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그리움

무주고등학교

청담(靑潭) 2015. 2. 6. 21:40

 

 

무주고등학교

 

 

  내가 첫 발령을 고창으로 받은 뒤 익산, 군산, 부안을 거쳐 전주에서 근무하였다. 30여 년 간을 평야지역에서만 근무하였으므로 마지막으로는 산간지역에서 근무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청정지역 무주근무를 원하였고, 고맙게도 원한바 대로 무주고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무려 예순 한 분이 축하 난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예순 여섯 분이 축하전보를 보내주셨다. 무려 백 스물다섯 분이 축하 전화를 해오셨다. 내가 지금 고마운 그 분들 한 분 한 분 인사를 잘 챙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2008년

   무주고 교장은 이찬규 선생님이시다. 일직이 이리북중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어 허물이 없으니 모시기에 편했다. 학급은 학년 당 4학급으로 총 12학급이며 일반계 2학급, 전문(상업)계 2학급을 모집한다. 학생정원은 학년 당 112명, 전체는 336명인데 실제로는 242명밖에 되지 않았다. 실상을 파악해보니 전문계 학생이 학급당 28명 정원에 15명 정도밖에 모집이 안 되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무주중학교 학생들의 졸업생이 대략 100여 명 정도 되는데 성적 우수학생들이 대거 전주로 빠져 나가고, 또 다른 지역의 실업계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겨우 70여명만 입학하고 적상중과 부남중에서 모두 10여명이 입학하는 상황이었다. 지역사회에서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학부모들이 무주교육을 믿지 못하여, 전주나 대전등지로 미리전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무주의 발전은 무주의 교육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역교육관계자들이 노력한 결과, 무주고는 2007년부터 3년간 농산어촌 우수학교로 지정받아 교육부로부터 지원(총 14억 원)을 받고 있었고, 또 마침 이제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하는 고교다양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군 지역에 거점학교 1개교씩을 지정하여 지역교육의 중심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기숙형 공립고로 이미 지정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교무부장은 권이철 선생, 연구부장은 한순이 선생, 학생부장은 김태호 선생이며 교직원은 모두 40여 명이다. 농산어촌 우수학교로 지정되어 지원금을 받기 전까지는 방과후학습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학생들의 학력향상도 크게 기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9월초에 개최한 농산어촌우수고에 대한 지원금으로 후관의 기존교실을 리모델링 한 기숙사(40명 정원) 준공식에는 군수님과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참석하셨고, 9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인근 선생이 사감을 맡았다. 3학년 졸업생들은 농어촌 특별전형과 수시모집에 힘입어 졸업생 83명중 74명(4년제 46명, 전문대 28명)이 대학에 진학하였다. 김정희는 경희대에 이창환이는 세종대에 진학하는 등 전국의 수많은 대학에 고루 진학하였다. 늦게나마 기숙사가 생기고, 진학부장인 최철호, 그리고 문병주 선생 등이 애쓴 보람이라 하겠다.

 

 

2009년

  교무부장은 권이철 선생이 여전히 맡고, 연구부장은 황봉식 선생이 맡았다. 학생부장은 김태호 선생, 진학부장은 문병주 선생, 기숙사 사감은 이인근 선생이 여전히 맡았다. 무게감 있는 50대 부장들과 김태호, 최소영 같이 최선을 다 하는 40대 교사들, 그리고 대부분 젊은 30대의 교사진으로 구성되어 학력신장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3학년은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1·2학년에는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우수학생들이 상당수 있어 2학년의 임슬기와 1학년의 김민수 등 학년별 8명 정도를 선발하여 진로진학(학력향상)상담록을 작성하고 매달 1회 정도 개별 및 집단상담을 시작했다. 3학년 졸업생들은 일반계에서는 정수석, 강명희, 이예진 등이 기억에 많이 남고 건국대와 인하대 등에 합격생을 냈으며, 특히 전문계의 김황은이가 농협대에 합격하여 우리를 매우 기쁘게 했다. 이 해 7월에 학교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던 학교운영위원장인 장정배 선생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 하였다.

  기존 기숙사가 운영되는 가운데 기숙형 공립고 출범을 위한 새 기숙사를 짓는 건축공사가 일 년 내내 이어졌다.

 

 

2010년

   20여억 원을 들여 지은 기숙사가 완공되어 준공식을 갖고 무주고는 기숙형 공립고로 공식 출범하였고, 새 교장으로 전주고에서 진학지도에 힘써 전문성을 가지신 데다 열정이 크신 이원택 교장(현 전주고 교장)이 부임하셨다. 교무부장은 권이철 선생, 연구부장은 최진만 선생, 학생부장은 허대웅 선생, 진학부장은 김영호 선생이 맡았다. 그리고 기숙사 운영부장을 신설하여 이인근 선생이 맡았다.

  우리 무주고에 처음으로 원어민 교사가 배정되었다. 읍내에 월 40만 원 짜리 2층을 얻어 거처하도록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정받은 남아프리카 출신의 여교사가 무주가 시골이며 전주에서 너무 멀다하며 부임을 기피하게 되어서 한 달 뒤 2차로 배정받게 되었고, 나는 담당 장학사에게 강력하게 가장 훌륭한 교사를 배정하여 주기를 요구하여 받은 교사가 캐나다 출신의 제니퍼 하워드이다. 토론토 대학 출신으로 미모도 아름답지만 성격이 쾌활하고 예의도 바른 숙녀다. 회식 때면 교장에게 찾아가 술잔도 채워드리고 노래방에서는 온몸으로 락을 불렀지만, 수업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고, 교수능력도 뛰어났다. 원어민 수업경시대회에 참가하여 심사위원들이 왔는데 정작 원어민 심사위원이 그녀의 뛰어난 교수능력을 믿지 않고 미리 준비와 연습을 많이 한 때문이라며 인정을 하려 들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150여명의 신청자중 당당히 5위에 입상하였다. 우리 무주고에 정이 들어 2년을 근무하고 동부대학으로 갈 때 내가 추천장을 써주었다. 1년 후 캐나다로 돌아갔다.

  구 기숙사는 반딧불관으로 이름 짓고 우수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도록 하고, 신 기숙사는 정원이 104명이나 80여명이 신청하여 총 기숙사 학생수는 120여명이 되었다. 기숙형고의 기숙사는 기존의 특목고나 자율형사립고 등에서 우수학생들을 모아 주로 성적향상만을 위해 운영하는 목적과는 약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교통이나 부모의 직업 등과 관련하여 교육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사는 고교생들에게 값싼 경비로 기숙사에서 공부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므로 누구나 성적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다. 첫해에는 운영규정을 제정하고 젊은 교사들이 일일 교대로 사감을 맡았다. 교육부에서 주는 기숙형 공립고에 대한 지원금과 무주군청에서 주는 기숙사 운영 지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기숙사비는 대도시 고교 기숙사의 절반 이하인 12만 원 정도로 책정되었다.

  의욕적인 이원택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길러주고 미래의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를 공모하였다. 심사 결과 김영호 선생 반 학생의 작품이 당선되어 상금을 주었고 본관에 아주 큰 글자로 써 넣었다.

을 위한 도전, 미래를 향한 비상 명문 무주고

이와 함께 학교를 상징하는 앰불럼도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또 2009년부터 교지를 발간하는 김아영 선생님이 무주고 신문까지 발간하였고, 2010년부터는 유지은 선생님이 영자신문을 창간함으로서 교지 외에 두 개의 학교신문이 발간되게 되었다. 힘들다 하지 않고 의욕적으로 학생들과 함께 교지와 신문을 발간해 주신 두 분에게 감사드린다.

  기숙사 운영 2년 반, 교감의 우수학생에 대한 지속적인 진로진학(학력향상)상담 2년, 1년 동안의 학교장의 열정과 집념, 담임의 탁월한 진학지도가 어우러져 드디어 무주고 개교 60년 사상 처음으로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하게 된다. 임슬기는 2008학년도에 우리학교에 1등으로 입학한 아이로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내신성적이 최상위이고, 우수한 머리도 있고 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기에 수능최저등급기준을 통과하여 당당히 서울대 간호학과에 합격하였다. 이밖에도 조수인, 권택진, 이준형, 송은정, 박은영, 박인정, 황상인, 최인수 등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아 무주고가 비로소 공부하는 학교 분위기가 제대로 형성된 한 해였다. 전북대 사대를 비롯하여 많은 학생들이 국립대에 합격하는 큰 기쁨을 맛보았다.

  이 해 내내 학교장과 나는 비로소 무주중학교 학생들이 우리 무주고에 모두 입학하도록 최선의 홍보활동을 하게 되었다.무주고를 살리기 위해 무주중학교 학생들의 대도시로의 진학을 비판하는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학교에서도 학교장과 교사들이 무주고를 믿고 진학을 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무주고가 기숙형 공립고가 된데다 최상위 학생들이 대거 전주로 빠져나간 3학년들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수능모의고사 성적도 잘 나오고 있는데다 3학년 담임들의 열정이 비쳐졌기 때문이다. 학교장, 교감, 교무부장이 수시로 중학교를 방문하고 우수학생들의 부모와 수차례씩 전화통화로 상담을 해가면서 최상위권 학생들의 과반 수 이상이 우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2011학년도 입학생 수는 정원을 거의 다 채우게 되었다.

 

 

2011년

  1학기에는 함께 근무하시던 이원택 교장이 갑자기 9월 1일자로 전주고로 가시고 후임으로는 은동수 교장(현 전라고 교장)이 부임하셨다. 이원택 교장은 전주고출신으로 나와는 고교동기정도의 동년배 교장이시고, 은교장은 대학의 같은 학과 동창이다. 장학사로 오랫동안 근무하신 겸손한 분이다. 비록 연하의 교장이시나 교감으로서 정중하게 보필하여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이찬규 교장께서는 동생처럼 여겨주셨고, 이원택 교장께서는 동년배로 존중해주시고, 은동수 교장은 선배로 대해주시니 내가 복이 많았다. 은교장님 역시 전고와 전라고에서 입시를 지도한 진학 베테랑으로 이원택 교장처럼 열정적으로 근무하셨다.

  2년 반 동안 늘 함께 지내며 나를 깎듯이 대해주던 권이철 교무부장이 전주제일고로 전출함에 따라 최진만 선생이 교무부장을, 김경님 선생이 연구부장을, 두 번이나 만나 늘 최선을 다해 근무하는 고마운 이인근 선생이 이웃 설천고로 이동하여 강우천 선생이 기숙사운영부장을 맡고, 허대웅 선생이 학생부장을 맡았다.

  이 해 후반기에 우리학교는 교과교실제 운영학교로 지정되어 약 10억원을 지원받아 본관과 후관 사이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기숙사에 이어 또 하나의 새 건축물이 들어선 것이다. 2년 만에 학교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

  3학년들은 2009학년도 입학생들인데 말하기 어려운 이유로 내가 그리 크게 입학홍보를 열정적으로 하지는 못했던 학년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당시 전교 1등을 다투던 김민수가 가정형편상 우리학교에 입학함으로서 민수에게 크게 기대하며 진로진학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내가 1학년 때부터 우수학생들의 학력신장을 위해 상담해온 아이들이다. 김민수는 카이스트와 서울대 농생명과학대에 합격하여 다시 한번 무주고의 명예를 높이고 무주지역사회의 자존심을 살려 주었다. 다만 크게 아쉬운 점은 원광대 의대에도 합격하였으나 수능최저등급기준에 수학이 미달하여 선택의 폭이 좁아졌던 점이다. 물론 서울대에 진학하였다하여 출세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로되, 항상 최선을 다하는 임슬기와 김민수이므로 지역사회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를 잘 개척해 나가리라 확신한다.

  김민수 이외에도 김도훈, 신행은, 전명규, 진보림, 최소라, 김민지, 김지슬, 송은선, 신우섭, 황태현 같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서울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 모두 진학하였다.

  작년에 이어 무주중학교에 대한 입시홍보를 더욱 강화하여 2012학년도 입시에서는 최우수권 학생 중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 무주고에 입학하였고, 적상중과 안성중에서도 우수학생이 한 명씩 입학하는 행복한 학교가 되었다.

  학교 뒤로 신설되는 순환도로에 학교부지가 들어가게 됨에 따라 1억 1천만 원의 보상금이 나와서 도교육청의 허가를 받고 운동장에 두 개의 농구코트를 설치하였다. 그토록 보기 흉하던 옛 테니스코트의 녹쓴 철망과 관리되지 않아 제멋대로인 등나무 아래 휴게터가 말끔히 제거되고 정리되었다.

 

 

2012년

  학교장은 이제 2년째가 된 은동수 교장, 교무부장은 최진만 선생, 그리고 연구부장은 김경님 선생, 기숙사부장은 강우천 선생, 학생부장은 허대웅 선생이 그대로 맡고 무주군청에서 운영하는 영재스쿨 운영을 우리 학교가 맡게 되어 김영호 선생이 담당하게 되었다.

  1학년들은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입학하였고, 2학년은 작년에 입학한 학생들인데 체제개편 전환계획 로드맵에 의해 일반계가 3학급이었다. 시대가 이공계가 취업이 잘되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적성과 희망을 고려하면서도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조금은 무리지만 문과 1개 반, 이과 2개 반을 편성하였다.

  교과교실제에 의해 지은 신축건물에는 무려 9개의 교실이 새로 생겨 음악실과 미술실을 처음으로 만들고, 영어와 수학 전용교실을 마련하여 최고의 수업 기자재를 구입하고 수준별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작년에 대형 기숙사가 신축되었고, 금년엔 대형 건물이 또 한 채 신축되니 학교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비로소 촌티가 물씬 풍기던 무주고의 겉 모습도 한결 세련되어졌다. 특히 교육과정의 개정으로 음악교과가 만들어지고 음악실이 생겨 음악교사로 부임한 김재경 선생님이 충분한 예산으로 여러 가지 많은 악기를 구입하여 1학년 학생 모두가 기타를 치며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내 우리학교는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지 않았으나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음악만큼은 비로소 배우게 된 것이다.

  3월에 이동하면 자연스럽게 시내의 고등학교로 전보되어 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나게 되는데 무주고에 너무 정이 들어버린 탓에 마저 4년을 채우기로 하여 2학기 발령을 받으려니 익산에는 자리가 없어 부득이 익산의 중학교로 내신을 하게 되었고, 그러나 고등학교로 발령이 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으나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정작 발령은 어양중으로 받았다. 2009년과 2010년에는 군수와 무주지역사회 교육관련 인사들(초중고 운영위원들 및 군의원들)이 모인자리에서 무주고 살리기의 당위성에 대해 말씀을 드릴 기회를 가졌고, 2011년에는 오히려 위축되는 안성고와 설천고의 운영위원장님들과 세 학교의 공동 발전을 꾀하기 위한 협의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제 무주고가 입학정원 112명을 모두 모집하게 되어 총정원 336명이 되어가고, 우수학생들이 타 지역으로 나가지 않고 모두 입학하는 무주지역사회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떠났기에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산수 좋고 인심 좋은 무주에서 세 분의 교장을 모시면서 무주고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보람을 안고, 그래도 미련을 다는 버리지 못하면서 4년 동안 근무하며 살았던 정든 무주를 떠났다.

 

 

관사생활

  처음으로 하는 관사생활이었다. 나는 지은 지 15년 쯤 되는 구관 102호에 배정되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교감방이란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모두 8개 방이다. 앞에 있는 신관도 구관과 거의 같은 시기(2년후 쯤)에 지었다는데 역시 8개의 방이 있다. 2011년부터는 기숙사인 덕유관에 6개의 관사가 만들어졌는데 부족한 관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설계를 의뢰할 때부터 강력하게 요청하여 이루어졌다. 신 관사가 난방이 잘되고 편안하지만 사감을 맡은 젊은 교사들이 들도록 하고 나는 그냥 마음이 편한 구관사에 살았다. 같은 1층 104호에는 1년 반 동안 황봉식 선생이 있어 함께 어울리며 자율학습이 끝난 후 맥주 한잔씩 하는 여유가 있었고, 황선생이 교감으로 나가시고는 그 방에 최진만 선생이 들어와 역시 가끔씩 캔맥주 한잔씩을 마시는 행복이 있어 좋았다.

  두 개의 오래된 관사는 겨울에 살기에 너무 추웠다. 바람이 자유롭게 제멋대로 솔솔 벽을 통해 들어오는 아주 허술한 벽이다. 1년 전까지 기름보일러를 땔 때에는 큰 비용이 들지 않고 겨울 지내기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데, 내가 가기 전 해에 도교육청에서 전기보일러 시설을 한 뒤로는 전기료가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모두들 무서워 한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겨울 방학이지만 보충수업과 교감근무일 때문에 방학기간의 절반이상을 근무하게 됨에 따라 관사에서 자면서 전기장판이 있는 침대와 작은 전기난로로 한겨울 밤을 지내야만 했다. 도교육청에 실정을 보고하여 관련 담당관이 조사를 나와서 보완시설을 해주었지만, 그 역시 전기사용량이 대단해서 우리 모두들 전기료 걱정 때문에 마음 놓고 사용하지 못하는 고충을 감내해야 했다. 자율학습이 끝나고 10시 10분에 관사에 들어오면 방안 기온이 영하온도라서 침대의 전기장판을 사용해도 5-6도를 넘지 못하므로 잠이 들기 전에 전기난로를 머리맡에 켜놓고서야 겨우 TV를 시청할 수 있었고, 잠이 막 들라치면 전기난로는 끄고 자는 고생을 4년 동안 치렀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현관 앞에 있는 온도계를 보면 연일 영하 14–18도인 매서운 무주의 겨울을 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추억이다. 요즘은 우리 아파트에서 밤에 22도를 유지하면서도 우리는 “춥다”소리를 자주 한다.

 

 

장정배·오세득·유송열 운영위원장

  2009년 9월 초, 부임한지 일주일이나 되었을까? 나무그늘 아래서 몇 교사들과 한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남자답게 생긴 신사 한 분이 가까이 다가왔다. 장정배 학교운영원장이었다. 정치에 관여하는 분이지만 무주고 발전을 통한 무주교육 살리기에 온 정성을 다하는 분으로 목표가 뚜렷하고, 그 동안에도 많은 노력을 해온 분으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지는 동안 학교발전을 위한 의견이 나와 일치하였고 함께 최선을 다해 노력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무주교육의 한 축을 움직이는 분이었고 장차 무주군수가 되어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뜻 밖에도 그와 만난 지 1년도 채 안된 2009년 7월 방학 중, 향년 50세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니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주를 위해 할 일이 많음에도 졸지에 세상을 떴지만, 다행이도 부인 이해양씨가 작년에 군의원이 되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일을 하시게 되었음은 저 세상에 있는 장정배 선생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할 것이다.

  장정배 위원장의 유고로, 뒤를 이어 오세득 선생께서 위원장직을 맡았다. 행정관리 출신으로 칠순의 연세에도 모교인 무주고 발전을 위한 열정이 대단하셨다. 교감인 나의 노력을 항상 부끄러울 정도로 칭찬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셨다. 동창들을 중심으로 무주고 발전기금을 조성하여 대학입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도 시작하셨다. 칠순을 넘기신 나이지만 지금도 무주자원봉사센터장직을 맡고 계신다. 열정적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다.

  2011년에는 유송열 선생이 위원장을 맡았다. 무주군의원을 역임하신 유위원장은 조용하시고 항시 겸손하시지만, 소리 없이 학교의 어려운 일을 잘 해결해 주셨다. 작년 선거에서 무주군 의원으로 다시 당선되시어 현재 부의장을 맡고 계시는 분이다. 이 밖에도 운영위원과 학생생활지도 위원을 맡아 열심히 도와주신 이강안 원장님, 김정오 위원, 우리 학생들의 생활지도와 상담을 열심히 해주신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의 서정분 소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훌륭하신 무주인들이다.

 

 

기숙사 신축 및 운영

  기숙사 부지를 선정하는데 그리 쉽지 않았다. 구관사 자리, 구관사 앞 창고자리, 지금 지어진 자리 등 여러 말이 있었으나 결국은 도교육청 시설과 직원들과 우리 교사들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 장소에 신축하기로 결정된다. 2009년 거의 1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다른 기숙형 고등학교들의 기숙사에 미치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비록 도교육청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신축하는 것이지만. 설계부터 시공까지 도교육청 담당자들과 더욱 긴밀히 협력하고 좀 더 세밀하게 확인하지 못한 데에 대한 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첫해에는 기숙사 운영부장은 이인근 선생이 맡고, 젊은 교사들 네분이 교대로 사감을 맡아주었으나 2011년에는 전문 기숙사 사감으로 남녀 두 분을 모셨다. 배상수, 양길순 선생을 선발하여 1년 반 동안 함께 근무했다. 열정적으로 근무해주신 두 분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 컸다. 반딧불관은 우수학생들이 공부하므로 문제가 없었지만, 덕유관에는 전문계 학생들도 많이 입사하고 일반계 학생들 중에도 공부에 전혀 뜻이 없는 학생들도 있었으므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2011년부터는 기숙사 운영부장인 강우천 선생과 배상수선생의 열정으로 점차 공부하는 기숙사로 변하여 갔다.

 

 

일반계고교 전환

  전문계반의 지원자수가 급감함에 따라 지역사회에서는 전문계반 모집을 중지하고 일반계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우리나라의 대학진학율이 84%에 이르고 상업계 졸업생들의 취업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에서 모든 금융계가 대졸출신만을 선발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상업계 학생들도 거의 모두 대학에 진학하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과 교사들이 애써 취업시킨 보람도 없이 중소기업에 취업한 학생들이 몇 달 만에 퇴사해 버리므로 더 이상 상과 유지를 주장하기도 힘들어졌다.

  우리 전북에서도 이미 완산여상, 이리상고와 전주상고가 일반계로 전환하였고, 군지역에 소재한 대부분의 혼합형 고등학교들이 일반계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주고도 순창제일고, 고산고, 설천고 등과 같이 2014년도 신입생 모집부터는 일반계만을 모집하는 체제개편 로드맵을 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2011년부터는 일반계 3학급, 상업계 1학급을 모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주고는 작년부터 일반계만 모집하였으므로 금년까지만 3학년 레저관광과가 유지되고 2016학년도에는 완전한 일반계고교로 완성된다.

 

 

서울대 입학생 연속 배출

  2010년 3월에 이원택 교장이 부임하여 학력향상과 진로지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내가 최고의 적격자로 보아 3학년 담임과 진학업무를 맡긴 김영호 선생이 드디어 무주고 최초의 서울대 입학이라는 영광을 만들어 냈다.

  2011학년도 대학입시에서 2008학년도에 우리학교에 1등으로 입학한 이후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내신성적이 최상위이고, 머리도 좋은데다 열심히 공부하는 임슬기가 서울대 수능최저등급기준을 통과하여 당당히 간호학과에 합격하였다. 본인과 부모는 동시 합격해 놓은 전주교대를 은근히 생각하는 듯 했지만 우리는 강력하게 서울대 진학을 관철시켰다. 바른 선택이었음이 입증되도록 임슬기가 잘 해 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2012학년도 대학입시에서는 줄 곳 전교 수석을 지켜오며 모의고사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내던 김민수가 카이스트와 서울대농생명과학대에 합격하여 다시한번 무주고의 명예를 높이고 무주지역사회의 자존심을 살려 주었다. 졸업식 날엔 임슬기랑 여러 아이들이 내게도 찾아와 인사하며 사진을 함께 찍고, 김민수는 제 담임과 교감인 내게도 선물을 주고가니 보람을 느끼며 기쁜 마음이 컸다.

  기숙형 공립고는 공부하는 학생들만 힘든 생활은 아니다. 중학교 교사들은 보통 4시 반이면 퇴근하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5시 반까지 방과후 학습을 하고는 잠시 저녁밥을 먹고 쉰 후엔 대여섯 과목의 야간 특별수업과 자율학습이 진행되어 10시에야 자율학습과 수업이 모두 끝이 나는 생활이 거의 일년 내내 계속된다. 4년 동안 열정을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도와주시며 희노애락을 함께하신 모든 분들을 잊을 수 없다. 감사드리며 성함을 적어본다.

 

 

함께 근무한 교직원 명단(존칭생략)

 

2008

권이철 황봉식 김태호 김아영 최철호 문병주 문경환 김정희

김서영 최명순 한순이 한은숙 이인근 손윤영 김신애 장은희

박주영 배경옥 김혜선 최웅규 박수진 김대억 김향희 이남숙

박민영 윤영오 윤영선 김미리 김병옥 김병수 황보영 이숙영

 

2009 새로운 분

손윤영 조유순 유지은 서향남 박경훈 최소영 임수빈 박종관

박은선 정우경 윤범호

 

2010 새로운 분

이원택 강우천 김영호 최진만 이경근 허대웅 김대식 김경님

한미정 권미진 이재현 신정선 안샘지니 제니퍼 하워드

신현영 이대웅 이영재

 

2011 새로운 분

은동수 이세풍 박성용 이연호 강효정 곽세진 문성신 김효진

배리 불랜킨튼 김성룡 김지영 정재성 배상수 양길순

 

2012년 새로운 분

김미경 정순도 정위연 한민준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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