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왕과 나

청담(靑潭) 2014. 4. 23. 11:00

 

 

왕과 나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저

 

서언

 

이 책을 읽으면서 이덕일 선생을 통해 조선의 정치사를 새롭게 보게 되고 다시 깊이 공부한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국사 교과서를 통하여 너무나 피상적으로 역사를 파악하는데 그치고 만다. 가르치는 교사조차 예외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뛰어난 역사가의 저술을 통하여서는 비로소 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실체를 깊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누구라도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어 볼 수 없다. 그러나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역사가가 많은 자료를 제시하며 엮어내는 역사서적은 우리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요즘 방영되는 <정도전>과 같은 정통사극과 같은 맥락이다. 때로는 저자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기도 하나 그런 정도는 있을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독자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인식능력의 정도에 따라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1 어젠다

 

비주류, 주류사회를 바꾸다

 

김유신(595-673)

 

김유신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12대손이라는 점이다. 금관국 임금인 그의 증조부 김구해가 법흥왕 때(532) 신라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신라인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의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법흥왕은 김구해 일가를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시켰다.

김수로....김구해-김무력-김서현-김유신

김춘추(604-661)는 왕족이었지만 조부 진지왕이 나라 사람들에게 폐위된 임금이었다. ...김춘추가 진골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642년 백제장군 윤충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성주로 있는 대야성을 공격한다. 그의 부인은 김춘추가 몹시도 사랑하는 딸 고타소였다. 김품석은 수하였던 검일의 미모의 아내를 빼앗았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검일이 창고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장이 되었다. 김품석은 성이 함락되려하자 처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김춘추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기둥에 의지해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후

?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고 했다.

...신라가 삼국통일 전쟁에 돌입하게 된 시초가 여기에 있었다. 당초부터 대제국 운운하는 대의로 시작한 삼국통일 전쟁은 아니었다. 그 발단은 김품석 부부의 전사에 있었고, 김춘추가 딸 부부의 복수를 결심한 데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드라마가 훗날까지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된 요인이

이 사적인 출발에 있었다.

이덕일 선생의 놀라운(?) 역사관이다. 이 때 김춘추의 나이는 39세로 4년 후인 646년에야 43세 때 비로소 5등급인 대아찬이 되고 654년에야 이찬이 된다. 고타소가 20세라 치면 김품석도 20대라고 추측하기 쉬운데 이미 그의 품계가 2등급인 이찬으로 대야성 도독이다. 결코 젊은 사위가 아니거나 성골로 나이에 비해 엄청 빠른 승진을 한 경우 둘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김품석은 김품일의 형이므로 화랑 관창의 백부가 된다.

(김품석이) 부하인 검일의 아내를 빼앗고, 원한을 품은 검일의 반란으로 전쟁에 패한 사위가 자신의 딸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그 지경까지 만든 장본인인 사위에 대한 원망은커녕, 대야성을 침범한 백제에 대한 분이 너무나 커서, 사랑하는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차원에서 기어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한 것이 삼국통일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분석은 과연 바른 판단인가?

김춘추는 백제 멸망에 남은 인생을 걸었고, 김유신은 여기에 고구려까지 추가시켰다. 두 사람의 결합으로 비로소 심라는 삼국통일이라는 새로운 어젠다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김춘추는 642년 고구려에 청병하러 간다.....실패하자 실망하지 않고 647년 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빈손으로 귀국한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648년에는 당나라에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정벌에 나섰고 신라의 3만 병력지원도 있었지만 참패하였기에, 그 아들 고종 때에야 정벌에 나선다.

 

 

2 헌신

 

충심으로 고려를 세우다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홍유

 

왕건의 조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사료가 없었다. ...모친 집안도 한미하다....왕건의 조부 작제건 때부터 서서히 송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서 용건은 진성여왕 10(896)에 송악군의 사찬이란 벼슬에 올라 있었다.

9186월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에 이르러 추대하겠다는 뜻을 함께 말했다. <고려사>

중학교 시절 왕건을 주인공으로 하는 라디오연속극이 있었고 그때 이들의 이름이 각인되어 오늘날까지 잊지 않는다. 네사람 외에 유금필도 있다. 내가 가끔 찾아가는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성흥산성에는 유금필 장군의 사당이 있어 갈 때마다 매우 반가운데 이는 전적으로 중학교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들은 유금필이란 이름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인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이유는 없다. 청소년기에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윤기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실감한다.

 

 

3 시야

 

내부의 지분대신 더 넓은 곳을 바라보다

 

소서노(기원전 54-기원전 6)

 

유화 역시 소서노처럼 아들을 현재에 붙잡아두지 않고 미래를 지향하라고 재촉한 것이었다.

소서노는 남편 주몽이 세운 아들 유리에 맞서 부여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전 남편 우태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고, 또 부친이 졸본부여의 국왕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종주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소서노는 부여 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움으로써 부여의 정통성이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에 있다고 주장했다.

 

 

4 사상

 

 

생각의 힘으로 세상을 뒤집다

 

 

정도전(1342-1398)

 

※TV연속극 천국인 우리나라에서 요즈음 사극도 많지만 유일한 정통사극은 오직 KBS에서 금년 1월부터 방영중인 <정도전>이다. 이는 내가 보고 있는 유일한 연속극이기도 하다.

북원의 사신이 온다고 하자 이를 반대하다 유배당하여 우왕 원년(1375)에 정도전은 전라도 회진현으로 귀양을 간다....1377년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으나 1380년 왜구를 피해 이주한다. 그는 삼각산 아래 자신의 호를 딴 삼봉재를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속수(수업료)라도 받아 생활에 보태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봉재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정도전을 미워하는 이곳 출신 재상이 헐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분노를 삭이며 정도전은 제자들과 과거 동문인 부평부사 정의를 찾아갔다. 그렇게 부평부 남촌에 주거를 틀었지만 이곳도 그의 안식처는 아니었다. 상 왕씨가 그 땅에 별장을 짓겠다고 하며 정도전의 집을 헐어 버렸다. 그는 다시 김포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오년에 세 번이나 집을 이사했는데

올해 또 다시 집을 옮겼네

탁 트인 들에 초가는 작고

기다란 산에는 고목이 성글구나

농부들이 찾아와 성을 묻는데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버렸네

천지가 능히 나를 용납할 것인가

바람부는 대로 맡길 수 밖에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함경도 함주로 향했다.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개인이 소유한 막대한 사전을 혁파해서 그 토지를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정도전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다....지극한 정치란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엇다.

..피지배층인 백성이기 때문에 무조건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국가에서 토지를 주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조용조를 납부하는 쌍무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의 위에 있는 자는 법으로 다스려서 다투는 자를 평화롭게 하고 싸우는 자를 화합하게 한 연후에야 민생이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는 농사를 지으면서는 할 수 없기에 백성은 10분의 1을 내어서 윗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조선경국전>

벼슬아치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때에 벼슬아치는 백성들이 기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5 시운

 

평생 할 말 다 하면서 고종명하다

 

황 희(1363-1452)

 

조선 초 좌의정은 문관의 인사권이 있는 판이조사, 우의정은 무관의 인사권이 잇는 판병조사를 겸임해 이조와 병조의 일도 관장했다. 정승들에게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까지 있으니 그권한이 막강했다.

육조직계제 아래서 황희는 예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해 육조판서를 모두 순회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 중에서도 이조판서는 여러 번 역임했다.

세자(양녕)과 태종이 직접 충돌했던 이유는 어리(於里)라는 미모의 여성 때문이었다. 전 중추 곽선의 첩 어리는 전라도 적성(순창)현에 살았는데 친족을 만나러 상경했다가 곽선의양자인 전 판관 이승의 집에 머물렀다. 세자는 악공 이오방으로부터 어리의 미모와 재예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승의 집으로 가서 어리를 세자궁에 납치해왔다. 이승이 고소하려 하자 세자는 사람을 보내 힐난했다.

?내가 한 일을 사헌부에 고발할 것인가? 형조에 고할 것인가? 어느 곳에 고할 것인가??

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 어리를 출궁시켰지만 세자는 장모 전씨를 시켜 어리를 다시 몰래 세자전으로 데려오게 한 것이다. 태종이 다시 어리를 내쫒자 세자는 태종 18(1418) 530일 부왕에게 항의하는 수서를 보냈다.

 

<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태종실록>

그 자세한 전말은 다음과 같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니, 어찌 도리어 여러 몸을 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함을 책()한다면 이별 해야 하고, 이별한다면 상()스럽지 못함이 너무나 클 것인데, 신은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악기(樂器)의 줄을 끊어 버리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고, 장래 성색(聲色)을 마음대로 할 계책을 오로지 뜻에 따르고 정()에 맡겨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天下)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이 비록 그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느냐 하면, 능히 천만세(千萬世) 자손(子孫)의 첩()을 금지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요, () 하나를 내보내는 것이 얻는 것이 적다는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사()가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은 태조(太祖)를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 이를 용서하였고, 김한로(金漢老 세자의 장인)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暴露)하시니, 공신(功臣)이 이로부터 위험하여질 것입니다.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 아침에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육대언(六代言)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어 보이고,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이른바 아버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내가 만약 부끄러움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 글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느냐? 모두 망령된 일을 가지고 말을 하니, 내가 변명(辯明)하고자 한다.”
하고, 변계량으로 하여금 답서(答書)를 짓게 하니, 아뢰기를,
이 일은 모두 망령된 것인데, 어찌 족히 답()하여 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를 들어 꾸짖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다. 세자는 나의 선()하라고 꾸짖는 말을 싫어한다. 옛날에 아들을 바꾸어서 가르쳤으니, 금후로는 대신이 이를 가르치고 나는 관대(寬大)할 것이다. 내가 옛날에
내풍류(內風流)를 들이었는데, 다만 내 몸이 한가로운 데 나아가기 위함이었고 태조(太祖)의 오락을 위함이었던 것을 지신사(知申事)가 알고 있는 바이다. 형세가 장차 가르치기가 어렵겠으니,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니, 조말생(趙末生) 5인이 모두 어리(於里)를 참()하여서 그 유혹을 근절하고자 청하였으나, 변계량·김효손(金孝孫),
도리어 어둡고 고집이 세기가 이미 심하여, 사세가 즉시 중지시키기가 어렵겠으니, 우선 그 여자를 돌려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육대언(六代言)의 말과 같이 한다면, 그의 원망과 혐의를 가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장차 사람을 보내어 이를 꾸짖겠다.”
하고, 명하여 박지생의 공초(供招)를 받게 하니, 그 공초에 말하기를,
세자가 금후로 만약 계문(啓聞)할 일이 있을것 같으면 반드시 먼저 보내어 계문하고, 주상이 허락한 뒤에 예궐하여 직달(直達)하겠습니다. ()에 의하여 일 이외에 입전(入傳)하거나 상서(上書)하지 말게 하고, 이와 같은 뜻을 윤덕인(尹德仁)과 전내(殿內) 내관(內官)에게 전()하여 설명하여 시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감계(鑑戒)가 되게 하고, 만약 모반(謀叛)과 시사(時事)는 이 한계에 두지 마소서.”
하였다. 박지생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전하여 유시(諭示)하였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일전에 내가 너에게 김한로가 여자를 바친 일을 고()하고, 또 말하기를, ‘이 말이 만약 나간다면 국가에서 반드시 이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하였고, 김한로도 또한 말하기를, ‘신의 죄는 열 번 죽어야 한다.’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김한로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신효창(申孝昌)이 왕명(王命)을 받고 태조(太祖)를 수종(隨從)하였던 까닭에 유사(有司)가 비록 청()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미편(未便)하다고 생각하여 윤허(允許)하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신효창의 죄가 무겁다고 생각하느냐?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죄인의 딸이라고 혐의하지 아니하고 전(殿)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비록 죽더라도 내가 어찌 아까와하겠느냐? 내가 어찌 죽()을 먹지 않아 변고(變故)가 있으면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여 내 마음이 움직일까 두려워하겠는가? 사부(師傅빈객(賓客)이 김한로와 절연(絶緣)하여 어버이로 삼지 않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절연하여 나주(羅州)로 부처(付處)하였다. 만약 다시 청함이 있으면 그의 죽음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박지생이 즉시 경도(京都)로 돌아갔다. 세자의 사람됨이 광포(狂暴)하고, 미혹(迷惑)하고, 음란하고, 오락을 즐기고, 말을 달리기를 좋아하고, 유생(儒生)을 좋아 하지 아니하고, 학문(學問)을 일삼지 않았다. 매양 서연(書筵)에는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다가, 서연관(書筵官)이 두세 번씩 청한 뒤에야 혹은 나왔다. 강론(講論)하는 스승이 앞에 있으면서 전에 한 말과 지나간 행동을 이끌어다가 되풀이하여 이를 타일러도 전심(專心)하여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활 쏘고 말 타고 힘이 센 무사(武士)가 아니면 반드시 맞추는
폐인(嬖人)· 영인(伶人)의 무리였다. 일찍이 임금이 강무(講武)로 평강(平康)에 출행(出行)하던 날에 연고를 칭탁하고 나오지 않아서 도성(都城) 문에서 배송(拜送)하는 예()를 폐()하였으나, 즉시 그날 그 군소배(群小輩)를 거느리고 몰래 금천(衿川부평(富平) 등지로 가서 말을 달려 사냥하고 매를 놓고 배를 띄워서 즐기다가 3일 만에 돌아왔다. 또 임금이 중국 조정(朝廷)의 사신(使臣)을 연회하던 날에 세자에게 명하여 시연(侍宴)하게 하니, 바야흐로 창기(倡妓)에게 빠져서 병이라 핑계하고 따르지 않았다.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훌륭한 매를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길에서 요구하게 하여 유혹하여 이를 빼앗고 다른 매를 대신하여 바치게 하였다. 48일 밤에 궁()의 담장을 넘어 가서 간사한 소인배의 무리와 더불어 탄자(彈子)를 가지고 등()을 쏘는 놀이를 하였다. 일찍이 폐인(嬖人) 구종수(具宗秀영인(伶人) 이오방(李五方) 등과 몰래 결탁하여 담장을 넘어서 궁()에 들어오게 하여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저녁까지 이르렀고, 혹은 달밤에 군소배와 담장을 넘어 나가서 길 위에서 노닐고 비파(琵琶)를 치면서 놀이하였다. 또 이오방 등과 더불어 구종수의 집에 가서 술에 취하여 새벽녘까지 이른 적이 두 번이었는데, 그 일이 발각되자, 구종수·이오방 등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어리(於里)를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다시 전(殿)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통절(痛切)히 이를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2장이나 부진(敷陳)하여 심히 무례(無禮)하였다. 이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세자의 글을 가지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박은(朴訔) 등에게 보이고 말하였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不孝)하였으나, 그러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 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다만 직접 그 잘못을 말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장인인 김한로가 당시 대사헌인데 25세인 세자가 어리를 납치하여 첩으로 삼으려 할 때 어리를 자기 집에 두다가 세자궁으로 보냈으며, 임금이 어리를 내쫒자 다시 세자의 요구로 장모가 어리를 세자궁으로 들이는 일을 도우니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한로와 장모는 세자의 요구를 거부하다가는 도리어 자신의 딸인 세자빈이 홀대를 받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세자는 왜 하필이면 그런 악역을 장인이나 장모에게 시켰을까?

황희는 세자인 양녕을 폐하려는 태종의 뜻을 반대하여 마침내 평민으로떨저져 자손들의 벼슬길도 막혔다. ...그는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황희의 결코 작지 않은 권력형 과실

1427년 세종 9년 시련이 닥친다. 의정부 좌의정인 황희가 찬성으로 있던 시절에 사위인 전 지현사 서달이 충청도 신창현의 아전(표운평)을 때려죽인 사건이 문제가 되었다. ...불법으로 아전을 때려죽인 사건은 교수형에 해당했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외아들이었다. 황희와 서선은 서달의 목숨을 건지기 ndl해서 나섰다. 황희는 신창이 고향인 판부사 맹사성에게 표운평의 집과 화해시켜달라고 요청했고, 맹사성은 때마침 서울로 올라온 표운평의 형 표복만에게 화해를 종용했다. 시선도 외아들 서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표복만은 보상금을 받고 동생집으로 내려가서 화해하라고 설득했다. ....사화장이 제출되자 형조와 충청도 및 지방수령들은 서달을 무죄로 방면하고 종 임질종(아전을 때린 종)을 범인으로 만들어 보고했다. 세종은 사건수사보고서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세종은 재수사를 지시했고, 드디어 전모가 드러났다.

황희는 스스로를 낮추면서 자신을 높혔다.

 

   

6 정책

 

보통의 군주 아래 삶의 변화를 이끌다

 

김 육(1580-1658)

 

왕자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후에야 나라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효종실록)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전체 국가세수의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세원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어느 군현에는 생산되지도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이 경우 먼 생산지까지 가서 사다가 납부해야 했다....각 군현의 백성수와 토지 면적이 다름에도 공납부과 대장인 貢案에 정해져 있는 액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가난한 전호(소작인) 집안이나 부유한 전주(지주)집안이나 거의 비슷한 액수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방납(농민들이 직접 납부하지 못하게 하고 방납업자들이 공납을 대신 납부하고 농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방식)이 시행되자 그 폐단이 농민들을 더욱 괴롭혔다. ...

?공납으로 바칠 꿀 한말의 값은 목면 3필인데 인정(수수료)4필이며, 양 한 마리의 값은 목면 30필인데 인정은 34필이라고 합니다.?

율곡 이이의 代貢收米法 주장 이후 한때 실제로 시행된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 겸 도체찰사자격으로 실시한 작미법이 그것이다. ....대동법은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래서 광해군 즉위년(1608)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시범실시하게 된다.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인들인데 김육은 서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한다.

정도전이 나주 회진현 부곡에서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목격하고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평생의 정치신념으로 삼은 것처럼, 김육도 가평 잠곡에서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대동법을 평생의 정치신념으로 삼게 되었다.

위로는 고위 벼슬아치를 정점으로 아래는 말단 아전과 모리배들이 피라미드식 구조를 이루어서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구조가 공납이었다.

효종 2(1651) 드디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공법은 심하게 무너져서 서울의 호활(豪猾  : 부유하고 간사한)무리들이 경주인이라고 칭하면서 여러 도에서 바치는 공물을 못 바치게 막고(防納)는 그 값을 본읍에서 배로 징수했다....?

충청도에서 실시한 대동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한 도를 통틀어서 1결마다 쌀 10두씩을 징수하는데 본 가을로 나누어 각각 5두씩 징수한다. 그리고 한군(산이 많은 고을)5두마다 대신 무명 1필씩을 걷는다> : 1가마(10)는 무명 2필 값과 같다.

대동법 실시를 둘러싸고 한당과 산당으로 갈렸다. 한당은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했고, 산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당의 당수는 잠곡 김육이었고, 산당의 당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었다.

송시열은 김집을 옹호하였다. 백성에게 필요한 관리는 김육같은 사람이지 결코 송시열같은 사람이 아니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지배층이 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육 같은, 정도전 같은 분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국민에게 아부하고자 온갖 개혁을 입으로 부르짖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실천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그득하다.

겉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면서 뜬구름 잡는 선문답이나 하고, 속으로는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벼슬아치들이 많은 상황에서 김육은 國富民富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드문 정승이었다.

 

 

 

 

7 기상

 

전통을 지키려다 쿠데타를 맞다

 

천추태후(964-1029)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신성왕후로 삼고. 자신의 뚜 딸을 경순왕에게 출가시켜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다.

王旭(왕건의 아들)은 태조가 정덕왕후에게서 낳은 배다른 누이 선의태후 유씨와 결혼해서 성종, 헌애왕후(천추태후), 헌정왕후를 낳았다....헌애왕후는 광종의 맏아들이었던 경종과 국혼을 치러 헌애왕후가 된다. 경종은 사촌오빠였고 여덟 살이 많았다. 그런데 동생인 헌애왕후도 경종과 혼인해서 자매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왕비가 되었다.

성종은 여동생들에게 수절을 강요했다. 18세의 헌애왕후나 더 어렸던 동생 헌정황후는 수절하기에는 젊다기보다 어렸지만, 유교윤리에 구애받지 않는 고려여인이었다.

헌정왕후는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이복숙부 王郁과 왕래하다가 정을 통하게 된었다. ...그러나 헌정왕후가 왕욱의 집에서 자고 있을 때 들통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냈다. 안종(왕욱)과 헤어져 집에 오던 헌정왕후는 집앞에서 산기를 느꼈다. 집안으로 들어갈 틈도 없이 문 앞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바로 훗날 현종이었다. 길가에서 아이를 낳던 헌정왕후는 산후조리를 잘 못해 그만 죽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불과 27세 정도였다.

2009년에 방영된 KBS연속극 <천추태후>는 그녀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역시 지나치게 자신이 설정한 주인공인 천추태후 중심의 역사를 서술하다보니 그런지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후계자로 자신의 여동생인 헌정왕후가 낳은 왕순(대량군 순)을 삼는 것이 순리임에도 자신들의 정적들과의 대립상황속에서 대량군 순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고 암살을 시도한다. 자신이 김치양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인 김진을 후계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데, 저자는 이를 그녀가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것으로 기술한다. 정말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일까?

■왕인 경종의 입장에서 볼 때

-왕가인 왕씨중심으로 보면 대량군 순은 오촌당숙(작은 할아버지의 아들)이나, 김진은 씨(김씨)다른 동생일 뿐이다.

-어머니중심(황보씨)으로 보면 대량군 순은 이종사촌동생이나, 김진은 아비가 다른 동생이다.

왕인 경종의 입장에서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권력을 잡고 왕대신 섭정하는 위치인 천추태후와 그녀와 사통한 실권자인 김치양 중심으로 후사를 정하는 것이 옳은가?

목종이 살해당하였을 당시 30세였고, 천추태후는 46세였다. ...그녀는 외가의 고향인 황주로 이사해 21년을 더 살다가 현종 20(1029)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이었다.

 

 

 

 

8 악역

 

나라를 위해 희생할 운명을 받아들이다

 

강홍립(1560-1627)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조선군이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서를 받고 일부러 패전하고 항복했다?는 말을 유포시켰다. 그리고 이런 말은 지금까지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후금군이 역관 하서국에게 강화하자고 먼저 요청했던 것이다.......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독자적인 판단을 요구한 사실은 있다....강홍립이 명나라 경략 양호의 요구에 따라 일부 포수를 명나라 진중에 보내자,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데 힘을 쓰라?고 질책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다른 조선인 포로들이 석방된 이후에도 부원수 겸경서와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강홍립에 대한 대우는 나쁘지 않아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다이샨의 양녀와 결혼하고 명나라 포로 500명을 하인으로 받았다고 적고 있다.

 

 

 

실력

 

성실과 기술로 한양도성을 쌓다

 

박자청(1357-1423)

 

태종12(1412) 형조에서 공조판서 박자청의 죄를 청했다....박자청이 도선공사를 감독하면서 앉아있었다. 그때 부사직 이중위가 말을 탄 채 그 앞을 그냥 지나갔다. 5품 무관직이 정2품 장관을 만났으니 말에서 내려서 읍하고 지나가는게 예법인데, 이중위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박자청이 이중위를 구타했다는 것이 형조의 논죄였다....박자청을 논죄하면서 형조에서 그의 출신을 규정한 말이 특이하다.

?박자청이 한미한 데서 일어났는데 성품이 본래 사납고 망령되었지만, 토목건축공사를 잘 다루어서 주상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사헌부는 보름 이상을 이 사건을 조사하고 태종에게 끈질기게 처벌을 요청했다.

... 태종은 박자청 탄핵의 배후로 의심받는 의정부에게 새로운 도성제조 추천을 명령했다. 의정부는

?박자청이 일을 잘 알고 또 부지런하니 갈 수 없습니다.?라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박자청은 황희석의 家人으로 내시로 출신했다가 낭장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환관이 아니라 임금의 호위무사 출신이란 뜻이다....박자청의 일화가 있다. 1393년 박자청이 입직군사로 궁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이복동생 의안대군 이화가 입궐하려 했다. 박자청은 태종의 소명이 없다는 이유로 굳게 거절하고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화는 자신이 태조의 이복동생이라고 말했지만 박자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이화는 발로 안면을 차서 상처를 입혔지만 박자청은 끝까지 이화의 입궐을 저지했다.

조선의 수도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짠 인물을 정도전이라고 한다면, 그 마스터플랜을 현실로 만든 인물은 박자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도 장영실을 비롯해 태종이 중용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대로 사용했는데 박자청도 마찬가지였다.

 

 

 

10 맹목

 

목적 잃은 권력을 탐하다

 

인수대비(1357-1423)

 

문종 즉위년 (1450), 13세의 한확의 인 한씨 소녀는 수양대군의 맏아들(의경세자)과 혼례를 올렸다. ...한확은 그의 누이가 공녀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성조영략제의 후궁이 되어(1418) 큰 세도를 부린 사람이었다. ...성조 영락제가 죽자(1424) 그녀는 순장으로 16명의 여인들과 함께 목을 졸려 죽고 말았다. ...1427년에는 다른 누이동생을 다시 공녀로 보내려 하자 그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원치 않는 길을 끌려간 한씨 소녀는 명나라 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이 되었다. ...선종이 1435년에 죽자 귀국을 허용했으나 그녀는 귀국을 선택하지 않고 명나라에 잔류했다.

한확의 여동생은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고, 딸은 조선의 세자비였으며 또 다른 딸은 세종의 며느리(서자인 계양군)였다.

1456년 사은사로 갔던 한확이 귀국길에 죽고 남편인 의경세자도 1457년에 죽는다. ....한씨는 만 20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세조가 1468년에 죽고 시동생인 세자가 왕이 되니 그가 곧 예종이다.

예종 17월 평양부 관비가 평양 부윤 이덕량을 사헌부에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평양부윤 이덕량의 반인(수종인) 박종직이 소서시란 관비를 강간하여 했지만 소서시가 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이 말을 들은 이덕량은 소서시와 그 형제들인 관노 막달, 말동과 그 어머니 내은이에게 심한 곤장을 때려 그 어머니를 죽이고 형제들을 중태에 빠뜨렸다. 그런데 이런 불법행위의 당사자 이덕량은 정희왕후(세조비)의 조카사위여서 아무도 고소장을 써주지 않았다. 소서시의 자매인 대비는 천신만고 끝에 사헌부에 고소했고, 의금부는?이덕량의 죄는 참형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예종이 이덕량에 대해

?척속(외척)이고 공신이므로 특별히 용서한다?면서 고신(벼슬임명장)만을 거두자 사헌부에서 ?율문대로 처단해야 한다?고 다시 주청했다. 예종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법에 따라 이덕량의 죄를 결단하고자 하지만, 대비께서 족친이라면서 특별히 용서하여 면제하라고 하시니, 내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예종이 재위12개월만에 죽자(1469) 장자인 제안대군은 불과 4세였으므로 의경세자의 장남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 이정이 16세가 되었으므로 왕이 되어야 하는데 정희왕후(세조비)는 월산군의 동생인 자을산군을 선택한다. 자을산군의 장인은 한명희였으므로 한씨도 굳이 월산군을 고집하지 않았다.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고 의경세자는 의경왕으로 추승되었다. 한씨도 이에 따라 인수왕비가 되었다. 의경왕이 1475년에 다시 의경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인수왕대비가 되었다.

성종비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가 14741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윤기견의 딸 윤씨가 왕비가 된다. 윤비는 왕비로 책봉되던 첫해에 연산군을 낳았다. ....윤비는 성종의 호색에 이의를 제기했다. 야사에서는 그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고 있으나 <성종실록>에서는 오히려 성종이 그녀의 빰을 때렸다고 전하고 있다. 왕비 윤시는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의 방에 뛰어들었다가 성종에게 뺨을 맞은 것이다....성종은 왕비 윤씨가 후궁의 처소에 뛰어들자 폐위하기로 결심했다.

연산군은 재위 10(1504) 갑자사화를 일으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에 나서는데 그 칼날은 인수대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가 귀여워했던 정귀인의 아들 앙양군과 봉안군의 머리털을 잡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끌고 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며 강제로 술을 주게 했다.

 

 

 

11 역린

 

참모는 참모일 뿐, 선을 넘지 않는다

 

홍국영(1748-1781)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 벽파는 영조가 세상을 떠나면 세손을 제치고 다른 종친을 내세워 추대하려는 속셈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은 결코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노론 벽파의 당론이었다.

세손을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이때 목숨을 걸고 세손을 옹위하고 나선 인물이 세손궁의 사서 홍국영이었고, 정민시 등 극소수만이 세손을 지지했다.

홍국영은 영조 48(1771)년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후 세손을 만난다. 9품 부정자에서 몇 달 만에 정7품 설서로 승진한다. 홍국영의 나이 25세 때였다. ...세손의 즉위를 크게 반대하지 않는 노론시파의 영수는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이었지만, 세손의 즉위를 목숨 걸고 반대하는 노론벽파의 영수는 그의 동생 홍인한이었다.

17763월 즉위 3일후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는다. 넉달 후에는 도승지로 삼고 9월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시켰다. 11월에는 종2품 수어사로 임명하여 수어청의 군권까지 주었다.

이듬해인 17775월에는 총융사로 삼았다가 다시 금위대장으로 삼았다. ...비서실장인 도승지와 경호실장인 금위대장을 하나의 손아귀에 장악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이후 숙위대장까지 겸한다.

홍국영은 사도세자를 지지했던 소론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다만 노론 정권의 영수는 홍봉한, 홍인한이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했다.

정조는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했다. 정조가 잇달아 송시열을 높이는 배경에는 노론을 끌어들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홍국영의 사욕도 작용했다. 홍국영은 자신이 노론의영수로 나서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권을 장악한 홍국영은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홍국영은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였다. ...원빈과 홍국영의 부친 호조참의 홍낙춘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원빈은 1년이 채 못 된 17795월에 세상을 떠난다. 홍국영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뜻대로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나갔다. ...정조는 홍국영을 봉조하로 정하고 궤장을 내렸다. 명예롭게 퇴장시키려하는 배려였다. 그러나 선마문 작성의 명을 받은 유언호는 여덟 번이나 이를 거부했다. ...홍국영 일파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정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옥당이 홍국영의 귀양을 요구하고 나섰다. ...홍국영은 전리에서 횡성으로 방축되었다가 다시 강릉으로 쫓겨났다. 울분을 삭이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다가 1781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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