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오래된 서울

청담(靑潭) 2014. 12. 15. 12:53

 

 

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지음

동하

 

 

1부 서울의 탄생

 

고려시대의 남경행궁은 지금의 경복궁 내 간의대가 설치된 지점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남경으로 들어오는 길은 서쪽으로는 홍제동에서 홍제천을 거슬러 올라가 자하문 고개를 넘어 행궁까지 이르는 세부루트가 정확하다.

사람들의 왕래가 더 많았다는 동쪽 길은 한양 근처의 남경역에서 지금의 서울 도심부를 관통하여 행궁으로 갔는데 .... 신서동역 근처에서 안암천을 끼고 있는 언덕 위의 대광고등학교 자리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2부 꿈꾸는 인왕산

 

인왕산에 기대어 서촌이 형성되었다. 경복궁 좌측에 형성된 마을이다. ...창의궁에서 창의문까지 이르는 곳에 형성되었다.

서촌지역은 자연경관 자체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내가 아직 서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지난 가을에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을 관람하고 가족과 함께 통의파출소 부근으로 나와 잠간 골목길을 구경한 일은 있다. 이 서촌마을을 아우르는 인왕산 자락을 옛 시절 경치가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촌에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정선(1676-1759)장동팔경첩이나 청풍계』 『인왕제색도등 다른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고, 궁궐 가까운 마을이라 고관대작들이 대를 이어 살던 마을이라 대단한 사저들이 많았다.

 

중인들의 시사는 대부분 인왕산 계곡에서 이루어졌다. 16세기 말 유희경(1545-1636)과 같은 탁월한 중인시인이 나타나면서 그를 중심으로 문장에 한 몫 하는 중인들이 결집하거나 사대부들과 어울리는 모임이 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희경은 중인신분으로 47세인 1591년에 부안에 와 기생 매창(1573-1610)과 사랑을 나눈다.

[젊은 시절 부안을 지날 때였다. 이름난 기생 계생(매창), 유희경이 서울의 시객(詩客)이라는 말을 듣고 물었다.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 가운데 누구신지요?” 대개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지역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파계를 했다. 시로 풍류로써 통했기 때문이다. 계생 역시 시를 잘 지었는데, 매창집이 간행되었다.]

 

남쪽 지방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어

시와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리더라.

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유희경

 

임진왜란으로 헤어지고 유희경은 그 후 벼슬을 받고 시인으로, 예법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며 출세하게 된다. 유희경을 그리며 외롭게 산 여류시인 매창은 15년 만인 1607년 다시 만났으나 곧 헤어지고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3년 만에 세상을 떴다. 스물여덟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유희경은 그 후로도 26년을 더 살았다. 방학 중인 1월 초에 오랜만에 우리 학생들과 문학기행차 아름다운 여인 매창을 찾아 매창공원에 가게 될 듯하다.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러워서

달빛 젖은 매화를 홀로 사랑하지요.

사람들은 내 마음 알지 못하고

오가는 손길마다 추근대네요. -매창

 

 

제 3부 서촌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

 

●정체성 변화로 몸살 앓는 서촌...친일파들이 몰려들다. ...이완용(1858-1926)의 집이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3년 옥인동 19번지에 들어선 그의 집은 말 그대로 대저택이었다. ...그의 아들 집을 제외한다 해도 3500평 가까운 규모다.

 

●옥인동에는 또 다른 친일파의 거두 윤덕영(1873-1940)도 자기 집터를 정했다. 그의 집은 1만 6628평이나 되었다...계속 주변 토지를 매입해 1927년에는 1만 9467.5평에 달해 옥인동 전체면적의 54%가 그의 소유가 되었다...그의 집은 벽수산장이라 하는데 프랑스 어느 귀족의 집 설계도를 따라 지었다고 하며 20여년이 넘게 걸려 1935년에야 완공되었다.

※2만평의 대지에 지어진 벽수산장의 사진을 보면 유럽 영주의 대저택 그대로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재벌도 그런 집에 살지 않는다.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라, 완공된 후 겨우 5년을 살다가 그는 죽고 만다. 그의 사후 양자에 의해 미쓰이 광산에 팔리고, 해방 후 적산가옥이 된 뒤 6.25 직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청사로 쓰이기도 하고, 언커크(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로도 쓰이다가 1966년 사소한 보수공사 중 실화로 건물로서의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김가진(1846-1922)은 서촌사람이다. 청운동 지역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고 아주 훌륭한 건물을 지어 살았다. ...창덕궁 후원 중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고종이 남은 자재로 김가진의 집을 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장안에서 으뜸가는 주택>으로서의 백운장이었다. ...나라가 망해가자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촌에서 살다간 사람의 첫 줄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은 이상(김해경 1910-1937)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나 세 살때 이웃 통인동에 살던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었다. 그리고 큰아버지가 즉은 뒤 큰 어머니가 그 집을 정리하는 1933년까지 스물 두해를 여기서 살고 성장했다.

 

●이상과 친구인 구본웅(1906-1953)은 한국현대미술사에 아주 분명히 자기 자리를 갖는 사람이다. ...허약체질에 후천적 척추이상까지 겹쳐 열여섯 살인 1921년에야 보통학교인 신명학교를 졸업하는데 이때의 동급생이 이상이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기까지 대담한 터치의 야수파 기법에 흠뻑 매료되었다.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동생인 변동림과 폐병장이 이상은 1936년 6월 결혼한다. ...그 다음해 이상이 도쿄에서 숨지자 몇 해 후 그녀는 김환기 화백과 재혼해버린다. 유부남인 김환기와 동거에 들어갔고 1944년에야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상이 서촌을 떠나고 나서 몇 년 뒤 또 한 사람의 고뇌하는 시인이 이 동네에 등장했다. 시대의 아픔을 처절하게 간직한 점은 같았으되 그 양상은 전혀 달랐던 윤동주(1917-1945)였다. ...그는 연희전문 4학년으로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말부터 9월초까지 이곳에서 후배인 정병욱(1922-1982)전 서울대 교수와 함께 하숙을 했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이여성(1901- ?)과 이쾌대(1913-1965)형제는 한국사, 특히 한국미술사에서 아주 드물고 의미 는 존재였다. ...경북 칠곡에서 개화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두 사람은 민족의 역사와 미술, 그리고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이여성은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했으며...아주 엄밀한 고증을 전제로 역사풍속화의제작에 몰두했다. ...이쾌대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 등의 관변전시회를 거절한 일군의 미술가들과 1941년 3월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자신의 궁정동 집을 연락사무소로 삼았다.

 

이여성은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 하면서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진보의 길을 추구하되 당면의 과제는 좌우합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명분에서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북한에서만 나타났다. ..1950년대 말을 고비로 이여성의 이름은 북한의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쾌대는 1946년 말 북한 미술계를 둘러보고 온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1949년에는 암한당국에 의해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고, 6.25전쟁 발발 이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인공치하에서 재건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서울수복이 임박한 9월 20일경 그는 어떤 경위인지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걷지 않아 국군에게 체포됐다. 부산을 거쳐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정전과 함께 가족이 있는 남한이 아닌 북한을 선택했다. ...30년 이상이 흘렀다. 그의 부인인 유갑봉이 간직했던 그의 작품 거의가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는 자발적으로 북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역을 하다가 북쪽으로 끌려갔는데 국군에게 체포된 뒤풀려난 것이 아니라 의용군으로 오인되어 수용서ㅗ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신망을 받았으나 다른 막사의 반공포로들이 좌익제거대상으로 찍어 남쪽을 신청할 경우 풀려나기도 전에 이들의 손에 죽을 것을 우려해 북한행을 선택하여 이주영에게 작품들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쾌대는 우리 역사의 가여운 희생자다. 이념과 정치권력욕이 어우러져 민족분단이 생기고, 김일성 집단이 일으킨 소위 통일전쟁의 발발로 죄없는 목숨들이 스러져 갔다. 억울한 희생자중의 하나가 천재화가 이쾌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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