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와 벼룩시장
마포에 볼일이 생겼다. 한 사흘 걸리려니 생각하고 짐을 챙겼다. 미국의 모 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인 예쁘고 자랑스러운 조카딸의 결혼식이 지난주에 서울대에서 거행되어 아들과 딸은 그곳에서 만난데다, 빠질 수 없는 모임이 있다며 양드리는 사양하므로 나 혼자만의 여행이 되었다.
첫 날과 이튿 날 오전까지 업무를 끝내고는 오후에 예정했던 동묘와 바로 곁에 있다는 벼룩시장을 찾았다. 지하철을 이용해보기로 하고 공덕역에서 6호선을 타고 『동묘앞』역에 내리니 바로 근처에 동묘가 있다. 지하철은 편하기 그지없는데, 아직도 나는 타는 곳을 찾아가는 일과 내려서 출구를 찾아가는 일에 여전히 서툴다. 동묘 입구로 가는 길이 바로 벼룩시장이다. 심지어 동묘의 입구 역시 많은 상인들과 구경꾼들로 북적이고 있다. 입장료는 없어 그냥 들어서니 부근에서 산책나온 남성 어른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을 보니 이곳도 탑골공원처럼 숭인동의 남자어른들의 쉼터이자 모임터인 듯하다.
동묘(東廟)
동묘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찾는 것이 처음이니 사실 무슨 묘인지도 잘 몰랐던 곳이다. 동묘는 중국의 관우(關羽 156-219)의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임진왜란 뒤인 1601년(선조 34)에 세워졌다. 정식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며, 조선 말 관왕을 관제(關帝)로 숭상하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시는 묘우(廟宇)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조선 말기에는 관왕을 관제라고 높여 불러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불렀으며, 문선왕(공자)을 모시는 문묘에 대응해 무안왕(武安王)인 관우를 모신다 하여 무묘(武廟)라고도 일컬었다. 이곳 외에도 관우를 받드는 사당으로는 선조 31년(1598)에 남관왕묘가, 고종 20년(1883)에는 북묘가, 광무 6년(1902)에는 서묘가 세워졌었는데 지금은 동묘만이 남아 있다. 동묘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제대로 격식을 갖춘 대표적인 관우의 사당이다.
중국 촉한의 장군을 사당까지 만들어가며 모시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한 명나라 장수 진린(陳隣)은 관우의 숭배자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겨울, 그는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완쾌 뒤 그는 관우의 음덕이 있었다 하여 관우의 소상(塑像)을 개인적으로 봉안하여 받들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함께 참전했던 명의 여러 장수가 돈을 내고 우리 조정에서도 건립비용을 보태 1598년 5월에 사당을 완공하였다. 이것이 남관왕묘다.
전쟁이 끝난 뒤 명의 신종(神宗)은 사신 편에 “관공(關公)은 원래 영령(英靈)이 비범하여 임진왜란 때 귀국을 음으로 도움이 지대하였으니 묘(廟)를 세워 그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조서(詔書)와 4천금의 건립 기금을 보내와 묘우 설립을 강력하게 종용하였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대문 밖에 터를 잡아 관왕묘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동묘이다. 선조 35년(1602) 봄의 일이었다.
관왕묘가 자리를 잡자 이제는 관우를 숭배하는 현상이 차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급기야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가 무속이나 민간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변모하듯 섬김의 내용이 바뀌면서 1920년대에는 관성교(關聖敎)라는 종교단체까지 등장하였다. 이런 연고로 전국 곳곳에 관우를 섬기는 사당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조선 말기 서울에 세워진 북묘와 서묘는 다분히 이런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전주에도 전북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성묘(關聖廟)가 완산구 동서학동에 있다. 주왕묘(周王廟) 또는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는데 남고산성의 만경대(萬景臺) 남동쪽에 있다.
1895년(고종 32) 전라도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별장(南固別將) 이신문(李信文)이 각처 유지들의 헌금을 받아 건립한 것으로, 30m 높이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중앙에 본전이 있고 좌측에 서루, 우측에 통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본전 네 기둥에 유려한 필체로 장수 관우를 봉안한 목적 등이 기록되었고 조선 말기의 화가 소정산이 그린 《삼국연의도》 10폭 그림과 관우의 소상(塑像)이 안치되었다. 전주교육대학을 지나 남고사지 가는 길 오른쪽 300m쯤에 입구가 있다. 어쩌다 한번씩이나마 내가 남고산성을 오를때면 찾아보는 곳이다.
진린의 개인적인 숭배대상이었고 신종의 의견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국가와 민간의 숭배대상이 된 관우(관운장)는 기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뛰어난 장수중의 한 사람이며 결코 천하를 지배하려한 영웅호결은 아니다. 삼국지연의를 통해 뛰어난 무예와 무거운 인품이 남달랐던 것은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나타난 재미있는 관우숭배신앙의 역사다.
동묘는 우리의 의지보다는 중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 세워진 까닭에 설립 뒤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관리되었다. 그러다가 숙종이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을 다녀오는 길에 친히 참배한 이래 영조부터 철종까지 역대 임금이 모두 능행길에 동묘에 들를 만큼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특히 정조는 자신을 포함한 네 임금, 즉 숙종과 영조, 뒷날 장조로 추존된 아버지 사도세자가 지은 관우를 찬양하는 글을 새긴 비석, 이른바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祖御製武安王廟碑)를 남묘와 이곳 동묘에 세운다.
정전은 건립 당시 중국의 관여가 있어서인지 평면 구성, 외부 마감, 지붕 구조가 우리 건축과는 무척 다른 중국식 건물이다. 본실의 중앙 뒤편으로 석단을 마련하여 나무로 만든 관우의 상을 안치하였다. 석단 앞으로는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을 포함한 4명의 무인상이 서 있다. 정전 내부 전실보다 한 단 높은 본실의 중앙에는 금빛 옷을 입고 긴 수염을 뽐내고 있는 관왕이 앉아 있다.
동묘구제시장(벼룩시장)
청계천을 중심으로 서울에는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소품과 지역 특산물 등을 취급하는 벼룩시장이 몇 군데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동묘벼룩시장이라고 한다. 동묘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동묘벼룩시장이 펼쳐진다. 동묘입구까지 시장이 서고 있다. 동묘를 구경하고 나와서 본격적으로 시장구경에 나섰다. 가장 보고 싶은 곳은 LP판이나 포크 CD가게지만 모든 물건들을 다 보고 싶어 천천히 구경한다.
동묘벼룩시장은 조선 시대부터 계속된 시장이다. 지금의 벼룩시장 일대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궁궐에서 쫓겨나 궁핍해지자 그 처지를 돕기 위해 여인들이 채소를 파는 시장을 만들어 정순왕후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한때는 이곳에서 행상과 노점을 하는 여인네들이 많아 여인시장이라고도 불리었고, 장거리(場巨里)라고 하였다.
현재는 동묘를 중심으로 골목길에 좌판과 노점이 길을 메운다. 구제 의류, LP판, 잡화 등 온갖 골동품, 전자제품, 오래된 책까지 펼쳐진 거리는 말 그대로 거의 요지경 만물상이다. 몇 천원이면 쇼핑도 하고 먹거리를 즐길 수도 있어 주말이면 늘 사람들로 붐빈다. 오늘은 평일(수요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가장 잘 팔리는 것은 단돈 천 원짜리 옷인데 거리에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다. 젊은이들이 입어보며 사는 듯하다. 나로서는 책 가게, LP판 가게, 오디오 및 재봉틀을 파는 가게, 군대용품 가게, 등산복 가게 큰 구경거리였다.세상에! 예쁜 여름용 등산조끼와 T셔츠가 5천 원씩 이란다. 스페인에서 제작된 칼과 100여년은 되었음직한 오디오를 50만원~100만 원 정도에 팔고 있어 관심이 가기도 했다. 이런 벼룩시장을 즐겨하면 돈 많이 벌지 않아도 살아갈 수는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해본다. 언젠가 한가한 시간이 나게 되어 다시 찾게 되면 LP판이나 포크 CD를 많이 구입하고 싶다.
다음날은 동구릉을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날은 더운데다 100M~150M정도의 산을 오르내리며 10여개의 왕릉을 찾아보아야 하는 쉽지 않은 답사가 될 것겉아 양드리와 함께 등산을 가는 셈 쳐서 좋은 가을에 가기로 일단 미루고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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