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추한 내방
허균 지음 김풍기 옮김
허균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홍길동전>을 생각한다. 허균이란 인간에 대해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잘 알지는 못한다. 초등학교시절부터 국어시간에 허균의 <홍길동전>을 배워 다들 이름과 소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데 국사시간에도 역시 <홍길동전>만 소개될 뿐 역사 속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기 때문입니다.
국사를 전공한 역사교사인 내가 허균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산문집 <누추한 내방>을 읽게 되면서 그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려 합니다. 일직이 30여 년 전 고창대성고 숙직실에서 국어교사인 이준호 선생(현재 전주남중 교감)과 아주 편안한 자세로 쉬고 있던 중 그가 내게 갑자기 물어왔습니다.
“형님, 허균을 어찌 생각하세요?”
“.....글쎄, 홍길동전의 저자로 아는 것 외에 크게 아는 것이 없고,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그가 시대에 아부하지 못하고 사상적으로는 혁명사상을 가진 이유로 배척당했으나 그가 가진 뜻과 이상은 대단히 컷 던 것 아닐까요? 허균에 대해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솔직히 아는바가 없어 더 이상 토론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아직 고전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기이기도 하고, 허균에 대한 서적을 사서 읽을 만한 관심도, 학문적 열정도, 책을 마음대로 살 돈도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마 이준호 선생은 국어교육과 출신이라서 허균에 관한 책들을 읽었거나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였거나, 당시 한참 막 읽고 있었거나 하지 않았나 싶지만 내심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허균을 대합니다. 梅窓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惺所覆瓿藁를 읽으면서 허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으나 그의 산문집을 통해 그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합니다.
1. 형님께 올리는 편지
○이 아우는 잘 파직되어 원하던 바에 너무도 잘 맞습니다.
○돌아보면 옛날 벼슬길에 골몰하던 것과 그 거리가 어찌 하늘과 땅 정도뿐이겠습니까?
1608년(40세) 허균이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부안의 정사암에 은거하던 시절에 쓴 글입니다. 이 때 부안기생인 매창과도 사귀게 됩니다. 허균은 당시 최고의 벌열집안(아버지가 허엽, 둘째 형이 허봉, 누나가 허난설헌으로 1594년(26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온갖 요직을 거치며 수안군수에서 파직당하고 삼척부사가 되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당합니다. 그리고 공주목사에서 또 다시 파직당합니다. 그러한 시기에 부안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갖게 되면서 쓴 글이지만 그의 벼슬에 대한 골몰과 권력에 대한 집착은 이후로도 여전함에서 그의 인간성의 양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언행이 일치하고자 하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음에서 다산 정약용선생과는 머리가 천재인면에서는 동질성을 보이지만 실천적 인격면에서는 많은 다름을 보여줍니다.
2. 대장부의 삶
○고을자리를 하나 얻어 입에 풀칠을 하니 만호후에 봉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고,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쇠하였습니다. 힘이 없어 망설이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거리듯 하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곤궁함과 현달함은 제 스스로 분수가 있는 법이니, 하늘도 또한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l 대장부의 생애는 관 뚜껑을 덮어야 끝나는 겁니다. 공께서 보시기에 제 혀가 아직도 붙어 있는 것 같습니까? 큰 골짜기의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묶어 두려하지 마십시오, 본성은 진실로 길들이기 어렵습니다.
1607년(39세)에 삼척부사에서 파직되었다가 금방 다시 내자시정에 임명되는데 모두 별열집안의 자손에다가 머리가 수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스스로 현달을 꿈꿈을 나타내고 있으며 스스로는 용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며 자신을 죽이고 살수는 없다고 하고 있다. 그는 조선유교사회의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벼슬을 통한 현달과 출세를 지향한다. 七庶之獄 사건(1613)에 연루되면서 허균이 선택한 인물이 당시 대북세력의 실력자인 이이첨이었다. 허균과 이이첨은 같은 글방 동문이었다. 결국 허균은 당시 실력자 이이첨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옥사에서 일단 화를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호조참의와 형조판서 등을 지내는 등 정권과 밀착되게 되었다. 위기를 모면한 그는 돌변하여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한다.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을 비롯해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사안이었다, 허균과 함께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기자헌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民家)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지만, 허균은 이 일로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결코 벼슬을 던지고 초야에 묻혀 살 사람은 애초부터 아니었던 것이다.
3. 저만의 詩를 쓰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두렵습니다.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무람한 생각이 아닐는지요?
4. 속절없이 봄날은 간다.
○한창 익은 차좁쌀로 빚은 술 걸러놓고 그물 엮어 시내에 쳐놓았으니, 그대를 기다려 잉어회를 칠 생각입니다. 석순과 자라도 안주거리로 장만해야겠지요. 저야 평생토록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린 탓에 술과 음식으로 청하는 것이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소서.
솔직담백하고 쾌남아다운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벌열양반집안의 재주 있고 잘난 귀공자로 태어나서 세월이 가고 세상 사람들의 온갖 비난과 배척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당당한 풍운아적 기질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가?
5. 누추한 내 방
○내가 누추하게 여기는 건, 몸과 명예 모두 썩는 것, 집이야 쑥대로 엮은 거지만, 도연명도 좁은 방에서 살았지.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랴?
말은 저렇게 해도 그의 진정성이 보이지는 않는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체념상태에서 나오는 생각이 아니었을지? 그는 진정으로는 결코 누추하게 살기를 워하지도, 달가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행합일면에서 큰 결격을 보이고 있다.
6. 먼저 간 아내 김씨의 행장
○기유년(1609, 41세)내가 당상관에 승직하여 형조참의를 제수 받았는데, 관례에 따라 숙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아! 그대의 아름다운 행실로 中壽도 누리지 못하고 후사도 끊어졌으니, 하늘의 도 역시 짐작하기 어렵다.
바야흐로 곤궁하던 시절에 그대와 마주하여 등잔불을 돋우면서 반짝반짝 밤을 세워 책을 펴고 읽었다.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면 그대는 꼭 농담을 던지곤 했다.
“게으름 피지 마세요. 저의 숙부인 牒紙가 늦어집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다만 한 장 텅 빈 교지를 그대 영전에 바치고 그 영화로움을 누리는 자는 나와 머리 틀어 올려 부부가 된 애초의 짝이 아니라는 것을.
임진년 왜적을 피해 임신한 아내와 함께 마천령을 넘어 피난하다가 아이를 낳고 아내는 죽었다. 열다섯에 시집온 아내의 나이는 그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틀림없이 너무나 청초하고 맑고맑은 사랑스런 아내였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 전쟁이 주는 무서운 슬픔은 우리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아야 한다. 전쟁없는 한반도 통일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평화통일,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나의 통일관의 핵심이다.
관이다.
7.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시노라
○나의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사방의 기이한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에는 날마다 산해진미를 갖추 맛볼 수 있었다. 자라서는 富豪家에게 장가들어서 또한 뭍과 바다의 진미를 모두 맛보았다.
○우리나라는 비록 궁벽한 곳이지만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높은 산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물산 역시풍부하고 요족하다.
지행합일이 안되는 강남좌파형 지식인일 뿐....
8. 나의 스승 손곡선생(蓀谷山人傳)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益之이며, 쌍매당 이첨(李詹 1345-1405)의 후손이다. 그의 모친이 천출이었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했다. 원주의 손곡에 살았으므로 스스로 호를 삼았다. 이달은 어렸을 때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엮어내는 글이 매우 넉넉한 느낌이 들었다. 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맞지 않는 점이 있어서 그것을 버리고 떠났다.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을 따라다니며 서로 매우 잘 어울려 시모임을 이루었다. 이달은 바야흐로 소동파를 본받아 정수를 터득하여 한번, 붓을 들면 문득 수 백편을 써냈는데 모두 농섬(穠贍)하여 읊조릴 만 하였다.
하루는 사암 박순 상공이 이달에게 말하였다.
“시의 도는 마땅히 당나라 시 작품으로 정법을 삼아야 할 것이야. 송나라 소동파의시가 호방하기는 하지만, 수준이 한 등급 떨어진 것이지.”
그리고는 책꽂이에서 이태백의 악부 및 가음, 왕유와 맹호연의 근체시를 뽑아서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달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올바른 시의 법도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침내 예전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예전 은거하고 있던 손곡 집으로 돌아가 <문선> 이태백 및 성당시대 열두분의 대가, 유장경, 위응물의 시에서부터 원나라 양사홍이 지은 <당음>에 이르기까지 숨어서 외웠다. 낮을 이어 밤을 새우기도 하면서 무릎을 좌석에서 떼지 않았다. 이렇게 5년이 되자 어렴풋이 무언가 깨달음이 있는 듯하여 시험 삼아 시를 써보니 시어가 너무도 맑아서 예전의 모습이 완전히 씻겨졌다. 즉시 그는 당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를 본 받아서 장단편 및 율시, 절구 등을 짓고 글자를 다금고 소리를 연습하여 운율을 헤아려서 작시의 법도에 마땅치 않은 점이 있으면 달이 지나고 해가 넘도록 퇴고를 거듭하였다. 무릇 그가 지은 10여 편의 작품들은 세상에 꺼내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읊조리자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최경창이나 이광훈이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제봉 고경명과 하곡 허봉 등 당대에 시로 이름이 난 분들은 모두 성당시대의 작품이라며 추겨 세웠다.
그의 시는 맑고 신선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품격이 높은 것은 왕유, 맹호연, 고적, 잠삼 등의 시에 드나들 수 있고, 낮은 수준의 작품들도 유장경이나 전기의 작품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신라, 고려시대 이후로 당시를 배워쓰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사암 박순 상공이 고무해주신 힘이었으니, 마치 진섭이 한고조를 고무하여 한나라를 개국하게 한 공적과 같은 것이었다. 이달은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이름이 진동하였으니, 그를 귀하게 여겨서 그 사람됨을 버려두고 칭찬과 비방을 바꾸지 않는 사람으로 서 너 분의 훌륭한 분이 있었지만, 그를 미워하는 세상 사람들은 빽빽이 줄을 서 있었다. 야라 칠 더러운 모ayr을 가해서 법망에 넣으려 했지만 끝내 그를 죽여 그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달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했고, 성품 또한 방탕하여 세상의 법도에 구애되지 않았다. 게다가 세상의 예법에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렸다. 그러나 지금 일과 옛 사적 및 산수의 아름다운 흥치를 잘 이야기했고 술을 좋아하고 진나라 사람들의 글씨를 잘 썼다. 그의 마음은 툭 트여서 정해진 한계가 없었고 생업을 일삼지 않아서, 사람들은 간혹 이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평생토록 몸 붙인 땅이 없이 사방을 유리걸식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를 천대했다. 곤궁과 재액으로 늙어갔지만 그것은 진실로 시에 연좌된 탓이었다. 그 몸은 곤궁했어도 불후의 명시들은 남아있으니, 한 때의 부귀로써 이 이름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가 지은 작품은 거의 잃어버려 내가 4권으로 모아 전승되게 하였다.
外史氏는 말한다.
“송나라 태사 주지번이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다가 <만랑무가>에 이르러 무릎을 치면서 가탄하여 말하기를, ‘이 작품이 이태백과 또한 어찌 품격이 멀겠는가?’라고 하였고, 석주 권필은 그의 시 작품<반죽원>을 보고는 ‘이태백의 문집인 <청련집>에 넣는다면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이 어찌 망령되이 말하였겠는가? 이달의 시는 진실로 기이하여라!”
제가 신평이씨로 할아버지 이덕명의 자손입니다. 쌍매당 이첨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이런 분이 있는 줄 처음 알았으니 심히 부끄럽습니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이 달[ 李 達 ]
이칭별칭 자 익지(益之), 호 손곡(蓀谷), 서담(西潭), 동리(東里)
출생 - 사망 1539년(중종 34) ~ 1612년(광해군 4)
성격 문인
성별 남
본관 신평(新平 :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본관이 신평(新平 : 충청남도 당진)인 것이 확인되었지만, 서얼이어서 더 이상의 가계는 확실하지 않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 : 당나라 때의 유명한 열두 명의 시인)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지만 또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기도 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됐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한편 잠시 동안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의 한 여관에 얹혀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손곡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달의 시는 신분 제한에서 생기는 울적한 심정과 가슴 속에 간직한 상처를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시어를 맛깔나게 사용했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이달이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만큼 그의 오언절구는 유명했다.
한편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이달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 청신아려). 그 가운데에 높은 경지에 오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기풍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저서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다고 전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1) 이수광(李睟光)이 쓴 『서담집』의 서문(序文)만이 전하고 있다.
9. 앎을 함께하는 기쁨
○강릉은 대관령 바다 동쪽의 큰 도회다. 신라 때에는 北濱京이었으며 東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주원이 溟洲郡王으로 봉해진 이후 아름답게 수식하여 화려한 볼거리라든지 웅장하면서도 곱고 매우 뛰어나서, 서울과 다툴 정도였다. 습속 또한 글과 교육을 숭상하는 터라, 글판에 나서서 드날리는 선비들이 뒤꿈치를 이어 숲을 이를 지경이었다. 풍속은 온유돈후함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하고 검약하며 백성들은 질박하여 기교를 꾸미는 일이 없었다. 또한 생선과 쌀 생산이 요족하여 산천이 동쪽 지역에서 으뜸일 뿐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벼슬살이한 사람은 잊지 못하고 연연해하였다. 임기가 되어 떠나가면 우는 사람도 있었으니, 員泣峴(원님이 울고 넘는 고개)이 아직도 있는 것은 대개 그 징표라 하겠다.
○나는 세상에 곤액을 당하여 관직생활은 오히려 쓸쓸하니 장차 벼슬을 버리고 영동으로 돌아가서 만 권 책속에 좀벌레가 되어 남은 삶을 마치려 한다.
글은 세속의 욕심을 다 떨치고 중국에서 가져온 많은 책을 보관한 경포호 옆의 별장에서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
10. 벼슬이 뭐길래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는데, 산 남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愚磻이라고 한다. 그곳 출신 부사 김청택공이 경치 좋은 곳을 가려 암자를 짓고 <정사>라고 이름하였다. ......올해 공주목사에서 파직되고(1608년 40세)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벼슬이란게 무엇이관대 감히 사람을 조종한단 말인가? 고을 원님인 심덕현군이 암자가 피페해 졌는데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세 사람의 스님을 모으고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보내주었으며, 재목을 벌채하여 그것을 수리하게 해 주고는 부역을 면제하는 조건으로 그곳에 살면서 관리하게 해 주었다. 암자는 이 때문에 복구되었다 하겠다.
공주목사직에서 파직되었음에도 벌열귀족출신의 관리로서 부안현감의 사적인 온갖 배려와 보호를 받고 있다. 그는 낭만적이고 호탕한 쾌남아일지언정 정녕 군자는 아니다.
10. 부귀영화의 허망함에 대하여
○동대문 밖 40리에 도산이 있는데 산 밑은 모두 비옥한 토지로 평성공 박원종 상국의 현손인 몽필이 거처하고 있다. 기유년(1609년) 내가 휴가를 얻어 동쪽으로 성묘를 하러 가다가 박씨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주인께서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부귀는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영화로움도 믿을 게 못됨이 이와 같다. 오늘날의 군자들이 어찌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권세로운 자리를 아끼고 임금의 총애와 이익을 그리워하지만 그 몸은 평성공과 같은 공적이 없이 그 분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면서 스스로 오래토록 그것을 보전하리라 생각하니 이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중종반정의 1등 공신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박원종의 호화스런 별장이 백년이 지난 오늘 크게 황폐해진 모습을 보면서 부귀영화의 허망함을 느끼지만 스스로는 권세와 임금의 총애와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고 있음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11. 네 친구
○나는 세 번이나 2천석 봉록을 받는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문득 쫒겨났다. ........나는 죄를 지어 형틀에 묶여 곤장으로 맞은 뒤에 남쪽으로 귀양을 갔으니 이는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하느라고 곤액을 똑같이 하면서도 부여해준 재능과 성품은 갑자기 옯겨질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닐까?
○내가 우거하는 집은 한적하고 이져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뜨락엔
오동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대숲과 野梅가 집 뒤란으로 줄지어 심어져 있다.
1611년 탄핵을 받아 함열에 유배되어 사는 동안 지은 글이다. 자신의 재능의 뛰어남과 바람직하지 못한 성품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12. 소인배들의 행태
○요즘 나라에는 소인도 없고 군자도 없다.
대한민국 정치계엔 군자는 없고 건달들만 있다. 특히 야당에는 건달을 넘어 거의 깡패수준인 자들이 많은데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내밷고, 우직한 어린 백성들을 상대로 자신들에게만 맞는 온갖 궤변으로 사실과 논리를 왜곡하기를 일삼는다. 국무총리를 지낸 者(놈), 법무장관을 지낸 者(놈), 제일 야당 대표를 지낸 者(놈), 청바지 입고 히트 친 별 우습지도 않은 者(놈), 방송국 앵커출신이란 者들(놈과 년), 제일야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者(놈들)들 온 정신이 아닌것 같던 무슨 진보계열 대통령후란 者(년) 그 외 수많은 정치 소인배들 너나 할 것 없다. 궁지에 몰리면 온갖 악담을 퍼붓고 인격 있는 대통령까지도 무지막지 하게 막말로 욕해댄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지켜만 보는데, 논리로 안 되게 될 양이면 국민의 뜻이라며 자신들을 추종하는 아주 극소수의 무리들과 길거리로 나서거나 대선무효를 외쳐댄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며 복지를 떠들어 대고, 대기업 귀족노동자들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자신들은 온갖 지위와 명예와 추종자들의 존경과 영화를 한 껏 누리는 강남좌파들이다. 자기 자식들은 미국유학에다 귀족학교에도 보내는 등 온갖 귀족행세 다 하면서도 남 헐뜯는 입들은 미친개들 다름 아니다. 지행합일이 안되는 위선자들이다.
선거를 통해 교육계를 교사노조가 장악하니 학교를 경영하는 책임을 진 학교장과 교감은 교직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고,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다가는 곤욕을 치를 각오가 필요하다. 교감은 교장을 보좌하고 교무를 통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리다. 큰 학교는 12개가 넘는 부서의 업무를 관리하고 조정하며 수 십명의 교사들이 불편없이 근무하도록 배려하며, 행정실과의 업무도 조정하고, 학교장에게 주요업무 현황을 보고하고, 학교장이 바른 정책결정을 하도록 상시 협의한다. 교감이 그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공문을 책임지고 작성하여 발송하라 명령하니 심지어 어떤 소심한 교감들은 무엇이 그리도 무서운지 눈치를 보면서 교무실무사가 있음에도 제 스스로 공문을 작성하여 보내느라 정작 학교 경영에는 소홀하고 교무실무사는 공문작성에 책임이 없어 유유히 시간을 보낸다. 교사들의 잡무를 줄이기 위해 혁신학교나 교과교실제 추진학교에는 또 하나의 교무실무사를 주고 있는데도, 교감이 교무실무사를 잘 활용하여 잡무많은 교사들의 공문작성을 도와주도록 요청하는 게 아니라 노조와의 합의사항이니 무조건 교감이 모두 책임지라고 고집한다. 이론도 상황논리도 모르쇠하며 오직 교사를 위한 교원노조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니 무조건 교사들을 위해 따르라고 강요한다. 조합원이든 아니든 학교 상황을 잘 파악하는 교사들이 교감에게 공문작성해 보내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지만, 나는 어떤 몰지각한 조합원 교사가 은근히 ′교감공문‵ 운운하며 살며시 어필하는 상황을 당한 바는 있다. 엄청난 월권이요 파쇼적 행위다. 아무리 학교현장 경력이 없는 교육감님이라도 현명하신 그 분이 그 잘못된 행정을 모르실리 없건마는 시정되지 않고 있다. 교과교실제 교실을 만들어 수준별 수업을 하고 있는 마당에 1학기가 두 달이나 지난 5월에 느닷없이 수준별 수업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시기도 문제지만 학교교육과정도, 학교장의 경영권도 철저히 무시되고 무조건 명령하면 들으라는 행정방식이 자행된다. 교과부가 하는 일은 도교육청과 방침이 다르면 무조건 거부하거나 반대하고 재판을 해대지만, 일선 학교에는 일방적 지시가 내려지고 따르라하니 민주행정과는 거리가 멀고 학교경영의 자율성은 철저히 훼손된다. 남에게는 비 민주네 독재네 파쇼네 비방하던 자들이 정작 내가 권력을 잡고서는 온갖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저지르는 치졸한 파소적 행동은 미래를 위해서 또는 다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변한다. 비겁한 위선이다.비 지성이요 반지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이미 그들은 권력에 심취해 버렸기 때문이다. 잡은 권력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표가 된다면, 다수에게 어필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인 듯 보인다.
다행이 권력의 핵을 차지한 일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성을 갖추고 있고, 우리학교에는 무지(?)한 교직원이 단 한사람도 없이 아름답고 보람 있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기꺼이 동참해 주고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비민주적 행동을 보이고 있는 도교육청 집권부와 아무런 관계없이 나는 민주적 리더십으로 학교를 경영하며, 혁신학교를 도입하고 오직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그들을 아름다운 인성을 갖춘 실력 있는 당당한 미래의 인재로 양성하기 위해 더욱 힘찬 노력과 추진을 계속하고자 한다.
13. 호민에 대하여
○천하에 두려워할 할 만한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고려시대에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산과 못의 이익을 백성들과 공유하였다. 商人을 통하게 하여 工人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며, 또한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소비하여 국가에 비축한 것이 여유로웠다. 그래서 큰 전쟁이나 장례를 치른 경우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았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三空(흉년들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 서당에 학동들이 오지 않는 것, 뜰에 개가 없는 것)을 걱정해 주었다.
우리 조선은 그렇지 않다. 보잘것없는 백성으로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예절을 중국과 똑같이 한다. 백성들이 생산물의 50%를 세금으로 부과하지만, 관청으로 돌아가는 이익은 겨우 10%다. 그 나머지는 간사한 개인들에게 약탈당해서 어지러이 흩어지고 만다. 또한 창고에는 저축해 둔 것이 없어서 일이 생기면 1년에 두 번 세금을 거두기도 하니, 고을의 수령은 그것을 빙자해서 가혹하게 수탈을 하여 그 끝을 모를 정도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은 고려 말기보다 더 심하다.
조선 중기시대 인으로는 오직 허균만이 할 수 있는 시원스런 정치사회 비판이다. 저처럼 고전과 역사를 궁구하여 앞서가는 시대정신으로 나라의 제도와 악습을 통렬히 비판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오직 현실에 안주하여 부귀영화만을 꿈꾸며 당파싸움에만 골몰하는 저 양반관료들이 백성을 먼저 생각하기나 할 것인가? 개혁정신을 가진 일단의 관료들이 백성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고자 해도 저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반대부터 하고 보는 성리학에 찌든 양반들에게서는 애시당초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17세기 이루 실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개혁을 주장하고 정조라는 현명한 군주가 있었지만 역시 근본적 개혁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하기는 허균이나 대부분의 실학자들조차 신분철폐를 강력히 주장하거나 부자의 세금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법 제정까지 주장하지는 못했다.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국민들의 끝없는 복지정책의 확대 요구는 정당한 것인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주민등록을 악용하여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국가의 보조를 받으며, 능히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국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부러 일하지 않는 것까지도 그저 복지사회로 가는 진통으로만 여겨야 할 것인가? 대선에서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벼랑 끝 권력투쟁의 산물로 복지공약을 남발하고 정권을 잡고서는 돈을 쏟아 붇는다. 엄청나게 늘어나는 국가 부채는 누가 갚으라는 것일까? 2007년에 300조였던 빛은 2013년 현재 1000조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계산하기도 어려운 저 빛(대략 1천억 달러)으로 인해 만일 어느 땐가 무슨 이유로 경제가 무너지게 되는 날, 우리의 가정경제역시 파탄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먹을 것을 생산하는 농토는 일정정도 꼭 필요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닌가?
참, 오늘 저녁 뉴스에 어느 항구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십몇 년 동안 어부들에게 자릿세를 받아온 조폭이 밝혀졌다는데 당사자 본인과, 이들을 오랫동안 눈감아준 해양경찰 및 항만청 관계자가 입건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로부터 폭력으로 금품을 십 수년간 갈취한 조폭이 겨우 입건? 조폭 일망타진한다는 경찰의 큰소리는 동네 개 짖는 소리만도 못한 게지. 개혁이란 정말 어려운 것임을 알게 해주는 사건이 아닐까?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안의 그들 (0) | 2013.08.13 |
---|---|
이용휴 이가환 산문선 (0) | 2013.07.27 |
이조시대 서사시 2 (0) | 2013.07.17 |
정약용-뜬 세상의 아름다움 (0) | 2013.07.16 |
이옥 산문집 (0) | 2013.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