면 좀도둑이나 난적이라도 또한 묵묵히 참아 넘길 수 있을 것이니 하물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야 말 할 것이 있으랴?
○시야가 좁은 사람들은 오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생기면 당장 줄줄 눈물을 흘리고, 다음 날 뜻에 맞는 일이 생기면 또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져서, 근심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 감동과 분노, 사랑과 증오의 온갖 감정이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달관한 자가 본다면 비웃지 않겠느냐?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에는 우주 안의 일들을 모두 다 해결하고 다 정돈해 보고 싶었다. 삼십 사십이 되어서도 이 뜻은 시들지 않았었다.
○남들이 모르게 하려면 안하는 것이 최고이고, 남들이 못 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이다. 세상의 재앙이나 우환, 천지를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전복시키는 죄악이 모두 몰래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치열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12.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집안이 부귀하고 번창할 때는 친척들도 따르고 의지하기 때문에 사소한 원망거리가 생겨도 속에 넣어두고 발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화기애애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모두가 몹시 가난하면, 한 두 말의 곡식이나 한 두자의 옷감 같은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시끄럽게 따지고 다투게 되어, 서로 몹쓸 말을 하고 모욕하고 업신여기게 된다. 그것이 갈수록 점점 더 격렬해져서 끝내는 원수가 되고 만다.
이런 때에는 도량이 넓은 한 남자가 나서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부인을 감동시켜 그 도량을 산이나 늪처럼 활짝 넓혀주고 태양처럼 밝은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여자의 도리를 지켜 어린아이인 듯, 창자도 없는 듯, 뼈 없는 벌레인 듯, 갈천씨 때 백성인 듯, 참선중인 중인 듯 유순하게 대하도록 해야 한다. 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나는 보석으로 갚아주고 저 쪽에서 칼을 설치하면 나는 맛좋은 술로 대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흘겨보고 성내며 다투다가 죽이기까지 하여 끝내는 집안을 뒤집어 엎고야 말 것이다.
○중국은 일상생활이 문명화되어 있어서, 비록 궁벽하고 외딴 시골에 살더라도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자도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못하여 도성 문에서 수십리만 벗어나도 벌써 태고적의 미개사회다. 하물며 먼 시골이랴?
○항상 요직에 있는 사람과 다름없이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라. 그리하여 아들 손자때 이르러서는 과거에도 마음을 두고 경제에도 정신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 번 망했다고 해서 반드시 못 일어서는 것은 아니다.
13. 입을 속이는 방법-가훈
○사대부의 마음이란 비 갠 뒤의 바람이나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리워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은 칼로 끊은 듯 범하지 말라. 그러면 스스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살져서 편안해지며 浩然之氣가 생긴다. 만약 옷감 한 자, 돈 한 푼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린다면 즉시 기상이 타락하고 만다.
○우리집안은 선대로부터 당파에 관여하지 않았다. 더욱이 곤경에 빠진 뒤부터는 친구들조차 못 속으로 밀어 넣고 돌을 던지는 괴로운 지경이다. 너희들은 명심하고 당파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버려라.
○나는 너희들에게 전원을 남겨줄 수 있을만한 벼슬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삶을 넉넉하게 해주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로 된 神符는 가지고 있다. 이제 그것을 너희에게 주니, 너희는 야박하다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부지런할 勤자요, 다른 한 글자는 검소할 儉자인데 이 두 글자는 비옥한 논밭보다 나으니 일생동안 써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勤勉이란 무엇인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으로 미루지 말고, 개인 날 해야 할 일을 끌다가 비를 만나지 말고 비오는 날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끌지 말아라.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하고 어린 아이는 들고 다니고, 장정은 힘드는 일을 하고, 병자는 지키는 일을 한다. 부인은 새벽 두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아야 한다. 요는 집안 남녀노소에 놀고먹는 입이 하나도 없고, 한 순간도 한가하게 해바라기나 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면하다고 하는 것이다.
儉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옷은 몸을 가리면 되는 것이다. 낡아빠진 고급 옷이란 참으로 처량한 것이다. 애초부터 소박한 베옷을 넉넉하게 지어 입으면 낡아도 걱정이 없다. 옷을 새로 만들 때마다 앞으로도 이런 옷을 계속 입을 수 있을지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라, 만약 계속 입을 수 없다면, 이번 옷은 앞으로 낡아빠진 고급옷이 될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누구나 곱게 짠 고급 옷 보다는 소박한 옷을 선택할 것이다. 음식은 연명하면 되는 것이다. 좋은 등심고기나 청어 같은 맛있는 생선도 입술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된다. 목구멍을 넘어갈 것도 없이 사람들이 침을 뱉게 되는 것이다.
14. 세상의 두 가지 저울-연에게
○세상에는 두 가지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是非)이라는 저울이고, 하나는 이익과 손해(利害)라는 저울이다. 이 두가지 저울에서 네 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 제일 고급이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이다.
-그 다음이 그른 것을 추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하급이 그른 것을 추구하다가 해를 입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일이 참으로 큰일이기는 하다만, 살고 죽는 것에 비한다면 하찮은 일이다. 생명과 의리 중에서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기도 하는 법이다. 하물며 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하찮은 일에도 문득 암을 향하여 꼬리를 치며 애걸한다면, 만일 남북의 국경에 근심거리가 생긴다면 임금을 배반하고 개나 양 같은 오랑캐들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몇 사람이자 되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또한 운명이다.
▣정약용의 유배와 관련이 깊은 자
○조장한 :?
○홍의호(1758-1826)
조선의 문신. 자는 양중(養仲). 호는 담녕(澹寧). 시호는 정헌(正憲). 본관은 풍산(豊山). 판돈령 부사(判敦寧府事) 수보(秀輔)의 아들. 1784년(정조 8) 문과(文科)에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고 지평(持平)ㆍ집의(執義)ㆍ응교(應敎) 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호조ㆍ예조ㆍ공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802년(순조 2) 한성부 판윤이 되고, 이듬해 사은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ㆍ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등을 지냈다. 그 뒤 의주 부윤(義州府尹)ㆍ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ㆍ우참찬ㆍ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14년(순조 14) 형조 판서로 금주령(禁酒令)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다. 181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복직, 1823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1825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천주교(天主敎)를 탄압했다
○강준흠(1768-1833)
본관 진주, 자 백원(百源), 호 삼명(三溟).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정조가 칭찬하였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직후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1799(정조 23)년에 육품에 올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9세기 순조 대에 이르러 벽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공서파(攻西派-서학을 공격한 파)가 되어 벼슬은 안전하였다. 1805(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1807년(순조 7) 교리가 되었다. 벽파가 몰락하고 시파(時派)가 정권을 잡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810(순조 10)년에 복직되어 수안군수(遂安郡守)가 되어 기민들을 구제하였고, 홍경래의 난 때 수안군을 잘 방비하였다. 1813(순조 13)년에 세미운반(稅米運搬) 등의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신화폐의 주조를 건의하였고 전폐를 개혁하여 전황(錢荒)을 타개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하였다. 정치적인 혼란으로 한동안 물러나 있다가 1827(순조 27)년 이후 다시 중용되었고, 동부승지에 올라 당상관이 되었다.
전대의 정승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의 문화적 자세에 대한 반대 감정으로 그의 삭직을 도모하였다. 공서파로서 정약용과도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그의 상소로 정약용의 유배기간에 영향을 주었다. 저술에 《삼명시집(三溟詩集)》, 《삼명시화(三溟詩話)》, 《동국선현전(東國先賢傳)》 등이 있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금석문(金石文)을 많이 남겼다
○이기경(1756-1819)
1777년(정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89년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강제문신(講製文臣)에 쁩힌 뒤 지평·감찰·예조정랑을 지냈다. 이때 이승훈(李承薰)·이벽(李檗) 등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어 본 뒤 종래의 주자학과 다름을 알고 이를 배척하였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때 이에 온건적이었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경원에 유배되었다.
1794년 풀려나 1795년에 다시 지평이 되었으며, 이어 병조정랑·정언·이조좌랑을 지내고, 1802년(순조 2) 집의를 거쳐 1804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재차 수렴청정하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다시 단천에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으나 이남규(李南圭)의 탄핵을 받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1809년 다시 풀려났으나 이후 계속 탄핵을 받았다. 천주교를 공격하기 위하여 편찬한 『벽위편(闢衛編)』은 정조·순조시대의 천주교사연구(天主敎史硏究)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편서로 『사교징치(邪敎懲治)』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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