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10월의 여행 스케치

청담(靑潭) 2015. 11. 5. 10:00

 

 

10월여행 스케치

10월은 지구 온난화 현상 이후로는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살기 좋은 달이자 가장 바쁜 달이기도 합니다. 이제 봄은 내내 더워졌습니다. 11월이 시작되자마자 벌써부터 추워졌습니다. 퇴직한 첫 해인 금년은 앞으로의 노후 30년을 준비하는 한 해로 삼았었습니다. 하고자 하던 일들이 거의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퇴직한 직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6개월 동안 공황상태가 되었었다는 어떤 일반직 출신의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거 없이 나름대로 잘 지내왔습니다. 10월 한 달을 지내면서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한 달 동안 다녀온 흔적들을 정리하여 봅니다. 제목을 좀 멋있게 붙여 보았습니다.

 

 

1. 이리 북중학교 거북비 제막식 참석(1일)

나의 블로그를 통하여 나의 소재를 알게 된 이리북중학교 제1회 졸업생 제자들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이리북중의 상징인 거북 형상이 새겨진 뱃지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거북마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학교에는 아무 흔적도 없어 안타까운 나머지 개교 30주년을 맞아 거북형상을 담은 교비를 제작하여 현관 앞에 건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교비의 건립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극구 사양하고 저희들이 쓴 건립문을 감수만 해주었는데, 정작 교비에는 원래 저희들이 쓴 원문을 새겼습니다. 매우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으나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개교 당시 근무한 교사들이 만든 친목회 명칭이 거북회입니다. 제가 총무를 맡고 있어 개교 30주년 행사에 채종석 회장님, 이영삼 교장, 송창오 선생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2. 재경 남성 한마음 체육대회 참석(3일)

해마다 이맘때면 재경남성가족한마음체육대회가 주로 올림픽보조경기장에서 열립니다. 지방(전북)에서도 각 기수별로 참석합니다. 우리 21회는 익산에서만 모두 13명이 총동창회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이용하여 참가하였습니다. 전주와 군산 친구들의 참여가 매우 저조한 것이 안타깝지만 강제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21회는 배구에서는 김남성 군(전 우리캐피탈 배구단 감독)이 홀로 분전했지만, 결승에서 선수 출신이 3명이나 되는 18회 선배들에게 무참히 깨졌습니다. 나도 오랜만에 배구선수로 뛰었습니다. 족구에서는 우승했고, 참석회원이 60명이 넘어서 참가상으로 20만원도 받았다고 합니다.

 

 

3. 서울 남산골 공원 및 한옥마을 구경(9일)

우리의 자랑인 송하진 전북지사 차남 결혼식이 남산 가까운 곳에 있는 한적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라비두스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선비답게 청첩장 없이 크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른 아들 결혼식에 우리 초등학교 친구들은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아 여덟 명이 축하하기 위해 상경했습니다. 도착 후 결혼식 시작 전 한 시간 반의 여유가 있어 미리 조사해둔 남산골 공원을 친구들과 함께 찾았습니다. 새천년에 만든 <서울천년 캡슐광장)을 지나 한옥마을을 구경하였습니다. 전주 한옥마을보다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오히려 지체 높은 양반들이 살던 전통가옥의 정취가 있었습니다.

 

 

4. 경기 안성 바우덕이 축제와 정원박람회 관람(11일)

매주 수요일 저녁 3시간 동안 전북대 평생교육원 익산캠퍼스 조경관리반에서 수업을 받습니다. 한 학기에 한번 씩 답사를 갑니다. 이번에는 안성에서 개최되는 정원박람회를 찾았습니다. 전북대 본 캠퍼스에 설치된 정원관리반 수강생들과 함께 갑니다. 정원박람회장이라고는 하지만 정원은 그저 아주 작은 규모로 몇 개의 작품이 전시된 정도였으나 나는 담장과 연못 설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정원박람회는 안성 바우덕이 축제의 일환으로 개최한 것으로 덕분에 바우덕이 축제를 잘 구경하고 왔습니다. 바우덕이(1848-1870)는 열 다섯 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써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천재 예인이랍니다.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853년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남사당패에 맡겨져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놀이를 익히게 됩니다. 바우덕이가 15세 되던 해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연로하여 새로운 꼭두쇠를 선출할 때 바우덕이가 어린 나이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불러서 공연을 펼쳤는데 그 때 뛰어난 공연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바우덕이는 이후에도 전국을 돌면서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나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어 1870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5. 경북 영주지역 문화답사(13일)

익산문화원에서는 연 2회 문화답사를 갑니다. 내가 한때 익산문화원 전문위원으로 향토지를 발간하는 일에 참여하고, 문화학교에서 특강을 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운영체제가 바뀌어 회원으로 가입해야 강좌에 참여할 수도 있고, 답사에 참가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채부원장의 안내로 회원으로 가입하고 처음으로 답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버스 4대로 출발하게 되니 참가자가 무려 160여명이 넘습니다. 선착순 모집이었다는데 내가 모집 하루 만에 신청했는데도 겨우 4호차에 배정받았으니 참가희망자가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가자 대부분이 60세 이상이고 80대 노인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정말 건강한 노인들입니다. 소수서원과 영주부석사를 찾았습니다. 영주 안동지역은 70년대 중반 첫 답사이후 대략 4번째쯤 찾게 된듯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숲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서원은 더욱 규모가 커졌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여 어느 때 보다 자세히 연못과 죽계천 건너편에 있는 정자인 翠寒臺(취한대)까지 살필 수 있었습니다. 또 바로 뒤편에 예전에 미처 몰랐던 선비촌이 있어 인동장씨 종택 등 옛 양반들의 고택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다시 찾은 것이 큰 기쁨이지만 나무들이 너무나 울창해져서 부석사의 전체적인 조망이 어려워졌습니다. 어쩐 일인지 옛 부석사 모습이 생각나며 매우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일행들이 대부분 노인들이라 이해는 하지만, 버스 안에서 방영하는 장시간의 품바타령과 트로트 소음공해 때문에 매우 힘이 드는 것은 노인들과의 여행시 내가 해결해야할 숙제입니다.

 

 

 

 

6. 완주지역 단풍 산행(25일)

1989년 봄에 자가용을 구입한 이후로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2012년 학교의 주5일제 시행부터는 거의 매주에 한 번씩 우리 부부만 또는 친한 사람들과 부부동반으로 가까운 산을 찾았습니다. 주로 익산의 미륵산, 완주 대아리 수목원, 진안의 운일암 반일암, 완주와 논산의 대둔산, 김제와 완주의 모악산, 그리고 최근에는 익산 함열의 함라산, 군산의 옥산저수지와 월명산을 자주 찾았습니다. 10월부터 양드리가 기간제 근무를 시작하면서 매우 피곤해 하므로 산에 오르기는커녕 야외드라이브조차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단풍구경을 겸한 가벼운 산행을 계획하였습니다.

10시에 출발하여 먼저 완주군 경천면에 있는 고찰 화암사를 찾았습니다. 금년 단풍이 많이 늦는다더니만 이제야 막 나무색들이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오르고 내리는데 약 한 시간 정도의 가벼운 등산이지만 양드리는 워낙이 등산을 잘하지 못하고, 나는 힘든 테니스 레슨과 무리한 서브 연습으로 골반 뼈가 시큰거려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화산면으로 들어가 유명한 화산붕어찜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저수지를 끼고 지어진 식당인데도 금년 계속되는 큰 가뭄으로 식당 옆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상당한 규모의 화산 저수지가 수초만 무성할 뿐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온 나라의 저수지마다 바닥이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백성 모두가 굶어 죽을 판입니다. 장차 올겨울에 눈이 아무리 많이 내린다 한들, 말라버린 저수지들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년 물 부족이 또 걱정입니다. 충청도지역은 벌써부터 제한 급수를 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위봉폭포에 차를 주차하고 폭포로 내려갑니다. 어제 약간의 비가 내렸는데 그 때문인지 폭포수가 제법 내리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딱 한 번 폭포소까지 찾아간 일이 있으나 한참을 돌아 걸어가야 하므로 불편하더니, 이제 주차장에서 내려가는 나무계단을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계단이 모두 250여개 쯤 되니 내려가기는 쉬우나 올라오는 것은 등산하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위봉사에 들리니 신도들의 무슨 행사가 막 끝난 모양으로 보이차를 공짜로 대접합니다. 약수도 마시고 차도 얻어 마시고는 양드리가 신도들이 담았다는 된장을 삽니다.

송광사에 들어갔습니다. 위봉사도 그렇지만 송광사도 그동안 아주 크게 확장되어왔습니다. 위봉사는 작은 절에서 상당한 규모의 절로 잘 정비된데 비해서 송광사는 아주 고즈넉하게 자리 잡힌 고풍스런 절에서 규모는 커지고 있으나 아주 번잡스런 절로 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없던 달마상 같은 이상한 중국식 석조물을 곳곳에 설치하여 사실 내보기에 흉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전에는 커다랗게 자란 보리수나무가 기세 등등, 당당했는데 오늘은 어찌 눈에 잘 띄이지 않아 일부러 찾아보니 확장되는 절의 위세에 눌려서인지 저 만큼 한적한곳에 버려진 듯, 낙엽을 떨어뜨리며 겨우 버티고 있는 것처럼 모습이 처량하게 보입니다.

 

7. 대종중 옥구시제 참석(29일)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翰林洞 마을에는 시조인 德明으로부터 14세손이시며, 나의 14대조이신 평택현감 李瀅水 公(1471-1547), 13대조 무안현감 李宜福 公(1518-1577), 12대조 이조정랑 李春成 公(1569-1641) 등 3대 조상의 묘가 있습니다.

벼슬을 하신 瀅字 水字 할아버지가 戊午士禍를 피하여 옥구 한림동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 후손들은 그래서 평택공파로 불립니다. 나는 재작년부터 옥구 시제에 참석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전적으로 당시에 이웃 옥구읍에 있는 자양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림동에는 염의서원이 있고 군산지역에서는 군산시 지도에도 표시되는 돗대산이 있습니다. 돗대산 너머에 당북초등학교가 있고 나의 매제인 유지득 현 익산교육장이 금년 2월까지 교장으로 근무했었습니다. 한림동 입구에 백석제가 있는데 물이 마른지 오랜 저수지로 군산시에서 전북대병원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반대로 건립이 불투명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갈대와 줄 등 습지식물로 초원을 이룬 11만 7000여㎡(3만 5000평)의 작은 습지는 북방계 멸종위기 식물인 독미나리와 각시수련, 남방계 멸종위기 식물인 물고사리가 함께 서식하는 매우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라며 반대가 거세기 때문입니다. 한림동에는 우리 신평이씨 종중의 재실과 논과 밭이 3천여 평, 산이 6천여 평이 나 되어 만일 대학병원이 건립되면 한림동 마을로 큰 길이 뚫릴 계획이어서 우리 자손들이 시제 모시러 다니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종중재산의 가치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이므로 집안 어른들의 관심이 큽니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땅값이 벌써부터 몇 배로 뛰어 거래된 일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현직에서 은퇴한 한가한 사람이며, 고향마을에 집을 가지고 있고, 종중 소유의 논과 밭을 경작하고 있으므로 종중의 제사와 행사에는 기꺼이 참여하겠지만 종중을 운영하는 직책을 맡기를 요구한다면 극구 사양하려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대종중의 주요간부 일을 오랫동안 맡으셨고 아버지께서도 현재 사(소)종중의 회장으로 계시지만 나는 지극히 보수적이며 답답한 중중운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시대는 혁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단히 변화하는 시대에 부응하여 바꾸고 개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친회라는 존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상징입니다. 지극히 보수적인 우리 신평이씨 평택공파 대종중이나, 6대조 할아버지 자손으로 조직된 사(소)종중의 일을 맡아 하기에는 나는 너무 혁신주의자입니다. 중중운영은 나의 성격과 맞지 않음을 내가 너무나 잘 압니다. 구태여 내가 나서서 애써 내 뜻대로 보수적인 종중을 개혁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관행대로 종중일을 잘 맡아 하실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물론 없습니다. 만일 내가 종중의 어떤 직책을 맡게 된다면 나는 필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건강을 해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동창회를 운영하는 일이 보람 있고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지금 현재 두 동기 동창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데 별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임기가 끝나면 언제라도 물러나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작은 가정경제를 효율적으로 잘 운영하여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일만도 막중한 일입니다. 하물며 복잡한 종중운영과 종중재산 경영일로 의견이 다른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들과 갈등하고, 타협하며, 발전을 위해 애를 쓰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픕니다. 나의 친구 하나는 나와 함께 금년에 정년퇴직했는데 벌써부터 자기 종중의 총무직을 맡았다고 합니다.

나는 나의 고조할아버지 玉石 李玉淵 公(1858-1930)의 장손으로서 할아버지의 시제를 잘 모시고, 그 자손들을 모신 선산을 잘 관리해 나가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5세 장손으로서 마땅히 내가 책임져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도 찾아가는 나의 시골집은 고조할아버지께서 1880년대에 분가하시면서 처음 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한 곳인데, 나의 조부 芝山 文煥 公(1903-1973)께서 50여년 만인 1937년에 다시 잘 지으신 집에서 나는 태어났고, 그 동안 우리 가족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께서 새 천년 이후 김제 시내 아파트에서 사시게 됨에 따라 관리가 소홀해져서 매우 누추해진데다 동향이어서 햇볕이 잘 들지 않고 대밭 언덕과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내가 과감하게 금년 6월에 78년 된 집을 허물고 8월에 12평짜리 조그만 조립식 전원주택을 지었습니다. 택호는 할아버지의 호를 따서 붙인 지산 플라스입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손자로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만큼이라도 할아버지를 기리고자 지은 이름입니다. 글씨는 우리 양드리가 솜씨를 발휘하여 예쁘게 썼습니다. 아름다운 집으로 오래토록 잘 가꾸어 가려 합니다.

 

 

 

 

8. 종정초등학교 제21회 경복궁과 청계천 모임(31일)

지난 4월 18일에 제가 종정초등학교 제21회 동창회장으로서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하여 모교에서 개최한 바 있습니다. 연락이 가능한 동기 95명 중 59명이 참여하였고 발전기금을 모금하여 일천만원의 운영자금도 확보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5월중에 전주에서 단 한 번 정기총회를 가져왔는데 서울에서는 참여율이 저조하였습니다. 서울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 최초로 서울에서 동창회를 개최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금년에 발전기금을 거두었으므로 회비 없는 모임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첫 모임이므로 서울의 한 복판인 세종로 광화문 앞에서 만나서 경복궁을 함께 거닐고 청계천에서 함께 걷는 동창회를 기획했습니다. 종로에서 직장생활을 한 우리 이쁜 딸을 시켜 식당을 예약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경복궁에 처음 온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청계천에 처음 와본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이쁜 딸이 예약한 무교동 근처의 다동에 있는 고깃집《반갑다 하대포》에서 저녁을 먹고 서울친구들이 커피를 샀습니다. 전북에서 18명, 서울을 비롯한 타․시도에서 27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귀순이는 경주에서 기꺼이 찾아왔습니다. 남자 친구들은 사업으로 또는 직장일로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남자가 18명, 여자가 27명이었습니다. 금년에 치른 두 번의 행사에 참여한 동창은 모두 63명입니다. 나머지 32명의 친구들 중에서 칠팔 명은 내년 모임에는 참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의 계모임인 동우회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매우 편안하게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버스에 가장 먼저 오른 나는 아침 9시10분에 집을 나서서 다음날 새벽 1시 반에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종정 21회의 새로운 운영팬턴을 잘 정착시켜 남은 30년(?)을 초등 친구들과 건강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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