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동학-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

청담(靑潭) 2014. 6. 12. 13:44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

 

 

전라도 고창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배항섭 김양식 조재곤 이병규 지음

역사공간

 

 

책을 읽으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우리 민족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중혁명운동이었다. 1980년대에 전봉준이 태어난 고창읍에서 내가 2년을 살았고, 봉기가 시작된 고부 이평과 만석보와 황토현은 내가 정읍을 오가면서 수없이 지나는 곳이요, 삼례집회가 열린 곳은 바로 내가 사는 익산시 동산동으로부터 불과 12km 지점이다. 그런가 하면 무장에서도 26개월을 산 바 있으니 동학혁명이 그저 백여 년 전에 있었던 지나버린 역사로 그치지 않고 나에게는 산 역사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동학농민혁명은 처절하게 아픈 민중의 역사다. 아직도 세계에는 민족 간, 부족 간, 종교 간의 분열과 다툼과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수억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가족해체와 고향을 떠나는 아픔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를 의식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역사인이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스스로를 반성하며 더욱 노력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은 고창군에서 발간하여 비매품으로 학교에 보내왔다. 크게 7장으로 편집되었는데 내용이 겹치는 곳이 많다. 익히 잘 아는 내용들이지만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므로 기록할 만한 것들만 간략하게 추린다.

필자

 

1. 동학농민군,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이필제의 난(1871)

1871(고종 8) 310() 동학교도인 이필제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이다. 1863(철종 14) 동학에 입교한 이필제는 9년 동안 진천·진주·영해·문경 등지에서 4번에 걸쳐 봉기 주도하였다. 특히 1871310() 전개된 영해봉기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18707월 진주작변(晋州作變)에 실패한 이필제는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5차례에 걸쳐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최시형은 수일간 이필제와 머물면서 영해봉기를 계획하였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난을 동학과 관계없는 민란으로 보아왔고, 또한 동학측에서도 최시형이 이필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근 동학측의 기본 사료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필제·최시형 등은 310() 교조 순교의 원일(寃日)을 영해봉기일로 정하고, 사전 면밀한 담당부서를 정하여 봉기를 계획한 뒤 동학 조직망을 이용하여 경상도내의 동학교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먼저 이필제는 천제(天祭)를 지낸 뒤 최시형과 더불어 500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야반(夜半) 게릴라 작전법으로 영해부를 야습하여 군기고의 병기를 접수한 뒤 부사 이정(0x914D)을 문죄, 처단하였다.

당시 정부측은 이는 어떠한 적도인지 알 수 없다라며 당황해 했으며, 인근 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겁을 먹고 모두 도망쳤다. 이곳에서 성공을 거둔 이필제는 이 해 82일 문경 봉기를 주모하다가 체포되었다.

동학 최초의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투쟁을 전개한 영해봉기는 분산고립적인 당시의 일반 민란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동학조직망을 통한 광범위한 인원동원, 야습작전 등으로 강한 저항력을 보여주어, 후기 전반적 농민봉기의 맹아(萌芽)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1890년대 들어 동학교도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다....189211월에 열린 삼례집회에 참가한 전봉준은 탄압이 두려워 소장을 告呈할 사람이 없자 고정을 자원하였다....이들은 교도들을 이끌고 시위를 하여 부장현감이 동학교도들로부터 빼앗은 돈 1천 냥을 돌려받았다.

보은집회 이후 손화중은 무장, 김개남은 남원, 전봉준은 교도들을 모아 전라도 금구 원평에 주재하여 교도들을 모았다고 한다.

사발통문196812월 정읍 고부 산중리에 거주하던 송후섭씨 마루 밑에 보관해 오던 궤짝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고부농민봉기의 발발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조병갑의 탐학 때문이었다.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이화여대 조기숙은 한때 정치에 관여하면서 언론에서 자신의 할아비에 대해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시 내 눈에 비친 그 여자는 지적 저능인 아니면 마치 무슨 혁명투사인 듯 보였다. 지금도 그런 정신으로 교수신분을 유지하며 무언인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겠다 싶다.

1894110고부농민 봉기 발발시 처음에 모인 난민은 500여명 정도였다.

1894320무장기포를 주도한 것은 손화중이었고, 이 때 모인 농민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이었다. 무장기포 장시 모인 농민군의 수는 약 4천여 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을 다른 나라의 유사한 민중운동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관리들이나 양반지주들을 직접 처단한 사례가 거의 없다.

집강소가 완연히 하나의 관청을 이루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농민군이 직접적으로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됨으로써 지방관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거나 수령은 이름만 있을 뿐 행정에 간여하지 못하였고, 쫓겨나기까지 하는 상황이 초래 되었다.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520일 무렵부터 직·간접적으로 의사를 교환하며 相和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지사로 당선된 새누리당 원희룡새정연 후보였던 신구범 전 지사에게 인수위원장직을 요청하였고, 신전 지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다. 기쁜 일이다. 당보다 먼저 제주도를 생각하는 정신이 훌륭하다. 두 사람 모두 존경스럽다.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남경필경기발전을 위한 여·야 협의체를 발족시킨다고 한다. 정말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는 두 지사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10일경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봉가준비에 착수하였다.

전봉준은 논산일대에서 다시 결집한 농민군이 2만여 명에 이르자 노성과 경천으로 다시 진출하여 군량을 나르고 포대를 설치하며 전투를 준비하였다. 우금치전투가 시작된 것은 119일 아침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반봉건 반외세를 통해 사람이 가장 귀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전봉준(1855-1895)1129일 입암산성을 거쳐 김개남과 만나기 위해 순창 피노리로 잠입하였다가 122일 밤 주민 한신현 등이 끌고 온 주민들에게 체포되었다. ...김개남(1853-1895)1123일 전주에서 남원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121일 태인 종송리에서 강화병영에게 체포되었다. ...손화중(1861-1895)은 부하들을 해산하고 광주를 떠나 고창으로 잠입하였으며, 1211일 고창에서 주민들에게 체포되어 고창현에 갇혀 있다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최경선(1859-1895) 역시 121일 귀화한다는 방문을 남기고 광주를 떠나 잠입하였다가 123일 화순 동복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인도되었다. 김개남(1853-1895)은 청주 싸움에서 패하자 진잠을 거쳐 연산(連山) 쪽으로 남하, 간신히 태인으로 돌아와 종송리에 있는 매부 서영기(徐永基)집에 숨어 있다가 1227일 체포되었다. 전라 감사 이도재(李道宰)에 의해 전주로 압송된 189518일 전주장대(全州將臺)에서 참수 당하였다.

 

 

2. 녹두장군 전봉준, 고창 당촌에서 혁명을 꿈꾸다.

 

전봉준은 고창 당촌(현 고창읍)에서 185512월에 태어났다. ...아버지 전창혁은 마을 서당 훈장을 하였다. ...아버지 주도로 당촌을 떠나 고부 남부면 진장과 차복리 주변으로 이사하였다. ,,,전주 봉상면(현재 완주군 봉동읍지역) 구미리로 옮겨 산 일도 있었다. ...다시 태인 감산면 계봉리 황새마을(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관봉마을)로 이사하였다.

전봉준이 23살 때 27살인 아내가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다.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던 남편이씨를 새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전봉준보다 5살 아래였다. ....고부 궁동면으로 이사하였다. ...다시 이웃마을인 조소리로 옮겨 살았다. 그때가 30대 초반인 1880년대 후반이었다. ..전봉준은 생계수단으로 자기 집에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았다.

선생은 항상 불평하는 마음이 많아 사람을 사귀어도 신사상을 가지고 개혁심이 있는 자를 추수하였다. 호남으로는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개남들과 상종이 많았고, 호서로는 서장옥, 황하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오지영 동학사

1888년경(34) 손화중을 만나 동학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890년경 황하일의 중개로 사장옥 포에 정식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고부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종교차원에서만 동학을 신봉한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보국안민을 이룰 목적으로 동학에 들어간 것이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고 말하며 저술목적은 우리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뜻이라 하였다. 다산이 강진에서 몰래 지은 경세유표는 강진의 선비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읽혀지다가 전봉준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의 구체적인 대안을 발견하였다.

전봉준을 실제로 겪은 사람들이 1920년대에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코는 크고 귀도 크며 눈빛은 형형하여 그와 한번 만나면 그 당당한 위풍에 압도될 정도였다. 평생 과묵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집에서는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으며 아내를 사랑하여 항상 화기가 돌았다.

 

 

3. 손화중, 석불비결을 탈취하여 혁명의 길을 열다.

 

손화중1861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태어났다.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81년 그의 나이 21세 때라고 전해진다. ...그는 본가가 있는 향리에서 포교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무장현(현 고창군 무장면)으로 옮겨 동학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키가 9척 장신이요 인상을 부드러웠으며 설득력이 아주 뛰어 났다고 한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들어있으며. 그 비결이 세상에 자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고 한다.

비결은 손화중이 가지고 갔으며...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3인은 모두 강도 겸 역적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남은 백여 명은 엄한 곤장을 맞은 후 풀려 나왔다.

동학교도들이 급증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동학이 신분적 차별을 두지 않고, 빈 부 간에는 서로 돕는다는 사회적 평등주의경제적 균산주의에 있었다.

 

 

4. 무장에서 높이 치켜 올린 동학농민 혁명의 횃불

 

세상 사람들은 전봉준 장군을 5척 단구로 여겨 녹두장군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다고 한다.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짐에 따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고부민들은 전주감영에까지 정소하였으나 조병갑의 탐학을 불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고부민들 간에는 자연적으로 민란발발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고부농민봉기는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던 조병갑이 189419일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한 직후인 110일에 일어났다. ...대부분 난민들의 목표는 조병갑을 축출하고 부당하게 빼앗긴 재물을 환수하는 데 있었다.

무장포고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무장포고문은 세계사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민중운동이 이와 같이 매우 조직적으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준비되었고, 또 민중들이 자신들이 봉기한 목적, 현 사회에 대한 생각 등을 이처럼 당당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글은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5. 아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다.

 

520일 무렵 이미 흥덕 이남부터 나주 이북 일대는 모든 정령이 농민군의 손에서 나왔고, 지방관은 단지 그 콧김만 살피는 실정이었다. 또한 무장과 장성, 정읍 등지는 농민군의 집결지로 되어 있고, 지방관은 유명무실한 채 모든 일이 농민군에게 좌우되고 있었다....무장에 기반을 둔 손화중 대도소가 있었던 고창지역은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한 5월부터 8월까지 사실상 모든 총치권이 농민군의수 중에 있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1895329일 혁명의 동지였던 최경선, 김덕명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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