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11국 15박 16일
※기내 2박․호텔 13박, 실제답사일수 14일․소요일수 16일
●기간
2015년 월 일 : ► 월 일 :
●국가별
영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모나코→(이탈리아)→바티칸시티→(이탈리아)→스위스→독일→룩셈부르크→벨기에→네델란드
●도시별 및 숙박지
인천→암스테르담→런던→파리(2)→뮬하우스(1)→인터라켄(1)→루가노→꼬모→에즈마을(1)→니스→모나코→제노바(1)→피사→로마(2)→폼페이→쏘렌토→나폴리→로마(1)→피렌체→베니스(1)→인스부르크(1)→하이델베르크→프랑크프르트(1)→룩셈부르크→브뤼셀(1)→암스테르담→인천
월 일 요일
▣영 국 : 243,610㎢ 세계80위 63,742,977명 세계22위 GDP 2조 8,476억$ 세계6위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로, 그레이트브리튼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과 아일랜드섬 북쪽의 북(北)아일랜드로 이루어진다. 영국은 서기전 55·54년 케사르(Caesar)의 침공으로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어 브리타니아로 불렸다. 약 400년간 로마의 군정이 있은 뒤 앵글로색슨의 침공으로 6∼8세기에 7왕국시대가 있었으나 829년 통일왕국을 이루고, 1066년에 봉건국가 노르만조(朝)가 성립되었다. 1215년의 <대헌장 大憲章>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절대군주제는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의 치세 이후 점차 쇠퇴하여 17세기 100년 동안의 내란으로 국왕이 처형되고 크롬웰(Cromwell,O.)이 주도한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 1688년 이른바 명예혁명이 이룩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른다. 엘리자베스시대에 시작된 해외영토 확장은 18세기에 이르러 ‘대영제국(大英帝國)’을 건설, 그 위세는 19세기 말 빅토리아(Victoria) 치세 때 절정에 달하였다. 이즈음 우리나라에도 한영 수교의 기원이 발단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치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은 ‘영연방(英聯邦)’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상 붕괴되었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될 때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음으로써 현재의 연합왕국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차는 썸머타임으로 8시간, 온도는 6도~15도
●국회의사당의 빅벤 : 빅 벤은 높이 95m의 시계탑이다. 이곳에 매달려 있는 무게 13톤짜리 종은 국제 표준시를 정확히 알리고 있다. 빅 벤이 건축된 1859년에 처음 소리를 냈던 이 종은 지금까지 시간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
●버킹엄 궁전 : 1703년 버킹엄 공작 셰필드의 저택으로 건축되었으며, 1761년 조지 3세가 이를 구입한 이후 왕실 건물이 되었다. 1825∼1936년 건축가 J.내시가 개축하였으며, 왕실의 소유가 된 뒤에도 당분간은 왕궁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뒤에 국왕들의 상주(常住)궁전이 되었다. 1946년 E.블로어와, 1913년 A.웨브가 동쪽 옆면을 증개축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2만㎡의 호수를 포함한 17만 4000㎡의 대정원, 다수의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도서관 등이 있다. 현재 매일 시행되는 전통 복장의 근위병 교대는 버킹엄궁전의 명물이다.
●대영 박물관 : 대영 박물관은 1753년 박물학자인 한스 슬론 경이 6만 5천 점의 수집품과 4만 5천 권의 장서를 정부에 기증하면서 시작되었다. 몬태규 후작이 건축가 피에르 퓌에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베르사유 궁전에 참여했던 화가들에게 실내 장식을 맡겨 세운 건물을 박물관 건물로 결정하여, 마침내 1759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당시에는 엄격한 심사에 통과한 사람만 관람할 수 있어서 하루 관람객이 1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후 18~19세기에 이집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의 고고학 유물,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 원정 때 발견해 영국이 전리품으로 가져온 로제타스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군, 서아시아의 발굴 유물 등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비좁은 건물을 확장하기 위해 1824년부터 20년간 대규모로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5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장품이 증가해 지금은 600만 점이 넘는 소장품이 있다. 1999년 관람객의 편의 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박물관 중앙에 유리 천장으로 단장한 그레이트 코트(Great Court, 하이테크 건축 대가인 노먼 포스터 작품)는 박물관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웨스턴민스터 사원 : 영국 왕실의 웅장한 사원. 명성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왕과 위인들이 잠든 곳이다. '수도원 중의 수도원'이라는 의미로 'The Abbey'라고도 불린다.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가 세운 세인트 페트로 성당이 지금의 수도원의 모체이다. 13세기에 헨리 3세의 지시로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을 비롯해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며 또한 이곳에 묻혀 있다. 1997년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을 이곳에서 치르기도 했다.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면서 영국 내의 로마 가톨릭 교회나 수도원이 모두 몰수되거나 파괴되었지만,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이곳은 무사히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타워브리지 : 국회의사당의 빅 벤과 함께 런던의 상징으로 꼽히는 타워 브리지. 조명을 받을 때면 하얗게 빛나는 야경이 장관이다. 1894년 총 길이 805m로 완성되었는데, 양 옆으로 솟은 고딕 양식의 탑이 무척 인상적이다. 탑과 탑을 잇는 산책길에서 바라보이는 전망은 언제나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다리 가운데가 열리도록 개폐형으로 만들어진 타워 브리지는의 다리가 열리는 모습이 장관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지만 이제 자주 볼 수 없게 됐다. 최근 들어 대형 선박이 지나다니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원래 연 6,000회 정도 열렸던 다리가 이제 연 200회 정도밖에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월 일 요일
▣프랑스 : 643,801㎢ 세계43위 약 66,259,012명 세계21위 2조 9,023억$ 세계5위
(1) 프랑크왕국의 건설
서기전 2000년경 북프랑스에 켈트족이 이동해 와 서기전 5∼3세기 사이에는 프랑스·영국·스페인 등을 정복하였다. 부족국가간의 대립으로 서기전 2세기경부터 로마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5세기경 서로마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게르만민족 중의 프랑크인이 세력을 확대,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 1세(Clovis I, 481∼511 재임)가 프랑크왕이 되어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프랑크인 교화에 착수하였다. 그가 죽은 뒤 8세기경에는 카롤링거의 샤를마뉴(Charlemagne)가 뒤에 대제(大帝)가 되었다(768∼814 재임). 그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에 걸치는 왕국을 건설, 그리스도교를 보급하였다. 800년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로 대관되었으나,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 분열되어 843년 베르덩조약으로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로 3분되어 현재와 같은 프랑스의 판도가 정립되었다.
(2) 카페(Capet,H., 987∼996)왕조로부터 대혁명기(1789∼1792)까지
서프랑크에 노르만족이 침입하여 이에 대전한 로베르가의 후손인 카페가 카페왕조를 건설함으로써 프랑스왕국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왕조시대는 봉건제가 성립, 변용하는 시대로서 전체 중세사(中世史)를 통하여 영국과 끊임없이 대립·항쟁을 계속하였으며, 가톨릭교와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1328년에 단절되고 발루아(Valois)왕조가 수립되었다. 이 왕조의 수립과 동시에 영국이 프랑스왕위를 노림으로써 백년전쟁을 겪게 되었으며, 또한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군비·관료제·재정의 정비 등을 이룩하여 국내의 귀족을 억압함으로써 절대왕정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발루아왕조는 16세기 말 신·구교도의 대립·격화·내란으로 결국 앙리 3세(Henri Ⅲ)를 최후로 단절되고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르봉(Bourbon, 1589∼1792)왕조가 시작되었다. 앙리 4세시대에는 종교적 내란이 종식되고 국력을 회복, 해외진출이 현저하였다. 그 뒤를 이어 루이 13세(Louis ⅩⅢ, 1610∼1643 재임)시대에는 귀족과 신교도를 억압, 30년전쟁에 개입, 루이 14세시대에 30년전쟁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끝맺었다. 루이 15세·루이 16세(1774∼1792 재임)시대에는 빈번한 해외원정, 베르사유궁전의 건축, 궁중의 사치생활 등으로 재정의 악화를 가져와 대혁명을 유발하였다. 18세기의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舊體制)에 대해서 신흥시민계급이 도전한 것이 프랑스대혁명인 것이다.
(3) 제1공화정으로부터 제3공화국까지(1792∼1940)
프랑스혁명은 시민혁명이라는 데 정치적 의의가 있다. 절대왕정을 타파하여 봉건제를 일소하고, 입헌의회제와 공화제(제1공화정, 1792∼1802)를 수립하고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였으며,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인간 및 민족의 국제적인 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혁명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나폴레옹(Napoléon,B.)은 군사적 독재를 감행하면서도 혁명의 성과를 보장, 국민의 신망을 얻어 나폴레옹 1세(1804∼1805 재임)로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고 제1공화정은 와해되었다. 그는 혁명전쟁을 계승하여 혁명의 이념과 성과를 유럽대륙에 전파하였으나, 프랑스의 침략성의 노정으로 이른바 나폴레옹전쟁을 야기하게 하여 1815년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 뒤 부르봉왕조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 1814∼1848)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국제적으로 보수파인 빈체제(Wien體制)의 일환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으나 반동적인 성격으로 또다시 혁명을 유발하여 1830년 7월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이어 오를레앙가에 의해 7월왕정이 성립되었으나, 1848년 2월혁명으로 무너지고 제2공화정(1848∼1852)이 수립되었다. 2월혁명은 혁명세력이 시민적 공화파와 사회주의적 공화파로 분열되어 전자가 승리하였으나, 이러한 대립을 이용, 보수파가 그 세력을 만회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와 같은 정세를 이용하여서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éon,B., 1808∼1873)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1851년 쿠데타로 그 지위를 굳히더니, 1852년 나폴레옹 3세로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제2제정(1852∼1870)이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는 산업혁명의 진전, 크림전쟁에의 참가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함으로써 명성을 얻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멕시코원정·보불전쟁에서의 패배로 제2제정은 붕괴되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19세기 말까지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고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대하였다. 1907년 프랑스·영국·러시아의 3국협상체제를 완성하여 독일과 대립하였고,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 참가, 승리하였다. 베르사유조약에 의하여 독일의 약체화와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고자 국제연맹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었다. 독일이 베르사유체제의 타파와 대외침략정책을 계획하자 영국과 같이 유화정책을 채택하였으나 실패, 제2차세계대전을 맞게 되었다.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프랑스정부는 처음에는 투르, 뒤에는 보르도로 수도를 옮겼다. 여기에서 페탱(Pétain,H.P.)이 수상에 지명되고, 22일 휴전협정에 서명, 수도를 비시로 옮겨 독일군이 직접 지배하는 지역 이외의 지역을 통치하는 괴뢰정부화하였다. 이에 앞서 제3공화국 정부가 취한 최후의 행동은 6월 9일 비시에서 열린 양원 합동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비시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제3공화국은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한편, 1940년 6월부터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독항쟁을 계속 주장한 드골(de Gaulle,C.)은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연합군에 의하여 수복된 뒤부터 14개월 동안 임시정부(1944∼1946) 대통령으로 통치, 1945년 11월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1946년 4월 헌법 의결을 거쳐 9월 새 헌법을 의결하였으며, 10월 국민투표의 승인을 얻어 제4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올랑드 대통령
●베르사이유 궁전 : 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 다시 커다란 건물 2동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안뜰을 추가하여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다. 이때 정원 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거울의 방은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다. 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특사를 맞을 때 사용되었으며, 화려한 내부장식을 한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으로 이어진다.
전쟁의 방에는 색조 회반죽으로 된 타원 모양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남쪽에 있는 평화의 방 역시 유럽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거울의 방에서 행해지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구·장식품 등이 많이 없어졌으나 궁전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주요부분은 오늘날 역사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프랑스식 정원의 걸작인 정원에는 루이 14세의 방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 축을 중심으로 꽃밭과 울타리, 분수 등이 있어 주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본 축을 따라 라톤의 분수, 아폴론의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을 배치하였다.
대운하 북쪽 끝에는 이탈리아식 이궁(離宮)인 그랑트리아농(1687년)과 프티트리아농(18세기)이 루이왕조의 장려함과 섬세한 양식으로 세워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루브르박물관 :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시티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에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외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조각 등 수많은 예술품은 오늘날 30만 점가량에 이른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리므로 관심 있는 작품이 있으면 그 위치를 파악해 미리 동선을 짜두는 것이 좋다.
루브르 정문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설치돼 있다.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에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는 건축 당시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로 들어가면 지하에 신설된 나폴레옹 홀로 이어진다. 안내 센터, 매표소, 서점, 물품 보관소, 뮤지엄 숍 등이 있다. 안내 센터에서 한국어 팸플릿을 받아 두도록 하자. 컬러판으로 주요 작품의 위치가 명기되어 있어 크게 도움이 된다. 전시관은 리슐리외(Richelieu)관, 드농(Denon)관, 쉴리(Sully)관으로 나뉜다.
각각의 전시관은 1층에서 3층까지로 이뤄져 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므로 가능한 한 같은 층에서 다른 전시관으로 옮겨 다니며 감상하는 편이 낫다. 반지하층(Entresol)에는 고대 오리엔트·이슬람 미술작품과 이탈리아·스페인·북유럽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프랑스 조각품은 리슐리외(Richelieu)관의 반지하층과 1층에 전시돼 있다. 유리로 이뤄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더욱 입체감 있는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다.
1층(Rez-de-chaussée)에는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 미술품도 전시돼 있다. <밀로의 비너스>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2층(1 er étage)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탈리아·에스파냐·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돼 있는데 앵그르, 다비드, 들라크루아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헬레니즘 조각의 걸작인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2층에 전시돼 있다.
3층(2 éme étage) 역시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놓았다. 2층과 함께 관람객에게 무척 인기 있는 곳으로, 네덜란드·플랑드르·독일의 회화도 전시되어 있다. 렘브란트,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개선문 : 개선문은 그 이름대로, 프랑스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건립되었다. 공사는 1806년에 시작했지만 나폴레옹 1세의 실각, 왕정 복고와 7월 혁명 등 격동의 시내를 거치느라 1836년이 되어서야 완성했다. 나폴레옹 1세는 1821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둬 완성된 개선문을 보지 못했지만, 유해는 1840년에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에 매장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이 개선문 아래에 매장되기도 했다.
개선문은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설계되었는데, 로마 시대에 개선문 아래로 행진하도록 허락된 자는 영웅뿐이었다. 새로운 땅을 정복한 황제와 그 부하들이 개선문 아래로 행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파리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때 4년간의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파리를 해방시킨 샤를 드골 장군이 이 개선문 아래로 당당히 행진했다. 개선문이 여행자에게는 파리의 거리를 장식하는 관광 코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프랑스 전쟁의 역사를 아로새긴 기념할 만한 건축물인 것이다.
●에펠탑 : 프랑스 파리.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약 324m이다. 1889년 3월 31일 준공되었고, 1889년 5월 6일 개관하였다. 이것을 세운 프랑스의 교량기술자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재료로는 프랑스에서 제조된 7,300t의 시멘즈 마르탕 평로강이 사용되었다. 탑에는 3개소에 각각 전망 테라스가 있다. 파리의 경치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완공 당시 모파상과 같은 예술가와 지식인의 비판을 받았으나 그대로 남아 무전탑(無電塔)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55피트의 텔레비전 안테나가 덧붙여져서 텔레비전의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약 40년간 인공 건조물로서는 세계 최고였다.
●세느강 유람선 : 길이 776km. 부르고뉴 ·상파뉴 ·일드프랑스(파리 분지) ·노르망디 등을 거쳐 영국해협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프랑스에서 3번째로 긴 강이다.
월 일 요일
●콩코드광장 :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동쪽은 튈르리 공원에 이어지고 북쪽은 루아얄가(街)를 통해서 마드렌 성당과 마주하며, 서쪽은 샹젤리제거리와 통하고 남쪽에는 센강에 걸린 콩코르드교(橋)가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이집트로부터 기증받은 룩소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분수와 조상(彫像)이 있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명으로 만들어졌으며, A.J.가브리엘이 설계하였다. 중앙에 루이 15세상(像)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부르다가 프랑스혁명 때 루이 15세상이 파괴되고 ‘혁명광장’으로 개칭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1,000여 명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뒤에 다시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개칭되었다.
프랑스 파리 시내에 있는 이 광장은 프랑스혁명 광장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 단두대가 설치되고서 처형된 사람은 1,119명이다. 1794년 말경 공포정치가 끝나고 명칭이 콩코르드 광장으로 바뀌었으며, 이집트의 총독이 루이 필리프 왕에게 3,200년 된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를 증정하여 이 광장에 세워졌다.
●샹제리제 거리 :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거리. 프랑스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부하는 명소이자 파리 시내 최대 번화가이다. 과거에는 들판과 습지에 불과하던 이 지역이 거리로 정비된 것은 17세기 초의 일이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가 '여왕의 산책길'인 튈르리 정원에서 이어지는 센 강을 따라 걷는 산책길을 조성하면서 샹젤리제 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조성으로 유명해진 르 노트르가 가로수를 심고 로터리 등을 만들어 보행 도로로 확장했다. 이윽고 이 아름다운 가로수 거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낙원이라는 의미의 '엘리제'를 따서 샹젤리제(엘리제의 들판이라는 의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려하고 우아한 왕비의 산책로는 화려한 쇼핑과 식도락 구역으로 변모해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나무가 우거진 전체 길이 약 2km, 폭 약 70m의 거리는 르 노트르가 설계한 로터리 '롱 푸앵 데 샹젤리제'를 경계로 동서가 대비를 이루는 독특한 경관을 보여 준다.
로터리 동쪽에는 녹음이 울창한 공원을 중심으로 그랑 팔레, 프티 팔레, 엘리제 궁전 등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화단과 가로수로 둘러싸인 공원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즐겨 보아도 좋다. 반면 로터리 서쪽은 레스토랑, 카페, 영화관, 은행 등이 즐비한 상업 지역이다. 항상 관광객으로 북적이며 파리 시민들도 쇼핑과 외식을 위해 이 지역을 자주 찾는다. 파리 패션의 메카답게 명품 브랜드의 본사와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입구가 보이는 아케이드 거리에는 값싸고 대중적인 상점이 많다.
월 일 요일
▣스위스 : 41,277㎢ 세계136위 8,061,516명 세계95위 6,790억$ 세계20위 스위스연방은 1648년 6월 1일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하여 독립국으로 공인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후인 1815년 강대국들에 의해 영세중립국으로 보장되었다. 1848년 제정된 연방헌법에 의거하여 26개의 주(Canton)로 구성되며, 7명으로 구성된 연방각의가 행정권을 행사한다.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7부 장관이 윤번제로 1년간 겸직한다. 그러나 실질적 권한은 임기 4년의 연방평의회 위원 7인에게 있다. 소마루가 대통령(1960년생)
●뮬하우스 :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계선에 있는 도시
●인터라켄 : 인구 5,500명 관광도시로 베른 남동쪽 26km 지점 툰호(湖)와 브리엔츠호 사이에 위치하며, 지명은 ‘호수의 사이’라는 뜻이다. 베른알프스산맥의 연봉(連峰)을 바라보는 경승지로 1128년경 건설된 이래 세계적 피서지·등산기지를 이루고, 섬유·고무·시계·리큐어 공업이 활발하다. 베른알프스의 융프라우 산괴의 북쪽 기슭에 있으나, 백류트시네강(江)·흑류트시네강이 아레강과 합류하는 요지에 위치한다. 곡구취락(谷口聚落)으로서 핀스터아어호른 산괴에 이르는 등산기지로서 발달하였다. 흑류트시네강 상류의 높이 1,000m의 그린델발트에 등산전차가 통하고 다시 그 곳에서 3,474m의 융프라우요흐에 등산전철이 통한다
●융프라우 :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융프라우는 인터라켄의 명물이자 인터라켄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높이가 3,454m에 달하는 융프라우요흐는 눈 덮인 산봉우리와 아름다운 설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융프라우요흐는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뜻으로 가장 높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는 교통수단인 톱니바퀴 기차도 명물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 최정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반짝이는 눈 속의 얼음 궁전,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인 알레치 빙하가 있다. 여름이면 푸른 초원으로 변한다.
●얼음궁전 : 얼음궁전은 융프라우요흐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다. 빙하 30m 아래에 위치하며, 거대한 얼음의 강에 동굴을 뚫어서 만든 곳이다. 다양한 얼음조각들을 전시하고 있다.
●스핑크스 테라스 :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인 알레치 빙하는 융프라우요흐역에서 남쪽으로 아래에 위치한 스핑크스 테라스에서 볼 수 있다. 테라스에서 서면 발 밑에 끝없이 펼쳐진 만년설의 거대한 얼음 강이 보인다. 1천만 년 전에 형성된 알레치 빙하는 현재 원래 넓이의 1/3로 압축되었고, 지구 온난화에 따라 점점 그 크기가 줄어들고 있어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다.
월 일 요일
●루가노 : 인구 5만 명, 이탈리아의 밀라노 북쪽 약 83km, 루가노호반에 위치하며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피서지로서 널리 알려졌다. 섬유·제재·인쇄업 외에 피혁제품·초콜릿·비스킷 등의 제조도 성하다. 주민의 대부분이 이탈리아계로, 정치적으로는 1512년 이래 스위스에 속했으나, 건물과 생활양식은 이탈리아적인 데가 많다. 13세기에 창건된 산로렌초 성당 및 1499년 창건된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있다. 특히 이곳은 남알프스의 관광 중심지로 봄부터 가을에 걸쳐 관광객이 많으며 대안(對岸)의 캄피오네는 이탈리아의 비지(飛地)로 이탈리아 국영 4대 카지노 중의 하나가 있다.
●루가노 호수 : 마을이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간드리아는 유람선을 타고 마주하면 더욱 탐스럽다. 간드리아는 티치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도 손꼽히는 곳이다. 간드리아의 집들은 예전 치즈, 올리브 등을 직접 만들고 재배하던 터전이었다. 언덕에서 가옥들을 거쳐 호수로 이어지는 비탈길과 골목에는 기념품가게와 앙증맞은 레스토랑들이 호수를 바라보고 들어서 있다. 간드리아는 루가노 호수의 마을 중 가장 빼어난 풍광과 정취를 자랑한다. 간드리아에는 올리브의 흔적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미로를 따라 이어진 계단 하나, 낙서하나에도 정감이 간다. 육로가 완전히 단절됐던 예전에는 이곳 주민들은 인근 루가노까지 배를 타고 식량을 구해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현지 주민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옛 가옥들은 별장이나 상가로 이용되고 있다. 루가노 호수를 언급하면서 또 헤르만 헤세를 빼놓을 수는 없다. 소설가이자 시인, 화가로도 활동했던 헤세는 루가노 호숫가의 몬타뇰라(Montagnola)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40여 년을 머물던 집에는 따뜻한 수채화들이 전시돼 있다. 호수에서 도심으로의 귀환을 반기는 것은 리포르마 광장(Piazza Riforma)이다. 오래된 윤곽의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 한 편에서는 시청사와 노천카페를 배경으로 이벤트가 펼쳐지고 떠들썩한 시장이 들어선다. 광장시장은 꽃, 야채, 과일들을 좌판대에 늘어놓으며 따사로운 도시의 단상을 더욱 짙게 채색한다. 부티크 상점이 들어선 낫사 거리, 식료품가게가 즐비한 펫시나 거리 등 루가노의 시장들만 활보해도 흥미롭다. 도심 대부분의 명소들은 걸어서 닿는 편리한 동선이다.
광장 마켓에서 펫시나 거리로 이어지는 시장 골목에서는 다양한 식료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골목의 식당들 또한 스위스 중부에서 전해졌던 투박함과는 다른 향을 뿜어낸다. 치즈가 곁들여진 파스타, 올리브가 듬뿍 얹어진 피자 가게가 유독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이곳에서 희한한 일도 아니다. 건물 담벼락마다 내걸린 붉은 색 국기만 아니었다면, 루가노가 스위스인가 하는 의혹의 잔상에서 헤어나기란 쉽지 않다. 루가노에서 산살바토레(San Salvatore) 산과 브레(Brè) 산으로 오르는 다양한 하이킹 루트 역시 도시의 여유로움을 부추긴다. 하이킹은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는 호수를 등지고 단조롭고도 유쾌하게 진행된다.
●쇼핑거리 : 루가노의 쇼핑거리를 말한다. 500여 미터
▣이탈리아 : 301,340㎢ 세계72위 61,680,122명 세계23위 2조 1,293억$ 세계8위 이탈리아의 역사는 서기전 7세기경 이 지역에 살았던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Etruria)인의 세계까지 올라가지만, 로마에 의한 역사는 이탈리아반도의 통일 시기인 기원전 270년경부터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395년 동서로 분열되었으며,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그 뒤 중세 교황시대에는 동방무역으로 여러 도시가 번영했으나, ‘신대륙의 발견’ 이후 16세기부터는 주위의 여러 세력에 의해 반도가 분열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침체되었다. 그 후 19세기 초엽에 분열되었던 도시국가들이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에 병합되면서 통일운동이 일어났으며,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고, 1871년 수도를 로마로 옮기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체제상으로는 입헌군주제였으며, 1913년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세력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등장, 1929년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한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성립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패함으로써 1946년 6월 총선이 실시되었으며, 새 헌법에 의한 공화제가 1948년 1월부터 출범하였다. 1955년 12월 유엔에 가입했으며, 정체는 공화제이다. 마테오 렌치 총리(1975년생)
●이태리 꼬모호수 및 꼬모 시내관광 : 면적은 146 km²이며, 이탈리아에서 3번째로 넓은 호수. 로마시대 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았고, 현재도 예술가 등의 자주 찾는 인기 있는 곳이다
●프랑스 니스의 에즈마을 : 700m 해안절벽 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에즈는 남프랑스 마을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니스와 모나코 왕국 중간쯤에 위치한 에즈는 지중해를 품고 있지만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독수리의 둥지'로 묘사되곤 한다.
높고 험준한 바위산 위에 중세 시대의 흔적을 품은 채 촘촘히 모여 있는 집들과 아름다운 전망은 이 규모가 작은 마을을 많은 여행객들이 발걸음하는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특히 마을 정상에 자리잡은 '열대 정원'에서는 독특한 식물들과 함께 에메랄드 빛 지중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찾는 수고
를 마다하지 않게 만든다.
에즈의 열대 정원에서 내려와 옛 성곽을 따라 산책 하다보면 중세 유럽을 거니는 느낌이 들고 왜 에즈가 '지중해의 정원'이라 불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더불어 마을 골목 사이사이에 있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샵과 갤러리에서 에즈의 정취가 드러나는 수공예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에즈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인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이곳에 머물면서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에즈에서 해변 간이 기차역까지 이어지는 산비탈길은 '니체의 산책길'이라 이름 붙어 있다.
니스에서 버스로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중세마을 에즈는 지중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한 마을로 중세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신비롭다.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작은 마을이지만 중세시대 지어진 요새를 정원으로 꾸민 에즈의 정원에서 바라보는 지중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절경이다. 돌로 지은 구 가옥들과 돌담길 등을 둘러보아도 좋고 중세풍의 호텔에 머물며 에즈의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 것도 좋다.
월 일 요일
●니스 : 인구 40만. 모나코 공국 및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지중해의 항만도시로 '리비에라(Riviera)' 혹은 '코트다쥐르(Cote d'Azur)'라고도 불리는 지중해 연안에 있다. 연평균 15℃의 기온을 유지할 만큼 기후가 연중 고르게 온난하다. 별장·호텔·정원·산책지·카지노 등 위락시설이 정비되어 있고, 인접한 모나코·칸과 마찬가지로 각종 행사가 열린다. 화가들의 별장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마티스미술관과 샤갈미술관이 있다. 해변가를 따라 3.5km 길이로 '프롬나드 데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 '영국인의 산책로'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라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특산물로 꽃·향수·올리브 등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인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가 태어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니스해변 등 시내 관광 후
▣모나코 : 1.95km² (233 위) 약 35,656명
모나코는 1297년부터 지금까지 그리말디 가문이 통치하고 있다. 이 나라는 영토 문제로 1701년부터 군 보유를 포기하였고 지금까지도 국방권은 프랑스에 위임되어 있다. 1861년 프랑스-모나코 조약으로 주권이 인정되었다. 1918년에는 모나코 대공위를 더는 계승할 사람이 없을 때 마지막 대공(大公)이 죽고서 프랑스에 합병된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에 점령되었고 곧이어 나치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레니에 3세가 1949년에서 2005년까지 56년간 재위하였고 그 사람의 뒤를 이어 알베르 2세가 즉위했다. 모나코의 국가 원수는 모나코 대공(大公:Prince)이다. 모나코의 헌법은 생물학자이기도 했던 알베르 1세에 의하여 1911년에 제정되었다. 행정부의 長(총리)은 5명의 행정위원회(Council of Government)를 이끄는 국무장관인데, 2002년까지는 프랑스 정부가 추천한 프랑스인이 임명되었다. 현재는 국무장관직에는 프랑스인과 모나코인을 임명할 수 있다.
●모나코 대성당 : 모나코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de Monaco)은 모나코에 있는 대성당으로, 그레이스 켈리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며 에즈의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 것도 좋다.
월 일 요일
●제노바 :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C.콜럼버스, 음악가 N.파가니니, 이탈리아 통일운동 때의 공화주의자 G.마치니 등의 출신지로서 알려져 있다. 16세기에 건축된 시청사(콜럼버스의 편지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이 보존되어 있음), 12세기의 성(聖)로렌초 성당, 흰 궁전(16세기), 붉은 궁전(17세기) 등을 비롯한 많은 옛 건조물과 대학·미술학교·카를로페리체 극장·곡물거래소 등이 있다.
기원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으나, BC 7세기경부터 리구리아인(人)의 항구도시로서 알려졌으며, 11세기에는 상인과 귀족의 단결로 자치도시를 형성하였다. 십자군원정 무렵부터 협력하여 동(東)지중해와 중동에 진출하였으며,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2∼13세기에는 많은 해외식민지를 획득하고, 상업·금융업·해군력 등으로 지중해의 일대세력이 되었으며, 내륙에도 영토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1380년의 키오지아해전에서 베네치아에 패배한 뒤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내정의 혼란으로 밀라노공(公)과 프랑스 왕 등의 지배를 받다가 1528년에 카를 5세의 원조를 얻어 다시 자립하였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진출로 해외의 근거지를 차례로 상실하였으며, 1768년에는 마지막 식민지인 코르시카섬을 프랑스에 양도하였다. 이처럼 원격지(遠隔地) 교역이 쇠퇴한 후에도 제노바의 상인 자본은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797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리구리아 공화국으로 개조되었다가 프랑스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빈회의(1815) 후부터 사르데냐 왕국에 편입되었다.
●피사 : 아르노강(江)의 퇴적작용으로 인하여 현재의 해안선은 피사시(市)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항만도시로서의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여,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아르노강 하구 부근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도로·철도 등 교통의 요지이며 기계공업을 비롯한 많은 근대공업, 대리석 가공업 등이 성하다. 주변 농업지대에서는 포도·올리브·곡물 등의 재배와 목축이 활발하다. 피사 대성당에 부속된 사탑은 갈릴레이의 이름과 더불어 유명하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피사의 사탑[斜塔 기운 탑]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州) 피사시(市)의 피사 대성당에 있는 종탑으로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하다.
피사대성당 동쪽에 있다.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는 58.36m이며 무게는 1만 4453t으로 추정된다. 2008년 현재 기울기의 각도는 중심축으로부터 약 5.5˚이다. 294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연결된다.
1173년 착공되어 1372년까지 3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1173년에서 1178년 사이에 진행된 1차 공사 이후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기울어짐이 발견되었다. 그 뒤 2차 공사에서 이를 수정하여 다시 건설하였으나 기우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1990년 이탈리아 정부는 경사각을 수정하기 위한 보수공사를 착수하여 10년에 걸쳐 보수작업을 진행한 결과로 기울어짐 현상은 5.5˚에서 멈춘 상태이다. 2001년 6월 일반에 다시 공개하였으나 보존을 위해 입장객의 수를 제한하고 있다.
갈릴레이는 이곳에서 무게가 다른 두개의 공(1파운드, 10파운드)을 떨어뜨리는 낙하실험을 통해 지표면 위의 같은 높이에서 자유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과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는 낙체법칙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는 일화(逸話)가 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실험은 1586년 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인 시몬 스테빈(Simon Stevin)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사 두오모 광장 :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에 위치한 피사는 갈릴레이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기적의 광장'이라 불리는 두오모 광장은 10세기부터 약 50년에 걸쳐 대성당과 세례당, 종탑, 묘지 등이 완공되었다. 광장의 명물인 성당의 종탑은 1173년에 건축을 시작한 뒤 지반 침하로 공사를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1350년에 완공되어 오늘날 피사의 상징이 되었다.
●미니밴 투어(옵션) :
월 일 요일
●로마 : 인구 300만.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BC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테베레강 하구에서 우안의 홍적층 대지와 좌안의 알바노 화산군의 용암에 의해 좁아지고 있는 지점(현재의 티베리나섬 부근)까지 작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고, 그보다 좀더 상류에는 아펜니노의 구릉지대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였던 아니에네강이 합류하였다. 바로 이곳은 에트루리아·라틴·사비누스의 3종족이 접하는 곳이기도 하며, 그러한 교통의 요소에 시장도시로서 기원한 것이 바로 로마였다.
그뒤 로마는 한때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시벽(市壁)을 갖춘 도시로 발달했다고 한다. BC 6세기 말에는 에트루리아계(系)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盟主)가 되어 고대 로마 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현재 ‘종착역(테르미니)’ 부근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세르비우스 왕의 시벽은 BC 4세기의 것으로, 이 무렵부터 로마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국가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 270년경 제정로마 시대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축조한 시벽은 주위 46km에 이르며, 현재 그 대부분이 남아 있다. 그러나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 왕을 폐위하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여 산피에트로대성당과 개선문을 세운 무렵부터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밀라노와 라벤나로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옮겨졌으며, 이후 중세에 걸쳐서 로마는 산피에트로대성당을 갖는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성립으로 로마는 형식적으로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역대 황제는 대관 때문에 로마로 오게 되었으나, 로마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충돌하는 무대를 이루게 되었다. 12세기가 되자 로마·라쵸의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코무네가 성립되었고, 황제의 지지를 얻어 교황과 자주 대립하였으나, 로마의 코무네는 북이탈리아·중부이탈리아의 코무네처럼 강력한 경제적 기초는 없었고 여전히 산피에트로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종교도시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아비뇽에 교황이 옮겨가 있던 14세기는 로마가 가장 침체했던 시기로 1348년 페스트가 유행했던 무렵에는 인구가 2만도 안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16세기에는 식스토 4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오 2세 및 레오 10세 등의 르네상스 교황이 등장하여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고, 그들의 학예보호 시책에 따라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이 시대에는 테베레강의 좌안, 바티칸의 대안 부분에 대규모의 도시계획이 이루어져 현재까지 남아 있는 로마 구시가의 기본적인 형태가 만들어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일어났던 ‘로마의 약탈’(1527) 때문에 일시적 중단은 있었으나,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으로서 로마의 발전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바로크시대까지 계속되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궁전과 광장이 건설되었다.
이와 같이 ‘교황의 도시 로마’로서, 또 중부이탈리아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교황국가의 수도로서 존재해온 로마는 19세기 이래 공화주의운동과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1849년에는 마치니·가리발디 등의 지도를 받는 시민 공화체제를 붕괴시키고, 다시 1861년 이탈리아왕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로마와 그 주변을 계속 지배했으며,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는 처음에는 토리노, 다음에는 피렌체에 두었다. 로마가 이탈리아왕국군에게 점령된 것은 1870년에 이르러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문에 로마를 방비했던 프랑스군이 허술해졌을 때이다.
이듬해인 1871년 로마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이에 화가 난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들어앉아 스스로 ‘바티칸의 죄수’라고 칭하며 이탈리아왕국과 대립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로마 문제였는데,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고 바티칸시국이 성립되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의 특수한 지위 등이 인정되었을 때부터였다. 로마의 도시로서의 발전은 통일 이탈리아 국가의 수도가 된 뒤 급진적으로 이루어져서 1871년 22만이었던 인구가 1900년에는 40만, 1936년에는 115만에 이르렀고, 그것이 다음 30년 동안에 배로 증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군의 폭격을 당하였으나, 연합군이 북상할 때는 무방비도시를 선언해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중한 문화재가 전화로 파괴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바티칸 시국 : 0.44㎢ 세계252위, 로마교황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는 바티칸시국은 1929년 2월 로마의 산 조반니인라테라노대성당에서 이탈리아와 교황청 사이에 교환된 라테란협정에 따라 성립되었다. 현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1936년생 제266대)
●바티칸 박물관 :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收藏)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 《아포크슈오메노스》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베데레의 토르소》 《라오콘》, 고대 회화에 《오디세우스 이야기》 《아르드브란디니가(家)의 혼례도》, 중세 회화에 《웨르기리우스사본(寫本)》 《여호수아기(記)》, 그리고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성체의 논의》 《아테네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聖)히에로니무스》,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과 역사적인 고문서 ·공문서류도 소장되어 있다
●성 베드로 성당 : 권력을 내뿜는 건축물이 있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톨릭 교회 그 자체도 아니다. 가톨릭의 진원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 국가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은 우아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미켈란젤로는 156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건물에 매달렸으며, 그 뒤 1593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마침내 완공되었다. 관광객들은 일단 132.5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는 등을 둘러싼 외부 갤러리로 오르게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로마가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그야말로 굉장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바실리카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네이브는 그 길이가 211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베르니니의 바로크풍 실내는 수많은 신성한 걸작들로 가득하며 제단 위에 드리운 발다친 혹은 휘장(1633년)은 정말로 멋지다.
성 베드로의 의자(1666년)는 베르니니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제작한 작품이자 하이 바로크 예술의 축도이다.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인 동쪽 면은 다소 딱딱하고 엄숙하지만 중앙 발코니에서 교황이 강론과 축복을 내리는 배경으로는 잘 어울린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산 피에트로 광장은, 로마는 완전히 배제하는 동시에 광장을 에워싼 열주(1656년에서 1667년 사이에 세워졌다)로 신앙심 깊은 순례객들을 끌어안는 '열쇠구멍' 설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천재의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 깊이가 1.2미터인 열주는 몇 겹으로 늘어선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로는 바로크풍 인물상들이 서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기원전 1년에 이집트에서 한 덩이리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기둥이 서 있는데, 1585년 이곳에 세워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어머어마한 규모, 엄숙한 구성, 그리고 강력한 권위는 세계 곳곳의 대형 교회와 정부 건물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스티나 예배당 : 로마, 바티칸 궁전내에 있는 예배당(⇒채플). 1473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위 1471~1484)의 명으로 조반니 ∙ 데 ∙ 돌치(Giovanni de Dolci)에 의해 건조됨. 반원통 볼트로 덮인 장방형건물로 천정과 벽의 장식이 유명. 좌우의 벽은 보티첼리, 핀토리키오, 페루지노, 로셀리, 시뇨렐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손에서 이룩된 『구약성서』의 이야기 벽화(1481~83)로 장식되고, 천정의 『창세기 이야기』(1508~12)와 정면 안쪽 벽의 『최후의 심판』(1534~41)은 미켈란젤로의 걸작. 현재 콘크라베(教皇選擧)에 사용됨.
●콜로세움 전경 :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Colosseum)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글라디아토르(劍鬪士)의 시합과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한편,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로는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外壁)은 높이 48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式)·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원주(圓柱)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트레비 분수 :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 G.L.베르니니의 원안(原案)에 따랐다고 하는 N.살비 설계의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하여 살비 사후인 1762년에 완성하였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像)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巨岩巨石)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 속신(俗信)이 있다.
●베네치아 광장 :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광장 북쪽으로는 코르소 거리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이다. 그의 기념관은 현재 통일기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로마 대사관 역할을 하던 베네치아 궁전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 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무실로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르네상스 예술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 광장과 계단 : 17세기에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유명해졌으며 이탈리아 사람들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계단에 철쭉꽃이 심어져 꽃이 피는 시기에는 적색, 분홍색 꽃들이 만발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Chiesa della Trinita dei Monti)가 있다. 스페인 계단은 17세기에 트리니타 데이 몬티의 프랑스인 주민들이 교회와 스페인 광장을 계단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광장 중앙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가 설계한 바르카치아 분수가 있다. 물에 반쯤 잠겨 있는 물이 새는 배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이다. 바르카치아는 '쓸모 없는 오래된 배'를 의미한다.
스페인 계단은 오랫동안 부유한 이들, 미인들, 보헤미안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18세기와 19세기에 이들은 화가의 모델로 선정되기를 바라며 계단에 이끌려 왔던 것이다. 계단 맞은편에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가 폐결핵과 싸우며 인생의 마지막 몇 달을 보냈던 집이 있다.
계단 바닥에는 보트 모양의 '폰타나 델라 바르카치아'(오래된 보트의 분수)가 있는데, 이는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잔로렌초 베르니니의 아버지인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디자인한 작품이라 믿어진다. 이 분수는 1588년 테베레 강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실어 나르는 데에 사용되던 작고 바닥이 평평한 보트가 물이 빠진 뒤 그 자리에서 발견되었던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빅토리아 엠마누엘 기념관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국립 기념관이다. 1885년 건축가 쥬세페 사코니(Giuseppe Sacconi)의 설계로 1911년 완공된 이 기념관은 통일된 이탈리아의 첫 번째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건축물은 독특한 외형 때문에 ‘타자기 건물’ 또는 ‘웨딩케이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기념관을 장식한 조각품들은 1935년에야 완성되었다. 건물과 계단, 거대한 에마누엘레의 기마상, 전차(戰車)에 탄 두 빅토리아 여신상 등 모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기념관 아래층은 '이탈리아 통일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 박물관은 1차 세계대전 때 숨진 무명용사들의 묘와 통일운동에 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포로 로마노 :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이 시민생활의 중심지로 생각하던 신전과 공회당 등 공공 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는 곳이다.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는 한때 원주민들이 수장 묘지로 사용하던 늪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왕 타르퀴노 프리스코가 하수처리장을 시설하고 이 늪을 메워버리자 이후 도시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장소가 되었다. 19세기에 발굴되기 이전에는 가축 방목지로 사용되었기에 '우시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발굴작업이 괄목할 정도로 진행된 다음 이 공회장은 엄청난 신전과 공공건물, 그리고 아치형 건물과 상점이 나란히 이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회장(Foro)은 신전, 바실리카(공회당), 기념비 등의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 공간으로 공공생활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었다. 나중에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약 1,000년 동안 로마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다. 283년 화재로 파괴된 후 복구되긴 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이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기도 했다. 그 후 1871년에 발굴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한때는 막강했던 위엄 있는 건물들이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 옛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되새겨볼 수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을 통과해 계단을 올라가면 왼편에 세나토리오 궁(Palazzo Senatorio)이 있다. 이곳 테라스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 전경은 일품이다. 직진하면 캄피돌리오 광장이 나온다. 여유가 되면 바티칸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과 폐허가 된 현재의 모습을 비교한 그림 책자를 참조하면서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티투스 황제 개선문(Arco di Tito)은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유적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의 형인 티투스 황제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대 예루살렘 전투 승전(70년)을 기념하며 81년에 세운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개선문의 내벽에는 로마군의 전쟁 장면과 쌍두마차를 타고 개선하는 티투스의 모습이 아름답게 부조되어 있다. 개선문 꼭대기에는 라틴어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티투스에게 바친다'라고 쓰여 있다. 티투스 황제 개선문을 지나 사크라 거리 오른편에는 아치 모양의 건물인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di Massenzio)가 보인다. 이 공회당은 막센티우스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했지만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완성되었다. 훗날 브라만테가 이 건축물을 토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했다고 한다.
막센티우스 황제의 바실리카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Templum Divi Antonini et Divae Faustinae)이 있다. 141년 안토니우스 황제가 죽은 황후 파우스티나를 위해 만든 신전으로, 황제 자신도 사후에 이곳에 매장되었다. 기독교 시대에는 미란다의 산 로렌초로 옮겨졌었다.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은 로마제국에서 약 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성화를 숭배하는 신앙의 전당으로서 매우 신성한 장소였다. 원형 평면으로 된 유적으로 이 신전에는 미네르바 여신의 형상과 로마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성화가 모셔져 있는데, 성화가 꺼지면 흉조라 여겨졌다. 귀족 가문에서 선발된 7~8세의 처녀들이 30년간 순결을 지키며 이 성스러운 업무를 헌신해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처녀 제관들은 순결을 잃는 경우 생매장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신전 뒤에는 191년에 마지막으로 고쳐서 세운 처녀 제관들의 집 유적이 남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보이는 붉은 벽돌의 큰 건물은 원로원(Curia)이다. 성당 부분을 복원한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입법 자문기관으로 정치와 외교를 지도했다. 로마 공회장 유적지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기원전 67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로원 제도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오래 유지되었던 정치 형태였다. 이 원로원에서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되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원로원 건물 앞의 광장은 '코미티움(Comitium)'이라 하여 시민들이 모여 집정관을 선출하던 곳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10년 통치를 치하하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의 파르티아, 아라비아, 아시리아 등지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과 시민들이 203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 새겨진 신들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에 전 유럽에 전해졌다.
월 일 요일
●폼페이 :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 내렸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폼페이 유적지 : 당시의 분화상황은 소(小)플리니우스가 실감 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財寶)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쏘렌토 : 인구 2만, 나폴리만(灣)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하며, 살레르노에서 35㎞ 떨어진 지점으로, 배후에 오렌지·레몬·포도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이 펼쳐진 산지를 등진 경승지로,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나폴리 민요로 알려진 곳이다. 포도주·올리브유가 생산된다.
♣Torna A Surriento (돌아오라 소렌토로)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여ㅡ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그리스인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는 수렌툼이라는 휴양지였다. 7세기에는 자치 공작령의 수도였으며, 1137년에 노르만족(族)에 정복당해 시칠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거리의 중심은 타소 광장(廣場)이며, 1544년 이곳에서 태어난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의 기념비가 있다. 시내에는 15세기에 재건된 성당이 있고, 14세기에 건축된 아름다운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캄파니아의 장식미술품, 중세의 조각·그림 및 고전양식의 유물 등이 소장되어 있는 코레알레디테라노바 박물관이 있다. 나폴리와의 사이에는 열차 및 연락선이 왕래하고, 나폴리만의 또 하나의 관광지인 카프리섬과도 연락선이 왕래한다. 거리 주변에는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이 많다.
●나 폴 리 : 인구 100만, 영어명은 네이플스(Naples)라고 한다. 로마·밀라노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만(灣) 안쪽에 있는 천연의 양항으로, 배후는 베수비오 화산(높이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 활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18세기 말 부르봉 왕조 지배하의 나폴리는 인구 40만을 헤아려 이탈리아반도 최대의 도시였다. 1860∼1861년 G.가리발디에게 정복되어 양(兩)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서의 시대는 끝났으나, 그후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이탈리아의 중심도시로서 근대공업의 발전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가장 앞서 있다. 나폴리항은 제노바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2의 상항(商港)인데, 이 항구가 1924년에 확장되고부터 현대 나폴리의 발전이 비롯되었다. 공업은 서쪽 포지리포 지구 및 남동 해안을 따라서 발전하고 주택지구도 교외에 부단히 발전해 갔으나, 남부 각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인구에 의한 빈민문제 등 사회문제도 심각하다.
●산타루치아 : 나폴리항의 한 마을. 베수비오산이 보인다.
●카프리 섬(옵션) : 주도(州都)이자 현 중심지인 나폴리(Napoli)로부터 남쪽으로 32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나폴리만의 카프리섬(Isola di Capri)에 자리잡고 있다. 평균 고도 142m에 위치하며, 지중해성 기후에 속한다. 소렌토(Sorrento)등의 도시에서 왕복 페리가 운항한다. 주요 건축물로는 산 콘스탄초 성당(Chiesa di San Costanzo)과 산토 스테파노 성당(Chiesa di Santo Stefano)이 있다. 해안 절벽과 지중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 Santa Lucia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싼타 루치아, 싼타 루치아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싼타 루치아, 싼타 루치아
월 일 요일
●피렌체 : 인구 40만.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강(江)의 양안(兩岸),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근교의 아르노강 연변의 저지는 신흥공업지대로 상공업의 중심을 이룬다.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역사는 BC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도시로서의 발전은 BC 2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街道)의 중심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와 일치하며 폰트베키오(다리)의 우안(右岸)에 해당한다.
제정(帝政)시대에는 토스카나·움브리아의 중심이 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는 백작령(伯爵領)의 중심이 되었으나, 11세기 후반 마틸데의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停滯)상태였다. 마틸데 사망 후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서 독립하고 좌안의 보루고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하였다.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나 귀금속상인이 각기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피렌체는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황당(敎皇黨:겔프)과 황제당(皇帝黨:기벨린)과의 싸움이 피렌체시(市)뿐만 아니라 전(全)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는 전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 1300년에 비롯된 백당(白黨)과 흑당(黑黨)은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家)가 시정(市政)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 및 손자인 대(大)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어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인구는 10만 이하에 머물렀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고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1944년 8월에는 영국·독일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었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 두오모로 잘 알려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피렌체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높고 웅장하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
●베키오 다리 : 아르노강 위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45년에 건설되었으며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 알려져 있다. 1944년 연합군의 추격을 받던 독일군이 강 양쪽 기슭의 집을 모두 파괴했으나 베키오 다리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원래 이 다리에는 푸줏간, 대장간, 가죽 처리장 등이 있었는데 1593년에 페르디난도 1세가 시끄럽고 악취가 난다며 모두 추방하였고 대신 금세공업자들이 다리 위의 상점에 세들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베키오 다리의 금세공 상점들은 다양한 보석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판매하는 수공예 제품들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단테교회 : 두오모와 함께 꼭 방문해야 할 곳은 산타 크로체 교회이다. 산타 크로체 광장에 면한 소박한 고딕 양식의 이 교회는 칸비오 설계에 의해 1294년에 세워진 흰색 건물이다. 이 교회에는 많은 음악가, 문호, 조각가 등의 묘 또는 영묘가 있다. 피렌체 사람들은 이 교회에 묻히는 것을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단테(1265-1321)와 동렬에 오르는 것이라 생각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남쪽 첫 기둥 가까이에 단테의 영묘가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라벤나의 산 프란체스카 교회에 묻힌 그의 유골은 라벤나 측의 거부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은 단테의 영혼만큼은 이 영묘에 있다고 믿고 있다. 1839년 리치의 작품이다.
다섯 번째 기둥이 있는 곳에 로시니(1792-1868)의 묘가 있다. 1792년 아드리아 해에 면한 항구 도시 페사로의 두오모 가에서 태어나 1868년 파리 교외에서 세상을 떠난 로시니는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는데, 유언에 따라 1887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로시니의 작품들 가운데 피렌체에서 초연된 것은 한 곡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로시니는 토스카나 대공이 자신을 피렌체에 초청해 최고의 예를 갖추어 접대한 것에 감동하여 타향임에도 항상 예술의 도시 피렌체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로시니 묘 가까이에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 면에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1475-1564), 정치 철학자 마키아벨리(1469-1527)의 묘도 바로 이곳에 있다. 제단에 있는 조토의 프레스코화와 스텐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 교회 오른쪽에 박물관이 있고 그 정면에 세례당이 있는데, 이 세례당은 피사의 것과 같이 잔음이 길게 남아 도·미·솔을 부르면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어 울려온다.
●시뇨리아 광장 :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장소이다. 광장 부근 베키오 궁전에 있는 종루의 종은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 모으는 데 사용되었다.
광장에는 피렌체를 일으킨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의 동상이 있고,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동상 《다비드》의 모조품과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의 청동상인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잠볼로냐의 《사빈 여인의 강간》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처형지임을 알리는 화강암이 서 있다.
월 일 요일
●베니스(베네치아) : 인구 30만. 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灣) 안쪽의 석호(潟湖: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의 사주(砂洲)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0세기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S자형의 대운하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출구 쪽의 운하 기슭에 장대한 산마르코 광장(廣場)이 자리한 기본적인 도시형태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궁전 등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5개의 원형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풍(風) 또는 오리엔트풍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十字軍)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 16세기 이후, 투르크인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이 약화되고, 따라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늘날의 베네토주의 풍요한 농업지대의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시경제의 쇠퇴와 페스트의 유행으로 16세기에는 인구가 10만으로 감소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에 점령되기까지 반 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베니스의 상인(세익스피어;1564-1616)1596년경의 작품. 1600년에 초판. 이탈리아의 옛날 이야기에서 취재한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로부터 벨몬트에 사는 포샤에게 구혼하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가지고 있는 배를 담보로 하여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그리고 돈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자기의 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증서를 써 준다. 포샤는 구혼자들에게 금·은·납의 세 가지 상자를 내놓고 자기의 초상이 들어 있는 것을 선택하게 하였다. 바사니오는 납으로 된 상자를 골라 잡아 구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배가 돌아오지 않아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남장을 한 포샤가 베니스 법정의 재판관이 되어,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샤일록은 패소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후 안토니오의 배는 돌아오고 샤일록의 딸 제시카도 애인 로렌조와 결혼한다. 로맨틱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감미로운 장면이 풍부한 희극이지만, 당시 런던 시민이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반유대 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극에서 샤일록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오히려 비극적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탄식의 다리 : 두칼레 궁전과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나 있는 감옥을 잇는 다리이다. 1600년부터 1603년까지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10인의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죄인들은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했다고 한다. 다리로 이어지는 감옥은 조반니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두칼레 궁전 : 산 마르코 광장에 면해 있는 궁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주거지이자 공화국 정부 건물이다. 9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확장되었다.
●산 마르코 광장 : 베네치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며,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 불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 테오도르상이 있고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1720년에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은 과거 바이런(1788-1824), 괴테(1749-1832), 바그너(1813-1883) 등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산 마르코 성당 : 2명의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성마르코 유골의 납골당(納骨堂)으로 세워진 것(829~832)이다. 그 후 성마르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이 되었다. 11세기 말에 현재의 산마르코성당이 재건되었는데 이 재건공사에 롬바르디아의 건축가와 석공(石工)이 상부구조(上部構造) 건축에 참가했다.
산마르코성당의 건축양식은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십자형(十字形)의 바실리카로 다섯 개의 동방적(東方的)인 돔을 받치고 있으며, 파꽃형[蔥花形]의 아치와 고딕풍의 천개(天蓋)가 이어진 정면(파사드)을 가지고 있고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으로 황금빛의 배경을 지닌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무라노 유리공장 : 무라노 섬은 베네치아 글라스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명소이다. 10세기 이후부터 베네치아의 사람들은 유리나 크리스탈을 만들어 왔다. 유리 세공업이 베네치아의 주요한 수익창출 수단으로 떠올랐고 13세기에 유리 세공업은 무라노 섬으로 이전하였다. 수공예로 만든 유리 세공품들은 유럽 및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베네치아로 모으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특히 무라노 섬의 유리 세공 공장에 가면 직접 입으로 유리를 불어 성형하는 공정을 볼 수 있다.
●리알토 다리 : "베네치아에서는 리알토 다리(Rialto Bridge)를 보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다리이다. 예전부터 리알토 다리 주변은 상권의 중심가였다. 12세기 경, 넘쳐나는 상품들과 한쪽 둑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배가 감당하지 못하자 다리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16세기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다리 없이 나무 다리를 임시로 사용하다가, 1591년 안토니오 다 폰테가 돌로 된 최초의 다리를 설계·건축하였는데 그 다리가 바로 리알토 다리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지어지기 전까지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곤돌라(옵션)
●수상택시(옵션)
▣오스트리아 : 83,871㎢ 세계114위 약 8,223,062명 세계94위) 4,361억$ 세계28위 유럽 대륙 중앙에 있는 내륙국으로,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되면서 오스트리아제국이 성립되었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1918년 제정(帝政)의 폐지로 공화국이 되었다. 1919년 빈조약으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가 이 나라에서 독립되면서 현재의 국경선이 결정되어 게르만민족만의 국가가 되었다. 1920년 헌법을 제정하였고, 1955년 10월 개정한 바 있다. 1939년 독일과 통합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1955년 영세중립선언으로 독립하였다. 피셔대통령
●인스부르크 : 인구 12만. 인스브루크라는 이름은 인(Inn)강과 다리(Brucke)라는 뜻의 독일어를 합친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강((Inn river)위에 있는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로마시대부터 동부 알프스의 교통요지로서 발전하였다. 유럽에서 알프스 산맥에 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이며, 빈(Wien), 그라츠(Geaz), 린츠(Linz)그리고 잘츠부르크(Salzburg)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다섯번 째로 큰 도시이다.
1429년에 티롤(Tirol)의 주도가 되었고 1490년대에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황실이 옮겨오면서 이 곳은 유럽의 정치, 문화 중심지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38년 나치(NAZI)에 합병되었으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폭격 시험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거리 : 카를 6세의 장녀이며, 토스카나 대공(大公)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였는데(1736), 부제(父帝)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하였다. 그러나 부제의 생존 당시의 상속법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國本詔勅)이 이미 각국의 승인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각국이 그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넘겨주었으나, 숙적(宿敵) 프랑스와 대립하는 영국과 손을 잡아 교묘하게 일을 처리하여, 아헨조약(1748)에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전쟁 중에 남편을 황제(프란츠 1세)로 세워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남편에게는 정치적 능력이 없어 그녀가 모든 국정(國政)을 담당하였다. 그 후 재정(財政)의 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여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1756∼1763)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이 등을 돌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하였다. 남편의 사망(1765) 후로는 아들 요제프 2세와의 공동통치로 바꾸었다.
내정(內政) 개혁에는 급진주의적인 요제프 2세를 견제하면서 부역(賦役)의 경감, 수도원영지(修道院領地)의 몰수, 교육제도의 개혁 등에 성과를 거두었다. 원래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딸의 제위(帝位) 상속은 생각하지 않았던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어 얌전한 여성으로 자라게 했으나, 마리아는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자녀를 16명이나 두었으며,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었다.
오스트리아 계의 합스부르크는 독일 제위를 보유하고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본령(本領) 외에 헝가리 ·뵈멘 등을 영유(領有)하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王家)와 대항하는 동방의 국제적 세력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와의 대립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계속되어 나폴레옹과도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라인동맹 성립을 계기로 신성(神聖)로마제국(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로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帝位)를 물러난 1806년 8월까지에 걸쳐 독일 국가 원수(元首)가 황제 칭호를 가졌던 시대의 독일제국의 정식 명칭)의 칭호를 버리고, 1804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하였다. 19세기에 와서는 프로이센과의 대항에서 패하여 독일 통일의 지도권을 빼앗기고 독일제국의 세력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1918년 카를 1세가 퇴위하여 500년에 가까운 황제가(皇帝家)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황금지붕 : 인스브루크 구 시가지에 있는 후기 고딕양식의 건물의 발코니를 덮고 있는 지붕이다. 이 지붕은 2,738개의 도금된 동판으로 되어있다. 1420년 티롤 군주의 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 1497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지시로 발코니가 만들어졌고 그 위에 황금지붕이 얹히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건물 바로 앞의 광장에서 행해 지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만든 이 건물 발코니에는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두 아내들, 재상, 궁중의 광대, 무희들의 모습과 문장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황금 지붕이 얹힌 발코니를 제외하고는 건물 전체에 아기자기하고 조그만 창들이 나 있다.
월 일 요일
▣독일 : 357,022㎢ 63위 약 80,996,685명 세계17위 3조 8,205억$ 세계4위 독일의 역사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건립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결한 칼 대제가 사망한 뒤 동·서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이후 13세기 전반까지 ‘황제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를 거쳐 다시금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家)에 의해 제위가 세습되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사회는 심대한 충격을 받아, 기사전쟁(騎士戰爭)·농민전쟁·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1555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Augsburg 宗敎和議)에 의해 신·구교가 분리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는 달성되었으나,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독일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산화·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통일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보았으나, 완전한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를 취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회의를 열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인민회의가 형식상의 국가최고권력기관이었다. 1969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설치된 국가평의회는 의회해산·총선거실시·법령공포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평의회는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5개 정당의 연립정권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단독정권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서독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독일민족은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 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메르켈 총리(1954년생)
●하이델베르크 : 인구 150만 명. 네카어강(江)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였다.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으며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또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고성으로도 유명하다. 이 성의 지하에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그밖에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 불리는 오솔길 등이 있다.
●카를 테오도어 다리 : 처음에는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강물이 불어나거나 폭설이 내리거나 불이 나면 쉽게 파괴되어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가 돌로 다시 짓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1788년 네카어강(Neckar River) 위에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놓여지게 되었다. 시내 방향에 있는 문은 중세 시대에 도시 성벽의 일부였던 것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다리 아래 부분이 아치형으로 되어 있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하이델베르그고성 전경 : 하이델베르크에 있으며, 1225년 팔츠백(伯) 오토 비텔스바흐가 축조하였다. 당시의 성은 현재의 성보다 더 높은 산허리에 있었는데, 1537년 낙뢰(落雷)로 파괴된 뒤 현재의 자리에 옮겨졌다. 그후 30년전쟁을 비롯한 잇단 전란으로 황폐해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축성(築城) 양식은 독일-네덜란드 르네상스풍의 성관(城館)과 중세풍 성새(城塞)의 일부가 혼용되어 있다. 성은 시의 중심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지하실에는 거대한 술창고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가장 큰 술통은 22만ℓ의 술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 : 정식 명칭은 ‘루프레히트 카를스 하이델베르크대학교(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이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385년 교황의 인가를 얻은 후 1386년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가 세워서 대학 명칭에 그 이름이 포함되었다. 설립 당시 철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를 갖춘 가톨릭계 대학으로 출발하였으나, 하인리히 선제후의 종교개혁(1556)으로 인문주의적 신교대학으로 전환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30년전쟁(1618∼1648)의 영향으로 폐쇄와 개교를 반복하다가 180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칙령으로 자치권이 인정되면서 근대대학으로 개편하고, 교수어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꾸었다. 이때 옛 바덴주(州)의 공작인 카를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교명에 더해졌다. 1899년에는 남녀공학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 인구 70만 명. 라인 지구대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강(江) 연변에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1848∼4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열렸으며,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시청사 : 1405년 시의회가 귀족 저택 세 채를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하고 '뢰머'라는 이름을 붙였다. 1562년, 건물 2층의 홀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뢰머광장 :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광장이다. '뢰머(로마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인데 15~18세기의 건물들이 몰려 있다. 광장 주변에는 구시청사와 오스트차일레가 있다. 구시청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이 끝난 후에 화려한 축하연을 베풀었던 유서깊은 곳이며, 프랑크푸르트 최초의 박람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405년부터 시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구시청사 맞은편에 있는 목조건물들을 통칭 오스트차일레라고 하며, 본래는 15세기에 쾰른의 비단상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월 일 요일
▣룩셈부르크 : 룩셈부르크어,프랑스어,독일어 2,586㎢ 세계179위
509,074명, 639억$ 세계70위, 국가원수는 앙리대공 유럽 중부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부르고뉴가(家)·합스부르크가·프랑스·네덜란드·프로이센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오다 183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헌법광장 : 수도인 룩셈부르크의 남쪽에 있는 기차역과 북쪽에 있는 구시가를 연결하는 루스벨트 대로(大路) 건너편에 있는 광장으로, 구름공원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페트루세 계곡에 위치해 있다. 중앙에는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황금의 여신상(Monument du Souvenir)이 서 있는데, 아래쪽에 4개 국어로 된 설명문이 있다. 'Gelle Fra'라는 이름의 이 기념비는 1958년 부분적으로 재건되었다가 1985년 지금의 형태로 다시 만들었다. 페트루세 계곡과 아돌프 다리 등 주위 경관이 아름다우며, 광장 지하에는 17세기 후반에 건설된 23km 길이의 복포대(Casemates Du Bock)가 복잡한 미로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 신시가지에 위치한 노트르담 성당도 볼 만하다. 룩셈부르크의 상징이라 할 만큼 웅장하고 고풍스럽다. 성당 입구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세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국기가 게양 되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아돌프 다리 : 길이 153m, 높이 46m의 거대한 석조 아치교로 1903년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치교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가을에 다리 주변의 나무들이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물들면서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아돌프 다리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의 모습도 큰 감동을 준다. 계곡과 천을 따라 숲이 울창하고 비슷한 형태의 멋진 옛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는 그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유럽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아름답다.
시청사가 위치한 윌리엄 광장 앞은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늘 활기 넘친다. 주말에는 광장 주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해 흥미롭다.
▣벨기에 :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30,528㎢ 세계141위
10,449,361명 세계83위 5,278억$ 세계25위 필리프(Philippe)국왕 서 유럽의 북해에 면해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1516년 에스파냐의 영토가 되었고 18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 1789년부터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워털루전투 뒤 네덜란드에 병합되었다. 1830년 8월에 독립하여 1839년 런던회의에서 영세중립국으로 보장받았다.
로마시대부터 거주가 시작되었으며, 6세기에 센강의 중앙에 있는 섬에 자리를 잡은 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7세기에는 그 곳에 요새가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북으로는 안트베르펜, 남으로는 니벨에 이르는 남북도로의 도하점(渡河點)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또 12세기경에는 이와 직교하는 브뤼헤∼쾰른 간 동서도로가 완성됨으로써 상업도시로서 급속히 발달하였다. 이 무렵(14세기경) 도시의 성벽이 구축되었으며, 그 후 수백 년 동안 성벽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데, 1818∼40년경 이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둘레 8 km의 아름다운 순환도로를 만들었다. 이 넓은 가로숫 길은 브뤼셀 구시가의 외곽을 형성하고 있다.
14세기부터 브라반트공국의 주도(主都)가 되었으나, 17세기에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家)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새로이 벨기에의 수도가 되었다. 유럽 굴지의 아름다운 역사도시인 브뤼셀의 시가는 서쪽의 상업구와 동쪽의 주택구로 갈라져 있는데, 주택구의 중앙부에는 루아얄로(路)가 뚫려 있고, 이를 따라 국회·왕궁·박물관·재판소 등의 건물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상점이 즐비한 상업구의 중앙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그랑플라스가 있으며, 그 근처에는 유명한 《오줌 누는 소년》(마네캉피스)의 청동상이 서 있다. 상업구의 일부분에는 중세도시의 모습을 담은 낡은 동네도 있으나 도시 전체로서는 근대화의 방향을 따르고 있으며, 고층건축물도 들어서고 있다.
브뤼셀은 벨기에의 플라망(네덜란드)어 사용지역에 속해 있으나, 사실은 2개 언어 지역의 특색이 농후하여 거리 이름은 프랑스어와 플라망어로 표시되며, 어디를 가나 프랑스어가 통한다. 유명한 레이스·융단을 비롯하여 모직물·면직물·염색·가구·종이·인쇄·출판 등 각종 산업이 발달한 남부의 공업구에서는 브뤼셀의 고유한 방언이 사용된다.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8년 원자력의 이용을 주제로 한 전후 최초의 국제박람회가 개최되었다. 해마다 많은 국제회의가 열리며, 유럽연합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도 이곳에 있어 서유럽의 수도 구실을 하고 있다.
세 가지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이 섞여 사는 나라의 수도인 브뤼셀에서는 공식 언어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인정되지만 실질적으로는 85-90%의 시민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랑 플라스 : 벨기에 브뤼셀 도심에 있는 광장으로 소설가 빅토르 위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했던 곳이다. 주로 17세기 후반의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극히 유럽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꽃시장이 열리고 각종 행사와 이벤트가 끊이지 않아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공공건물과 사유건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며, 활기 넘치는 일상의 생활과 아름다운 문화예술이 함께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서로 110m, 남북으로 70m인 광장은 그랑 플라스(Grand-Place), 즉 대광장이라는 명칭에 비하면 그리 크지는 않은 규모다. 시청사, 왕의 집, 길드 하우스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96m의 첨탑이 높이 솟은 시청사다. 15세기에 건설된 고딕양식의 건물로 1695년 프랑스의 침입으로 광장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속에서 유일하게 화를 면한 건물이다. 탑 꼭대기에는 브뤼셀의 수호성인 미카엘 대천사가 조각되어 있다.
16세기 초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왕의 집은 애초 개인 소유였으나 샤를 5세가 청사로 활용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브뤼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는 시립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왕의 집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있는 큰 건물은 브라반트(Brabant) 공작의 집으로 불린다. 하지만 건물 정면에 브라반트 공작의 흉상이 놓여 있다는 것 이외에 브라반트 공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곳이다. 안에는 초콜릿 박물관이 있는데, 초콜릿의 역사와 제조과정은 물론 맛 좋기로 유명한 벨기에 초콜릿을 시식까지 할 수 있다.
●오줌싸개 동상 : 브뤼셀의 가장 나이 많은 시민이라 불리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은 벨기에 관광에서 빼지지 않는 코스이다.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에 의해 제작된 이 동상의 실제 크기는 60cm 남짓하다. 이 동상과 관련한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프랑스 루이 15세가 브뤼셀을 침략했을 때 이 동상을 탐내 프랑스로 가져갔다가 이후에 사과의 의미로 화려한 후작 옷을 입혀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월 일 요일
▣네덜란드 : 41,543㎢ 세계135위 16,877,351명 세계65위 8,804억$ 세계16위 유럽 서부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1515년부터 에스파냐의 통치를 받으며 신교 탄압을 받아왔고 1566년 독립전쟁을 감행해 1579년 1월 독립을 선언했으나 1648년에야 완전 독립이 승인되었다. 국왕은 빌럼 알렉산더르(Willem-Alexander)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암스텔강의 댐에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암스텔 강에서 1170년과 1173년에 일어난 홍수 직후, 다리와 댐을 건설하면서 마을 이 형성되어 발전하였고, 이후 14세기 초 도시로 승격되었다. 한자동맹으로 인한 무역업의 성행으로 암스테르담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1515년부터 카를 5세(Charles Ⅴ)의 즉위와 함께 시작 되었던 스페인의 지배 이후 새로운 세금의 부과, 기독교에 대한 종교탄압 등으로 인해 스페인에 대한 저항과 네덜란드독립전쟁(Eighty Year’s War)이 일어나게 되는데 암스테르담은 그 주요 거점이었다.
17세기 황금시대(Dutch Golden Age)에 무역의 발달로 암스테르담은 주요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가 자바섬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암스테르담은 북미, 아프리카,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회사의 많은 지분을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1810년 홀란드(Holland) 지역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1815년 네덜란드 왕국이 설립되면서 19세기는 암스테르담의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박물관, 기차역, 콘서트홀 등이 만들어지고 산업혁명의 여파로 암스테르담과 라인강을 연결하는 암스테르담-라인 운하, 북해와 최단으로 연결되는 북해 운하 등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암스테르담은 기존의 도시경관을 보전하면서 도시를 확대하고 교외지역 개발에 힘썼으며 1977년에는 교외지역과 암스테르담 간에 지하철이 처음으로 운행되기도 하였다.
●잔세스칸스 마을 :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잔 강변의 마을로서, 풍차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으로, 네덜란드의 명물인 풍차와 양의 방목으로 유명하다. 18세기에는 700개가 넘는 풍차가 있었으나 산업혁명의 기계화에 밀려 지금은 관광용으로 몇 개만 남아 있다.
17~18세기의 목조가옥과 크고 작은 풍차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잔강(江) 건너 왼쪽에는 보트 승강장과 풍차가 있고 강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쪽에는 나막신을 만들어 파는 상점과 음식점 등이 있다. 목장 앞의 치즈 공장에서는 맛있는 치즈와 우유를 맛볼 수 있고 풍차의 내부도 견학할 수 있다.
●담 광장 : 암스테르담의 모든 길은 담 광장으로 통하며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다. 원래는 암스테르담 중심부를 흐르는 암스텔강의 둑이 파손되었을 경우 도시가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13세기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왕궁, 신교회, 아주 높은 전쟁기념탑,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담 튀소(Madame Tussaud)의 밀랍인형 박물관 등이 주변에 세워져 있다. 거리의 예술가들과 60년대에 유명했던 담광장 히피들(Dam Square Hippies), 많은 카페들로 인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왕궁전경 : 네덜란드의 현재 군주인 베아트릭스 여왕(Queen Beatrix)과 그의 가족이 암스테르담시(市)를 방문할 때 거주하는 곳이다. 1648년에 짓기 시작하였고 원래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쓸 목적이었다. 건물을 설계한 야콥 반 캄펀(Jacob van Campen)은 고대 로마 건축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건물도 중앙의 높은 돔 지붕과 아치형 기둥 등 로마 건축의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철저히 고전적인 외형에 반해 화려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왕궁의 벽과 지붕은 당시 유명한 조각가였던 아르튀스 퀼리뉘스(Artus Quellinus)와 렘브란트의 제자들인 페르디난트 볼(Ferdinand Bol)과 고버르트 플링크(Govert Flinck) 등 유수의 미술가들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예술적으로 장식하였다. 한때 암스테르담 시에서 계획했던 공사비 예산보다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하게 되자 동시에 건축되고 있었던 신교회(De Nieuwe Kerk)의 공사를 잠시 중단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665년에 완성된 시청사는 17세기 네덜란드 고전주의 건축의 상징으로써 200년 가까이 암스테르담과 네덜란드의 정치적 중심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1808년에 네덜란드를 점령했던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동생인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이 새 왕으로 부임해 오게 되자 이 건물은 왕궁의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현재 왕궁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상당수의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품은 나폴레옹 점령 당시에 들여온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곳은 196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결혼식 때 호화로운 무도회가 열렸던 홀과 담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방들이다.
●암스테르담 운하(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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