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이조시대 서사시 2

청담(靑潭) 2013. 7. 17. 13:44

 

 

이조시대 서사시 2

 

지은이 임형택

출판사 창 비

 

 

대부분 長時들이기 때문에 전문을 다 적을 수 없어 필요한 연만 추려 적어보기로 한다.

 

1. 달량행(백광훈 1537-1582)

 

하늘은 멀고 땅은 넓어

천지간에 아득한데

장수로서 갑옷 벗고 옷을 던지다니

생사를 내 맡기고 말았구나.

 

슬프다 병사들이여,

누군들 부모의 사랑하는 자식 아니랴!

무고한 생명이 모두 함께

칼날 아래 피를 흘렸더라오.

 

버려진 시체 물어뜯고 훔쳐가고

까마귀 솔개에 늑대가 덤벼들어

가족이 와서 찾을 때는

머리가 떨어지고 다리는 달아나고

 

을묘왜변(1555)의 참상을 읊었다. 장군은 바로 전라병사 원적이다.

 

 

2. 코 없는 자(임환 1561-1608)

코 없는 자, 누구 집 자식인고?

홀로 산모퉁이에서 얼굴 가리고 우네.

 

적군의 칼날 번쩍, 바람이 일어

하나 베고 둘 베고, 백 명, 천 명 코가 달아났구나.

 

 

 

3. 단천의 절부(김만중 1637-1692)

 

시커먼 산에 희디 흰 눈이요,

진흙탕에 곱디고운 연꽃이라.

청루에 맑고 맑은 여성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 일선이라네.

 

  함경도 단천고을의 관비 일선은 태수의 아들(성균관생)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그는 아비의 임기가 끝나자 서울로 떠난다. 낭군만을 그리워하며 지조를 지켜 안찰사의 수청을 거부하고 죽으려 물에 뛰어들었다가 구조되기도 한다. 서울 낭군이 죽은 소식에 상을 치르러 찾아가 삼년상을 치렀다 한다.

 

 

4. 향랑요(이광정 1674-1756)

 

선산의 여자이름 향랑인데

농가에서 자랐으되

품성이 단정하고 고왔어라.

어려서부터 장난이 적고 늘 혼자 노닐며

사내애들 하곤 어울리지 않더라네.

......

강가로 강가로 가는데

단풍잎 가을바람에 울고

갈대꽃 석양에 졸고 있다.

.......

어느새 두 소매로 얼굴 가리고

몸을 솟구쳐 물속으로 던지니

지는 해 뉘엿뉘엿

강물에 푸른 물결 성을 낸다.

 

  숙종 28(1702)의 일이다. 선산 상형곡 양민의 딸로 태어나 혼인하였으나 계모에게 용납이 되지 못하고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외숙과 시아버지는 개가할 것을 권하지만 향랑은 듣지 않고 다래와 치마를 풀어 나무하는 소녀에게 맡기며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갖다 드려 나의 죽음을 증언하고 시체를 물속에서 찾게 해다오라고 말하고 나서 산유화 노래를 불러 그 소녀에게 가르쳐 준 다음 드디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5. 장대지(이광려 1720-1783)

 

  장대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윤용(1684-1764)의 첩실이다. 신해년(1731)에 성천부사로 나갔을 적에 그 고을의 기생이었다. 당시 나이 15,6세로 여러 시사의 기생들 가운데 자태가 특출한 편은 아니었다. 윤공은 우연히 그녀를 보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수청을 들게 했는데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대답은 이러하였다.

 -제 아비는 양인이었습니다. 아비가 돌아가실 때 딸이 천류인 때문에 어미를 돌아보며 몹시 슬퍼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통한이 되어 이 몸은 맹세코 한 남자만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윤공은 그녀의 말에 감동하여 평생토록 저버리지 않기로 언약을 하였다. 남녀의 인연을 맺게 됨에 그녀는 더욱 진심으로 공경했으며 윤공 또한 흡족히 여겼다. 얼마 후에 윤공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성천을 떠나게 되었다.

 -아무 때 사람을 보내 너를 맞아갈 터이니 우선 기다려라

라고 타이르자 그녀는 공손히 응낙했다. 그런데 그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도임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체되어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윤공은 칩이 청빈한데다 성품도 졸렬하여 첩실을 둘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처럼 관서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 맞아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이 또한 뜻을 이르지 못하였다. 어언간 6,7년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더욱 지켰으나 이미 몸에 병이 깊이 들고 말았다. 병들기 전에 한번 서울에 올라와서 윤공을 뵙고 돌아간 적은 있었다. 윤공이 강화유수로 있을 때(1737) 그녀가 죽었다는 부음이 왔다. 윤공은 슬퍼하고 후회하며, 제문을 지어 신임하는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녀는 죽을 때 나이 겨우 스물 남짓이었다. 죽음에 다다라 어미에게

 -저를 큰 길가에 묻어주셔요. 행여 우리 서방님이 벼슬길에 지나실지 모르니까요.

라고 당부하여 ,이 말을 들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장대류 길가에 선 버드나무

봄바람 부는 이삼월에

이 몸은 나무의 한 가지라면

오직 한 분만 꺾도록 하겠어요.

 

다행이 꼭 한 분이 꺾기는 하였으나

평생토록 그리다 말 신세 면하기나 할런지요?

 

 

6. 전불관행(성해응 1760-1839)

 

만포의 한 기생

성은 전씨 이름은 불관

그 아비 진장으로 왔다가

남 몰래 관비를 보아 낳은 아이

 

불관 태어나고 이내 어미 죽어

외로운 몸 갖은 고생 겪으며 자라

나이 열여섯에 기적에 올랐더니

그 용모 어여쁘고 얌전하였네.

.......

성인의 가르침 마련한 뜻

윤리를 바로 세우는데 있거늘

어찌 관기를 금하지 않아

풍속을 더럽게 만드는가?

향락을 탐하다 예법을 무너뜨리니

진실로 부끄럽고 창피한 노릇일세.

 

하물며 잔혹한 자 내보내

백성 다스리는 일 맡게 하다니

이야말로 호랑이를 풀어놓아

물어뜯게 하는 것과 무에 다르랴?

 

  그녀는 구씨 성을 가진 남자의 사랑을 받아 혼인을 약속합니다. 속량해 데려간다던 그 사람은 오지 않습니다. 새로 진장으로 온 조만호가 수청을 강요합니다. 온갖 美辭麗句로 유혹하나 춘향이처럼 거부합니다. 만호는 곤장을 칩니다.

 -이 몸뚱이 아무리 으스러질지라도 내 마음 끝내 변치 않으리!

불관은 세검정에 나가 천길 폭포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립니다.

 

 

7. 남당사(작자 미상)

 

  다산의 소실이 내침(다산을 만나고 돌아가는 상황이니 버림받은 의미로 쓰인 듯 함)을 당했는데, 양근 사람 박생이 가는 편에 동행하여 강진의 남당 본가로 가게 되었다. 박생을 그녀를 데리고 호남의 장성읍내에 당도해서는 그곳 부자 김씨와 밀모하여 훼절시키고자 하였다. 그녀가 이를 알고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박생과 단절한 다음, 곧 바로 금릉(강진)으로 갔다. 그리하여 남당 친정으로 가지 않고 다산이 머물던 초당으로 가서 날마다 연못과 누대, 초목사이를 서설거리며 서럽고 원망스런 마음을 달랬다. 금릉의 악소배들이 그곳 경내를 감히 한 발자국도 넘보지 못했다 한다.

 

물이 막히고 산이 가려

기러기도 날아오지 않으매

한 해 다가도록

광주편지 받질 못했네.

 

지금 아이 하나 데리고

만단의 고달픔

서방님 떠나시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주인공은 다산 小室로 알려져 있다. 처음 듣는 사실이며 君子茶山도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소실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의복, 음식을 수발하며 다산을 모신 여자인데 두사람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고, 이름이 홍임이어서 <홍임이 모>라고 불렀다 한다. 다산이 해배되어 돌아간 뒤에도 초당에 남아 있으면서 해마다 찻잎이 새로 돋아나면 따서 정성스럽게 차를 제조해서 경기도 마현으로(강진의 경주인편을 이용하여)보내드리곤 했다. 1970년대 초 저자가 만난 윤씨마을 율동에 살던 윤재찬옹의 증언에 따르면 귤동윤씨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에는 홍임이 모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하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8. 최북가(신광하 1729-1796)

 

그대는 보지 못하였소?

최북이 눈 속에 얼어 죽은 것을.

.....

최북 그이의 사람됨

정갈하고 매서우니

그 스스로 칭호하길

화사 毫生館이라고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한짝이 멀었지만

술이 석 잔을 넘어서면

꺼리는 것이 도무지 없었더니라.

 

  최북(1720-?)은 본관이 무주이다. 무주와 직접적 관련이야 없다지만 어찌되었든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무주읍에 작년에 설립되었다. 최북에 대한 진품 자료가 없어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지난 6월 초 잔딧불 축제에 가보니 최북관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9. 김홍도(신광하 1729-1796)

 

내 듣자 하니 화사 김홍도는

요즘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옛사람도 그의 그림 솜씨

따르기 어렵다 하대.

.........

최북 그 사람

취하여 제멋대로 떠들고

그림 그리는 동료들 만나서는

자칭 독보라 뽐내더니

 

최북 이 사람 궁해서 죽자

그림 값도 따라서 떨어졌다지.

때를 따라 변하는 세상 물정

차라리 말하지 말자.

 

  김홍도(1745-1806)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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