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卑怯한 勝利
김연수 지음
●序言
초․중․고교 韓國史 敎科書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比較的 상세히 敍述되어 있는 편이다. 大略
1. 倭敵의 侵入에 전혀 對備하지 못하고 戰爭까지도 黨派싸움(美辭麗句로 表現하여 朋黨政治)에 利用하는 士林들과 無能한 王
2. 戰爭에 對備하지 못하여 무너지는 官軍과 宣祖의 避難, 그리고 百姓들의 反撥
3. 李舜臣 將軍의 連戰連勝의 海戰勝利와 그 成果
4. 義兵들의 偉大한 抗爭과 그 成果
5. 倭와 明의 休戰會談 및 兩國 指導者의 死亡, 戰爭의 終熄
6. 7年戰爭 倭亂의 影響에 대해 공부한다.
역사를 전공하지 아니한 저자가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며 쓴 이 책을 통하여 임진왜란의 전말 뿐 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고 있어 대단히 큰 공부가 되었고 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에게 감사드리며 기억할 만한 주요내용을 정리하는 바이다. 확인이나 보완이 필요한곳은 왕조실록을 찾아 내용을 더하였다.
1장 전쟁을 불러들이는 조선
●조선은 철저히 중국 중심의 세계관 안에서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터무니없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명나라는 모범적인 조공국인 조선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 정례 조공사절단에 대해서도 중국민간인과의 교류및 접촉, 심지어 서적구입까지 제한하는 등 폐쇄적인 통제정책을 시행했다.
●도요토미(1537-1598)는 전투금지령을 내려 다이묘간의 군사행동을 역제하고, 해적질을 업으로 삼던 왜구를 통일정권의 수군으로 편입시켰다.
●명의 해금정책으로 일본은 10년에 한번 있는 조공무역 이외에는 밀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밀무역에 는 항상 위험이 뒤따랐고, 이에 종사하는 일본 상인들은 대집단을 결성하여 무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들이 소위 16세기의 후기왜구이다....밀무역의 중심지는 중국 동남부 동중국해 연안에 있는 절강성(저장성)과 복건성(푸젠성)이었다.
●도요토미는 관백 취임 직후인 1595년 9월, 부하인 히도츠야나기 이치스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침략의 의중을 밝힌다. 이듬해 3월에는 오사카성을 방문한 예수회선교사 가스파르 코에류에게 조선과 중국 정복 의도를 전했다. 도요토미가 다이묘에게 중국과 조선정벌의사를 밝힌 것은, 시코쿠를 정벌하기 전인 1586년 4월 모리 데루모토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다. 이후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조선과 명 침략을 입에 올렸다.
●조선으로 파견한 정보원들이 보낸 온 내용은 기가 막혔다. 조선에는 군대가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조정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각하다고 했다. 수시로 발생하는 수해와 가뭄에 백성들은 수없이 굶어죽고, 전염병에 하 s고을 사람이 모죌 죽어가도 조정은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인구의 절반이 노비라는 것이었다.
●1587년 9월 일본사신으로 지난날 조선에 자주 드나들던 재마도 도선주 다치바나 야스히로란 자가 아닌가?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고의로 연회석상에서 호초를 흩어 놓으니 기공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줍고 전해 질서라고는 없었다. 그가 객관에 돌아와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20년(1587) 9월 1일
●상대에 대한 정보가 절실한 쪽은 조선이었다. 먼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야 함에도 도리어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여진과 일본에 대한 교린은 거의무시하다시피 했다. 조선통신사가 세종 시대에 세 차례 다녀온 이후로 선조 때까지 130여 년간 한 차례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은 그 사이에도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왔다. 태조 4년에 조선과 국교를 연 이래 선조 때까지 총 60여회나 사신을 파견했다.
●1590년 조선통신사가 수도 교토에 도착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도요토미는 조선의 국서를 받지도, 통신사를 만나지도 않았다. ...도요토미가 있는 오사카에 도착하여 숙소에 머문 지 5개월만에야 도요토미를 만났다.
●도요토미가 보낸 국서의 내용은 놀라웠다.
사람의 한 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토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 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아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의 정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가 되어 입조한다면 원려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의 맹약을 굳게 할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24년(1591) 3월 1일
●일본이 보낸 국서는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명백한 위험을 담고 있었다. ....지난날 소수의 오랑캐가 북변을 소란하게 했을 때 이이가 나서 時弊개혁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가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시비네 휘말려 결국 쫒겨 나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았는가?...조선의 兵政을 조금 손보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대비해야 했다.
●유성룡(1542-1607)은 당시 집권파인 동인의 지도자였다. (전쟁 위험이 없다고 보고한 통신부사 김성일이 동인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거쳐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중국은 즉시 요동도사를 통해 자문을 보내어 사실 여부를 조선에 물었다. 이애 조선은 예조판서 한응인을 보내 그 소문이 허위임을 주장한다. 이때 보낸 <陳倭情奏聞>을 유성룡이 작성했다. 내용이 이렇다.
-도요토미가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하였지만, 도요토미는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만큼, 그 정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분명한 것은 임금이나 대신들 어느 누구도 일본의 직접적인 패해를 입게 될 남쪽 백성들을 진심으로 걱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장 임진년의 패주
●조선은 부산 앞바다에 척후선 한 척 띄우지 않았다.....일본군이 준비한 군량은 30만석이었다. 일본군 16만 명이 6개월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봉화는 가동되지 않았다. 일본군의 침입이 서울에 처음 알려진 것은 침입 4일 만인 4월 17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궁궐 깊은 곳에 있어 곧바로 면대가 허락되지 않아 보고된 것은 10시간이 지난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조정은 이일을 경상도 순변사로 삼고...그러나 3일이 지나도록 서울을 떠나지 못했다. 이일이 데리고 갈 수 있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에는 300명의 군사도 없었다....병조에서는 급히 兵案을 가져다 병사들을 징집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대상자들은 아침에 성문이 열리자마자 모두 서울을 떠나 달아나고 없었다.
●일본군의 조총은 조선군의 주력무기인 활에 비해 그 사정거리가 세 배였다....신립이 이끈 탄금대 방어전의 패배로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에 조선군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신립은 정쟁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병력이 당시 조선이 지닌 전투력의 전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다면 마땅히 조령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했다. 그렇게 신립이 시간을 벌면 조정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후방에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여 제2, 제3의 서울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그들에게 대의명분은 나라보다, 임금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왕의 파천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자 물꼬를 튼 사람이 영의정 이산해(1539-1609)였다. ...그러자 모두 웅성거리며 이산해를 비난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즉각 들고 일어나 이산해의 파면을 청했다.
●조선왕의 도망으로 일본은 심각한 전략적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왕의 도망은 의병이 활동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이순신의 수군이 활약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중국이 개입하여 전황을 변화시킬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지난 25년간 사림세력과 야합하여 백성의 삶을 외면한 선조가 맞이한 위태한 순간이었다. ...백성들은 궁궐에 불까지 질렀다....그 분노와 증오의 불길에 200년 역사의 창덕궁과 창경궁, 경복궁이 잿더미로 변해갔다. ...지방에서는 官倉을 습격하고 관곡을 탈취해 갔다. ...심지어 어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가 허술하고 약해서 돌을 던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임금이 개성에 도착한 이튿날 겨우 정신을 차리자 兩司가 임금 앞에 나와 엊그제 대궐에서 파천을 의논했을 때 먼저 파천의 의논을 받아들인 영의정 이산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파천을 주도했다는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경상도 평해 땅으로 귀양을 떠났다. ...선조는 그 책임을 좌의정 유성룡도 함께 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적들을 한없이 우려했는데 도리어 내가 한 말을 비웃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성룡 혼자 그 죄를 받아야 된다. 민폐가 된다고 해서 예비하지 않아 방비가 허술하게 만든 것은 모두가 성룡의 죄이다. <선조실록> 25년 5월 2일
●선조의 의중을 먼저 알아차리고 요동 망명을 주장한 사람은 도승지 이항복(1556-1618)이었다. ...비변사 유사당상 이항복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국이 붕괴되어 조선의 자력으로는 국가 회복을 이해서 어떠한 일도 해 볼 수없는 형국이므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일만이 상책>이라고 비변사회의에서 제의한다.
●비변사 당상 이성중 등이 국왕의 요동행을 전제로, 세자가 조선에 남아 대 일본 항전을 이끌자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근왕병을 일으키기 위해 함경도로 들어간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모반자 국경인에 의해 가토진영에 넘겨졌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합병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미 평양까지 함락되었으니 하루 이틀 사이에 압록강마저 안전치 못하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징비록>
3장 일본의 좌절
●일본은 여름이 가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병사들이 여름옷만 준비했을 정도였다.
●서울 싸움에서 조선왕의 항복을 받은 뒤, 조선왕의 조선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대신에 조선왕이 도요토미의명령에 따라 휘하의 조선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중국으로 밀고 들어가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선왕이 도망가 버린 것이다.
●만일 일본군이 신속하게 차선책을 선택하여 서울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계속 선조를 추격했다면, 소수의 기병으로 추격군을 편성하여 압박을 가했더라면 선조는 중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선은 완전히 붕괴되어 300년이나 먼저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일본은 뒤늦게 조선왕과 조정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조선을 붕괴시켜 일본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평양성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6월 15일이었다.
●6월 6일 용인 광교산에 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 6만을 일본군 장수 와카사카가 병사 1,600명으로 기습했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 버리고 떠났다. <선조수정실록>25년 6월 1일
이로써 대규모의 조선군은 더 이상 조선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 도요토미는 돌연 정명계획을 변경하여 임진년에는 조선평정을 완전하게 이룩할 것이며, 명나라 정벌문제는 자신이 도해한 후 이듬해 봄을 기하여 결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요토미는 조선 8도에 각각 점령책임자를 정하고, 그들에게 지역의 지배를 담당하게 했다. 각도를 나누어 관리하게 하되, 조선의 감영과 비슷한 다이칸쇼(대관소)라는 기구를 만들어 이를 통해서 모든 민정을 전담토록 하였다. ●곽재우(1552-1617)는 선조 18년에 문과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답안지에 조정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선조는 과거 합격을 취소해 버렸다. 이후 곽재우는 벼슬에 뜻을 접고 유유자적했다. ●의병의 출현은 일본군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의병이 주로 노린 목표는 일본군 보급선이었다. ...일본군은 10리 혹은 50리-60리 거리를 두고 험한 곳을 골라 보급로 경비를 위한 영책을 세웠다....영책은 수시로 의병들에 의해 기습을 당했고 일본군 수송대도 번번이 조선의병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수로 운송도 여의치 않았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고을은 대략 180개 정도로 조선 전체 324개 고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본래 일본의 조선 침공 전략은 수륙병진전략이었다. 육군이 신속하게 서울과 평양을 장악하면 충분한 보급품과 보충병을 실은 일본 수군이 서해를 돌아 한강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전라도 공략에 동원된 일본군은 총 1만 2천 명의 대군이었다. ...고바야카와 부대는 6월 23일 금산성을 점령하고 그곳에 제6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군대를 2개부대로 나누어 전주를 향해 서둘러 출발했다. 제1부대는 고바야카와가 2천의 정예군을 이끌고 진산을 거쳐 이치(배치고개)로 진출하고, 제2부대는 안고쿠지 에케이가 군사 1만을 이끌고 무주와 진안을 거쳐 웅치(곰치고개)를 거쳐 전주로진군하기로 했다. ...권율(1537-1599)은 문관이었으나 뛰어난 장수였다. 웅치와 이치에 1차방어선을 구축하고 이곳이 무너지면 전주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로 했다. ●싸움은 웅치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의병장 황박이 산 아래 목책과 말뚝을 이용하여 1차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복남이 2차방어선을, 정담이 산위에서 3차 방어선을 구축했다. 7월 7일 치열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결국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치전투는 7월 8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치열하던 전투는 오후 4시경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종료되었다. ...적장이 직접 지휘하는 대규모의 일본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정면으로 대결하여 조선군이 승리한 최초의 육상전 이었다. ●영주들에게는 전쟁에서 이기는 거 못지않게 자신의군사력을 온전히 보존하여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요토미의 명령이 아무리 엄해도 자신의 군대를 지키는데 필사적이었다. 비록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한다하더라도 자신의 군대가 패망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주자신뿐 아니라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운 領國의 가신들 모두의 꿈과 운명을 함께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각 영주들에게는 전쟁의 승리보다 자기 군대의 보존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1545-1598)은 종6품 정읍현감에서 무려 일곱 계단을 단숨에 뛰어넘어 정3품 수군절도사가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선조와 좌의정 유성룡은 조정의 반발을 누르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부임시켰다. ...선조는 인사에 관한 한 소신이 뚜렷했다....조정의 실세였던 이이를 비롯하여 많은 신하들이 정여립을 강력히 추천했지만 선조는 한 번도 정여립을 중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바로 자신의 부대를 전투태세로 바꾸어 갔다. ...그의 뒤에는 그에게 기대를 거는 선조와 유성룡의 후원이 있었다...그가 부임할 당시 장부에는 30척의 전함이 있었다. 그러나 lf제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전함은 다섯 척 뿐이었다. 4장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임진강의 수비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명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군이 국내에 들어오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극력 반대하였다. ...결국 선조는 혼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실제로선조는 나중에 명에 파병을 청하는 결정을 측근 내시 이봉정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노라고 고백한다. 5장 일본군의 패퇴 ●1593년 3월 3일, 저선주둔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최고위 장수들을 서울로 불러 모은다....서울의 일본군은 절박한 상황이니 어서 철군 명령을 내려 달라는 곳이었다. 이 문서에는 대표적인 주전론자인 가토를 비롯하여 17명의 조선 주둔 일본군 최고위 장군이 전원 서명했다. ...도요토미는 서울 주둔군에게 경상도 남부 지역으로 철수를 허락했다. 도요토미가 눈물을 풀풀 흘리며 내가 소국에서 태어나 병력이 적어서 대국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다하고 이를 악다무니 듣는 사람이 모두 큰 생각을 느끼고는 소배를 적셨다. <조선정벌기> 제6장 정치가 전쟁을 대체하다. ●합의의 요지는 일본군이 서울을 명군에게 내주는 대신에 명군은 남해안까지 일본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한다는 걳이었다.....강화회담으로 서울에서 탈출하여 남해안의 안전한 곳에 준사를 주둔한 일본군은 나중에는 명나라 사절단이 일본까지 건너와 강화회담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으니 이는 일본이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강화협상 중임에도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1593년 6월 29일, 공격 8일째인 이 날 진주성에 들어온 일본군은 6만 명의 군민을 사창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모두 학살하였다. ●1594년 8월이 되자 대부분의 명군이 조선에서 철수했으며 일본도 3만 8천의 명력만 조선에 남았다. ...당시 일본의 속셈은 중국과 협상하여 조선의 반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병력 4만 3천 명을 배치한 후 둔전을 경작했다. 7장 또 하나의 전선 ●소와 말이 있는 자는 명나라 병사들에게 팔았다. 이에 병사들이 하루에 수 백 마리의 소를 도살하여 사방 경내에 소, 닭, 개가 거의 없어졌다. 1594년이 들어서자 굶주림은 전국적으로 더욱 심해졌다. 특히 서울과 삼남 지방은 초근목피도 다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처참한 비극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경남(의병장)이 성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병나라 군인이 술을 잔뜩 먹고 가다가 길 가운데 구토하는 것을 보았는데, 천백의 굶주린 백성이 한꺼번에 달려와서 머리를 땅에 박고 핥아 먹었는데 약해서 힘이 미치지 못한 사람은 밀려나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난중잡록> ●상황이 나아지자 임금과 조정은 백성들을 폭도로 보기 시작했다. 궁궐을 불태우고, 어가에 돌을 던지고, 종묘의 신주에 몽둥이를 휘두르고, 임금의 도망을 가로막고 나선 백성들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뿐인가? 그들은 의병의 공까지 폄하했다. 의병이 세운 공이란 고작 무리와 떨어져 길을 잃고 헤매던 왜적 몇 놈 무찌른 것에 불과하다며 그 공을 깎아내렸다. ....의병에게는 군량의 보급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의병에게는 명나라 군사의 지원 임무가 맡겨졌다. ...1593년 1월 명나라에 통보한 조선 의병은 2만 2,600명이었다. ●당시 정철(1536-1593)은 죄의정에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술에 취해 노닐고 맡은 업무는 두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세종대왕은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고 했지만 이제는 백성과 나라가 모두 하늘을 잃어버린 것이다. ●성공도 하기 전에 명성이 너무 성했던 의병장 김덕령은 비명에 죽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곽재우도 몇 번이나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가야산과 방장산으로 들어가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고 함경도를 거의혼자 힘으로 회복했던 정문부도 나중에는 감옥에서 죽어야 했다. 8장 정유년, 일본군이 되돌아오다. ●일본이 제2차 조선침략에 동원한 병력은 12만 명, 조선에 이미 2만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이미 2만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파견한 병력은 모두 14만이었다. ●원균(1540-1597)은 이순신보다 다섯 살 위였으며, 무과급제는 12년이나 빨랐고, 오랜 세월 군내에서의 서열이 늘 이순신보다 위였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남해안에서 강한 해군을 건설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전쟁이 소강상태였으므로 비상시를 대비하여 함선과 병력을 확충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조정의 지원은 사실상 전무했다. 군사를 모으고 훈련하고 전선과 무기를 만드는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1594년 2월 무렵부터 경상, 전라, 충청의 70여 해변 고을의 군정과 민정이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지휘체계는 주로 육군 장수인 도원수, 순찰사, 그리고 체찰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이순신은 도원수와 순찰사의 간섭을 차단했다. 이렇게 하여 이순신은 해변 고을을 독자적으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이 조선 초부터 비어있던 섬을 둔전으로 개간하고, 인구가 적은 해변지역에 둔전을 설치하자, 수많은 피란민이 수군이 주둔하는 섬과 해변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해안과 섬의 빈 땅을 주어 개간하게 하고 소출의 절반을 걷어 군량으로 바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더 많은 피란민이 일본군을 피해 조선수군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의 생업이 안정되자 군민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전라도 해안 지역에는 빠르게 경작자가 늘어났고 인구도 급속하게 불었다. ●1593년 세자 광해군이 전주에서 조정과 같은 권한을 가진 무군사를 이끌 때, 이순신에게 예비군관을 이끌고 전주로와서 무과시험을 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ㄱ k대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그해 말, 한산도에서 수군만의 특별무과를 보게 해 달라고 조정에 요청했다. ...결국 한산도에서 수군 단독의 무과가 실시되었다. ...선조에게 이순신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남원성 전투는 1597년 8월 13일에 시작되었다.5만 일본 대군에 맞서는 조선군은 군사와 백성을 합해 모두 1만에 지나지 않았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조선군과 명군은 물론이고 일반백성들도 모조리 죽였다. ...도요토미는 일본군이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적을 베었는지 확인하겠다며 살해한 적군의 코를 베어 보내라고 지시했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음 힘을 다하여 싸우면 젓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다행한 일로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의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설령 전선수가 적다하나 미약하나마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 전서>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必死則生 必生則死). 그리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살려고 생각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법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난중일기> ●명량해전을 치른(1597.9.16) 바로 그날 (해남군 문내면의 우수영에서)물살이 험하고 형세도 외롭고 위태로운 당사도(완도군 소안면의 섬)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이외도, 칠산, 법성포, 홍농을 거쳐 부안의 위도, 고군산군도에 도착했다. 명량해전을 치른 후 4일 만이었다. 그렇게 해야8 할 만큼 당시 조선 수군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이듬해 2월경(1598.2)이 되자 조선 수군의 병력은 8천을 헤아렸고 전선은 60척에 이르렀다. 이순신에 대한 병사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일반 백성들의 믿음이 든든한 재건의 밑천이 되었다. 이러한 군세에 힘입어 이순신은 수군 기지를 완도군의 고금도로 옮겼다. 칠천량 패전(1597.7.16) 후 반 년 만에 대략 수군 전력의 절반을 회복한 것이다. ●실제로 직산에서 명군과 충돌(1597.9)한 후 일본군은 호남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조령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전투도 없었다. 그들은 힘들어 점령한 호남의 중심 전주는 물론이고, 치열한 전투로 빼앗은 남원, 안의의 황석산성까지 모두 돌려주고 철수했다. 진주․합천․밀양까지 고스란히 돌려준 일본군은 그들의 본거지로 삼은 처음의 주둔 지역으로 신속하게 퇴각했다. 9장 전쟁의 끝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바로 도요토미의 죽음이었다(1598.8.18).....전쟁을 서둘러 종결하지 못하면 일본의 분열은 시간문제였다....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다이묘(봉건영주)들은 도요토미에게 속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여한 다이묘들과 무사들은 신속한 철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비밀리에 철군을 준비하던 일본군이 마침내 명군에 공식적으로 철군을 통지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이순신이 고니시의 철군계획을 알게 된 것은 11월 8일이었다. ...고니시는 수로군 총사령관 진린에게 길을 열어달라며 뇌물공세를 퍼부었다. 고니시의 뇌물에 마음이 흔들린 진린은 이순신의 출병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순신은 진린에게 출병을 허락해 달라고 눈물로 청했다....진린은 이런 이순신의충성에 감동하여 전투를 허락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향년 54세였다.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진 11월 23일, 서울에 있던 명군 사령부에서는 총독 형개가 앞장서서 이순신은 애도하며 명군진영안에 빈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총독이 직접 향을 사르고 제사를 지내며 추도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순신의 충의에 감동하고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예조에서 명군 사령부가 이순신을 애도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보고를 올리며 조선 조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자, 선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예조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를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린(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실록)31년 11월 27일 10장 모든 것을 전쟁 전으로 되돌리다. ●좌의정 이덕형이 국정 쇄신안을 건의했다. 정치의 기강을 정돈하소서. 부박하고 험사한 자들을 물리치고 순박하고 근신한 사람을 기용하며 허식을 물리쳐 버리고 실효만을 책임지우소서. <선조실록>31년 12월 19일 ●이원익(1547-1634)과 이덕형(1561-1613)은 정승의 자리를 걸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는 끝내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원익과 이덕형을 4도체찰사, 3도 체찰사로 임명하여 지방으로 쫒아 버렸다. ●전쟁 전 9만에 이르던 서울 인구는 4만으로 줄었다. 조정이 파악한 전국인구는 전쟁전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전쟁 전 170만결이던 농토도 전쟁이 끝났을 때는 54만결에 불과했다. ●인구의 30-40%에 달하는 노비들은 전쟁 중에도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 노비와 주인이 함께 일본군에게 쫒기다가 헤어지게 되면, 주인은 전란 중에도 지반수령을 찾아가 도망간 노비를 추쇄해 달라는 청을 넣었다. 노비들은 일본군에게 쫒기고, 조선 관리와 추쇄꾼에게 쫓겨야 했다. 노비를 데리고 피란을 하던 사대부들이 피란 중에 돈이 필요해지면 자신을 위해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던 노비를 팔아서 비용을 대기도 했다. 노비의 아이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거나, 다른 사람의 노비와 바꾸어서 일부러 가족을 해체하기도 했다. 그 결과 노비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가려고 했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은 그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함께 도망이라는 기회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경연에서 시독관 조수익은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소신의 우견(愚見)에는 사천법(私賤法)이 우리 나라에만 있습니다. 하늘이 많은 백성들을 낼 적에 부여(賦與)한 것은 균일한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귀천이 나뉘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법은 아무리 용렬한 자라도 선조(先祖)가 물려준 노비가 있기만 하면 편히 앉아 공후(公侯)의 즐거움을 누리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선유(先儒)들이 ‘정전법(井田法)은 천하가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라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국세가 위기 일발의 처지여서 노비가 있는 자라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으니 중국의 법에 의거 재상 이상까지만 거느리는 가정(家丁)을 헤아려 지급하고 사천은 영원히 혁파하여 군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 고려 때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둘 적에 중국 관원이 사천법을 묻고 혁파하려 하였는데 그때의 군상(君相)들이 못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용렬한 임금에 용렬한 재상의 소견이어서 의논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운이 되돌아와 온갖 정사가 새로와지는 시기이니 전일의 잘못된 법규를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회복시키는 일을 어떻게 담소(談笑)하고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대대적인 거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변란이 발생한 지가 10년인데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선조실록) 34년(1601)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