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한시의 품격

청담(靑潭) 2014. 10. 17. 16:19

 

 

 

漢詩品格

창비

김풍기(강원대 교수)

 

1

 

양반부터 중인까지 그들은 왜 한시를 짓는가

 

1. 시 귀신이 돌아다니던 시대

 

근래에 이현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詩魔를 숭상했다. 아계(이산해) 상공이 그런 줄을 모르고 이현욱의 시를 크게 칭찬하였다. 하루는 이익지(이달)가 상공을 뵈오러 갔는데, 상공이 이현욱의 시를 꺼내서 그 높고 낮음을 품평하도록 했다. 이익지는 이현욱의 작품 속에 있는 바 걸음걸이가 느긋하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은데, 동서남북 어디나 두루 봄빛(步復無徐無忙 東西南北遍春光)”이라는 구절을 들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문장가의 어법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같은 글자는 일찍이 사용한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의 나이가 어리니 필시 시마에 걸렸을 것입니다.”

상공은 몰랐는데 과연 그러했던 것이다.

허균의 시평서인 鶴山樵談에 기록된 내용이다. 허균은 자기의 스승인 이달의 놀라운 시에 대한 전문성과 통찰력을 높이 사고 있다. 李益之(1539-1618년경)는 조선 중기 삼당시인중의 한 사람인 蓀谷 李達을 말하며 허균과 허난설헌에게 시를 가르친 스승이며 필자와 같은 新平李氏입니다. 우리 가문에는 역사에 기록되는 유명인사는 雙梅堂 李詹(1345-1405)선생과 石亭 이정직(1840-1910) 선생만 있었으나 최근 손곡선생이 크게 부각되고 있어 후손으로서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선생의 시를 보이는 대로 정리하려 합니다.

三唐詩人 : 백광훈(白光勳) · 최경창(崔慶昌) · 이달(李達)

 

2. 여성부터 스님까지, 삶을 닮은 시

 

근대 이전의 지식은 두 얼굴을 가진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갈파한 것처럼 책을 읽으면 선비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라는 표현은 그들의 두 얼굴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벼슬에 나가기 전에는 열심히 글을 읽는 지식인의 모습이지만, 정계에 진출하면 대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3. 새로운 시의 가능성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머무를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고개를 들면 모든 것이 변해 있다. 만물의 덧없음을 느끼는 순간 자기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꿈틀거리는 욕망이라든가 명예욕의 덧없음을 깨닫고,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된다.

 

4. 천기, 개성 그리고 이옥의 한시

 

천기를 발현한다는 의식도 없이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한 작가로 우리는 문무자 李鈺(1760-1815년경)의 작업을 들 수 있다. 그는 정조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文體反正의 덫에 걸려 과거시험 응시 자격도 정지되고 멀리 군역에 다녀오기까지 하면서도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고 주옥같은 소품문과 아름다운 한시를 남긴 인물이다. 이옥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비정하려고 애를 썼다. ...이옥은 인간의 가장 솔직한 감정을 남녀 간의 정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무늬 보자기로 싸서

대나무 상자에 넣었답니다.

밤마다 낭군님 옷 마름질하니

손도 향기롭고 옷도 향기롭네요.

 

사경이면 일어나 머리를 빗고

오경이면 시부모님 인사 올리네.

맹세컨대 친정집 돌아간 뒤엔

먹지 않고 종일토록 잠만 자리라.

 

하나는 고운 옷감 고이 간직하다가 사랑하는 님의 옷을 지으면서 행복한 마음을 드러내고, 하나는 시집살이 힘듦을 기가 막히게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네요.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오늘날 그 어디에서 저런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수나 있을까요?

 

 

5. 개성과 격조사이에서

 

김정희의 문자향 서권기이다.

(구양수가 시를 논하면서 곤궁해져야 시가 좋아진다.’라고 했다. ....부귀하면서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또한 곤궁하게 된 뒤에 더욱 그 시가 좋아지는 것이니 빈천함에서 오는 곤궁함으로는 도달한 수 없는 바가 있다.)

부귀하게 지내던 사람이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곤궁한 처지로 떨어지고, 그런 환경에서 깊은 고민과 사유를 곰삭여서 좋은 기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부귀함을 누리는 자들이 빈천한 처지로 떨어지기를 바라기나 하겠는가? 어쩌면 김정희 선생의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이미 부귀함을 얻고 맛보고 즐긴 시인은 이미 시인이 아니다. 그는 정치시, 이념시, 사상시는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자연과 인생을 말하는 시는 지을 수 없다. 진실이 아닌 거짓 말장난이라 해도 무방하다.

 

 

 

2

 

대필작가부터 표절시비까지,

 

명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표절과 창조 그 미묘한 차이

 

중국 사신들이 왔을 때, 주고받은 시문을 모아놓은 황화집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영의정 유영경(1550-1608)의 작품은 모두 최립(1539-1612)이 대신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粧點은 서거정이 자주 사용한 點化와 같은 뜻인데 화장을 해서 아름답게 꾸민다는 의미로 이는 옛사람의 시문을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는 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말한다.

(옛사람의 뜻을 바꾸지 않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을 換骨이라하고, 옛 사람의 뜻을 본받아서 그려내는 것을 奪胎라고 한다.)...

문제는 환골탈태라는 문학적 수법이 자칫하면 표절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아무리 뛰어난 시인도 다른 사람의 글을 오랫동안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좋아하는 시인의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다. 무의식중에 표절이 자행되는 것이다.

 

2. 그림속의 시 시 속의 그림

시는 형상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상 있는 시이다.

문인들에게 시와 그림과 글씨는 하나의 예술적 흥치를 통해 인격을 도야하고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였던 순임금의 두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에 얽힌 고사가 있다. 아황과 여영은 요임금의 딸로 모두 순임금에게 시집갔으나 순임금이 죽자 상강에 투신하여 자살한다. 이들의 눈물이 떨어져 소상강가의 반죽(斑竹: 검붉은 빛이 줄기에 얼룩진 대나무)이 되었다고 한다.

 

윤덕희(1685-1776)그림 그린 부채에 쓰다

물이 줄자 바위 드러나고

서리 맑아지자 나뭇잎 드물다.

저녁 햇살 비끼는 청산 저편으로

아스라이 기러기 한 마리 돌아간다.

 

이달의 시 산사

절은 흰 구름 속에 있는데

흰 구름을 스님은 쓸지 않는다.

나그네 오자 비로소 여니

온 골짜기에 소나무꽃 흐드러졌네.

 

대추를 터네

이웃집 꼬마들 와서 대추를 털자

주인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들 쫓는다.

꼬마들 도리어 늙은이 향해 소리치네.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못 사실걸요.

 

3. 한시 속에 스민 음악

서유구(1764-1845)82세 되는 해 병이 위독해졌다.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자기 옆에서 거문고를 타게 했는데, 그 연주가 끝나자 세상을 떠났다. 서유구는 고위관직을 지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만년에는 모든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축적한 가산을 죽기 전에 다 나누어 주고 거문고를 들으면서 평온하게 잠들면서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변화가 일정한 형식을 만든 것을 이라고 한다. 음을 배열하면 그것을 연주하고 여러 춤의 도구에 이른 것을 이라고 한다.

한시의 음악적 차원을 구성하는 핵심이 바로 聲律이다. ...한시를 짓는 조선의 선비들 입장에서는 한자 하나하나의 뜻과 발음은 물론 그 글자의 높낮이(성조)를 외워야만 했다. ...그래서 선비들의 필수품 중에 韻書가 빠지지 않았다.

 

4.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서 서성거리기

작가의 발언은 때때로 사회적 파장을 크게 일으킨다.

사마천(BC 145년경-BC 85년경)사기는 역대 문인들이 도달하고ᄌᆞ 했던 장쾌하면서도 뛰어난 문장의 모범이다. ...도대체 사마천은 어떻게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사마천의생애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이점을 발견했다. 젊은 시절, 중국 천하를 주유하면서 견문을 넓혔다는 사실이었다.

허균은 조서와 김구용의 시를 인용한 뒤 이렇게 자신의 평을 덧붙인다.

나는 대장부의 몸으로 좁은 땅에 태어나 천하를 유람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두 분은 비록 이역에 유배되었지만 오초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장쾌한 일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공자가 노나라 무성에 들러 이곳을 다스리는 제자인 자유에게 어떤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었고, 자유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인재를 얻었노라고 대답한다. 길을 갈 때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개인적인 일로 자신의 방을 찾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3

인상비평부터 원류비평까지 무엇으로 한시의 품격을 논하는가

1. 음식의 맛, 작품의 맛

어떤 사람은 한 겨울 눈 내리는 풍광을 보면서 얼음이 서걱거리는 막걸리 한잔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 그렇습니다. 오늘날 모두들 바쁘고 바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환갑 진갑 지나면 어른이었습니다. 큰 아들 나이가 40이니 일을 놓고 편하게 지낼 나이였지요,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6563세로 지금 제 나이였는데 수염을 길게 기르신 틀림없는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 친구들은 마냥 편히 지내며 노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직업을 가지고 일들을 하고 있네요. 그러니 언제쯤이면 눈 내리는 겨울 시골집에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하나, 나보다 일 년 늦게 퇴직하는 강교장, 김교감, 김선생이랑? 그리고 다시 사업을 시작한 오사장, 전교장, 채교수까지 함께?

하나, 초등학교 친구들인 영수, 기선이, 해정이, 준기랑?

하나, 호적이 늦어 지금도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서울의 재호 형이 전환이 아저씨와 같이 고향에 내려오면 재철이 형과 함께?

하나, 3년 후면 퇴직하는 권 교수, 신 교수, 강선생 심사장 등이랑?

  80년대 말경 오성수 사장, 김호길 선생, 채수환 교수랑 시골 선 막걸리 주막집들을 찾아다니며 두부 한 모와 시디 신 김치를 안주로 하여 맛있게 마시던 때가 매우 그립습니다. 꼭 다시 그런 시절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음식의 맛으로 문학론의 얼개를 만든 사람은 허균이다. 일직이 음식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남긴 일이있다. 도문대작이라는 이 책은 그가 함열로 귀양가 있는 동안 집필하였다.

생활의 무게로 무디어진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문학작품이다.

 

2. 인상비평을 위한 변명

척보면 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저것 복잡한 분석을 하지 않아도 보는 순간 안다는 말이다. 세상 살아가다 보면 기쁜 일도 많지만 험한 일도 많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서 무언가 일을 하고 그 안에서 이익과 손해를 보기도 한다. 삼라만상을 무대로 살아가는 중생들의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연구하고 분석해서 알아낸다는 것을 앺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보고 아는 것이다.

...‘첫 인상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종류에 속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서 인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삶의 방식을 유추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의 첫 인상이 훗날 정확히 맞는 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육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감탄 같은 것을 느낀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것도 뛰어난 능력이다. 어떤 작품이 잘된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독자요, 비평가라 할 수 있다.

홍만종은 시림총화에서 시를 알아보는 것은 시를 짓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한 바 있다.

 

3. 불평의 시학, 화평의 시학

돈맛을 알면 좋은 글을 못 쓴다는 속설이 있듯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좋을 글을 생산하기 어렵다고 공공연히 말해진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듯이 어렵고, 힘든 시련을 겪으면서 위대한 시는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나라 잃은 민족의 시련기에 김구선생이, 안중근 의사가, 유관순 열사가 나타나시고, 나라가 곤궁에서 허덕일 때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이 나타나시고,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나타나 우리나라를 이 만큼 만들어 냈듯이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개인의 삶이 위태롭고 힘들 때 김소월이나 윤동주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민족의 고난도 운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세태를 좇아 살다간 서정주니 모윤숙이니 하는 분들이나 요즈음 무슨 위대한 반체제 인사나 된 것처럼 정치에 뛰어들어 떠들어 대는 어느 유명한 두 시 쓰는 사람들은 이미 나의 존경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지금도 그 중 한 시 쓰는 사람의 강연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면서까지 감동했던 것이 억울하고 분하다.)

나는 부연한다. 詩人이 정치에 참여하면 그는 이미 참 시인이 아니고, 神父가 정치에 끼어들면 그는 이미 참 신부가 아니다. 이미 그들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다. 나는 그들이 전혀 존경스럽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 그들을 오히려 輕蔑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자신의 글에는 謙辭를 하고, 다른 사람의 글에는 稱頌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한유(768-824)가 절친한 벗인 맹교(751-814)를 위해 쓴 글의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대개 만물은 평정함을 얻지 못하면 소리 내어 운다. 소리 없는 초목들도 바람이 뒤흔들면 울고,.....사람에게 있어서 말도 그와 마찬가지라서,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말을 하게 된다. 노래를 하는 것은 마음속에 생각이 있기 때문이고, 통곡을 하는 것은 마음속에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를 내는 것은 모두 평정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4. 작품에 드리운 옛 사람의 그림자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작가로서의 글쓰기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서거정(1420-1488)동인시화에서 아무리 뛰어난 시라도 구절마다 전거나 원류를 가지지 않는 구절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물론 그는 각 구절의 원류를 하나씩 예거한 뒤에, 이혼(1252-1312)이 비록 다른 사람의 시구를 이용하여 작품을 짓기는 했지만 구성과 변용이 뛰어나고 격률이 삼엄하다는 높은 평가로 끝을 맺는다.

 

이백(701-762)금릉의 봉황대에 서서

 

봉황대 위에선 봉황 노닐더니

봉황가고 누대는 비고

강물은 절로 흐른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그윽한 길을 뒤덮고

진나라 때 귀인은 옛 무덤이 되었다.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떨어지고

이수는 백로주 한가운데를 나누었다.

뜬구름이 해를 온통 뒤덮어

장안이 뵈질 않으니

사람을 시름겹게 하는구나.

 

금릉은 지금의 난징으로 위진남북조 시대(220-589)의 오나라와 남조인 동진, , , , 진의 서울이었다.

 

이혼(1252-1312)서경의 영명사에서

 

영명사 안에 스님은 뵈질 않고

영명사 앞엔 강물 절로 흐른다.

산은 텅 비어

외로운 탑은 뜰 가에 서 있고

인적 끊어져

작은 배는 나룻가에 비껴 있다.

먼 하늘 날아가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가.

넒은 들판 동풍은 물어볼 곳 없는데

옅은 연기 비낀 해는

사람을 시름겹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