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식탁위의 한국사

청담(靑潭) 2013. 12. 19. 15:45

 

 

식탁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

 

 서설

 

음식문화에 대한 책은 처음으로 접한다. 흥미를 가지고 읽는 가운데 내 자신 60여년을 살아오면서 삶의 현장에서 익히 경험하였거나 기억되는 내용들이 많은 것을 보니 우리음식은 바로 우리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의 대부분의 서민들은 쌀밥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그나마도 봄이 지나면서부터는 대개는 그처럼 맛이 없고 거친 꽁보리밥을 먹었다. 꽁보리밥보다는 그래도 먹기 좋은 시래기밥, 무우밥, 고구마밥, 콩마물밥 등을 많이도 먹었다. 그중 시래기 밥(간장에 비벼 먹는다)이 가장 맛있고 질리지 않아 좋았다.고구마 밥은 너무 달아서 정말 싫었다. 여름에는 감자가, 겨울에는 고구마가 있어 다행히 배는 곯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철이면 밥대신 저녁마다 먹는 팥 칼국수와 막국수가 참 맛있었다. 봄철이면 밥상위엔 으레 미나리 김치가 맛있어 먹을 만 했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고구마순 김치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겨울철이면 김치로 만든 청국장이 끼니 마다 올라오는데 정말 먹기 싫었다. 고구마와 김치 청국장에 얼마나 질렸던지 40대까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50대가 되어서야 재수시절 잘사는 시내 친구집에서 맛보았던 시래기에 돼지고기를 넣고 만든 순수 청국장을 먹기 시작했고, 고구마도 (맛있는 호박고구마만)먹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가 무언가 먹고 싶어 뱃속이 궁금하다고 조를라치면 두말없이 빵을 쪄주시거나 부침을 만들어 주시거나 단술을 만들어 주셨다.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가난한 사람들도 그저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나,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파트에 자가용에 온갖 가전제품을 소유하고 해외여행을 가기 시작하고 마음만 내키면 외식을 하는 나라가 되었다.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는 나라가 아니라 먹을 것이 넘쳐 건강을 생각하여 다이어트 열풍이 부는 나라가 되었다. 마음껏 먹어대며 살이 찌는 것을 두려워하고 성인병을 걱정하는 나라가 되었다. 고려대생이 붙인 대자보‘요즘 안녕하십니까?’가 젊은이들 사이에 열풍인데 어른들은 그저 무덤덤하거나 안타깝게 바라본다. 살아온 역사와 환경이 다른 우리 50-60대 이상 세대의 긍정적 가치관과  20-30대 젊은 친구들의 비판적(또는 부정적) 가치관의 차이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누가 꼭 옳다거나 그르다 거나 하고 다툴 필요는 없다. 그냥 다를 뿐..... 

 

  어제 저녁에 만난 소중한 친구들 모임인 해우회 익산모임에서도 정말 많이도 먹었다. 돼지갈비, 돼지 삼겹살, 냉면, 소주, 맥주, 닭튀김, 소고기 육포 등등...그리고 오늘 배가 더부룩하고 기운이 쇠잔하여 이따가는(잠시 후) 온천에 갈 요량이다. 먹을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게 하고, 한국인의 키를 키우고, 몸집을 크게 하고 수명을 길게 하였지만 그래도 그 옛날 가난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시 돌아갈 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제 모두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기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인 듯 도 하다. 그 시절 10대 때 마을에서 함께 어울리던 병환이 아저씨 영균이 형을 만나고 싶다. 두 사람 모두 익산에 살고 있는데도 잘 만나지못한 것은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게지. 곧 다시 만나 어울리는 시절이 오리니...

  책을 정리한다기보다는 기억해 두고 싶은 내용만 적어본다.

 

1부 개항기, 다양한 외래 음식이 들어오다

 

중국 화북지역에서 20세기 중반이후 쇠퇴하여 사라졌던 짜장면이 한반도에서는 1950년대 이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1909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은 가구 수 7,745호에 28,788명에 이르렀다.

 

 

2부 국밥집

 

국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며 장국밥, 국말이라고도 하고 한자어로는 탕반이라고 적는다.

한국인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으뜸으로 치므로 아무리 군음식을 많이 먹었더라고 곡물로 지은 밥, 그 중에서도 쌀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느끼는 생각은 여전하다.

 

설렁탕

1920년대 서울에서 설렁탕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설렁탕은 쇠머리, 사골, 도가니를 비롯하여 뼈, 사태고기, 양지머리, 내장 등을 넣고 10시간 넘게 푹 끊인 음식이다.

<박제가 북학의>

우리나라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나라의 제사나 호궤(군사들의 특별식)에 쓰기 위해 잡는다. 더불어 반촌과 한양 5부의 24개 가게를 비롯해 300여 고을에도 반드시 가게를 연다.

해방이후 설렁탕에는 미국에서 무상으로 들어온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들어가게 되었다.

 

추어탕

사실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엄밀하게 따지면 다른 종류의 민물생선이다. 미꾸라지가 미꾸리에 비해 크기도 하고 색도 진하다.

우리는 청소년 시절 동네에 있는 둠벙(작은 방죽)을 품어 붕어, 송사리를 수대에 가득 잡고 미꾸라지도 반 수대는 넉넉히 잡는다. 솜씨 있는 형들이 솥에 산채로 넣고서는 소금을 뿌리고 삶는다. 우리는 그릇에 가득 담겨진 미꾸라지를 사정없이 아구 아구 먹어댔다.

 

육개장

육개장은 개장에서 변이된 음식이다. 육개장이 탄생한 이유눈 개장을 기피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한다.

개장은 한자로 狗醬이라 적는다. 오늘날 보신탕이니 사철탕이니 영양탕이니 부르고 있다.

<그리피스 1871>

일반 푸줏간에서는 개고기를 파는데, 조선 사람들은 미국의 인디언들처럼 이 고기를 즐긴다. 그러나 음력 정월에는 종교적 금기로 인하여 개고기를 먹지 않으며, 개처럼 천한 신분들만이 먹도록 되어 있다.

육개장의 실질적인 대중화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졌다.....1950년대 이후에는 개장 판매를 금지하는 행정조치가 시행되는 바람에 개장 대신 육개장이 남성들의 보신음식으로 인기를 끌었다. ...개장을 만들 듯이 살코기를 손으로 찢어야먄 육개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양드리도 처음에는 보신탕을 기피하더니만 어느 날인가 맛을 한번 보시더니 몸에 좋다는 핑계로 나와 함께 가끔씩 드시기 시작했다. 여름이면 시골에서 노랑개를 한 마리 잡아 두 어집이 나누어 육개장(?)을 해서 먹었는데 양드리가 만든 육개장(?) 맛은 익산과 전주에서도 유명한 춘포보신탕보다 더 맛이 있어 그야말로 입에서 녹았다. 우리 아이들은 의심쩍어 하면서도 육개장이니 먹어보라는 엄마 아빠에게 속아주며 고등학교 시절까지 잘 먹어 주었다. 훗날 아들은 진짜 육개장으로 생각하고 먹었다하였으나 딸은 고등학교시절에는 가짜육개장인줄 짐작은 하였으나 워낙이 맛있는 음식이므로 그냥 모르는 체 먹었다는 고백이었다. 10여년전 부터는 그저 여름철이면 일년에 두어번 보신탕집에 가는 정도이고 금년에는 학교 근처에 유명한 집이 있어 대여섯 번 먹었다.

 

육회비빔밥 탄생의 비밀

 

사실 지구촌에서 육고기나 생선을 날 것 그대로 즐겨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 많지 않은 사람에 아주 당연하고 당당하게 속한다.

비빔밥은 한국인의 일상 식사를 구성하는 밥++반찬이 밥+반찬으로 간편해진 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60년대부터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전주비빔밥은 1980년대 초반에는 전국정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면옥집의 대표 메뉴 냉면과 만두

 

냉면이라고 하면 메밀가루로 빚은 국수만을 가리킨다. ...냉면은 본디 겨울음식이다.

1910년대 들어 사람들은 냉면은 여름음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냉면의 변신은 근대적인 제빙 기술과 겨울에 캐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는 냉장시설의 탄생이 결정적인 역학을 했다.

만두의 대중화에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와 서울로 이주해온 산둥지방 출신의 중국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도시 서울로 이사를 온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 사람들 역시 만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평안도 대만두가 서울에서 인기를 누린 때는 식민지시기에 들어와서다. 더욱이 1945년 해방이후에는 월남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냉면과 함게 필수 메뉴가 되었다.

 

근대가 만들어 낸 음식, 삼계탕

 

조선시대에 닭고기는 값비싼 고기였다. 그러니 사위정도는 되는 귀한 손님이 와야 계란을 낳는 씨암탉을 잡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白熟이라고 적는데 여기서 한자 에는 ?그저?라는 뜻이 담겨있다. 곧 소금이나 간장으로간을 하지 않고 그냥 익혀서 내는 음식을 가리킨다. 軟鷄白熟은 부드러운 닭, 곧 어린 닭을 말하는데 요사이 말로 嬰鷄이다.

수삼유통이 확산되고 닭고기 수급이 원활해지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영계백숙을 판매하던 식당들이 삼계탕이란 이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진행된 양계업은 공장식 양계장에서 생산된 닭고기를 식탁위에 올려놓는 불행을 자초했다.

익산의 하림식품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닭고기 생산공장 이라고 한다. 김홍국 회장은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리농고를 다니신 분인데 학생 때부터 학교 실습장에서 닭을 키웠다고 하며 최근엔 미국 닭고기 시장도 석권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 시골마을에서 7촌 아저씨가 대학의 축산과 출신으로 큰 양계장을 운영하는데 직접 구경해보니 정말 닭을 키운다기보다 그저 사육하는 것이었고 생명사상과 지구보존을 아울러 생각하게 해주었다.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우리는 전라도 말로 ?짐치?라 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기존의 배추와 품종이 다른 배추가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 왔다. 그것이 오늘날 배추김치의 재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결구배추(호배추)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말이 되자 점차 호배추가 조선배추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가 되자 시장에서 값비싼 재래종 배추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에 값싼 호배추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0년대 초반이 되자 호배추로만 김장김치를 담갔다. 당연히 시장에서 조선배추는 찾기 어렵게 되었고, 호배추란 이름도 그냥 배추로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전반적으로 김치 소비량이 그 전에 비해 훨씬 줄었음에도 배추김치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금년에도 작년처럼 시골에서 아버지가 키운 배추 50포기를 가져다 아파트에서 김치를 담았다. 우리는 20포기면 충분하므로 30포기 분은 서울의 아들딸 그리고 처제들 둘이 나누었다. 우리 아들딸은 하루 한 끼 겨우 집에서 식사를 하는 정도인데 그나마 김치를 반드시 먹는 것도 아니어서 작년 김치도 두통이나 남았다고 한다. 우리는 시골에 담가놓은 무김치를 두통이나 가져다 겨울 내내 먹으므로 20포기도 오히려 넘친다. 내가 강력히 주장하여 고춧가루를 적게 넣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양드리가 싱겁게 담는답시고 젓갈(멸치, 까나리, 간재미 등)을 너무 적게 넣어 지나치게 싱겁고 맛도 조금 모자란 느낌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내년에는 더 맛있는 김치를 담그겠다.

 

 

 3부 조선요리옥

 

 

0 고급 음식점, 조선요리옥의 탄생

 

요리옥은 음식과 함께 술이 제공되는 곳이다.

料亭은 게이샤의 활동이 좀 더 적극적인 곳이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요정이 있었다. 70년대 중반, 친구 누나네 집이 2류급 요정이었는데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너 댓 명씩 있었다. 내가 그 집에서 매니저로 잠시 일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갈 때면 가끔씩 그녀들과 함께 밥을 먹기도 했는데 차마 그녀들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다. 대학생인 나는 여자대학생들만 보면서 사는데 술집의 아가씨들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것이 아직 어린 20대의 나로서는 부끄럽고 멋쩍은 일이었다. 그녀들은 친구를 삼촌이라 불렀다.

1880년대 제물포 개항이후 일본인의 거주지가 생기면서 일본요리옥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조선 요리옥에서도 기생이 나와서 손님을 접대했다.

 

 

1 신선로, 조선요리옥의 상징이 되다

 

신선로는 음식이름이 아니라 그릇 이름이다. ...겨울에 정자에서 술을 마실때에 신선로는 안주를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면서 동시에 음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신선로는 유기로 만들었다.

1969년에 전기 신선로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연탄 온돌이 성행하는 바람에 마침내 집안에서 화로와 함께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1970년대 이후 신선로의 명성은 오로지 식민지 시기 조선요리옥의 변형인 요정에서만 유지되었다.

 

 

 

2 구절판은 궁중음식이었을까?

 

구절판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담긴 음식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1970년대에 구절판 그릇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칠기나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1950년대 이후 구절판은 가장아름다운 한국음식으로 손꼽히며 외국손님에게 제일 먼저 오르게 되었다.

 

3 한정식의 기본요리, 탕평채

 

200여 년 전 영조 때 노소론을 폐지하자는 잔치에서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 하였던 것이 초나물의 시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정식을 판매하는 음식점에서 탕평채가 필수메뉴가 된 때는 대략 1970년대 이후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 요즈음 사람들은 탕평채의 맛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육식에 길들여진 요즘 한국인들 입맛에 탕평채는 그저 역사가 담긴 음식으로만 부각될 뿐이다.

 

4 잔복초가 요리옥 식탁에 오르기까지

 

해방이후 민생은 최악이었지만 고급 요정은 오히려 성업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의 채복법에서 마치잠녀가 전복을 캐는 장면을 실제로 본 듯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970년은 전후로 일본에서 들여온 고무옷 혹은 스폰지옷이라 불리는 잠수복이라도 입지만 예전에는 그런 옷이 없어 삼으로 엮은 끈도 없었다.

1930년대 전복은 제주도 잠녀가 채취하는 어물 중에서 가장 값이 비쌌다.

2000년대가 되어서야 해상 가두리 방식으로 양식을 하면서 전복 생산량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내가 전복 맛을 처음 본 것은 아마도 1975년경이었다. 강원도 현장학습을 나갔는데 당시 월정사인지 근처의 식당에서 전목죽을 처음 맛보았다. 촌놈들 전복죽 맛이나 보여준다고 식사후 조동원 교수님이 식당에 특별히 부탁하여 전복죽 맛을 보게해 준 것이다.

 

 

5 쇠고기 편육, 고금 요정의 최상급 메뉴

 

보통 서울이나 남부지역 사람들은 제육편육을 먹을 때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 ....돼지고기를 이용한 편육은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남한 사람들에게는 돼지고기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한약을 먹는 동안에 돼지고기를 먹으면 머리카락이 희어진다는 속설이나 돼지고기에 기생충이 잇어 잘못 먹으면 죽게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마침내 1980년대 초반 이후 돼지고기 소비량이 소고기를 넘어섰다. ....바야흐로 1970년대 이후 진행된 한국정부의 돼지고기 소비 육성책이 10여년이 지나면서 쇠고기편육을 좋아했던 국민의 입맛을 돼지고기편육 쪽으로 바꾸어놓았다. 한정식 음식점에서도 더 이상 소고기편육을 식탁에 내지 않게 되었다.

 

 

 

6 한국식 어회에서 일본식 사시미로

 

사시미는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요사이도 한정식 전문점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다.

지금과 같은 사시미는 에도시대에 에도 앞바다에서 신선한 생선이 나오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1905년에는 조선의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냉동 수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과 타이완에도 점차 일본식 사시미가 퍼져나갔다.

회는 어회와 육회로 나뉘고 어회는 다른말로 생선회라고도 한다.

생선회가 결코 서민의 음식은 나이었다. 생선회는 육회와 함께 조선시대부터 고급 음식에 들었다.

1970년대까지 육회나 생선회를 제대로 먹어본 일은 없다. 겨우 전복죽 맛을 한 번 본 경험밖에 없었다. 횟집은 고급 음식점이어서 돈이 많은 사람들이 회식을 하는 곳이거나 손님대접을 하는 곳으로 여겼다. 감히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l980년대 초만 하여도 쇠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돼지고기까지도 꽤나 비싸서 마음대로 사서 찌개를 끓이거나 하지 못했다. 돼지고기 한 근 사려면 마음먹고 정육점에 가야만 했다.

선운사 풍천장어는 우리네들은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80년대초 우리 월급이 십 만원이 겨우 넘어가던 시절, 우리 초년병 교사들은 이웃 선운사에 등산을 가서도 풍천장어를 맛볼 엄두도 못 내고 바윗돌에 돼지고기를 구워 소주를 마시곤 했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선운사에 가게 되면 풍천장어에 복분자를 마셨다 하더라만...

생선회는 정식으로 먹지 못하고 소주한잔을 하려면 으레 아나고(바닷장어)를 시켰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아나고 한 사라(한 접시)에 작은 것 1만원, 큰 것 2만원이었고 정식은 3인이 광어 1kg을 먹으려면 6-7만원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나고나 활어값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이유는 하나, 물어볼 것 없이 활어들의 양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월급이 30만원, 또는 50만원이던 시절에 쇠주 한잔 마시기 위해 아나고 한사라 2만원짜리 먹는 것도 큰 호사였다. 나는 처남이나 동서 형님과 쇠주 한잔 할 때나 먹던 음식이며, 정식 횟집은 가족 모임시나 감히 감행할 수 있던 일이다.

육회는 육사시미를 처음 먹어본 것이 80년대 말이다. 내 봇장(그릇)으로는 감히 육사시미 먹으러 가자 하기는 힘들었으나 당시 주조장 사장인 후배 오성수 사장이나 대학에서 강의하던 김성진 교수 같은 미식가들을 따라 가끔씩 먹었다. 역시 가격은 한 접시에 2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가격은 3만 원 정도이다. 내가 맥주도 활어도 육사시미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먹을 것이 너무 많고 오히려 지나쳐 항상 많이 먹고 후회하고, 적게 먹기 위해 애쓰는 세상에 살고 있다. 행복하다. 젊은이들은 이 행복을 느끼기 힘들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와 시대가 있어 우리와는 가치관이 다르니까... 젊은 그들은 대부분 지금 많이 아프다. 우리는 그 어떠한 역경이 닥쳐도 능히 극복할 자신이 있지만 그들은 아니다. 다시 고구마와 옥수수를 먹고 단수수를 씹고 고무신과 빈병을 모아 엿과 아이스께끼를 바꾸어 먹는 시대가 다시 온다 해도 우리는 능히 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성인들 중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국가가 복지정책으로 해결해야 하지만 아직도 어른이 되었음에도 상대적 빈곤에서 늘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른(특히 노인)이 되어 상대적 빈곤감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찾는 길은 첫째로 욕심을 줄이는 것이 한 방법이요, 둘째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신의 철학을 가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둘째는 역사나 철학서적을 탐독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방법일 수도 있다.

1965년 한·일이 수교 후에는 서울의 명동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 주방장이 사시미를 치는 일식집이 생겨났다. .....또한 일본인 밑에서 요리를 배운 한국인 조리사의 경우, 1980년대 중반까지도 당당하게 자기 이름으로 일식집을 열지 못했다. 반면, 1980년대 초반 부산에서는 일본식 횟집처럼 인테리어를 갖추고서 한국인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 횟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일식집이었지만 요리법은 한국식이었다.

1988년 이후 당시 부유층 사이에서 일식, 그중에서도 사시미가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일대에 일식집이 골목마다 들어섰다. 주방장은 한국인이지만, 일식집처럼 꾸민 음식점이 한국의 대도시에서 고급음식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7 약주, 정종에 밀려나다

 

조선후기 이래 약주는 양반의 술로 인정되었다. 약주는 양반가에서 봉제사와 접빈객을 위해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

약주는 독에 물을 담고 누룩가루를 넣은 다음 찹쌀가루로 찐 떡을 넣어 밑술을 만든 뒤, 다시 멥쌀과 누룩, 그리고 물을 넣어 빚은 술이다. 술독에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약주가

된다. 갈색을 띤 연노랑의 약간 투명한 술로, 알코올 도수는 12-20% 정도이다. 제법에 따라 특이한 약재를 넣어 빚기도 한다. 그래서 약이 된다고 약주라 했다.

서울 양반가에서 마시던 약주를 19세기말 이후 음식점이나 양조장에서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일반인들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말 조선에 와서 일본식 청주를 생산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조차 조선주의 으뜸으로 약주와 탁주를 꼽았다. 조선약주는 분명고급술 이었다.

18831월 부산에 일본 청주공장을 설립했다. ....결국 1920년대 이후 조선 사람들은 일본 청주회사의 상표 가운데 하나인 정종을 일본 청주를 일컫는 이름으로 대체하여 부르게 되었다.

결국 식민지시기 한반도에서 일본의 청주는 생산량과 품질에서 조선 약주를 밀어냈다.

1950년대 희석식 소주가 돈 없는 사람이 마시는 저급술이었다면, 정종은 부자들이 마시는 고급술이었다.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정종으로 산학대왕표, 수복표백화, 금천표보해 등이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민속주란 이름으로 다시 약주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중 백세주라는 술은 이름 그대로 약주의 장점을 담아낸 술이다. ...주당들은 약주에 희석식 소주를 타서 달콤한 맛을 상쇄시키고 대신에 독한 맛을 더했다. 이름도 오십세주라 한다.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는 제사 때가 되면 약주를 담그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막을 술이라 하시며 제사에 약주를 쓰거나 정종을 썼다. 지금도 명절 차례나 제사 때면 정종을 쓴다. 1970년대 전주에는 도청 앞에 정종 대포집이 있었다. 정종을 대컵(맥주컵)으로 한잔 씩 팔았는데 안주가 그만이었다.

2013년 한국인들이 마시는 술을 정리해본다.

 

막걸리 : 90년대 이래 잊혀졌던 막걸리가 전주에서부터 안주를 무한정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막걸리 집으로 태어나면서 이제 언제나 즐길 수 있는 술로 재탄생했다. 한 대는 포천 이동막걸리가 유명했지만 요즈음은 정말 많은 막걸리 브랜드가 나타났다. 우리지역에서는 완주 소양의 천둥소리가 맛이 좋다.

 

소주 : 한국인들이 최고로 마시는 술로 성인 연가 82병인가를 마셔서 단일 술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술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마시고 미국인들도 마신다는데 해외에서는 값이 비사서 여행시에는 팩으로 갖고 나간다. 소주는 역시 참이슬(진로)이다. 우리 전북 지방에서는 한때 보배를 많이 마셔주기도 했다.

 

맥주 : 내내 OB맥주가 판을 치더니만 1990년대 들어 갑자기 하이트가 완전히 맥주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또 카스인기다. 간단하게 한잔 할라치면 생맥주다.

 

정종 : 명절이나 제사 때 마셔보는 술이다. 그러나 따뜻하게 한잔 하면 기분이 좋고 또 금방 깨므로 참 좋은 술이다. 평생동안 오로지 군산에서 생산되는 백화수복만 먹었다.

 

와인 : 수많은 종류의 각국 와인들이 대형마트에 가득하다. 유럽이나 남미산들인데 5만 원정도의 고급에서부터 7-8천 원 짜리까지 다양하다. 나는 무주에서 근무하면서 머루와인을 자주 먹게 되어 지금도 포도와인보다는 머루와인이 좋다.

 

 

 

위스키 : 위스키는 비싼 외국 술이라는 인식이 있고, 서민들은 비싸서 먹을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20여년 전 까지 아가씨가 있는 고급 룸 싸롱에서 위스키 한 병에 수십만 원씩 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세 명이 가면 두병은 먹게 되고 20여 년 전에도 5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나오고 팁(5만원)까지 주어야 하므로 이래저래 100여 만 원이니 서민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술이었다. 집에서 사다 먹으려 해도 국산 위스키마저 몇 만 원씩 하므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대체로 선물용으로 주고받고 하는 술이 되었고 요즈음은 웬만하면 집에서도 맛볼 수 있는 술이 되었다. 딤플, 조니 워커, 시바스 리갈, 패스포드, 임페리얼, 발렌타인 등이 일반적인 술인데 그중 시바스리갈과 발렌타인 12년산이 비싸지 않고 맛있어서 대중적이다. 발렌타인 17년산은 확실히 좋은데 부자들은 30년산을 마신다. 요즘은 빠나 가요주점에서 30만 원 정도면 양주 한 병을 마실 수 있으니 세상 정말 많이 변했다.

 

 

8 명란이 후쿠오카로 간 사연

 

일본인의 발동선과 수조망은 명태잡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1930년 함경남도 어항에서 모두 24척의 발동선이 가동외었는데 그 중 21척이 일본인 소유였다.

 

 

9 ··3국의 합작품 당면잡채

 

요사이 한국인은 잡채하면 당면이 들어간 음식을 떠올리게 마련이다....1920년대가 되자 전국각지에 당면 공장이 들어섰다.

해방이후 당면잡채는 한정식을 판매하는 식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분식집에서도 중요한 메뉴가 되었다.

결국 무치는 방식의 당면잡채가 1970년대에 한국 음식으로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이래 지금까지 생일, , 회갑과 같은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당면잡채는 20세기 전반기 제국 일본에 편입되었던 중국의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살았던 조선인·중국인·일본인의 합작품이다.

 

 

10 요리옥 사람들, 기생과 보이

 

요리점에 불려온 기생들은 시간을 기준으로 돈을 받았다. ...조선 요리옥 기생은 식사자리를 예술의 장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4부 대폿집

 

0 고달픈 서민의 안식처, 대폿집

 

대폿술은 무엇인가? 바로 큰 잔으로 마시는 술을 가리킨다.

주모가 혼자서 운영하던 선술집은 대폿집이 되었고 고용녀를 둔 선술집은 니나노집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대폿집의 주류는 막걸리가 아니라 희석식 소주로 바뀌어 갔다. ...막걸리를 큰 사발로 내놓아 <왕대폿집>이라 불리던 대폿집이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지만 말이 왕대포이지 날이 갈수록 막걸리보다 희석식 소주를 즐겨 마셨다.

 

  

1 대폿집의 끼니술, 막걸리

 

노동에 지친 도시 노동자들은 대폿집이나 국밥집에 가서 고기 육수가 가득한 뜨끈한 술국이나 국밥을 먹으면서 막걸리를 들이켰다.

탁주라하는 것은 막걸리라 하기도 하고 탁백이라 하기도 하고, 막자라 하기도 하고, 큰 술이라 하기도 한다.

막걸리에는 누룩을 사용했다. ...추운 날 막걸리와 국밥은 언 몸을 녹이고 바람을 막아주며, 허약한 원기를 일으켜 몸을 온전히 지켜주면서 고픈 배를 채워준다고 했다.

소주는 압록강을 건너오기 때문에 서북지방에서 먼저 퍼지고, 맥주는 황해를 건너오기 때문에 영호남에 먼저 퍼진 것이다.

1934년 서울이남에서는 단연코 탁주의 생산량이 훨씬 많았지만, 이북에서는 소주의 생산량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946년 미군정청에서 막걸리 주조 금지령이 내렸다....결국 이 금지령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야 슬그머니 사라졌다.

1966년 멥쌀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밀가루로만 막걸리를 담도록 했다. 이후 밀가루 원조량이 줄자 막걸리 또한 밀가루 함량을 50-70%로 줄였다. 19771215일 정부조치로 다시 쌀 막걸리가 부활했다.

1980년대까지 막걸리는 여전히 농민과 노동자, 심지어 반정부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의 술이었다.

2000년대 이후 갑자기 일본에서 막걸리 붐이 일어나더니 한국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한국드라마 붐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막걸리를 찾는 이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돌이켜보니 70년대 초에는 학사주점에서 막걸리를 폼나게 마셨다. 통키타와 청바지와 장발과 학사주점과 뻥튀기가 대학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역전 앞 막걸리 집들엔 아가씨가 있었다. 대학생들에게까지 아가씨들이 막걸리를 따라주는 슬픈 시절인데 그때는 그것을 전혀 마음 아파하지 못했다. 오히려 즐겼다. 나 같은 많은 무식한 젊은이들의 지적 한계였다. 옥수수 막걸리는 참 맛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비싼 특주를 마셨다. 막걸리보다는 두배 이상 비싼 술이었고 도수도 높아 쉽게 취했다. 특주집엔 막걸리 집보다 훨씬 세련되고 예쁜 아가씨들이 상당히 화끈하게 술시중을 들었다.

 

 

 

2 술국중의 으뜸, 전주 탁백이국

 

술국은 쇠뼈다귀를 오랫동안 푹 곤 물에 배추, 우거지, 콩나물, 애호박 등을 넣고 끓인 토장국을 말한다.

탁백이국은 콩나물로 끓인 국밥이다. , 콩나물해장국이다.

식민지 시기 전주에는 콩나물국밥을 파는 식당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중 남문시장 건너 편 완산동에 있던 원각사 골목의 고씨집이 가장 인기 있었다.

전주천 제방은 본래 나무를 사고파는 거리였다. 지게에 나무를 지고 새벽길을 걸어온 나무꾼들은 나무가 다 팔리면 그제서야 콩나물국밥집에 들러 아침 끼니를 해결했는데, 밥은 집에서 싸오고 식당에서 국만 사서 말아 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전주 음식으로 비빔밥을 꼽는다. 하지만 실제로 전주 바깥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음식은 탁백이국, 즉 콩나물해장국밥이었다. ...2003년 문화관광부는 전주시를 전통문화도시로 지정했다....2013년 봄 전주시는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지정되었다.

전주에 간다면 비록 지난 100여년 사이에 조리법과 맛이 만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콩나물국밥을 먹어야 한다. 그것도 남문시장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다.

나는 전주에서 콩나물국밥을 많이 먹어보았지만 익산의 별미집의 콩나물국밥을 최고로 친다. 일요일 오전 익산온천을 들러 별미집에서 아점으로 콩나물국밥을 자주 먹는데 정말 시쳇발로 끈내주게 맛있다. 서울에서 별미집처럼 값싸고(1인분 6천원) 맛있는 콩나물국밥집을 개업하면 술 좋아하는 분들의 해장국으로, 어려운 서민들의 한 끼 식사로 크게 환영 받을 것 같은데 실제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는 중론이다. 이유는 서울사람들의 입맛이 결코 우리 전라도 사람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단골을 만들면 되지 않나?

 

   

3 갈비구이는 본래 대폿집 메뉴

 

먹을거리 갈비의 으뜸은 쇠갈비였다. ...그러나 먹는 모습이 추한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안주로 밀려나고 그보다 품위있게 먹을 수 있는 갈비찜이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가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1960년대가 되면 갈비찜이든 갈비구이든 상관없이 쇠갈비라면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쇠갈비는 병절 선물로 으뜸에 들었다. ...가격은 암소를 구분하지 않고 쇠갈비 한 짝에 4,500원이었는데 서울시청 과장의 월급이 월 1만원 전후였으니 얼마나 비쌌는지 짐작이 간다.

갈비 가격이 치솟자 미국산 갈비가 LA갈비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 한우 쇠갈비는 크게 마음먹지 않으면 식당에 들어서기조차 겁난다. 쇠갈비 1인분 2대에 55천원을 넙기 때문이다.

겁날 일이 하나 없다. 나는 쇠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쇠갈비를 사먹어 본 일조차 없다. 또 나는 비싼 한우를 반드시 먹고야 말겠다는 인간들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 못한다. 미국갑부들도 수입한우를 먹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값이 싼 미국산 호주산 갈비를 맛있게 만들어 주는 식당의 쇠갈비가 제일 맛있겠지요.

 

 

4 좌판에서 시작한 저렴한 안주, 빈대떡

 

 

빈대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에서 각종 연회에 내던 밀가루 대신 녹두가루로 만든 전유어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왜 해방이후 서울에서 빈대떡집이 유행했을까? 빈대떡집은 큰 자본이나 특별한 조리 기술이 없어도 차릴 수 있는 음식점이었다.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 살마들,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그리고 혼란 속에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판매한 음식이 바로 빈대떡이었다. ...전쟁 와중에 끼니가 될 수 있는 음식이었다. 빈대떡이 서민의 음식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녹두가 쌀에 비해 월등히 쌌기 때문이다.

 

   

5 고급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1964년까지만 하더라도 순대는 값비싼 음식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이 되면 ...돼지 순대도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으로 재탄생했다. ...돼지 순대가 인기를 누리게 된 데에는 순대속에 넣는 재료가 고가에서 저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바로 당면을 넣은 당면순대가 그것이다.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부속물중 소청의 양이 대창에 비해

많아서 서민용 돼지 순대는 소창이 이용되었다.

아바이 순대는 대창을 이용해서 속에다 찹쌀, 좁쌀, 선지, 고사리, 숙주나물 등을 넣고 쪄낸 음식이니 고급이라 할 수 있다.

 

 

 

  6 복엇국이 시민권을 얻기까지

 

서거정(1420-1488)이 시 한수를 지었다. 제목은 <하돈(河豚)이 이미 올라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흥이 나서 짓다>이다. 하돈은 복어를 가리킨다.

소식(1037-1101)은 복어요리를 먹고는 <죽어도 그 값을 하겠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덕무(1741-1793)는 복어 독을 경계하는 시를 지었다. <이삼월 사이에 어선이 강에 머무르면 하돈이 때대로 나타난다. 시골 사람들이 이것을 잡아서 먹고서는 죽는 자가 매우 많다.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어찌 그리 어리석단 말인가?>하며 사람들을 조심시키고자 했다.

 

오호! 백년도 못사는 몸

잘 죽어도 오히려 서글플 텐데

어쩌자고 독물을 마구 삼켜서

가슴에 뾰쪽한 쇠촉을 묻으려드나

비록 잠간의 기쁨이야 얻겠지만

결국 한순간에 목숨을 잃게 된다네.

 

강복어와 바닷복어로 나눈다.

내가 엊그제 전주 예담에서 복어찜을 먹었는데 살이 통통하여 먹을 만 했다. 내 기억으로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선창가에 버린 복을 주어다 먹고서는 죽었다는 뉴스가 종종 있었다. 10여 년 전에는 이곳 군산에서 복을 먹은 익산의 어느 한의사가 죽은 기억도 있다. 지금은 그런 사고가 없고 어느 생선탕 집에서나 복탕은 가장 값이 비싸다. 대부분 2만원이다.

콩나물을 끓인 물에 미나리를 곁들여서 복엇국을 끓인 다음에 식초를 약간 치는 방법이 오래된 한국식이라고 한다.

복어는 내장을 완전히 통째로 들어낸 다음, 뼈 관절과 살 부분에 칼금을 내어 피를 완전히 뽑아낸다.

1984, 한구인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전문가의 손에서 조리된 복어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7 보양식에서 술꾼의 별미가 된 쏘가리 매운탕

 

북한 사람들은 쏘가리를 회나 탕으로 먹는다면, 남한 사람들은 주로 매운탕을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매운탕 중에서 가장 비싼 음식이 쏘가리 매운탕이다.

무주에 근무할 때 손님이 오면 어죽이나 쏘가리 매운탕을 대접한다. 어죽도 별미지만 값이 겨우 6천원인가 하는데다 죽이라서 식사대접으로는 마땅치 않아 주로 쏘가리 매운탕으로 하였다. 2011년까지만 해도 4인분이 5만원으로, 큰 쏘가리 서너마리를 넣어서 배가 부를 지경이었는데 2012년 봄부터 갑자기 쏘가리가 잘 잡히지 않는다며 4인분이 8만원으로 뛰어 올랐다. 역시 바다에서는 복어매운탕, 강에서는 쏘가리 매운탕이 가장 맛있기에 가장 값도 비싼 것이리라.

 

 

8 청어과메기와 꽁치과메기

 

경상북도에서 잘 말린 과미기는 1918111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포항역을 통해 그 전보다 수월하게 전국 각지로 배송되었다.<동아일보>

식민지시기에 영일만에 몰려들었던 청어는 1960년대 초반 해류의 변화로 인해서 영일만에서 사라졌다. ...청어를 대신한 포항의 꽁치과메기는 1990년대 이후 전국적인 유행 음식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청어가 대향으로 다시 잡히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청어과메기를 먹으려 하지 않는다. 비린내가 훨씬 적고 값도 싼 꽁치 과메기에 입맛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유일한 고교친구인 신홍규 교수가 자기 집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하더니 소주 한잔 하자며 안주로 내놓은 것이 꽁치 과메기다. 미식가 친구 때문에 이때 처음 구경했거니와 촉촉한 과메기를 된장을 발라 깻잎에 싸서 마늘과 함께 먹으면 맛이 그럴싸하다.

 

 

 

5부 해방이후, 음식의 혼종과 음식점의 글로벌화

 

0. 음식점과 메뉴의 끊임없는 진화

 

다국적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물론이고, 국내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전국적인 외식업의 유행을 이끌었다. 이때가 바로 1990년대이다.

 

 

1. 한국음식으로 자리잠은 일본음식

 

오뎅(꼬치안주) 우동(가락국수) 생맥주(날맥주) 돈가스(저육카틀리트) 소바(메밀국수) 생과자(무른과자) 스시(초밥) 양깡(팥편)

김밥은 원래 일본 음식인 노리마키스시에서 비롯되었다.

김은 원래 <>이라고 불렀다. 우리 전라도에서는 사투리로 짐이라 했다. 어린 시절 평소의 식사때에도 항시 김을 드시는 당숙을 보며 매우 부러웠다. 우리는 소풍때나 김맛을 보았건만...

해방후 1950년대는 일본과 정식으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지만, 식민지시기와마찬가지로 한국 김은 중요한 일본 수출상품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 김 생산이 늘어나자 김밥 또한 종류가 다양해졌다 그 중 오늘날 <충무김밥>이라 부르는 새로운 김밥이 등장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김밥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우리 승수와 승원이가 소풍가는 날이면 초밥을 2인분씩 사서 보냈다. 하나는 담임선생님 것이다. 그때(1990년대 초중반기)만 해도 익산시내에 초밥과 김밥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집이 거의 없어 전화로 주문했다. 이제 우리 아파트 앞에만 두 개의 김밥전문점이 있고 등산을 가는 날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가장 값싸고도(한 줄 1500) 맛있는 보통김밥을 세 줄 산다. 둘이 세 줄을 먹으면 충분히 배부르다. 집에서 그처럼 맛있는 김밥을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좋은 세상이다 편한 세상이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절약하면 부자 되기 좋은 세상이다.

 

2. 호황을 맞은 밀가루 음식

 

밀의 생산지는 대부분 북한지역이었지만, 밀가루소비는 서울에서 가장 많았다.

193211일자<별건곤>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사는 인간이니 돈 없는 우리는 품팔이도 하고 자유행상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교사도 했던 김원진은 돈이 없어서 빵행상을 한다며 쓴 글이다.

오늘 순회교사로 우리학교에 오시는 이덕순선생님께서 전주 풍년제과에서 빵을 사 오셨다. 선생님들도 드리고 내게도 주셨는데 초코빠이형 빵으로 전통있는 풍년제과에서 가장 유명한 빵이라고 한다. 군산의 이성당 단팥빵이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풍년제과도 개발했나? 이성당처럼 사려면 줄서기를 해야 한단다.

1960년대 정부가나서 혼식을 장려하자 그 바람을 타고 동네빵집이 급증했다. 당시 빵집에는 식탁과 의자가 놓여있어 손님들이 빵집에서 바로 빵을 사먹거나 음료를 마셨다. 남녀 고교생들의 이성교제도 이런 빵집에서 이루어졌다. ...1980년대는 전문제과점 시대였다. 1990년대가 되면 프랜차이즈 빵집이 전성기를 맞이한다. 어김없이 아파트 단지에 자리를 잡았다.

60년대 학생들의 데이트장소인 빵집은 빈부차가 심했다. 시내에 사는 부잣집 아이들은 고급 빵집에서 단팥빵이나 크림빵, 생과자를 먹었다. 우리 시골출신들은 작은 골목길 빵집에서 찐빵이나 국화빵, 풀빵을 사먹었다.

70년대 초 친구인 기도가 농고 식품과를 졸업하고 한 3년 정도 군입대하기전에 전주의 빵집에서 근무했다. 돈이 궁할때면 가끔 기도에게 가서 돈을 빌리고 먹고 싶은 고급빵을 무한정(?) 먹을 수 있었다. 비싼 고로케를 실컷 먹었고 엄청 성실한 친구인 기도는 성공한 요식업자다. 아들 딸 잘 키우고 재산도 상당히 모으고 지금도 직접 음식을 만들며 대학가에서 생맥주집을 경영하며 돈을 잘 번단다. 의지의 한국인!

한반도에서 짜장면이 음식점의 메뉴로 자리 잡은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아마도 한반도에 중국음식점이 들어온 19세기 말고 20세기 초반에 짜장면도 메뉴로 기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

하지만 당시에도 짜장면은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이라기 보다는 그저 중국요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이 이유는 중국인만이짜장면을 만들 수 있어서 먹고 싶으면 중국 요리옥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1963년 한국정부가 화교의 토지 소유를 금하는 정책을 취하자 농촌에서 채소를 재배하며 살던 화교들도 도시로 나와 다른 화교들처럼 음식점을 내기 시작하여 중국음식점은 급증했다.

그들은 고급 청요리를 할 수 있는 조리기술이 없으므로 조리법이 수월한 우동과 짜장면 그리고 짬뽕 따위를 주요메뉴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1976년 정부는 하교에대한 교육권과 재산권 박탈이라는 최악의 정책으로 중국음식점을 한반도에서 쫒아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음식점은 대부분 한국인 손에 넘어갔다.

2000년대 이후 베이징에서 중국고유의 짜장면이 부활했지만 한국인이나 조선족이 운영하는 한국식 짜장면이 인기다.

60년대에는 우리 촌놈들은 짜장면 맛도 보기 어려웠다. 초등하교 시절 엄마가 처음으로 중국집에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신 기억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그래도 가끔씩 짜장면을 사먹을 수 있었다. 중국음식하면 우리는 우동, 짜장, 짬뽕 이렇게 세 가지다. 요즘 조개 듬뿍 넣은 짬뽕집들이 여기저기 소문이 나는데 나는 맵기만 하지 별로다. 우동이 훨 낫고 아니면 짜장을 먹는다. 동네 짜장면집들이 대부분 배달하느라 고생하며 영업하는데 주방이나 식당을 바라보면 도저히 먹을 용기가 안난다. 별수 없이 익산에서 가장 전통있는 화원반점이 가까이 있어 안심하고 시켜 먹거니와 맛도 뛰어나다.

국민 1인당 연중 소비하는 라면 양은 한국이 단연 1위다. 연중 1인당 무려 68개를 먹는다. 특히 한국인은 라면을 먹을 때 국물 맛을 따지고, 또 배추김치와 함께 먹어야 맛이 좋다고 여긴다. 심지어 남은 국물에 밥을 넣어 말아먹기도 한다.

 

 

 

3 식품공업의 성장과 뒤안길

 

1970년에 전국 32개 도시의 397개 탁주제조장을 113개 제조장으로 통합시켰다. 이때 소주업체도 통합시켰다....전라북도에서는 27개 업체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전북은 보배소주였다.

2011년도희석식 소주의 총 출고량은 327,225만 병이었다. 이를 19세 이상 성인 3,900만 명으로 나누면 성인 한명이 소주 84병을 마신 셈이다.

최근 희석식 소주의 도수는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알코올 도수를 낮춤으로써 소비자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기술은 세계최고수준에 도달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30도 소주와 25도 소주가 있었고 우리는 25도만 마셨다. 25도짜리 소중 1병만 마셔도 취하고 1병 반을 마시면 하늘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20도 안팎이다. 두병을 거뜬히들 마시고 술이 센 사람들은 서너병씩 마신다. 89세인 방송인 송해선생은 지금도 KBS 노래자랑의 사회를 보시는데 반주가 소주2병이고 술자리에서는 4병이 기본이란다. 놀라운 분이다. 세계 최고령 방송사회자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훌륭한 분이시다.

1960년이 되면 서울 명동과 을지로 일대에서 생맥주를 팔았다. 생맥주를 호프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생맥주는 500CC 두어 개면 배도 부르고 얼큰하여 좋은데 나는 몸이 남들보다 뜨거워서인지 찬 생맥주를 마시면 뱃속이 영 좋지 않아 거의 찾지 않는다. 아니 누구랑 생맥주 마시러 갈 일도 이젠 별로 없고요. 친구들도 2차로 가볍게 생맥주집에 들어가지만 정작 마시는 건 병맥주다.

한국사회에 맥도날드화의 상징인 패스트푸드점이 처음 소개된 때는 19791026일이다.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아케이드에 햄버거와 탄산음료를 판매하는 롯데리아가 문을 열었다.

 

 

 

에필로그 비판적 음식학, 한국사회를 읽 는 새로운 시선

 

서양인이나 중국인이나 가정에서는 한국인처럼 식탁에 여러 음식을 펼쳐놓고 먹는다. 시간계열형 음식이 나오는 곳은 고급 레스토랑뿐이다.

고급 중국음식점에 코스요리(1인당 2만원내지 3만원)가 있고 대형 오리전문점에서도 코스요리(15천원 정도)가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음식이 세계 여러 곳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한국의경제성장과 함께 한국인이 세계각지로 이동한 결과이다. ...2005<대장금>의 열품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도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어온 문화적 혼종의 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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