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명문가, 그 깊은 역사

청담(靑潭) 2014. 5. 30. 14:46

 

 

명문가, 그 깊은 역사

 

 

500년 조선사회를 이끈 정신

글항아리

 

 

책을 읽고 나서

 

책의 질이 아주 좋고 사진 자료가 많아 값이 무려 3만원이다. 그러나 내용은 그저 여러 집안의 족보 설명과 나열에 그친게 아닌가 여겨진 다. 그들이 당시 지배층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역사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하고, 백성들을 위해 무슨 노력을 기울이고 어떤 존경받은 행동으로 치적을 남겼는지 잡히는 게 별로 없다. 대대로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벼슬을 지내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유지하며 잘살면 명문가인가? 부질없는 명문가일수 있고 별 의미 없는 책이 될 수 있다. 단순한 명문가 소개는 내게는 큰 의미 없다. 혹평은 이쯤 해두자.

                                                                                     필자

 

예와 덕으로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한 명가들

 

조선양반사회를 500여 년간 지탱한 저력은 유교의 예와 덕이었다.

조선시대 양반 명가의 탄생도 예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1장 한양조씨 정암 가문

 

조선사회에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천하다

 

조선 초 왕조 변혁기에 한양 조씨 일원은 이성계 측에 가담해 새 왕조를 건국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조영무(? - 1414)와 조인옥은 한산부원군으로 봉군되었고, 조온은 한천부원군으로, 조연은 한평부원군으로 관향의 지명에 따라 봉군되는 등 당대에 집안의 위상을 높혔다.

조원기는 관련 자료를 수습해 1524(중종 19)에 마침내 족보를 완성했다.

조광조(1482-1519)를 위시한 당시 사림들의 실패에 대해 율곡 이이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기묘년에 조광조가 중종의 예우를 받아서 크게 사업할 가망이 있었으나, 나이가 적은 선비로서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아 소요(騷擾)함을 면하지 못해서 소인이 이 틈을 타 사람들을 해쳤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라않지 않고 민심이 불안한데다 다음주 64일이 지방선거라서 무능하다고 정평이 난 정홍원 총리를 물러나게 하고 새 총리를 임명하여 국면전환을 꾀하려는 대통령의 발상으로 일주일 전 안대희(1955- ) 전 대법관을 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다니던 재학 중(20)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노무현 대통령과 사시 동기) 한 수재이며 30여 년 간 청렴하고 소신있는 강직한 검사로 유명하였고, 서울지검장과 대법관 출신으로 아직은 59세로 젊은 편에 속하여 미래의 지도자로 여긴 분이다. 그러나 변호사 개업이후 전관예우(5개월 동안 16)가 밝혀지고 25년간 살던 35천만 원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13억 짜리 50평대 고급 복합주상아파트로 이사한 것이 드러나면서 야당과 언론의 거센 공격에 굴복하고 어제 자진 사퇴하고 말았다. 박대통령은 왜 법조인만 내세우나? 이 시국에 대통령을 대신하여 나라를 이끌 역량 있는 인재들이 많건만 꼭 법조인만 고집한다. 법조인이란 법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대체로 융통성이 부족하고 개방성이 떨어지고 창의성이 결여되기 쉬운 사람들일진대 굳이 고집하는 이유는 말 잘듣고 비정치적이어서 대통령과 청와대의 국가운영 방향에 잘 순응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이런 비상시국에도 비정치적 실무형 총리를? 박근헤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이 참으로 안타깝고 한편 안쓰럽다. 내가 지금까지는 마음속으로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지향하는 박대통령을 지지하고 기대가 컸지만 이번 사건으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더 이상의 기대도 접으려한다. 자기 당에도 김무성, 이인제, 김문수 같은 정치력과 지도력 있는 거물들이 있고, 정치를 떠나 있는 조순형, 심대평 같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어른스럽고 존경받는 인물들이 있는데도 하나같이 정치력 없고 말 잘들을 법조인 타령으로 말썽만 일으키는 대통령의 한계점을 본다.

안대희씨가 어제 말했다.

내가 젊은 시절 너무 함부로 처신했나 봅니다.”

그동안 국민들의 지지는 받았지만 정치인들 속에 적이 많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자신의 처신에 대한 후회인 모양인데 그 말도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안대희 같이 청렴하고 강직한 법조 아이콘이 어찌 법복 벗자마자 소신을 깨고 돈에 물들어 평생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나? 안대희가 우리에게 실망을 줄 지경일진대 이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 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어디 얼마나 있을 것이며, 더구나 정치하는 인간들이란 거의 사이비 인격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일색인데 어쩌면 저리도 남을 공격하는 데는 재주들이 좋은 것인가? 자신들은 총리 후보는커녕 지금 하고 있는 의원자리도 분에 넘치고 아까운 데 말이다.

안대희는 똑똑한 인간들이 추구하고 누리는 재력과 권력, 명예욕 측면에서 모두 실패하였다. 법복을 벗은 직후 기자에게 이제 그동안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불편을 준데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해 부당한 일이 아니면 돈도 벌 겁니다

라고 했다는데 그만 온 국민이 걱정하는 불량관행인 전관예우에 깊숙이 빠지고 말았다. 무려 10개월에 20억을 벌고 세금을 6억 냈으며, 총리에 내정되자마자 부랴부랴 3억을 헌금으로 낸 것도 들통이 났다. 게다가 나머지 11억을 국가에 낼 터이니 그만 용서해 달라고 하며 비난을 비껴가려 한 것까지도 공격대상이 되고 아들 취직문제까지 번질 위기에 몰리자 하차한 것이라 한다. 애초에 거창한 전관예우를 이미 받은 바에는 총리직을 거부해야 했다. 이참에 사회적 이슈가 된 관피아를 척결할 막중한 임무를 띠는 총리직인데 관피아의 하나인 전관예우를 크게 받은 그는 막중한 임무를 애초부터 해결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쌓은 명예도 잃었다. 11억은 약속대로 헌납하겠다하니 새로 산 아파트를 처분해야 하는데 그 빛은 언제 갚나? 그리고 이젠 전관예가 잘 통하지도 않을 텐데...걱정스럽다. 그의 처신이 밉기보다는 그의 잘못된 선택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생은 선택이다!


숙종대 이후 조광조의 포장(襃章)은 지속되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국왕들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 앞선 17세기 사림정치 시기에 조광조는 주로 사림들에 의해 포장되었는데, 이는 사림들이 도통의 맥을 계승했음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탕평책이 정국에 시행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와중에서 국왕들은 조광조의 포장을 통해서 앞서 사림들이 차지했던 도통을 자신들이 장악함으로서 君師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하려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2장 창녕성씨 청송·우계 가문

 

은둔자와 도학자를 배출한 조선의 명가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현은 자신의 저술인 <용재총화>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우리 창녕 성씨다고 했다....창녕 성씨는 성여완(1309-1397)이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면서 집안이 크게 일어난다.

성혼(1535-1598)은 이이와 함께 도학의 종사로 16세기 기호학계를 대표했던 학자다.

 

 

3장 창녕 조씨 남명 가문

 

으로 안을 곧게 하고 로써 밖을 반듯이 하다.

 

남명 조식(1501-1527)

우리 선조는 창산사람, 9대에 걸쳐 평장사가 났다네

라며 자기 가문에 대한 남다른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의 학자들은 남명사상을 한마디로 경의라고 요약하곤 했고, 지금도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재야 학자들은 남명학을 敬義之學이라 일컫는다.

 

 

4장 영일정씨 송강 가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세출의 문장과 언어를 이뤄내다.

 

정철(1536-1593)의 삶이 파란만장했던 것은 선조대의 극심한 당쟁에서 비롯되었지만, 일면 그의 직선적이고 불같은 기질과도 관련이 있다. 김장생은 1621년 겨울에 정철의 넷째 아들 정홍명의 부탁을 받고 정철의 행록을 지었다. 그는 첫마디에서 정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공은 흉회(가슴속에 품은 생각)가 소탈하고 상쾌하며 언어가 호방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점이 많으나, 다만 대신으로서 관홍용중(寬弘容重: 관용의 덕과 얼굴이 진중함)하는 도량이 작고 또 때로는 주색에 초월하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공은 평생 악한 이를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쳐 사람의 과실을 능히 용서하지 못하여, 조금도 마음속에 담아주는 일이 없으며, 반드시 바깥으로 드러냈던 까닭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정철은 이이(1536-1584)와 동년생으로 21세에 처음 만났다. 그의 재주와 인품을 존경해 交道를 정했다. 훗날 조정의 의론이 당쟁으로 갈릴 때에는 이이가 정철에게 동서간의 조정을 부탁했으며, 죽을 때 정철의 손을 붙잡고 나랏일을 걱정했다.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당쟁의 한 가운데에서 살면서 어느 곳에서도 그의 인품과 훌륭한 모습을 그린 글을 보지 못한다.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같이 그저 문학적 업적에서만 가치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5장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임란의 한가운데를 학문과 충으로 관통해낸 구구의 경세가

 

경북 안동 하회의 풍산 류씨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헤쳐나간 명재상 서애 유성룡(1542-1607)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시대에 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영의정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결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또한 그 자리에서 명상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옳은 말이다. 정홍원 현 총리는 인품은 있는듯한데 무능하다고 평판이 났고,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 안대희는 청문회도 못해보고 일주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총리내정을 받았다가 청문회장에도 못가보거나 또는 청문회과정에서 물러났다.

 

 

6장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엄격한 가정경영과 과감한 실천으로 이름을 떨치다.

 

진성이씨 이황은 선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물려받았으며, 그 자신 또한 적극적인 가산 경영을 통해 노비 367명과 약 200섬지기의 토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16세기 이후 외가나 처가를 따라 정착하는 일은 흔했다.

박영기 부부는 아들딸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했던 시대 관행에 따라 토지의 척박함과 비옥함, 노비의 건강 여부와 나이를 고려해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나눠주었다.

박세렴(1535-1593)은 그자신이 무과를 통해 출사하여 벼슬길을 열었음에도 아들에 대한 훈육을 목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경제와 손자들에 대한 학업을 독려했다. 그 결과 박의장(1555-1615)이 과거에 합격하고 나아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되면서 무안박씨는 일약 명문가로 발돋움 했다. 박의장 또한 선대의 가정경영 전략을 바탕으로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읽어 후손들을 위한 경제 기반을 확고히 함은 물론 무반가에서 학문하는 가문으로의 전환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7장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학통과 정파와 혼맥을 초월한 열린 가문

 

해주오씨는 고려조에 검교군기감을 지낸 오인유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고려시대이래 벼슬을 하던 중 조선중후기에 접어 들어 문벌가문으로 발전했다.

오윤겸(1559-1636)의 아버지인 오희문(1539-1613)쇄미록의 저자로서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오희문이 지낸 벼슬은 선공감 감역뿐이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오희문의 벼슬살이에 대한 욕구는 그가 한평생 이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짐작케 한다. 오희보(1360-1426)이래 과거 출신 및 고관을 내지 못했던 집안의 열등감은 가난한 집안 형평과 맞물려 그로 하여금 과거급제자를 내는데 대한 욕구를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오희보에서 오희문에 이르는 해주오씨의 한 지파가 17세기 사림사회에서 주목받는 집안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오윤겸의 현달이었다.

일찍이 오윤겸은 서얼의 수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시했다.

서얼을 금고하는 것은 고금천하에 없던 법이며, 실로 편벽되고 비루한 소견으로서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뜻을 상하게 하는 것이니 선왕의 크게 공평한 정사가 아닙니다. 통용하는 일이 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세간에서 행하기를 어렵게 여기는 자는 명분이 문란해진다고 말합니다. 嫡庶의 명분은 자기집안 내부의 일일 뿐이며, 조정에서는 단지 현명한 자를 쓰고 인재를 거둘 뿐입니다. 비록 貴顯이 된 뒤에 적서 사이에 만약 명분을 법하는 일이 있다면, 나라의 법이 진실로 업하게 적용될 것이니 문란해지리라는 것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8장 파평 윤씨 명재 가문

 

백의정승을 배출한 소론의 명가

 

충남 논산 노성의 파평 윤씨는 조선 중기 호서를 대표하는 명문가다.

윤선거(1610-1669)는 공주이씨 이장백의 딸과 혼인했는데, 윤선거와 공주 이씨 사이에서는 2(윤증·윤추) 1녀가 태어났으며, 측실에게서 3남이 태어났다. 윤중(1629-1714)은 서울 정선방 외가에서 태어났다.

파평 윤씨 노성파는 조선 말기까지 시호를 받은 인물이 10명에 이르고, 문과 급제자가 40여 명에 달한다.

스승인 우암 송시열(1607-1689)懷尼是非(당시 송시열은 회덕에 살고 윤증은 이산에 살았다)가 시작되었다. 회니시비는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이 부친의 墓碣銘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나 데서 비롯되었다....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은 신유의서1682년경에 세상에 드러나면서부터다. 신유의서는 윤증이 당시 사류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송시열의 처신에 대해 비판조 논설을 편 편지글이다. 그 글에서 윤증은 송시열이 윤휴와 남인을 지나치게 몰아붙여 정치적 실효는 거두지 못한 채 당쟁만 격화시켰다고 했다. 또 그가 평생을 바쳐 주창한 대의도 실효가 없다고 했고, 심지어 송시열의 편벽된 기질까지 논박했다. 편지를 본 송시열은

윤증이 나를 죽이려 한다.”

며 대로했다.

대저 조선전기 이황과 기대승간에 벌어지는 사단칠정논쟁도 성리학자들이 벌이는 학자들의 철학논쟁일 뿐 백성들의 먹고사는 일과 국가의 발전과 변화를 위한 개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지식인들만의 논쟁이기에 나는 큰 관심도 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하물며 송시열과 윤증은 같은 서인이며, 송시열이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임에도 서로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더구나 송시열이란 인간은 17세기 당쟁의 한복판에 서서 남인과 끝없고 허망한 예송쟁투만 전개하고 끝내는 윤증과 노소분당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들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였던 것이며 이들에게서 명문가를 이룬 의미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인가?

 

 

9장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사람, , 재산은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

 

앞서 1장에서 한양 조씨 정암 가문을 소개한바 있다. 주실 가문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시인 조지훈(1920-1968)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조덕순(1652-1693)1679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 뒤 서울로 올라가 아우 조덕린과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그가 문과에 합격한 것은 10여년 뒤인 1690년의 일이다. 그는 장원으로 급제했다.

조덕린(1658-1737)167619세 되던 해에 향시를 통과했고, 그 다음 해인 1677년에는 진사시에 합격했다. 1678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168629세 되던 해에 형덕순과 함께 다시 성균관에 유학했다. 1689년 동당책시에 합격했다. 1690년 조덕순이 먼저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1691년에는 조덕린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주실마을에는 이들 형제에 앞서 과거에 급제한 조상이 없음에도 경제가 튼튼하고 양반행세를 크게 한 집안이었는지 진사시에 합격하고는 두형제가 당당하게 성균관에 입학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과거에 합격한다. 아우인 조덕린이 약관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형인 조덕순은 그보다 2년 후 28세가 되어서야 진사시에 합격한다. 이때 사람들은 분명히 아우가 훨씬 더 재주가 있다고 했을 터이다. 그러나 정작 과거시험은 형이 39세인 늦은 나이지만 장원급제하여 42세에 죽기까지 단 3년동안 승승장구했다. 동생은 다음해 34세에 급제한다....그는 영조때인 172568세의 나이에 노론의 전횡을 비판하는 시무10조를 올린다. 이후 원종일등공신이 되고 172871세에 동부승지가 되었고 사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736년 시무10조가 논란거리가 되어 79세의 노구로 제주도로 위리안치 된다. 한여름의 더위를 무릅쓰고 귀양지인 제주도로 향했다. 이 길은 그의 마지막 행보가 되었다. 도중에 이질에 걸려 10여일을 고생하다가 전라도 강진의 후풍관에서 생애를 마쳤다.

 

 

10장 여주 이씨 퇴로 가문

 

실학정신으로 근대의 선구가 되다.

 

오늘날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여주이씨 퇴로가문은 우리민족의 근대화과정에서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 어떻게 적응해나가고 또 능동적으로 사회에 공헌하면서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하고 흥미로운 사례다.

도원 이종극(1811-1859)은 바로 항재의 부친으로 비로소 삼형제를 낳아 가문이 번성할 기틀을 마련했다. 항재 이익구(1838-1912)1890년에 300여년 살아오던 단장면 무릉리를떠나 부북면 퇴로리로 이거했다. ...삼형제는 퇴로리로 이주한 뒤 각기 邸宅山亭, 別墅(농막)를 지었다. ...

항재 일문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주력했던 분야는 신교육이었다. ..화산의숙과 정진의숙을 세웠고 해방이후에는 화양초등학교, 정진국민학교가 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했다. ...해방후에는 공립 밀양중학교를 설립한다. ...1909년에는 인쇄소인 동문사를 설립하여 여러 책을 간행했다. ...이들은 일찍 문중 사창을 세워 춘궁기나 흉년에 지역사회의 빈민들을 구제했다. ...항재 일가는 의약에 조예가 있어 각기 소규모 약포를 가지고 있었다. ...항재의 학문정신에는 난세에 선비의 도리로 복전역색(服田力嗇)과 통상혜공(通商惠工)도 있었기에 일찍부터 상업이나 공업에 진출한 자제들이 있었다.

...이렇게 퇴로의 이씨 가문은 서당, 학교, 사창, 인쇄소, 약포, 정미소, 상점 등 그들의 생활이나 사업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직접 만들어 활용하는 성향을 지녔다. 그들의 본업은 유학이었고, 경제기반은 각처에 산재해 있었던 농장이었지만, 소규모 상공업에도 진출했고 잠업과 같은 새로운 사업에 뛰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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