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
이문열 평역
민음사
▣읽기 전에
갑자기 삼국지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내가 삼국지를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64년 12월로 기억된다. 어쩌면 다음해 1월일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께서 마을문고에서 10권짜리 삼국지를 빌려오셨다. 잠간 1권을 들여다보고는 그 흥미진진하고 스펙타클한 영웅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 들어버렸다. 할아버지께서 읽지 않으시는 동안 후다닥 1권을 읽어버리고는 며칠사이에 내리 10권을 다 읽어 버렸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중고생용 두꺼운 압축본을 빌려 가볍게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읽으면서 느낀 유비현덕, 관우, 장비, 조조, 손권, 여포, 동탁, 공손찬, 원소 등 영웅호걸들이 끊임없이 벌이는 전투와 말을 타고 겨루는 장수들의 싸움에 대한 큰 감동과 재미가 어쩌면 깨질까봐 두려워서였다.(영화는 더욱 그러했다. 닥터 지바고, 스파르타가스, 황야의 무법자, 쿠오바디스, 노트르담의 꼽추 등 중학교시절에 본 영화들은 감동이 무참히 깨질까봐 다시 보기 어려웠다. 먼 훗날 TV로 볼 기회가 많았지만 정성들여 보지는 못했다.)
새로운 해석으로 썼다고 알려진 이문열의 삼국지가 마침 집에 있어 찾아보니 겨우 3권만 있고 그나마 한 권은 서울 아이들 집에 있단다. 우선 세권부터 읽기로 하고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한다.
우리 아파트 앞에 익산시립모현도서관이 있어 방금 찾아가 대출증을 발급받고 삼국지 4-6권을 빌려왔다. 이사 온 우리 아파트 앞에는 근린공원과 시립체육관이 있고 더욱이 도서관이 있어 퇴임 후 얼마든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사 참 잘 왔다는 생각이다. 1회에 다섯 권 씩 2주일 간 대출해준다고 한다.
▣삼국지를 평역하면서
<三國志演義>를 흔히 우리가 <三國志>라고 부른다. 羅貫中은 이전에 있던 모든 것을 수집하고 취사선택과 정리를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시킨 사람이다. 正史인 陳壽(233-297)의 <삼국지>와 용의주도하게 비교, 검토해가며 -흔히 일곱 푼의 진실과 세 푼의 허구로 애기된다. - 완결된 나관중(1328-1398)의 경이로운 작업 뒤에도 삼국지는 여러 판본이 있었다.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거의 대역이 가능할 만큼 충실하게 모본을 따랐고, 월탄 삼국지는 대강 의역한 듯싶다.
...나는 전체의 구도는 모본을 따르되 시와 평문을 가감하거나 내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고 필요한 곳은 변형․재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변형과 재구성은 철저하게 正史에 의지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의 말에 <젊어서는 삼국지를 읽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마라>는 게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삼국지에는 젊은이들의 용기와 포부를 길러주고 지혜와 사려를 깊게 하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도서관에 박종화, 김구용, 이문열, 장정일 등의 삼국지가 다 갖추어져 있다. 김홍신 선생의 삼국지는 보지 못했다.
군주 기타 참모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기타 무장 기타 여인 기타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문관
제1권 桃園에 피는 義
○전한(B․C206~A․D9 수도:장안)-신(A․D9~A․D24)-후한(A․D25-A․D220 수도:낙양)
○위(220-265) - 촉(221-263) - 오(222-280)
○유비(161-223) 관우(156-219) 장비(162-221) 동탁(139-192)
조조(155-220) 원소(155?-202) 손견(156-192) 공손찬(155?-199)
원술(157?-199) 여포( ? -198) 제갈량(181-234)
○황건적의 난(184~194)
○영제(168-189) - 소제(189) - 헌제(189-220)
○권력자 변천 : 십상시(168)→동탁(189)→이각과 곽사(192)→조조(195)
○황제는 흔히 十常侍라고 불리는 열 명의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허수아비가되고, 착하고 어진 이들이 모두 떠나 버린 조정에는 환관들과 선을 댄 간신배들만 득실거리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십상시의 난(189)를 일으켜 권력을 유지하려 하다가 원소에게 모두 죽음을 당한다.
※요즈음 박근혜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정윤회라는 사람과 그 측근들(현재 청와대 비서관들)을 SMS에서 십상시라고 부른다고 한다.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허자강은 당대에서 제일간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相을 잘 보는 사람이다. ..조조가 재촉하자 응했다.
?당신은 治世에는 能臣이 될 것이고, 亂世에는 奸雄이 될 것이오.?
○황건적의 난(184~194)
○영제(156-189) - 소제(189) - 헌제(189-220)
○슬기로운 사람은 流言蜚語를 들어도 전하지 않는다....하지만 일반민중들에게는 생각 밖으로 위력적인 것이 또한 유언비어이다. 퍼져나가는 동안의 알 수 없는 自家增幅의 속성은 때로 선동으로까지 커져 어줍지 않은 起爆劑로도 강력한 권력집단의 몰락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도 한 까닭이다.
■『三國志演義』의 성립과정
진수의 <삼국지>는 <사기>, <한서>, <후한서>와 더불어 <前四書>라고 하여 중요시도어 왔는데 그 까닭은 격조 높은 그 문장도 좋거니와 전후 400년에 걸쳐 중국 대륙에 군림하여 왔던 유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전국시대의 재래를 방불케 할 만 한 후한말의 격동기에 활약하였던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인간형이 잘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후한 영제 말년(184)부터 동진 무제의 태강원년(280)가지 97년간에 걸친 전쟁과 정치의 이야기인데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첫째,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소설이다.
둘째, 언어․문체에 있어서 俗語와 雅語(고전어)를 적소에 적절하게 쓰고, 구어체와 문어체가 가지고 있는 특색을 잘 살린 점이다.
셋째, 철저하게 蜀을 정통으로 내세운 민족주의적 작품이다. ...도원결의에서부터 이 작품은 유비․관우․장비 및 제갈량을 중심으로 전개시켰고 그들을 극력 미화하였다.
제2권 구름처럼 이는 영웅
○동탁토벌군 17제후
1.남양태수 원술 2.기주자사 한복 3.예주자사 공주 4.연주자사 유대
5.하내태수 양광 6.진류태수 장막 7.동진태수 교모 8.산양태수 유유
9.제북상 포신 10.북해태수 공융 11.광릉태수 장초 12.서주자사 도겸
13.서량태수 마등 14.북평태수 공손찬 15.상당태수 장양 16.장사태수 손견
17.발해태수 원소 18.발해태수 원소
○잔을 받은 여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볼수록 빼어난 초선의 자색이었다. 초승달 같은 눈썹과 가을 물처럼 맑고 찬 눈, 상아로 깎은 듯 오똑한 콧날에 복사꽃빛 도는 볼,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군데 모아놓은 듯한 얼굴이요 자태였다.
○초선 : 두 팔을 휘저어 바삐 휘돌면 동정호의 봄을 나는 기러기요, 버들잎을 스치는 제비 같았으며, 느릿느릿 멈추어 서면 아름다운 누각에 걸린 흰 구름이요, 바람에 흔들리는 한 떨기 고운 꽃이었다.
○비록 정의일지라도 독선에 흐르면 화가 따른다는 이치를 마일제는 헤아렸던 것이다.
제3권 헝클어진 천하
○사람들은 손책(175-200)을 소패왕이라 불렀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는다던 패왕 項羽에 비견할 만한 용력이었다.
○화타(?-208)는 마비산이란 아마도 삼에서 추출한 것으로 짐작되는 마ㅜ치제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걸 마신 사람은 즉시로 취한 듯 죽은 듯 아픔을 모르게 되는데 이때 그가 째서 수술한 부위는 四肢뿐 만 아니라 복개수술이며 뇌수술까지 걸쳤다.
○군사를 이끌고 나온 터라 여러 날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원래도 호색한 조조였다.
○조조는 큰 아들 조앙이 주는 말을 타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채찍질해 사라졌다. 조앙도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말을 바꾸어 타는 동안 적병이 소나기처럼 퍼부어대는 화살을 피하지 못해 끝내는 꽃다운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자식을 대신 죽게 한 것이 나 다름없는 조조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조조의 非情함과 利己에서 구하고 있다. 실제로도 조조의 정처인 송씨는 그 일을 들어 조조와 의절하고 평생을 다시 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조의 간교함과 표독스러움을 말할 때 먼저 손꼽는 게 전에 여백사의가족을 몰살한 것과 창관 왕후를 죽인 일을 든다. 자신의 안전이나 이득을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 그것도 특히 자기편을 죽였다는 데서 오는 섬뜩함 때문일 것이다.
○헌제가 가만히 헤아려보니 유비가 자신에게 아재비 뻘이었다. ...헌제는 유비를 단순히 종실로 반길 뿐 아니라 좌장군에 의성정후로 봉한 뒤 잔치까지 벌여 은근하게 대접했다. 뒷날까지 유비를 따라다닌 호칭 가운데 황숙이란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었다.
○조조는 무엄하게도 천자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다시피 앞서 나아갔다.
○조조가 말한다.
?무릇 영웅이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배에는 좋은 智謀가 가득한 사람으로 우주의 기운을 머금고 하늘과 땅의 뜻을 토해내는 자요.?
?지금 천하의 영웅이라면 오직 현덕과 여기 이 조조가 있을 뿐이오!?
제4권 칼 한 자루 말 한 필로 천리를 닫다
○여기서 또 한번 볼 수 있는 것은 조조와 원소의 대비이다. 조조는 장수에게 쫓길 때 아들의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나 목숨을 건지고 뒷날을 기약했다. 그런데도 원소는 어린 아들의 병으로 마음이 흔들려 실로 얻기 힘든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조조는 던져졌던 상황이 원소보다 더 극한적인 것이었고, 또 감상적인 이들에겐 원소의 그 같은 다감함이 훨씬 인간적으로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천하를 다투는 싸움터에 발을 들여놓은 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에서 볼 때 원소의 그 같은 다감함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뿐이다.
※주인공을 유비로 정한 소설이지만 조조의 위대성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유비현덕은 그릇은 원소보다도 더 작은 인물인 듯하나, 남다른 德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소설 삼국지의 내용이 마치 모두가 사실인양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삼국지에서 전투장면의 대부분은 양편의 장수 하나씩이 나와 겨루다가 이기는 장수의 편이 승리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이는 전적으로 픽션이다.
마치 프로레스링을 보는 느낌이다. 중학교시절 프로레슬링이 크게 인기를 끌 때, 모두들 선수들이 실제로 피비린내 나는 경기를 하며 싸우는 것으로 경기가 진짜인줄로 착각하였으나 나는 처음부터 쇼로 규정하여 다른 친구들과 많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렇게 대부분의 전투가 이루어진다면 병법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장수들의 무용을 겨루는 장면은 이야기를 통해 더욱 부풀어지고 보태지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작자(나관중)가 흥미진진하게 부풀려 나간 것이리라.
제후들이 거느리는 군대의 숫자는 어찌 그리도 많은 지, 모았다하면 작으면 수천이요, 수만이고 큰 규모는 수 십 만이다. 마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려고 대비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도저히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 군인들은 강제 징집이 아니라 자진하여 합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바, 당시 중국의 인구가 비록 4천만 명 내지 5천만 명이라고는 하나, 영웅호걸들이 수 만 명, 또는 수십만 명씩의 군사들을 모을 수도, 그 많은 병사들을 수 백리 또는 수 천 리길을 다니면서 몇 달씩 전쟁을 하며 먹여 살릴 수도 없다고 본다. 아무리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상황이지만, 아무리 전투에서 이기면 포상이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전쟁터에 따라가면 한꺼번에 수천 명씩 몰살당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병사가 되어 전쟁터에 따라가겠는가? 우리나라의 왜란이나 호란이 일어났을 때의 의병모집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漢書에 따르면 조조가 패권을 장악할 무렵 천하에는 20군(軍)의 주군병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당시 한 나라의 1개 군이 약 1만 2,500 명 정도였으므로 주군병의 총수는 25만 명인 셈이다. 그렇다면 후한의 총병력은 중앙군과 주군병을 합치면 약 30만 명 정도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비록 당시의 실재인물들이 70%이고, 전개되는 큰 줄거리는 대부분 맞는다할지라도 세세한 전투들이나 전투상황, 군사들의 수,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작자인 나관중에 의해 철저히 픽션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확신한다. 엄청나게 부풀어진 이야기(소설)임이 틀림없다. 삼국지는 정통사극이 아니라 반 퓨전사극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조조는 원소가 버리고 간 금은보화며 비단으로 군사들에게 골고루 상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서책과 문서를 뒤질 때였다. 편지 한 묶음이 나왔는데 모두가 허도에 있는 대신들이나 자신의 부하 장수들이 원소와 몰래 주고받은 것이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모조리 이름을 밝혀내 죽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조조는 잠간 생각에 잠겼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소의 세력이 강할 때는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랬을진대 하물며 딴 사람들이겠느냐?」
그러고는 명을 내려 묶음도 풀지 않은 채 모두 태워버리게 한 뒤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일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라」
실로 우리는 이 이야기(삼국지) 전체를 통해 가장 광채 있는 부분 중의 하나를 보고 있다. 다만 승자의 관용으로 돌려버리기에는 너무도 휘황한 영웅정신의 광채이다.
○조조는 싸움에 이겨 기세가 오른 군사들을 이끌고 하상이란 곳에 이르러 진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지방의 사람들이 대그릇에 담은 밥과 병에 넣은 장으로 조조의 군사를 반겨 맞았다. 조조가 그들 가운데 몇몇 늙은이를 보니 머리가 허옇게 센 이들이었다.
...「내 군사들이 어른신네의 고을을 놀라게 하지나 않았는지 실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리고는 삼군에게 엄한 영을 내렸다.
「지금부터 작은 것이라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아니 된다. 백성의 닭이나 개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조조의 아들 조비(18세)가 원소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두 부인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보였다....칼을 들어 막 찍으려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붉은 빛 같은 것이 번쩍하며 두 눈 가득 찔러오는 게 있었다. 두 부인 중 하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으로 조비는 까닭 모르게 손목에서 힘이 빠져 칼을 내리고...그제서야 조비는 그 젊은 부인 곁으로 끌리듯 다가갔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실로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미인이었다(傾國之色). ...동생인 조식도 그 형수를 사모하여 훗날 그의 작품 속에 그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조비는 일생동안 진씨를 사랑했으며 뒷날 황후로까지 올려 세우고 또 그녀의 아들로 태자를 삼았다.
※원소가 죽은 해가 202년이니 황건적의 난으로 유비가 뜻을 세운지 18년이 지나 그의 나이 42세가 된 해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나 조조는 196년 그의 나이 42세 때 이미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5권 세 번 천하를 돌아봄이여
○조조가 河北을 평정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멀리 荊州에 있는 유비의 귀에도 들어왔다. ...
※이때는 207년으로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 의지하여 신야현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시기이다.
○생각하면 황건과 十常侍의 난리로 군웅의 割據가 시작된 이래 그때까지의 싸움은 선봉장의 개인적인 무용과 謀士의 기지에 의지한 기세 싸움이었다. 사방을 떠도는 유민들을 아무렇게나 끌어 모아 급조한 군사들로 하는 싸움이라 조직이나 훈련은 거의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점차 천하가 몇 갈래의 세력으로 고착되면서 처음으로 진법에 의지하는 싸움이 나타났다.
※이 삼국지연의에는 수 만 명의 대군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항에서 양편의 장수들이 한사람씩 나와 겨루고, 이기는 장수의 편이 기세를 몰아 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전투장면이 대부분이다. 이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전투장면이지만 실로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래서 이 삼국지연의를 보면 마치 만화나 프로레슬링을 보는 듯 하거니와, 나관중이 <정사 삼국지>를 소설로 만드는 과정에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미있는 그림을 그린 것이라 여긴다.
○207년 유비는 三顧草廬하여 제갈공명을 얻고, 유표가 죽으면서 유비가 세력을 길러 조조와 손권 그리고 유비의 三分天下의 計를 시작한다.
○형주를 정벌한 조조에게 밀려 백성을 이끌고 강릉으로 향하는 유비군은 군대의 행진이라기보다는 피난민 행렬에 가까웠다.
※조조군에게 대패당하고, 조자룡이 미부인과 아들인 아두를 찾았으나, 미부인은 아두를 내려놓고 몸을 뒤집어 마른 우물로 뛰어들었다. 나는 언젠가 중국에서 제작한 TV극에서 이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이 때 아두를 허리에 차고 용맹을 떨치는 조운의 활약으로 그의 무예가 후세에까지 빛을 발한다. 또 이 때 장비는 꾀를 내어 조조의 수십만 대군을 장판교에서 혼자서 막아내는 전무후무한 쾌거를 이루어 낸다. 미부인 사건과 장판교 사건은 그동안 내게도 오래 기억되고 있었다.
○손권을 치러 출병한 조조의 군사는 백만 대군이라 소문을 냈지만 ...정사의 안복에서 보면 매우 과장된 것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史家들이 추정하는 조조군의 실제 세력은 이십 오만 정도라고 한다. 그것도 십만 가량은 유종이 항복한 뒤 급히 긁어모은 형주 군사들이라 팔십만 혹은 백만 이란 숫자는 최소한 대여섯 배 이상 과장된 셈이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일 만기를 이끌고 간다느니, 삼천 병사를 주어 출전시키느니 하는 것은 모두 소설일 수밖에 없다. 나는 숫자는 숫자일 뿐 실제 전투에서는 그 1/10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하여 드디어 208년 드디어 장강에서 적벽대전이 시작되고 있다.
제6권 불타는 赤壁
○주유와 제갈량이 연합하여 조조군을 무찌르다. 제갈량은 힘안들이고 조조에게서 화살 10만개 이상을 획득한다.
○서기 208년 주유와 공명이 공동으로 기획한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대파한다. 그러나 정사를 통해 본 실제로는 모두가 황개의 작품이라고 한다.
○유비가 반가운 얼굴로 이적에게 물었다.
“ ......<馬씨의 常자 돌림으로 자를 쓰는 다섯 사람 중에 눈썹 흰 사람이 가장 낫다네>란 것이 있을 정도지요.”
이른 바 白眉란 말이 생겨난 고사이다.
○흔히 삼국지연의는 <일곱 푼의 진실과 세 푼의 허구>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적벽대전과 유비, 손권 관련 기사는 그 비율이 뒤짚혀 있는 듯하다.
○서기 210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손권과 함께 이제 당당히 조조에 맞서는 인물이 되었다.
※이때 유비는 50세, 제갈량은 30세, 조조는 56세, 손권은 29세요, 주유는 이해에 36세로 죽는다.
제7권 가자 서촉으로
※이 책의 6권과 7권에 있는 지도이다. 당시는 서기 200년 경 내지 215년 경이므로 우리나라는 요동지방에 고구려와 부여가 있고, 한반도 남부는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져 있어야 함에도 저자는 중국의 지도를 그대로 인용하였는지 요동과 한반도 최북단이 대부분 마치 중국영토인 듯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한반도 대부분은 마치 오늘날의 3.8선 마냥 두리뭉실하게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 역사에 저런 지도상태의 시기는 없었다. 저자의 우리역사에 대한 지식이 의심스럽거나, 아니면 당시 한반도 북부의 한사군 세력에 대한 논란이 잔존하므로 취한 고의성으로 의심한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저자가 다시 쓴 삼국지이고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책이므로 보다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된 입장이라서 이제 와서 저자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게 되어 못내 아쉽다.
○西蜀은 익주(스촨성, 즉 사천성 지역)을 말하고 있으며, 유비가 나라를 건국하여 촉나라가 된다.
○조조가 정벌에 나선 서량(현 감숙성, 익주의 위쪽에 위치)의 태수 한수(146-215)가 40세로 나오는데 실제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양관과 조구가 ....먼저 마초의 아내 양씨를 끌어내 마초(당시 36세)가 보는데서 목을 벤 뒤 그 목을 성벽 아래로 던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울고 불며 끌려나온 마초의 어린 아들이 차례로 목이 떨어지고, 마초의 가까운 피붙이 이십여 명도 모두 목만 마초의 발아래 떨어졌다. ...더욱 성이 난 마초는 스스로 칼을 뽑아 강서의 어머니를 베어 죽이고 이어 윤봉과 조앙의 전가족도 늙은이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몰살시켰다.
※전쟁의 참혹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청소년들이 삼국지를 통해 그저 재미있는 전쟁이야기를 읽는데 그치면 안 되고, 모두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인간의 역사에서, 적어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만큼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전쟁혐오, 전쟁불가, 전쟁반대론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조조는 아직 군웅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도 사욕에 눈이 멀어 주인을 판 자는 자신에게 아무리 큰 이익을 갖다 주어도 용서하지 않았다. ...조조는 거의 일관되게 주인을 팔아먹은 자는 죽였고, 아무리 자신에게는 매섭게 저항해도 그 주인을 위해 힘을 다 한 이는 되도록 해치지 않으려고 했다. 간혹 긑내 항복하지 않아 죽인 적이 있지만, 그 때조차도 상대의 깨끗한 이름을 지켜주기 위해서였고, 또 그 뒤에는 후한 장례를 잊지 않았다.
◯조조는 군신간의 신의와 의리를 철저히 강조하고 지키는 사람이요, 이에 반해 유비는 관용과 자비를 숭상하는 사람으로 아주 대조적이다. 두 가지 덕목이 모두 우리가 지켜야할 바람직한 덕목이로되, 오늘날에는 공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신의가, 사적인 측면에서는 관용이 더 인정되는 모습이다.
◯建安은 헌제의 연호로 196년부터 220년까지 25년간 사용되었다. 조조가 위와에 봉해진 해는 216년으로 건안 21년이었다. 7권의 352쪽에는 이십 칠년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개정판 32쇄 때까지 바로잡아지지 않고 있다. 384쪽에 보면 건안 이심삼년 정월에 경기와 위황이 위왕인 조조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으므로 이십일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제8권 솥발처럼 갈라진 천하
◯무심코 닭국을 먹던 조조의 수저에 문득 닭갈비(鷄肋) 조각이 건져졌다. 그걸 보자 조조는 속으로 씁쓸한 웃음이 일었다. 닭갈비는 살이 없어 먹기에 성가시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분이었다. 韓中이 꼭 그와 같았다. 기름지고 드넓은 중원이나 물자가 풍부한 강남에 비해 대단할 것 없는 땅 조각이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내주기에는 아까웠다.
◯유비가 한중왕으로 나아가는 의식을 치른 것은 건안 이십사 년(219년)칠월의 일이었다.
◯화타(? - 208?)는 칼로 살갗을 쪼개고 팔을 갈라 뼈가 드러나게 했다. 화살촉에 바른 독이 스며 뼈는 이미 시퍼랬다. 화타는 칼날로 뼈를 긁어냈다. ...화타는 뼈에 스몄던 독을 말끔히 긁어냈다. 거기에 약을 바른 화타는 살을 여미고 실로 꿰맸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의 연령에 대한 큰 오류가 보이므로 지적하고자 한다.
1. 제1권 104쪽
(장비는 유비보다 한 살 아래인 열아홉이었으나 ...)
유비현덕은 161년에 태어나 223년에 죽은 역사적 실재인물이다. 따라서 저자는 장비의 출생연도를 162년으로 보았다.
2. 제 1권 123쪽
(나이는 장비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관우가 형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셋이 가까워져 호형호제한 것은 유비가 24살이던 184년의 일이다. 이때 장비는 23살이요, 관우는 29세가 되겠다. 따라서 유비는 161년생, 장비는 162년생, 관우는 156년생이 된다. 참고로 조조는 155년생이다.
3. 제 1권 154쪽
(이에 세 사람은 다음과 같이 형제의 의를 맺기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이로 보면 관우가 가장 위이고, 다음이 유비이며 끝이 장비였지만, 관우의 주장으로 유비가 맏이가 되고 다음이 관우가 되었으며 장비는 막내가 되기로 했다.)
4. 제 8권 215쪽
(이에 관공과 관평은 모두 끌려 나가 목숨을 잃으니 때는 건안 이십사 년 시월이요, 그때 관공의 나이는 쉰여덟이다.)
건안 이십사 년은 219년이다. 관우가 이 해에 죽은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관우가 죽을 때의 나이는 예순 네 살이 맞다. 소설 작법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명백한 오류다.
5. 제8권 335쪽
(장비가 한 소리 큰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지니 그때 그의 나이 쉰 다섯이었다.)
이때가 유비가 황제가 된 후, 동오를 치는 해인 건안 26년으로 서기 221년이다. 장비의 나이는 예순이 맞다. 이 또한 명백한 오류다. 유비현덕은 223년에 예순 셋의 나이로 병사한다.
●조조가 위왕에 오름(216)→유비가 한중왕에 오름(219)→조조가 사망, 조비가 천자가 되고 위를 세움(220)→유비가 제위에 오르고 촉을 세움(221)
제9권 출사표(出師表), 드높아라 충신의 매운 얼이여
◯出師表는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표문(表文)을 말한다.
○100쪽에서 223쪽까지는 온통 南蠻 정벌에 대한 내용이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장무 삼년 봄 제갈량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해 가을에 그 땅을 평정하다>라고 만 되어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삼국지연의 저자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조비가 죽고(226), 사마의(사마중달:179-251)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227년 3월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린다. 그는 훗날 위의 권력을 하게 되고 손자인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265)하게 된다.
○제갈량이 마속을 참한다(228). 이에서 泣斬馬謖이란 말이 생겼고,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성도 무후사에서 본 출사표
제10권 五丈原에 지는 별◯손권이 위로부터 받은 오왕을 반납하여 독립(222)한 후 황제로 등극(229)하여 위․촉․오가 모두 천자의 나라가 되었다.
○촉의 패장 진식은 공명에 의해 요참, 즉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다. 그가 바로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다.
※227년부터 제갈공명은 유비현덕의 유지를 받든답시고 무려 6번에 걸쳐 위를 침략한다. 마치 전쟁광처럼 군사를 일으킨다.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고, 웨이허 남쪽의 오장원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나, 그해 제갈량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하고, 부상을 당하여 장애자가 되고, 포로가 되어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려야만 했을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육체적 아픔과 정신적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외롭고, 힘들며, 가족해체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을까? 영웅들의 권력쟁투에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만 갔다.
○제갈공명(181-234)과 사마의 중달(179-251)의 끝없는 대결은 항상 공명의 승리로 끝난다.
○손권(182-252)이 죽는다. 이로써 삼국을 일으킨 첫 세대는 온전히 사라진다.
○『삼국지연의』가 취급하는 시대는 황건적이 일어난 183년부터 오나라가 망하는 282(280년의 오류)까지 약 백년간이며 공명이 죽은 232년은 꼭 그 한가운데에 해당된다. 그런데 연의의 여섯 중에 다섯은 전반에 바쳐지고, 나머지 오십년은 겨우 여섯 중의 하나로 매듭지어지고 있다.
※공명의 죽음 이후의 50여년의 역사는 이문열 삼국지의 20분의 1의 분량(200쪽)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종회는 곧 前軍에게 영을 내려 흰 깃발아래 <輔國安民> 넉자를 써서 들게 하고, 어디를 가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자신의 목숨으로 그 죄를 갚아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동학에서 가장 기치로 내세운 보국안민이 삼국지에 보이고 있다.
○촉(221-263)이 망하다. 서기로는 262년(263년의 오류)의 일이었다.
※후주 유선의 무능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한나라의 운명이 군주 한 사람에 의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준다. 민중사학자들이 우리 사학계를 지배할 당시 우리는 한 영웅에 의해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한 못난 군주(지도자)에 의해 나라가 망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모두를 민중의 공으로 또는 민중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철석같이 믿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실제로는 그게 아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한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박정희의 군사정변에 의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필히 인정해야만 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칭 진보라고 여기는 역사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진정한 역사인이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자신이 추종하는 사제가 사이비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치면서 까지도 맹종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도 아니면 그들은 매우 어리석거나 어쩌면 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들이 아닐까?
○후주가 항복할 당시 촉의 호수는 이십 팔만이요, 인구는 남녀를 합쳐 구십 사만이었다.
※삼국지연의의 기록이 맞지는 않는 것 같다. 비록 작은 나라 촉이지만 공명의 6번째 기산정벌 시, 34만의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인구가 백만이 안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록에 263년 촉 멸망 시, 위의 인구는 429만이요, 촉의 인구는 208만이요, 오의 인구는 265만 이라고 한다. 모두 합해서 902만이다. 넉넉히 잡아줘 1천 만 명, 아니 두 배로 늘려 2천만 명이라고 하자. 서기 156년 당시 후한의 인구가 무려 5600만 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100여 년간의 전쟁 중에 죽어갔다는 것인지!
우리 중 일부 사람들은 어찌 김일성 같이 허울 좋은 민족전쟁을 일으킨 자를 철저히 미워하지 않고, 6.25를 민족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치부해 버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전쟁을 미워하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부끄러움 없이 저지르는 것인가?
※『삼국지 이후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삼국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 실로 정확하게 50년 만에 삼국지 1권을 읽기 시작한 지 꼭 두 달 만에야 10권 모두 읽기를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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