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중학교
○1979년 10월경 순위고사에 원서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고 합격자가 발표되는 기간에 10·26사태가 발생하여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되고, 12·12사태가 일어나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고 최규하가 대통령이 되는 등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급변하는 격동기였다. 실로 우리 현대사에서 해방과 6·25 전쟁(1945~1953),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1960~1961)과 더불어 가장 급박하게 정치와 사회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나는 중등교사임용시험을 치르고 교육공무원이 되었다.
○1980년
1980년 3월 11일자로 고창해리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전날 고창교육청에 들러 장학사로부터 발령장을 받고 밖으로 나오니 웬 준수한 청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서로 인사하고 어디로 발령을 받았는지 확인하니 같은 해리중학교이다. 반갑기 그지없고 과목도 같은 사회과(나는 역사과, 김선생은 일반사회)인데 사는 곳도 같은 익산이다. 함께 버스를 타고 먼지 나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해리중학교를 찾아 김종호 교감선생님께 신고하고 둘이 한방에 하숙집을 정했다. 이 분이 바로 김호길 교감선생님이고 나와 이후 누구보다도 돈독한 우정을 계속하고 있다. 해리는 충남의 비인처럼 이름이 예쁜 곳으로, 당시로는 전북의 가장 서남에 위치한 곳이어서 매우 먼 곳으로 여겼다. 물론 발령을 받기 전에는 해리는 알지도 못한 곳이다. 이제야 비로소 배우는 학생에서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해리중학교는 1952년에 개교한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로 학교장은 박종호 교장선생님이시고, 학년 당 7학급으로 총 21학급이다. 남학생반이 4학급이고, 여학생반이 3학급인데 2학년 학생수는 총 450여명이며 전체 학생수는 1,200여명이니 오늘날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학교인 36학급의 전주 서신중과 거의 같았다. 나는 2학년 3반 담임을 맡았다. 이부헌이가 실장이고 이병석이가 부실장으로 기억된다. 이병석이는 훗날 대성고 제자인 야무진 똑똑새 김임순과 결혼하였고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이라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2학년과 3학년의 국사를 담당하였는데 3학년들 중에는 성적으로나 외모로나 눈에 띄는 믿음직한 학생들이 남녀 모두 많았다. 이들이 27회인데 사실상 첫 제자들이다. 담임을 맡지 않아 앨범은 없지만 모두를 기억할 것 같을 만큼 정이 들었다.
교장·교감을 제외한 교사들은 27분인데 선배들로는 50대의 박구년 선생, 40대의 김윤갑, 이종엽, 양경용, 오종대 선생이 계셨다. 대부분 지역 토박이 분들이시다. 20여 교사들은 모두 30대 이하이니 주로 첫 발령을 받은 젊은 교사들이다. 아이들이 우리 교사들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데, 정귀우 선생은 특히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대부분 토요일이면 전주나 익산으로 재빨리 몰려나가는데, 정귀우 선생은 자주 해리에 남아 아이들과 어울리고, 우리가 막걸리집에 있을 때 술을 마시지 않는 정선생님은 아이들과 운동을 함께하니 그만큼 아이들이 따랐던 것이고 또 아이들 사랑이 유난히 각별한 분이다. 지금도 당시의 해리중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가끔씩 하시니 부러운 일이다.
5·18 민주항쟁이 광주에서 일어나면서 가까운 고창도 위기감이 돌고 모두들 긴장하였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전두환 정권은 8차 헌법개헌을 추진하여 무서운 공포분위기가 전 공직사회에 조성되었다. 교육공무원이 된 첫해부터 개헌추진에 동참할 것과, 비밀을 누설하면 사표를 낼 것을 확인하는 각서를 제출하는 봉변을 당한다. 우리 교사들도 각 마을에 개헌홍보요원으로 나가 반상회에서 개헌취지를 설명하게 된다. 우리는 시골어른들에게 그저 개헌내용이 간선제임과 7년 단임이며 따라서 중임할 수 없고, 개헌을 추진한 대통령은 재임기간동안에 다시 개헌을 추진할 수 없다는 내용만 설명하는 정도였지만, 유신체제이후 투표 때면 체제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무효표를 만들어버렸던 나였음에도, 일체 반발하거나 항거하지 못하고 따른 저 굴종은 나의 생애 가장 부끄러운 정치행위가 되었다. 물론 그 어느 누구 하나 항거하여 퇴직 당했다는 말은 아예 전혀 들어보지 못했을 만큼 무서운 사회이기도 했고 우리의 먹고사는 일은 그만큼 중요했을 터이다. 하숙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순경이랑 여럿이서 정치담론을 편 것이 어떤 경유로 경찰에 보고되었는지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명령서를 받았을 만큼 유신체제마냥 정치상황은 무서웠으나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는 행복한 교직생활을 이어갔다.
○1981년
새 교감으로 인자하신 문하상 교감선생님이 오시고, 김종기 선생, 유영상 선생, 김효순 선생, 최귀숙 선생, 허미애 선생 등이 부임했다. 3학년 담임은 1반에 김창수 선생, 2반은 이치수 선생 3반은 유영상 선생, 4반은 나, 5반은 강거희 선생, 6반은 김재완 선생, 7반은 최귀숙 선생이 맡았다. 2,3,4,5반 담임들은 현재 교장으로 재직 중이고, 김재완 선생은 명퇴하였다.
우리 반은 모두 56명으로 김성만이 전교 회장이고, 반장은 잘생기고 믿음직한 김광훈이다. 김광훈이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카카오스토리에 자주 소식이 뜬다. 3학년들은 2년 연속 가르치고 담임까지 맡아서인지 역시 모두들 기억에 뚜렷하고, 바로 엊그제 일만 같다. 이들이 2012년 봄에 서울에서 졸업 30주년 행사를 개최하여 강거희, 이치수, 정귀우 선생등과 함께 다녀왔었다. 27회의 김효례를 보았고 카카오스토리에 글이 뜬다. 28회중 우리반으로는 김광훈과 김남수 이주용이를 만났고, 7반의 최미홍이가 반겨주었다.
10월에 익산에서 치른 나의 결혼식에는 많은 남녀 학생들이 참석하여 주어서 고맙기 그지없었다. 어찌 그 먼데서 일요일에 익산까지 와서 축하를 해주다니...그런 호강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양드리가 신왕초등학교에 근무하므로 무장객사 앞 수퍼 안집에서 연 25만원자리 방 두 칸으로 신접살림을 시작하였다. 그 집에서 2년 반을 살았다.
○1982년
3학년 담임을 이어 하게 되었다. 1반은 김호길 선생, 2반은 나, 3반은 조희태 선생, 4반은 첫 부임한 김석태 선생, 5반은 김효순 선생, 6반은 최귀숙 선생, 7반은 이남희 선생이다. 김호길 선생은 현재 교감으로, 김석태 선생은 교장으로, 김효순 선생은 교육장으로 재직 중이다. 우리 반은 50명인데 정현진이가 실장이고 김선희가 부실장으로 기억된다. 당시 너무나 가난한 시절이고 지역적으로도 시골이라 여학생들은 한일합섬 같은 회사로 취직하여 야간을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
○첫 발령을 해리중학교로 함께 받은 강거희 선생은 전년에 해리고등학교로 옮겼다. 나도 고등학교로 옮기기로 하여 관내내신을 한다. 공립고교는 역사교사 TO는 고창고와 대성고에 하나씩 있는데 대성고로 발령이 났다. 불과 3년 만에 해리중을 떠났지만 엄청 애정이 남은 학교다.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은 학교이며, 내가 해리중에 근무하면서 결혼을 한다. 그리고 해리중에서 함께 근무하며 정을 다진 사람들 9명이『해우회』를 조직하여 지금까지도 가장 소중한 부부모임으로 만나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있으니 졸업생 못지않게 해리중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해우회원은 김병근 강거희 이석한 이치수 김호길 유영상 김재완 김종기 정귀우 선생이다. 1990년대 초 학교 강당에 쓰도록 기부금을 전하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모두 함께 동호에서 식사를 한 뒤 학교를 방문하여 학교장과 환담한 일도 있다.
현 강천희 교장은 나와 교감연수동기로 나와 같은 시기에 발령을 받았으니 조금만 내 운명이 달랐다면 어쩌면 내가 해리중 교장으로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대한민국의 눈부신 역사발전에 따른 변화를 거스르지 못하고, 당당하던 해리중학교 역시 우리 자양중학교와 다르지 않아 이제 3학급 49명의 작은 농어촌 학교로 명맥은 잘 유지되고 있다.
◈엊그제(2016.10.9) 30회 졸업생들의 초청을 받아 그들과 함께 모악산에 올랐다. 27회는 3학년 국사를 가르쳤고, 28회와 29회의 3학년 담임을 했지만 30회는 그들이 2학년때 남학생 3개반만 가르쳤던 것으로 알고 있어 기억에 크게 남아 있지 않았는데 어느 한 친구가 이 블로그를 보고서 서로 연락이 이루어진것이 우리 해우회원들이 초대를 받게 된 연유다. 김진득군이 홍보부장으로 우리들의 초대를 위해 지난 봄부터 전화를 통해 끈질긴(?) 구애를 해왔다.
정작 해우회원들중 그들의 3학년 담임은 4반의 김호길 선생과 김종기 선생인데 김호길 선생이 10월 중간발령을 받아 김종기 선생이 이어 받아서 졸업을 시켰다고 한다. 나와 김병근 이치수 교장이 등산을 함께하고 김종기, 강거희 교장이 늦게 합류하였다. 3반 담임이었다는 조희태 선생님이 참석하여 오랫만에 뵈었다. 본래 눈이 좋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시력을 잃어 매우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고 벌써 71세시라는데도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셨다. 너무 순수하시고 맑은 영혼을 가진 분이다. 김호길 선생은 스페인 여행으로, 정귀우 선생은 전국체전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두어 달 전에는 28회의 이병석군이 미국에서 반가운 전화를 해오고 가족사진도 보내주었고, 가을에는 30회와 즐거운 하루를 보내니 매우 흐뭇하고 부끄럽지만 교사의 보람을 느낀다. 수도권과 전북권에서 무려 73명의 친구들이 참석했는데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그래도 여럿 보였다.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준비와 정성을 쏟아준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해우회를 초청해준 30회 여러분 감사!
▣어제(2017.4.30) 해리중학교 제28회의 사제 동행 체육대회에 우리 해우회 선생님들이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회장은 우리반(3-4)이었던 박부성인데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서 즐거운 행사가 되었다. 2012년에 서울모임에 초대받은지 5년만이다. 28회는 우리 해우회원들이 7개반중 5개반의 담임이다. 3반의 담임인 유영상 선생과 7반의 최귀숙 선생이 긴급한 개인사정으로 불참하여 아쉬었으나 2반의 이치수 선생, 4반의 나, 5반의 강거희 선생, 6반의 김재완 선생, 그리고 담임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가르친 김병근 선생, 정귀우 선생, 김호길 선생이 참석하여 참석치 못한 반의 담임을 대신했다. 28회와 우리 해우회는 정말 깊은 인연이 있으니 우리 9명의 회원중 다섯명이 저들의 3학년 담임이었고 나머지 네분 도 저들을 모두 가르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초대하여 최선을 다해서 모시느라 애쓴 박부성 회장, 해리고 교사인 오영석 선생, 이용완 전 회장 모두 고맙고 5년만에 현명재, 최미홍을 다시 반갑게 만났다.우리반이었던 이민, 이철민, 김남수, 박부성, 이현욱, 이재락, 박규열, 조대현, 김동희, 김광훈이를 만났다. 주동복이와 박병상은 본 것은 같은데 사진에 없어 잘 모르겠다. 공무로 지리산에 갔다가 버스로 해리까지 달려온 초대회장 김광훈이와는 겨우 기념사진만 찍고 헤어져서 서운하다. 현재 교장은 유재이 교장이신데 전에 군산에서 만난 일이 있고 이치수 선생의 부인인 유정효 선생님과 고교동창으로 절친이고, 고등학교 교장은 김현석 교장으로 나와는 전주 제일고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이래저래 인연이 많은 해리이다. 하숙집이 있던 골목도 부러 찾아보고 왔다.
■지난 일요일(2018.5.10)에 해리중 30회의 초청으로 《속리산 수학여행》에 우리 해우회 선생님 아홉분 중 유영상 교장을 제외한 여덟분이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3학년 담임이셨던 세 분만 가셨으면 했지만, 김동식 회장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뗄 수 없어(?) 제자들의 뜻 깊는 축제인 추억의 수학여행에 모두 가서 하루를 즐기기로 하였다.
100여명의 나이 쉰 하나인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34년 전의 수학여행을 다시 한 번 떠났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우리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호텔에서 법주사까지 걸어가서 추억의 사진 촬영을 한다.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행사를 하는데 나도 고무신 윷놀이에 참가하여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 하루여행은 충북방송에서 촬영하였는데 14일 오후7시에 방송된다고 한다.
우리 해우회원 외에 조희태 선생님, 천현봉 선생님, 김선예선생님, 허미애 선생님께서 오셔 반갑게 만났다. 천현봉 선생님은 금년봄에 교장으로 정년하셨고 김선예선생님은 김창덕 선생님과 결혼하였었는데 울산에서 모두 퇴직하셨고 김창덕 선생은 무주에서 작물을 재배하신다고 한다. 허미애선생님은 부군이 치과의사라고 하는데 건강하게 잘 사신다고 한다.
100여명의 제자들과 추억의 수학여행을 보내고 오면서 우리 선생님들이 무척이나 흐뭇해 하신다. 푸짐한 선물에다 가고 오는길에 이종면군을 비롯한 고창 친구들이 너무나 성심성의껏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이 행사를 기획하고 잘 이끈 김동식 회장, 정성으로 연락을 취해주는 김진득군, 전주에서 가고 오며 정성을 다 해준 이종면군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34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선생님들을 잊지 않고 초청해주니 교사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은근히 느끼게 하고 교사였던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다. 해리중학교 30회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내가 근무한 학교를 돌아보기로 하고 가장 먼저 해리중학교를 찾았다. 학교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다. 세월이 무상하여 이젠 학생이 몇 안되는 아주 작은 학교가 되었으나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주어 감사하다. 모레 해리중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맺어진 해우회가 익산에서 모인다. 해리중에서 만난지 40년(1978-81년 부임)이 넘어갔는데도 아직도 끈끈한 정을 나눈다. 202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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