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노니는 산수
-조선시대 산수유기걸작선-
이종묵 편역
이 책은 많은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다녀본 아름다운 산수를 예찬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쩐지 대부분의 저자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아주 오래 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수명을 조사하여 보니 조선시대 사대부 20여명의 평균수명이 무려 78세나 된다. 주로 실학자들의 글을 모은 다른 책의 저자들 평균수명은 66.5세였다. 조선시대 민초들의 평균수명을 대략 42세로 보고 있고 고려와 조선의 왕들 평균수명이 46세임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사대부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승 판서에 이르고, 특히 자연과 산수를 즐겨하여 산수예찬의 글을 남길 정도로 삶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대개 장수하고 있고 그 수명은 오늘날로 치면 거의 100세까지 장수한 셈이다. 내가 40대 이후 87세까지만 건강하게 살겠다고 호언하다가(1990년경 이후 남자평균수명이 내내 60대 후반이었다가 2000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남자 71.7세, 여자 79.2세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세계최고수준의 의료선진국이 되고 복지가 급속히 확대됨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급격히 증가하여 2012년 평균 81세(여자 84세, 남자 77세)가 되고 보니 나도 덩달아《건강하게 90까지》로 건강캐치프레이즈를 바꾸었는데 요즈음엔 너도 나도 100세 시대를 말하며 의당 100세까지 사는 것으로 간주들을 하니 이참에 나도《건강하게 100살까지》로 바꿔 볼까나? 우리 할머니만큼 100살 까지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첫째가 小食이요,
둘째는 運動이요,
셋째는 無慾이요,
넷째는 人間親和(가족, 친구)요,
다섯째는 自然親和(旅行)를 더할지라. 그런데 소식과 무욕은 너무 어렵지 아니한가?
1. 풍악이 있는 삼각산 단풍놀이(이정구 1564-1635) 72세
●한강 한 줄기가 완전히 얼음이나 흰 비단을 깔아 놓은 듯 뻗어 있었다. 구불구불, 굽이굽이 도성을 에워싸고 흘렀다. 먼 곳의 봉우리들과 어지럽게 놓인 섬들이 그름 가에 어른거렸다.
2. 인왕산에서 본 서울 도성(김상헌 1570-1652) 83세
●양곡(소세양)은 문장으로 세상에 현달하고 부귀하였는데 또 집을 잘 설계한다는 명성이 있어 건물 꾸밈이 매우 공교하고 화려하였다. 교유한 사람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그가 짓고 읊조린 글들은 반드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만 한데도, 백년이 채 되지 못한 지금 한둘도 남아 있지 않다. 선비가 의지하여 후대에 베풀 바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법으로 금제 한 것이 느슨해져서 온 산에 한 길 이상 되는 큰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난 후 23년, 태어나는 아이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집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처럼 왕성하다.
●경복궁 빈 정원은 성이 무너지고 목책이 빠져 있다. 용과 봉을 새긴 전각들은 모두 무성한 잡초에 묻히고, 그저 경회루 앞의 못에 연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석양에 어른어른 하는 것만 보였다.
●동궐의 두 전각은 우뚝 솟아 붉은 빛과 흰빛이 중천에 어리고, 금원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울울창창하다.
●아아! 아침저녁 기거하는 곳에서 늘 접하고 있던 것을 태어난지 43년이 되어 처음 한 번 올라 보았다.
3. 운악산(포천시 소재)에서의 꿩사냥(성대중 1732-1812) 81세
●임진년(1772년) 그믐달 매곡 이공과 완계 서공, 서유문, 권공저를 따라 운악산 서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밤에 산사에서 잤다.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날 산길을 따라 북으로 갔다. 매 네 마리, 말 다섯 마리, 개의 숫자는 매와 같고 사냥꾼을 그 배였다.
●산골의풍속이 순박하고 나물과 밥이 맛있었다. 나무 등걸을 지펴 불을 피웠다. 생선을 굽고 술을 데웠다. 실컷 마시고 질탕하게 놀았다. 두밤을 자고 돌아왔다. ....석양이 고개마루에 걸려 연기가 이어져 있었다. 하인들이 마을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말은 질풍과도 같이 빨랐다. 나이든 사람의 흥이 그치지 않아, 이씨의 부락에 이르러 매화를 완상하고 다 취한 다음 길을 나섰다.
4. 달밤에 찾은 운주사(온양소재) 이산해(1538-1608) 71세
●나는 승려의 등을 빌려 업혔다.
●이날 저녁 가는 구름까지 다 걷히자 푸른 하늘이 얼음처럼 밝았다. 수레바퀴 같은 둥근 달이 점점 중천에 오르고 별과 은하수가 은은히 빛을 흘리는데, 천지사방 천상천하가 맑디맑아 만 리 먼 곳까지 시야에 막힌 것이 없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천 개 만 개 바위와 골짜기가 그 모습을 모두 드러내었다. 산 아래쪽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이 눈앞에 뚜렷하게 다 보였다. 貢津이남 水南의 여러 산들을 하나하나 아득한 데까지 분별해 낼 수 있었다.
이윽고 푸른 그름 한 무더기가 산 너머에서 일어나 하늘 한 복판을 가렸다. 바람이 일어나 동남쪽까지 불어왔다. 소나무 잎이 서로 부딪혀 소리를 내는데, 계수나무 혼백인 달이 구름에 가려져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였다. 골짜기는 은은하고 숲은 음산하였다. 이름 모를 새가 울며 날아올라, 메아리가 서로 답을 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쓸쓸하여 비감이 들게 하고, 숙연하여 두렵게 하고, 오싹하여 놀라게 하였다. 마치 신선이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면서 먼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소리가 가물가물 귀에 들릴 듯하였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기다려 보아도 끝내 신선을 만날 수는 없었다.
5. 폭설 속에 찾은 천방사(이정전 1567-1644) 78세
●사미승 10여인이 두레박줄을 드리운 듯이 줄줄이 아래로 내려왔다.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곧바로 그 어깨와 등을 빌려 업혔다.
●기미년(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 군사를 보내었을 때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이 다른 풀은 먹지 않고 모두 솔잎만 먹고 오게 하였는데 수십 일을 아무 탈 없이 몸을 보중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6. 문석이 아름다운 수정사(청송 소재)(허훈1836-1907) 72세
7. 예순 일곱에 오른 관악산 연주대(체제공 1720-1799) 80세
●조금 있으니 흰 중옷을 입은 사람 4-5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이미 정오가 되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놀러온 사람들중에 우리보다 일찍 올라간 이들이 만길 절벽위에 서서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주대는 구름 속까지 우뚝 솟아 있다. 내 자신을 돌아보니 천하 만불중에 감히 높이를 다툴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8. 미지산(용문산) 윤필암에서 기른 높은 안목(김윤식1835-1922) 88세
●한강에서 물결을 거슬러 동쪽으로 가면 모두 큰 협곡이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가면 지세가 더욱 높아지고 강물이 더욱 거세진다. 그 옆의 벼랑과 산들은 모두 기세가 우뚝하다. 그 정수가 모이고 맥이 몰려들어 걸출하고 우뚝하게 양근과 지평사이에 서려 鎭山이 됭 것이 바로 미지산이다.
9. 유년 시절의 수종사(남양주)를 다시 찾은 즐거움(정약용 1762-1836) 75세
●건륭 기묘년(1783) 봄에 나는 경학으로 진사가 되어 소내로 돌아가려하니 부친께서 말씀하셨다.....소내로 돌아온 사흘 후에 수종사로 가려 하였다. 따르는 젊은이들이 또한 십여 인이었다. 어른들은 탈것에 타고 갔는데 어떤 이는 소를 타고 가고 어떤 이는 노새를 탔다. 젊은이들은 모두 걸어갔다. 절에 이르니 해가 막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였다.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에는 저녁 햇살이 막 붉게 비쳤다. 이에 강물 빛과 햇빛이 창에 어리비치었다. 여러 공들과 서로 즐겁게 노닐었다. 한밤이 되니 달빛이 낮처럼 밝아, 서로서로 배회하며 관망하였다. 술을 내오게 하고 시를 지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나는 세 가지 즐거운 일에 대해 말하여 여러 공들에게 들려주었다.
10. 책 읽는데 좋은 치악산 대승암(안석경 1718-1774) 57세
●스님 한분과 대승암에 올랐다. 가는 길에 범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가 맑고 커서 온 산이 진동하였다. 도중에 약초를 캐고 꽃을 땄다.
●화창한 봄날의 사물들이 모두 유유자득하였다. 내 어찌 깊이 사랑하여 돌아보며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1.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난 법천사(원주) 허균(1569-1618) 50세 처형
●비석 하나가 절반이 동강난 채 풀 더미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국사의 탑비였다. 그 심오한 문장과 굳센 필치가 누구의 솜씨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물건이다. 나는 한참을 어루만지며 탁본을 할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약 4.55m, 비신(碑身) 높이 2.97m, 너비 1.42m이다. 법천사 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1년(1067)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과 함께 세운 것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은 현재 서울 경복궁 안에 있으나 비는 원래의 위치에 보존되어 있다.
12. 퇴계의 덕을 닮은 청량산(봉화군)(박종 1735-1793) 59세
●퇴계선생이 이 산을 특히 좋아하였다.....연대에 앉아서 박군에게 삼가 선생이 지은 청량산가를 부르게 하였다.
13. 소동파를 넘어선 위항인의 서호 뱃놀이(변종운 1790-1866) 77세
●천지도 한 순간이요, 우리 인생도 잠시인지라. 지금 사람들이 옛 사람을 보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말 일이겠소? 고인이라고 해서 지금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고 어찌 다시 한탄하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있겠소?
세상에 태어나서 옛 성인들처럼 덕을 세우지도 못하고, 또 옛 호걸들처럼 공을 세우지도 못하는데, 근근이 일생동안 글을 짓는데 힘을 쏟고 말단의 일에 구구하게 매어 있으면서 뒷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기를 구한다면 이 또한 쓸픈 일이지요. 물이 흘러가도 빠름을 다투지 않고 구름이 떠가도 마음이 없는 법이라, 술을 마시어 취하고 차를 마시어 깨어나며, 내가 스스로 세상을 잊고 세상이 도한 나를 잊으면 그뿐이지요. 이미 지금에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거늘, 어찌 뒷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다시 바랄 수 있겠소?
14. 노량강에서의 눈썰매(이경진 : 이산해의 子 1567-1644) 78세
●이 해(1631) 겨울 큰 눈이 내려 들판을 덮었다. 강과 물이 한 빛이 되었다. 평평한 모랫벌에 눈이 쌓인 것이 이미 몇 척이 넘었다. 눈이 녹아 땅이 보이려면 몇 달 몇 날을 기다려야 할지를 기약할 수 없었다. 때때로 나가 끝없이 드넓은 곳을 바라보았다. 얼음을 타고 허공을 내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처지를 돌아보니 늙고(65세) 병들어 있는데다 추위 또한 두려웠다. 또 나를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울 만한 벗이 없었다. 나는 그저 혀만 쯧쯧 찰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섣달이 훌적 다가왔다. 새 봄이 오게 되면 눈앞의 맑은 경치가 한꺼번에 다 사라져버려 나중에는 가려해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섣달도 이레가 지나도록 쓸쓸한 마음으로 외롭게 앉아 있노라니, 더욱 마음이 무상하였다. 부질없이 t동파의 ?문을 나서도 갈 곳이 없다(出門無所之)?는 시구만 외우고 있으니, 가물가물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ent한 마음이 든 지 한참이 되었다.
그 때 집안의 종이 달려 들어오더니, 파강 김공(김두남)이 왔다고 알렸다. 바쁜 마음에 넘어질 듯 나가서 맞았다.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평소에 들를 때보다 천 배 만 배 이상 기뻤다. 서로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고 조용히 말을 나누었다.
●곧 바로 나루를 향해 일제히 달려 나갔다. 천천히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하기를 마음대로 하고, 멈추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였다.
문득 술을 준비하게 하여 양껏 마셨다. 흐드러지게 마셔 잔 수를 헤아리지 않았다. 또 계집아이 하나가 술잔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데, 곧 독우집의 가야금을 타는 아이다. 나이가 열여섯도 되지 않아 예쁘장하다. 정말 낙수의 파도를 버선발로 걷고 다니는 선녀라 하겠다. 가녀린 노랫가락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울려 퍼지는 소리가 맑고 우아하다. 화려한 집에서 귀를 시끄럽게 하면서 떼지어 떠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
모래 언덕으로 가까이 내려갔다. 빙 둘러앉아 이별을 고하는 대형을 지었다. 미련이 깊어 차마 떠날 수 없다.
....나는 이 일이 기러기가 날아가버리고 안개가 흩어지듯 자취를 남기지 않고 부질없이 사라질까 안타까워 이에 돌아와 등불을 돋우고 이렇게 대략 적는다.
15. 달밤에 배를 타고 노닌 우협(광주시 남종면 소재)(신방 1685-1736) 51세
●병술년(1706) 8월 16일 나는 광주 선영에 성묘하고 돌아가는 길에 우저에 들어갔다. 같은 마을 이웃 몇 사람이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각기 닭을 잡고 술을 담아 와서 정성껏 대접하였다. 이에 약조하여 밤에 노닐기로 하였다. .....작은 배를 불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초생달이 이미 돋아 강물을 비추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물결을 일으켰다. 마치 천마리 금빛 규룡이 물밑에서 장난을 치는 듯이 물결이 흔들흔들하였다. 갑자기 큰 물고기 몇 마리가 뛰어 올랐다가 다시 물밑으로 잠겼다.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모습은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의 눈을 휘둥그렇게 하고 정신을 놀라게 하여 진정할 수 없었다.
내가 목소리를 높여 학사 소동파의 <적벽부>를 낭랑하게 외웠다. 배안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부가를 불러 답하게 하였다. 흥이 일어 실컷 놀았다. 술병과 술잔이 모두 비었다. 광기가 그다지 심한 데까지 이르지 않은 읻르은 서로서로 끌어 잡고 춤을 추어 즐거움을 돋구었다.
16. 낙동강에 밤배를 타고서(이규보 1168-1241) 74세
그 앞에 기암괴석이 있는데 호랑이가 걸터앉고 곰이 쭈그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내가두건을 벗고 비스듬히 기대 자못 강호의 즐거움을 얻었다. 비록 병중이라도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매일 곱게 화장한 여인을 끼고 좋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마음대로 노닌다면, 그 즐거움은 어찌 다 말하겠는가?
17. 위항인의 시회가 열리던 인왕산의 일섭원(박윤묵 1771-1849) 79세
●일섭원은 인왕산의 이름난 곳이다. ....계묘년(1843) 초여름 일섭원의 주인(김낙서)이 동지 5-6인을 불러 일섭원에서 시회를 열었다.
※西園詩社
조선 후기의 위항시사(委巷詩社).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라고도 한다.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위항시사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해체된 뒤 결성되었다. 시사란 시를 짓고 즐기기 위하여 모인 모임을 뜻하는데, 주로 양반 사대부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역관(譯官)이나 의업(醫業)·산술(算術) 및 규장각 등에서 일을 하는 중인계층(中人階層)을 중심으로 위항시사가 형성되었다.
서원시사는 김희령(金羲齡)의 일섭원(日涉園)과 지석관(池錫觀)의 칠송정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졌는데, 일섭원은 송석원시사의 핵심인물인 김낙서(金洛瑞)의 소유로 이곳에서 그의 아들 김희령이 시사를 열었고, 칠송정은 인왕산 육각현(六角峴) 위에 있는 경승으로 지석관의 소유였다.
동인으로는 지석관·김희령 외에 박기열(朴基悅)·유기성(柳基成)·조경식(曺景軾)·박기연(朴基淵)·김영면(金永冕)·유정주(劉定柱)·홍덕조(洪德祚)·신이중(申彛仲) 등이 있다.
활동내용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송석원시사의 막내였던 박윤묵(朴允默)이 1843년(헌종 9) 일섭원에서 시연을 열고 그 정경을 묘사한 시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헌종 때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층의 성격상 신분적·경제적·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울분과 좌절을 읊은 시들이 많이 나왔으며, 따로 시문집을 남긴 사람은 없다. 위항시사로는 서원시사 외에 비연시사(斐然詩社)·직하시사(稷下詩社) 등이 있었다.
●산봉우리를 당겨서 구름과 안개를 희롱하고, 얻고 잃는 것을 같게 여기고 사물과 나를 잊었다. 서로 함께 먼지 나는 세상을 벗어나 떠돌고, 맑고 깨끗한 곳에서 소요하였다.
18. 이계(우이동 계곡) 개울가에 지은 집(홍양호 1724-1802) 79세
●(1777년 54세) 9월 16일 이계의 집이 완성되었다. 한 필 말을 몰고 어린 종 한명을 데리고 책 한 상자, 술 한 동이를 가지고 표연히 동대문을 나섰다.
●매일 아침밥을 먹고 나면 지팡이를 짚고 앞개울로 나갔다. 물에 노는 피라미를 구경하고 돌아가는 기러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사방에 행인이 없었다. 이따금 나무꾼의 어사용 노랫가락이 산골짜기에 들려왔다. 물소리와 더불어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나무 그림자가 조금씩 기울어질 때 유유히 돌아왔다. 저녁에 달이 동쪽 봉우리에 뜨면 하늘은 깨끗하고 ant 사물이 숨을 죽였다. 다시 지팡이를 끌고 개울가로 나갔다. 흰 바위에 맑은 물이 흘러 달빛과 어리비치고, 별들이 아래로 빛을 드리웠다. 내려다보면 물속의 별을 주을 수도 있을 듯하였다.
....숲속의 새들은 모두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돌밑에서 고개를 쳐들며, 그 소리를 들어보려는 듯하였다. 가끔은 반딧불이 나뭇잎 사이에서 나와 옷소매에 붙었다. 유성처럼 밝았다.
이때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들이 귀에 들리지 않고, 기쁨과 슬픔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깨끗하기가 달이 훤한 것 같고, 깔끔하기가 물이 맑은 것 같으며, 희기가 바위가 깨끗한 것 같고, 고요한 것이 마치 ant 만물의 소리가 사라진 것 같으며, 텅 빈 것이 마치 태허(太虛)의 허공과 같고, 시원하기가 먼지 구덩이에서 홀로 빠져나와 있는 것 같으며, 아득하기가 마치 정신이 태초에 혼돈에서 노니는 것 같다.
19. 사계절 경치를 모아놓은 수락산 취승대(박세당 1629-1703) 75세
주인은 角巾에 野服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면서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씻는다. 아침에 노닐고 저녁에도 노닐었다. 동대에서 놀지 않았으며 서대에서 놀고, 남대에 오르지 않았으면 서대에 올랐다. 이 네 곳의 석대는 아침저녁 노니는 장소일 뿐만이 아니다. 진실로 사시사철 즐거움이 이곳에 있다. 봄에는 동대에서 꽃을 즐기고, 여름에는 남대에서 바람을 맞으며, 가을이면 서대에서 달맞이를 하였고, 겨울이면 북대에서 눈을 구경하였다. 농염한 꽃이 눈을 비추면, 그 고움에 마음이 기뻤고, 산들바람이 낯을 씻으면 그 맑음이 좋았다. 털끝처럼 작은 모습도 다 드러나는 달밤이면 그 밝음이 사랑스러웠고, 한 점 티끌도 불지 않은 눈은 그 깨끗함이 좋았다.
20. 창옥병에 서린 맑은 절조(이민구 1589-1670) 82세
●白鷺州는 동음현(포천시 영중면) 남쪽 십리에 있다.
●대저 명승지는 오나라나 월나라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신에 밀랍을 발라가며 한번 놀기를 원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서울과 90리 떨어진 곳에 하늘이 만들어내고 땅이 가무리고 있는 이런 절경이 있어 서울의 유람객을 배부르게 하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같이 이미 늙어 문득 아흔의 나이가 닥치고 보니, 세월이 흘러가는 데 대한 느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그러나 정자와 경물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21. 은둔의 땅 청계산(과천) 아래의 둔촌(남공철 1760-1840) 81세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땅이 깨끗하고 넓은 곳임을 알게 된다. 그곳에는 숲이 울창하다. 세상에 전하는 바로는 고려 때의 학사 李集이 살던 터라 하는데, 그 후에 권씨가 살다가 다시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나에게 돌아왔다.
●사영정은 기둥을 여섯 개 두었는데 날개처럼 지붕을 인 것에도 기둥을 몇 개 두었다. 정자 앞뒤에 울타리를 치고 채마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었다. 땅을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고 기장이나 벼를 심을 수 있게 하였다. 매화나 국화, 오동나무, 대나무 등을 마구잡이로 심었다. 꽃잎과 꽃잎 사이로 지팡이를 끌고 배회하였다. 밤에는 바위 평상 위에 걸터 앉아 동남쪽을 바라다 보았다. 산이 둘러치지 않은 곳에는 달빛이 일렁거려, 푸른 물에 파도가 멀리서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 아래 산장을 만들었다. 기둥과 난간은 새기거나 장식을 하지 않고 주렴과 휘장을 만들어 두었다. 겨울에는 훈훈하게 하고 여름에는 탁 트이게 하였다. 그 가운데 앉아 있으면 마음이 열리고 정신이 모인다. 사방의 산에는 소나무 소리만 들리는데, 차를 끓이는 듯, 생황을 연주하는 듯하다.
●금릉의 둔촌은 시내와 산으로 한 고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풍속 역시 순박하여 좋다. 사족들은 모두 詩書를 업으로 삼고 이익을 따지는 마음이 없다. 조정에서의 의론이나 정치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더욱 근실하다. 초가로 지붕을 이고 구들을 깔고 사는데, 남자나 여자, 소나 개가 아무 곳에나 살아 구분이 없다. 농사짓고 베 짜는 여가에 토란, 참외, 채소들을 기르기를 좋아한다.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거나 고용살이를 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긴다. 마을 안팎에 집이 백여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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