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청담(靑潭) 2015. 1. 2. 16:31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조선후기 천재 여항인들의 초상

설흔 지음

 

 

여항인 : (마을) (거리), 여염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하지 않는 일반 백성들을 이르는 말.

이 소설은 우봉 조희룡(1789-1866) 호산외기에 기록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채롭게 해석한 창작물이다.호산외기는 조선후기 여항인들의 傳記集으로 1844년 조희룡의 나이 56세 무렵 일차 탈고를 마인 이래 1853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 기존 원고에 田琦傳등 몇 편을 추가하였다. 호산은 조희룡의 호이다.

원래 꼬불꼬불한 골목이란 뜻의 閭巷은 조선후기 문헌에 의하면 서울의 비양반 계층의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여항인이란 18세기 이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통해 형성된 서울의 중간계층을 지칭한다. 주로 중앙관서의 기술직 중인과 京衙前이라 불리는 各司의 서리층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들 중서층은 능력과 경륜이 있어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하대를 받았다. 그들은 신분적 불평등에 민감했지만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길을 모색하지는 못하였다.

 

이 소설은 정독하기에는 매우 힘이 들기에 소개된 18세기 조희룡이 기록한 여항인들에 대한 약간의 소개와 내가 알고 싶어 찾은 내용만 첨가하여 정리한다.

 

1. 최북(1712-1786?)

 

자는 칠칠이다. 호는 호생관이다. 그는 산수와 가옥과 수목을 잘 그렸는데 필치가 짙고 무게가 있었다. 사람됨이 원래 기상이 높고 거칠어서 조그마한 예절에는 스스로 얽매이지 않았다.

 

2. 김수팽전

 

그는 호걸스러운 성격에 절도가 있어 기상이 넘쳤다. 호조의 서리로 일했는데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켰다. 오늘날에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 쾌남아이다. 가끔 내부 고발자들이 마치 의기 있는 사람인양 정치인들과 언론에 의해 치장되는데 역겹기 그지없다. 그들은 전혀 순수하지 않고 오직 출세에 눈이 먼 치졸한 인간들이다. 요즈음 김수팽 같은 사람들이 많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3. 김종귀전

 

세상 사람들이 그를 우리나라 제일의 고수라고 일컬었는데 구십여 세에 죽었다. 현대 한국의 바둑 고수는 조남철, 김인,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등이다. 그중 조남철은 부안출신이고, 이창호는 전주출신이다.

 

4. 임희지(1765-?)

 

중국어 역관이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둥근 얼굴에 뾰족한 구레나룻, 키는 팔 척으로 그 특출한 모습이 꼭 도인이나 신선 같았다. 술을 좋아하여 간혹 밥도 먹지 않고 며칠씩 술에 취해 살았다. 대와 난을 잘 그렸는데 대 그림은 강세황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난에 있어서는 더 뛰어났다.

 

5. 천수경(?-1818)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했고 시에 능했다. 위항(委巷)의 부호들이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를 다투어 초청했다. 학생이 모두 5060명이나 되어 반을 나누어 교육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르치는 법도가 매우 엄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중인이나 상인은 재산을 모으고 지위 상승을 꾀하는 단계에 이렀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과 한시문(漢詩文)의 교육을 절실하게 요청했다.

인왕산 옥류천(玉流泉) 송석(松石) 아래에다 초가집을 마련하고 송석도인이라 자처하며 동인(同人)들을 모아 시를 읊었다. 당시 시인으로서 이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유명했다.

1786(정조 10) 여름에 결성된 이 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옥계시사(玉溪詩社)·서사(西社) 혹은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했다. 이는 뒤에 중인층 시단의 모체가 됐다. 당시 송석원시사에 참여한 사람은 장혼(張混조수삼(趙秀三차좌일(車佐一김낙서(金洛瑞왕태(王太) 등이었다.

 

6. 장혼(1759-1828)

 

서울 출신의 중인인 우벽(友璧)의 아들로,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다.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땔나무를 하고 물 긷는 일을 직접 했다.1790년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의 추천으로 교서관사준(校書館司準)이 되어 서적 편찬에 종사하였다. 인왕산의 옥류동(玉流洞)'이이엄'이라는 집을 짓고 중인 출신의 문인들과 교유하였는데, 이이엄은 한유(韓愈)의 시에서 취했다고 하며, 자족(自足)한다는 뜻이다. 천수경(千壽慶김낙서(金洛瑞) 등과 함께 위항(委巷)문인들의 시사(詩社)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인물로 활약하면서, 1797풍요속선(風謠續選)을 편집, 간행하였다.

또한 규장각 서리로 있으면서 홍석주(洪奭周김조순(金祖淳김정희(金正喜) 등 당대의 사대부 문사들의 지우를 받았으며, 특히 홍석주와는 4대에 걸친 인연으로 더욱 친밀하였다. 초서와 예서에도 뛰어났다. 역사·문학에 관계된 많은 저술들을 남겼으며, 아희원람(兒戱原覽)》 《몽유편(蒙喩篇)등의 사전류도 편찬하였다. 문집으로는 이이엄집이 전하며,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일사유사(逸士遺事)등에 행적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7. 김양원전

 

그는 젊어서부터 협기가 있어서 계집을 사 술을 팔게 하였다. 몸집은 크고 모습은 사나왔으며, 기생집과 도박장을 떠돌아다녔는데 기세가 거칠고 등등하여 사람들이 감히 멸시하지 못했다. 시에 이 있어 자기의 기세를 꺾고 시인들을 따라다녔다. 강산 풍물을 구경하며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계집에게 여비를 의논하면 계집은 그의 여비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라도 늦게 준비한 것은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다.

 

가랑비 속에 발 드리우고 풀빛을 바라보다

사립문 앞에서 지팡이 짚고 새소리 듣는다.

세월은 오래되어 산중의 나무는 늙어가고

연기와 구름사이로 石樓만 높이 솟았다.

 

8. 이단(1755-1790)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이다. 평소에 패랭이[平凉子]를 쓰고 다녔으므로 이패랭이[李平凉]라고 불리었다.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이나, ()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시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청금시(聽琴詩)에서

 

골짜기의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시냇가의 안개는 조용히 피어오르네.

 

수성동시(水聲洞詩)에서

 

지는 해는 남은 힘이 없고,

뜬 구름은 절로 그 모습 바꾸누나

 

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항상 한 말[]들이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좋은 글귀를 발견하면 주워 담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 단전(亶佃)진실로 밭가는 놈[소작인, 종놈]’이란 뜻이다. 또 필재(疋齋)라고 자호(自號)하였는데, ()을 파자(破字)하면 하인(下人)이 된다. 그는 스스로 진짜 종놈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은 것이다.

 

 

9. 조수삼(1762-1849)

  그는 풍모가 출중했고 신선의 기상이 있었다. 시에 가장 뛰어났다. 여섯 번이나 중국에 가서 대륙사람들과 사귀니 그의 시는 압록강 동쪽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재주가 열 가지인데 그중 한두 가지만 얻더라도 평생 만족하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풍도, 시문, 과거문, 의학, 장기와 바둑, 글씨, 기억력, 담론, 복록, 장수가 그것이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으며 정이조(丁彛祚이단전(李亶佃강진(姜溍조희룡(趙熙龍김낙서(金洛瑞장혼(張混박윤묵(朴允默) 등 여항시인과 사귀었다.

  그리고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조인영(趙寅永조만영(趙萬永한치원(韓致元남상교(南尙敎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 문인과도 친하게 지냈다. 특히, 조인영·조만영은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추인물이다. 이들은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관직에 나간 이력이 없는 조수삼의 삶은 여행으로 특징지어 진다. 1789(정조 13)이상원(李相源)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로 여섯 차례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아무리 역관이라 해도 연경에 여섯 번이나 다녀온 인물이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박제가는 세 번 다녀왔다 하고, 김정희는 단 한 번 다녀오고는 그렇게 다시 가고 싶은 연경에 다시는 가지 못했다. 그는 신분제한으로 1844, 나이 8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많은 벼슬아치들이 그를 축하해 주었다.

   

10. 조신선(18세기)

  그는 서울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책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는데, 동서남북 존비귀천의 집을 막론하고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육십이라했다. 칠십 세가 된 노인이 말하기를

내가 아이 때 조를 보았는데 그때도 육십이라 했다.” 그런데도 얼굴 모습은 사십이거나 그도 안 되어 보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신선이라 칭한 것이다.

 

11. 김홍도(1745-1806?)

  그는 음직으로 벼슬이 연풍현감에 이르렀다. 집이 원래 가난하여 가끔은 끼니를 잇지 못했다. 강세황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얼굴이 준수하고 마음가짐이 깨끗하여 그를 보는 이는 누구든 그가 고상하여 속세를 넘어섰으며, 시중 거리에 흔한 자잘한 무리가 아님을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12. 이언진(1740-1766)

  일본어 역관이다. 일찍이 이용휴에게 사사 받았다. 집이 가난하여 작고 있는 책이 별로 없었다. 누군가 특이한 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그 집에 가 책상머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통신사 역관으로 일본에 다녀 온 뒤 그는 자신의 시 몇 수를 박지원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했다.

간드러지고 자잘하기만 하니 값나갈 게 없구나.”

그는 당황하다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이 상처받은 마음은 다음의 문장으로 표출되었다.

내가 어찌 이 세상에서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겨우 26년을 살다 갔다.

 

11. 권효자(18세기)

  그의 이름은 권재중이다. 뛰어난 문장 한 줄도, 아름다운 그림 한 점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은 부모의 푸르른 무덤뿐이다.

 

12. 전기(18세기)

  전기는 얼떨결에 약방의 주인이 되었으나 전기가 운영하는 이초당은 보통의 약방이 아니었다. 전기는 약을 지어 줄 때 마다 남는 종이에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함께 주었다. 特健藥窓이란 낙관까지 찍어서 건넸다.

 

문 밖에는 찾아오는 이 드물고

정원에 쌓인 눈만 빈 창에 비친다.

질화로에 불이 식어 황혼이 찾아와도

나는 그저 책상에 앉아 옛 그림만 보노라.

 

  그는 스스로 표현하였듯이 뛰어난 화가인 동시에 그림 감정가이기도 했다. 그 뛰어난 감식안을 바탕으로 그림을 중개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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