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프롤로그
이 유명한 책을 이제야 읽고 정리하는 것이 심히 부끄럽다. 100여 년 전, 19세기 말(1894∼1897)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 큼 많은 도움을 주기에 하는 말이다. 3년이라는 이 짧은 시기는 우리역사에 대단히 큰 격동기이다.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갑오개혁-삼국간섭-을미사변-을미개혁-아관파천-대한제국수립으로 이어지는 숨가뿐 역사의 소용돌이 현장이었다.
이때 비숍여사는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모습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사실과 상황을 가감 없이 기록하였으므로 오히려 왜곡이 적을 것이다. 영국의 국익에 관련된 기록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당시의 우리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최고의 기록물이라 할 것이다.
■서론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이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다. ...여자들은 격리되어 있으며 열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유효한 판단이다. 요즘 청년들의 평균키는 174cm에 육박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교육강국이요, 인터넷, 스마트 폰 최강국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제 오히려 남자들을 능가하고 있다.
●기후는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서 가장 화창하고 건강에 좋은 곳 중의 하나이다.
●1897년 1월 현재 부산, 원산, 제물포의 항구에는 11,318명의 외국인 거주자와 266개의 외국 사업체들이 있다.
●도로는 그 불편함이 악명 높으며, 심지어 주요 도로들과 거친 승마용 도로와 다를 바 없었다.
※한국은 고속도로 천국이다. 하도 생겨나는 길이 많아 이젠 내비게이션 없이는 운전하기가 힘이 들 정도이다.
■비숍여사의 여행로
●나가사키(1894.2) → 부산 → 제물포 → 서울 → 남한강 상류여행(1894.4) → 북한강 상류여행 → 금강산 여행 →원산여행(1894.6) → 부산 → 제물포 → 체푸 → 영구 → 심양(1894.8) → 베이징 → 연대 → 나가사키 → 블라디보스톡 → 노보키에프 → 훈춘 → 블라디보스톡 → 원산(1894.12) → 부산 → 제물포(1895.1) → 서울 → 중국의 남부 및 중부(1895.2) → 일본(1895.8) → 서울(1895.12) → 개성 → 평양 → 덕천 → 평양 → 제물포 → 중국(1895.12) → 서울(1896.10) → 상하이(1897. 봄)
1. 한국의 첫 인상
●나가사키항에서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열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크고 작은 증기선들이 부산항에 도착한다.
※지금도 배로 가면 하루이니 그 때 다름 아니다.
●한국인들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부산을 떠난 지 사흘 만에 히고마루호가 서울의 외항인 제물포의 정박지에 닻을 내린 것이다.
2. 서울의 첫 인상
●제물포와 마포사이에 증기연락선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다른 어느 지역들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경인운하는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드디어 2조 6천억 원을 쏟아 2011년 완성되었다. 이 <아라뱃길>을 이용하는 여객선도, 화물선도 없고 오직 자전거 도로만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시대를 거스른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 착오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대 실패이며 거의 망녕 든 늙은이 수준의 고집이었다. 한반도 운하를 시작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더럽고 좁고 끈적거리는 마포의 거리로 들어섰다. 마포의 거리는 토산품을 파는 자잘한 구멍가게와 팔려고 길거리에 내놓은 나뭇단과 나뭇단을 산더미처럼 지고 운반하는 소들로 가득 찬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그 길에서 남자 일색인 군중들은 특별히 하는 일이라곤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 왕궁과 빈민가를, 빛바래가는 왕조의 광휘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이 궁핍한 삶을 보았다. 나는 또 목적 없이 빈둥거리는 군중들과 그들의 중세적인 행렬을 보았다.
●인구 25만으로 추정되는 이 서울이라는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믄 수도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만큼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봄맞이 대청소 행사가 있다. 마포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서 서울의 물웅덩이들에서 나온 쓰레기를 수레에 싣고 가는 수많은 황소들의 행렬을 보았다.
●남산 기슭에는 일본 공사관의 흰 목조건물들이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아래로 5천명에 육박하는 일본 조게는 찻집, 극장, 기타 일본식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설비들을 갖추고 있다. 그 구역은 한국적인 모든 것과 대조적으로 청결과 쓰개치마를 쓰지 않은 여인들과 후드 달린 오버코트를 입은 신사들이 일본에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한다.
●많은 사람들이 <막후의 실세>라고 물러마지 않는 위안 스카이는 방약무인하게 왕의 재가에 참견하며, 무례한 태도로 왕을 꾸짖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연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빨래는 한국여인들의 타고난 숙명이었다. 1970대말 이후 에 세탁기가 보급될 때까지 여자들은 힘든 빨래의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맞다. 남녀평등이 당연한 2014년 지금도 맞벌이 가정의 부엌일마저도 여전히 여성 몫이고 나는 계속 밥을 얻어먹는다. 내년부터는 나도 함께 하기로 약속하지만 실천할 수 있을 지는 나 자신도 의심쩍다.
●경복궁을 향해 뻗은 폭 55m의 가장 넓은 대로가 있다. 이 55m 폭의 길은 한국에서 사시사철 언제나 정비되고 깨끗하게 단장되어지는 유일한 도로이다.
●저녁 8시경이 되면 대종이 울리는데 이것은 남자들에게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여자들에게는 외출하여 산책을 즐기며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3. 1894년, 한국 국왕의 거둥
●최소한 15만 명을 헤아리는 이 엄청난 군중들은 웅성거림조차 거의 없었다. 반쯤은 도시 사람들이며,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도시락을 들고 사나흘씩 걸어온 시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두 번째의 붉은 교자에 국왕이 타고 있었다. ...창백하고 기운 없는 얼굴 표정은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왕세자 역시 붉은 색 가마로 옮겨지고 있었으며 부친보다도 더욱 창백하고 부감각해 보였다.
4. 서울, 한국의 메카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지방관리들은 수도에 따로이 저택을 갖고 있으며, 연중 많은 기간 부임지의 직무를 경시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에 살고 있는 부재지주들이며, 그들은 지대를 받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민중들을 쥐어짠다.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고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여겨진다.
※백 이십년이 지나 교통과 통신이 세계에서 최고로 발달한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사고요 풍조다. 그렇다. 젊거나 늙거나 경제적 여유와 건강과 폭넓은 인간관계와 문화향유의 의지가 강한 인간이라면 서울을 떠나기 힘들 것이다. 서울은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곳이 분명하다.
●한국인들은 종교 없이도 잘 지내왔다. 종교 같은 것으로, 특히 아무런 현세의 이익도 제공해 주지 않는 자제와 희생의 종교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인 것 같다. ...로마 카톨릭 교도의 수는 28,802명이며, 평균적으로 한 해에 1천 명 가량 증가하고 있다.
5. 한강 상류로의 나룻배 여행
●한국의 화폐가치는 1달러당 3천 2백 푼이었다. 1달러는 32냥이다. 일백 엔을 현금으로 운반하는데 여섯 사람이나 한 마리의 조랑말이 필요하다. 단 10파운드에!
※10달러면 중류가정의 장례식을 해결한다고 한다. 오늘 날 가치로 200만원이라 치자. 배의 주인인 김씨는 배 삯으로 한 달에 30달러를 받는다. 오늘 날 돈으로 600만원(고용한 뱃사공 임금포함하여 하루 20만원)이라 치자. 한국에서 구입한 주방 기구들은 목탄을 쓰는 일본 화로, 얕은 일본식 냄비와 프라이 펜, 숯 집게가 딸린 조그만 주전자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합해 2달러 미만이었다. 30만원이라 치자. 당시 대략 1달러 가치는 오늘날 원화로 20만원의 가치를 가졌던 듯 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월급이 가장 많았고, 70년대까지도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면 수입이 대단했다. 60년대 중학교 시절 미국의 이발가격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거의 한 달 월급이라는 것을 알고는 경악하였다. 요즘 우리나라 뷔페 식사비가 대개 3만 원 정도이니 30달러이다. 동남아시아 후진국 사람들의 한 달 월급은 대개 100달러 내지 200달러이고 아프리카 최빈국은 한 달 월급이 단 10달러인 사람들이 있다고 하며, 월 30달러면 중학생 학비를 책임질 수 있다. 지난 해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평균 월급은 2500달러에 달했다. 아마도 300만원을 달러로 환산하면 3천달러인데 후진국 돈으로 바꾸면 가방으로 가득일지도 모른다. 1백년이 지난 오늘날 매우 잘사는 나라의 국민이 된 우리가 많이 겸손하고 많이 절약하고 어려운 노인들, 어려운 장애인들, 어려운 나라도 많이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실천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6. 금모래 강변에서
●큰 사슴의 벨벳 같은 뿔은 한 쌍에 40-60달러에 팔리고 있다.
●한강에는 정부가 운영하는 무료 47개의 여객선으로 왕래가 유지되고 있다.
●만일 가난이란 것이 생필품의 부족이란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라면 한강 유역의 계곡들에 사는 부민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한 강 유역의 자작 농가들은 실질적인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7. 남한산성에서 단양까지
●소읍과 작은 도시들을 방문해보니 우선 빈민촌의 움막들이 눈에 띄었다.
●관아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여주에 높은 양반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단지 7백호 가구를 가진 마을의 지방관은 그리 높은 지위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양반의 집의 모든 방은 부드럽게 채색된 벽에 비해 번쩍이는 금박속이 큰 거울이나 프랑스식 시계가 있어서 모든 것을 돈으로 처바른 저속함을 보여 주었다.
●프랑스식 시계, 독일식 저울, 미국산 담배, 벨벳 덮개를 깐 의자 등의 이런 일반적으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외제품에 대한 열광이 돈 있는 젊은 멋쟁이들에게 번져가고 있다.
●한국인이 술을 좋아하는 첫 번째 원인은 아마 도시에서조차도 차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과, 사치스러운 청량음료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일 듯하다. 아마도 식수로 쓰는 물이 훌륭해서 대부분 그냥 먹을 수 있는 탓일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러 먼 길을 걸어와, 한 번도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일별한 대가로 달걀들을 내 놓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보여줄 게 없다고 말하고 되돌려 주었다.
8. 남한강 상류에서 북한강으로
●나루터는 한산했다. 이 나루터에 있는 배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무료 여객선이었다. 정부에서는 사람뿐 만 아니라 가축들을 실어 나르는 데 쓰이는 넓고 튼튼한 배를 제공하고, 그 대신 동네 사람들은 사공에게 음식을 대준다. 가난하지 않은 승객들은 사공에게 작은 선물도 준다.
●한국에는 금 장식이 드물다. 금은 예술품에 사용된다하더라도 미량에 불과하고 금전은 아주 없다.
●한국소는 한국에 남아있는 대단한 것의 하나다., 소가 완전히 자라면 159-227kg까지 나간다.
9. 한국의 결혼 풍습
●7살부터 아버지의 집 안뜰에 완전히 갇혀 살던 소녀는 다시 17세를 전후하여 시아버지 댁 안방에 갇혀 살게 된다. 친정의 낡은 구속이 파괴되면 그때부터는 남편의 집이 그녀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관습이다. ●한국의 결혼은 지극히 건전하고 도덕적인 성격을 갖는다.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안ㄹ을 뿐만 아니라, 신부도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 ●아주 검소한 결혼식이라 할지라도 음식값만 최소한 일흔 다섯 냥(3달러, 현재 원화로 60만원 정도)이 들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5-6명의 딸을 가졌다는 것이 엄청난 불행이 된다. ●여자가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계율은 결혼 후에도 계속되는데, 특히 상류계층에서 중인계층까지는 가능한 한 철저히 지켜진다. ●한국의 아내들은 어머니가 되는 순간 갑자기 지위가 격상된다. ※최근 젊은 부부 이혼사유 중 가장 비중이 큰 이유 중 하나는 사위와 장모사이의 갈등이라고 한다. 수십 년 전에 미국에서나 있던 일인데, 금방 우리나라에 상륙한 현상이다. 현재 60대 초반의 우리 나이세대는 대부분 아들, 딸 하나씩이다.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도 없고, 경제력도 만만치 않아 젊은 사위보다야 훨 강하다. 애지중지 키워 시집을 보내고도 여전히 내 딸이며 시어머니보다도 더 애정을 쏟는다. 친정어머니는 아파트 관리나 김장 등 가정살림을 돕거나 출산 후 돌봄까지 하게 되고, 딸은 아이양육까지도 시어머니보다는 친정어머니에게 더 의지하기 되기 때문에 사위는 어머니보다 장모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되며 허물이 없어진다. 이를 사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만일 인격이 약간 없는 장모이거나, 돈이 많아 거만한 장모이거나, 사위 돈벌이가 변변치 않거나 하면 자칫 갈등이 생겨나게 되고 심지어 장모가 사위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까지 하게 되면 장모는 무서운 마녀가 되고 당근 이혼으로까지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0. 금강산 가는 결혼 - 한국의 도로와 여관 ●한국의 조랑말은 ...근골이 좋고 체격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강인하여 73-91kg까지의 짐을 운반하는데 형편없는 사료를 먹으면서도 날마다 하루에 48km씩을 간다. 조랑말들은 극성스런 싸움꾼들이어서 다른 조랑말을 볼 때마다 빽빽 울고 앵앵거리면서 돌격하기 일쑤다. 길에서 만난 조랑말들은 아무리 먼 길을 같이 간다고 할지라도 화해할 줄을 모르며, 화가 나면 그들의 짐 따위는 일찌감치 잊어버려서 두 조랑말의 드잡이질에 짐짝이 아주 산산조각이 나기도 한다. ...이 같은 흉폭성 때문에 모든 말에 마부가 하나씩 붙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여관에서 우리는 밥과 계란과 야채와 한국 고유의 요리들, 즉 한국식 스프인 <국>과 한국식 베르미첼리(국수), 말린 미역요리 등을 사 먹을 수 있고, 밀가루와 설탕과 기름으로 만들어진 한국식 패스트 푸드(약과)를 살 수 있다....제철만 디면 닭은 4페니에 살 수 있고, 꿩은 그것보다 더 싸게 살 수 있다. 봄철에는 개고기를 자주 팔며 돼지고기는 언제나 살 수 있다. 한국 여관의 숙박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등잔과 따뜻한 구들이 제공되는 방에는 요금이 없다. 그러나 나의 경우 여관에서 파는 상품을 아무 것도 사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밤에 1냥(8천원 정도)씩의 숙박요금을 치렀고, 낮 동안 방에 들어 휴식할 수 있는 요금도 같은 값으로 치렀는데...나그네들은 하루를 묵으며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사소한 팁까지 포함하여 2-3냥의 요금(2만원 정도)을 지불한다. 11. 금강산의 여러 사원들 ●장안사의 식객들은 1백 여 명에 달했는데 절로부터 잘 대접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100-120명 가량 되는 비구니들이 있었다....장안사의 첫 인상은 숲속에 자리한 규모의 엄청남이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더하며 금강산에 종교적인, 인간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55개의 사원과 암자들 가운데 장안사는 3대 대찰의 하나이며, 그리고 의심할 바 없는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다른 대찰로 유점사와 표훈사가 있다. ●한국인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여행자로서의 확고부동한 명성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많은 서울사람들은 이 풍류어린 명예를 거머쥐려고 젊을 때부터 벼르고 또 벼른다. ※ 1998년 11월부터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 이후 중단된 상태이다. 10년 동안 전개된 관광에 나는 참여치 않았다. 학교에서 보내주는 기회를 갖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구태여 북한 당국의 감시 하에서 열을 지어 다니면서 안내원들이나 북한 주민들과의 어떤 접촉도, 대화조차도 전연 하지 못하는 경직된 관광에 참여할 생각이 전연 일지 않았었다. 다시 재개된다면 이젠 꼭 가보고 싶고 개성관광을 비롯하여 북에서 개방하는 관광지역이면 모두 찾아 갈 생각이다. ●유점사 : 70여명의 비구와 20여명의 비구니들 말고도 거의2백여 명에 이르는 불목하니(절에서 밥 짓고 땔나무하고 물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과 목수들에게 금강산을 여행하는 최초의 유럽 여성은 대단한 볼거리였다. ●산사에서의 일반적인 문화란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자상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한국 어디서나 만난 수 있는 그 꼴꼴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거만함,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 아주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12. 원산에 이르는 해변의 여로 ●지난주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여자를 물어갔고 , 그 전날 밤에는 개와 돼지가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한국의 성인 남자들은 한 번 꺼억 하고 트림을 밷어 내고는 배를 두드리는 것으로 만족스런 포만에 이르렀다는 것을 과시한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하루 두 끼의 식사로 만족해야 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세 끼나 네 끼를 들었다. ●서너 명이 모여 앉으면 한자리에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20-25개의 복숭아나 참외가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이다....그런 까닭에 한국 사람들에게 소화불량, 위장병, 대장염, 치질등의 고질병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8천이 넘는 일본 어부가 부산 부근의 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함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간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한국 연근해에는 충분한 어획량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의 정갈함과 산뜻함, 중국의 부지런하고 알뜰함에 비래 한국의 농업은 다소 헤프고 정리되지 못한 감이 들었다. ●내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동양음악의 모티브인 듯이 보이는 우수는 한국음악 속에서 극도의 구슬픔으로 화했다. ●원산으로 가는 넓은 주요도로의 완성과 한국에서 또 한번 내가 본 전신주는 매우 큰 변화였다.
13. 청일전쟁이 임박한 무렵의 제물포 ●왕권에의 확고한 충성을 고백하는 그들(동학군)의 선언으로 판단해 볼 때, 한국 어딘가에 애국심의 맥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농민들의 가슴속뿐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론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학의 선언문은 ....내가 보기에 그 모든 것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14. 만주로 가다 ●온통 진흙으로 만들어진 듯한 영구(營口)는 ?군인들의 숙영지?란 뜻이다. ●라오허강이 해마다 11월 20일부터 약 넉 달 동안 결빙되기 때문에...내 가 본 그 다음의 두 달을 보냈던 러시아령 만주는 중국과 구별되는 여러 요소로 매우 흥미로웠다. ...약 3만의 한국인 이주자들이 언급되어야겠다. 이 이주자들은 대부분 1868년에 한국을 떠났다. ●북만주 주민들의 대부분은 전과자와 떠돌아다니는 범죄자. 군대에서 도망친 탈영병, 그리고 금맥을 찾아 떠돌아 도니는 사람들이다. ●북만주의 테러리즘에도 불구하고 만주는 중국의 지배영역 중에서 가장 번성하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곳은 외국과의 무역에 있어서 해마다 그 중요성이 더해질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만주족 여자들은 보통 한족보다 더 키가 크며 더 건장하다....만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중국 본토의 여성들보다 훨씬 높다.
15. 만주의 대 홍수 16. 펭티엔과 그 곳의 선교사들 ●26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지배왕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제국내의 두 번 째 도시이다. ※펭티엔은 옛 우리말 이름으로는 봉천(奉天)이고 오늘 날 이름으로는 심양(瀋陽)이며 중국어로는 센양이다. 2005년 8월에 우리 해우회는 비숍여사처럼 영구(잉커우)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센양으로 달렸다. 센양역에서 우리 양드리와 승원이랑 사진을 찍은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9년 전? 아이쿠! 무서운 시간의 흐름! ●가장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홉 살 이하의 어린이들은 묻히지 않는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서글프게 통곡하고 거적에 시신을 사서 내다버린다. 다시 말해 개들이 가져갈 수 있는 곳에 위치시킨다. ●중국에서 전당포의 소유주는 서양에서 은행을 소유한 자본가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17. 펭티엔의 중국군 ●국왕의 요청으로 조약의 대표들은 평화유지를 갈망하며 양국의 동시 철군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중국은 동의했으나 일본은 연기를 요청했다. ●7월 25일, 영국 상선으로 영국 국기를 날리며 1천 2백 명의 중국군을 수송하던 가이롱호가 일본 해군의 순양함 나니와호에 의해 무참히 격침되고 말았다. 나흘 후 아산전투에서 일본은 중국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7월 30일, 일본의 협박을 받은 한국은 앞으로 중국의 종주권 행사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8월 1일 전쟁은 선포되었다. ●중국군은 하루에 1천명 꼴로 펭티엔을 지나갔다. 이들은 남쪽으로의 행진을 자랑스러워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고, 여관에 투숙하며 여관주인을 구타하였으며, 반 기독교적이어서가 아닌 반 외국인적인 감정에서 교회를 파괴하였다. ●얼마 후에 평양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확인된 바이지만, 그들은 모두 우산이나 부채를 지니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의 무라다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이들 수천 명의 병사를 맞닥뜨리게 한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하였다. ●병사의 명목상 월급은 노동자보다 높았는데, 이는 아산전투에서 패한 후 누구도 병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펭티엔과 근처마을의 노새 마차들은 수송을 위해 징발되어 도시의 교역은 마비되었다. 후에 이러한 마차들은 굶주린 군인들이 노새를 잡아먹는데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상인들은 군대를 피해 산속으로 달아났다. 안전과 질서를 보장하는 일본군의 점령이 모든 이재민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18. 나가사키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전쟁에 대한 열광은 여전히 맹렬했다. 돈과 현물 형태의 국방성금이 나가사키 행정당국에 계속해서 비오듯이 답지했다. ●블라디보스톡(동방의 보물)의 첫 인상은 매우 훌륭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자유항이었다. ...웃고 떠드는 한국 소년들에 의해서 나는 해안 쪽으로 잡아당겨졌다. ....부두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좀 더 소란하고 공격적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난여름 우리 해우회는 연해주로 여행을 갔다. 내가 많이 가고 싶은 곳이어서 회원들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졌다. 여름의 블라디보스톡은 작고 아름다웠다. 아주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다. ●1878년 블라디보스톡의 인구는 1천 4백명이었다. 1897년에 집계된 시민의 인구수는 2만 5천명이다. 여기에는 도시에서 1.6km 떨어진 외곽에서 거주하면서 짐마차꾼이나 짐꾼을 하면서 살아가는 3천명의 한국인과 2천명의 중국인이 포함되어 있다. ...새로움, 발전, 희망이 블라디보스톡 사회의 특징들이다.
19. 시베리아의 한국인 정착민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윈 동물들을 싼 값에 매입해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산 값에 되판다. ●한국인 촌락들은 한국에서라면 매우 강력한 지배계층의 저택일 그러한 집들이 많았다. ...어쨌든 마을의 농장은 깨끗하고 잘 청소되어 있다. ●1863년 전에 13가구가 함경도로부터 국경을 건너 포시만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티젠호 주변에 정착했다. 1866년에 이르러서는 1백여 가구가 정착했지만 매우가난해서 러시아정부는 소와 씨앗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1869년 중에 한국의 북쪽 지역이 심한 기근에 허덕일 때 4천 5백여 한국인들이 굶주린 채 프리모스크로 이주했고, 그들 중 3천 8백 명은 절대 기근에 굶주렸다.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했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러시아 제국에 양도된 그 지역은 거의 황무지였고 정착민들은 흉작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1897년 프리모르스크에는 외딴 거주지까지 포함하여 32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외에도 흑룡강 가있는 하바로프스크시에 속하는 한 마을에도 블라디보스톡과 니콜스코예에 근접한 커다란 한국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한국인 이주민의 수는 1만 6천~1만 8천명이었다. 이들은 그대로 빈곤자였다. 러시아정부의 자선으로 한 해 한 해를 겨우 살아가고 있었고 옥수수 씨앗까지 배급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시베리아 계곡의 부유한 지역에 무국적의 거주자로 정착했고, 몇 년 동안 평온했었다. 그 뒤 많은 거주자들이 그들이 차지한 땅을 구입했고 인접한 땅에 대한 공동권리를 얻었다. 무국적의 거주를 정식 토지구입에 의해 점진적으로 대체하고 토지 구입자들에게 법적인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이 러시아정부의 의도였다. 실제로 이 외부 정착자들은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연장자나 촌장은 마을의 크기에 따라 한 사람에서 세 사람까지 관리를 거느리고 각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경찰과 공무원도 한국인 이었다. ....1884년 이전에 시베리아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이제 러시아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이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음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했다. 20. 시베리아 횡단철도 ●우수리 철도에서는 미국 서부선이나 캐나다 태평양 철도에 서 보이는 임시변통적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없다.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12km구간을 말하는데 우리는 블라디보스톡역에서 기차를 타고 겨우 40여분만에 오골라야 시골역에 내렸다. 다시 대기한 버스를 타고 우스리스크로 갔으니 시베리아횡단열차 맛 뵈기만 한 셈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1891년에서 1904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공리주의야 말로 최상의 것이다. 나는 이 정착촌 주변 32km를 마차로 드라이브하면서 어디에서나 번창한 농장과 초원 위에서 농사를 짓는 마을, 거시아인, 한국인을 보았다. 21. 고종의 칙령과 4차에 걸친 한국 왕실 알현 ●1895년 1월,....한국의 독립이라는 선물을 제시한 일본은 왕에게 공식적으로 중국의 종주권을 폐기하는 동시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공을 일소할 것을 요구했다. ●1884년 정변의 주역이었던 내부대신 박영효의 특별경호대였다. 일본 경찰대를 거느린 박영효는 위풍당당함은 국왕의 위엄을 능가하였다. ●명성황후 :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칠흑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비는 정중할 뿐 아니라 기지가 넘치는 모습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것들을 내게 말씀하시더니 잠깐 왕에게 무언가를 맣하고는 곧 대화를 다시 시작해서 약 30분간 더 계속했다. ...그 때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 깊은 틴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 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했다. 나는 그녀의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 뿐 아니라 그 외 만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이해하게 되었다. ●고종 : 왕은 작은 키에 병약해 보이는 얼굴로 필시 소박한 사림일 듯 했다. ...왕은 천성이 온화하기로 잘 알려진 분이다.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왕비는 왕을 몹시 채근했다. ...왕의 표정은 온화하다. 그는 특별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한국 역사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구래의 관습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면 어느 시대 모월, 모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하게 언급하면서 조목조목 설명해 낼 수 있다고 한다. ...통치자로서 그는 굉장히 근면하여 어떤 분야의 업무에도 익숙하다....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떤 일을 단단히 그러쥐고 밀어붙일 만한 능력이 없다. ...성격의 박약함은 그에게 치명적이다. ●순종 : 왕세자는 몹시 통통했으나 병약해 보였다. ...그는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그 어머니의 우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건강 때문에 걱정을 들어야 했다. 아들의 병약함이 왕비로 하여금 몇 가지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끔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점쟁이에게 계속적인 도움을 청했으며 절에다 바치는 시주도 자꾸 늘려만 갔다. 알현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와 아들은 줄곧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대원군 : 대원군의 섭정이 끝날 즈음부터 왕비의 시해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정치사는 왕비와 그 일족, 그리고 대원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반복으로 일관된다. 나는 궁궐에서 딱 한 번 그를 본 적이 있는데, 표정의 생명력과 정력,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 왕성한 제스츄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22. 전환기-을미개혁의 파란 ●왕은 1894년 6월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한 이래로 <봉급받는 자동인형>과 다름없이 되어 버렸고, 한 때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던 민씨 일파는 어 이상 공무에 간섭할 수 없도록 축출되었다. 23. 왕비 암살-을미사변의 전말 ●민간 복장에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왕비의 소재를 미친 듯이 따져 물으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자객들을 피해 도주한 왕비는 곧 그들에게 잡혀서 칼에 찔렸다. 왕비가 죽은 둣이 쓰러져 있을 때, 약간 정신을 차려 왕세자는 안전하냐고 물었다. 그 순간 한 일본인이 그녀의 가슴위로 덮쳐 대검으로 그녀를 베어 버렸다고 한다. 왕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는 시중을 들어준 간호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마지막 모습은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녀를 비단으로 된 누비이불로 꽁꽁 묶어 널판 위에 누인 후에, 사슴공원 부근의 작은 소나무 숲으로 운반해 갔다고 한다. 그 곳에서 등유를 몸위에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단지 몇 개의 뼈 조각 뿐. ●왕궁에서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지 열훌 후,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즉각 증명했던 일본정부는 미우라 자작과 스기무라, 그리고 군무아문의 고문관이었던 오카모도 등을 소환하여 체포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다른 45명과 함께 히로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24. 경기도 고양에서 본 한국의 장례예법 ●몇 킬로미터 동안 도시에 일용품들을 공급하려고 장작더미와 쌀, 그리고 소나무 장작을 지고 하는 소들이 길에 바글바글했다. ●한때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황폐한 관청들과 3백여 채의 가난한 오두막집들이 모여 잇는 <고양>에 도착했다. ●가난한 사람일 경우 3일을, 중류층일 경우 9일을, 귀족이나 고위관료일 경우 석 달 동안 매장을 유보하는 것이 관례이다. ●보통사람들은 3대 조상까지만 모시면 된다.....과부는 평생동안 소복을 입는다. 25. 개성–옛 왕조의 수도 ●우리가 파주에 도착하기 전에 날은 어두워졌고, 마부는 호랑이와 도적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불을 밝히기 위한 식물성 기름을 러시아와 미국의 등유가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었다....등유는 시골의 밤 풍경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평양 남쪽에 있는 아주 외 딴 마을에도 등유가 다 퍼져있는 것을 보았다. ●인삼은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다. 극동지역에 며칠간 머물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뿌리와 그것의 효험에 대한 극찬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경작시기는 정부에서 내리는 지시에 따른다. 재배자와 상인은 날자가 빠를 때 가장 큰 이윤을 낼 수 있다. 오직 두 명의 가공업자와 150명의 재배자만이 허가를 받는다. 가공되는 야야은 제한된다. 1895년에는 홍삼 1만 5천 캐티와, 수염(잔뿌리), 3천 캐티만이 허가되었다. ...수출용 이것 한 바구니는 1만 4천~2만 달러(1억 내지 2억)의 가치를 지닌다. 26. 청일전쟁 직후의 평양 ●꿩들은 마부가 길 밖으로 쉴 새 없이 몰아내야 할 만큼 많았고, 야생오리도 시냇물마다 가득했다.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임지에 관계없이 이지역의 대부분 관리들은 안락과 사교를 위해서 서울에 살았고, 거기에는 하급관리만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재직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들은 관학지역의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 보다는 갈취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강하나 증오심을 가지고 일본군을 미워했지만, 일본군인들이 매우 공손하며 그들이 가져가는 모든 것에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영향아래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엔화는 서서히 한국 경제의 내부로 침투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새로 주조된 한국의 주화의 견본조차 본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번의 여행처럼 돈을 한 짐 싸들고 다녀야 한다거나, 거슬러 받을 엔화가 없어서 곤란에 처하는 불편 없이, 모든 여관에서 쉽게 통용되는 커다란 엔 은화를 사용하면 되었다. ●한국의 공산품 중 최고인 종이는 전라도에서 최상의 제품이 생산되었고, 노점 진열대에서 인기가 좋았다. ●8만의인구를 가진 번창하던 평양은 쇠락하여 1만 5천의 주민만이 남아 있었다. ●평양은 군대에 의해 습격당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 이곳에선 어떠한 실제 전투도 없었고 약탈도 없었다. ...이 모든 잔해들은 적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싸운다는 사람들(중국군과 일본군)에 의해 의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주민 대부분이 도망간 후였다. 일본군들은 기둥과 목조물을 부수고 지붕을 땔감으로 사용했으며 또 마루위에 불을 피우고는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집이 타버리기도 하였다. ...뒤 이은 점령기간 동안 일본군대는 정당하게 행동했고, 마을과 이웃에서 거둬온 전리품들에 대해 꼼꼼하게 배상했다. 사람들은 일본군들을 아주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의해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평양사람들은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이일본군들이 떠나고 나면 시민들의 권리를 얕보고 시민들을 무수히 폭행하고 강탈하는 한국의 구제 군대가 그들을 괴롭힐까봐 매우 걱정했다. ●기자께서 B.C 1122년 중국에서 건너와 7세기동안 지속된 왕조를 세우고 평양을 도읍으로 정했다는 이신성한 장소를 지날 때 말탄 이들은 말엣 내릴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 씌여 있다. 27. 안주, 덕천에 이르는 평안도 길 ●길가의 작은 집들은 유쾌하고 분주했다. ...이틀 동안의 언 정도 단조로운 여행 뒤에 <수양리>를 지나서 만난 부락은 정말 아름다웠다. 몇 몇 큰 계곡들은 특히 매력적이었다. 야트막한 언덕 사면으로 과일나무와 그 밖의유실수들이 즐비했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성(옷)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유족해보이는 큰 마을들이 나타났다. 이 평양 북방의 마을들은 한국의 다른 시골마을보다 훨씬 더 반듯하고 청결했다. ●대부분의 한구의 시골가정에서 조금씩 가지고 있는 이 돼지들은 터무니없이 작은 검은 종이고 성숙한 것이 11.8 킬로그램도 되지 않는다. ●평안도 지방에는 양반계급이 없다.....한국인들의 주식인 쌀은 안주로부터 가져오고 있으나 부자들, 즉 관리들만이 먹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크고 작은 기장을 먹고 산다. ...장날에 내놓은 것들은 거의 모두 일본제품이었다. 28. 알일령을 통과하는 험로 ●한국의 국민들이 오로지 과세를 위한 지배가아니라 산업의 발전을 위한 지배 아래에 있었다면 이 같은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 없다.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반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아! 비숍여사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정확히 보고, 한국인의 힘찬 에너지를 발견하고 있다. 우리 자신들이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과학과 실질을 멀리하고 성리학에만 매달리는 학문적 풍조에 실망하고, 오직 중국의 한족문화만 숭상하고 우러러 보는 사대주의에 낙담하고, 국가발전과 국민들의 먹고사는 일보다는 자신들의 영달만을 위해 싸우며 권력다툼에 지나지않는 당파싸움만 일삼는 지배계층을 저주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정치체제의 개혁을 두려워하며 오직 백성들의 고혈만 빨아먹는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왕들과 지배층들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자조만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한국을 돌아보며 한국인들의 위대성을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다. 1백년이 지나 우리는 해 냈다. 비록 연합국의 승리에 힘입은 바 컸으나 해방을 이루어 냈고, 비록 김일성이 영원히 용서 못할 동족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은 극복해 냈다. 그리고 박정희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가난을 극복하고 중진국을 거쳐 전 세계 220개국 중 당당히 선진국 OECD 34개국에 포함되고 세계를 이끌고 움직이는 빅20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제 민주정치면에서나, 자유와 인권면에서나 ,과학기술면에서나 산업발전면에서나, 의료복지면에서나, 대중문화면에서나, 스포츠면에서나 어느 하나 선진형 아닌 것이 없다. 오늘날 아직까지도 정치인입네, 국회의원입네 하며 권력놀음에 툭하면 국회문을 닫고 거리를 휘저으며 프랑카드를 내걸고 피켓을 들고 무어라고 연신 외쳐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일삼고, 온갖 저속한 말로 상대당 비난전으로 말장난이나 하며 사는 꼴사납고 가소로운 정치인들이 판치는 세상이긴 하나, 그들이 이 나라를 만들어낸 것이 전혀 아니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요, 인권이요, 국민의 뜻이요 외치면서 온갖 갈등만 조장 생산해 내는 저 웃기는 야당동네사람들이나 거창한 시민단체동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결코 아니다. (이들은 무시와 착취와 차별속에 눈물로 살아가며 하소연도, 도움도 받지 못하는 섬 노예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많은 다문화가정 여성, 폭언과 착취속에 살아가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 계몽하거나 투쟁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고, 북한동포들의 가슴 찢어지는 인권문제는 남의 나라(?)일이라 정치적 간섭이 된다면서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면 게거품을 물고 소리친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런 인간군상들이다.)
●겨울이 아주 추운 한국의 북부에서 농부들은 수확으로 얼마간의 현금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땅속의 구멍에다 넣고 거기에다 물을 뿌리는데, 관리와 도적들로부터 안전해 질 때까지 돈꾸러미는 그렇게 얼려진 땅속에 묻힌다.
29.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
●한국의 하층계급 여성들은 버릇없이 자라고 예의가 없어 같은 계급의 일본 여성들이 가진 절제와 우아함, 중국 농촌 여성들의 과묵함 혹은 친절함이 전혀 없었다. 어디에서나 밤늦도록 계속되는 끊임없는 빨래는 오직 남자들의 옷에만 한정된 것이지 여자들의 옷은 매우 더러웠다.
●이 흰 옷, 특히 겨울에 흰 솜을 채워 넣는 옷을 입는 것은 여성의 고되고 간단없는 노동을 필요로 한다. 외투는 씻을 때마다 반드시 실을 빼어 풀고 다시 꿰매야 하며, 몇몇 긴 솔기는 종종 풀 먹여야 하지만 훨씬 더 많은 바느질을 해야만 한다.
...이런 노동 때문에 한구의 농촌 여성들은 삼삽대에 이미 오십대로 보이고, 사십이면 종종 이가 없어진다.
※불과 30~20년 전까지만 하여도 시골 농촌의 대부분의 70대 할머니들은 족진 머리, 별로 예쁘지 못한 몸빼, 살집 없는 마른 몸, 구부러진 허리, 몇 개의 이는 빠지고 까만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의 70대 할머니들이 풍채 좋고 예쁘게 화장한 얼굴에 값비싼 노란색이나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바바리나 모피외투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자가용을 운전하며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모습에 우리는 한없는 부러움만 가졌을 뿐이었다.
우리도 이루어냈다. 요즘 70대 할머니들 옛날 할머니 아니다. 노인회관에서 주민센타에서 함께 모여 즐겁게 식사하고, 이것 저것 다 무료로 배우고, 유명인사들 강연듣고 국악에서 뮤지컬까지 공연보러 다니신다. 자가용 운행은 아직까지는 전직교수나, 공무원이나 교사, 간호사 등 전문직업에 종사했던 60대 여성들까지 대부분 필수로 하고 있지만, 장차 몇 년 후면 우리네 70대 할머니들이 자가용 몰고 여행 다니는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볼 날이 금방이다. 아! 대한민국!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파이팅!
●도시여성이나 상류계층 여성들의 도덕적 건전성은 우리유럽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30. 평양의 무당과 기생
●주민들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파렴치하게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중국병사로부터 시달린 일을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물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변덕스러운 습관을 가진 한국의 증기선 해령호는 명목상으로 평양과 제물포사이를 왕래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을 60리쯤 거슬러 내려간 포산에서 출발하였다.
●평양은 매우 부유하고 부도덕한 도시였다. 무엇보다도 평양은 몇몇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무서운 적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거부했다. ....평양은 오래전부터 기생과 창녀, 요설가로 우글거렸고 富와 파렴치한 비행으로 악명 높았다.
●평양은 항상 도시의 아름다움과 많은 점에서 일본의 게이샤를 닮은 노래하고 춤추는 소녀들인 기생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생들은 대부분 정부에 소속돼 있었고 국고에서 지원받았다. 첫 번째 서울체류에서 안 사실이지만 약 70여명의 기생들이 왕궁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음악가들과 똑 같이 정부부서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한국의 남편들이 그들 부인의 교양이 전무하고 발전되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과 대조된다. 기생은 항상 훌륭한 옷을 입는다. 그들이 평양의 진흙길을 걸러 나를 보러 왔을 때 격리되어 생활하는 여느 한국 여성들과는 달리 남녀 모두에 대한 예절이 우아하고 편안했다.
●5천의 군사와 함께 평양과 한국의 문화를 찾아오던 기자는 이 넓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또 첫 번째 왕조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위만의 군대를 피래 이 강을 따라서 도망쳤다.
31. 단발령의 충격과 아관파천
●1896년은 ....일본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친일적인 정권은 전국에 걸쳐 분괴되고 있었다.
●갓은 ....한국인에게는 끝없는 걱정거리가 된다. 만약 비에 젖는다면 이것은 못쓰게 된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은 도포자락 안에 이것을 위한 방수 커버를 넣지 않고서는 좀처럼 밖으로 나다니지 못한다.
●진정한 애국심이 부복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겐 강한 국가적 본능이 있다.
●같은 날(1896년 2월 11일) 수 천명의 백성들이 단발령을 취소하는 명령을 읽었고, ....관청의 집무실을 지키다 체포된 총리대신(김홍집)을 비롯해서 농부대신, 탁지부대신은 붙잡혀서 거리에서 참수를 당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상투를 자르게 한 장본인이 총리대신이라고 간주하여 정말 잔인하게 시체를 모독하고 손발을 잘라내는 등 극도의 야만성을 보였다.
32. 재정비된 한국의 정부
●왕비의 힘 있고 야심 많은 사촌인 민영환의 통솔하에 모든 실무권한은 내무부로 집중되었다. 그 동안 왕비와 그녀의 친척들은 전 나라에 걸쳐 요직을 점거하고 아무런 제재없이 국민들을 착취했다.
...이 나라는 관료주의에 의해 완전히 젓갈 담구어진 형편이었다.
엄청난 권력 남용, 공금 낭비가 성행할 뿐 아니라 총치체제 자체가 이미 거대한 권력의 남용, 국익의 낭비였다. 현재 한국의 통치체제는 모든 인생을 근면과 생업으로부터 파산시키고 강탈해가면서 바닥도 끝도 보이지 않는 몰락과 부패, 타락으로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관직과 재판 판결이 다른 상품과 다름없이 사고 팔렸으며, 정부는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정부의 단 하나 남은 권한은 피지배자들을 먹이로 삼을 수 있는 권리뿐이었다.
33. 한국의 교육 및 대외무역
●한국의 수출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콩, 생선,(말린 생선), 암소고기, 인삼, 종이, 쌀, 그리고 해초 등으로 여겨진다.
●나는 멀리 않은 장래에 개선된 도로와 철도, 개선된 문명이 한국에 들어서리라 믿는다.
●일본은 가위, 칼, 성냥, 바늘, 호미, 풀깎기, 비누, 향수, 석유, 철제 솥, 못, 기타 상품의 증가 수요를 지속적으로
공급한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한국의 환경이 일본이나 러시아 어느 쪽을 도움으로 점차 개선되고 잇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관리들의 구상력과 재치는 주로 공공재정에서 사적인 이익을 빼돌리기 위한 기교와 장치를 고안하는 데 발휘되고 있다. 어떤 한국 관리의 부정직한 수입원이 발견되어 그것을 근절시키고 나면 더 근절시키기 어려운 교묘한 방법이 즉시 고안된다.
34. 한국의 무속신앙
●성황당 ●작대기(솟대 ) ●무당 ●판수(맹인 점술사)
●지관
●판수가 만들어 파는 부적에 대한 신뢰는 매우 크다. 아마도 한국에서 부적을 들고 다니지 않는 어른이나 아이는 없을 것이다.
35. 한국의 귀신들
●박수무당과 같이 남성인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무당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어 박수무당조차도 여성의 옷을 입고서 그들의 기능을 수행한다.
●무당은 降神과 世襲으로 입문한다.
●萬神(여자무당) ●마을 굿 ●성주풀이
●무당에게는 신이 내림으로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구애를 받지 않을 정도로 지위가 강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부를 잃게 된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고난이나 질병의 이해 못할 원인에 대해, 상업과 관련된 운수의 결과나 개인적인 발전의 계획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 무당의 말을 거의 신령과 다름없이 높이 평가한다.
※오늘날 21세기 초 첨단 과학(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온갖 자동시스템 등)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미처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세상인데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미신을 믿어 점을 치고, 이름을 짓고, 묘를 옮기고 결혼날짜, 개업날짜, 이사날짜를 잡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미신을 쫒는가 하면, 식사 때면 밥 먹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기도까지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자신의 조상께 제사드리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기도 한다. 참으로 영혼의 세계는 누구도 자신하지 못한다. 나는 특정 종교가 없음에도 위대한 신(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정하며, 귀신도 인정하나 조상을 섬기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어떤 위대한 분이나 귀신들이나 조상님들에게까지도 기대어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은 못한다. 내가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 나의 동반자나 나를 찾는 자식이나 친구들이 없게 되어 내가 한없이 외로워질 때- 그때 나는 위대한 어느 분에게 스스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
●五方將軍(5명) ●神將(8만 명으로 귀신의 장군) ●도깨비 ●魔鬼 ●山神靈
●호랑이(산신령의 화신) ●龍神 ●성황당(가장 큰 제단) ●토지신 ●천신(옥황상제)
●城主(지붕의 용마루를 지키는 영혼) ●터주(宅主)
●業主(부엌의 귀신) ●철륭(澈龍 : 가족의 행운과 운명을 좌우하는 신으로 터주귀신의 일종)
●제석(帝釋:아기출산을 수호하는 귀신인 삼신제적의 할아버지) ●바물(富의 귀신)
●걸립(乞粒:가족의 외적인, 즉 상업적인 부를 책임지는 귀신)
●무당이 얼마나 沒我的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녀의 춤 가운데 몇 가지에서 특히 음성적인 귀신들 중 하나인 <이씨 왕조의 귀신>을 푸닥거리하는 춤에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정도이다. 때때로 무당은 그 광란적인 엑스터시로 인해 죽는 경우도 있다.
36. 1897년 서울의 정치적 상황
●이어지는 짧은 대화에서 세자가 끼어들어 성장한 체격과 더불어 상당한 정도의 총명함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는 한국에 12년 동안 체류해 왔다. 그는 러시아의유능하고 충실한 심복이다. 왕과 모든 외국의 사절들은 그를 신뢰한다. 또한 솔직히 말해서 그는 <헤지라의 시간 : 아관파천을 말함>까지 한국인들의 따뜻하고 판단력 있는 친구였다. 그의 지도로 국왕은 악명 높은 이를 임명하거나, 독단적으로 아무나 체포하거나, 일을 잘 수행하는 관료를 이유 없이 좌천시키거나, 유럽의 궁정에 쓸데없이 돈만 드는 사절단을 보내거나, 군대나 경찰력을 마구잡이로 증강시키는 식의 우행을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37명의 부유한 가문 출신의 젊은이들과 7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생도들의 군대를 볼 수 있었다. ....이 젊은이들은 러시아 장교로부터 2년간 군사훈련을 받아왔는데 훈련은 매우 엄격하다.
●이 새로운 군대는 현재 서울에 4천 3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 중 8백 명은 왕을 지키기 위한 호위병으로 훈련을 받으며, 1천 2백 명은 서울의 변두리지역에 배치된다.
●서울의 도로들은 최소한 17미터의 폭으로 넓혀졌고...좁은 오솔길은 넓혀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도로에 의해서 사라지고 없었다. 도로 부지에는 쓰레기로 인해 받는 <대책 없는 공격>이 사라졌으며 사람들이 뙤약볕 밑에서 확 트인 평평한 거리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리로 된 진열대가 있는 상점들이 수없이 세워져 있다.
...이러한 엄청난 변화는 넉 달 동안에 일어난 일어었는데, 이는 현 중앙관세청장이며 미구에 서울시장(한성부윤)이 될 예차윤씨의 정열과 능력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워싱턴을 시찰하고 미국의 市政 업무들의실행에 대해매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예차윤씨는 확실하게 어느 분인지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내용응로 보아 윤치호(1865-1945)씨가 아닌가 여겨진다. 윤치호는 갑신정변후 미국의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년간 공부한 뒤 상하이 중서서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1895년 2월 귀국해 김홍집 내각의 외부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협판 등을 지냈고,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 하였다.
...다시 복원된 멋진 도로는 과거의 초가집들이 멀찌감치 옮겨가고 기와집으로 바뀌어 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들이다.
●독립협회의 가입비는 대단히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는 이미 2천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언문으로 씌여진 신문을 팔에 끼고 거리를 지나가는 신문팔이들, 가게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은 한국에서 1897년에 볼 수 있는 참신함이다.
●계, 즉 친목단체의 원리는 한국의 가장 독특한 성격 중의 하나를 대표한다. 현재 계는 보험회사, 상호이익조합, 돈을 빌려주는 기업조합, 생명보험, 결혼이나 장례조합, 거대한 무역동업조합 등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37. 한국에 부치는 마지막 말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국민들의 잠재된 에너지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산층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지 않다. 중산층이 그들의 에너지를 쏟을 숙련된 직업이 없다. 매우 충분한 이유로 인해서 하층 계급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餓死를 면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가장 큰 가게조차도 일정한 상점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한국의 모든 것은 낮고, 천한 수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한국의 바다에, 땅에, 가난에 견딜 수 있는 국민속에 있음을 보았다.
●이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관청과 관직으로 몰려드는 현상이다. .....오랜 세월동안 한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매관매직이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사회는 공공기업(공사)이나 공무원이 되기 위한 대학생들의 취업열이 가히 광풍이다. 심지어 대학에 입학한 1학년 때부터 공무원 시험준비를 시작하는 학생들도 있다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이 취업 학원 다름 아니다. 대학생활을 통한 수준 높은 철학적 사유도, 예술적 소양을 높이는 향기도, 대학생들만의 멋진 낭만을 통한 멋스러움을 기르는 기회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방자치를 시작한 지 20여년인데 자치단체장(시장·군수) 들이 매관매직을 하다 형사처벌을 받아 구속되고 재선거가 치러지는 곳이 수없이 많다. 언제나 저 부끄러운 일들이 사라지려나....너도 나도 공무원이 되려는 모습이나, 사무관 승진시켜 준다고 돈 받아먹고 구속되는 지자체장들이나 아직도 단절하지 못하는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일본과 서양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한국의 소작농은, 기생충들의 부양자로 살아가는 운명이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공민권, 법 앞의 평등, 그리고 소득을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 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와 국경을 인접하고, 좁은 바다만으로 일본과 구분되는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짓는데 크게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