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병자호란

청담(靑潭) 2014. 1. 17. 12:12

 

 

역사평설 병자호란 1-2

한명기 저

 

머리말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읽는다. 우리가 이민족에 의해 저질러진 침략에 의해 겪은 모진 고난과 아픔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전쟁에 의해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치 살이 칼에 베어 에이는 듯, 뇌가 부서지는 듯, 심장이 멈추는 듯 내게도 그 고통들이 마치 사실로 다가오는 듯 하여 눈물이 돌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한편의 생생한 드라마이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의거하여 생생이 그 현장의 모습을 전달하여 주고 있는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내가 태어나서 숨 쉬며 공부하고 일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 나라,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나의 영원한 조국인 내 나라가 당하는 가장 큰 불행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전쟁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한 없이 고통당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구태여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김일성에 의해 저질러진 6.25전쟁은 우리에게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교훈을 준다.

●전쟁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의 수령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존경받아서는 아니되며, 전범들은 자유와 평화의 신과 전 인류의 명령으로 처형되어야 한다.

●국가의 지도자는 국력신장과 자주국방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하며, 평화외교에 최선을 다하며 또 능란해야 한다.

 

 

제1권

●능양군은 부친의 상중이던 1620년 무렵부터 사람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모의했다.

●반정(1623)직후 인조는 도원수 한준겸에게 평안감사 박엽과 의주부윤 전준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박엽과 정준은 각각 평양과 의주에 머물며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 후금과의 외교교섭을 전담해온 인물이었다.

●모문룡은 1922년 평안도 철산(압록강 입구에서 100여리 지점) 앞바다에 있는 가도에 동강진을 설치하고 요동수복을 표방하며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하는 전진기지로 삼았다.

●1624년 2월, 이괄군이 도성에 진입한 경우에 대비하여 영의정 이원익과 우찬성 이귀는 종로에서 의용병을 모집하려고 시도했지만 열흘 동안에 응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인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 등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이원익의 증언에 따르면, <변란을 겪은 이후 군기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훔쳐 간 조총의 수가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할 형편이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이 조선의 은인으로 떠오른 데다 광해군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명이 승인이 절실했던 상황, 또 명과 후금사이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명사들을 회유하는 것이 필요했던 현실 등이 맞물려 다량의 은을 뇌물로 주는 일이 관행이 되었다.

●1625년 6월에 명의 사신으로 온 왕민정과 호양보는 사상 최악의 약탈자들이었다. ...조선에서 16만 냥 가까운 은과 수 천근의 인삼을 챙겼다. ...조선의 재정은 초토화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상당수 도망노비들이 신분을 속이고 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호패법을 실시하면 노비 주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도망자들이 속출하여 결국 국가의근간인 양인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수만 명이 넘는 요민(요동에 살던 漢人들 가운데 후금의 지배를 피해 탈출해 온 사람들)들은 가도로 들어가거나 철산, 용천, 의주 등 청천강 이북(청북)을 떠돌며 구걸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은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들녘에 흩어져 봄갈이한 곡식과 보리 싹을 죄다 캐 먹었다. 마을로 들이닥쳐서는 재물을 약탈하거나 밥을 지어달라고 떼를 썼다.

●조선 상인들은 가도에서 은과 인삼으로 비단, 생사, 청람포 등 중국산 물화를 구입했다. 조선 상인들은 그것을 후금상인들에게 넘기거나, 부산의 왜관으로 가져가 일본 상인들에게 전매하여 이득을 챙겼다. 한족 상인들과 후금과의 사이에 밀무역이 벌어지기도 했다.

●1618년 누르하치(1559-1626)는 이른바 일곱 가지의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과 청하를 잇달아 점령했다.....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회피하다가 어쩔 수없이 도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1만 5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1619년 3월 명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행해 네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갔지만 후금군의 역습에 참패하고 만다. 명청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던 이 싸움 전체를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그리고 유정이 이끌던 명군과 유정 휘하에 배속되어 역시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하던 강홍립의 조선군이 패했던 싸움을 따로 심하(深河) 전투라고 부른다.

●요동을 장악한 후금은 허투알라에서 1621년 요양으로, 1625년 다시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홍타이지(청태종 : 1592-1643)는 심양고궁에서 칸으로 등극했다....그는 한인들을 포용하고 우대하여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1627년 후금이 쳐들어오자 평안감사 남이홍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결전을 준비했다. ...삼남에서 올라온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선군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남이홍은 부하들과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직전 남겼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내가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진을 치는 훈련)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당시 인조 정권의 실세들이 벌이고 있었던 기찰(사찰)때문이었다. 이괄의 난 때문에 정권을 잃을 뻔한 인조 정권은 이후 과거 정권의 잔당이나 휘하에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무장들에 대한 기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4일 후인 1월 17일 이었다.

용골산성 싸움은 정묘호란 당시 조선군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더욱이 정봉수 휘하의 병력은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이었다.

●김장생은 호남의 의병들을 전주로 모이도록 한 뒤, 자신도 호서의 의병들을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당시 전주는 분조를 이끌고 남하했던 소현세자 일행이 머물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당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후금군에 끌려가던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적장 모유후는 조선 난민들이 타고 있는 선박 세척을 기습하여 건장한 납자들과 노약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과 화물만 싣고 갔다.

...당시 후금군에 끌려간 피로인의 수는 최소한 수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북한에서 파견된 체포조와, 중국 경찰의 체포와 압송의 두려움 속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심정을 우리는 진심으로 함께하며 도울 마음이 있는가? 체포되어 끌려간 그들은 모진 고초를 겪고 나서 다시 탈출을 감행한다. 이제 대한민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의 숫자는 2만 명을 넘었다고 보도되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하고, 심지어 좌파사회단체들은 탈북자들을 돕는 일이 북한을 자극하여 남북의 평화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이대며 오히려 방해하기까지 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그 사람들이 인권과 통일은 더 부르짖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당한 백성들의 피맺힌 아픔은, 이제 우리 같은 민족인 북한에 의해 전쟁으로 저질러졌고, 지금까지도 저질러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내 나라가 싫어 다른 나라에서 살고자 탈출하는 국민을 막거나 붙잡아 들이는 것은 정당한가? 그러한 나라도 나라인가? 국제법이 허용하는가? 만일 국제법이 허용한다면 악법이니 바꾸어야만 하고,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고 항거해야 하며 나쁜 법은 고쳐야만 한다는 우리나라의 일부 반체제 인사들이 적극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여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임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신료들은 대개 화친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척화파들도 큰 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론이 무서워 함부로 입으로 화의를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최명길만이 주저하지 않고 화의를 역설했다.

●누적된 폐단, 이괄의 난, 사신 호양보의 무지막지한 수탈, 모문룡에 대한 접제부담까지 더해지면서 국가재정은 사실상 파탄 상태였다....

  사간원은 어염 등의 이익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재정을 보충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당시 어염을 비롯한 바다의 이권은 궁가를 비롯한 권세가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궁가는 이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점유했던 토지, 산림, 柴場(시장), 漁箭(어장), 鹽盆(염분) 선박 등에서 사적으로 이익을 챙기면서도 면세혜택까지 받고 있었다. 아예 산이나 저수지를 통째로 독점한 채 땔감 채취나 용수 확보를 위해 접근하는 백성들을 차단했다. 또 궁노들을 시켜 어선이나 염분에서 사사로이 세금을 징수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민들의 어로활동 자체를 방해했다.

●명의 명장 원승환(1584-1630)은 1629년 모문룡을 제거하였으나 당쟁에 희생되어 19세의 어린 황제 승정제에 의해 <황제를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원승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자멸의 길로 확실히 들어섰다.

...지도자의 局量 차이가 결국 후금과 명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것이다.

※19세의 승정제와 39세의 노련하고 포용적인 홍타이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웅대한 꿈을 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편협하고 독선적인 소인배 선조, 외교적 현실감각이 뛰어난 광해군과 오직 명분에만 집착하는 인조가 대비된다.

●후금군의 침략이 있었던 직후 서울로 전해지는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봉화가 제때 오르지 않았고 파발도 단절되었다.

●1631년 10월 7일 홍타이지는 대릉하성을 공격했다. ...부사령관 하가강은 죽음을 앞두고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후금군에 의해 그의 목숨이 끊어지자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굶주린 명군병졸들이 달려들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제2권

●1636년 4월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들 서생들이 10년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1636년 명의 사신 황손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經學의 연구는 장차 이용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토를 건설하고 군현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귀국의 인심과 군비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獎諭(主張)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명이 망하기 직전인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라 하지만 황손무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보다는 오직 권력쟁탈에만 혈안이 되어 자유민주국가 건국세력과 산업세력에 대해서는 오로지 독재와 탄압만 강조하며 맹비난만 일삼는다.

  그들이 일구어낸 경제발전의 과실은 장관이네 의원이네 사회단체의 장이네 강남좌파네 귀족노조네 하면서 자신들도 모두 알차게 따먹으면서도 오직 빛깔 좋은 남북화해와 복지확대와 평등과 인권 등을 내세우며 온갖 투쟁이슈를 생산해 내고 국민에게 선동선전하여 불만세력들을 거리로 내 모는 무리들이 우리사회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어려운 국민들을 위해 싸운다는 세력들이 어렵게 산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진정으로 통일과 남북화해와 평등과 복지를 위해 싸워야할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가는 중소도시의 자영업자들과 박봉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의 노동자들과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와서도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며 차별받으며 고통받는 탈북민들이 아니겠는가? 소외세력을 담보로 저들은 자신들의 실체는 숨기고 시도 끝도 없이 권력을 탐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꼴을 언제까지나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남한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갑자기 소집되어 왔으므로 방한장구를 제대로 갖추었을 리 없었다. 그저 빈 가마니 하나를 방한복 삼아 어깨에 두른 채 밤새도록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이미 12월 17일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위 때문에 손과 발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당장 먹이를 먹지 못해 말들이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조선군 장졸들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산성의 민심도 심상치 않았다. 성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 비단옷 입은 벼슬아치들은 후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왜 우리만 死線으로 밀어 넣느냐? ?고 항변했다.

※자고로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이나 전쟁을 사전에 막지 못하는 인간들이나간에 전투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죽는 일은 거의 없다. 진정한 군인들이나 진정한 애국자들이나 지배층 잘못 만난 애꿎은 백성들만 강제로 끌려나오거나 의병으로 나오거나 하여 할 줄도 모르는 전투를 하다가 수없이 비참하게 죽어가지만, 권력을 가진 지배층들은 전쟁 중에도 갑론을박 서로 다투며 상대를 모함하며 십중팔구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기어이 부지한다.

●홍타이지는 탄천주변에 자신이 머물 진영을 설치한다. 1636년 12월 30일이었다.

●1월 3일 도성으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몽골병들이 도성으로몰려들어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청군은 특히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청군의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도 할 수 있다.?며 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김상헌은 적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레 <와신상담>운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반박했다. 인조는 ? 강국도 약국에 거만하게 대할 수 없는데 약국이 강국에 뻣뻣하게 굴 수 있느냐? ?며 최명길을 두둔했다.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

? 나라가 살아남은 뒤에야 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장차 무슨 명분을 논하겠습니까? ?

●홍타이지는 마지막 답서에서 말한다.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릴 것이다.>

●1월 22일 조정은 화친을 배척한 신료들에게 자수하라고 권고했다. 1월 23일에는 수원출신의 장졸들이 승정원 문밖에 몰려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고 소리쳤다. ...이날 강화도가 함락되었다....1월 23일 수원과 죽산출신의 초관 수백명이 행궁 앞으로 물려와 시위를 벌였다. 척화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1월 26일 이번에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역시 척화신들을 붙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강화도성이 점령된지 9일이 되던 날의 정경은 처참했다. 청군은 포로들을 남한산성으로 몰고 가면서 대대적인 노략질을 감행했다. 관청과 여염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는 살함들을 도륙했다. 이 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눈 위를 기어다니거나,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고 했다.

●항복조건 중 특이한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 포로와 관련된 이 조항은 훗날 조선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남기게 된다.

●인조가 청군 병력의 호위속에 잠실 벌판을 지나 도성으로 돌아올때 주변에서는 청군에 잡혀있던 수많은 포로들이 인조를 향해 울면서 절규했다.

?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는 백성들의 절규를 뒤로 한 채 도성으로 향했다.

●홍차이지는 1637년 2월 2일 철수 길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피로인들을 차질 없이 심양까지 끌고 오라고 강조했다.

※수십만의 포로를 강력히 끌고 간 것은 군사들에 대한 포상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다. 부족한 인력과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정묘호란 후 조선이 보인 명에 대한 지독한 맹목적 충성과 형제 맹약을 파기하고 흥성하는 자신들에 대한 조선의 철저한 홀대전략 때문에 기어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므로 차후 다시는 조선이 명에 붙지 못하도록 완벽한 조치를 한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조․청연합군은 1637년 4월 9일 철산 앞바다를 출발하여 가도를 공략했다.<병자록>에는? 조선군이 청군보다 더 심하게 한인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다?고 기록했다.

●2월 19일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라를 그르친 자들의 죄를 따지는 자리였다. 논의결과를 보고 받은 뒤, 이조는 이들 척화신들 모두 관직을 삭탈하라고 지시했다.

●병자호란 후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단연 최명길이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농사와 교역을 통해 상당한 재물을 모았다. 뛰어난 이재능력을 발휘하여 축적한 재물로써 청인들을 접대하고 관사를 새로 짓고 몸값을 치르고 조선인 포로들을 구해내기도 하였다. 본국에 사람을 보내 각종 물자들을 들여오고, 工匠들을 데려다가 빙고를 만들기도 하였다.

●인조와 소현세자는 서로 경쟁자가 되어갔다. 그 귀결이 소현세자의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소현세자 일행은 1645년 2월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얼마가지 않아 병석에 눕는다. 그리고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 나왔다>는 것이 입관식에 참여한 종실의 증언 내용이었다. ....강문명을 비롯한 강빈 친정형제들도 유배에 처했다가 장살한다. 전격적인 인조의 강공 앞에서 강빈의 운명도 비극으로 치닫는다. 강빈은 목숨을 걸고 시아버지 인조와 대립한다. 인조는 강빈을 별당에 가두고 庶人으로 강등시킨 뒤 사약을 내리려고 결심한다. 1646년 강빈을 사사시킨다.

●이제 조선에서 사로잡은 피로인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할 <무역상품>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니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피로인들에 대한 교섭했다. 하지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전체 피로인 가운데 조선으로 돌아온 수는 고작 6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강화도 함락 직후 청군의 체포와 능욕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여인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청군은 아이가 있는 여자라 해서 봐주지 않았다. 젊고 예쁜 여자들은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 청군은 아이들을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저항하는 여인들은 살해되었다....당시 청군 장수들은 조선여인들을 자신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본처들 가운데 질투심에 조선에서 온 여인들을 참혹하게 학대하여 뜨거운 물을 끼얹거나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여인들에게 그런 짓을 감행하는 본처들이 있을 경우 남편이 죽었을 때 殉死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속환이란 청측 주인에게 몸값을 치르고 피로인들을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 이제 피로인들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인간시장>이 서게 되었고, 몸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피로인들은 상품이 되었다.

  처음에는 속환가를 은으로 계산했는데 남자는 은5냥, 여자는 은 3냥정도였다. ....5월 5일 심양에서 인간시장이 열렸다.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많은 원속인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절망하고 만다. 속환가가 최소 수백 냥에서 수천 냥으로 폭등했기 때문이다.

  ...사속이란 사대부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 몸값을 마련하여 심양에 들어가 혈육을 데려오는 것이다. 공속은 국가가 몸값을 대고 데려오는 것인데 대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종실, 인조를 호종했거나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출가했던 딸이 속환녀가 되어 돌아온 친정 부모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ㅇ란 속환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

  고지식한 장유는 사람은 자신의아들과 속환되어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의정 최명길은 단호했다. 본래의 남편과 속환녀의 이혼을 허락하면 안된다고 했다. 이론을 허락할 경우 수많은 부녀자들은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속환녀들이 모두 실절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주회인(탈출한 피로인)들 가운데는 도중에 붙잡히거나 조선으로 입국이 좌절되어 도로 심양등지로 귀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8년 만에 탈출하여 돌아온 안추원은 생계대책이 없어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에서 체포되었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한 안단의 사연은 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1675년 압록강을 건너게 해 달라는 그의 간청에 의주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 오늘날 탈북 난민들도 저 같은 피눈물 나는 고초들을 겪고 있다고 한다.

●명이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서 멸망하고, 굳게 닫혔던 산해관의 대문이 오삼계에 의해 열렸다. 오삼계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창한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산해관으로 들어가서 이자성의 반란군을 격파한 뒤, 북경으로 진입한다. 소현세자 또한 도르곤을 따라 이 원정에 동행했다.

●1653년 6월 스페르베르라는 네델란드 상선이 제주도에 표착하자 조선조정은 1654년 하멸등 36명을 서울로 불러들여 금군에 편입시킨다. 하지만 조선은 청이 이 사실을 눈치챌까봐 두려워했다. 청의 사신이 올 때마다 하멜 일행을 거체에 연금시키거나 남한산성 등지오 이송했다. 급기야 1655년 일행 가운데 두사람이 청 사신의 행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나가사키 송환>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서조정은 1666년 하멜 일행을 강진 등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그 해 겨울 하멜 등 8명의 탈출 사실을 전라감영은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1600년 리프데라는 네델란드 상선이 큐슈에 표착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승조원을 불러 도항이유와 유럽의 정세에 대해 물었다. 일본에는 이미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선교사와 상인들이 와 있었고 그들은 신교와 자신들의 무역독점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에야스는 이들을 외교자문역으로 임명하고 우대했다

●박지원은 하등 선비로 자처했다. 그러니 청을 바라보는 태도가 사뭇 다를 수 밖에 없었다.

<治者는 백성과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배워야 한다.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국의 법제를 모조리 배워 우리의 고루하고 거친 풍습부터 바꿔야 한다.>

  박지원이 보기에는 청이 오랑캐가 아니었다. 입만 열면 청을 치자고 외치면서도 현실에서는 수레조차 변변히 사용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던 조선이야말로 진짜 오랑캐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입만 열면 미국이 제국주의니 경제 침략국이니 하면서 FTA를 반대하고 무슨 꼬투리만 살짝 잡힐라치면 반미운동을 벌이는 태생적으로 병적인 반미주의자들이 있다. 심지어 국가원수인 노무현 대통령은 <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라고 미국장관에게 공언했다고한다. 대한민국이 미국을 멀리하고 일본을 버리면서 중국에만 의지한다면 그 존립과 번영이 가능할까? 북한에 의한 공산통일? 중국에 또 마냥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북한을 견제? 그 반미주의자들이 자식들은 미국에 유학보내고 시민권을 획득하여 직장을 잡고 잘들 살고 있어, 그 사실을 지적할라치면 그 자들은 ?자식은 자식이지 내가 다 큰 자식의 일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하느냐? ?며 어쩌면 그리도 똑 같은 핑계를 대며 피해 나간다. 나는 미국에 아직 가보지도 못했구마는...

●저자의 주장 : 미국과의 관계를 견고히 하되, 중국와 일본과의 우호는 물론, 러시아와의 협조도 다질 수밖에 없다. 북한과의 소통 또한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전략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일본 사이에서 활로를 찾으려 애쓰되 우리의 자체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의 자체 역량을 키우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가 20-50클럽(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인구 5천만 명 :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에 일곱 번째로 진입했는데, 이제 40-80클럽(국민소득 4만 달러 이상-인구 8천만 명)에 진입하자는 통일경제 프로젝트를 세운다고 한다. 현재는 미국 일본 독일만 해당되는데 우리가 통일되고 경제발전만 연 3-4%대로 성장한다면 머지않아 2020년대에는 가능성이 있다한다. 내 생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니 좌우간 말만 들어도 가슴이 뿌듯하고 어깨가 펴지며 기쁘기 한량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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