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의 정자와 함양의 상림 탐방
들어가는 말
오늘은 스승의 날이라 휴업일이 되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스승들은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며 스승의 날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 언젠가부터 스승의 날은 참교육학부모회의 무차별 공격대상이 되어 학생들이 존경하는 스승에게 또는 담임에게 작은 선물, 꽃 한송이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며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도시의 학교에서 일부 몰지각하고 부끄러운 교사들이 학부모들에게 뇌물성 선물을 요구하는 데서 발단한 것이지만, 이때 대부분의 교사들은 싸잡아 부도덕한 교사로 매도되다시피 하였고 스승들이 스승의 날을 스스로 부끄럽게끔 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는 어쩐지 쑥스럽고 서운하여 이후 학교에서 꽃은 준비하고, 학생회 간부들이 아침에 등교하는 교직원들에게 가슴에 꽃아 드리는 행사를 치르는 것이 정착되고 일반화 되었다. 교육계 일부에서는 아예 스승의 날을 없애달라는 요구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제는 자랑스러운 날이 아니라 거북스럽고 스승된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평소에 아이를 예뻐해 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나 존경하는 이웃 어른들에게 선물을 드리면 아주 착한 행동이라 칭찬받는데 존경하는 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에게는 편지를 드리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지만 행여 무슨 작은 선물이라도 하게 되면 마치 범죄를 저지르는 듯 아주 부도덕하고 나쁜 짓이 되어버렸다. 교사들은 말썽이 일까봐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지 말도록 신신당부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과자는 해도 돼요??
?과자는 한 개만 해야 돼요??
하고 묻는다고 한다. 일부 몰지각한 교사들의 부정의 싹은 잘랐으되, 훈훈한 사제간의 정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교권은 추락을 멈추지 않는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학교현장의 슬픈 자화상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권추락 모습은 스승의 날에 스승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든이들 모두에게 일단의 책임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당시 참교육 학부모 회원들과 통신매체를 통해 이에 관련하여 상당히 심도 있는 격론을 벌이며 한편으로는 서로의 입장을 상호 이해하기도 한 적이 있다. 이제 많은 교사들이 일부 아이들의 교사에 대한 선을 넘는 도전에 더 이상 기력을 잃고 교직에 대해 회의하고 환상이 깨지면서 교단을 떠나기 시작했다. 시대변화에 따른 교직사회의 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한편으로 많은 교사들이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퇴직이 채 일 년이 남지 않은 내가 적이 걱정을 놓기 어렵다.
폐일언하고 금년에는 안산 단원고학생들을 비롯한 302명의 세월호 참사로 인해 사회분위기가 어둡고 불안정한 가운데 학교는 아예 스승의 날에 대부분의 학교들이 학사일정대로 소리 없이 휴업하기로 결정했다.
단원고 14명의 교사중 11명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학생들을 구하려다 학생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살아남은 교감선생님도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교사들이 세월호 승무원같은 사람들과는 결코 같지 않음을 저 분들이 증명하여 주셨다. 그분들의 숭고한 스승의 자세가 한없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우며, 우리 교사들이 오랫동안 지고 온 부끄러움을 많이 덜어주시고 깨져버렸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 주심에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의 희생이 큰 빛을 발하였음을 고합니다.
5월 21일 오늘 체육대회는 효체험 춘계체육대회로 주제를 잡았다. 한달여동안 세월호 추도분위기인데다가 1차 고사뒤 4일간의 연휴라서 학생조회도 없어 어버이날도, 스승의 날 계기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한 터이라 오늘 대회사에서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은혜와 스승의 고마움에 대해 얘기하고 점심은 학부모들과 함께 삼겹살을 함께 구워 먹으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아주 좋다. 여러 아이들이 쌈을 싸서 교장인 내게 찾아와 직접 입에 넣어주니 행복하고 기분이 너무 좋으네요.
오늘 양드리와 김호길 교감 내외와 함께 거창의 정자문화와 함양의 상림공원 답사를 준비하고 함께 떠난다. 최근에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 6권에서 거창의 정자에 대해 알게 되었기에 녹음지절에 곧바로 가고 싶었고, 양드리는 상림구경도 못했다하니 답사일정에 넣으면 좋겠다 싶었다.
거창의 정자문화
1. 심소정 : 남하면 양항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거창의 심소정을 네비게이션에 찍으니 133km이다. 김호길 선생이 무섭게 차를 몰아간다. 익산-장수간 고속도로의 마이산 휴게소에 잠깐 들리고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거쳐 구닥다리 88고속도로를 지나 거창으로 들어간다. 유홍준 선생이 소개한 여섯개의 정자 중 인터넷을 통해 조사해보니 네 개가 확인된다. 남하면의 심소정, 거창읍의 건계정, 위천면의 요수정, 북상면의 용암정이다. 먼저 거창의 정자가 거창읍에서 아주 근접한 남하면 양항리에 위치한 심소정에 도착한다. 거창읍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다. 입구에 小心樓가 있다.소심루를 지나 올라가니 바로옆을 흐르는 황강과 거창벌의 전망이 탁 트인 곳에 규모가 크고 잘 지어진 심소정이 있다.
심소정 옆에는 500년이 넘은 노송이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심소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원래 정자고을이라면 먼저 소쇄원이 있는 담양과 불타버린 농월정의 함양을 연상한다. 거창의 정자를 처음 만났는데 건물은 대단하다. 아쉬운 점은 황강이 예전엔 바로 심소정 아래를 흘렀을 터이나 지금은 제방을 쌓아 저 멀리 흐르고 있을 뿐이니, 제방안쪽에서 흐르는 저 강물이 무슨 운치가 있을 수 있으랴? 근대화의 치수공사로 심소정은 그냥 건물만 남았다.
문화재 해설 : 心蘇亭은 조선 세종 때 단성현감을 지낸 윤자선이 1450년 하향하여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산수를 즐기며 강학하덕 곳이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2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계자난간이 있는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정자의 규모와 내외부의 공간구성이 주변의 자연경관에 잘 조화된 목조와가 건물이다.
또한 이곳은 1919년 지방 유림들이 이 곳에 모여 "파리장서거사"를 의논한 곳이며, 현 거창 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남의숙을 세워 교육하던 곳이다. 건물 옆에는 윤공의 유허비가 있으며 파평 윤씨의 자손과 외손, 전주 이씨, 밀양 박씨 문중에서 수계하여 관리를 하고 있다.
2. 건계정 : 거창읍 상림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7호
거창읍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십 여 리를 달리니 위천(읍에서 황강에 합쳐짐)이 흐르고 거열산군립공원이 나온다. 거열산은 570m인데 거열산성이 있다하고 등산로가 개발되어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다. 바로 옆에 건계정이 있다. 경치가 그런대로 볼만 한데 물이 읍내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맑지 않다. 바로 옆에 함양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데 거대한 시멘드 교량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이 작은 건계정을 기를 죽이고 있다.
문화재 해설 : 建溪亭은 거창장(章)씨 문중이 1905년에 세운 것으로, 문중의 시조인 평보(平甫) 장종행(章宗行)이 고려 충렬왕(1240년)때 중국으로부터 귀화했는데, 그의 아들인 두민(斗民)이 공민왕 때 홍건적들이 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들을 지휘하여 개경으로부터 홍건적을 몰아내어 국란의 위기를 극복한 무훈을 세우자, 이에 대한 공로로 공민왕이 두민을 아림군(娥林君)으로 봉했다. 이에 그 후손들이 두민의 공을 기려서 세운 정자이다.
건계정 계곡은 역사, 지리, 군사상의 요충지로 자리하였으나 지금은 「거창」하면 건계정을 생각할 만큼 고풍스런 정자와 맑은 물이 굽어 도는 물길과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명소로서 자리한다.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거창을 소재로 하는 글이나 문학소재의 대상에서 으뜸이 되었던 곳이다. 건계정은 영천의 맑은 물 위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 등 위에 지어진 거창 장씨의 정자이다. 정자가 지어진 바위를 구배석이라 한다.
3. 수승대(명승 제53호)와 요수정(경남유형문화재 제423호), 구연서원과 관수루(경남유형문화재 제422호) : 위천면 황산리
건계정에서 마리면을 지나며 삼십 여 리를 달리면 명승지 수승대가 나온다. 수승대는 명승지로 지정되었믈 만큼 그 경치가 뛰어나다. 심소정이나 건계정과 비할 바가 아니다. 주차장을 경유하여 수승대로 간다. 가히 아름다운 곳이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더 대단할 듯하고, 오랜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아름답고 크나 큰 바위로 덮인 넓은 위천을 감싸고 있다.
예쁘게 잘 지어진 다리를 지나 한참을 걸어 요수정에 오르니 스승대가 한 눈에 잡히고 흐르는 물은 아주 맑다. 거북바위 앞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에 모두 발을 담근다. 수승대의 아름다움에 다들 취하여 기분이 둥둥 뜨는 듯 마음과 몸이 가볍고 어린아이들처럼 함께 연신 웃어대며 사진을 찍어 대고는 수승대를 벗어났다.
구암서원의 정문처럼 잘 지어진 관수루가 서있다. 바위에 잇대다시피 하여 지어졌기에 오르는 것도 바위를 올라가야 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구연서원의 넓은 안뜰이 나타나고 깊숙이 아주 안정된 모습으로 서원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해설 : 거창지방이 백제의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강약이 부동인지라 신라로 간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送] 하여 여기를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한다.
그렇게 불리던 이름이 지금처럼 바뀐 것은 조선시대다. 거창 신씨 집안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권(愼權, 1501~1573)이 있다. 자(字)는 언중(彦仲), 요수(樂水)가 그의 호(號)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1540)부터는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사의 이름 또한 ‘구연재’(龜淵齋)라 했으며, 아예 동네 이름조차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 뒤(1542)에는 냇물 건너편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이렇게 자연에 묻혀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닿았다. 십 리 아래 영송마을(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로부터 이튿날 거유(巨儒) 이황이 예방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안의삼동을 유람 차 왔던 퇴계가 마침 처가가 있는 영송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골짜기의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1543년 이른 봄날, 정갈히 치운 요수정에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하냥 기다리던 요수를 찾은 것은 그러나 퇴계가 아니라 그가 보낸 시 한 통이었다. 급한 왕명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는 양해의 말과 함께.
搜勝名新換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遠林花欲動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陰壑雪猶埋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未寓搜尋眼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惟增想像懷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他年一樽酒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巨筆寫雲崖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넘치지 않을 만큼 정이 담긴 시였다. 화답이 없을 수 없었다.
林壑皆增采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臺名肇錫佳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勝日樽前値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深荷珍重敎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殊絶恨望懷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行塵遙莫追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獨倚老松崖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옛사람들의 여유로운 만남이 부럽다. 이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새 이름을 얻은 암구대, 곧 거북바위에는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이곳을 찾았던 선비들이 읊조린 시문이나 이름 남기기 좋아하는 이들이 새긴 성명 석 자가 빈틈없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 퇴계의 시와 나란히 새겨진 글은 역시 거창이 자랑하는 선비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00~1584)의 시다.
花滿江皐酒滿樽
강 언덕에 가득한 꽃 술동이에 가득한 술
遊人連袂謾紛紛
소맷자락 이어질 듯 흥에 취한 사람들
春將暮處君將去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不獨愁春愁送君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거북바위에는 짤막한 전설도 얽혀 있다. 장마가 심했던 어느 해, 불어난 물을 따라 윗마을 북상의 거북이 떠내려 왔다. 이곳을 지키던 거북이 그냥 둘 리 없어 싸움이 붙었는데, 여기 살던 거북이 이겼음은 물론이다. 그때의 거북이 죽어 바위로 변했으니 거북바위가 바로 그것이라 한다. 옛날 이곳을 범한 거북을 물리쳤듯 바위가 된 거북은 오늘도 이곳을 지키는 지킴이 구실에 어김이 없다는 얘기다.
시내 건너 바위 언덕에 선 정자가 요수정(樂水亭)이다. 요수 선생이 처음 세웠던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1805년에 다시 만든 것이 지금의 정자다. 정자의 볼품이야 대단할 게 없지만 옛 주인의 마음이 담긴 주련(柱聯)은 가볍게 음미함 직하다.
林泉甘老地
숲과 물이 함께라면 늙기도 수월할 터
小檻卜淸幽
작은 정자 그런대로 맑고 그윽해
洞鶴留仙跡
골짜기에 내리는 학 신선의 자취
巖龜送客愁
시름 달래기엔 거북바위가 안성맞춤
登臨惟自適
이곳에 노닐며 자신에 만족할 뿐
聞達不須求
헛된 이름을 좇지 않으리.
時看漁樵伴
풀 베는 아이, 고기 잡는 늙은이 벗 삼아
相尋碧澗頭
이따금 푸른 물에 발을 담그네.
요수 선생이 죽은 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재실은 서원이 되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이다. 그 문루(門樓)인 관수루(觀水樓)가 볼 만하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층 누각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편으로 덩그렇게 놓인 크고 펑퍼짐한 바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천연스러움을 한껏 살렸다. 덤벙주초 위에 놓인 누하주(樓下柱)는 굽으면 굽은 대로 그저 껍질만 대충 벗긴 나무들을 그대로 썼다. 특히 안쪽 것들이 그렇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인데도 네 귀퉁이마다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왼편의 둘은 바위 위에 맞춤한 구멍을 뚫어 짧은 돌기둥을 박은 뒤 그 위에 올렸고, 다른 둘은 외벌대 기단 위에 길숨한 돌기둥을 마련한 다음 나머지를 나무로 이었다. 조금 되바라진 느낌이 있긴 하나 좌우로 뻗쳐올라간 처마선이 시원스럽고, 무엇보다 듬직한 바위와 어우러진 모습이 천연덕스럽다.
관수루를 찾을 때 반드시 생각해볼 인물이 있다.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와 함께 우리 회화사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의 실마리를 풀어간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이다. 광해군과 세조, 그리고 숙종의 어진(御眞)을 새로 그릴 때 영조 임금이 그의 그림 솜씨를 높이 사 그때마다 그림 그리기를 명했으나 하찮은 기예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끝내 붓 잡기를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관수루는 조영석이 안음(현재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있던 1740년에 지은 누각이다. 그때 그는 고을의 수령으로서 누각의 이름을 ‘관수루’라 명명함과 동시에 「관수루기」를 지어 일의 내력을 밝혔다. 관수루 다락에 오르면 지금도 그의 글과 시를 볼 수 있다.
4. 용암정 : 북상면 갈계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3호
용암정까지 네 개의 정자를 찾았는데 자연과 잘 어울려 지은 장소가 잘 태해 졌고 건물모양도 모두가 일품이다. 담양이나 함양의 정자들을 능가하는데 이제야 찾은 내가 부끄럽다. 누구든 거창의 정자들을 찾게 되면 오래토록 보존해야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느낄 수 밖에 없으리라. 양드리와 박숙경 여사 김호길 선생도 아주 대 만족이라하니 더욱 기분이 좋다. 수승대로 다시 내려와 황산정가든에서 맛있는 한방백숙으로 점심을 먹고 함양으로 출발한다. 3시가 다 되었고 거리는 100여리이다.
문화재 해설 : 용암정은 조선 순조 1년(1801)에 용암 임석형(1751∼1816) 선생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종 1년(1864)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 안에는 ‘용암정(龍巖亭)’,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 ‘환학란(喚鶴欄)’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함양 상림
■ 함양읍 운림리, 천연기념물 154호, 면적21ha (연장1.6km,폭80~200m)
아름다운 인공조림숲이다. 그것도 1100여 년 전 고운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하면서 조성한 숲이라 오랜 역사의 향기가 있고, 함양군이 공원으로 정하여 많은 공을 들여 넓고 다양한 연지를 조성하여 오래전부터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나는 2000년 경 마한향토사연구회에서 함양답사를 갔던 기억이 있고 삼사년 전 무주고에 근무할 때 두 번 찾았다. 오늘 네 번째인데 양드리는 직원여행 시 들리기는 했으나 연밥점심을 먹기 위해 들렸을 뿐 정작 상림은 구경을 못했다 한다. 박숙경여사는 처음이라 아주 좋아하신다. 오늘와 보니 상림 오른편으로 조성된 연방죽 위쪽으로 아주 넓은 농지를 확보하여 아름다운 꽃양귀비를 재배하였는데 큰 볼거리이다.
문화재 해설 :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 잡은 호안림이며 신라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령군(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이숲을 대관림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후 중간부분이 파괴되어 지금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다.
사랑나무 연리목
함양어은리석불(경남유형문화재 제32호)
최치원선생 신도비(경남문화재자료 제75호)
사운정
함화루(경남유형문화재 제258호)
꽃양귀비 정원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본 마이산(명승 제 12호)
후기
이 글을 정리하다가 갈계숲을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갈계숲은 용암정이 있는 북상면 소재지 근처에 있으며 용암정으로부터 불과 2km 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고 허망하다! 사전조사를 하면서 지도에 정자 이름을 일일이 쳐서 확인할때에 위천계곡의 갈계숲에 있는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등은 나타나지 않아 답사경로에서 제외했던 때문에, 모두 갈계숲에 있는 정자인데 가까이 가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서운한 마음이 크다. 또 용암정에서 3km지점인 월성계곡 아래쪽 북상면 농산리에는 강선대의 모암정이 있으니 반드시 후일을 기약하거니와 네이버나 다음 지도에 모암정을 제외한 세 정자이름을 쳐도 나타나지 않음과, 거창군 홈페이지에서 문화재지정이 안된 때문이겠지만 네 정자명을 쳐도 역시 모두 나타나지 않음은 크게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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