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기
들어가는 말
우리 대한민국이 잘사는 나라로 변하다보니 어린 시절엔 꿈조차 꾸어보지 못했던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1990년 12월에 처음 해보았다. 조선일보가 주선한 역사과 교사들의 <일본속의 한국사 탐방>이었다. 이후 많은 해외여행을 해왔으나 언제나 꿈꾸어 온 대망의 여행이자 해외여행의 종결이라 믿어온 것은 바로 서유럽 탐방이었다. 어느 지역보다 잘사는 나라들이며 세계를 이끌어온 강대국들이며 오늘날의 현대문화를 지배하며 선도해 온 저 나라들을 직접 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다. 양드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꾸어 왔다하니 그래서인지 그 열망이 나보다 더 한 것 같았다. 저들은 15C말부터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이후 광대한 해외시장이 형성되어 상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16C에 신항로 개척에 앞장선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가 아메리카를 점령하여 착취를 시작하고 에스파니아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다. 이어 17C에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만들고 18C에는 영국이 인도와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를 지배한다. 1880년대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쟁탈전을 벌여 독일과 벨기에, 이탈리아까지 식민지를 만들었다.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친 저 제국주의들은 앞선 무력을 이용하여 전 세계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지배하며 약탈하였으나 그들의 앞선 문화를 이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 측면도 있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의․식․주면에서 저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아파트와 옷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나폴레옹이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주의가 전파되고 민족주의가 각성된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약한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아무 죄 없는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아프리카인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고 부린 저들의 행패에 대한 분노는 언제까지나 절대로 억누를 수 없지만, 그래도 저들로부터 우리는 긍정적인 역사적 교훈을 얻는 바가 있다.
『나라든 개인이든 강해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는 명제다.
아들 딸을 가르치랴, 미래를 설계하랴 하다 보니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그저 꿈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꿈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경제가 해결되어서도 서유럽 여행이 쉽게 허락되지는 않았다. 관리자로서 충실히 근무하려다보니 방학 중에도 10일 이상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차마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도 안타까움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그 언젠가 찾아올 서유럽 여행의 부푼 꿈의 실현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또 방학 때에는 여행비는 비싸면서도 추위나 무더위 속에서 긴 여행을 해야 하므로 아주 비경제적이고 비실용적인데 비해, 비록 조금 늦게 가더라도 비용을 절감하면서 4,5월 좋은 계절에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에 느긋하게(?) 참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그 시기를 나의 정년퇴직 직후 봄으로 정해 놓았다. 나는 양드리에게 서유럽 여행의 선결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반드시 양드리와 함께 간다. 만족도를 최대로 높이기 위해서다.
둘째, 다시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 것이므로, 되도록 많은 나라를 방문하는 상품을 선택한다.
일본의 나라와 교토를, 중국의 요동과 국내성과 백두산을 다녀오고서야 비로소 아이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유럽을 가보지 못하고 세계사를 가르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나 많은 돈이 드는 일인 만큼, 나 혼자만의 부끄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생생한 역사교육이 아닌 입시용 서양사를 책으로만 가르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죽은 교육을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몇 년 전에 세계사를 가르칠 때는 미처 가보지 못했던 이집트와 그리스는 다녀왔으나 이탈리아와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은 이제서야 가게 되니 그 점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서유럽은 선진국의 상징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은 현재에도 세계 10대 강국이자 인류문화의 선진국이다. 근대이후 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고 그들의 문화가 전 지구에 전파되어 인류의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도 양복도 자동차도 정치․교육제도도 축구도 배구도 맥주도 본래 모두 그들의 것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유럽을 제압하고 있으나 우리는 여전히 유럽을 동경하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고,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와 바로셀로나의 메시는 늘 가까이 있으며, 차범근은 독일에서, 박지성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뛰었고, 손홍민과 기성용은 현재 독일과 영국에서 뛰고 있고, 우리 이승수는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우리 이승원은 프랑스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젊은 아이들의 안중에는 마치 동경하는 세계는 유럽밖에 없는 듯 보인다. 바로 그곳에 내가 이제야 가게 된 것이다. 무려 11개국을 방문하는 16일 여행코스에다 양드리의 강력한 요청으로 반드시 베르사이유궁을 코스에 넣은 상품을 고르다보니 여행사는 0000이고 항공사는 0000이 되었다.
4월 28일 22시에 공항에서 가이드와 만나게 되지만 우리는 27일에 서울로 떠났다. 마포집에서 아이들과 하루를 함께하고 28일 이승수가 인천공항까지 바래다준다. 민경이가 셀카봉을 드린다며 바삐 찾아왔다. 15박 16일의 서유럽 11개국 여행의 시작이다.
이미 우리가 찾아보는 국가, 도시, 문화유적, 관광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공부하고 블로그에 올렸으므로 여행일정과 느낌, 견해 정도만 간단하게 기록하여 나가고자 한다.
4월 29일 수요일(제1일)
▣영국
우리 팀은 가이드 및 9개 팀으로 구성된 20명이다. 여섯 부부(서울 임기자님 부부, 박부회장님 부부, 경주 이선생님 부부, 광주 이선생님 부부, 서울 이선생님 부부, 우리 부부), 순천에서 온 부부와 따님 가족, 서울과 인천에 사시는 친구사이인 명진씨와 애정씨, 우리 어른들을 즐겁게 해준 딸 같은 상큼한 유진이, 혜진이, 민정이다. 남자가 일곱에 여성이 열 네 분이다. 특이한 것은 젊은 여성분 세분과 두 부부를 제외한 13명이 전라도 사람들이어서 모두들 놀랐다. 15일 내내 화기애애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행복한 여행을 만들어 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다.
인천공항에서 정각 1시에 출발하여 암스테르담에 12시에 도착한다. 11시간이 걸렸는데 현지시간으로는 새벽 5시이다. 우리와의 시차는 7시간이다. 출발 할 때 비행항로 안내도를 보니 북한의 황해도 상공을 지난다. 깜깜한 밤이라 확인할 수 없어 매우 서운했다. 중국과 몽골,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 에스토니아, 발트 해, 독일 상공을 지나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의 스키폴공항에 도착한다. 두 시간을 기다려 비행기를 갈아타고 7시 15분에 런던으로 향하는데 간신히 창밖으로 10여 분 간 대서양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많은 배들이 항해하는 대서양 구경도 겨우 10여분, 구름이 나타나 아무것도 더 이상 보지 못하며 1시간 30분을 날아 런던의 히드로공항에 도착했는데 시간은 7시 40분이다. 또 한 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런던
영국은 2014년 국민총생산액은 세계 6위, 1인당 GDP는 44,000달러로 세계22위이다. 착륙하면서 보이는 공항 주변은 농촌인데, 꽃 재배가 성하고 여러 색의 꽃들이 아주 예쁘다. 그래서인지 밭 모양이 마치 우리의 색동저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말로만 듣던 템즈강은 뱀 모양의 사행천으로 색깔이 너무 아름답지 못한 강이라서 놀랍다. 버스로 돌아보면서 느낀 런던은 대체로 깔끔하고 밝게 정돈되고 조용한 도시로 고층빌딩이 전혀 없어 우리 서울과는 다른 모습이다. 런던의 가이드는 50대 초반의 남자분이다. 매력남으로 세련되고 지적이신 분인데 유학생 출신으로 따님들이 벌써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국회의사당과 빅벤
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의 상원과 하원이 함께 있는 국회의사당에 가지는 못하고 건너편 템즈강가에서 의사당과 빅 벤을 보다. 멀리서 보아도 의사당은 장엄하고 규모도 대단하다. 직접 가까이서 보고 싶지만 하루일정으로 런던을 소화해야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패키지 여행은 오직 『짧은 시간에 더 많이 보는 것』을 생명으로 하며 나는 기꺼이 이를 적극 지지하므로 일체의 불만은 없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날씨가 바람이 불며 을씨년스러워졌다.
●타워브리지
국회의사당의 빅 벤과 함께 런던의 상징으로 꼽히는 것이 타워 브리지라 한다. 역시 멀리서 바라보며 사진촬영만 하는데 에구!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한다. 버스를 타고 출발하자 비가 차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웨스턴민스터 사원
영국 왕과 위인들이 잠든 곳이다. 비는 약해졌다.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며 또한 이곳에 묻혀 있다. 1997년에 교통사고로 죽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을 이곳에서 치르기도 했다. 고딕식으로 아름답고 장중한데 실제 왕실에서 예배를 보는 성당은 바로 옆에 따로 있다.
●버킹엄 궁전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26년생 : 90세)이 사시는 곳이다. 여왕이 계시면 왼편의 작은 문 위에 깃발이 내걸리는데 오늘은 없는 것을 보고 가이드는 현재 여왕님이 안 계신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귀족적 자태와 여왕다운 품위를 지닌 여왕님에게 반하였고 존경해왔다. 1947년 필립공과 결혼하여 이듬해 찰스황태자를 낳고 1950년에 앤공주를 낳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앤공주는 본 적이 있다. 1952년 27세에 왕위에 올라 지금까지도 건강하시며 계승자인 찰스는 현재 68세로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한다. 남의 나라 일이긴 하지만 찰스가 옛 애인인 카밀라와 저지른 공공연한 불륜행위, 다이애나(1961-1997)와의 이혼, 카밀라와의 결혼 등을 보면 찰스는 영국왕으로는 적절치 못한 것 같다. 존경의 대상이 못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이혼후 이집트 사업가와 데이트하다가 파리의 지하도에서 37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그 때가 1997년이다. 벌써 18년 전의 일이 되었다. 재클린(1929-1994)과 다이애나의 죽음에 지금까지도 나는 그다지 인간적인 연민을 크게 느끼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고고함을 잃어버린데 대한 아쉬움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점에서 나는 권위의식이 매우 강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임을 알겠다. 파리에서 그녀가 사고를 당한 지하도를 버스로 지나는 일이 있었기에 옛일을 회상해본다. 나는 한 때 영국왕실이나 일본의 천황가등 아직도 남아있는 각국의 왕가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조금이나마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耳順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음인가?
●하이드 파크
중학교 때 영어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하이드 파크는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소유지였다. 일렬로 세워져 심어진 큰 나무들 아래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라 하는데 과연 많은 시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시내 중심가에 무려 40여만 평의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우리 익산시는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산이 없는 평야도시(높이 85m인 배산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기에 삭막하기 그지없었으나 20여 년 전부터 무려 세 개의 공원이 조성되었고 나는 그중 하나인 배산체육공원 옆에 살면서 마음껏 산책하고 운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며 굳이 하이드 파크를 부러워 할 생각은 없다.
●대영박물관
우리 서울의 국립박물관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며칠로도 부족하다. 하물며 세계적인 대영박물관을 어찌 다 볼 수 있으랴? 이집트, 로마, 그리스 등의 예술품 전시관을 지나 우리 한국의 전시실을 찾았다. 로제타스톤을 보게 되어 가슴 뿌듯하지만 이집트실이나 그리스실이나 유물들이 조잡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직접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이나 아테네에 직접 다녀온 때문이겠다. 람세스 2세상을 제외하고는 볼만한 예술품이 거의 없고, 특히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과 부조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내가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놀랍다. 부조는 그런대로 온전한 상태였지만 조각상들은 대부분 크게 훼손되어 온전한 작품이 거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고, 약탈문화재일지언정 잘 보존한 공이야 인정되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리스에 돌려주어 파르테논 신전의 복원을 돕는다면 더욱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다. 파르테논 조각상들이나 부조들이 이곳에 전시된 여유는 이렇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의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저 한국관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하면 지나친 말인가?
4월 30일 목요일(제2일)
▣프랑스
●파리
프랑스는 2014년 국민총생산액은 세계 제 5위, 1인당 GDP가 45,000달러로 세계 18위이다. 어제저녁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이동했다. 차창을 통해 영국의 농촌을 보고 싶으나 벌써 어두워지는데다 터널이 계속되더니 천지가 어둠에 묻힌다. 파리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인데, 버스를 타고 동북쪽 시골에 있는 호텔로 향한다. 5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많이 실망스런 호텔(balladins)이다. 모두 남은 기나긴 일정을 생각하여 이심전심으로 말을 아낀다.(나는 지금도 계속 말을 아껴야 합니다.)...하지만 설레는 파리여행은 시작된다. 파리는 아름답고 고색이 창연한 도시다. 유럽여행에는 이제 일본인들은 거의 없고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온통 판을 치는데 특히 파리는 중국인 여행객 천지였다. 일본인들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다녀갔고, 우리 한국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오기 시작하여 현재 진행형인데 중국은 2010년 이후 시작하자마자 급증하기 시작했고 그 관광객 수와 그들이 쓰는 돈이 엄청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는 쁘렝뎅 백화점도 중국인들이 80%를 차지하는데 바로 옆에 있는 라파이예트백화점은 100% 중국인이라 한다. 중국인들은 우리와 유럽여행의 성격이 달라서인지 주로 대도시의 백화점을 중심으로 몰려다니므로 고대유적지들에서는 만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평범한 시골 중년들로 보이는데도 유럽여행을 다니고 또 잔뜩 물건을 구입해가는 저 중국인들 대단하다.
●루브르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시티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비가 내리니 우산을 받고 입장을 하는데 엄청난 관광객으로 장사진을 친다. 가이드는 50세 정도의 세련되고 특히 목소리가 아나운서 뺨치게 고혹적인 분으로 불문학을 하신 분이라 한다. 요령 있게 우리를 이끌며 안내 하는데 정말 최고의 전문가이드답다.
1층에는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 미술품이 전시돼 있는데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상들을 지나 말로만 들던 <밀로의 비너스>를 만났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어 가까이 가지 않고 기념사진을 잘 찍어 두었다. 2층은 이탈리아·에스파냐·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돼 있는데 어찌나 최고의 그림들이 즐비한지 황홀할 지경이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과 어린 시절부터 실물을 보고 싶던 저토록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보았다. 역시 사람들이 장터처럼 모여 움직이질 않아 가까이 가기 힘들다.
3층 역시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네덜란드·플랑드르·독일의 회화도 전시되어 있다. 이름은 모르지만 이미 책과 TV를 통해 보았던 유명한 그림들이 즐비하다.
●베르사이유 궁전
얼마나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인가? 대부분의 여행상품에 들어있지 않아 워낙이 사람들이 몰려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소비되므로 코스에 넣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양드리의 강력주장으로 오게 되었다 할 것이다.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이다. 비록 비를 맞으며 입장을 조금 기다렸을 뿐 생각보다는 쉬웠다. 안내도를 받아들고 인파에 밀려가며 차례로 20여개의 방을 모두 돌아보다. 방방마다 수많은 미술품과 그림들로 호화로움과 장엄함의 극치다. 루브르박물관과 베르사이유궁을 보게 되어서 이제 웬만한 미술전시회 정도는 시시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 절대주의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궁궐이라는 생각이 들다.
가장 널리 알려진 거울의 방에서는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행해지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었다 한다. 가랑비가 내리지만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정원에 가다. 대단한 규모의 정원이 빗속에서도 매우 아름답다. 멀리 대운하가 보인다. 화장실이 단 하나밖에 없는데 이미 나온 뒤 찾으니 불가하다. 유럽 여행 중 내내 화장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니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들이 원망스러웠고 어쩔 수 없이 대체로 50센트씩 지불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펠탑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약 324m이다. 파리의 경치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완공 당시 모파상과 같은 예술가와 지식인의 비판을 받았으나 그대로 남아 무전탑으로 이용되었다 한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약 40년간 인공 건조물로서는 세계 최고였다. 사진이나 TV를 통해 본 에펠탑이 그저 철로 세워진 건축물이려니 여겼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실로 너무나 아름다운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번째 관망대까지만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계단을 걸어서 꼭대기까지 다녀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저녁에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보는 에펠탑의 야경은 신비스럽고 이렇게 아름다운 탑을 만들어 가는 프랑스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에 놀라울 따름이다.
유람을 마치고 간이 근로자 숙소(호텔이 아니므로)로 돌아오는데 급조 투입된 버스의 운전사는 60대의 여성으로 남편과 함께 왔는데도 길을 잘못 찾아 무려 1시간 30분을 헤매다가 겨우 찾아들었다. 명색이 관광버스인데 네비게이션도 없이 핸드폰으로 길을 찾는 나이든 기사부부여서 참 한심한 생각이 들다.
시골숙소에서 파리에 이르는 프랑스의 시골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농사짓는 모습은 없고 끝없는 넓은 들판과 낮은 구릉에는 온통 목초와 노랗게 물든 아름다운 유채밭들이다. 금년엔 제주도 유채 밭 따로 구경 갈 필요가 없어졌다며 좋아들 한다.
5월 1일 금요일(제3일)
●개선문
개선문에 모인 인파는 온통 동양인들인데 물론 거의 중국인들이다. 개선문은 그 이름대로, 프랑스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건립되었다. 개선문은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설계되었다 한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으며 개선문 안쪽의 바닥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용사들을 추모하는 동판이 새겨져 있어 그들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도운 것을 역사적으로 크게 기념함을 알았고 참전해준 프랑스가 고맙다. 2004년 5월 27일에 설치하였고 한국전쟁에서 270명이 전사하고 1,500여명이 다쳤다고 한다. 감동적이어서 동판을 찍어두었다.
●샹제리제 거리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거리인데 20여분 걷을 수 있는 거리다. 프랑스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부하는 명소이자 파리 시내 최대 번화가이다.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나무가 가로수로 우거져 간다. 파리 패션의 메카답게 명품 브랜드의 본사와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파리는 마로니에의 도시다. 하얀색의 꽃이 핀 마로니에와 붉은 색의 꽃이 핀 마로니에들이 조화를 이룬다. 매우 아름답다. 우리나라에는 동숭동 대학로에 마로니에가 있다고 들었고 60년대 후반에 박건이 『지금도 마로니에는』이라는 노래를 불러 히트한 일이 있어 기억에 새로워서 막 불러댔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유럽 북반부의 전역에 걸쳐 도시마다 아름다운 마로니에는 조성되어있고 꽃이 피어 있다. 우리나라의 도심에 소나무를 심는 넌센스가 벌어져 내가 지난번 조경관리 수업시간에 비판한 적이 있다. 우리 소나무는 결코 가로수로 맞지 않다. 이태리의 가로수로 심어진 우산소나무는 소나무가 많지 않은 나라에서 그늘이 많은 소나무이므로 이해가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산에 온통 소나무천지인데 수목이 우거지지도 않는 소나무들을 비싸게 구입하여 가로수로 심은 익산시, 부안읍 등의 행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분명 도시 미관과 효율성을 먼저 고려하기보다는 조경업자들을 우선한 행정으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로니에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콩코드광장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로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 한다. 버스로 지나면서 잠간 바라보았는데 일정에 있음에도 정작 방문하지 않아 내내 서운하다. 샹젤리제거리와 통하는 줄 알았더라면 샹젤리제를 산책할 때 뛰어가서라도 콩코드광장을 다시 보고 왔을 터이건만 미처 알지 못했다. 광장의 중앙에는 이집트로부터 기증받은 룩소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어 얼핏 보기만했을 뿐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1,000여 명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뒤에 다시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개칭되었다. 이집트의 총독이 루이 필리프 왕에게 3,200년 된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를 증정하여 이 광장에 세워졌다고 한다.
●야시장 구경
약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우리 일행이 들어가는데 나는 입장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500여 평에 펼쳐진 야시장을 돌아본다. 순천의 가족들도 함께 구경한다. 싱싱한 생선에서부터 각종 야채, 양념, 고기구이 등을 판매한다. 값은 저렴한 편이고 상인들은 유입된 이국인들인 듯하다. 생활이 어려운 이국인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야시장임에도 음식물들이 청결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다.
●트라카대로 광장과 사요궁
사요궁은 1937년 만국박람회 때 전시관으로 사용된 건물로 지금은 프랑스기념박물관과 인류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에펠탑의 모습이 일품이다. 가이드가 알려주는 포토 존에서 사진을 사정없이 찍다. 『다와』라는 식당에서 오랜만에 맛있는 한식을 먹다. 메뉴판을 보니 18유로다. 너무 비싼 점심 아닌가?
●노트르담 성당
성당으로 가는 길에 유네스코 건물, 나폴레옹이 졸업한 군사학교, 나폴레옹 묘당, 팡테옹(로마의 판테욘 신전이 아니다. 파리의 팡테옹은 특히 저명한 예술가와 정치인의 묘로 유명한데, 미라보, 볼테르, 루소, 위고, 졸라, 퀴리, 말로 등이 이곳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저 유명한 소르본느대학, 명문고 지역과 로마시대 공동목욕탕 지역을 보면서 가게 되다. 세느강변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은 고색이 창연하고 위엄이 있다. 엄청난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입장을 기다린다. 우리는 성당 앞 광장에서 성당과 인파와 주변 풍광을 구경하며 셔터를 눌러 댔다.
빅톨 위고(1802-1885)의 작품인『파리의 노트르담』을 1956년에 제작한 영화『노틀담의 꼽추』는 중학교 시절에 보았고 나의 기억에 생생한 성당이다. 안소니 퀸과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주연인데 나는 오래토록 아름다운 롤로 브리지다를 기억하였다. 어쩌면 오늘 본 노트르담 성당의 모습보다도 영화의 장면들이 더 오래토록 기억될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경험하는 감동은 그만큼 대단하고 영원한가 보다.
몽마르트 언덕은 우리 여행코스에 없다. 그곳을 다녀온 우리 아들과 딸이 이구동성으로 별로 가볼 만한 곳은 아니라고 이미 귀뜸하여 주었지만 그래도 우리나이 세대는 그곳에 은근히 가보고 싶은 향수가 있으나, 코스에 없으므로 버스로 하면서, 또 에펠탑에서 멀리 보이는 높은 몽마르트 언덕을 바라만 보며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리 동역에서 유로레일을 타고 프랑스 동북부의 로렌을 지나 알자스 지방에 있는 벨포르로 향한다. 무려 4시간 30분이나 걸려 도착하니 이탈리아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앞으로 모든 일정을 이 버스가 담당한다고 하는데 기사이름은 40대의 까를로씨이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역으로 프랑스에 속한 뮬하우스의 이비스(IBIS)호텔에 도착했다. 아주 작지만 깔끔하여 지난 이틀 밤의 아픈 기억을 말끔히 씻었다. 체인호텔인지 우리가 묵은 호텔 바로 뒤에도 좀 더 큰 이비스 호텔이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유럽의 도시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호텔이었고 오늘 인터넷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서울과 부산 등에 10여개나 된다. 세계적인 중저가호텔이라는데 별이 두 개 혹은 세 개였다. 유럽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적어도 이 정도의 호텔은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5월 2일 토요일(제4일)
▣스위스
뮬하우스라는 곳에서 잠을 잤지만 늦게 도착하여 잠만 자고 출발하였으므로 도시 모습은 모르겠다. 이비스(IBIS) 호텔 주변은 호텔촌인지 온통 호텔뿐이어서 도시의 실체는 제대로 보지 못한 때문이다. 1시간을 달리니 국경을 통과하게 되고 라인강이 보인다. 이제 스위스로 들어선 것이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농촌의 모습자체가 바로 예술이다. 나라 전체가 알프스 산맥에 속한 스위스는 국도 주변 골짜기를 따라 그림 같은 시골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예쁜 집들과 푸른 목초지가 어찌나 아름답게 잘 조성되어 있는지 신기하기도하고 황홀하다. 실제로 목축업을 위해 조성하고 가축을 기르기 위한 목초지라기보다는 관광용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며 국가에서 농촌에는 소득의 약 80%를 보전해준다고 한다. 이해가 되는 말이다. 스위스의 2014년 1인당 GDP는 44,000달러로 세계 22위이다.
●인터라켄
스위스를 종단하며 인터라켄이 가까워지자 눈이 덮인 높은 산들이 수 없이 나타나는데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한다. 호수를 따라 이루어진 농촌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니 또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점심때가 되어 도착한 인터라켄에서 바라보는 알프스는 정말 장관이다. 잔디와 야생화가 많이 피어있는 광장에서 아름다운 알프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다. 인터라켄은 수도인 베른이 있는 베른주에 있다. 관광도시로 베른 남동쪽 26km 지점 툰호와 브리엔츠호 사이에 위치하며, ‘호수의 사이’라는 뜻이다. 흑류트시네강 상류의 높이 1,000m의 그린델발트에 등산전차가 통하고 다시 그 곳에서 3,474m의 융프라우요흐에 등산전철이 통한다.
●융프라우
인터라켄에서 등산전차를 타고 그린델발트에 도착하여서 다시 톱니바퀴 등산전철을 여러 차례 갈아탄다. 높이가 3,454m에 달하는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전망대에 올라 마치 지하도 같은 통로를 따라가며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얼음 궁전, 스핑크스 테라스에서 보이는 알레치 빙하 등을 찾았다.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 덮인 산이라는 융프라우 등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유명한 만큼의 또 기대했던 만큼의 감동이 내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호숫가 호텔(DU LAC)에서 자게 되다. 테라스에서 호수가 보이는 호텔이라서 좋았지만 비가 계속 내리는데다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는 시골이다. 샤워기가 줄줄 새고 있어 이용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래도 스위스인데 이럴 수가 있나? 손님 맞는 준비가 전혀 되지 않고 서비스정신도 없이 중국인 여성을 카운터에 앉혀 놓고 그저 찾아오는 손님이나 있으면 받는 그런 호텔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스위스의 호텔에도 실망이 컸다.
5월 3일 일요일(제5일)
●루가노와 루가노 호수
인터라켄에서 루가노를 거치며 꼬모로 가는 길은 유럽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는 길이다. 알프스를 넘는 숲은 신비할 만큼 아름답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은 이 길보다는 더 서쪽에 위치한 발레주를 경유하여 제 2차 이탈리아 원정길에 나선다. 비록 그 길은 아니지만 같은 지역의 아름다우 아름다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서면 그림 같은 마을들은 차츰 사라지고 소나무와 아카시아가 나타나고 낮은 산들이 보인다. 이탈리아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였는데 천지가 아카시아다.
루가노는 스위스 티치노주에 있는 인구 5만 명의 도시다. 루가노호반에 위치하며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피서지로서 널리 알려졌다. 잠시 호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출발한다. 루가노 호수를 언급하면서 또 헤르만 헤세를 빼놓을 수는 없다고한다. 소설가이자 시인, 화가로도 활동했던 헤세는 루가노 호숫가의 몬타뇰라(Montagnola)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하며 그가 40여 년을 머물던 집에는 따뜻한 수채화들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꼬모와 꼬모호수
꼬모호수는 밀라노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탈리아에서 3번째로 넓은 호수이다. 2시경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다. 꼬모는 로마시대 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았고, 현재도 예술가들이 자주 찾는 인기 있는 곳이라 한다. 꼬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나는 도시여서 우리는 골목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당에 들어가 보기도 하는 등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루가노 호수와 꼬모 호수를 구경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아주 한가한 날이기 때문이다. 꼬모를 출발하여 아퀴테르메지역으로 버스는 달린다. 원래는 밀라노 지역에서 성당을 찾아보고 밀라노 지역에서 숙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밀라노 엑스포 축제로 시내진입이 어려우므로 일정을 변경한 것이다. 대도시이자 유행의 도시인 밀라노를 방문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 대신 오래된 마을인 에즈마을을 찾는다하여 아쉬운 마음을 쉽게 바꾸었다. 밀라노 부근을 지나며 고속도로를 달려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생산지인 피에몬테주의 아퀴테르메 지역에 도착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 시골마을길을 달리는 등 까를로 기사가 꽤나 혼이 났다. 도착한 론도(RONDO)호텔은 큰 강가에 위치하고 별 세 개짜리 호텔이다. 모두들 좋아한다. 저녁식사 후 서울 이기자님 부부와 산책하러 나가보니 호텔 바로 옆에 고대 수로유적이 남아 있고 강변이라서 관광객이 많은 모양으로 캠프용차들이 강변주차장에 여러 대 주차된 모습이 보였다. 이탈리아는 2014년 국민총생산액은 세계 8위, 1인당 GDP는 35,000달러로 세계 22위이다.
5월 4일 월요일(제6일)
▣모나코
아퀴테르메에서 출발하여 버스는 지중해 연안도로를 달린다.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지중해가 아름답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들의 모습도 그림 같다. 가요제로 유명한 산레모를 지나 먼저 모나코왕국을 찾는다. 우리는 모나코는 도박의 도시, 부유한 나라,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우아한 여인 그레이스 켈리(1929-1982)가 시집가서 왕비로 살다 교통사고로 죽은 나라로 알고 있다. 오드리 햅번(1929-1993)과 함께 전 세계 남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그녀는 아름다웠다. 오늘 방문해보고서야 모나코는 주권이 인정된 나라이지만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나라임을 알게 되다. 주권이 있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지중해 해변가에 늘어선 작은 도시로만 보이는 때문인지 그저 프랑스의 작은 市나 區지역정도로 인식되었다. 언젠가 TV에서 모나코 그랑프리를 본 적이 있는데 곧 개최될 예정이라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엊그제 TV에서 결승장면을 방영해 주었다.
●모나코 왕궁
그리말디 왕조가 프랑스, 스페인 등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기 위해 세운 요새를 17세기에 왕궁으로 개축한 건물이다. 지금도 왕이 살고 있으며, 왕실의 휴가철에만 일부 장소를 일반에 공개한다. 왕궁치고는 매우 작은데 소박한 외관과 달리 왕궁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고 한다.
●모나코 대성당
모나코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de Monaco)은 모나코에 있는 대성당으로, 그레이스 켈리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가볍게 목례로 아름다운 여인에게 조의를 표했다. 왕궁과 대성당 주변엔 작은 시장이 있어 구경하였고 성당 앞 절벽위의 가든은 저 낭떠러지 아래 푸른 바다와 어울려 너무나 아름답다. 다시 프랑스로 들어간다. 오늘은 이탈리아에서 모나코로, 모나코에서 프랑스로 이동하고, 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프랑스
●에즈마을
모나코와 니스의 중간에 있다는데 모나코를 떠나 금방 도착한다. 700m 해안절벽 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높고 험준한 바위산 위에 중세 시대의 흔적을 품은 채 촘촘히 모여 있는 집들과 아름다운 전망이 대단하다. 중세의 어느 마을에 놀러온 듯 착각하게 한다. 우리 한국인, 중국인, 특히 다른 관광지보다 서양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곳저곳 구경하다가 마을 꼭대기에 있는 에즈의 열대 정원에 겨우 찾아올라 주변을 조망하고는 다시 내려와 옛 성곽을 따라 산책 하다보면 중세 유럽을 거니는 느낌이 들고 왜 에즈가 '지중해의 정원'이라 불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안내도를 보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찾아다니면서 눈요기를 하는데 그리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온갖 기념품 가게와 식당과 그림 가게들이 많다. 양드리는 무지 신이 나는지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가게마다 들락거린다.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는 재미도 아주 쏠쏠하다.
이 마을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와의 인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이곳에 머물면서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에즈에서 해변 간이 기차역까지 이어지는 산비탈길은 '니체의 산책길'이라 이름 붙어 있다. 마침 서울의 박부회장님 내외분과 함께 만나 산책길을 거닐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지중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한 신비로운 마을을 돌아보며 맛보는 행복감이 여간 아니며, 밀라노 방문이 취소된 아쉬움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하다.
●니스
니스를 포함하는 이 지방은 프로방스인데 중심도시는 마르세이유와 아비뇽이 있고 휴양지인 이곳 니스가 유명한 곳이다. 니스로 가는 도중 나는 계속하여 70년대 말 유행했던『모모』를 불러댔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짓하며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노래를 들은 앞에 앉은 플로리스트 애정씨가 좋아한다. 그녀는 친구인 명진씨와 함께 여행을 무척이나 즐기는 분들이다. 노래 모모(Momo)는 프랑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모모는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아랍 소년이면서 고아였다.
소년 모모와 프랑스 휴양도시 니스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냥 니스 해변을 나르는 새만 생각하며 니스에 가는 것이 마냥 즐거워 무턱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곳 니스는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인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가 태어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시간이 많이 주어져서 우리는 해변가로 내려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니스의 시가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거리엔 온통 관광객 물결인데 온갖 민족의 다양한 사람들이 보인다. 다시는 오기 힘들 니스를 떠나 숙소인 산레모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노바 근처에서 자기로 되어 있었으나 변경되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산레모에 가게 되는 것만으로도 나의 여행만족도는 높아진다.
5월 5일 화요일(제7일)
▣이탈리아
●산레모
젊은 시절엔 70년대에는 라디오로 음악프로를 듣고 살았다. 우리 집에 전축이 없었고 라디오가 딸린 카세트만 겨우 마련했다. 오직 라디오를 통하여 우리가요와 팝송과 상송과 칸초네를 듣는다. 서울의 이종환, 김기덕, 광주의 소수옥 같은 유명 DJ들의 입을 통해 산레모 가요제를 알게 되고 칸초네를 소개받았다. 이처럼 옛 추억이 담긴 산레모에서 잠을 자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분이 좋다. EDEN호텔은 규모도 크고 별이 세 개라서인지 정원이 그럴듯하고 침실이 깨끗하다. 양드리가 매우 좋아한다.
산레모는 제노바만 연안에 위치하며, 역사가 있는 주요 휴양지라고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해안에 나가보니 그저 작은 항구일 뿐 아름다운 해변을 찾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 4월에 연합국의 회의인 산레모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1951년부터 매년 겨울에 칸초네 콩쿠르인 산레모가요제가 열린다. 산레모 가요제는 1951년 관광객 유치책으로 국립방송의 후원을 얻어 시작되었고 이탈리아인이 작사·작곡한 응모작품을 가수에게 부르게 하여 입상을 결정하는데, 1958년에는 우리도 잘 아는 최우수 입상곡 《보라레》가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이목을 끌었고, 1964년부터는 외국인 가수를 초청한 국제가요제가 되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 하우스(카사비앙카)』를 부른 비키 레안드로스(1949- )는 산레모가요제 입상자이고, 질리오라 징케티(1947- )의『노노레타(나이도 어린데)』는 1964년도 산레모 가요제 대상곡이다. 두 노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 가운데 하나들이다.
●피사
피사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제노바 지역을 벗어나니 올리브 농장과 농가들이 보이고 경사진 산이 많다. 가이드님은 역사지식이 대단히 풍부하여 많은 공부가 된다. 지금 지나고 있는 제노바에서 탄생한 콜롬버스(1451-1506)의 활동, 피렌체 출신인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 베네치아 출신인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제노바에 잡혀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여행담을 말한 것이 『동방견문록』으로 편찬된 것이며 당시 독일 마인츠 출신인 구텐베르크(1397-1468)의 금속활자가 발명됨으로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는 설명이다. 서로마제국 멸망(476)이후 이탈리아의 분열상황과 1961년에 통일이 되기까지의 이탈리아 역사를 잘 설명해 주었으나 너무 많은 설명이 오히려 일반인들에게는 이해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 세계사를 전공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피사에서 앞으로 이태리를 안내해줄 현지 가이드를 만나니 50세 정도의 성악을 전공하신 분으로 고향이 충남 서천이라 한다. 서천과 부여는 군산․익산과 금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다.
피사는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여,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피사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웬 노점상들이 그리도 많고 셀카봉이며, 여러 기념품을 파는 흑인들이 저리도 많은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국인이 중국인들보다 많고 서양인들도 많은데 장사꾼들이 간단한 한국말을 여간 잘 하는게 아니다. 헬싱키나 피사나 로마의 노점상인들이 저처럼 우리말을 잘하는 건 오로지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은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피사의 두오모 성당과 사탑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모 TV에서 계속 방영하는『세계역사테마기행』을 통해 피사사원(두오모 광장)을 이미 입체적으로까지 보았지만, 오늘 정작 실제로 와서 보니 사원 전체가 아름답고 장엄하기 그지없다. 아! 그렇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란 말이 왜 생겼겠는가? 백번 TV를 통해 자세히 보고 공부한다해도 직접 찾아보며 느끼는 감동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주어지는 행복은 또 얼마나 큰 것인지! 저 유명한 광장의 명물인 성당의 원주형 종탑(캄파닐레, 일명 피사의 사탑)은 1173년에 건축을 시작한 뒤 지반 침하로 공사를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1350년에 완공되어 오늘날 피사의 상징이 되었다.
성당도 흰 대리석으로 지어져 아름답기 짝이 없고 사탑도 흰 대리석으로 저처럼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다고 양드리도 많이 감동한다. 2008년 현재 기울기의 각도는 중심축으로부터 약 5.5˚이다. 시간 여유가 많은 관광객들은 탑의 꼭대기까지 오르고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기울어진 때문에 그만큼 더 유명해지고 나는 오늘 이곳을 찾아 마냥 기분이 들떠 있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곳에서 무게가 다른 두개의 공(1파운드, 10파운드)을 떨어뜨리는 낙하실험을 통해 지표면 위의 같은 높이에서 자유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과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는 낙체법칙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실험은 1586년 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인 시몬 스테빈(Simon Stevin)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월 6일 수요일(제8일)
●로마
피사를 떠나 버스는 내가 예상했던 길인 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지 않고 피렌체쪽 고속도로로 들어서더니 피렌체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피렌체가 주도인 이 지방이 바로 토스카나지방이라는데 매우 큰 주였다. 우리는 로마시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 파리시내와 로마시내에 호텔이 즐비하건만 우리는 시골에서 잠을 자는 처량한 신세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아예 로마를 지나 남쪽으로 30여분 더 달린 뒤에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20여분 달려 여름 휴양지인『피우지』에 있는 ARISTON호텔에 여장을 푼다. 여름 관광철이 아니어서인지 호텔은 많으나 관광객을 별로 없이 우리처럼 시골의 호텔에 머물기 위해 찾은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보이는 정도이다. YIPI도 안 되는 호텔이다. 여행 처음부터 와이파이가 되는 호텔에서만 카톡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아들과 딸, 부모님과 3일 동안은 연락이 두절될 상황이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으므로 아버지께는 전화를 드렸다. 친구인 덕신이와 완수가 성호와 함께 오늘 동유럽 여행을 시작했으므로 메시지만 날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로마이다. 그리스와 함께 서양사의 한 축을 이루는 로마의 역사가 인류문명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나는 그 고대 로마의 문명과 중세로마의 문화를 보고자 온 찾아온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테베레 강가에서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가면서 보이는 테베레강은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강이다. 작은 도시국가 로마가 드디어 기원전후에는 유럽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당시의 위대한 인간 카이사르(씨이저B.C100-B.C44)와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를 기억한다. 제국의 분열로 5세기에 영광의 역사는 끝이 나고 서로마가 멸망(476)하면서 이탈리아반도는 분열의 시기로 들어서 무려 1400여년을 이어지게 된다. 특히 아비뇽에 교황이 옮겨가 있던 14세기는 로마가 가장 침체했던 시기로 1348년 페스트가 유행했던 무렵에는 인구가 2만도 안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속에서도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으로서 로마의 발전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바로크시대까지 계속되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궁전과 광장이 건설되었다.
이와 같이 ‘교황의 도시 로마’로서, 또 중부이탈리아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교황국가의 수도로서 존재해온 로마는 19세기 이래 공화주의운동과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1849년에는 마치니·가리발디 등의 지도를 받는 시민 공화체제를 붕괴시키고, 다시 1861년 이탈리아왕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로마와 그 주변을 계속 지배했으며,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는 처음에는 토리노, 다음에는 피렌체에 두었다. 통일 이듬해인 1871년 로마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이에 화가 난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들어앉아 스스로 ‘바티칸의 죄수’라고 칭하며 이탈리아왕국과 대립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로마 문제였는데,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고 바티칸시국이 성립되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의 특수한 지위 등이 인정되었을 때부터였다.
●폼페이
원래는 내일 갈 예정이던 남부일정을 오늘 먼저 소화한다. 호텔을 떠나 폼페이로 가는 길에 아피아가도를 볼 수 있었다.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도로로 길이 50km, 너비 8m인 로마의 켄소르(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B.C 312년에 건설을 시작한 도로이며, 도로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와 카푸아 사이였으나 B.C 240년경 브룬디시움(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다. 도로는 돌로 포장을 했는데 로마와 남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의 간선도로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도 일부가 사용되고 있다. 상당 구간 우산소나무를 가로수로 뻗어 있는데 지금도 사용되는 길로 보인다.
그 유명한 폼페이 유적지부터 찾게 된다. 터어키의 에페소 유적에서 로마고대도시의 모습을 보았으니 이제 두 번째로 부근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폐허가 되었던 폼페이를 보게 된다. 그때가 A.D 79년의 일이니 제정이 시작되고 로마가 번창하던 시기다. 폼페이는 베수비오산의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화산폭발의 조짐이 있어 상층들은 모두 바다로 피신하고 남은 하층계급들만 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때 2∼3m 두께의 마그마와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고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지역만 해도 상당히 넓다. 창녀촌이 잘 남아있어 방 입구에는 섹스의 여러 자세를 그린 그림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들과 도로가 아주 과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로마의 도로와 건축술에 다시 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에페소에서 받았던 감동만큼은 크지 못하다.
●쏘렌토
폼페이역에서 쏘렌토로 가는 기차를 탄다. 기차는 우리나라에서는 구경할 수없는 오래된 기차이며 소리도 요란하다. 소렌토는 인구 2만으로 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하며,《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나폴리 민요로 알려진 곳이다. 나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계속 불러대며 녹음을 했으나 신통찮다. 이 노래는 자기마을에 우체국을 지어달라고 시장님께 바친 노래였다고 한다.
♣Torna A Surriento (돌아오라 쏘렌토로)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여ㅡ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쏘렌토로 돌아오라!
쏘렌토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각종 공예품을 파는 좁은 골목이 있어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 나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카프리 섬을 가기 위해 소렌토항구로 나가니 경치가 정말 아름답다.
●카프리 섬
쏘렌토에서는 불과 8km, 나폴리로부터는 3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해안 절벽과 지중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관광지를 조성하여 직접 운영하면서 많은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300여m 산을 오르기 위해 마을소형버스를 타고 오르다가 마지막 구간은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데 오르내리면서 발아래 보이는 카프리섬의 마을과 지중해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다.
●나 폴 리
인구 100만인 나폴리는 이 지역의 중심도시이자 로마·밀라노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3의 도시라고 한다. 카프리섬에서 배를 타고 나폴리만을 지나 나폴리로 간다. 나폴리는 나폴리만 안쪽에 있는 천연의 양항으로, 배후는 베수비오 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도시가 마치 베수비오화산을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나폴리항은 제노바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2의 상업항인데, 이 항구가 1924년에 확장되고부터 현대 나폴리의 발전이 비롯되었다. 나는 또 《산타루치아》를 불러보았다. 산타루치아는 나폴리항의 한 마을이라고 한다. 성악을 전공한 가이드가 노래를 들려준다. 우리나라 성악가가 부르는데 아주 잘 훌륭하기에 누구신지 물으니 김남두 선생이시란다. 놀랍게도 우리 전북의 부안군 출신으로 전주대를 졸업하고 이태리에서 공부하신 분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열린음악회에서 자주 보는 성악가이시다.
♣ Santa Lucia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또 다른 산타루치아가 생각이 나서 부르기는 해보는데 제목도 생각이 나지 않고 영 두 노래가 헷갈린다.
오늘 생각해보니『먼 산타루치아』이다 중학교 때 음악시간에 가창만큼은 반드시 최고점수를 받던 실력 어딜 갔나?
♣ 먼 산타루치아
잔잔한 바다위로 저 배는 떠나가고
노래를 부르니 나폴리라네.
황혼의 바다에는 저 달이 비추이고
물위에 덮인 하얀 안개 속에 나폴리는 잠잔다.
산타루치아 잘 있어 서러워 말아다오
즐거운 나그네는 이 밤이 기쁘건만
나폴리 떠나가는 저 배는 가슴이 아프리라.
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곡인『O Sole mio』역시 나폴리 출신 작곡가인 조반 카푸아가 시칠리아섬 출신 시인 지오반니 카푸로(Giovanni Capurro)가 자신의 고향인 시칠리아를 그린 짧은 시를 건네받아 작곡한 노래라고 하는데, 이 노래를 나폴리 출신인 카루소가 미국에서 불러 크게 유명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중학교 때 세계적인 테너로 스테파노와 카루소를 잘 알았다. 음악실 벽과 음악책에도 그들의 사진이 있었다.
♣ O Sole mio(오 나의 태양)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 올 때
하늘에 밝은 해는 비친다.
나의 몸에는 사랑스런 오 나의 태양 비친다.
오 나의 나의 태양 찬란하게 비친다.
5월 7일 목요일(제9일)
▣바티칸 시티
로마교황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는 바티칸시국은 1929년 2월 이탈리아와 교황청 사이에 교환된 라테란협정에 따라 성립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에서도 가장 작으며 일종의 교황령이라 할 것이다. 현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1936년생 제 266대)이다.
●바티칸 박물관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야한다. ?남들 보다 조금만 늦게 도착해도 기다리는 시간은 몇 배가 된다.?고 가이드는 엄포를 놓는다. 8시에 도착하니 우리가 거의 맨 앞쪽이어서 쉽게 입장했다. 말로만 듣던 바티칸 입장을 하기 위한 지루하고 긴 행렬은 이어졌지만 우리는 해당 없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 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광장에 들어서니 박물관부터 웅장하여 우리를 압도한다. 아름다운 정원과 이름 모를 수많은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로 입장하여 베르사이유궁에서처럼 수신기를 들어가면서 가이드와 우리 팀을 쫒아가며 종종걸음으로 관람을 시작한다. 교황의 관은 크기가 엄청나고 화려하여 놀라울 뿐이다. 밀려오는 인파에 떠밀려 가니 긴 회랑이 있는데 좌우에는 수놓은 성화와 지도들이 전시되어 있고, 천정에도 황금빛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너무 아름답고 화려하다. 가는 도중에 교황의 정원이 보여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실내에 들어와 떠밀려 다니며 구경하랴, 가이드 말 따라 우리 팀 놓치지 않으려 신경 쓰며 따라가랴 정신이 없다.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모르며 따라가는 사이 어느 새 나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왔다.
●시스티나 예배당
1510년에 완성된 미켈란젤로(1475-1564)의 천정화 천지창조와 벽면화 최후의 심판을 보고 있다. 그는 거대한 건물의 천정에 매달려 어마어마한 대작을 그려내었다. 엄청난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느라 움직이지 않아 이동이 멈추어졌다.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또 이동이 시작되었고 나는 금새 또 어마어마한 성 베드로성당 내부에 들어와 있다.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 대성당
아! 이 세상에 이처럼 웅대하고 장엄하고 화려한 집이 있다니..... 나는 말로만 들던 성베드로 대성당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인간의 능력이 정말 위대하다. 로마의 아니 인간이 만든 건축술의 극치다. 파르테논 신전과 베르사이유 궁보다도 훨씬 더 나를 압도하며 놀라게 한다. 우리는 내부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 곳 저 곳을 찾아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오니 광장이다. 밖에서 본 베드로성당도 역시 웅대한데 사실 내부에서 느끼는 장엄함의 느낌이 더 컸다.
미켈란젤로는 156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건물에 매달렸으며, 그 뒤 1593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마침내 완공되었다고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어마어마한 규모, 엄숙한 구성, 그리고 강력한 권위는 세계 곳곳의 대형 교회와 정부 건물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탈리아
●진실의 입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에 다다랐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조각상의 입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1953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어제 버스 속에서 그 영화를 보았으므로 더 실감이 난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으므로 재빨리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각자 50센트씩 넣고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면 가이드가 사진을 찍어준다.
●베네치아광장
버스가 통일기념관을 지나치더니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아마도 베네치아광장인 듯하다. 당시는 잘 몰랐으나 이 글을 정리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니 그렇다. 베네치아 광장은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광장 북쪽으로는 코르소 거리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이다. 그의 기념관은 현재 통일기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로마 대사관 역할을 하던 베네치아 궁전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 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무실로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르네상스 예술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냥 버스에서 내려놓고 잠시 시간을 준 것이라서 광장 주변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사진을 찍고 나니 바로 아래에 있는 포로 로마노 지역을 조망하는 곳으로 간다. 포로 로마노를 바라보며 사진은 많이 찍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버스로 이동하여 낮은 지대에 있는 포로 로마노 지역의 일부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중앙공원
지금부터 오후 일정은 미니밴 투어로 소화한다. 우리는 3대의 미니밴을 탑승하고 좁은 골목들까지 누비며 로마투어를 시작했다. 하나라도 더 보아야 하므로...
밴은 우선 중앙공원에 오른다. 로마 시내가 모두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이탈리아 혁명가이자 통일지도자였던 마치니(1805-1872)의 동상이 서있다.
●판테욘신전
A.D118∼128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축되었으며 다신교였던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이다. 로마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고대의 건물로 로마제국의 장군이었던 아그리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세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판테온의 입구는 16개의 코린트식 화강암 원기둥으로 된 주랑 현관으로 되어 있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 건물 내부의 둥근 천장은 높이와 직경이 똑같이 43.40m(성 베드로 대성당 돔보다 크다)로 완벽한 비율의 일치를 이뤄서, 돔은 정확하게 건물 내부 높이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정말 밖에서나 안에서나 보이는 것이 모두 웅장하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바닥쪽으로 원을 그려 보면 정확한 구의 모양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렇듯 조화와 균형이 있는 건축미가 돋보인다.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은 내부를 고르게 밝혀 주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추는 각도가 변한다. 마치 하늘이 판테온의 내부 공간에 스며들어 오는듯한 느낌이 들게 해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신에 대한 경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테온 신전은 여행사 계획에 없었으므로 미리 조사를 하지 못해서 부끄럽게도 천정의 둥근 원구멍에 대해 잘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트레비분수
잠시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아이스크림 판매점에서 휴식을 취한다. 마침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펙과 햅번이 함께 자전거 타는 사진이 있어 그 앞에서 멋진 사진을 연출해 보았다.
이 분수는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며 1732년 착수하여 1762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 해신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 속신이 있다. 하필이면 우리가 방문한 이때 트레비 분수는 보수작업을 하느라 공사중이다. 사람들은 공사용 발판을 따라 구경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시간이 없어 그냥 바라만 보고 기념사진만 찍다. TV를 통해 분수의 모습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공사장만 보고 와서 많이 아쉽다.
●스페인계단
트레비 분수를 떠나 스페인 계단으로 가는 중에 오벨리스크를 만나 사진을 부랴부랴 찍고는 이제 계단을 내려간다. 17세기에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유명해졌다. 데이몬티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계단을 내려오니 많은 관광객들로 매우 붐비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가 설계한 바르카치아 분수가 있다. 물에 반쯤 잠겨 있는 물이 새는 배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이다. 바르카치아는 《쓸모없는 오래된 배》를 의미한다. 이 분수는 1588년 테베레 강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실어 나르는 데에 사용되던 작고 바닥이 평평한 보트가 물이 빠진 뒤 그 자리에서 발견되었던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통일기념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국립 기념관이다. 1885년 건축가 쥬세페 사코니(Giuseppe Sacconi)의 설계로 1911년 완공된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건축물은 독특한 외형 때문에 ‘타자기 건물’ 또는 ‘웨딩케이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건물과 계단, 거대한 에마누엘레의 기마상, 전차에 탄 두 빅토리아 여신상 등 모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서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다. 가이드는 ?이 건물이 사실상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동의하고 싶다. 부러운 건물이다.
●포로 로마노
베네치아 광장 부근에서 포로 로마노를 이미 조망하였고, 이동하여 일부 건물들을 본 바 있는데 이제 포로 로마노 지역의 정문으로 왔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이 시민생활의 중심지로 생각하던 신전과 공회당 등 공공 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는 곳이다. 입구의 넓은 길 양편에는 소나무 가로수가 있다. 가이드는 입구의 개선문 앞에서 자유시간을 주는데 겨우 15분이란다. 포로로마노를 찾아 돌아보며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고 그냥 한번 바라보라는 식이다. 서양의 단체 관광객들은 많은 건물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돌아보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국식 관광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나로서는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양드리와 나는 티투스황제 개선문과 콜로세움 부근에서만 서성거리다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전에 있는 기록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멀리서 조망만 하고 자세히는 살펴보지 못한 포로 로마노 내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티투스 황제(A.D79-81) 개선문은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유적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A.D81-96)가 그의 형인 티투스 황제와 베스파시아누스(A.D69-79) 황제의 대 예루살렘 전투 승전(A.D 70년)을 기념하며 A.D 81년에 세운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개선문의 내벽에는 로마군의 전쟁 장면과 쌍두마차를 타고 개선하는 티투스의 모습이 아름답게 부조되어 있다. 개선문 꼭대기에는 라틴어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티투스에게 바친다.?라고 쓰여 있다. 티투스 황제 개선문을 지나 사크라 거리 오른편에는 아치 모양의 건물인 막센티우스(A.D 306-312) 바실리카가 보인다. 이 공회당은 막센티우스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했지만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콘스탄티누스 대제(A.D 312-337)에 의해 완성되었다. 훗날 브라만테(1444-1514)가 이 건축물을 토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했다고 한다.
막센티우스 황제의 바실리카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이 있다. A.D 141년 안토니우스 황제가 죽은 황후 파우스티나를 위해 만든 신전으로, 황제 자신도 사후에 이곳에 매장되었다. 기독교 시대에는 미란다의 산 로렌초로 옮겨졌었다.
베스타 신전은 로마제국에서 약 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성화를 숭배하는 신앙의 전당으로서 매우 신성한 장소였다. 원형 평면으로 된 유적으로 이 신전에는 미네르바 여신의 형상과 로마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성화가 모셔져 있는데, 성화가 꺼지면 흉조라 여겨졌다. 귀족 가문에서 선발된 7~8세의 처녀들이 30년간 순결을 지키며 이 성스러운 업무를 헌신해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처녀 제관들은 순결을 잃는 경우 생매장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신전 뒤에는 A.D 191년에 마지막으로 고쳐서 세운 처녀 제관들의 집 유적이 남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A.D 193-211) 개선문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보이는 붉은 벽돌의 큰 건물은 원로원이다. 성당 부분을 복원한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입법 자문기관으로 정치와 외교를 지도했다. 로마 공회장 유적지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B.C 67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A.D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때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로원 제도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오래 유지되었던 정치 형태였다. 이 원로원에서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되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원로원 건물 앞의 광장은 '코미티움'이라 하여 시민들이 모여 집정관을 선출하던 곳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을 통과해 계단을 올라가면 왼편에 세나토리오 궁이 있다. 이곳 테라스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 전경은 일품이다. 직진하면 캄피돌리오 광장이 나온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10년 통치를 치하하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의 파르티아, 아라비아, 아시리아 등지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과 시민들이 A.D 203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 새겨진 신들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에 전 유럽에 전해졌다.》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포로 로마노의 개선문 바로 오른편에 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글라디아토르(검투사)의 시합과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오늘날 UFC, 글로리, onEFC 등의 이종격투기를 그리도 좋아하는 나는 검투사의 시합을 이해해야만 한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원주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현재 계속 보수공사중이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실제로 공사 중인 모습이 보인다. 물론 들어가 볼 시간도 없어 밖에서만 구경한다.
5월 8일 금요일(제10일)
●피렌체
로마에서 피렌체로 간다. 인구 40만의 역사가 있는 도시다. 가는 길에 내려갈 때 이미 보았던 아름다운 산성도시를 다시 보게 되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가 말하는 이름을 적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오르비에토인듯 싶다. 해발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위치하며, 케이블카로 오르내린다. 주변의 비옥한 농업지대의 유통·산업·관광의 중심지이다. 부근의 농촌에서는 포도가 많이 생산되며, '오르비에토'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연철·도자기·레이스 등의 수공업이 이루어진다. 철도와 도로를 통해 로마, 피렌체와 연결된다. 오르비에토는 최초의 슬로시티의 하나이며 12세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슬로시티 대표운동본부가 있다. 슬로시티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단순하게 사는 방식이다. 전통을 지키며 느림을 추구한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고향집 지키기 및 텃밭과 과일밭 가꾸기는 슬로시티와 통하는 면도 많지만 꼭 같지만은 않다. 나는 매일 시골에 다녀오는 것일 뿐 잠을 자며 살고 싶지는 않고, 편안한 아파트에 살면서 아름다운 배산시민공원에서 자전거도 타면서 운동을 하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우리 양드리는 시골생활을 절대로 조금도 꿈꾸지 않는데 나는 그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혼자 다니면서 매일 기르는 채소를 뜯어오고, 토종닭 계란, 오리알, 칠면조 알을 가져오고 매실엑기스도 담고 복분자도 따다가 갈아먹을 생각이다. 내가 요즈음 시골집 지을 준비로 상당히 바쁘기 때문에 이 기행문의 진도가 통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너무 가물어 시들시들한 과일밭에 물을 주고, 작은 집을 짓기 위해 큰 톱을 사다가 혼자서 나무들을 베었다. 엔진톱이나 전기톱은 무서워서 피하고 없는 힘 좀 썼더니 팔뚝이 꽤 아프다.
이탈리아는 곳곳마다 산성도시가 산재해 있어 처음부터 의문이 컸다. 도대체 21세기에 어찌 산성에서 살고들 있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수적이어서 은퇴하면 자신이 태어난 마을로 돌아가 연금으로 편안한 노후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고 또 전문 수공업자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준다. 이탈리아는 원래 연금수급률이 무려 마지막 월급의 80%를 주는 방식이어서 유럽 최고수준의 연금제도였으나 이로 인한 재정악화로 여러 차례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이제는 작아져서 현재의 노인들은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한 사람들은 우리 돈으로 약 200여만 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산성에 사는 사람들은 물은 원래부터 모두가 사먹고 있으니 문제가 될 수 없고, 주말이면 시내로 나가 먹을 것을 모두 사가지고 들어간다고 한다. 정말이지 산성마을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인구가 아주 적다. 로마가 300만 명, 밀라노 130만 명, 나폴리 100만 명, 피렌체 40만 명, 베네치아 30만 명밖에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나라는 인구50만 명 이상인 도시가 22개이니 단순 비교해도 이탈리아는 농어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우리가 묵은 이탈리아의 호텔들이 아무리 하급이라 할지언정 YIPI가 되지 않는 것이나, 샤워기가 고장이 나도 고치지 않는 것이나, 수건을 두 장 밖에 놓지 않는 것이나, 비누 샴푸도 제대로 준비해 놓지 않는 것이나, 냉장고가 없거나 또는 있어도 물도 주지 않는 것이나 모두 그들의 문화라고 인정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들의 경제가 반드시 우리에게 곧 따라 잡힐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의 정신은 독일형으로 모든 국민들이 부지런하고 자신의 직업이나 사업에 있어 보다 철저하고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고 칭찬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사해보니 2014년도 이탈리아의 GDP순위가 8위이고, 우리나라는 13위이나 1인당 국민소득은 이탈리아가 세계 27위로 35,500달러이고 우리나라가 세계 29위로 28,700달러로 그 격차가 좁혀져 있다. 특히 국민들의 생활형편을 알 수 있는 구매력 평가(PPP)기준 세계 GDP순위는 이탈리아가 12위이고 우리나라가 13위인데, 1인당 구매력지수는 이탈리아가 33,800달러이고 우리나라는 35,000달러로 이미 이탈리아를 앞서고 있다. 국민들의 경제생활수준은 우리가 이탈리아보다 높다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전 세계가 놀라는 경제기적을 만들어 냈고, 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에 지나지 않는데도 유럽여행을 즐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를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이 더욱 자랑스러운 나라임을 더욱 확실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에 교황당과 황제당과의 싸움이 피렌체시 뿐 만 아니라 전 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는 전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고 한다. 1300년에 비롯된 백당과 흑당의 투쟁은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가 시정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 및 손자인 대 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고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성 십자가 교회(산타 크로체 교회)
가장 먼저 단테교회라고도 불리는 성 십자가교회를 찾는다. 산타 크로체 광장에 면한 소박한 고딕 양식의 이 교회는 칸비오의 설계에 의해 1294년에 세워진 흰색 건물이다. 이 교회에는 많은 음악가, 문호, 조각가 등의 묘 또는 영묘가 있다. 피렌체 사람들은 이 교회에 묻히는 것을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단테(1265-1321)와 동렬에 오르는 것이라 생각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남쪽 첫 기둥 가까이에 단테의 영묘가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라벤나의 산 프란체스카 교회에 묻힌 그의 유골은 라벤나 측의 거부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은 단테의 영혼만큼은 이 영묘에 있다고 믿고 있다. 1839년 리치의 작품이다. 단테상이 있다. 다섯 번째 기둥이 있는 곳에 로시니(1792-1868)의 묘가 있다. 로시니 묘 가까이에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 면에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1475-1564), 정치 철학자 마키아벨리(1469-1527)의 묘도 바로 이곳에 있다.
●단테 생가
단테의 생가가 남아있어 찾게 되었는데 외양은 그대로 잘 남아있다.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기념촬영만 하는데 가이드가 『신곡』처럼 재미없는 책을 제대로 읽은 분이 있느냐며 이탈리아에서는 의무적으로 학생들이 『신곡』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하므로 단테를 제일 싫어한다고 한다. 이해가 가는 일이다. 나도 대학시절에 큰 맘 먹고 『신곡』읽기에 도전했다가 쉽게 포기하고만 일이 생각난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두오모로 잘 알려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피렌체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높고 웅장하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이라고 한다. 웅장하면서도 칼라가 상당히 밝고 아름다운데 다른 큰 성당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르네상스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며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의뢰 받았을 당시 “피렌체의 두오모보다 더 크게 지어드릴 수는 있지만 아름답게는 해드릴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밖에서 보는 규모는 엄청난데 안으로 잠간 들어가 보니 본당은 의외로 크지 않다. 아마도 부속건물들이 많은가 보다.
아까 보았던 성 십자가 교회와 외양은 비슷하다. 성당 옆에서 어느 기타리스트가 연주를 하는데 대단한 실력이다. 자신의 CD도 제작하여 20유로에 판매한다. 동영상으로 찍어 보았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관광지 곳곳에서 많은 길거리 음악가들을 만났는데 모두들 동전을 받는다. 생생한 음악연주를 들으며 관광하는 재미가 여간 솔솔한게 아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베키오 다리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 위에 세워진 다리로 14세기에 건설되었다. 강 양쪽으로 귀금속 세공소와 보석상이 즐비하다. 본래 푸줏간이 있던 자리였는데, 페르디난도 1세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철거시킨 후 금은 세공품 상점이 들어섰다.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이 다리에서 피렌체의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그 증표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강물에 버리거나 다리에 자물쇠를 달곤 했다. 현재는 피렌체 시에서 다리가 손상될 것을 우려해 이와 같은 행위를 금지하고 어길 시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베키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아르노강의 풍경도 아름답다고 한다. 양드리가 갑자기 어느 가게에 들어가더니 작고 예쁜 오리 한 쌍을 보자고 한다. 여주인은 자물쇠를 열고 보여주면서 할인하여 준다는데 제시하는 가격이 55만원이다. 이탈리아 전문 기술자들이 은과 옥을 이용하여 만든 전통 있는 상품이라서인지 아름답기도 하고 값어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혹한다. 우리 두 사람의 여행 기념이자 사랑의 정표로 잘 간직하면 의미는 크겠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고 모이는 시간도 촉박하여?보여주어서 고맙다?며 인사하고 그냥 나오고 말았다. 돈이 많아서〈파악!〉사버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시뇨리아 광장
가게를 나와 가깝기는 하지만 부지런히 모임장소인 시뇨리아 광장으로 돌아간다. 이 광장은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장소이다. 광장 부근 베키오 궁전(메디치궁)에 있는 종루의 종은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 모으는 데 사용되었다.
광장에는 피렌체를 일으킨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의 동상이 있고,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동상《다비드》의 모조품과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의 청동상인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잠 볼로냐의 《사빈 여인의 강간》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처형지임을 알리는 화강암이 서 있다.
3시에 버스가 출발한다. 베니스로 간다. 2시간을 달리니 밀밭이 계속 펼쳐진다. 4시간을 달려 베니스 못 미친 지역인 스트라의 별 3개짜리 호텔(VILLA ALIGHIERI)에 도착하다. 카운터여직원에게 물으니 베니스 까지는 30km라고 한다.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호텔이어서 산책하러 나가볼 곳도 없다. 빙금 인터넷을 찾아보니 숙박료는 4만 2천원이다.
5월 9일 토요일(제11일)
●베니스(베네치아)
영어로 베니스(Venice)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하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때문이 아닐까?
※베니스의 상인(셰익스피어;1564-1616)은 1596년경의 작품으로 이탈리아의 옛날이야기에서 취재한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로부터 벨몬트에 사는 포샤에게 구혼하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가지고 있는 배를 담보로 하여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그리고 돈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자기의 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증서를 써 준다. 포샤는 구혼자들에게 금·은·납의 세 가지 상자를 내놓고 자기의 초상이 들어 있는 것을 선택하게 하였다. 바사니오는 납으로 된 상자를 골라잡아 구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배가 돌아오지 않아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남장을 한 포샤가 베니스 법정의 재판관이 되어,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샤일록은 패소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 후 안토니오의 배는 돌아오고 샤일록의 딸 제시카도 애인 로렌조와 결혼한다. 로맨틱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감미로운 장면이 풍부한 희극이지만, 당시 런던 시민이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반유대 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극에서 샤일록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오히려 비극적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베네치아는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의 사주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에 대해 그동안 많이 듣고 보았지만 이처럼 바다 한가운데 이루어진 도시인 줄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베네치아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0세기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S자형의 대운하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출구 쪽의 운하 기슭에 장대한 산마르코 광장이 자리한 기본적인 도시 형태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궁전 등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5개의 원형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풍 또는 오리엔트풍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 16세기 이후, 투르크인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이 약화되고, 따라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늘날의 베네토주의 풍요한 농업지대의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에 점령되기까지 반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감옥과 탄식의 다리
버스주차장에서 배로 갈아타고 도착한 베니스의 본섬에서 관광을 시작한다. 로마의 가이드님은 피렌체에서 돌아가고 베니스에서는 젊은 40대 초반의 잘생긴 가이드가 나타났다. 대형 크루즈 선이 여러 척이 들어올 때도 있는데 오늘은 한 척이라서 좀 한가한 편이라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지난 5월 16일에 만난 고교동창 최용진 친구는 부부가 함께 6일에 베니스에 크루즈로 들어왔었다고 한다. 탄식의 다리는 두칼레 궁전과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나 있는 감옥을 잇는 다리이다. 1600년부터 1603년까지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10인의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죄인들은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했다고 한다. 다리로 이어지는 이 감옥은 조반니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여성을 만나지 못하는 감옥에서 많이 외로웠겠다. 오늘날은 별별 카사노바가 수없이 많은 세상이다.
●산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며,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광장의 양편에 있는 식당에서는 현악 사중주 연주를 하면서 손님을 부르고 있다. 음악을 들으면서 광장에 있으니 기분이 붕 뜨는 기분이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 테오도르상이 있고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1720년에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은 과거 바이런(1788-1824), 괴테(1749-1832), 바그너(1813-1883) 등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 이 선생은 기어이 안에 들어가 보았다고 한다.
●두칼레 궁전
산 마르코 광장에 면해 있는 궁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주거지이자 공화국 정부 건물이다. 9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확장되었다.
●산 마르코 성당
두 명의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성 마르코 유골의 납골당으로 세워진 것(829~832)이다. 그 후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1세기 말에 현재의 산마르코성당이 재건되었는데 이 재건공사에 롬바르디아의 건축가와 석공이 상부구조 건축에 참가했다. 산마르코성당의 건축양식은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무라노 유리공장
무라노 섬은 베네치아 글라스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명소이다. 10세기 이후부터 베네치아의 사람들은 유리나 크리스탈을 만들어 왔다. 유리 세공업이 베네치아의 주요한 수익창출 수단으로 떠올랐고 13세기에 유리 세공업은 무라노 섬으로 이전하였다. 수공예로 만든 유리 세공품들은 유럽 및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베네치아로 모으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특히 직접 입으로 유리를 불어 성형하는 공정을 시연하여 주는데 중․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학교 정문 옆에는 허술한 공장(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있었던 듯 벽면은 여기저기 떨어 나가고, 공장의 모습은 험해서 차마 볼 수 없었다.)에서 기술자들은 입으로 불어가며 전구를 만들었다. 우리가 등하교시 자주 보던 풍경이다. 귀족들이나 사용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유리잔 세트가 주전자와 함께 150만원이라는데 우리 팀은 아무도 사지 않았다. 잘생기고 목소리가 좋은 매니저가 실망한 듯 표정이 바뀐다. 판매방식이 후진적이다. 저처럼 큰 유리세트를 누가 사가지고 한국까지 가져갈 생각을 하겠는가? 배송비를 받고라도 배송을 책임져야 누군가라도 살 것이라는 생각이다. 욕심이 많이 났다. 부티나고 싶어서...
●곤돌라
곤돌라가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작은 운하들을 찾아 간다. 막대 하나로 곤돌라 운전하는 기사들 장난 아니게 잘생겼다. 유럽에 오니 잘생긴 남자들은 가끔씩 눈에 띄는데 여자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인터라켄에서 본 50대 후반의 남자 정말 멋있었는데(부인보다 훨씬) 오늘 기사 중의 한 사람도 마치 배우 같다. 곤돌라를 타고서야 비로소 베네치아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인데 운전기사가 노래를 못한다며 우리보고 부르라기에 내가 선창하여 『희망의 나라』로와 『산타루치아』를 합창했다. 이번 여행에는 옵션이 모두 6개인데 파리의 세느강 유람선, 카프리 섬 답사, 로마의 미니밴 투어, 베니스의 곤돌라와 수상택시, 암스테르담 운하 여행 등인데 모두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서울의 임선생님은 지인이 곤돌라 별것 없다며 구태여 탈 필요가 없다고 귀뜸 했으나 자신은 그냥 신청했는데, 그 사람 말 들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면 웃는다. 그렇다. 누구나 자신이 좋으면 좋다하고 자신이 싫으면 싫다한다. 문제는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좋지만 판단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하는 것이다. 귀가 엷어서 남의 말에 솔깃하며 정작 자신의 주관은 오히려 배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주성의 부족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남이 가면 나도 가고, 남이 사면 나도 산다면 되겠는가? 내 일은 내가 결정한다.
●수상택시
곤돌라는 베니스의 왼편 작은 운하와 작은 지역을 돌았는데, 수상택시는 오른 편의 더 운하와 큰 지역을 무려 한 시간이나 달린다. 주변의 성당이나 나폴레옹궁전 등 건물들이 아름답고, 관광객들인 듯한 사람들이 건물 주변에 많아서 구경하는게 더 재미있다.
●리알토 다리
?베네치아에서는 리알토 다리(Rialto Bridge)를 보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다리이다. 예전부터 리알토 다리 주변은 상권의 중심가였다. 12세기 경, 넘쳐나는 상품들과 한쪽 둑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배가 감당하지 못하자 다리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16세기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다리 없이 나무다리를 임시로 사용하다가, 1591년 안토니오 다 폰테가 돌로 된 최초의 다리를 설계·건축하였는데 그 다리가 바로 리알토 다리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지어지기 전까지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재빨리 사진을 찍었으나 큰 의미는 없다.
▣오스트리아
베네치아에서 2시에 출발한다. 베네치아는 베네토주에 있고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베로나도 이곳에 있다. 햄릿 역시 이태리를 배경으로 한다. 베니스에서 한 시간을 달리니 돌로미티산이 나오고 아지제강이 흐른다. 가이드인 배선생은 직접 오래전에 돌로미티산을 찾아 트레킹했다고 한다. 대단한 분이다. 차창을 스치는 수많은 고성과 아름다운 마을들을 사진에 담았다. 휴게실에 들리니 젊은 이탈리아 군인인지 경찰인지 많이 보이는데 우리 젊은 아가씨들 눈길을 떼지 못한다. 돌로미티를 지나 다시 알프스가 나온다. 스위스마냥 다시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산위에는 눈이 덮인 채이지만 국도변은 아름다운 마을들이 계속 나타난다.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함께 알프스산맥을 끼고 유럽 대륙 중앙에 있는 내륙국으로, 모두 영세중립국가로서 자연은 아주 아름답고 국민들은 전쟁 걱정 없이 평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나라로 예전부터 언제나 부러운 나라들이었다.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되면서 오스트리아제국이 성립되었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1918년 제정의 폐지로 공화국이 되었다. 1919년 빈 조약으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가 이 나라에서 독립되면서 현재의 국경선이 결정되어 게르만민족만의 국가가 되었다. 1939년 독일과 통합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1955년 영세중립선언으로 독립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함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체코 등을 동부유럽이라 하며 양드리는 작년에 자매들과 함께 다녀왔다. 나는 동부유럽은 포기한다. 혼자 가기도 그렇고 다른데 갈 곳도 많지 않은가? 오스트리아의 2014년 1인당 GDP는 51,000달러로 세계 11위이다.
●인스부르크
6시에 인스부르크에 도착하다. 1964년 제 9회, 1976년 제 12회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2018년에는 우리나라 평창에서 제18회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도 반가운 곳이다.
인스브루크라는 이름은 인(Inn)강과 다리(Brucke)라는 뜻의 독일어를 합친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강위에 있는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로마시대부터 동부 알프스의 교통요지로서 발전하였다. 인구는 12만에 지나지 않지만, 유럽에서 알프스 산맥에 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이며, 빈(Wien), 그라츠(Geaz), 린츠(Linz)그리고 잘츠부르크(Salzburg)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는 다섯 번 째로 큰 도시이다. 1429년에 티롤(Tirol)의 주도가 되었고 1490년대에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황실이 옮겨오면서 이곳은 유럽의 정치, 문화 중심지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우리 팀이 무슨 가게에 모두 들어간 사이 광주의 이 선생님과 함께 거리구경에 나섰다. 작은 개선문이 있는 곳까지 갔다 오니 쇼핑이 끝났는지 우리 팀들이 이제야 오고 있다. 사거리에 여러 인스부르크 동계대회를 알리는 홍보판이 눈길을 끌고 오가는 붉은 색깔의 전차들이 예쁘다.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거리
인스부르크의 주변 산에는 아직도 눈이 덮여 있으니 과연 알프스다. 마리아테레지아 거리는 걸어서 채 10분이 안 되는 거리다. 끝가지 가보니 개선문 같은 작은 문이 있을 뿐이어서 곧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카를 6세의 장녀이며, 토스카나 대공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였는데(1736),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생존 당시의 상속법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이 이미 각국의 승인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각국이 그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넘겨주었으나, 숙적 프랑스와 대립하는 영국과 손을 잡아 교묘하게 일을 처리하여, 아헨조약(1748)에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전쟁 중에 남편을 황제(프란츠 1세)로 세워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남편에게는 정치적 능력이 없어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하였다. 그 후 재정의 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여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1756∼1763)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이 등을 돌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하였다. 남편의 사망(1765) 후로는 아들 요제프 2세와의 공동통치로 바꾸었다.
원래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딸의 제위 상속은 생각하지 않았던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어 얌전한 여성으로 자라게 했으나, 마리아는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자녀를 16명이나 두었으며,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었다.
오스트리아계의 합스부르크는 독일 제위를 보유하고 오스트리아와 그 밖의 본령 외에 헝가리 · 뵈멘(보헤미아 :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주) 등을 영유하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대항하는 동방의 국제적 세력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와의 대립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계속되어 나폴레옹과도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라인동맹 성립을 계기로 신성로마제국(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로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를 물러난 1806년 8월까지에 걸쳐 독일 국가 원수가 황제 칭호를 가졌던 시대의 독일제국의 정식 명칭)의 칭호를 버리고, 1804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하였다. 19세기에 와서는 프로이센과의 대항에서 패하여 독일 통일의 지도권을 빼앗기고 독일제국의 세력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1918년 카를 1세가 퇴위하여 500년에 가까운 황제가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황금지붕
인스브루크 구 시가지에 있는 후기 고딕양식의 건물의 발코니를 덮고 있는 지붕이다. 이 지붕은 2,738개의 도금된 동판으로 되어있다. 1420년 티롤 군주의 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 1497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지시로 발코니가 만들어졌고 그 위에 황금지붕이 얹히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건물 바로 앞의 광장에서 행해지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만든 이 건물 발코니에는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두 아내들, 재상, 궁중의 광대, 무희들의 모습과 문장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황금 지붕이 얹힌 발코니를 제외하고는 건물 전체에 아기자기하고 조그만 창들이 나 있다. 내용을 모른 채 실제로 보면 규모가 작아서 별로 관심이 가지 않고 또 그리 별반 눈에 띄는 지붕이라 할 수도 없다.
아름다운 알프스의 도시 인스부르크를 떠난다. 채 30분 정도 고개를 오르며 달렸을까 해발 1,000m 넘는 곳에서 버스는 좌회전하여 호텔이 있는 마을로 내려간다. 야호! 우리가 오늘 묵을 곳이 이 아름다운 알프스의 산속이란 말인가? 이게 웬 떡입니까? 더구나 ALPENKONIG TIROL 호텔의 규모도 크거니와 별이 네 개짜리라니... 그런데 방을 배정받고 들어서니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아니 이건 초 특급호텔만큼이나 넓고 화려하다. 실 평수로도 15평 이상이다. 파리에서 4평짜리 간이숙소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또 다시 화가 나려 한다. 비록 이 호텔의 시설이 조금 낡긴 했지만 오늘은 황제가 된 기분이다. 우리 양드리님 기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방에서도 찍어대시고, 로비에서까지 이곳 저곳 찾아다니며 사진 무지 찍어대신다.
5월 10일 일요일(제12일)
▣독일
독일은 세계 제4위의 경제대국이며 유럽연합의 중심국가이다. 독일의 2014년 국민총생산액은 세계 4위, 1인당 GDP는 47,000달러로 세계 16위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동서로 갈라졌던 독일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 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우리가 항상 본 받고자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우리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 프랑스와 함께 세계제패의 자웅을 겨루던 강국인 독일이 이루어 낸 기적보다, 500여 년간 성리학 중심의 유교사상과 양반중심의 지나친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폐쇄주의와 비실용주의, 상공업 천시사상으로 인하여 그리도 가난하고 비자주적이던 우리가 이루어낸 기적은 더욱 값지고 대단한 것이다. 처음으로 그 독일에 들어가 보는 길이다. 분명 이탈리아와는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
●하이델베르크
7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알프스를 내려오는 길 주변은 예쁜 목장, 맑고 작은 천, 빨간 색 작은 기차 등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국경을 넘어 오후 1시 반이 되어서야 인구 150만 명이나 되는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잠간 들렸다가 출발하게 되는 여정이다. 이 도시는 네카어강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였다. 1225년 라인 백작령이 되었으며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강변 저편 잔디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일광욕을 즐기는 듯 편안하게 쉬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먼저 한가로운 광장을 찾았고 주변에 있는 시청사와 성당을 보고 난 뒤 강변으로 이동한다.
●카를 테오도어 다리
강폭이 크지 않아 금방 지날 수 있는 다리이다. 다리 입구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한 젊은이가 기타를 치며 엘비스의 노래를 불러대는데 목소리도 작고 노래실력도 듣잘 것이 없는 데도 계속한다. 건너편은 고급 저택들이 자리 잡고 있어 아주 평화로운 정경이다. 처음에는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강물이 불어나거나 폭설이 내리거나 불이 나면 쉽게 파괴되어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가 돌로 다시 짓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1788년 네카어강(Neckar River) 위에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노여지게 되었다. 시내 방향에 있는 문은 중세 시대에 도시 성벽의 일부였던 것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다리 아래 부분이 아치형으로 되어 있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하이델베르그 고성
카를 테오도어 다리부근에서 볼 때 앞 편의 산 중턱에 자리 잡아 아주 잘 보이는 고성이다. 1225년 팔츠백 오토 비텔스바흐가 축조하였다. 당시의 성은 현재의 성보다 더 높은 산허리에 있었는데, 1537년 낙뢰로 파괴된 뒤 현재의 자리에 옮겨졌다. 그 후 30년전쟁을 비롯한 잇단 전란으로 황폐해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축성 양식은 독일-네덜란드 르네상스풍의 성관과 중세풍 성새의 일부가 혼용되어 있다. 지하실에는 거대한 술창고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가장 큰 술통은 22만ℓ의 술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멀리서 보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
정식 명칭은 ‘루프레히트카를스하이델베르크대학교이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385년 교황의 인가를 얻은 후 1386년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가 세워서 대학 명칭에 그 이름이 포함되었다. 설립 당시 철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를 갖춘 가톨릭계 대학으로 출발하였으나, 하인리히 선제후의 종교개혁(1556)으로 인문주의적 신교대학으로 전환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30년전쟁(1618∼1648)의 영향으로 폐쇄와 개교를 반복하다가 180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칙령으로 자치권이 인정되면서 근대대학으로 개편하고, 교수어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꾸었다. 이때 옛 바덴주의 공작인 카를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교명에 더해졌다. 1899년에는 남녀공학이 되었다. 이 대학도 많은 건물들이 어디에 모두 있는지 도무지 대학 같지 않아 우리나라 상식으로는 이해가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우리나라처럼 한 캠퍼스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열흘 이상 유럽여행을 다니는데 대학은커녕 중고등학교나 초등학교도 거의 보지를 못했다. 시골의 마을들에도 학교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우리처럼 큰 운동장에 큰 나무로 들러 싸여있는 형태의 학교가 아니기 때문이지 왜 학교가 없을라고? 우리는 지금도 학교를 세우려면 반드시 축구장만한 운동장이 있어야만 하니 시내에서는 부지를 구입하기부터 어렵다. 100년 전 인식이 바뀌지 않으니 법령도 바뀌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바꿀 때가 되었다. 운동장이 없는 학교는 학원이라고 생각하거나 비인가 학교로 치부한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운동할 곳이 학교운동장 밖에 없었지만 지금이 어느 세상인가? 아이들은 이제 학교의 실내체육관, 시내의 청소년체육시설, 공설운동장의 풋살장이나 농구장 등에서 운동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중학교 남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정작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거의 운동장에 나가지 않는다. 시내 곳곳에 체육시설이 많아 학교운동장은 구색을 맞출 뿐 쓰임새는 사실상 사라졌다. 일 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하는 체육대회 때문에 운동장이 꼭 존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학교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이다. 4시에 하이델베르크를 떠나는데 들어갈 때 보았던 작은 개선문이 다시 눈에 띈다. 사람들이 마치 우리의 옛 4대문인양 그 문을 통해 왕래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프랑크푸르트
내 기억에 프랑크푸르트와 연관되어지는 것은 나와 동갑인 차범근과 1848년의 프랑크푸르트국민회의 정도이다. 인구 70만 명의 이 도시는 라인 지구대 북부 라인강의 지류인 마인강 연변에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열리고 이곳에서 자유주의적 통일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실패한다.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차범근은 1979년부터 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팀에서 뛰었다. 다름슈타트와 레버쿠젠에서도 뛰었으나 별로 기억이 없다.
●뢰머광장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광장이다. '뢰머(로마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인데 15~18세기의 건물들이 몰려 있다. 광장 주변에는 구시청사와 오스트차일레가 있다. 구 시청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이 끝난 후에 화려한 축하연을 베풀었던 유서 깊은 곳이며, 프랑크푸르트 최초의 박람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405년부터 시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구 시청사 맞은편에 있는 목조건물들을 통칭 오스트차일레라고 하며, 본래는 15세기에 쾰른의 비단상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구 시청사
먼저 가이드가 1848년 프랑크푸르트국민회의가 열렸던 교회 건물을 소개한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독일을 자유주의적으로 통일하려는 시도였던 1848년 독일 혁명으로 설치된 입헌 기관으로서, 1848년 5월 18일부터 1849년 5월 31일까지 이 파울 교회에서 열렸던 역사적인 교회이다.
부근에 있는 시청사는 1405년 시의회가 귀족 저택 세 채를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하고 '뢰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562년, 건물 2층의 홀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한 기록이 있다. 주변에 있는 어느 성당에 들어가 보았다. 괴테가 어린 시절 살았다는 괴테하우스를 다녀온 후 뢰머광장에서 자유시간을 주어서 조금 여유 있게 쉬다가 외곽에 있는 IBIS 호텔에 여장을 푼다. 처음 잘못 찾은 호텔은 별이 세 개였는데, 다시 제대로 찾은 호텔은 별이 두 개다. 그래도 IBIS는 믿을 만하니 별 상관은 없다. 11일에야 카카오톡을 열어보니 10일 오후에 이완수 친구가 보낸 사진이 와 있다. 오스트리아 짤즈부르크라 한다. 고교동창인 이완수, 강덕신, 김성호 부부들이 함께 6일부터 동유럽 여행 중이다.
5월 11일 월요일(제13일)
▣룩셈부르크
아침에 일어나 호텔 밖 공원으로 나가보니 하늘은 푸른데 온통 비행기가 날아간 흔적인 비행운이 수없이 보이고, 눈에 들어오는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만 세워보니 평균 5대 정도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크다는 것을 실감하겠다. 오늘과 내일은 베네룩스 3국이다. 8시에 출발하여 얼마가지 않아 마인츠라는 도시가 나온다. 15세기 중엽에, 구텐베르크(1394-1468)에 의한 활판 인쇄기술의 발명이 이곳에서 있었다. 구텐베르크 박물관, 로마 게르만 중앙박물관 등이 있다고 한다.
12시에 룩셈부르크에 도착한다. 가는 길의 독일 농촌은 끝없는 밀밭과 유채밭 풍경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작은 나라이다. 면적이 2,586㎢이니 제주도의 1.4배 정도이고 인구는 50만 명이라고 한다. 국가원수는 앙리대공으로 유럽 중부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부르고뉴가(家)·합스부르크가·프랑스·네덜란드·프로이센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오다 183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2014년 1인당 GDP가 무려 11만 6,700달러로 단연 세계 1위의 부자나라이다. 도시는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다르게 현대식 건물들이 대부분이어서 도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헌법광장
수도인 룩셈부르크의 남쪽에 있는 기차역과 북쪽에 있는 구시가를 연결하는 루스벨트 대로 건너편에 있는 광장으로, 구름공원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페트루세 계곡에 위치해 있다. 중앙에는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황금의 여신상이 서 있는데, 아래쪽에 4개 국어로 된 설명문이 있다. 'Gelle Fra'라는 이름의 이 기념비는 1958년 부분적으로 재건되었다가 1985년 지금의 형태로 다시 만들었다. 표지석을 보니 세계 제1차대전(1914-18)과 2차 대전(1939-45) 아래에는 놀랍게도 한국전(1950-53)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작은 나라이지만 연인원 83명의 보병 1개 소대를 파견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2명이 전사했단다. 참으로 고마운 나라다. 그 덕택에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고 있다. 언젠가 곧 세계10대 강국이 된 통일 대한민국을 세상에 드러내놓을 때가 올 것이다. 뒤편으로 페트루세 계곡과 아돌프 다리 등 주위 경관이 아름다운데 다리는 보수중이라 가까이 갈 수 없고 계곡 건너편의 마치 아름다운 성당처럼 보이는 건물은 버스이동시 언뜻 보니 성당은 아닌 듯 했다.
●윌리엄 광장(시청광장)
가이드가 알려 주는 대로 바삐 움직여 광장을 찾았다. 시청사가 위치한 윌리엄 광장 앞은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늘 활기 넘친다. 주말에는 광장 주변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다고 한다. 후다닥 광장을 빠져나와 오는 길에 민속품 가게들이 있어 아이쇼핑을 하고는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간다.
●노트르담 대성당
헌법광장 부근 신시가지에 위치한 노트르담 성당도 볼 만하다. 노트르담은 ?성모마리아?를 의미하는 프랑스의 존칭어라 한다. 그래 파리에만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것은 아닌 이유이다. 룩셈부르크의 상징이라 할 만큼 웅장하고 고풍스럽다. 성당 입구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세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국기가 게양 되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우리 팀들이 모두 성당 주변을 산책하듯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게 되어 우리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는 상당히 크고 화려하며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매우 아름다워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성당 및 부속건물의 규모가 커서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여러 나무들을 조화롭게 잘 심어놓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조경도 볼 만하다.
●아돌프 다리
길이 153m, 높이 46m의 거대한 석조 아치교로 1903년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치교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가을에 다리 주변의 나무들이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물들면서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보수공사중이어서 먼발치로만 보았다. 룩셈부르크에서의 점심은 중국집 <通好>에서 먹었는데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8천 원인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중국인들은 1만 원 짜리 뷔페를 먹고 있어 조금 부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2천원의 가격차이로 중국식 뷔페를 먹지 못하다니... 이번 서유럽 여행에서 호텔의 부실, 그리고 음식의 낮은 질은 큰 문제점이다. 나는 무엇이든 잘 먹는 고로 항상 배부르게 먹었지만 그래도 다시 이런 수준의 여행은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다. 룩셈부르크에서 2시에 출발한다. 브뤼셀까지 3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벨기에
벨기에는 인구 1천만 명으로 결코 작지 않은 나라이며, 2014년 1인당 GDP는 47,000달러로 세계 17위이다. 서 유럽의 북해에 면해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1516년 에스파냐의 영토가 되었고 18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 1789년부터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워털루전투(1815) 뒤 네덜란드에 병합되었다. 1830년 8월에 독립하여 1839년 런던회의에서 영세중립국으로 보장받았다.
●브뤼셀
인구 1백만의 큰 도시인 브뤼셀은 센강이 남에서 북으로 시가를 흐르고 많은 분류가 있지만 모두 암거(속도랑)로 되어 있기 때문에 브뤼셀에는 수로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17세기경에 이미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평을 받은 브뤼셀의 역사는 길다.
로마시대부터 거주가 시작되었으며, 12세기경에는 상업도시로서 급속히 발달하였다. 이 무렵(14세기경) 도시의 성벽이 구축되었으며, 그 후 수백 년 동안 성벽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데, 1818∼40년경 이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둘레 8km의 아름다운 순환도로를 만들었다. 이 넓은 가로수 길은 브뤼셀 구시가의 외곽을 형성하고 있다.
14세기부터 브라반트공국의 주도가 되었으나, 17세기에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새로이 벨기에의 수도가 되었다. 유럽 굴지의 아름다운 역사도시인 브뤼셀의 시가는 서쪽의 상업구와 동쪽의 주택구로 갈라져 있는데, 주택구의 중앙부에는 루아얄로가 뚫려 있고, 이를 따라 국회·왕궁·박물관·재판소 등의 건물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상점이 즐비한 상업구의 중앙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그랑플라스가 있으며, 그 근처에는 유명한《오줌 누는 소년》의 청동상이 서 있다. 상업구의 일부분에는 중세도시의 모습을 담은 낡은 동네도 있으나 도시 전체로서는 근대화의 방향을 따르고 있으며, 현대식 고층빌딩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서울처럼 그냥 지어댄 빌딩이 아니라 모두 예술작품 같다. 해마다 많은 국제회의가 열리며, 유럽연합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도 이곳에 있어 서유럽의 수도 구실을 하고 있다. 세 가지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이 섞여 사는 나라의 수도인 브뤼셀에서는 공식 언어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인정되지만 실질적으로는 85-90%의 시민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연 브뤼셀에 들어서니 건물들이 아름답고 디자인이 산뜻한 고층빌딩들이 즐비하다. 마치 새로 건설되는 도시 같은 인상을 주는데 아마 그랑 플라스 주변의 건물들을 빼고는 모두 현대식 건물들이 아닌가 싶다. 버스는 유럽연합(EU) 본부건물 앞을 지나간다. 괜히 유럽연합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유럽의 28개 가맹국을 관장하는 곳이기에 디자인도 좋고 큰 건물이다. 또 하얀색의 너무도 아름다운 성당도 보인다. 내려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이다.
●그랑 플라스
벨기에 브뤼셀 도심에 있는 광장으로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했던 곳이다. 주로 17세기 후반의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극히 유럽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꽃시장이 열리고 각종 행사와 이벤트가 끊이지 않아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공공건물과 사유건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며, 활기 넘치는 일상의 생활과 아름다운 문화예술이 함께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광장으로 가는 길에 돈키호테의 동상이 서있고, 이름 모르는 동상들이 여기 저기 있는데 모두 모습들이 재미있다. 광장에 들어서니 정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신나는 음악은 연주되는지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 건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냥 이곳에서 맥주라도 마시며 두 어 시간 쯤 놀다가고 싶다.
동서로 110m, 남북으로 70m인 광장은 그랑 플라스(Grand-Place), 즉 대광장이라는 명칭에 비하면 그리 크지는 않은 규모다. 시청사, 왕의 집, 길드 하우스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96m의 첨탑이 높이 솟은 시청사다. 15세기에 건설된 고딕양식의 건물로 1695년 프랑스의 침입으로 광장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속에서 유일하게 화를 면한 건물이다. 탑 꼭대기에는 브뤼셀의 수호성인 미카엘 대천사가 조각되어 있다.
16세기 초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왕의 집은 애초 개인 소유였으나 샤를 5세가 청사로 활용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브뤼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는 시립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줌싸개 동상
광장에서 좁은 상가로 들어서니 브뤼셀의 가장 나이 많은 시민이라 불리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이 나온다. 에게! 정말 작다.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에 의해 제작된 이 동상의 실제 크기는 60cm 남짓하다. 이 동상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프랑스 루이 15세가 브뤼셀을 침략했을 때 이 동상을 탐내 프랑스로 가져갔다가 이후에 사과의 의미로 화려한 후작 옷을 입혀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골목 와플이 유명하다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우리도 2.5유로를 주고 하나만 사서 둘이 함께 먹어본다. 평소 먹는 것이 아니라서 얼마나 맛이 있는것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좌우간 맛있게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어느 가게에 아름답게 수를 놓은 수공예품이 있어 한참동안 구경하다. 8시가 되어 숙소인 안트베르펜에 있는 TULIP INN호텔에 들다. 플랑드르(플란더스) 지방에 위치한 벨기에의 도시로 수도인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북해에서 90km 지점인 스헬데강 하구에 있다. 소설 《플란더스의 개》로 유명하기도 한 안트베르펜은 수도인 브뤼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이다. 영어로는 앤트워프(Antwerp)라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호텔주변을 산책하노라니 작은 규모의 아파트들이 아주 소박하고 별도의 정원은 없어 주변의 큰 나무들이 없다면 좀 삭막할 듯한 생각이 들며, 내가 지금 벨기에 도시사람들보다도 더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구나 하는 자긍심이 들며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에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사람들은 출근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가 묵은 호텔 바로 뒷길은 큰 고속도로다.
5월 12일 화요일(제14일)
▣네덜란드
베네룩스 3국 중 가장 큰 나라로 거의 전라도와 충청도를 합친 정도의 면적이다. 인구도 1,700만 명이나 되어 우리는 학창시절에 군소국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로 기억해왔다. 그리고 홀랜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현재는 인구밀도가 우리 대한민국과 비슷하니 작은 나라로 인구는 많으나 잘사는 나라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유럽 서부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인데 1515년부터 에스파냐의 통치를 받으며 신교 탄압을 받아왔고 1566년 독립전쟁을 감행해 1579년 1월 독립을 선언했으나 1648년에야 완전 독립이 승인되었다. 네덜란드의 2014년 1인당 GDP는 52,000달러로 세계 10위이다. 네덜란드 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히딩크(1946- )감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우리 대표선수들의 역량을 극대화시킴으로써 2002 서울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강에 올려놓는 신화를 창조하였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 누구도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1980년대 이후 특정한 사상과 주의에 물들어 교조주의에 빠진 대한민국 어떤 부류의 못된 지도자들과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매(?)한 시민들을 선동하거나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느 시대든 어느 집단이든 변화와 발전은 시민들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개인의 리더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며 개인의 영도력을 일체 부정하고 민중의 힘만 강조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들은 알렉산더나 카이사르나 징기즈칸이나 세종대왕의 영웅적이거나 위대한 능력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오직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시 창조하는 리더십을 발휘한 박정희를 깔아뭉개기 위해서라면 역사와 철학까지도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먹고 살만한 위치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눈에는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해결방안이나 국가의 경제발전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와 통일이라는 두 글자만 보였던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네 글자만 추종한 북한의 현재 모습과 과감히 경제발전이라는 국가목표를 도입한 오늘의 중국의 모습에서 그리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결국은 완성해낸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그들의 주장과 논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공리공담이었는지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오늘(2015년 5월 25일)자 신문에는 미국의 CIA가 공식 발표한 내용이 나왔다. 구매력지수(PPP)를 감안한 GDP가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267개국 중 1위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인도가 3위, 일본이 4위이며 한국은 12위로 평가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267개국 중 명목상 GDP는 13위이고 PPP지수를 감안한 GDP는 12위로 공식 인정된 것이다. 드디어 아시아 태평양시대는 도래된 것이 확인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역사를 전공한다는 학자라는 인간들이 먼 미래를 내다보는 긍정적 역사인식을 국민이나 학생들에게 심어주지 않고 정치에 물들어 역사를 왜곡하고, 무지하거나 불만이 많은 계층에 속하거나 아직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여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은 가난한 역사에서 부강한 역사를 창조한 박정희의 영도력을 폄훼하고자 온갖 감언이설과 궤변으로 일관하였다. <그 당시에 박정희가 아니라도 가능했다. 이미 민주당 정부에서 경제개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친일파인데 권력을 위해서였지 진정으로 애국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경제성장할 수있는 좋은 조건이 이미 주어진 상황이었다. 북한은 60년대까지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 경제만 성장하면 제일인가? 민주화가 더 중요하지. 장기집권과 독재의 잘못이 경제성장한 공보다 더 크다.> 벼라 별 이유로 그들은 우리 경제성장의 진실을 외면하고 자본주의와 대한민국과 미국이라면 이를 갈며 헐뜯어왔다. 그들이 우리의 국사학계를 지배하면서 교과서 문제를 야기시킨 뒤 검인정 교과서에서 근현대사 부문을 과잉확대시킴으로 인하여 우리 국사교과서들은 이미 절름발이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천재교육에서 발간한 고교국사(2010)는 고대사에서 조선후기까지의 분량은 84쪽에 불과하고 근현대사 부분은 313쪽이나 되는 이상야릇한 교과서를 만들어 냈다. 학생들은 고대사에서 조선후기까지 정말 겉핥기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도록 서술되어 있어 구체적 내용은 중학교 때 배운 지식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고등학교에서 전혀 좀 더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배울 수가 없고 그런 피상적으로 서술된 내용으로 공부하고 수능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근현대사의 구체적 사실에 대한 저자들의 역사관을 지적하며 싸우기 이전에 교과서의 분량 배분에서부터 지나치게 의도적인 것이 더 큰 문제점인 것을 모두들 간과하고 있다. 교과부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자 그들은 다시 크게 반발하며 근현대사 위주의 국사교육만을 강조하고 나서고 있다. 나는 이제 직접 국사를 가르치지는 않는 위치이지만 정치위주의 교과서가 아닌, 근현대사만 가르치는 교과서가 아닌 보다 균형 잡힌 교과서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히딩크 감독을 선임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4강 신화를 능히 이룰 수 있었다? 그만큼 선수들의 기량과 의지가 강했으니까? 따라서 히딩크의 공은 별것 아니다? 고마워 할 것도 없다? 계약금을 다 챙겼을 터이니? 그럼 왜 그 뒤에는 16강도 못 들어가나? 부정적 역사관을 심어주는 그들은 그저 역사관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분명 나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의 번영과 영광을 자랑스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그들의 저의를 감지하지 못하는 채 나쁜 사람들의 감언이설을 믿거나 지지하기도 한다. 하긴 해산된 통진당의 이석기를 지지하는 대한민국 국민들도 있다는데요. 아무튼 풍차의 나라 히딩크 감독의 나라에까지 내가 왔다.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수도이며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도시이다. 12세기 경 암스텔강 하구에 둑을 쌓아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16세기경에는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현재, 네덜란드의 경제∙문화의 중심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민자들의 인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현재 암스테르담은 약 170개가 넘는 다양한 국적의 인구로 구성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다양성이 높은 도시로 손꼽힌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암스텔강의 댐에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암스텔 강에서 1170년과 1173년에 일어난 홍수 직후, 다리와 댐을 건설하면서 마을 이 형성되어 발전하였고, 이후 14세기 초 도시로 승격되었다. 한자동맹으로 인한 무역업의 성행으로 암스테르담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1515년부터 카를 5세(Charles Ⅴ)의 즉위와 함께 시작 되었던 스페인의 지배 이후 새로운 세금의 부과, 기독교에 대한 종교탄압 등으로 인해 스페인에 대한 저항과 네덜란드독립전쟁(1568-1648)이 일어나게 되는데 암스테르담은 그 주요 거점이었다.
17세기 황금시대(Dutch Golden Age)에 무역의 발달로 암스테르담은 주요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가 자바섬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암스테르담은 북미, 아프리카,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회사의 많은 지분을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벨테브레는 1626년에, 하멜은 1653년에 나가사끼로 가던 중 표류하다 우리나라에 오게 된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1810년 홀란드(Holland) 지역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1815년 네덜란드 왕국이 설립되면서 19세기는 암스테르담의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자전거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고 젊은이들이 자전거 행렬을 이루며 지나간다.
●잔세스칸스 마을
네덜란드에 들어서면서부터 간간이 아름다운 풍차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잔세스칸스 마을은 관광용으로 남겨둔 것일 뿐 실제 사용하는 풍차는 대부분 없다는데 사용은 안하지만 그래도 간간이 마을에 하나씩 남아있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 마을은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잔 강변의 마을로서, 풍차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으로, 네덜란드의 명물인 풍차와 양의 방목으로 유명하다. 18세기에는 700개가 넘는 풍차가 있었으나 산업혁명의 기계화에 밀려 지금은 관광용으로 몇 개만 남아 있다. 마을은 완전히 관광지가 되어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17~18세기의 목조가옥과 크고 작은 풍차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트 승강장과 풍차가 있고 강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쪽에는 나막신을 만들어 파는 상점과 음식점 등이 있다. 목장 앞의 치즈 공장에서는 맛있는 치즈와 우유를 맛볼 수 있고 풍차의 내부도 견학할 수 있다. 스위스의 산장처럼 이 풍차마을의 정경도 너무나 아름다워 이곳저곳을 찾아 누비며 예쁜 사진을 남기려 많이 찍었다. 나막신을 구경하는 중에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보이는 나막신에 비해 훨씬 과학적이고 실제 사용해도 큰 불편이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습에 놀랐다. 우리 나막신은 비가 올 때나 한번 씩 신을 뿐이어서 그런지 섬세하지 못해 그저 장난감 같다는 생각만 하게 되는데 이곳의 나막신은 항시 상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 과거 우리의 상공업 천시사상과 수공업의 비과학성, 비실용성을 비교당하는 것 같아 조금 우울한 생각이 들기조차 한다. 우리 서민들은 그저 짚신에만 의존하며 살았으니 볼품도 없거니와 금새 닳아버리니 수없이 만들어 신느라 얼마나 불편하였을까? 아마 비오는 날엔 맨발이 차라리 편했으리라. 내가 신발장에 놓을 기념품으로 꽃나막신 한 벌을 사려하니 양드리는 도기로 제작한 예쁜 신 한 짝을 더 한다. 지금 신발장에 예쁘게 장식해 놓았다. 한 시간 이상을 잔세스칸스 마을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식이라는데 국물은 내가 평생에 단 한번 먹어본 기억밖에 없는 부대찌개다. 그나마 다른 건더기는 없고 모두가 짤게 썰어놓은 쏘세지 일색이다. 반찬은 우리나라 음식 반찬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말을 또 아끼겠습니다.)...그런 식사지만 배가 고프니 다 먹어 치웠다.
●담 광장
붉은 색 아름다운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큰 번화가이다. 수많은 인파가 밀려오고 밀려간다. 약 5분 거리에는 담 광장이 있다. 암스테르담의 모든 길은 담 광장으로 통하며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다. 원래는 암스테르담 중심부를 흐르는 암스텔강의 둑이 파손되었을 경우 도시가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13세기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왕궁, 신교회, 아주 높은 전쟁기념탑,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담 튀소의 밀랍인형 박물관 등이 주변에 세워져 있다. 거리의 예술가들과 60년대에 유명했던 담 광장 히피들, 많은 카페들로 인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자유시간이 많이 허락되어 담 광장과 부근의 거리를 돌아다녀본다. 역시 화장실이 없어 맥도날드 집에 개방된 화장실(50센트)이 있다기에 다녀왔더니 서울 이선생님은 부근 병원에 들어가 공짜로 보셨다고 자랑한다. 우리나라는 병원화장실이나 커피숍 화장실이나 은행 화장실이나 급하면 누구나 이용할 뿐 만 아니라 소공원에까지도 깨끗한 공중화장실이 완전 공짜이러니 살기 좋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유럽에서 운행되는 차들은 보이느니 거의가 벤츠, 폭스바겐, 아우디, 푸조, 피아트 등인데 가끔씩 현대차와 대우차도 볼 수 있다. 생전에 외제차라도 한 번 타봐야 하지 않나하는 촌스런 생각일랑 완전 버려야겠다. 유럽에선 우리나라차도 외제차다. 그 비싼 외제차를 구입하고 많은 세금에 많은 관리비 들여가며 외제차 탄다는 말 듣고 싶어 타는 일일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값이 싸면서도 운영비가 절약되는 실용적인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은 부러워할망정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런 차가 있다면 물론 나도 탈 수도 있는 일이다.
●왕궁
담광장에 있는 왕궁은 네덜란드의 현재 군주인 알렉산더르 국왕과 그의 가족이 암스테르담시를 방문할 때 거주하는 곳이다. 1648년에 짓기 시작하였고 원래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쓸 목적이었다. 겉으로는 색깔이 거무튀튀하여 화려하기는커녕 볼품이 없는데 왕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유료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1층 통로만 볼 수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왕궁이라서인지 건물자체가 육중한 돌로 지어졌고 실내는 고급스런 장식을 해서인지 무게감 있는 분위기가 서려있다.
1665년에 완성된 왕궁은 17세기 네덜란드 고전주의 건축의 상징으로써 200년 가까이 암스테르담과 네덜란드의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1808년에 네덜란드를 점령했던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동생인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이 새 왕으로 부임해 오게 되자 이 건물은 왕궁의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현재 왕궁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상당수의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품은 나폴레옹 점령 당시에 들여온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곳은 196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결혼식 때 호화로운 무도회가 열렸던 홀과 담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방들이다.
●암스테르담 운하
중앙역 부근에서 배를 탄다. 우리 팀이 타면 출발하는 줄 알았더니 그에 아니다. 한참을 기다려 30여명이 넘게 타고서야 배는 출발한다. 암스테르담은 100km 이상의 운하와 약 90개의 섬, 그리고 1,500여개의 다리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다리는 1728년에 설치한 것도 있다고 한다. 베니스 운하는 파란 바닷물이어서 주변 건물들과 어우러지면서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되었지만, 암스테르담 운하는 어쩐지 물이 깨끗하지 못하여 아름다움이 덜 한다. 주변에는 오래된 배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상가옥들이 보이기도하고 일반 시민들의 오가는 일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운하를 유람하는 시간은 무려 한 시간이나 된다.
마치는 말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밤 9시 40분에 정확하게 이륙한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오후 2시 40분에 도착했다. 갈 때보다는 1시간 빠르게 10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마포집에서 하루 쉬고 내려가려고 공항버스를 타자마자 아버지의 전화다. 어머니께서 오늘 입원하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다시 처제차를 타고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百畵面이 不如一實見』이란 말을 지어 보았다. TV를 통해 유럽의 문화를 수도 없이 접했지만 그건 감동이 없다. 단 한번 다녀왔음에도 비로소 유럽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듯하다. 15일의 긴 여정은 비록 힘들었지만 내게는 큰 의미를 지니는 서유럽 여행이다. 이번 서유럽 여행 중 내가 가장 크게 감동한 세 가지를 정리해 본다.
첫째,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극치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내가 살기에는 버거울 것 같다.
둘째,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한 아름다움이다. 궁전건축의 극치이다. 절대주의의 전성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셋째, 성 베드로성당의 장엄함이다. 파르테논 신전만이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인간의 위대함을 느꼈다.
숙식이 문제점을 크게 노출하였고, 관광객을 배려하지 않는 화장실문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함께 한 우리 일행들이 어려움을 잘 견뎌내며 서로 배려해주신 덕분이다. 분에 넘치는 여러분들의 배려에 감사드리고 어찌되었든 길고 힘든 여정을 잘 마무리해주신 가이드님에게도 감사드린다. 서유럽 여행을 다녀온 느낌은? 마치 60년대에 시골 촌사람이 완행열차 9시간 타고 처음으로 서울에 가서 남대문과 경복궁을 보고 가슴 뿌듯한 느낌? 비로소 이제야 해외여행을 좀 했다고 누군가에게 그래도 조금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게 된 느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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