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순교자 이순이 - 죽음을 넘어서

청담(靑潭) 2014. 5. 27. 17:07

 

죽음을 넘어서

 

 

순교자 이순이(1779-1801)의 옥중편지

 

정병설(서울대 교수) 지음

05 서울대 인문 강의

 

 

 

들어가는 말

 

이것은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참수당한 이순이가 감옥에서 어머니와 두 언니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신앙하는 종교가 없다는 사람도 종교를 의식하며 산다.

 

 

1장 순교의 현장

 

1802130(음력 18011227) 전주시 진북동의 속칭 숲정이에서 죄인 네 명의 목을 자르는 사형집행이 있었다. 여자 세 명, 남자 한 명이었다....그 날 사형수들은 전주 최고의 부잣집 식구들이었다. 대지주인 이순이의 시아버지 유항검의 식구였다. ...유항검은 이들이 갇힌 다음 날 전주성 남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숲정이에서 죽은 사람은 유항검의 아내 신희, 며느리 이순이,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이었다.

이순이는 동정을 지킨 순교자다. 자기 몸을 온전히 천주에게 바치고자,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도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이순이는 1801년 음역 보름께 감옥으로 잡혀 왔다. 그리고 거의 석달 반을 감옥에서 지내다 칼을 받았다.

1795년 남인의 영수인 이가환은 천주교도라는 혐의를 입었는데 그렇게 되자 도리어 천주교도에게 더욱 악형을 가하여 자신의 혐의를 벗으려고 했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이가환을 정약용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감옥을 이승의 지옥이라고 하면서 그 고통을 다섯 가지로 말했다.

첫째는 형틀의 고통이요, 둘째는 토색질 당하는 고통이요, 셋째는 질병의 고통이요, 넷째는 춥고 배고픈 고통이요, 다섯째는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이다.

역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죄인의 아들은 교수형을 받는다는 법률에 따라 이순이의 남편 유중철과 시동생 유문석이 전주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장 옥중편지의 배경

 

이순이의 아버지 이윤하(1757-1793)는 이수광의 7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극성(1721-1779)으로 성호 이익의 사위이다.

정약용(1762-1836)이 쓴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의 묘지명을 보면 정약전은 이윤하, 이승훈(1756-1801) 등과 굳은 친분을 맺었다고 한다.

이승훈은 1783년 서장관으로 북경으로 가게 된 아버지 이동욱을 수행했다. 이때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수장격이었던 이벽(1754-1786)이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정식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충고했다....이벽은 초기 천주교 공동체의 대표였고, 이윤하는 그 공동체의 핵심인물이었다.

1785년 봄 서울 을지로 입구 근처의 장악원 앞 김범우의 집에서 어떤 모임이 열렸다. 방 안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이벽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 두건을 쓰고 아랫목에 앉았고, 이승훈과 정약용 삼형제, 그리고 권일신(이윤하의 처남이며 이순이의 외삼촌)), 권상문 부자는 스스로 이벽의 제자라 하며 책을 끼고 앉아 있었다. ...김범우는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 가서 일 년 만에 죽고 말았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1759-1791)권상연(1750-1791)이 순교하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다. 외삼촌 권일신도 이때 고문을 받고 죽었다. ...아버지 이윤하도 이때 받은 신문의 후유증으로 다다음 해에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순이의 어머니는 안동권씨(1754-1835)로 권암의 딸이자 이익의 수제자인 권철신의 동생이다. ...이순이의 외가는 경기도 양근에 있었다. ...정약용은 이순이의 외삼촌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이 집안의 분위기에 대해 말했다.

(아들과 조카가 집안에 가득한데 모두 한 형제처럼 어울리니, 그 집에서 달포 이상은 머물러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 있었다. 노비나 땅이나 곡식을 모두 함께 사용하여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없었다.)...이순이의 외가는 조선 천주교 명가로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한눈에 보게 하는 집안이다.

이순이는 1797년 열아홉 살에 결혼을 했다. ...이순이의 결혼상대는 전주의 거부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이다....정약용의 어머니 윤씨는 윤지충의 고모인데, 윤지충은 유항검과 이종사촌(윤지충의 어머니와 유항검의 어머니는 자매간)이다.

진산(당시는 전라도 진산인데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사는 윤지충과 전주의 이서에 사는 유항검은 이종사촌간인데 윤지충의 고모인 윤씨는 경기도 양주에 사는 정재원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하여 약종, 약전, 약용 형제를 낳는다. 윤씨가 윤선도의 손녀이므로 윤지충은 윤선도의 증손이다. 윤지충은 단순히 진산에 사는 한 시골선비 이전에 정약용의 외사촌 형으로 1783(정조 7)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고 가톨릭교에 입교, 세례를 받았다. 1789년 베이징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귀국하였다. 천주교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신주를 태우고 천주교 신앙에서 요구하는 교리를 지켰다. 1791년 어머니 권씨가 죽자 가톨릭 교리에 따라 위패를 폐하여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관가에 알려져 조선 정계에 이 문제로 정파싸움을 유발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정치적 위기에 몰렸으며 노론 벽파에게는 남인을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는 전주감영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았으나 끝내 위패를 불태운 자신의 행위를 과오로 인정하지 않았고, 천주교 교리에 따라 행한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주 풍남문 밖 형장(현 전주전동성당)에서 불효·불충·악덕 죄로 사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조선 교회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북경주교의 대답은 단호했다. 조선교회의 지도자들이 신부로서 드리는 모든 예식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최초의 세례신자로 교회를 이끌던 이승훈조차 이때 신앙을 버렸다. ...윤지충은 유항검의 이종사촌이고, 권상연은 유항검의 고종사촌이다.

유항검을 중심으로 보면

-유항검의 이모는 진산에 사는 윤지충의 어머니이고, 고모는 역시 진산에 사는 권상연의 어머니이다.

-윤지충의 고모가 정약용의 어머니이다.

 

 

3장 옥중편지 읽기

 

9월에 시집와서 10월에 우리 부부 두 사람이 발원하여 맹세 했지요. 그렇게 하여 사 년을 동정으로 지냈으니 이름은 부부지만 실상은 남매와 같았어요. 중간에 유혹을 받아 그것도 근 십여 차나 받아, 거의 어쩔 수 없게도 되었지만, 성혈의 공로를 일컬으면서 유혹을 면했어요.

누우나 앉으나 구하고 원하는 바 은혜라, 이런 소망이 가득하여 각각 말을 하되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 했어요.

이순이의 시신은 고향 부근에 가매장되어 있었는데 1914년 전주시 남동쪽에 있는 현재의 <치명자산>으로 이장했다. 치명자산은 원래 중바위산이었는데 치명자의 유해를 모시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치명은 당시 천주교에서 순교를 뜻하는 말이다.

전주의 중바위는 승암산이라고도 하는데 그곳에 치명자 성지가 있어 70년대 이후 여러 차례 간 기억이 있으나 단순히 천주교성지라고만 여기고 크게 관심을 두지는 못했었다. 바로 그곳이다.

 

 

4장 박해와 순교

 

황사영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서민들은 죄가 있으면 형조에서 다스리는데, 교우들은 모두 서민인데도 포도청으로 잡혀 갑니다. 도적죄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의금부로 옮겨지는 사람들은 역적으로 처리 됩니다. ’

 

 

맺음말

 

니체는 순교자는 진리에 해를 입혔다. 자기가 참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세상에 대놓고 말해 대는 순교자의 어조에는 저급한 지적 성실성과 진리 문제에 대한 둔감함이 이미 표현되고 있다.’

니체는 순교자를 이성적인 사유를 못하는 맹목적인 인간으로 보았다. 또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인지 몰라도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하는 추론은 백치들이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숭앙 역시 순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위상을 높이려고 든다고 여겼다. 니체의 말은 순교의 일면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맹목 절대복종의 교정신은 박해기에 희생으로 나타나지만 교회가 권력을 얻게 되면 공격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자살폭탄은 그 작은 권력이 나타난 결과이고, 십자군 원정은 그것이 크게 집단화한 것이다.

●옛날에도 충효의 덕목을 위해 육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한 충신과 효자가 있었지만, 이순이처럼 고통과 고난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한 인간은 없었다. 모든 일이 영광이고 은총이고 기쁨이고 감사인 사람은 없었다. 니체의 눈에 바보로 보일 정도로 이순이와 같은 순교자의 목표 의식은 뚜렷하고 강렬했다. 이처럼 강한 의지는 한국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세월호 사건의 발단은 사이비 종교인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 교주 유병언이 온갖 감언이설로 신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악질적인 수법으로 수많은 부실기업과 사이비 기업들을 만들어 수천억의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인재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청해진 해운의 악질경영은 유병언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고 세월호는 결국 침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이비 교주 유병언이 302명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인거나 다름이 없다. 그 저주스런 인간은 현재 지명수배중인데 오늘 전라남도 여수 어딘가에 잠적해 있다고 한다. 현상금이 5억원이나 걸린 상태인데 구원파 신도들은 종교탄압이라고 우겨대면서 순교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저 사악한 인간을 보호한다며 10만 성도가 자신들의 종교를 지켜내겠다고 하는데 저들이 죽는 것도 과연 순교인 것인가? 유병언을 보호하기 위해 죽는 죽음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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