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청담(靑潭) 2014. 5. 1. 15:09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人生到處有上手

 

유홍준 지음

 

 

 

서언

 

  유홍준 선생이 모두 7권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냈는데 이 책은 6번째 발간한 것으로 20135월에 나왔다. 내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처음 발간된 세권 정도 읽다가 중단하고 이번에 6권을 읽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은 오직 책일진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므로 저자의 사상이니 진보니 정치행위니 하는 것들은 배제 하여야 하는데,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나 보다. 저 분이 노무현 정권에서 문화재청장을 맡았을 때 처음엔 전문가로서 임명되었거니 여기다가 그가 정권을 잡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진보파들(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 아주 마땅하다고 맹신하며 우쭐대던 학생운동권 출신들)과 대학시절부터 한동아리였으며 뜻을 같이 하면서 살아온 것을 짐작하고 그런 이유로 임명되었음을 인지한 후 그의 책을 읽기가 싫어졌다. 그가 문화재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학자로 보이지 않고 운동권 출신 정치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한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분들의 친일행각만 보지 말고 그들의 시와 글은 그저 문학적 측면에서만 보아야 하듯이, 역시 같은 시기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문학도 빨갱이라 보지 말고 그저 문학에 대한 잣대()으로만 보아야 한다. 안도현 시인이나 도종환 시인의 정치 행위가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국회의원 도종환의 시는 시로만 보아야하기에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을 국어선생님이 현관부근에 게시하자는데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뛰어난 전문성과 통찰력,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쓰여진 유홍준 선생의 6번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다시 읽게 되면서 지나친 선입견으로 인한 오해에서 벗어나 그의 참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고 그것은 바로 나의 인격이 조금은 성숙해진 또 다른 모습의 하나가 아닐까 자화자찬하면서 간단히 정리해본다.

 

 

경복궁1 경복궁과 근정의 참뜻을 새기면서

 

경복궁은 14만평, 자금성은 24만평이다.

경복궁은 어느 시점에서 보아도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 볼 수 있는 자연과의 어울림이 자랑이다.

태조는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하여 도시 전체의 설계를 맡겼다. ...

엄청난 공사가 불과 10개월 뒤에 완료됐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완벽하게 갖추게 된 것은 세종대에 들어와서이다.

경회루, 종묘의 정전, 근정정이 평수가 엇비슷하지만 근정전은 높직한 월대위에 훤칠한 중층이어서 외관상으로도 가장 크게 느껴진다.

勤政의 뜻 :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정도전)

 

 

경복궁2 아미산 꽃동산에 십장생 굴뚝을 세우고

 

경복궁 3: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

현재 복원된 건물은 흥선대원군 당시의 45%가량이다.

엄청난 인력과 재력을 들여 복원한 경복궁에 임금이 어거했던 기간은 중건에서 대화재까지 8, 갑신정변에서 아관파천까지 10, 도합 18년밖에 안 된다.

일제의 철거를 피한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고종 당시 500여동의 25% 수준이다. 그것이 현재의 경복궁 모습이다.

 

 

경복궁3 경복궁 건축의 꽃, 경회루와 건청궁

 

경회루는 누마루 넓이가 298평이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베풀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회루 북쪽 입수구 용머리 조각이 있는 바로 곁에 하향정이라는 육각정을 짓고 여기에서 낚시를 했다. ....경회루 연못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개방되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권위주의 시대의 강압통치를 오랫동안 경험하여 <출입금지>, <사진촬영금지>에 아주 익숙해 있다. 세계 모든 나라의 박물관이 별도의 규제가 없는 한 플래시 없는 촬영을 허가하고 있다.

지난번 현장체험답사시 유관순열사 기념관을 가게 되었고, 영정을 모신 사당을 참배하고 난 후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사진 촬영 금지에요라 한다. 아주 멋쩍었다. 다른 참배객이 아무도 없는데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영정을 모신 사당이라고 박물관 내부처럼 무조건 <촬영금지>. 무조건 경건해야만 하는데 셔터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는 의미라 하겠다.

건청궁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살림공간이다.

향원정은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으로 꼽힌다.

춘양목이라는 목재는 금강송으로 고성, 울진, 삼척, 봉화 등 태백산맥 줄기에 자라는 소나무이다. ....이 금강송들이 철도가 생기면서 춘양역에서 출하되어 흔히 춘양목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경복궁4 광화문에 새겨진 영욕의 이력서

 

내가 행정을 해본 경험으로 말하면 공무원들은 타고난 수비수들이다. 무언가 공격적인 자세에서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공격하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다는 위기의식이 있을 때만 움직인다. 그러나 그 경우도 공격이 아니라 수비의 전진 배치만 있을 뿐이다.

광화문 현판 글씨문제가 노출되면서 광화문 현판문제는박정희 글씨를 떼어 낸다’, ‘정조대왕 글씨로 곡학아세한다.’ 는 등 정치적인 논쟁으로 바뀌어 버렸다.

광화문의 명칭은 원래 1395년 축조당시 사정문이었다. 1425년 세종때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누가 현판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후 1864년에 중건했는데 이때의 현판글씨는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 있다가 1968년 원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콘크리트로 복원하였고 이때의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문화재청이 복원을 계획하면서 현판글씨 문제가 불거졌고 청장은 박정희 글씨나 임태영 글씨가 아닌 다른 글씨를 원하였던 듯하나 결국 임태영의 글씨를 디지털로 복원하여 걸게 된다. 그가 제시한 글씨 중 훈민정음은 명칭을 바꿀 당시 집현전 관리들도 택하지 않은 바요, 갑인자도 마찬가지이며 이황 글씨는 건물과 전혀 관계없을 뿐 만 아니라 글씨도 졸렬하다. 한석봉 글씨나 정조대왕 글씨도 광화문과 아무 관련이 없다. 임태영 글씨가 비록 졸렬하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박정희 글씨는 정말 떼어내 버릴 숨은 마음이 있어 다른 글씨들을 찾은 것은 아닌지 의심을 불식하기 힘들다. 나 역시 당시 집권층의 숨은 의도(박정희 글씨 제거)는 없었는지 강한 의심을 하였기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20108월 14일 우연하게 통일연수중에 휴일에 서울집에 갔다가 가족과 함께 광복절 기념공연에 참석하면서 막 완공된 광화문(다음 날 15일에 완공식)을 보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즐겁게 음악공연을 관람하였다.

 

 

 

순천 선암사1 산사의 미학-깊은 산, 깊은 절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급조한 전시회여서 외국인 커미셔너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300억원이 들어간 광주비엔날레의 시작은 문민정부가 호남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급히 내놓은 정치적 목적의 문화행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나 다들 실망했다는 후일담이었다. 나도 큰 의미를 찾지 못했다. 즐거움도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보느라 많이 걸은 기억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논이다.

우리나라 절들은 그 위치와 건물구조에 따라 대략 네 가지로 나눈다.

강진 무위사처럼 소박한 절집이다.

부안 내소사처럼 규모를 갖춘 화려한 절이다.

구례 화엄사처럼 궁궐 같은 절이다.

여주 부석사처럼 장대한 파노라마의 전망을 가진 절이다.

선암사처럼 크고 작은 당우들이 길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치 묵은 동네 같은 절이다.

1970년데 중엽 처음 선암사를 찾았을 때 정말 조용하고 편안한 절이어서 오래토록 기억에 남아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절로 쳤다. 그러나 경제가발전하고 포장도로가 생겨나고 관광업이 발달하게 되자 금방 선암사의 모습도 변해갔다. 1990년대에 찾았을 때 입구는 이미 포장도로와 주차장이 생겨나고 가게들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웠으나 절은 그대로 여서 다행이었다.

 

 

순천 선암사2 365일 꽃이 지지 않는 엣 가람

 

조계종은 1994929일자로 종헌을 개정 공포하면서 제1조에

본 조계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2004. 조계종 관련 국정교과서 수정보완 건의 내용

(한국불교최대종파인 조계종이 한국사 교과서에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게 됨에 따라 필자가 다음과 같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건의하여 다음 해 고교한국사에 조계종의 발전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실리게 되었다.)

2004년판에서 갑자기 본 내용에 조계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하여 소제목에서 조계종이라는 말을 삭제하였는바 본 내용에 조계종이라는 말이 없다하여 제목에서 조계종이라는 말을 삭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

원래 집필자는 본 내용이 조계종의 발전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제목을 결사운동과 조계종이라고 하였을 것이나 내용에서는 조계종을 전적으로 결사운동으로 대체해 버렸는바 이는 학술적으로 좀 더 규명이 필요함.

지금까지 어느 국정교과서도 고려 후기에 조계종이 지눌로부터 발전하여 선종의 중심종파로써 자리를 잡았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대표적 종파가 된 것을 설명하지 않은 적이 없음.

오늘날의 한국불교의 모습에 대한 보충설명을 위해서도 제목과 본문에 조계종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필요함.

결사운동과 조계종(제목)

한편, 천태종 이후에 성립된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 고려 후기에 이르러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고승 선사를 배출하였다.

 

 

달성 도동서원 가 마침내 동쪽으로 오기까지

 

거창·합천1 정자고을 거창의 코스모스길

 

왜구들의 침입이 너무 심하자 고려 원종(1271)때 거제도 사람과 관아가 모두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거제현이 다시 섬으로 돌아간 것은 세종(1442)때 였습니다.

거창 초입에서 건계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를 만난 것은 그 예고편에 불과하다. 수승대의 요수정, 가북면 흠거리의 소원경, 북상면의 용암정, 갈계숲의 병암정, 고제변 원농산의 요원정, 남하면 살목의 심소정...

수년전 무주에 근무하면서 거창에 다녀 왔지만 미처 정자는 생각지 못했다. 꼭 거창의 정자문화 탐방을 해보련다.

 

거창·합천2 종가의 자랑과 맏며느리의 숙명

 

거창·합천3 쌍사자석등은 황매산을 떠받들고

 

부여·논산·보령1 내 고향 부여 이야기

 

부여·논산·보령2 내 고향 부여 이야기

 

송국리 선사 유적지에 미처 가보지 못했다. 가까운 곳이므로 꼭 찾으리라.

홍산현 관아가 잘 남아 있다하니 언젠가 답사하련다.

 

 

 

부여·논산·보령3 백제의 여운은 그렇게 남아 있고

 

한 전라도 사람이 정읍에서 장사하다 망하자 자살하려고 맘먹고 죽기 전에 장항의 누님이나 한 번 만나보려고 대전에 와서 버스를 탔다. 한 여름인데 이 버스가 만고강산을 유람하듯 여기서도 손님 태우고 저기서도 손님 내려주고 하며 마냥 가더란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다보았더니 운전수가 시동을 켜둔 채 차에서 내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았더니 개울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올라오더란다. 그래도 어느 손님하나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다시 한 참 가는데 마주 오는 버스와 마주치자 두 기사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맞대고

어휴 덥구먼

왜 이리 찐댜

하면서 아무 긴하지도 않은 얘기를 마냥 늘어놓는데 버스 두 대가 길을 막고 있어도 뒤로 죽 늘어선 차들 역시 누구 하나 클랙슨을 누르는 일이 없이 느긋이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그는 무릎을 치면서 여기 와서 장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포기하고 홍성에서 판을 벌였다. 그리고 800원을 받을 것이면 900원 매겨놓고 흥정이 들어오면 100원을 깎아줄 요량이었는데

이거 얼마유?” 라는 물음에

“900원유라고 대답하면 느릿한 말씨로

그래유라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고 사가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장사가 쉬운 곳이 어디 있겠냐며 신이 났는데, 한 달이 지나자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더라는 것이다. 그새 그 가게는 비싼 집이라는 소문이 다 나버린 것이다. 충청도사람들은 일단 참고 당해주기는 하지만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은근히 전라도 사람의 약삭빠름을 암시하고 있고 충청도 사람들의 양반 기질과 순수함을 표현하는 이야기다. 맞다. 나는 솔직히 충청도 사람들의 말씨 느림의 아름다움과 순박함을 많이 좋아한다. 그들과 대화하노라면 다들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들로만 여겨진다. 그들이라고 모두 다 착하지만은 않겠지만, 경상도의 억센 말투나 전라도의 자신 없는 말투에 비하면 정말 착한 말, 정감이 가는 사투리인 것이다. 이십여 년도 더 지난 얘기다. 충청도에서 어느 돗자리 장사가 학교 교무실에 왔다. 내가 물었다.

이거 믿을 만한 물건인가요?”

그럼유. 틀림없는 물건이구만유. 지를 믿고 사세유

가격도 깎으려 하지 않고 그냥 샀다.

임천면 면사무소가 있는 군사리 뒷산인 성흥산은 해발 268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다. ...대조사는 성흥산성 못 미처 산중턱 양지바른 자리에 있다.

이십 수년여 년 전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성흥산성을 발굴하고 있어 한 대희 교수 채수환교수와 함께 김성기 학예관이 발굴책임자로 있어 위로 차 처음 찾은 기억이 난다. 성흥산성과 대조사는 가깝기도 하거니와 석조관음보살상이 은진미륵보다도 더 친근감이 있어 거의 매년 찾았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작년엔 봄에는 김호길 선생 부부와 함께, 가을엔 우리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다녀왔다.

산딸나무 하얀 꽃은 흰 모자를 쓴 간호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청순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여·논산·보령4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

 

극락전(보물 제356)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렇게 너그럽고 준수하게 잘 생길 수가 없다. 사실 절집에서 목조건물 자체가 잘 생겼다는 감동을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 극락전만큼은 살필 것도 없이 예스러운 기품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기쁘게 열린다.

그렇다. 무량사 극락전은 미적 감각이나 안목이 별로인 사람도 능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성주사터는 폐사지이지만 조금도 쓸쓸하거나 스산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한번은 답사를 같이 했던 한 스님이

세상에 이렇게 화려한 폐사지가 있단 말인가?” 라며 탄식과 감탄을 동시에 말했다.

스님이 바로 보았다. 누구든 부여지방에 여행하거들랑 성흥산성과 대조사, 무위사, 성주사터를 찾게 되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 아주 크게 만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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