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작은 것의 아름다움-남공철

청담(靑潭) 2013. 10. 4. 23:30

 

 

작은 것의 아름다움

-남공철1760(영조 36) ~ 1840(헌종 6)산문선-

안순태 옮김

남공철은 교과서에 이름이 비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 후기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인물이므로 그의 약력을 먼저 알아본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 금릉(金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대제학 유용(有容)이다.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정조 8) 음보로 세마(洗馬)에 등용되어 산청(山淸)·임실(任實) 등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에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부교리 · 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인 동지인 김조순(金祖淳) ·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운동에 지목되어 그 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하였다.

순조즉위 뒤 《정종실록》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아홉 번씩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1833년에 영의정으로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평소에 김상임(金相任) · 성대중(成大中) · 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경전의 뜻에 통달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고, 많은 금석문 · 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순조 · 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자편의 시문집으로는 《귀은당집(貴恩堂集)》 · 《금릉집》 · 《영옹속고(穎翁續藁)》 ·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 《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洗馬 : 조선 시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두었던 정구품(正九品) 벼슬. 동궁을 모시고 경호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며 좌우 각 한 명씩 두었다.

 

1. 붓끝으로 사람 끌어안기 -남공철론 : 옮긴이

●1792년 10월 19일 .....처음으로 문체로 처벌받은 이가 남공철이었다.... 며칠 뒤 자술서를 받고 그를 복직시키면서 ...한 달쯤 후에 정조는 남공철을 조용히 부른다.

?그대가 연암을 회유해서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치게 하시오.?연암의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돌면서 선비들의 문체가 더욱 기이하게 변했으니 그 책임을 연암에게 묻겠다는 것이다....하지만 연암은 정조의 지시를 완곡히 거부한다.

 

2. 술을 좋아하는 화가 이야기 : 최북

3. 종이 밖이 모두물이잖소 : 최북

4. 마당발 시인 이단전

●이단전(1755-1790)은 여항인이다....군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군은 술을 좋아했다. 술을 마신다음 비록 사대부를 만나더라도 그 사대부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사대부를 업신여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단전은 유언호(1730-1796)의 종이었다....그는 한쪽 눈에 백태가 낀 지독한 추남이었던 데다 키가 작고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했다...당시 서울에서 그림깨나 그리는 화가나 글깨나 한다는 양반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는 언제나 시 모임, 술 모임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빠지지 않고 따라다녔다...어떤 사람이 이단전의 그런 행실이 예의가 아니라고 탓하자 이단전은 웃으면서

?나 같은 종놈에게 예의가 다 무엇이오? 예의는 내게 잠방이 속의 이나 서캐와 같은 거지?라 했다고 한다....남공철에게 최북을 소개한 것은 이단전이다.

 

5. 거짓된 세상에 하는 거짓말 : 김용행(1753-1778)

●영조 말년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모두 시문을 잘 짓는 다고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세 사람이 모두 군과 어울려 날마다 오가며 술을 마시고, 서로 경쟁하면서 그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두 스스로 김용행의 재주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6. 참된 즐거움 : 남유두(1725-1798)

●의롭지 않으면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

 

7. 궁핍해 질수록 시는 더 공교로워지고 : 남유형(1715-1778)

●그 옛날에 ?궁핍해진 자가 되고 나서야 시에 능한 자가 된다?고 한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시인이 정치에 나서고 야당 대통령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인가를 하고 국회의원감투까지 쓰며 나타났다. 그가 또 시를 쓸 수 있을까?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8. 선비가 절개를 지킬 수 없으면 : 박남수(1758-1787)

●아아! 나는 늘 남의 좋은 점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나는 약관 때부터 글을 서서 함께 교유한 이들이 많았고 名士도 많이 알았지만 그 가운데 박산여가 가장 뛰어났었다.

●내 일찍이 연암 박지원과 함께 산여(박남수)의 벽오동에 모인 적이 있었다. 청장 이무관(덕무), 정유 박차수(제가)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밤은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었다. 무관과 차수도 둘러앉아서 듣고 있었는데 산여가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훌륭하기는 하지만 稗官奇書를 좋아하시니 古文이 興起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연암이 술에 취해

?네가 뭘 안다고!?

하고는 전처럼 다시 읽었다. 산여 역시 취하여 의자를 끌고 촛불 옆으로 가서 <열하일기> 초고를 불살라 버리려 하였다. 내가 급히 만류하자 그만 두었다.연암이 화가 나서 마침내 몸을 돌리고 누워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연암이 술이 깨어 옷을 정리하고 꿇어앉더니

?산여는 이 앞으로 오게. 내 이 세상에서 불우하게 지낸 지 오래되어 문장을 빌어 불평한 기운을 펴서 제멋대로 노니는 것이지 어찌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산여와 원평(공철)은 모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아름다우니 글을 신중히 지어 나를 본받지 말고 正學을 진흥시키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아 나중에 나라에 쓰일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네. 내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벌을 받아야지?하고 술잔을 들어 다시 마시고, 무관과 차수에게도 바시기를 권하여 드디어 잔뜩 취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이 일로 연암의 뛰어난 기질과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아량에 감탄했다. 그리고 산여의 의론이 옳은 것임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산열 h하여금 몇 년 더 살게 했더라면, 마침내 그가 배운 것이 반드시 볼 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다.

※박지원(1737-1805) 이덕무(1741-1793) 박제가(1750-1805)

박남수(1758-1787) 남공철(1760-1840)

위 상황이 전개된 시기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고 아직 벼슬길(1786)에 나가기 전인 1781년~1785년 사이이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었고 남공철은 아직 벼슬길(1783)에 나가기 직전의 시기로 보인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연암의 제자이며 실학파로서 북학파들이니 요즘 말하면 진보파요, 박남수와 남공철은 그중 젊지만 벌열집안출신으로 보수파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대략 1782년으로 가정하면 박지원은 46세, 이덕무는 42세, 박제가는 33세, 박남수는 25세, 남공철은 23세가 된다.

 

9. 부디 살아계시기를

손옹은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술을 좋아했다.....옹은 한 평생 동안 기생집과 술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도 나한테 하는 말은 늘

?사대부는 마땅히 글을 읽어 功名을 이루어아지?했으니 나는 예전부터 묵묵히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옹은 늙어서 한층 곤궁해져 식구들을 데리고 호숫가에 살면서 벼농사를 짓고 부추나 오이, 박, 마를 기르고 소리개를 키웠다. 밭을 갈기에는 힘이 부족했지만 때맞춰 항아리를 안고 물을 날라 채마밭에 물을 주었다. 옹은 이에 한사람의 훌륭한 농부가 되었다.

한 해에 한번은 서울에 와서 나를 보곤 했는데,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을 하고 사슴처럼 민첩하게 걸어 다녔다. 벗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노닐었는데 벗들이 번갈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면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는 감칠맛 나는 유창한 목소리로 길게 노래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1795년 사도세자를 호종했던 노고를 치하하여 한 직급 올려주도록 명했다. 옹은 이미 정3품 통정의 품계에 올라있었는데 특별히 종2품 동지중추부사의 직책을 준 것이다.

 

10. 어느 것이 소리고 어느 것이 거문고 소리인가? : 민범대

●시는 性情에서 나오는 것이고 거문고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민범대는 나에게 시를 배웠다....임인년(1782) 가을, 나는 민군과 함께 철금(구리줄로 된 거문고)을 들고 남산에 갔었다. 군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시를 끊임없이 지어냈다.

 

11. 좋은 벗 사귀기의 어려움 : 권지연

●나의 벗 권심원이 죽었다. 그의 나이 이제 서른 둘이다. 심원의 사람됨은 질박하고 곧았다.

●손을 잡고 월파정에 올라 술을 마시고 취해서는, 심원은 굴원의 <離騷>와 제갈공명의 <出師表>를 읊조리더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장부의 가슴속에 절로 높고도 울적한 기운이 있어 저는 매번 이 두 사람의 글을 읽다가 내려놓고는 강개하여 눈물을 흘립니다.?나는 속으로 그의 의기가 대단히 높으나 마음속에 답답함이 있어 일이 잘 풀리지 않음을 슬퍼하였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죽었다.

 

12.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하라.

●禍福感應 :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

 

13. 잡목과 복숭아나무가 함께 자라는 정원

●나는 성품이 게을러 일찍이 동산을 가꾸지 않아 꽃나무가 거의 없다.

 

14. 청산은 약이 될 만하고 : 임실의 최생

●제가 임실에 삼 개월 머무르는 동안(임실현감 : 1990년 6월)심하게 피를 토하고 때때로 기진맥진하여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였습니다. 한 두 벗이 전하기를, 족하(최생)의 이름난 정원이 이곳에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구름과 숲이 마치 물위에 떠있는 누각이나 산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15. 책 사 모으기

●사람들은 사물에 대하여 모두 癖이 있다. 벽은 병이다. 그러나 군자도 평생토록 흠모하는 것이 있으니 거기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구슬이나 돈처럼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다닌다. ...그러나 충족시키고 난 다음에는 禍각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취하고도 禍가 없으며 소장하여도 끝이 없는 오로지 書冊뿐이다.

 

16. 허영심의 끝 : 안명관(1725-1778)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창덕궁 위장에 배수되었다. 4년 뒤에는 동지중추부사에 발탁되었다. 군의 사람됨은 호탕하고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며 남을 자기처럼 믿었다. 옷의 장식이나 말 장식이 번드르르하지 않으면 부끄러워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 재산을 자주 말아먹어 끝내는 끙끙 앓다가 죽었다.

...(은점과 방죽사업에 실패하고)이때부터 군은 더욱 곤궁해져서 다시는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았다. 매번 가을바람이 불면 일어나서 낙엽 떨어지는 것이나 물이 말라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더욱 허망하여 스스로를 탓하더니 얼마 안가서 병들어 죽었다.

 

17. 병이 귀한 이유 : 조진구

●벗이 귀한 이유는 단지 과오를 범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선한 행동을 하도록 격려해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록 작은 技藝나 사소한 일이라도 道에 맞지 않으면 또한 서로 말해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18. 글자도 얼굴처럼 : 이현수

●어찌 족하께서 진정 글자 쓰는 법을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앞으로 쓸데없다고 字學에 힘쓰지 않으셨기 때문이겠지요...족하께서는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해박하여 초연히 홀로 남들보다 특출 나지만 字學에 있어서는 오히려 남의 말을 듣고 힘쓰셔야 할 것이 있어 감히 말씀드립니다.

 

19.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 산청의 강사백

●...하지만 세상에서 의사임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의사의 병입니다. 약을 지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자가 곧 성인이 아니겠습니까?...또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나라를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20. 이익을 보면 두려워할 줄 알아야지(雜說)

세상에서 욕심을 무릎 쓰고 채우려는 자는 늘 無妄의 재앙에 결려들게 된단다. 그러나 이익을 보고 두려워할 줄 아는 자는 화를 면하니 이것은 유념해 둘 만 한 것이지.

●늘 이런 조심성과 겸허함이 있었기 때문일까? 남공철은 74세에 스스로 벼슬을 물러날 때까지 이렇다 할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가히 혼돈의 시대이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에 <카오스의 삶>이란 배너를 설치하고 혼돈의 시대를 말해주는 놀라운 사건들을 정리하여 스스로의 교훈으로 삼는다.

권력을 가진 이는 자신도 모르는 중에 권력을 남용하게 되어 敗家亡身하고, 돈을 가진 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을 함부로 쓰다가 敗家亡身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사회에는 이런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非一非再하여 이제 특기할 만한 것만 기록하기에는 넘치고 넘친다. 최근 며칠사이에 유명가수 송대관씨 부부가 부동산 사업으로 온 재산을 날리고 사기죄로 부인이 기소되고 본인은 입건되었다 하고, 차기 대선후보라는 정치거물 새누리당의 김무성 의원은 간담회자리에서 술에 취해 어느 일간지 여기자에게 부끄러운 행동(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여 구설수에 오르며 성추행으로 몰려 대권행도에 위기라 할 수 있는 곤경에 빠져 있다.

 

21. 20년 뒤에 짓는 그림 감상문

●나는 젊어서부터 서화에 대한 癖이 있어 명품을 파는 자를 보면 옷을 벗어서라도 그것과 바꿨다. 남의 집에 좋은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곧 가서 보고 모두 품평을 하였다.

 

22. 이름을 고친 정군에게 주는 글 : 정희순

●성인의 도가 세상에 밝혀지지 않으면 異端이 성인의 도를 어지럽힌다는 것을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데 나는 성인의 도를 어지럽히는 것 중에 유독 科擧의 폐단이 가장 심하다고 생각한다.

●선비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데, 벼슬길에 나아간 자 또한 자신도 모르는 잠깐 사이에 날마다 義에서 멀어지고 날마다 이익에 빠져든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스승과 벗은 제쳐두고 벼슬자리에나 급급해하기 때문에 모두 죽을 때까지 과거시험에만 빠져 지낸다.

 

23. 상자속 옥류동

●내가 낭이(산청)에 있을 때 오랫동안의 공무로 골치가 아파 매번 퇴근 후에 고을의 父老들에게 한번, 가볼 만한 산이나 물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없다고 하길래 안타까워서 크게 한 숨 지은지 오래다.

...관리들은 사무에 매여 있고, 농부나 목동들은 비록 그것을 보아도 기이한 줄을 알지 못하니 시골 사람들이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음이 이와 같구나.

 

24. 스승과 벗 사이 : 오윤상

●오윤상은 나보다 열네 살 위인데, 두 집안이 대대로 사귀어 온 교분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나와 친구 사이로 지내려 했다. 그래서 가끔 그를 찾아갈 때마다 내가 절을 하려고 하면 사집은 누차 말리고는 반드시 서로 읍하고 앉았다.

●그가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장차 政事에 베풀기 위함이네. 그래서 쓰이게 되면 나아가 도를 행하고 버림받게 되면 물러나 숨어 지내는 것이지... ?

●연하자는 연장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연장자는 연하자를 벗으로 대우하는 師友關係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25. 이별의 순간

●우리들은 모두 젊고 건강하니 나중에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도 오히려 이렇게 이별에 연연해하니 만약 나이가 들게 되면 어떠하겠소?

 

26. 아내의 빈 자리

●나의 외종형 현감 잍9형에겐 어진 아내가 있었으니 순창조씨라 한다. ...1786년에 졸하였다...현감공이 내손을 잡고 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아내가 죽었네. 나는 불행하게도 어진 아내를 잃고 말았네. 내 아내는 나와 50년을 살다가 죽었네. ....내가 가난하긴 했어도 내 아내는 기쁘게 처신했네....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검소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매우 사랑을 받았다네....매일같이 집안일에 힘썼고...시집을 와서 우리 집이 오랫동안 벼슬길이 끊어져 들어오는 봉록이 없는데도 매일같이 한 되의 쌀로 밥을 지어 시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들까지 먹였다네.?

 

27. 조카의 죽음에 부치는 글

●孺人은 1745년에 태어나서 1783년에 돌아갔으니 서른 아홉 해를 살았다. 유인은 나의 형님 성재공 휘 공보(1721년생)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어 나의 부친 문청공(남유용 1698-1773)께서 길러 주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양친을 아버지, 어머니라 불렀다.

※남유용이 진사가 되던 해인 1721년(24세 때)에 낳은 아들 공보의 딸이다. 남공철은 남유용이 63세 때 나은 아들이다.

 

28. 여름날의 시험공부

●1781년 나는 민성능(민극대), 이원리(이현수) 한자정(한상리)과 함께 성북에 있는 김시 제자원에 모여 진사 시험공부를 하였다. ...그 뒤로 성능과 원리는 사방을 떠돌아다니고 나와 자정 또한 아직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서울에 있으면서 그 세 사람과 다시 모일 장소를 마련하여 술 한잔 들어 서로 권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해주는 글이다.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학문에 뛰어난 영재인 남공철이 1780년 21세에 초시에 합격한 뒤 복시에 합격하지 못하여 진사가 된 못한 채, 1783년 24세에 음서로 벼슬길에 나선다.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낸 뒤 1792년 33세에 이르러 식년시(각종 사전에 친시로 되어 있는데 오류이다.)에 그것도 병과 1위로 급제한다. 합격자 59명중 11위이다. 장원급제는 이조원(1758-1832)이다. 남공철이 1817년 정승이 되어 15년간 정승으로 있을 때 이조원은 여러 판서를 두루 역임하다가 1827년 역모사건에 몰려(당파싸움의 희생이 된 억울한 죄)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29. 죽은 친구의 편지 : 김재련(1750-?)

●나와 뜻이 잘 맡는 사람은 오직 국기 한 사람 뿐이다. 국기의 사람됨은 깨끗하여 남과 쉽게 어울리지 않았다.

 

30. 벗 ․ 술 ․ 눈물

●1779년 여름, 나는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친구 박남수의 기소원 정자에 모였었다. 그때 날씨가 무척 더워 모두들 늙은 소나무 아래나 파초 그늘 밑에 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옷을 풀어 헤치고, 도 어떤 이는 배를 다 들어내고 누워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취해서는 천하 문장의 높고 낮음, 일의 시비에 대해 한껏 토론하다가 강개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그 意氣를 즐길 만 했다. 조금 뒤에 산여가 다시 저자에서 술을 사 와서 객들을 더욱 취하게 하고는....

※당시 남공철은 20세, 박남수는 22세, 이덕무는 39세, 박제가는 30세였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그해 3월부터 규장각 검서관으로 벼슬을 시작한 상태였다.

 

31. 가보지 않고 그린 화원

●이원좌가 자기의 화원에 오색 국화를 심었는데, 그 아래에는 시내가 있다.....원좌는 성품이 맑고 곧아 사물의 是是非非에 의해 부림을 당하지 않고, 홀로 이 화원에서 즐기되, 싫증을 내지 않는다.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서리가 높고 깨끗하면 원좌는 객들을 이곳에 모아, 종일토록 가만히 앉아 술을 따르고 시를 짓는다. 그리고 시내에서 고기를 낚고 화원의 국화를 달여 술을 마시고 퉁소를 불고 휘파람을 불면서 농담하고 서로 권커니, 부르거니 즐긴다. 그러다가는 이윽고 주인과 손님이 각자 몸을 일으켜 강개하여 운다. ...내가 비록 이 화원에 가보지는 못하였으나, 뜻은 일찍이 이 화원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

 

32. 제대로 유람하는 법

●화림동(함양 화림동천)은 삼진 가운데 하나다. 나는 아직 그곳에 가보지 는 못했지만 그곳을 두고 지은 시가 있어 그곳 산수의 경치가 이미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다.

 

33. 문명으로 그린 진주담

●나에게는 승려 친구 둘이 있는데 법명과 혜령이 그들이다. 혜령이 금강산에 노닐러 간다면서 나에게 서문을 서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일찍이 법명과 함께 금강산의 승경지에 대해 평한 일이 있는데, 그는 眞珠潭을 제일로 쳤다.

※남공철은 40세 때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금강산에 간 적이 있다.

 

34. 만년 요새의 은둔지

 ●광주부 관아 서쪽 30리를 金陵이라 한다. 금릉은 평평한 밭과 푸른 들판 가운데에 있는데, 먼 산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마치 병풍을 벌여 놓은 것 같다. ....가운데에 주점이 있고....몸을 구부려 문처럼 생긴 곳을 들어가면 그곳이 바로 둔촌이다.

●금릉과 둔촌은 청계산으로부터 구불구불 돌아 내려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세시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오가며 계를 맺는다. 1801년에 내가 이곳에 정자를 사서 又思潁亭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구양수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위에는 초가집이 한 채 있었는데 예전에는 마을의 서생 김씨가 살던 고시이다. 내가 또한 30냥을 주고 그 초가집을 사서 나에게 글을 물으러 오는 자가 있으면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35. 구양수를 그리워하는 마음

●의양자(남공철)는 평생 동안 구양수의 사람됨을 흠모하였고 그 문장과 덕업을 흠모하였으며 구양수가 潁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흠모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 정도가 심하였다. .....그러나 돌아가 쉬려는 뜻은 일찍이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구양수(1007-1072)는 마흔네 살 때 영수가에 정자를 지어두고 64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그리고 2년 뒤에 죽는다. 남공철은 15년간 정승으로 일하다가 74세가 되어서야 둔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6년이 더 살다가 80세까지 장수하다 죽는다. 요즘으로는 100세까지 산 것이나 다름없다.

 

36. 옥경산장에 부친 기문

●둔촌은 옥경산 아래에 있는데 주위를 빙 둘러 10리 정도 된다. 물이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데 검푸른 것이 술을 빚을 만하다고 해서 淸溪라 이름 붙였다. .....우사영정의 동쪽에 작은 집을 지었는데 모두 아홉 간이다. ...뜰에는 파초와 작약, 벽오동 수십 그루를 심고 정원 뒤편에는 소나무 몇천 그루를 심고는 <산장>이라고 편액하였으니 청명과 곡우 사이에 완성된 것이다.

●때때로 시골 농부들과 농사일에 대해서 애기할 뿐 정치의 잘잘못이나 인물의 선악은 정대 입데 답지 않았다. 손님이 가고 나면 대나무로 얽어 만든 가마를 내어오게 하여 푸르고 평평한 밭두둑이나 푸른 들 사이를 다녔는데 험한 길이 나오면 그냥 돌아왔다.

 

37. 그림으로 달래는 그리움

●의양자(본인)가 산을 산지는 오래되었지만 귀거래하지 못하여 한번 城市로 들어가면 이러한 풍경이 문득문득 꿈에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이 그림을 그려 때때로 펼쳐본다. 옛 사람의 말에?내 사는 곳에는 산이 없지만, 내 눈엔 산이 없었던 적이 없다 ?라 한 것이 이러한 뜻이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총, 균, 쇠  (0) 2013.11.14
이규보-봄 술이나 한잔 하세  (0) 2013.10.21
알아주지 않는 삶  (0) 2013.10.02
누워서 노니는 산수  (0) 2013.09.18
유득공 산문선  (0) 2013.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