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언행 모음집
잠깬 정신
맘을 갖자
도서출판 Book Manager
최구남 엮음
1
●저자인 최구남 선생은 나의 고교 동기 동창으로 지난 8월 말로 사립 인문계고 교사로 정년퇴직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 나와 같은 문과였고, 같은 반 이었으며, 입학 시기는 다르지만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에 편입하여 중등에서 교편을 잡은 것도 같으니 지금까지 40여 년 간 거의 같은 인생길을 걸어 왔다고 하겠다.
엊그제 재경 남성동문 가족동반 한마음 체육대회에 함께 다녀와 동기들끼리 양푼국수로 저녁을 먹고 난 뒤 그는 조용히 아주 겸손하게 이 책을 친구들 앞에 내밀었다.
“우리 아버님께서 살아계실 때 내게 남긴 말씀들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보았는데 친구들에게 한권씩 나누어 주고 싶네만 많이 망설여지네. 원하는 친구만 한권씩 드림세.”
내가 기꺼이 받아와 읽었다.
●고교시절 최구남 친구에 대한 지금도 가장 선명한 기억이 있다. 고3 학기 초 어느 날 앞뒤로 앉은 친구들 몇몇이 잡담하던 중에 농사얘기가 나왔다. 최구남이가 자기네 집은 농토가 많다고 하기에 내가 살며시 물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다는데 그럼 논이 몇 마지기냐?”
최구남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이 백 팔십 마지기!”
나는 기겁할 만큼 놀랐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도 가장 부자가 대개 논 50마지기를 짓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어 물었다.
“그럼 머슴은 몇 명이냐?”
“열 명 정도 돼!”
다시 한 번 놀랐다. 내가 사는 김제군의 백산면, 공덕면일대에서 머슴을 두 명이상 둔 집이 있다는 말은 대 부잣집인 유흥순, 유흥철씨 형제 이외에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그럼 나락이 천 가마도 더 나올 텐데 어디에다 보관하냐?”
“창고가 큰데 그 나락을 다 넣으면 높이 쌓아져 천정까지 닿을 정도지!”
그의 집은 나와 같은 김제군이지만 들녘인 진봉면이다. 당시 우리 김제군은 한국에서 가장 큰 호남평야의 중심으로 쌀이 가장 많이 나는 곡창지역이었다. 인구가 25만 명이 넘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군으로 가장 잘사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백산면, 외가가 있는 공덕면과 청하면 등은 낮은 구릉지대여서 당시만 해도 산과 밭이 많고 논은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부터 간척이 된 죽산면, 광활면, 진봉면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산은 없고 완전히 논 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가 사는 진봉들녘은 가 본 일이 없기에 아무리 부자라 해도 그처럼 많은 논을 소유한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겨우 논 밭 합쳐 5천여 평을 가진 우리 집도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머슴을 두었는데, 구남이네 농토가 무려 6만 여 평이라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놀람 때문에 그 날의 대화는 지금까지 오래토록 각인된 채 기억되고 있다.
2
●이 책은 최선생 아버지께서 남기신 글과, 아버지로부터 들은 교훈과, 자신의 어린 시절 행적 등을 함께 묶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주신 교훈이나 가정사보다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농촌에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의 경제적 측면에서의 위대한 모습과 그 분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본 받아야 할 내용 몇 구절을 찾아 적어보기로 한다.
3
●집에는 가끔 먼 곳에서 꿀 장수들이 오곤 했다. 아마 지금 생각하면 무주나 진안 장수에서 꿀을 가지고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께서는 큰 양철통에 든 꿀을 통째로 사곤 하셨다. 그런데 꿀을 판 아주머니들이 계산을 끝내고 가면서
“밑지고 팔았다.”
라고 말하면, 아버지께서는 쌈지를 꺼내시며
“얼마나 더 주면 되는가?”
하고 물으셨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장수들이 의례히 하는 말이다.”
라고 말씀하셔도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돈을 더 주려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마음이 아주 넉넉한 부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냥 믿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부자들이 더 인색한 세상 아닙니까? 나는 어제 이삿짐센터 사장이 약간 허풍을 치며 전화 약속한 이상의 경비를 요구했지만 그냥 요구대로 계약했습니다. 그의 말이 큰 거짓이 아닐 것이며, 더 달라는 돈이 그리 큰돈도 아니고, 달라는 대로 주는 만큼 일도 잘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20대 때 밤낮으로 어머니와 교대로 새끼를 많이 꼬아 마당에 쌓아놓으면 사람들이 사갔다고 했다.
※1930년대에 일제 새끼틀을 사서 밤새 부부가 새끼를 꼬아 파셨다는 겁니다. 그런 근면이 많은 부를 축적한 바탕이었을 겁니다. 경제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은 과잉복지니 연금문제 등으로 항상 다투고 말이 많습니다. 마치 경제적 평등세상을 만들려는 듯이 복지만 외치니 어떤 사람들은 아예 불법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가 들통이 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일단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뒤 부러 일을 안 하고 놀고먹는 생활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기초생활 수급자들이 결코 경제적 무능력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런 계층이 된 듯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는 능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정하여 국가가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일이니 결코 자랑할 수 있는 자신들이 아닌 데도요.
요즈음 사람들이 나라 경제가 걱정되어 돈을 안 쓰기에 돈이 돌지 않아 오히려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정부는 소비를 권장하는 추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몸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열심히 일하며 절약하는 생활을 오랫동안 끈기 있게 지속하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이 시대에 가난은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최구남 부모님은 그런 면에서 매우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잘살아보기 위한 지혜와 노력이 남다른 분들이었습니다.
다만 장애우들이나 건강하지 못한 분들은 국가와 사회와 이웃이 최선을 다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지금 잘 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께 논을 사달라고 했다. 다른 논에 비하여 논 값이 훨씬 쌌다. 그 논은 잡초가 많아서 어느 누구도 그 논을 사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가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해 농사를 아무 문제없이 지으셨다고 한다. 잡초를 완전히 제거하여 다른 논과 다름없이 지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힘써 잡초의 뿌리를 완전히 뽑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근면함과 성실성을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학교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등 그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다.
※여러 곳에서 공부보다는 건강과 특기 신장을 챙기시는 아버지로 그리고 있다. 매사에 흥미와 관심이 크시고 격물치지와 탐구정신이 크신 분으로 보인다. 말씀보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자식사랑을 보이신 분 같다.
●아버지께서 훗날을 도모하시어 시제답으로 논 600평(3마지기)를 내놓으셨다. 문중 어른들이 힘을 모아 그 소득을 잘 활용하여 논 2110평, 밭 2,000여 평으로 늘렸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지표상 미국에 버금한다고 한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재산은 크게 늘어난다.
예전의 농업사회에서는 부자가 여유 있는 쌀 100가마를 빌려주면 연이자가 40가마였다. 당시 쌀 한가마는 어려운 사람들의 한 달 생활비였고, 흉년에는 쌀 두가마로 논 한 마지를 쌀 수 있었다고 하니 이자로 받은 쌀로 매년 10여 마지기나 살 수 있었다. 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는 농촌의 경제구조였다. 기왕의 부자들이나 최구남의 아버지처럼 근면과 성실로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는 가진 땅이 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수십억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또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벤처산업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여 삼십대나 사십대에 이미 수천억의 재산을 형성하는 부자들이 막 생겨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큰 부자가 되고 능력 없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늘날은 다들 없는 것 없이 살아간다. 동네 포차주인이 포차옆에 중형 자가용을 세워놓고 있다. 富益富 貧益貧 문제는 우리가 함께 걱정하고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는 하여야 하나, 결코 막을 수는 없는 현상이며 이를 막기 위한 지나친 정책을 펴서도 안 된다. 누구라도 부자가 되기 위한 꿈을 꾸어야 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부자들이 정당하게 세금을 잘 내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많이 기부하는 사회를 만들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자 어머니께서는
“아이들을 말로 잘 타일러서 가르치되 말로 안 된다고 남의 자식을 때려서 까지는 가르치지 말거라.”하고 말씀하셨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를 따르지 못하여 젊은 시절 해리중과 대성고에서 제자를 감정적 폭력으로 다룬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경험을 두 번 가지고 있다. 월명여중에서 학생부장을 하면서 체벌을 한것은 전적으로 학생지도상 전혀 감정이 없이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기에 큰 부끄러움은 없다. 그 이후(1998년) 나는 교육적 체벌마저 일체 하지 아니했다.
●나는 철궤를 열고 헝겊으로 만든 쌈지를 감은 끈 모양을 잘 보아두었다가 돈을 훔치기 전과 똑 같이 해놓았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한 완전무결한 절도를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계속했으나 단 한 번도 걸려서 아버지께 꾸중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의 월급은 어머니가 관리하셨는데 용돈이 워낙 궁한 나는 벽장에 둔 아버지의 월급봉투에서 가끔 천 원짜리 지폐를 한두 장씩 몰래 꺼내 쓰곤 했다. 당시 공무원 초임월급이 12만원 정도였으니 천원이면 오늘날 만 오천원 가량 되는 돈인데 어머니께선 한 번도 이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 사립대학에 편입하여 다니고 동생들이 많아 용돈이 적었으나, 함께 어울리는 후배들은 부잣집 아들들이어서 그들과 조금이라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저지른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어머니의 넓으신 아량과 하해와 같은 아들 사랑에 항상 감사드린다. 지금도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심에 항상 감사드리며 내가 잘 갚아드리면서 살아가리라.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셨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네 친구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당시 시골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찾아보니 군산중학교만 개교한 상황이다.) 알고 싶어서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 중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수학문제라고하자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가져오라고 하여 며칠을 생각하여 결국 그 문제를 푸셨다고 한다. 얼마나 생각하였던지 코피가 났다고 하셨다.
●형이 이리시(현 익산시)에 있던 전북농대에 다닐 때 아마 내가 6-7살이 되었을 쯤 아버지와 함께 갔다가 걸어서 오는 길이었는지 늦은 저녁때 쯤이었다. 아버지께서 목천포 다리를 건너기 전 뚝방에서 팔뚝같이 긴 빵을 사주신 것이 생각난다.
※1958년경이다. 나는 그 해 할아버지를 따라 아버지가 훈련 중인 논산훈련소에 다녀왔다. 연무대에서 군대 짚차를 얻어 타고 금마로 와서는 버스로 이동하여 집에까지 왔는데 깜깜한 밤이어서 금마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곱 살짜리 구남이는 거의 70리 길을 걸은 것이다. 대단하다.
●시골집 마루에 생선장수가 다라이를 놓고 생선을 사라고 하면 아버지께서 보시고는 만약에 알을 밴 생선일 경우에는
“누가 알을 밴 생선을 잡아오라고 했는가?”라고 나무라시고 절대 사지 않으셨다.
나는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다.
“알 밴 그 고기를 잡지 않았다면 그 알도 한 세상을 살고, 우리는 더 많은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구남이 아버지는 한학을 깊이 한 분으로 이미 자연의 순리와 이치 그리고 동물에 대한 참사랑을 깨달으신 분이다. 우리는 동물보호를 외치고 천연기념물을 보호한답시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어느 하루도 육식동물과 어류를 먹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동물을 사랑하자고 외치며 사랑할 수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동물은 가축으로 길러서 우리 사람이 잡아먹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고 죄악이 아니라고 결정하고, 인간에게 해가 되는 동물은 총으로 쏘아서라도 제거하는 것을 모두가 허용한다. 다만 자연 속에 살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동물은 인간들이 굳이 해치지 않기로 합의한다. 인간의 만용과 사악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누구도 이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스님들이 고기를 먹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재산이 좀 많은 것은 재산을 늘리는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머리를 깎지 않아 이발비를 아끼는 등 절약을 했고, 자식이 적어 돈을 쓸 곳이 많지 않아 재산을 좀 모은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잘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약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절약과 저축을 기본정신으로 하되, 분수에 맞게 소비도 잘 하는 사람이 좀 더 행복할 수 있고 나라 경제도 살리는 길이다.
●성산이 형이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려 찾아뵈었다. 형이
“제 생각에는 몇 년 만 있다가 결혼을 하면 논 한 필지를 살 수 있는데 아버지께서 지금 결혼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형의 재촉에 하신 말씀은
“왜 논 한필지만 사려고 하느냐? 들에 있는 논 다 사고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라고 되물었다는 이야기를 형에게서 들었다.
※자수성가하여 큰 가정경제를 일으킨 분이지만 돈을 우선시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요, 일의 경중에 따라 순서를 잘 정하라는 말씀이시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적어지면서 취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결혼을 미루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의 꿈을 꾸고 기약하였다면,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었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가정부터 꾸리고 함께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의 자식은 나와 생각이 다르고 그래서 자기 식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강제할 생각이 없다. 나의 인생은 내가 추리고 저의 인생은 30이 넘었으면 자기 의지대로 제기 추려나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안향리 사람들이 우리 논으로 농로를 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부당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께
“우리 논이 작아져 손해입니다.”라고 하자
“안향리 사람의 논으로 길을 내면 자연을 해쳐 좋지 않다, 그리고 그 논이 언제까지나 우리 것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크신 대인의 풍모, 군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우리 주변에 아무리 부자라도 저처럼 마음이 크신 말씀을 하시는 분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가진 만큼 재물에 대해서도, 남에게도 너그러워야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평소에도
“많은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지닌 기술이 중요하다. 만약의 경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매 몸에 기술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한학을 하신 분이고 이미 많은 재력을 쌓은 분이심에도 기술을 강조하시고 있는데 이는 자립정신과 자력갱생의 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김제장에 갔다 오시면서 책을 한권 사다주셨다.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문이 있는 책이었다. 내가 웅변을 잘 했으면 해서 그런 책을 사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한학을 하신 분인데 저런 책을 직접 사다주시는 것이 놀랍고 자식교육에 관심과 기대가 크신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일을 하시는 일꾼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다.
“자네가 우리 일을 할 때는 내가 술과 담배를 사주지만 비가 와서 일을 하지 못하는 날은 자네 돈으로 술과 담배를 사야 할 테니 어찌 잘 살 수 있겠느냐며 배가 고파 밥을 더 달라면 얼마든지 더 주겠다. 그리고 우리 일을 할 때 술과 담배를 주지 않는 대신 그만큼 돈으로 주겠다.”
고 하셨다. 그런데 일꾼들은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았고 술과 담배를 원했다.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각고의 노력과 인내와 절약과 창의력으로 이미 40대에 큰 부를 이루신 아버지와 보통사람들의 차이를 보여준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열심히 하면 공부를 어느 정도는 잘 할 수 있고, 누구라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어느 정도의 부자는 될 수 있다.
●어느 겨울날 동네 청년들이 합동으로 꿩 몰이를 했다. 집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서인지 쫓긴 꿩 한 마리가 큰방으로 들어왔다. 청년들이 몰려와 꿩을 내어 놓으라고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지갑에서 얼마의 돈을 주어 청년들을 돌려보낸 뒤 나중에 꿩을 날려 보냈다.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보통사람들은 저런 일에 함께 즐거워하리라. 돈이 있다고 행하는 일이 아니다. 부자들은 활과 총으로 산짐승들을 사냥하며 즐긴다.
●자기 재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것이 있어야 마음을 붙일 곳이 생겨 마음이 안정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행복지수는 힌두교를 믿는 가난한 인도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에서 오히려 높고,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임에도 행복지수는 부끄럽게도 하위권이다. 돈이 많아서 행복한 것은 절대 아니로되, 다른 조건이 잘 갖추어진 사람이 이왕이면 재산까지 잘 갖추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훨씬 더 쉽게 추구할 수 있으리라. 아버지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인공 때 우리 동네에서는 세 사람이 지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 날은 인민군이 후퇴하는 날로 자기편에 들지 않은 사람을 죽이고 가는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동네 모정 쪽으로 가시자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이야기하다가 뿔뿔이 흩어지는데 아버지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동네 어느 한 분이 찾아와 오는 밤 3명을 손보기로 했으니 피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는 지목받은 세 사람 중 한 분을 찾아갔더니 벌써 알고 피하였고, 또 다른 한 분을 찾아가니
‘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도망 가냐?’
고 하면서 듣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만 들판에 있는 논의 벼 사이에 숨었다고 한다. 숨지 않은 그 분은 여러 사람에게 붙잡혀 관기 지서로 끌려가는데 외아들이 울면서
‘우리 아버지 살려 달라.’
고 애걸하며 뒤따라오고, 관기 지서에서는 먼저 잡혀온 사람들을 죽이는 총소리가 탕! 탕! 하고 들려오자 잡아가던 사람들이 마음이 약해져 지서에서 650미터 떨어진 〈세 가옥 뜸〉 쯤에서
‘우리가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라면서 가던 길을 되돌아와 우리 동네에서는 희생자가 없었다고 한다.
※북한이 저지른 6.25 침략전쟁 때 인민군이 무고한 양민을 죽인 생생한 증거자료다.
●농한기에는 누에를 많이 키웠다. 버스에 누에고치 포대를 여러 개 싣고 공판장에 갈 때 버스운전기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공판장에 가면 어머니께서는 좋은 등급을 받기를 희망하셨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었다.
※우리 집도 고교시절 누에를 길렀다. 밭이 많지 않고 일손이 없으므로 한 장(2만 마리) 또는 두 장을 길렀는데 다 길러 좋은 등급을 받으면 큰 수입이었다. 오늘날 가격으로 한 장에 100만 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우리 집이야 누에수입이 큰 소득이라서 기르지 않을 수 없었지만, 부자인 최구남이네 집에서 구태여 누에까지 기를 필요가 있었을까? 좀 지나친 것은 아닐까? 족 한 줄 알면 몸도 조금은 편해져야 하는데 부잣집 마나님으로서는 어머니의 육체노동이 지나쳤을 터이다.
●아버지께서는 논을 사더라도 이전을 잘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농지법이 3정보 이상을 소유할 수 없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내심 걱정이 되었던 나는 아버지께
“논을 사면 우리 앞으로 이전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이전을 하였다가 농지법 적용으로 논을 국가에 빼앗기는 것보다는 이전을 하지 않아 전 주인이 소유권을 주장해 그 사람에게 논을 빼앗기는 것이 낫다. 전 논주인은 친인척이거나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논을 샀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 논이 내 것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 된 것이다.”
※사람을 믿는 통 큰 마음을 가지셨고, 친인척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남을 용서하는 마음도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라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일종의 재산공유개념을 가지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충분한 재력이 있으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선영에 비석을 세운적도 없었고, 비석을 세운다거나 재실을 짓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절약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돈을 어떻게 하면 많이 벌 수 있다든가 그런 말씀은 않으셨다.
※재력이 있지만 겸손하시고 돈에 집착하지 아니하신 참 선비시다.
●우리지역에서는 소작을 어우리라고 했다. 우리 논을 어우리 짓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농사짓기 전에 일정한 임대료를 내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다.
“만약에 선세를 주고 땀 흘려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 농사를 망쳤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 농사가 잘되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고, 농사가 잘못되면 그 사람도 좀 손해보고 나도 좀 손해 보고 하는 것이 옳다.”
※조선후기 18세기 이후 대부분 賭租法으로 바뀌었으나 규남이네는 여전히 打租法으로 도조를 받았던 모양이다. 타조법은 소득의 반을 주인에 주지만 도조법으로는 대개 소득의 삼분의 일 정도를 주게 되었다. 농촌은 텅 비어 농민 인구가 6%인 오늘날 대한민국은 모두 도조법을 적용하고 어우리 짓는 사람들은 보통 수 만평(수 백마지기)씩 지어 연 수입이 수 천 만원이어서 재산은 없으나 몸이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똘똘한 사람들은 이미 크게 재산을 형성한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논 300마지기(6만평)를 소작하는 사람이 한마지기에서 쌀 4가마가 산출되면 주인에게 1.5가마를 주고 경영비에 최대 1.5가마를 사용한다 해도 1가마는 남는다. 순 소득이 300가마이므로 연소득은 5,000만 원 정도 된다. 대부분 농기계를 사용하고 본이들이 직접 일을 하므로 실제 수입은 더 크다고 한다. 익산의 목천포에 사는 어느 농부 3부자는 소작을 수 백마지기 짓는데 3부자 모두 외제차를 탄다고 한다. 내 후배의 논을 짓고 있는 사람이므로 팩트이다. 아버지는 비록 변화를 거부하신 것이지만,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깊은 뜻이 있었다.
●생선 장사를 하시면서 아이들을 잘 키운 할머니에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요즈음은 막내가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좋은 곳에 취직도 하고 큰 아들이 논도 백마지기 넘게 짓고 해서 살기가 좋겠습니다.”하니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내가 생선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아이들에게 돈을 줄 때가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용돈을 주지만 나에게 주권이 없어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돈이 많다거나 권력이 크다거나 명예가 높다거나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능력을 발휘하여 보람을 얻어가며 사는 것, 그 과정에서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주권(경제권)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모님의 재산은 그 분들 마음대로 쓰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큰 교훈이 되는 할머니의 말입니다.
●초등 5학년 때 쯤 아버지께서 만화책을 비료포대 두 개에 담아 오셨다.
※부자 아버지의 통이 크시다. 당시 학교에는 동화책이나 동시집은 있어도 만화책은 없었다. 나는 5학년 때 김제 시내에 엄마를 따라가서 만화책 두 권을 사온 기억이 있는데 짜장면 한 그릇 사먹지 못하던 시절에 만화책을 사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은 내 친구들 중에 별로 없었다. 사온 만화는 만화를 좋아하는 6학년 선배들과 서로 바꿔 읽었는데 구남이는 비료포대로 담아와 읽었다니 부럽다.
●아버지께서는 술, 담배는 전혀 하시지 않으셨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서 논다든가 잡담을 한다든가 도는 모정에 가셔서 사람들과 어울린다든가 하는 일이 전혀 없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사서 삼경을 공부하신 분이시고, 마을에서 가장 부자이신 분이라 행동을 매우 조심하신 것이다. 남의 농사를 짓거나 무식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하면 존경의 대상이 되기 힘들고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몸가짐이 바르고 행동을 조심하시는 모습이 농사짓는 선비답다.
●내가 가족계획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맬더스의 인구론을 들어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역설하니
“쥐는 한 번에 여러 마리 새끼를 낳고 사람보다 회임기간도 짧다. 그러니 말대로라면 온 세상을 쥐가 다 차지할 것 아니냐? 절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크신 분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은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수준인데도 먹을 것이 부족하기는커녕 먹을 것이 넘친다. 세계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하며 만경강 양안의 논은 만경강 환경개선사업을 한다고 거의 농사를 중단시키고 파헤쳐지고 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보상하고 논들은 메꾸어져 건물들이 들어선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수준이어서 장차 언젠가는 인구가 제로가 되는 시대가 온다고 하는 보도를 보았다. 대한민국 땅에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된다? 웃기는 통계다. 자연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돈 계산을 분명히 하셨다고한다. 어떤 때는 너무 세밀하고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을 빌려간 당숙의 입장에서 야속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큰돈은 오히려 거리낌 없이 썼다고 한다.
※경제운영을 하시는 방법이 모범적이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돈을 벌 때 매우 짜지만, 쓰는 데에도 매우 인색하다. 부자들이 본 받아야 한다.
●비오는 날에도 형이 벼를 베고 있었더니 ...아버지께서
“일 잘한다고 잘사는 것 아니다. 쉬어가면서 해라.”라고 하셨다.
※건강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씀이고, 돈만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우리는 군산에 가는가? (0) | 2014.11.19 |
---|---|
창문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0) | 2014.11.11 |
한시의 품격 (0) | 2014.10.17 |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둘째 권) (0) | 2014.09.25 |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첫 째 권) (0) | 2014.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