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홍대용과 1766년

청담(靑潭) 2014. 12. 29. 04:15

 

홍대용과 1766년

강명관 지음

한국고전번역원

●홍대용(1731-1783)

국정 고등학교국사교과서(2009)에 실려있는 홍대용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북학파의 실학사상은 18세기 후반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혁신과 문벌제도의 철페,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홍대용(1731-1783)이 북경에 다녀온 해는 1766년이며 박제가(1750-1815)와 이덕무(1741-1791)는 1778년에 다녀왔다. 그리고 박지원(1737-1805)은 1780년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썼다. 기존의 연행기와는 달리 이들의 여행기는 변화하고 발전하는 청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상공업과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자는 개혁을 주장한 점이다. 그중 가장 먼저 다녀온 홍대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홍담헌 홍대용의 여행기가 특별한 이유

1765년 12월 27일 담헌 홍대용은 북경 땅을 밟았다. 조선 사신단의 서장관이었던 숙부 홍억을 수행하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간 것이었다. 그는 해를 넘겨 1776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북경에 머무르고 귀국하였다. ...담헌은 자신의 여행 체험을 『연기』와 이를 한글로 옮겨 적은 『을병연행록』에 담았다.

 

●조선 사람에게 북경이란

○청나라가 들어선 후 청은 조선에 1년에 단 한차례의 사행만 허락했다. ..조선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북경이었다. ...1년에 단 한차례 방문하는 북경은 조선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다.

마테오리치는 1583년 9월 중국 광동의 조경에 도착하여 이내 북경으로 올라가 서양 서적을 번역하고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京華勢族의 자제들이 오직 遊觀, 즉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기 위해 사신단을 따라 북경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김창업이 1712년 다녀와서 『노가재연행일기』를 지었다.

○그는 여행에 대비해 매일 근력을 키웠고, 틈나는 대로 중국어도 익혔다.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이르기까지 56일이 걸렸다.

○湛軒은 청을 오랑캐로 보는 徹頭徹尾한 대명의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과 태도를 중국 여행 내내 바꾸지 않았다.

○명대에도 조선 사신단의 북경 출입은 그리 자유롭지 않았고, 청이 들어선 이후로 상당기간 청은 조선을 의심하여 사신단의 북경 출입을 금지 하였다.

○담헌은 천주교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었고, 어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對明義理와 華夷論을 굳게 믿고, 북벌을 주장한 조선의 양반들은 번영하는 중국을 보고도 그것이 청의 정치에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중국의 정통왕조는 1백 년 전 망한 명이고, 청은 부당하게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오랑캐에 불과하였다. 담헌 역시 생각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담헌이 북경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같은 하늘아래 이런 큰 세계가 있을 줄 꿈도 꾸지 못하였다. ...슬프다! 이런 번화한 기물을 오랑캐에게 맡기고 백년이 넘도록 회복할 묘책이 없으니 만여 리 중국 가운데 어찌 사람이 있다 하겠는가?)

○유리창은 원래 유리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다. ...유리창 가까운 길 양쪽에는 점포가 늘어서 있다. 동쪽과 서쪽의 어귀에 문을 세우고 琉璃廠이란 편액을 달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시장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라 한다. ..유리창 시장의 길이는 5리(2km) 가량이다.

○중국의 물질문명에 대한 본격적인 관찰과 서술은 담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더러운 오랑캐인 청의 중국지배가 중화문명의 오염을 초래했다고 생각한 담헌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북경에서 엿본 세계

○번이의 조공은 조선(1년에 1회), 유구(오키나와 : 2년에 1회), 안남(베트남 : 3년에 1회), 섬라(태국 : 3년에 1회), 소록(인도네시아 : 5년에 1회), 남장(라오스 : 10년에 1회), 면전(미얀마), 몽고 등이 있었다.

○청과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면서 교역을 시작했다.

○예수회의 마테오리치가 1583년 천주교 선교를 목적으로 광동에 도착하여 1601년 만력제를 만나고 선교를 허락 받은 이래 서양인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 천문학과 경쟁하여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이미 수많은 오류를 노정하고 있던 명의 大統曆을 수정하여 1634년『숭정역서』를 완성한다. ...1645년 청이 시헌력을 공식 역법으로 선포하자, 조선 역시 1653년 시헌력을 공식 역법으로 채택하였다. 시헌력은 원래 명대에 완성된 『숭정역서』를 청이 그대로 수용하고 이름만 고친 것이다.

○조선의 풍속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기를 좋아해 그들로부터 선물을 받고도 답례를 하지 않았다. 또 무식한 아랫사람들이 이따금 천주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는가 하면, 기물들을 마구 만져 그들의 깨끗한 성품을 거스르기도 하였다. 요즘 서양 사람들은 더욱 조선 사람을 싫어하여 구경을 하자해도 반드시 거절하고, 보여주더라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

○담헌은 천주교 자체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오랑캐의 차원 낮은 종교로 여겼다.

○담헌은 뒷날 『의산문답』에서 지구자전설을 주장한다. ..담헌만큼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천주당에서 관찰과 대화에 임했던 사람은 없었다.

 

●국경을 초월해 知己를 사귀다

○2월 3일 김재행과 함께 이기성을 앞세우고 두 중국선비가 머무르고 있는 정양문 밖에 객점인 천승점을 찾았다. ....몸이 마르고 속기가 없어 선비의 풍모가 뚜렷한 사람은 엄성(嚴誠 1732-1767)으로, 담헌보다 한 살 적은 35세였다. ...작은 체구에 얼굴이 여자처럼 곱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은 반정균(潘庭均 1742- ?)으로 25세의 청년이었다. ...이들은 절강성 항주 전당 사람들로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온 사람들이었다.

○경전과 문학에 관한 한 박학하기 짝이 없는 학자인 모기령은 주자의 경전해석을 전면적으로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학문적 과업으로 삼았다. ...담헌은 모기령(1623-1728)은 물론 청대고증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담헌은 주자의 경전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이때의 대화를 통하여 깊이 인식 한 것으로 보인다.

○담헌은 儒家 倫理의 실천에 관한 한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 담헌은 유가적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담헌은 이제 숨길 말이 없다면서 공식적인 문자에는 청의 연호를 쓰면서 사적인 글에는 쓰지 않는 다고 했다.

○담헌은 천주교의 교리는 가소로운 것이나, 천문 역법만은 중국인이 미칠 수 없는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2월 23일 모임의 특기할 만한 것은 반정균이 강남 제일의 인물이라고 평한 육비(陸飛 1719- ?)를 만난 일이다.

○담헌이 반정균에게 당부한다.

?...지금의 조정이 중원에 뛰어든 뒤 도적떼의 무리를 평정하고 1백여 년 동안 백성이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그 정치의 도리가 휼륭하다고 할 만 합니다.?

엄성과 반정균, 그리고 육비와 사귀면서 사유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후장상이 종자가 없고 누구라도 하늘의 때를 잘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면 천하의 의로운 주인이라는 발언은 매우 파격적이다. 이는 청의 중국 통치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육비는 청이 산해관으로 들어오기 전 조선이 당한 병화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방사람들이기에 조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이 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며 놀라운 기록이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 겨우 1백여 년 전 일이며, 그들이 모두 책을 읽는 지식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청이 일으킨 조선침략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전쟁은 청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숨길만한 이유가 되지 못하므로 당시 한인 지식인들은 학문과 오랜 역사를 공부하나, 1백년 청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었던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담헌이 학문을 하고 있음에도 고증학에 문외한인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서울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170여일이 걸렸고, 총 여정은 6,200여리였다.

○북경을 떠나는 날 ...향시에 합격한 손유의의 답변에서 중국과 조선이 경전과 가례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담헌은 퍽 안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사모하여 높이 받들고 의관과 문물이 중화의 제도와 비슷하여 옛날부터 소중화로 일컫습니다. 하지만 언어만은 아직도 오랑캐의 풍속을 면하지 못하고 있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손유의가 답변한다.

?오랫동안 귀국의 인물이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풍속이 순박하여 중화에 처지지 않음을 우러렀습니다. 방언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중국의 경우도 동서남북의 말이 또한 같지 않지만, 조정에서 선비를 뽑아 쓸 때 그것을 가지고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당시 귀국하는 날 까지도 얼마나 홍대용이 소중화사상에 갇혀 있었는지,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의 식견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한다. 오늘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우리가 경제선진국이 되어 OECD 회원국이 되고,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가까워지고, 너도 나도 자식들을 해외유학 보내고, 너도나도 해외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나라들을 그저 돈의 잣대로만 바라보게 된 것은 우리가 이미 속물들이 되어버린 증거다. 부끄러운 폐쇄적, 국수주의적, 경제동물적 사고다. 경제가 무너진 이집트와 그리스가 우습게 보이고,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 돈을 벌기 위해 찾아온 동남아 근로자들을 가볍게 여기고 대한다.

  또 언젠가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아주 우리나라의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한 일도 생각난다. 물론 필요에 의해 가능하기도 한 일이지만, 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지나치게 경제논리적 사고에만 집착한 때문이다. 모두가 균형을 잃고 자아도취적 경제적 동물이 되어버린 한국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들이다.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되, 지나쳐서는 안된다.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희원외를 만난 일은 담헌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希員外는 만주인이었다.

그가 말한다.

?지금의 조정이 전조인 명을 위해 큰 도적을 멸하자 하늘이 이정하고 사람들이 귀의하였으니 이것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양위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귀국에서도 알고 있는지요??

담헌은 답한다.

?순 역시 동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요에서 순으로 바뀔 때 오늘처럼 복색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군요.?

  담헌은 요에서 순으로의 양위는 체제나 문화의 격변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명에서 청으로의 변화는 단 나나 복식에서 만주풍의 강요, 특히 변발의 강요라는 변화를 가져왔다. 담헌은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희원외는 그 점을 간단하게 돌파한다.

?세상에는 옛날과 지금이 있고, 시대의 의리는 같지 아니하니, 의관이 어찌 정해진 제도가 있었단 말입니까??

담헌은 이 말에는 그저 아무 반박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훗날, 이덕무가 말하기를 담헌이 북경을 유람할 때 도포에 혁대를 두르고 갓을 쓰고 가는 모습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면서 ?거지중?이라 했다고 하였다. 이덕무(1741-1793)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담헌이 자신은 ?예를 차린 옷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중국사람들은 거지중이라고 해서 한탄스럽다?고 했다고 하였다.

 

●담헌이 만든 길

○편지는 먼 길을 오갔다. 엄성 등이 고향 항주로 돌아갔기에 담헌이 보낸 편지는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인편을 통해 항주로 전해졌다. 항주에서 보낸 편지는 그 역순을 밟았다. 편지가 오가는 데는 보통 1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편지는 제때 전달되지 않았고, 십 년 뒤인 1778년 가을에야 담헌의 손에 전해졌다. 북경에 갔던 이덕무가 이 편지를 받아 온 것이다.

○귀국 후에도 그는 여전히 청이 오랑캐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생각의 변화에 일대계기가 된 것은 김종후(1721-1780)와의 논쟁이었다. ...담헌이 귀국하여 중국인과 사귀었음을 말하자 그를 공공연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담헌이 중국인과 우정을 나누고 청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말한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헌은 이에 대해 ?명에서 청으로 세상이 바뀐 지 1백여 년이 훨씬 넘었고, 청이 비록 오랑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정치가 훌륭하여 중국이 안정을 누리고, 번영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지구설은 담헌의 시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은 담헌의 독창적이 학설이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결국 중국이란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따라서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 문명은 각 문명대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 이것이 담헌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각각 자기 나라 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각각 자기 임금을 높이며,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고, 각각 자기의 풍속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중화나 오랑캐나 꼭 같은 것이다.?

○그는 『임하경륜』에서 주장한다.

?나라를 9도로 나누고 또 아래에 9군, 9현, 9사, 9면을 두어 재조직한 뒤 백성에게 전답을 균등하게 분배하고, 도에서 면까지 모두 학교를 두어 백성 전체를 교육해야 한다. 이 중 우수한 학생은 선발해서 도의 태학에 보내고 그들 중 언행과 학문이 우수한 자에게 관직을 주자. 양반으로서 일없이 먹는 자를 처벌함으로써 놀고먹는 자를 없애고,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농민과 상인의 자식도 조정에 들어갈 수 있고, 재능과 학식이 없으면 고관대작의 자식이 하인이 되어도 무방하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다. 행정체계의 재조직, 토지 균분, 신분차별 철폐(교육기회의 균등, 양반특권 해체)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 것이다. 그 이상적인 꿈은 오늘날 일부 국가들은 이루어 냈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이다. 우리는 현재진행중이다. 그래서 항상 다투고 시끄럽다. 언젠가 우리도 모두가 잘 살면서도 그런 모습의 나라가 과연 될 수 있을지! 북한이라는 존재가 유지되면서도? 아니면 통일이 되어서야? 그 통일이란 게 과연 평화적으로 오기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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