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스파니아)
공용어 : 스페인어
지역어 :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
정부 형태 : 단일 국가, 양원제, 입헌군주국
국왕 : 펠리페 6세 총리 : 마리아노 라호이
면적 : 504,030km² (51 위)
인구 : 46,464,053명 (30위)
인구 밀도 : 90명/km² (106위)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및 안도라 공국과 접하고 있다. 또한 피레네 근처에 있는 인구 약 1200명 규모의 이비아(Llívia)라는 마을은 프랑스 영토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스페인은 17개의 자치 지방으로 구성되며, 2개의 자치시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17개의 자치 지방은 50개의 주로 다시 나뉜다. 단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 칸타브리아 지방, 라리오하 지방, 마드리드 지방, 무르시아 지방, 나바라 지방은 그 자체가 주이자 자치 지방이다.
■스페인의 자연
1. 지리
세계에서 51번째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면적은 50만 4,782㎢이다. 본토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는데, 그밖에 지중해와 대서양의 제도, 두 개의 자치시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본토의 1/3 정도가 산지이며, 평균 해발 고도 660미터로 유럽을 통틀어 스위스 다음가는 고산 국가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피레네 산맥, 대서양 연안 지방에는 칸타브리아 산맥, 남부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중앙부에는 메세타 고원(이베리아 고원)이 있다. 과달키비르 강, 과디아나 강을 비롯해 에브로 강, 두에로 강 등이 스페인의 주요 강이다.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포도 및 오렌지, 올리브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이슬람의 지배를 오래 받아 아직도 아랍 문화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다. 스페인 본토의 동쪽을 보면 큰 섬이 몇 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요르카 섬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라 불리는 이곳은 지중해에서 가장 각광받는 휴양지 중 하나이며, 1950년대 스페인 정부의 관광 개발 정책에 힘입어 관광업이 계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장했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스페인령으로 모로코와 인접하는 한편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 항구인 지브롤터는 영국령이다. 비다소아 강의 작은 섬인 피센 섬은 프랑스와 공동 관리한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및 안도라 공국과 접하고 있다. 또한 피레네 근처에 있는 인구 약 1200명 규모의 이비아(Llívia)라는 마을은 프랑스 영토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스페인의 영토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지중해 및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접하는 여러 무인도가 포함된다. 지중해의 도서 영토를 두고 Plazas de soberanía로 칭하며 차파리나스 제도, 알보란 섬, 페레힐 섬 등을 포함한다. 비다소아 강에 있는 피전트 섬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공통으로 점유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 속한 스페인 본토는 산악 지형이 두드러 지며 산악 지형을 중심으로 고지대 평원이 분포한다. 피레네 산맥을 잇는 산지로는 칸타브리아 산맥, 시스테마 이베리코, 시스테마 센트랄, 톨레도 산맥, 시에라 모레나 등이 있으며 최고봉 3,478m인 물아센(Mulhacén)이 있는 시스테마 페니베티고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우리는 스페인 본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스페인 전 영토를 포함하여 최고봉은 카나리아 제도의 화산인 테이데이다. 메세타 고원은 스페인 중앙부에 위치한 고지대 평원이다.
주요 강으로는 에브로 강, 두에로 강, 타구스 강을 비롯해 과디아나 강,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 충적 평야는 대부분 해안가에 분포하며 과달키비르 강에 위치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충적평야가 가장 넓고 비옥하다.
2. 기후
스페인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자면 기후 또한 다양하게 나뉜다. 대개 스페인의 기후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지중해성 기후는 안달루시아 평원 해안가에서 시작해서 바르셀로나와 피레네 산맥 인근까지 해안 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대륙성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과 혼재하여 나타나는 기후 특성으로 특히 마드리드를 비롯한 내륙에 나타난다.
서안 해양성 기후는 갈리시아를 비롯해 비스케이 만 근처의 해안가에 나타난다. 가장 큰 도시인 빌바오를 포함한 이 지역을 대개 “녹색의 스페인”(Green Spain)이라고 부른다.
사하라 사막이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뜨거운 바람이 넘어오는데, 이 때문에 남부 지방은 상당히 건조한 기후를 띠기도 한다. 빌바오 지역을 제외한 중남부 일부에서는 반사막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사하라 사막의 바람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역사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 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1. 선사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적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아타푸에르카 지방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에서는 이미 백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민족은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이다 이들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리아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두번째로 긴 강 이름인 에브로에 남겼다. 이베리아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도 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마라가, 아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로는 카르테지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타헤나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키노에 남았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고 한다.
2.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2차 포에니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 또는 한니발 전쟁은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현 튀니지 소재)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로마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니발 전쟁으로도 부른다. 이 전쟁에서 로마 공화정은 초기에는 명장 한니발에 밀려 이탈리아 본토까지 침략당하였으나 끝내 역전에 성공하여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차지한다) 후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을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야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 서고트족과 수에비 족, 반달 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 족이 세운 서고트 왕국(415-711)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 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3. 이슬람 시대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751년 호라산 지방에서 봉기한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조(751-1258)가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대체하자 우마이야 가문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분열된 이슬람 왕국들을 통일하고 후 우마이야(후 옴미아드)시대(756-1031)를 열었고, 8대 원수 압둘 라흐만 3세 때 이르러 대외적으로 칼리프국임을 선언하였다.
※후우마이야 왕조(756-1031)
코르도바 칼리프국(아랍어: خلافة قرطبة Khilāfat Qurṭuba) 또는 서칼리프국이라고도 한다. 우마이야 왕조 멸망 후 일족인 아브드알 라흐만이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 피신하여 독립했다. 제8대 아브드 알라흐만 3세 때 칼리프를 자칭하고 왕조는 최성기에 달했다. 그리하여 후우마이야 왕조를 서칼리프국, 아바스 왕조를 동칼리프국이라고도 했다. 양국은 정치적으로는 대립해 있었지만, 문화·경제적 교류는 활발하여 이베리아 반도에는 고도의 이슬람 문화가 꽃피었다. 수도 코르도바는 서방 이슬람 문화의 중심을 이루면서 발전하였으며, 이슬람 문화를 배우기 위해 유럽 유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 결과 이슬람 문화는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안달루시아에서 서방 이슬람 문화가 번영하여 중세 서유럽의 사상이나 문예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국력이 쇠퇴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마침내 기독교 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알 안달루스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 안도라를 차지하는 중세 무슬림 국가및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지역 이름은 711년부터 1492년 사이의 여러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두루 가리키지만 영토의 경계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일정한 변화를 겪었다.※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의 일환이었다. 원주민들은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자유가 주어졌다.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10세기와 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안달루스(안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유산이 유럽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스페인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압둘 라흐만 3세의 손자인 히샴 2세 시기에 이르러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안달루시아는 1031년부터 1085년까지 분쟁과 협력을 계속하다가, 북부 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슬림들은 북부 기독교 왕국에 파리아스(Parias)라고 불리는 보호비 명분의 조공을 받치게 되었다. 1085년, 북부 국경 지대의 톨레도 왕국이 기독교권에 넘어가자 여러 군소 이슬람 왕국들은 당시 모로코 지방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던 모라비드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라비드 왕국은 이를 계기로 안달루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재차 몰아내었다. 그 후 모하드 왕국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6왕국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모하드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무슬림들(알 안달루스)은 남쪽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안달루시아 남부 지방만을 지배하다가 1492년 최종적으로 후퇴하였다.
4. 무슬림 통치의 종말과 스페인의 통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콘키스타(재정복; 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그래서 14-15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1037년부터 1479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톨레도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 왕국. 뒤에 아라곤 왕국과 통합하여 에스파냐 왕국이 되었다)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1035년에 라미로 일세가 이베리아 반도의 동북부에 세운 나라. 1479년에 카스티야 왕국과 합쳐 뒤에 에스파냐 왕국을 이루었다.), 그라나다 왕국(에스파냐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2세기 반 동안 지속되었던 이슬람교 왕국(1238~1492). 알람브라(Alhambra) 궁전의 완성 등 이슬람교 문화를 꽃피웠으나 귀족과 왕족의 내분을 겪다가 1492년에 에스파냐에 점령당하였다), 나바라 왕국(9세기 중엽에 에스파냐와 프랑스에 걸친 나바라 지방에 건국한 바스크 인의 왕국. 11세기 산초 대왕 치하 때 전성기를 이루다 1512년과 1589년에 각각 에스파냐 왕국과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등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
한편 8세기부터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회복 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 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 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는 팔렌치아 대학과 살라만카 대학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1492년은 스페인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추방하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5. 스페인의 전성기
네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
이름은 슈바벤지방 (현재의 스위스)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가문은 독일의 남부지방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여 신성 로마 제국(독일의 오토 1세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독일 제국의 정식 명칭. 962년부터 1806년까지의 시기를 이른다)에서 큰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선출에도 개입하였다. 독일왕으로는 최초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은 루돌프 1세이다. 그는 1282년두 아들 알브레히트와 루돌프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물려주었고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왕가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이후에는 부르고뉴, 그의 아들 펠리페는 에스파냐 왕위에도 결혼으로 인해 개입하게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지역 뿐 만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의 왕위에도 관여하게 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1500-1550)는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1세가 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도 편입해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계열과 에스파냐 계열의 가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무렵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에스파냐 왕, 포르투갈 왕의 왕가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로 부상했다.
1700년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기자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였고 1740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기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계승자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트링겐(로렌)의 공작, 프란츠 스테판과 결혼함으로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왕가로 바뀌게 되며, 합스부르크 정통 왕가는 단절된다.
1804년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왕가의 프란츠 2세는 스스로를 오스트리아의 황제로 칭하였고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왕가는 몰락한다.※
다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1585년)으로 여러 고비를 겪었다.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하기에 이르렀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의 남서부 지방에서부터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까지 차지하게 된다. 1580년부터는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는 물론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전체 혹은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북부 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스페인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금은이나 향신료, 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대는 분명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지나치게 강요하였으며 더구나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에 패배하였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스페인은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해적이 남발하면서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노예 매매와 침략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후에는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도 함께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1648년 완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전반의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쇠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18세기 초부터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럽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계승 전쟁 동안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생겨났고 부르봉 왕가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두 나라의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를 후일을 우려해 계승권을 포기했다. 스페인의 완전한 자주 독립은 펠리페 5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 지역을 완전히 합병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서 성취됐으며 그는 바로 귀족들의 터무니없는 특권을 폐지하였다.
통일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다시 회복기를 맞는다. 더불어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의 시작과 함께 부르봉 왕가는 행정 체계 정비에 박차를 가해 견제하는 한편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
1763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하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빌링스, 캐스퍼, 시애틀, 애리조나 주, 미니애폴리스, 덴버,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배턴루지, 댈러스 등 미시시피 강 서부에 있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6. 스페인의 쇠퇴
1793년 스페인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전쟁을 겪게 됐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스페인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장에서 패하면서 1795년에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스페인 왕실 자체가 멸족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듬해 스페인은 영국과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으로 되레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력만 허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왕은 권력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이양하는 한편 조제프가 새로운 군주로 등극한다. 원래 스페인의 왕은 나폴레옹의 맹장(猛將)인 조아생 뮈라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아생 뮈라에 대한 스페인 군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 관계로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하고 원래 나폴리의 왕이였던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왕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제프 역시 뮈라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군중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으므로 1808년 5월 2일 민족주의자 군중은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일종의 독립 운동을 하게 된다. 독립 운동의 전개와 함께 이러한 움직임은 반도 전쟁으로 촉발됐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는 한편 참전한 영국군을 몰아낸다. 그러나 이후 스페인 군의 게릴라전과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전략이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겹치면서 프랑스 세력은 1814년 완전히 스페인에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에 따라 나폴리의 왕으로 지내던 찰스 3세(나폴리의 페르디난드 7세)가 복권한다.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은 1세기가 넘도록 스페인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뺀 모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전의 부와 국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7. 스페인-미국 전쟁
스페인이 19세기 내내 식민지 지배권을 잃고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필리핀과 쿠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다. 식민지 내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 지역에서도 일어나 미국의 예견치 못한 공격으로 스페인은 패배하고 만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98세대(1898년 세대)는 전쟁을 뼈저린 “재난”("El Desastre")으로 느꼈다. 그에 따라 국가 안팎에 문제를 야기하였고 특별히 알폰소 12세가 쌓아놓은 치적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8. 혼란한 20세기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 이르러서 스페인은 잠시 평화를 누린다. 서사하라와 모로코, 적도 기니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대륙 침탈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코의 리프 공화국(Rep. of Rif)과 전쟁(1920년)을 겪으면서 시민들의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한편 스페인 군인으로서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나 1931년에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권은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한다.
1936년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전선/우파연합과 제휴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모로코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인민 전선과 국민전선 간의 스페인 내전이 촉발됐다. 3년 뒤인 1939년 스페인 내전의 시민 세력이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주도로 승리를 얻게 된다. 상당 부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멕시코 등은 스페인 내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밀리 지원을 하나, 서방 세계는 영국이 주도하던 내정 무간섭주의(Non-Intervention)에 따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인민 전선을 지원하여 참전했으나 결국 내전에서의 승리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다. 민간인 학살 범죄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나치 독일 공군에 의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1937년). 내전으로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오십만 명 정도의 인구가 자신의 모국을 떠나게 됐다. 이들의 후예가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만 30만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최초 시작이자 유럽의 시민 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추축국에 협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행적이 국제 사회로의 진출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반대를 부른 명분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스페인은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사회는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순을 보일만큼 부가 지주계층, 군벌, 로마 가톨릭 교회에 편중돼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 전선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이 창궐하였다. 인민전선에서는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 등 심각한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군사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탄압, 비밀경찰을 통한 통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당은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ONS)뿐이며, 1937년 창립 후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로마 가톨릭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코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내비치자 1949년에는 국민 운동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하였다. 2차 대전이 종결되자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고립 상태를 겪기도 했다. 1955년이 돼서야 미국이 공산세력의 남하를 우려해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에 군사 주둔을 꾀함에 따라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기적을 이루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졌으며, 특히 관광 분야의 활성화와 더불어 산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학력 수준 향상으로 인력 개발이 진척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의 마지막 군사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 스페인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현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영단으로 스페인에서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1979년 스페인 국민들은 처음으로 보통 선거에 참여하였는데, 《스페인사》(청아)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에서 길게 줄을 설 만큼 보통선거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프랑코 정권 때 수감됐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의 자유·결사·정치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1978년 스페인 헌법이 선포되면서 각 지방을 이루는 지방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진적인 양상으로 번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스크의 경우이다.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가 날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나 대다수의 군부 세력은 왕실에 충성을 다짐한다. 사실 쿠데타 조짐을 억누르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의 촉발로 국회가 군부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긴급 내각이 설립돼 국내 정치 양상에 격변기를 맞기도 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실시된 선거로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내전 이후 기구 자체가 거의 운용되지 못하다 43년 만에 다시 생겨나면서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다. 14년이나 스페인의 정권을 독점하던 좌파계열의 사회노동당은 개혁을 요구받으며 결국 1996년 우파에 참패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Euskadi Ta Askatasuna”)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59년 결성됐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게릴라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주장은 '지금껏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40년간 800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바스크 자치 정부는 자유 민족 바스크의 도를 넘은 폭력에 대해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라는 것이다.
9. 21세기
2002년 1월 1일 스페인 페세타가 유로화로 대체되면서 15개국과 함께 유로존으로 편입, 새로운 변혁기를 맞게 된다. 유로존으로의 편입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 도입 후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럽 연합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국부 팽창이 미칠 악영향과 최근 대외 적자가 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4년 3월 11일 2004년 마드리드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이 일어나 아침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ETA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2004년 3월 13일 토요일 정오, 중도 우파인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의 대변인이었던 Eduardo Zaplana는 검찰 수사가 ETA에 집중되어 있다고 발표한다. 이는 스페인 총선거 하루 전날 일이었다.
최근에는 카탈루냐 지방의 분리 독립 투쟁이 시작되고 있다.
●마드리드
마드리드(Madrid)는 스페인의 수도로, 나라의 중앙부에 있다. 인구는 약 300만 명 (부산광역시, 요코하마 시, 경상남도 수준)이다. 마드리드는 만사나레스(스페인어 : Manzanares)를 끼고 있으며 스페인의 중심에 위치한다. 마드리드가 쏟아내는 경제적 효과로 인해 주변 도시들이 크게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의 경제 중심으로 여겨진다. 또한 스페인 회사의 절대 다수가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드는 3개의 기업(Telefónica, Repsol-YPF, Endesa)도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스페인의 수도로서 정부 청사가 있으며 스페인 왕궁이 있을 뿐 아니라 스페인 정계의 중심이기도 하다.
한편 마드리드는 현대적 인프라를 갖춤과 동시에 역사적인 거리와 장소를 간직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거대한 왕궁이 그 중의 하나다. 스페인 국립극장,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명작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프라도 박물관, 스페인의 왕비인 소피아(Reina Sofía)의 이름을 따서 지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가 이에 포함된다.
인구는 2007년 기준 323만 명이었으며 도시 외곽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510만 명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드리드를 아우르는 전체 메트로폴리탄 지대의 인구는 584만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꼰수에그라 마을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에서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하고 사운 11개의 하얀 풍차가 있는 마을이다. 실제로는 부근의 캄포 데 크리프타나에 있는 10개의 풍차라고 한다.
●똘레도(톨레도)
톨레도(스페인어: Toledo, 라틴어: Toletum)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스페인 중부의 도시이다. 톨레도 주의 도시이며 카스티야라만차(스페인어: Castilla-La Mancha) 자치지역에 포함된다.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언되었으며 단연 문화적인 스페인의 유적지이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유적이 공존하는 장소이며, 스페인의 옛 수도이기도 하다. 스페인 역사상 수많은 유명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다. (2005년 기준 75,578명, 232.1 제곱킬로미터)
톨레도는 서고트왕국(415-711)의 수도였으며 코르도바 칼리파(후우마이야 황조 : 서칼리프)지배하에 톨레도는 황금 시대를 누렸다. 이 시기 동안 톨레도는 라 콘비벤시아(스페인어: La Convivencia)로 알려졌으며 세 종교의 공존처였다. 아랍인의 지배하에서는 طليطلة로 불렸다.
1085년 5월 25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의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그가 계속해서 무어인들에게 톨레도를 재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통합을 향한 최초의 구체적인 발판이 되었다.
톨레도는 철제 생산과 특별히 검 제작으로 유명하다. 여전히 시 중심부에는 칼과 철제 생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펠리페 2세가 궁정을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1561년 옮기면서 고도 톨레도는 이제껏 없었던 잠시 동안의 침체기를 겪는다.
○똘레도 대성당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 대성당(스페인어: Catedral de Santa María de Toledo)은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지방 톨레도에 있는 가톨릭 성당이다. 1226년,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어, 가톨릭 군주 시대인 1493년에 완성되었다.
○산토 토메 교회
엘 그레꼬의 명화가 소장되어있는 교회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소장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
세계 4대 미술관중의 하나로 스페인 회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미술의 걸작 등 유럽의 다양한 회화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1785년 카를로스 3세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게 자연과학박물관의 설계로 의뢰한 것이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물의 건축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중단되었다가 1819년 완성되어 왕립회화관으로 공개되었다. 왕궁 및 에스코리알에 있는 그림들을 모아 이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 2세가 추방된 뒤 1868년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다른 부속 건물들이 지어지고 수집품도 더욱 늘어났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프란체스코 데 고야, 호세 데 리베라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살라망카
이 도시는 두에로 강의 주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켈틱 부족(바떼오스)의 요새들 중 하나로, 고대 로마 시대 이전에 설립되었다. 기원전 3세기,카르타고가 로마공화국에 의해 멸망하고, 상업적 허브로 발전하게 된다. 그때 당시, 엘만티카(Helmantica), 살만티카(Salmantica)라고 불렸다.
712년, 살라망카는 무어인에 의해 포위된다. 방어적인 도시 성벽은 한 층 강화되고, 모사라베(무슬림 지배하의 기독교인들)들은 성벽 밖으로 쫓겨난다. 이 시기엔, 어쨌든, 아스트르-레오네세왕국들(the Astur-Leonese kingdoms) 간 끊임없는 싸움이 이어졌고, 이 도시는 아무도 살지않는 도시로, 북쪽의 기독교와 남쪽의 무슬림에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 11세기 후반, 기독교세력의 라몬 데 보르고아(알폰소6세-카스티야왕의 사위)에 의해 재정복된다.
살라망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1218년 알폰소 9세가 살라망카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곧, 이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문의 대학이 되었다.
나폴레옹군대의 반도 전쟁의 1812년 7월 22일의 살라망카 전투는, 프랑스군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서쪽 1/4이 파괴된 살라망카군에게는 힘이 쇠약해진 전투였다. 이 전투는 수천만의 사람이 한 장소에서 대포에 의해 짧은 시간동안 대학살된 군대 역사상의 유명한 순간이다
○조개의 집
15세기에 지어진 기사의 집으로 건물의 외벽에 가리비 모양의 돌이 박혀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지금은 도서관과 식당으로 운영된다.
○마요르 광장
도시의 중심광장을 '마요르'광장이라고 부른다. 필리페 5세가 건설한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다.
●세비야
과달키비르 강 어귀에 있는 내륙 항구도시이다. 이곳은 문화 중심지로서,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을 지배했을 때의 수도로서, 스페인의 신세계 탐험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곳이다. 1503년 무역관인 카사데콘트라타시온의 설립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들과의 해외 교역에 있어서 독점권을 부여받았고, 17세기에 들어서 교역업이 쇠퇴한 반면 문화활동이 활발해졌다. 20세기에는 항구가 확장되었으며, 공업·상업의 요지로 다시 활력을 얻게 되었다. 주요수출품은 포도주·올리브·과일·코르크·광물이며, 공업으로는 담배·무기·섬유·도자기·기계류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세비야(세빌리아)의 이발사(이탈리아어: Il barbiere di Siviglia)는 조아키노 로시니가 작곡한 2막의 희극 오페라이다. 프랑스 희곡 작가인 피에르 보마르셰의 코메디, "세비야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를 기초로 체사레 스테르비니가 대본을 작성하였다. 첫공연은 "알마비바", 또는 "쓸모없는 사전조심"라는 제목으로, 1816년 2월 20일에 로마의 테아트로 아르젠티나에서 막이 올려졌다. 다수에 의해 위대한 오페라 부파로 여겨지고, " Opera America"의 통계에 따르면, 북미에서 5번째로 많이 상연되는 작품이다.
○세비야 성당과 히랄다 탑
세비야 대성당은 스페인의 세비야에 위치해 있는 가장 큰 대성당으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관이 있다.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을 부수고 지은 것이며 1402년부터 100여 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슬람 건축과 고딕,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방 14m의 4각형 탑인 히랄다 탑은 이슬람 교도들이 12세기 말에 세웠다. 그 탑 위에 그리스도 교도들은 예배 시간을 알리는 28개의 종을 달았고, 그 위에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
탑의 이름도 풍향계(Giralda)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해서 총 98m의 탑이 1565~68년에 완성되었다. 처음 그리스도 교도들은 탑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반해 차마 부수지 못했다고 한다. 히랄다는 "돈다"라는 뜻이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스페인 세비아의 마리아 루이사 기념공원은 1893년 미리아 루이사 왕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29년 아메리카 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스페인 광장, 고고학 박물관등 화려한 건물 등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많다.공원가는 길에 좁은 골목을 지나니 이층집이 "세빌리아(세비야)의 이발사" 오페라의 무대가 된 집이 있고 이발사 피가로가 다니던 골목길이다. 부근에는 돈 후안이 머물던 호텔도 있다.
※돈 후안은 민간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스페인 극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가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가〉에서 문학적 주인공으로 처음 선을 보였다. 희곡·소설·시 등에서 악당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통해 꾸준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돈 후안은 귀족가문의 한 소녀를 유혹하다가 딸을 위해 복수하려는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다. 나중에 소녀의 아버지 묘에 있는 석상을 보고 그 석상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데, 돌로 된 유령은 돈 후안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식사 시간에 도착한다.
돈 후안은 활력, 도도한 자세, 유머 감각 등을 통해 극적 가치를 고조시킨다. 19세기 돈 후안의 이야기가 각국의 언어로 번안되었다.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할로윈 전야에는 〈돈 후안 테노리오〉가 공연된다.
○황금의 탑
1220년 이곳을 지배하던 무어인이 원래 두 개의 탑이 있어 쇠사슬로 걸어 외적을 방어했다고 하며 이곳에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는 탑으로 탑 끝부분에 황금 장식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타리파
타리파(Tarif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인 카디스 주의 도시로, 인구는 17,793명(2009년 기준), 면적은 419.67㎢이다.
●지브롤타 해협
스페인 남단과 아프리카 북서단 사이에 있으며 길이가 58㎞이다. 마로키 곶과 키레스 곶 사이에서는 너비가 13㎞까지 좁아진다.
이 해협에는 동풍이나 서풍이 분다. 북쪽으로부터 지중해 서부 해역으로 확장하는 찬 기단이 종종 낮고 빠른 속도의 동풍이 되어 지나간다. 해협을 지나가는 물의 흐름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다. 시속 2kn의 표층해류가 동풍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해협의 중심부를 통해 동쪽으로 흐른다. 표층의 운동은 수심 120m 이하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무겁고 차며 염기가 많은 해류를 압도한다. 이로 인해 지중해가 점점 수량이 줄어드는 염호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전략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남부 유럽, 북부 아프리카, 아시아 서부지역의 선박 항로로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7일째 다시 스페인으로
○미하스 마을
안달루시아 지방 하얀 마을이다.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 서쪽 산기슭 마을. 붉은 기와지붕과 햇빛을 반사시키기 위한 하얀 회벽. 예쁜 격자무늬 창틀과 아기자기한 골목.
●말라가
피카소가 태어난 곳이다. 말라가(스페인어: Málaga)는 스페인 남부의 항구 도시로 지중해를 마주하고 있다. 2007년 기준 시의 인구는 561,250명이다. 말라가 주의 주도이며 위성 도시의 인구를 합치면 60만명에 달하는데 스페인의 대도시로는 그 규모가 6위에 해당한다. 말라가는 과달메디나 강의 왼편 둑에 자리하는데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과달오르세 강은 말라가의 서쪽을 지나 지중해로 흘러들어간다.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므로 온화하고 살기 좋은 기후가 나타난다. 대개 평균 기온은 섭씨 19도이다. 하늘이 파랗고 넓은 항만을 끼고 있어 흔히 나폴리에 비교되기도 한다. 말라가의 주시가지는 항구 안쪽에 자리한다. 중심부 너머로는 농작지와 관광지로 구분된다.
●론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인 말라가 주의 도시이다.
○누에보 다리
다리 건축은 1735년 펠리페 5세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8개월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무너져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건축가는 José Martin de Aldehuela이였고, 책임자는 Juan Antonio Díaz Machuca였다.[6] Juan Antonio Díaz Machuca는 다리 건축 시에 필요한 거대한 돌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획기적인 기계들을 고안해냈다. 다리의 높이는 98m이며,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다.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9]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 이 방은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투우장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다.
●코르도바
코르도바 시 (스페인어: Córdoba, 아랍어: قرطبة)는 스페인의 시로서 코르도바 주의 주도이다.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있으며 고대 로마 시대 때부터 도시가 형성됐다. 2007년 기준 인구는 323,600명이다. 오늘날 코르도바는 대도시는 아니지만 오래된 유적이 산재하고 있는 문화의 산실이다. 오래된 구도심에는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나 코르도바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때에 수도의 구실을 했으므로 이슬람과 스페인 후대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10세기까지만 해도 코르도바의 인구가 5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유럽과 세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인구면에서 뒤지지 않는 도시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세의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그 유려함으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히스파니아 베티카 속주의 주도였다. 지금도 로마 신전과 다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후에는 서고트 왕국에 지배하에 들어가고, 6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된 적도 있다.
711년,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다. 756년에 성립된 후우마이야 왕조(서칼리프 : 756-1031)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는데, 그 중심지는 메스키타(스페인어: Mezquita, 스페인어 일반명사로 모스크를 의미하나, 고유명사로서는 코르도바의 모스크를 지칭함)였다. 10세기에 아브드 아르라흐만 3세(Abd ar-Rahman II)와 알하캄 2세(Al-Hakam II)의 치세 때가 전성기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40만에서 100만 권에 이른다는 장서를 자랑하는 대도서관이 세워져 수많은 학자들이 활약하여, 톨레도와 함께 서방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손꼽혔다.
크리스트교 세력에 의한 레콩키스타가 전개됨에 따라, 1236년 6월 29일,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에게 정복당했다. 15세기 말,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자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소되어, 메스키타도 가톨릭교회로 개조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와 루카누스, 중세 시대의 철학자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와 모세 벤 마이몬(마이모니데스)등이 코르도바 출신이다.
○코르도바 대성당
남북 180M, 동서 130M의 거대한 이슬람 사원(메스키타). 르네상스양식을 중앙에 지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다.
○유대인 거리등 구시가지 관광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꽃의 거리이다. 1315년에 지어진 시나고그 교회가 있다. 메스키타에서 과달키비르강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포트르 광장이 나오는데 세르반테스가 묵었다는 옛날 여관 포트르가 있다. 토레스 미술관, 코르도바 미술관, 고고학 박물관등이 있다.
●그라나다
그라나다(스페인어: Granad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그라나다 주의 주도이다.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마지막 근거지였으나, 1492년 이사벨 여왕에 의해 결국 함락되었으며, 이로서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다.
○알함브라 궁전(나자리에 궁전)
이슬람 지배시절 아랍양식으로 지어진 궁전
○헤메라리리페 정원
그라나다왕의 여름별궁
○아랍인 마을이었던 알바이신 지역
●발렌시아
발렌시아(스페인어: Valencia, 카탈루냐어: València)는 스페인 발렌시아 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81만 명(2008)으로 제지(製紙)·담배·식료품 공업의 중심지이며 마요르카 섬과 함께 보양·관광지로 되어 있다.
중세 스페인의 전설적 인물 엘 시드가 활약한 곳이다.
○발렌시아 대성당
○시청사및 시청광장
●몬세라트
몬세라트(카탈루냐어: Montserrat, 스페인어: Montserrat)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산이다. 아서 왕의 성배 전설에 등장하는 베네딕트의 산타 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다. 기독교 성지로 되어 있다.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Barcelona)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부터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과 접경지역을 아우르는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인구는 1,602,386 명(2014년), 면적은 100.4 km²이다. 도시의 명칭은 고대 페니키아어인 '바르케노(Barkeno)'에서 유래하였다(또는 B.C. 3세기경 스페인 식민지를 개척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가문의 성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1992년 하계 올림픽이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와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은 작은 몬테타베르 언덕 위에 서 있는데, 로마 시대의 성벽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 1289년에 시작해 15세기말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는 6세기에 지은 바실리카가 있으며 이밖에도 산타마리아델마르 교회를 비롯한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왕궁과 주교관은 바르셀로나 시와 아라곤 왕국의 기록보관소로 사용된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내전으로 인하여 대대적으로 파괴되었지만, 다른 지역과 비교적으로 산업화가 잘 되어 스페인 제 2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 가족교회(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으로 1884년에 착공한 이 건물은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공사가 진행중이며, 완성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주제로 한 옥수수 모양의 탑4개가 유명하다. 4개의 탑(높이 107m)은 그 전체 곡선도 볼 만하지만 그리스도의 강림을 표현해 놓은 생동감 넘치는 조각들이 더욱 눈길을 끈다.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1852년-1926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건축가이다. 기록된 그의 정식 이름은‘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이다. 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이다. 아버지쪽 가문은 프랑스계의 가우디 집안이고, 어머니쪽이 코르넷 가문이다. 안토니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74세를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단명한 것은 아니나, 젊어서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쓸쓸한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19세기말 카탈루냐 지역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 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구엘공원
구엘 공원(카탈루냐어: Park Güell, 스페인어: Parque Güell)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공원이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 중 하나이다. 카르멜 언덕 위에 있으며, 공용 공원과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가우디
○몬주익 언덕과 올림픽 경기장
1992년 하계 올림픽(영어: 1992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V Olympiad, 스페인어: Juegos Olímpicos de Barcelona 1992)은 1992년 7월 25일부터 8월 9일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제25회 하계 올림픽이다. 바르셀로나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 의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으로 암스테르담, 베오그라드, 버밍엄, 브리즈번, 파리 등과의 유치전 끝에 1986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총회에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은 금 12개 은 5개 동 12개로 총 29개의 메달을 따서 7위였다.
몬주익 언덕은 해발 213M로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다. 이곳에 마라톤 우승자 황영조 기념비가 있다.
○람블라스 거리
번화가. 람블라 거리(카탈루냐어: La Rambla, 스페인어: La Rambla) 또는 람블라스 거리(카탈루냐어: Les Rambles, 스페인어: Las Ramblas)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거리로, 구 시가지에 위치하며 시내 중심에서 임해 지역까지 이어지며 길이 1.2km의 가로수길이다.
○카탈루나 미술관
까탈루냐 미술관은 에스파냐 광장에서 약 1.8Km를 걸으면 갈 수 있다.
국립 까탈루냐 미술관은 1929년 개최된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포르투갈(Portugal)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경안에 포함된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해왔다. 갈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 같은 켈트인들은 후에 로마 공화정에 통합되었고, 이후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부터는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도의 헤콩키스타 도중에 초기엔 갈리시아 왕국, 후엔 레온 왕국의 일부로 포르투칼레 백작령(포르투갈어: Condado de Portucale 혹은 Condado Portucalense)이 성립된다. 1139년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로 거듭난다.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대항해 시대 탐험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서양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포르투갈 제국은 사상 첫 세계 제국이었고, 1415년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지 제국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제적 중요성은 19세기, 특히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왕가는 추방되어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권위주의 정권인 이스타두 노부가 형성되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종식되어 마지막 해외 주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등이 독립하게 된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비교적 HDI와 1인당 GDP가 낮지만 선진국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인간 개발 지수 역시 "매우 높음" 수준에 속한다. 삶의 질은 19위로, 세계적으로도 최상 수준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가장 세계화되고 평화로운 나라에 속한다. 포르투갈은 국제 연합 (UN), 유로존, 쉥겐 협정을 포함한 유럽 연합 (EU),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CPLP)의 창립 회원국이며,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공용어 : 포르투갈어 정부 형태 : 단일 국가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대통령 : 아니발 카바쿠 실바 총리 : 페드루 파수스 코엘류
건국 : 868년 • 1차독립 : 카스티야로부터 1140년
• 2차독립 : 스페인으로부터 1640년
• 공화정 : 1910년2
면적 : 92,391km² (110 위) 인구 : 10,477,800명 (85위)
1. 자연
1. 지리
포르투갈의 대륙부는 유럽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오직 스페인 한 국가와 국경을 접한다. 대륙부의 국토는 가장 중요한 하천인 테주 강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쪽은 내륙으로 이 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한 사이사이 낀 고원을 가진 산악지역의 풍경을 보인다. 남쪽으로는 알가르브 지방까지 드문드문 산맥이 나타나는 평원이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다른 주요 하천으로는 테주 강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발원하는 도루 강, 미뉴 강, 과디아나 강 등이 있다. 이들 강 사이사이로 강줄기가 포르투갈 영토 내에서만 흐르는 강이 있다. 이러한 강으로는 보가 강, 사두 강 등이 있으며, 더불어 이러한 포르투갈 내에서만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몬데구 강은 포르투갈 대륙부에서 가장 높고, 포르투갈 내에서는 아소르스 제도의 피쿠 산 다음으로 높은 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해발 1,993m)에서 발원한다..
아소르스 제도는 대서양중앙해령의 열곡에 위치하며, 1563년 상미겔 섬 분화와 1957년의 파이알 섬 서쪽 면적이 늘어난 카펠리뉴스 화산 등 몇몇 섬에서는 최근에도 화산활동을 보여줬다. 동조앙드카스트루 퇴(堆) (포르투갈어: Banco D. João de Castro)는 테르세이라 섬과 상미겔 섬 사이 해저 14m 깊이에 위치한 거대 해저화산이다. 1720년 분화를 시작하면서 섬 하나가 생성되어 수 년 동안 수면 위에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섬이 머지 않은 미래에 솟아 오를 가능성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곳인 피쿠 섬의 피쿠 산은 해발 2351m에 달하는 화산이다.
대서양 중앙해령의 열곡 지대에 위치한 아소르스 제도와 달리, 마데이라는 아프리카 판 안쪽에 위치하며 지각판 이동이 아닌 열점 활동으로 생성되었다. 이러한 안정적이고, 지각판 내부에 위치한 까닭에 포르투갈에서 지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다. 증거가 있는 마지막 화산 분출은 약 6000년 전 마데이라 섬에서 일어났으며, 현재는 도로 터널 또는 본섬 내륙의 물 저장 갱도 굴착 과정에서 배출된 화산가스나 뜨거운 탄산수 같은 간접적 형태의 화산활동을 보여주고 있다[47]. 마데이라에서 가장 높은 곳은 후이부 봉으로 해발 1862미터로[48], 이는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이다.[49]
포르투갈은 본토 1230 km, 아소르스 667 km, 데제르타스 제도, 셀바젱스 제도, 포르투산투 섬을 포함한 마데이라가 250km로, 긴 해안을 갖는다. 이러한 해안은 다양한 절벽과 모래사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형성하고 있다. 암석으로부터 생성된 본토의 해안과 달리, 포르투산투 섬에는 조개껍질과 같은 유기물로 만들어진 9km에 달하는 사구가 있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포르투갈 해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아베이루 가까이 위치한 보가 강 하구의 아베이루 히아(포르투갈어: ria de Aveiro)로, 길이 45 km, 최대 폭 11km에 달하며, 어류와 해양 조류가 풍부하다. 4개의 수로 사이에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4개의 강이 대서양으로 접어든다.[50] 또한 사취가 형성되어 석호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포르투갈의 해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약 1,683,000 km²에 달하는 배타적 경제 수역을 갖는다.
2. 기후
포르투갈은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남쪽은 "Csa", 북쪽은 "Csb"로 분류된다.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갖는 나라 중 하나로, 포르투갈 본토의 연 평균 온도는 북부 내륙 산악지역이 13 °C, 남부 과디아나 강 유역이 18 °C 정도의 다양성을 보인다.] 북부 지방 고지대와 최북단 해안 지방, 중부 지방에서의 여름은 온화한 편이다. 가을과 겨울은 보통 바람이 많이 불며, 비가 많이 내리고 선선하다. 중부와 북부 지방의 주에서 가장 추우며, 이들 현 가운데 일부에서는 가장 추운 기간 중에는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 남부 지방의 도시에서는 온도가 0 °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며, 대개의 경우 5 °C 정도에서 머문다.
보통 봄과 여름에 낀 달에는 날씨가 맑다. 온도는 건조한 7, 8 월에 가장 높은데, 심한 날의 경우 포르투갈 대부분 지역에서 간간히 최대온도가 40 °C를 넘으며,[54] 알렌테주 지방 내륙에서는 이러한 일이 더욱 빈번히 발생한다. 여름에는 최근 기상 연구 보고서 기록의 도루 강 계곡의 코아 계곡 선사유적 공원의 예와 같이 50 °C까지 올라갈 수 있다. 테주 강과 도루 강 유역과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연 평균 기온이 20 °C에 달할 수 있기도 하다.
최고 기온은 상조앙다베스케이라의 히오다드스에서 기록된 50.5 °C 다. 총 연평균 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방에서 3,000mm를 조금 넘고, 알렌테주 지방 남부 지역에서 600mm에 못 미치는 등의 편차를 보여준다.[52] 일조 시간은 연 2500~3200 시간으로, 평균적으로 겨울엔 일일 4~6시간, 여름엔 일일 10~12시간 정도이며, 남동부 지역에서 최대, 북동부 지역에서 최소 값을 보인다.
눈은 북부 지방의 구아르다 현, 브라간사 현, 빌라헤알 현, 비제우 현 등 4개현에서는 주기적으로 내리며, 남쪽으로 갈수록 빈도는 줄어들며, 알가르브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를 찾아 볼 수 없다. 겨울에 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 세하두제레스 산맥, 세하드몬테지뉴 산맥 같은 제한된 곳에서 온도가 영하 10 °C까지 내려가고, 자주 눈이 내리며, 이들 장소에서는 10월부터 5월 사이에도 눈이 오기도 한다.
2. 역사
1. 초기의 이주민족들
포르투갈의 선사시대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와 함께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흔적은 약 2만 4,5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자취"가 공존하는 크로마뇽인으로, 이는 두 종 사이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또한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이 드러나는 가장 최근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해당 종의 마지막 개체일 것으로 추정된다. 약 서기 5500년 전에는 중석기 문화가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에는 갈라이키족, 루시타니족, 코니족과 같은 부족들의 기원인 선켈트족과 켈트족이 점령하였고,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체류하였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45년 이후 처음 이 지역을 루시타니아로써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고, 비리아투를 우두머리로 한 저항을 진압한 뒤, 도루 강 북쪽의 갈라이키아(라틴어: Gallaecia)를 세웠다. 로마는 포르투갈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라틴어는 포르투갈어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서기 406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로 반달족, 부리족과 같은 게르만족이 침공하였다. 이 중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은 이 지역에 첫 기독교 왕국을 세운다. 711년 무어인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 알안달루스를 세웠다. 기독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으로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운다.
2. 왕국의 성립 및 공고화
포르투갈 독립 훨씬 이전부터, 갈리시아 왕국과 포르투칼레를 통치하던 귀족들에 의해, 독립에 준하는 자치권 확대를 꾀한 시도들이 여러 번 있어왔다. 레온 왕국의 지배에 대한 지방 귀족들의 독립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당시 "포르투칼레 땅"을 포함하고 있던 갈리시아 백작령의 통치권을 부르고뉴의 하이문두(포르투갈어: Raimundo de Borgonha) 백작에게 양도하였다. 무어인에 대한 하이문두의 여러 차례의 군사적 실패 이후, 1096년 알폰소 6세는 하이문두의 사촌 동 엔히크 백작에게 갈리시아 백작령 남쪽 땅의 통치권을 양도하며, 포르투칼레 백작령이 세워졌다. 동 엔히크 백작의 통치 아래, 포르투칼레 백작령은 무어인들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군사 정책은 물론, 가장 활발한 독립정책을 펼쳤다. 동 엔히크 백작이 죽은 뒤, 아들 동 아폰수 엔히크스가 권좌에 올랐고, 포르투갈은 산타렝, 리스본, 팔멜라, 에보라 등 주요 거점을 무어인들로부터 정복하는 한편, 1143년 사모라 조약을 통해 독립에 서명하였다.
1249년 포르투갈의 헤콩키스타가 끝났지만, 신생 왕국의 독립은 이웃 카스티야로부터 여러 차례 위협받았다. 첫 위기는 페르난두 1세의 왕위계승 문제로, 당시엔 알주바호타 전투의 승리로 위기를 넘기며 아비스 왕가가 성립되었다.
3. 지리적 발견과 필리피나 왕가
15세기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로 알려진 해외 원정 및 확장을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항해왕자' 엔히크와 동 주앙 2세가 지도자로써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포르투갈은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였고, 1434년 질 이아네스가 바다의 끝으로 여겨지던 보자도르 곶을 넘어가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였고,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을 지나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였다. 뒤이어 '행운왕' 마누엘 1세 통치기간에는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동양으로의 항로와 육지 등 대다수를 발견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정복 덕분에 16세기 전반에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확장하는데 전력을 쏟는 한편, 1530년 동 주앙 3세가 브라질의 식민화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은 1480년대부터 거의 100년 동안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578년 모로코 정벌에 나선 젊은 왕 동 세바스티앙과 상당수 포르투갈 귀족이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대패해 사망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뒤를 이어 즉위한 추기경왕 엔히크도 2년 뒤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였고, 1580년 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는 동군 연합(同君聯合)이 형성돼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필리피나 왕가"의 첫 왕인 "필리프 1세"로 즉위하였다. 독립된 외교권을 상실하고 스페인과 묶인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인도양 독점무역이 깨지며 큰 퇴보를 겪게 된다.
이러한 스페인의 지배는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종식시켰고, 동 주앙 4세가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4. 왕정복고와 절대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독립운동 쿠데타 이후, 곧 스페인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전쟁은 1668년까지 가서야 리스본 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 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며 끝나게 된다.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브라질에서 금과 귀금속 등 광물이 발견되며 광산개발은 호황을 맞이했고, 이를 통해 동 주앙 5세 시기 포르투갈의 궁정은 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궁정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는 주로 수입품을 지불하는데 사용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왕국 내에 직물 산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직물을 잉글랜드로부터 수입을 하였고, 이로 인해 대부분이 잉글랜드로 빠져나가게 된다. 포르투갈의 대외 무역은 와인 산업에 기반하였고, 동 주제 통치기인 1750년에서 1777년 사이 재상을 지낸 폼발 후작은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중상주의적 개혁 등의 노력을 통해 왕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리스본과 알가르브를 폐허로 만든 1755년 11월 1일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동맹을 유지하고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길 거절한 이유로 인해 1807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는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해 리우데자네이루로 수도를 옮긴다. 이러한 상황은 1816년부터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왕이 된 동 주앙 6세가 1821년 첫 헌법을 공포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돌아갈 때 까지 지속되었다. 이듬해, 그의 아들인 동 페드루 4세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1세로 즉위한다.
19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내전과 9월 혁명, 마리아다폰트 혁명, 파툴레이아 전쟁 등 반복되는 반란과 무력 봉기와 같은 거대한 사회정치적 혼란기를 겪었으며, 1852년 헌장에 추가 법령이 더해지면서 겨우 정치적 안정과 재생 기간 중 주를 이룬 폰트스 페레이라 드 멜루를 앞세운 진흥 정책의 시작이 가능해졌다. 19세기 말엽,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욕은 영국과 충돌했고, 이는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요구에 대한 굴복과 점점 더 흔해져가는 경제 문제와 논란으로 인해 왕실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갔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8년 2월 1일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 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된다. 동 마누엘 2세가 이끈 왕실은 2년을 더 유지하지만, 1910년 10월 5일 공화국이 수립되며 폐지된다.
5. 공화국, 이스타두 노부와 민주주의
1910년 10월 5일 공화국이 수립된 지 머지않아, 젊은 왕 동 마누엘 2세는 잉글랜드로 떠나게 된다. 이 후 수년간 노동자 투쟁, 소요사태 ,봉기, 정치인 암살, 재정위기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이러한 문제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면서 더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군대가 권력을 쥐게된다. 군사 정권은 1928년 재무부 장관으로 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임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라자르는 1932년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된다.
살라자르는 재정을 회복하는 동시에, 단일 정당과 국영 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 이스타두 노부 (신국가체제)를 수립하였고, 최소 1945년까지 파시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후 1968년 병으로 인해 권력에서 멀어지며,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살라자르의 뒤를 이었다.
살라자르 정권의 해외 주 탈식민지화에 대한 거부는 식민지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고, 1961년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시작으로 1963년 기니비사우, 1964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 등 몇몇 육군 원로 장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정책을 유지하는데 확고한 듯 하였다. 해외 전쟁에서 군사적 해결책이 유지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자신의 책 "포르투갈과 미래"(포르투갈어: Portugal e o Futuro)로 인해 스피놀라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는 육군 내 청년 장교들의 늘어나던 불만을 가중시켰고, 이들은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어 혁명 진행 과정(포르투갈어: 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이라 불리는 여러 사회정치적 세력간 매우 열띤 정치적 대립기가 나타났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공산주의 방향의 새로운 독재기로 빠져들려 했던, 뜨거운 여름(포르투갈어: Verão Quente)이라 불린 1975년 여름에 극에 달했다. 이 기간 포르투갈은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한다.
1975년 11월 25일 주로 리스본 군사지역 내 낙하산부대원과 헌병이 주축이 된 여러 급진 좌파 군부세력은 쿠데타 시도를 하지만, 이들은 뚜렷한 지도부를 갖지 못했다. 9인방 (포르투갈어: Grupo dos Nove)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가 지휘하는 군사계획을 실행에 옮겨 대응했다. 이들이 승리하면서 다음 해 민주주의가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하말류 이아느스 본인은 다음 해 보통 선거로 뽑힌 첫 포르투갈 대통령이 된다. 또한 민주주의 헌법을 승인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아소르스, 마데이라 지방자치정부를 수립한다.
1940년대와 60년대 사이 포르투갈은 194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1960년 유럽 자유 무역 연합 (EFTA), 1961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의 공동 창립회원국이었으며, 이 중 EFTA는 유럽 경제 공동체 (EEC) 가입을 위해 1986년 탈퇴한다. 1999년 포르투갈은 유로존에 가입하며, 같은 해 마카우의 주권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양한다. 유럽 연합 가입 이후, 포르투갈은 총 3번의 유럽 이사회를 개최하였다. 가장 최근인 2007년 이사회에서는 리스본 조약 서명식을 거행하였다.
●파티마 마을
세계문화유산지로 지정되었다. 레이리아 남동쪽 29㎞ 지점의 코바다이리아 고원에 있다. 12세기에 무어 공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17년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큰 성모 마리아 성지가 되어 해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1917년 5월 13일과 그 이후 10월까지 매달 젊은 농부의 자녀들인 루시아 두스 산투스와 사촌 프란시스쿠, 자신타 마르투 등 세 어린이가 자신을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인을 보았다고 했다. 10월 13일 파티마에 운집한 군중들(7만 명 정도로 추산)은 성모 마리아가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직후 일어난 '기적적인 태양의 현상'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리아의 주교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다. 같은 해에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을 주었다. 순례자들의 봉헌은 로사리오의 기도를 자주 외우고 은총이 가득한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를 의심 없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가 건축되기 시작했고,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교회당의 양측면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이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다. 기적적인 치유사건이 많이 보고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1967년 5월 13일 첫 출현의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가 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운집했다. 인구:마을 525(1981), 마을과 인근 교회구 7,298(1981).
○예배당
성모마리아의 기적을 기념하는 예배당으로 파티마 성당 광장에 있다.
○파티마 대성당
네오클래식 양식의 성당이다.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에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파티마의 기적 후 레이리아의 주교가 신빙성을 인정하였고 바티칸의 명으로 성지로 정하였다.
1928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실리카식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여 1953년 10월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로사리오 성당이라고도 하는데, 15개의 제단과 1952년 설치된 대형 오르간이 있다.
아일랜드 성체 안치기(聖體安置器)는 아일랜드의 주요 종교작품으로 1949년 기증되었다. 건물 앞 거대한 광장에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The Chapel of Apparitions)과 64m 높이의 탑이 있다. 성모마리아가 발현한 장소가 대리석 기둥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성당 묘소에 파티마의 기적을 목격했던 당시 세 사람의 무덤이 있으며 파티마의 기적에 관한 내용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있다. 1982년 5월 파티마 기적을 연구하고 되새기기 위한 바오로 6세 목회센터를 세웠고 2007년 세계에서 4번째 큰 성삼위성당을 지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순례 여행지로 특히 성모 발현일인 매년 5월 13일과 10월 13일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까보다로까
유럽 최서단의 땅끝 마을로 해안 절벽 위에서 드넓은 대서양의 절경을 감상한다.
●리스본
리스본(영어: Lisbon 리즈번[*], 포르투갈어: Lisboa 리스보아)은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리스보아 현의 중심도시이자,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도시다.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인구는 564,477명 (2007년)이다. 리스본의 경제적인 산출, 삶의 표준, 시장 크기, 그랑드 리스보아 (Grande Lisboa) 소구역에 기인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두 번 째로 가장 중요한 재정적 경제적 중심이다. 유럽 연합의 유럽 마약 감시 센터 (EMCDDA)와 유럽 해양 환경청 (EMSA),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본부가 리스본에 있다. 시 공휴일은 파도바의 안토니오의 날인 6월 13일이다
○로시우 광장
호시우 광장(포르투갈어: Praça do Rossio)은 포르투갈 리스본의 광장이다. 페드루 4세 광장(포르투갈어: Praça de D. Pedro IV)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간단히 호시우라고도 한다. 광장 중심에는 페드루 4세의 동상이 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대항해시대의 번영을 표현한 대표적 건물로 세계문화유산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포르투갈어: Mosteiro dos Jerónimos 모스테이루 두스 제로니무스)은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에 있는 수도원으로, 인근에 위치한 벨렝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부근에 엔히크 왕자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발견기념비가 있다.
○밸렘 탑 : 수도원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모로코[Kingdom of Morocco]
위치 : 아프리카 북서단 (북위 23-36도, 서경 13-17도)
면적 : 710,850㎢(서부사하라지역 252,120㎢ 포함 / 한반도의 3.2배)
기후 : 온대기후(북부 지중해성기후, 중부 대륙성기후, 남부 사막기후)
언어 : 공용어(아랍어, 베르베르어), 상용어(프랑스어)
인구 : 3,264만명(2013년), 2014년 인구총조사 실시 예정
수도 : 라바트(Raba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2012년)
국가 형태 : 입헌군주국
정부 형태 : 입헌군주제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98.7%, 기독교 1.1%, 유태교 0.2%(6000명)
교육 : 문자 해독률 52.3%(2010년 15세 이상 인구 기준): 남성 65.7%, 여 성 39.6% · 의무교육 기간 9년
국내총생산(GDP) : 985억 달러(2013년 9월기준)
1인당 GDP : 5,400불(2012년)
화폐 단위 : 디람(Dirham/DH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
독립기념일 : 1956.03.02 (프랑스로부터 독립)
독립기념일은 독립선언일인 1955.11.18일로 지정
주요 자원 : 인광석(세계 3위 생산국), 철, 망간, 구리
국경일 : 7월 30일, 현재 국왕 시디 무함마드 6세 즉위일
모로코의 국가 정식 명칭은 모로코 왕국(Kingdom of Morocco)이다. 수도는 라바트(Rabat)이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의 북서부 끝, 지중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스페인(Spain), 동쪽으로 알제리, 남쪽으로 모리타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북위 23-36도, 서경 13-17도에 놓여 있다. 면적은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 지역의 252,120㎢를 제외하면 446,550㎢이다. 기후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 기후 아래 놓인다.
모로코 국민은 아랍-베르베르인 99.1%, 유럽인과 흑인 등 0.7%, 유대인 0.2%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3,264만 명이며 인구 증가율은 1980년대 2.5%에서 2001년 1.6%대, 2010년 1.1%로 크게 감소하였다. 평균수명은 75.47세이다. 2008년 기준으로 인구 분포 비율은 도시가 56%, 농촌이 44%이며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도시화 비율은 1.8%이다. 연령별로는 0세~14세 인구가 28.7%, 15세~64세 인구가 65.4%, 65세 이상인 인구가 6%이다. 평균 자녀 수는 2010년 성인 여성 1인 기준으로 2.23명이다(2010년 CIA3) World Factbook 참고).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4)에 따르면 주요 도시별 인구 분포는 카사블랑카(Casablanca) 390만 명, 라바트·살레(Rabat·Sale) 155만 명, 페스(Fes) 104만 명, 마라케시(Marrakech) 90만 3천 명, 탕헤르(Tánger) 70만 4천 명, 케니트라(Kenitra) 57만 3천 명이다.
모로코의 공용어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고 프랑스어가 상용어이자 제1 외국어이다. 모로코 북부 지중해 연안과 남부 해안 지방에서는 스페인어가 통용어로 쓰인다. 표준 아랍어는 신문, 방송, 출판물 등 문어체에서만 사용하며 구어로는 모로코 방언을 주로 사용한다. 표준 아랍어에 대한 문맹률은 65%에 이른다.
모로코 국민의 문자 해독률은 2010년 15세 이상 인구 기준으로 52.3%이며 그중 남성이 65.7%, 여성이 39.6%이다. 의무교육 기간은 9년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인구의 98.7 %, 기독교가 1.1%, 유대교가 0.2%이다.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국왕이 종교 수반을 겸한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나 모로코인에 대해서는 이슬람교 외의 종교 포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는 알라(Allah), 조국, 국왕을 국시로 삼으며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다. 단, 국왕은 3권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의회는 상·하 양원제이다. 2012년 현재 국가원수는 시디 무함마드 6세(Sidi Mohamed VI) 국왕이고 총리는 압델릴라 벤키라네(Abdelillah Benkirane)이다.
국내총생산(GDP)5)은 2013년 9월 기준으로 985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구매력 평가(PPP)6) 기준 5,400불이며 경제성장률은 3.2%이다. 회계연도는 1월 1일부터 그해 12월 31일까지이다. 모로코의 주요 자원은 세계 제3위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인광석과 철, 망간, 구리 등이다. 화폐단위는 디람(Dirham/DH - 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이다. 2010년 기준, 환율은 1미국달러(USD)가 약 8.39모로코디르함(MAD)이다. 도량형은 미터법을 채택하고 있다.
■모로코의 자연
1. 모로코의 지리
모로코는 서사하라(西Sahara) 지역 252,120㎢를 포함하면 면적이 710,850㎢로 한반도의 약 3.2배 규모이다.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서경 5° 00", 북위 32° 00"에 놓여 있다.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끝에 위치하며 알제리, 모리타니, 스페인(Spain)1)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닿아 있으며 해안선은 비교적 굴곡이 적은 편이다.
지정학적으로 북동쪽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남서쪽의 대서양 연안에까지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하라사막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Rif) 산맥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아틀라스(Atlas) 산맥에는 높이 4,165m의 투브칼 산(Jebal 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2. 모로코의 기후
모로코는 전 국토가 북위 23°∼36°에 있어 온대기후에 속하는데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등으로 지역별로 특성이 있다. 강우량을 기준으로 크게 우기와 건기로 구분된다. 우기는 11월~4월로 날씨가 따뜻하고 습도가 높으며 평균기온이 15℃이다. 건기는 5월~10월로 덥고 건조하며 평균기온이 28℃이다. 해안 지역의 기온은 겨울에 8℃~21℃이고 여름에는 17℃~27℃이다. 반면 내륙 지역은 겨울에 4℃~20℃이고 여름에는 17℃~38℃로 지역 차와 일교차가 매우 큰 편이다. 모로코에서 가장 더운 달은 8월이고 가장 건조한 달은 7월로 평균 강우량이 1mm 내외이다. 반면 가장 추운 달은 1월이며 강우량이 가장 많은 달은 12월로 평균 강우량이 약 86mm 정도이다. 리프(Rif) 산맥과 아틀라스(Atlas) 산맥의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로 이를 이용해 관개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3. 모로코의 자연재해
모로코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불안정한 대역(帶域)에 속해 있어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1960년 지진으로 남부 도시 아가디르(Agadir)가 초토화되었고 2004년 2월 25일에는 북부 도시 알 호세이마(Al Hoceima) 지역의 지진으로 약 6백 명이 사망하였다.
■모로코의 역사
1. 모로코의 선사시대
약 100만 년 전에 당시 비옥한 지대였던 모로코의 사하라(Sahara)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사하라 지역에 사막화가 시작되기 전인 기원전 1만 5000년~5000년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집단 주거가 시작되었다.
2. 모로코의 고대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 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들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ánger), 라바트(Rabat)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아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다.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아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Spain)1)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Ceuta) 등 모로코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 황제 시기에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3. 모로코의 이슬람교 도래
이슬람교도들은 680년 세우타(Ceuta)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711년경에 무어인은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4.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8세기~11세기)
이드리스(Idriss) 왕조는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이다. 787년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5. 모로코의 모라비드 왕조(1062년~1145년)
모로코의 모라비드 왕조(Al Moravids)는 베르베르족이 세운 왕조이다. 이슬람 수니파가 세운 이드리스(Idriss)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 지방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기독교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Valencia) 등 스페인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6. 모로코의 모하드 왕조(1145년~1248년)
모로코의 모하드 왕조(Al Mohads)는 아틀라스(Atlas) 지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Al Moravids)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톨로사(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기독교도에게 잃었다.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이던 그라나다는 스페인에 의해 무혈 함락되었다.
7. 모로코의메레니드 왕조와 와타시드 왕조(1248년~1554년)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족은 모하드 왕조 쇠퇴에 따른 혼란기에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Merenids)를 수립하였다. 1465년 왓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시드(Wattasids)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한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Tánger), 아가디르(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8. 모로코의 사아드 왕조와 내전(1554년~1665년)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사아드 왕조(Saadians)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 이래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이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하여 왕국은 마라케시(Marrakech), 메크네스(Meknes), 라바트(Rabat)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9. 모로코 알라위트왕조 성립과 열강의침공(1665년~1912년)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는 사아드 왕조(Saadians)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Meknes)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무함마드(Sidi Mohamed, 재위 1757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á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리드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국제 행정부(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다. 또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스페인은 모로코 북부 해안 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10. 모로코의 프랑스와 스페인 보호령 시기(1912년~1956년)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이 대규모로 이민하고 프랑스 식민 정부가 유화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 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Rabat)와 페스(Fes)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기독교를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교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다. 1927년 즉위한 무함마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11. 모로코의 현대사(1956년~)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Mohamed V) 국왕은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길에 올랐다. 무함마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고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산 2세 국왕은 행정 수도인 라바트(Rabat)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Casablanca)를 중심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 권력은 계속 유지하였다.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2),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월 14일 모로코는 새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 13일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하 양원을 구성하였다. 1999년 7월 23일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30일 시디 무함마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2012년 현재에 이른다.
●탕헤르
탕헤르 시는 주요항구이며 무역 중심지로 지브롤터 해협에 맞닿아있으며, 스페인 남단에서 27㎞ 떨어져 있다. 관광 중심지일 뿐 아니라 건축업, 어업, 방직업 등이 발달해 있다.
고대 페니키아의 무역거점으로 처음 알려졌다. 705년경부터 1471년까지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은 뒤 17세기까지 스페인·포르투갈·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684년 모로코에 반환된 후, 19세기까지 영국의 영향력이 강했으나 서서히 모로코의 외교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 후 국제공동관리 지역으로 남아있다 1956년 독립 모로코 왕국에 통합되었다. 탕헤르 주는 탕헤르 시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1195㎢의 면적을 차지한다. 천연자원이 부족하지만 탕헤르 시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채소재배와 가금사육이 농촌의 주요수입원이다.
●패스
페스 강과 세부 강의 합류점 바로 위, 페스 강가에 있다. 모로코에 있는 4개의 황제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곳은 원래 페스 강 양안에 세워졌는데, 789년경에 이드리스 1세가 동쪽 제방에, 809년경에 이드리스 2세가 서쪽 제방에 세웠다. 이 두 부분은 11세기 알모라비데조(朝)에 의해 하나가 되어 이슬람 도시로 발전했다.
14세기 중엽 마린 왕조 치하에서 학문·상업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맞았고, 그후로도 종교 중심지로서의 탁월성을 유지해왔다. 1912년 3월 30일에 체결된 페스 조약으로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섭정정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도시는 올리브 숲과 과수원으로 덮인 낮은 언덕으로 거의 완전히 둘러싸여 있으며, 측면에 돌탑들이 있는 페스의 고대 성가퀴가 페스엘발리로 알려진 이 옛 도시를 부분적으로 두르고 있다.
○메디나(구 시가지)
세계 최고의 미로라고 불린다. 9000여개의 미로가 있다. 789년경에 이드리스 1세가 동쪽 제방에, 809년경에 이드리스 2세가 서쪽 제방에 세웠다. 이 두 부분은 11세기 알모라비데조(朝)에 의해 하나가 되어 이슬람 도시로 발전했다.
○왕궁
13세기에 마린 왕조가 세운 이 도시의 신(新)페스 지구(페스엘자디드)에는 왕궁과 13세기 다색 채색의 미나레트로 유명한 대사원이 있다. 패스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로 황금색과 녹색타일로 되어 있다.
○가죽염색공장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다. 천년 이상 내려온 옛 방식으로 한다. 원단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비둘기 똥에 손을 담가 무두질을 한다.
●라바트(라바트엘파티프 : 은둔지)
인구 수는 2004년을 기준으로 63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면적은 5,321㎢로 경기도의 절반 크기에 해당된다.
○모하메드 5세 묘
현 국왕인 핫산 왕의 할아버지인 모하메드(1956년 독립, 독립영웅)의 영묘이다.
○왕궁
현 국왕의 왕궁
○핫산탑
12세기말 알 모하드 왕조의 제 3대왕 야쿤 엘 만수르가 지브롤터 해협 건너 스페인 원정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이슬람 최대 높이의 미나렛(첨탑)을 세울 목적으로 시작했으나 착공 4년째 되는 해에 왕이 사망하여서 높이 44m에서 중단되었다.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Casablanca, 아랍어: الدار البيضاء, ad-Dār al-Bayḍāʼ / 모로코 아랍어로는 ed-dar el-Biḍa 앗다르알바이다는 대서양에 위치한 모로코의 최대 도시이다. 위도는 33°32′N 7°35′W.에 있다. 도시 이름은 스페인어로 "하얀 집"을 뜻한다.
약 33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의 주요한 항구일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마그레브(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내에서도 가장 큰 도시이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 기준으로는 여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모로코의 실제 수도는 라바트이지만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는 카사블랑카로 여겨진다.
카사블랑카에는 또한 모로코 내 굴지의 기업들과 그곳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들이 본사와 주요 산업 시설들을 두고 있다. 그리고 산업 통계를 보면 카사블랑카가 모로코 내에서 산업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 동안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카사블랑카에는 왕립 모로코 해군이 주둔한 제1기지가 있다. 그리고 카사블랑카 항구는 인공 항구 중에서 마그레브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한다.
○모하메드 5세광장
○핫산 2세 메스키다 사원
카사블랑카 최고의 명소라 할 만한 핫산 모스크로 높이 200미터이며, 10만 명 동시 예배 가능하다. 세계 세 번째 규모로 모로코 사원 건축 양식과 전통문양(아라베스크)의 집대성.
※참고자료
■카타르
카타르국(아랍어: دولة قطر 다울라트 카따르), 약칭 카타르(문화어: 까타르)는 중동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는 도하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및 아랍에미리트와 가깝다.
면적 : 11,437km² 인구 : 2,334,029명 1인당GDP : $102,943
역사 : 지금의 카타르 지방에는 약 10000년 전 또는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7세기에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아랍족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본래 아랍에미리트의 수장국 중의 하나였다가 1916년 영국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1971년, 바레인과 함께 영국 통치령으로부터 벗어났다. 2006년 12월에 수도 도하에서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고, 2011년 1월에 아시안컵을 개최하였다. 또한 2022년 FIFA 월드컵이 개최될 예정이다.
지리 : 대체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타르 반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3면이 페르시아 만에 접해 있다.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위치해 있다.
기후 : 바다에 접해 있으나, 기후는 몹시 건조한 사막 기후가 나타난다. 일최고 기온은 53~55도를 기록하고 있다.
주민 : 아랍인이 다수이며 영국인도 존재한다. 이 나라는 남녀 성비가 2.00 대에 달하는데, 이는 종교적 이유로 '여아 살해' 가 샤리아에 의해 합법으로 규정된 것은 물론 남성 근로자들이 많이 유입된 점에 있다. 인구는 160만 명 정도로 대전광역시와 비슷하다.
언어 : 7세기 이후부터 아랍어 (카타르 아랍어)가 공용어이나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영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비교적 수월하다.
종교 : 7세기 들어온 이슬람교가 국교지만, 아랍에미리트, 오만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 국가 중 교회 건축이 허용된 몇 안되는 나라이다. 종교 비율은 이슬람 91.4%(수니파 위주), 개신교 2.5%, 카타르 성공회, 로마 가톨릭 3%, 정교회 0.5%이며, 2008년 카타르 역사 최초로 15만 명의 기독교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가톨릭교회가 건립되었다.
경제 : 풍부한 석유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1인당 GNP는 2013년 기준(국제통화기금(IMF) 통계)으로 10만 4,700여 달러로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다.
문화 : 2010년 12월 3일 스위스 취리히 메세오디토리움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개최국 투표에서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도하
도하(Doha, 아랍어: الدوحة)는 카타르의 수도로 페르시아 만과 접한 지방 자치체이다. 2005년 인구 조사에 따른 도하의 인구는 400,051명이다.[1]
도하는 카타르 전체 인구의 약 80% 가량이 거주하는 카타르 최대 도시이며, 카타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도하는 카타르 정부 소재지로 카타르의 국왕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하는 교육 도시의 본고장이며 지역은 연구와 교육에 헌신적이다. 도하는 세계 무역 기구 협상 ‘도하 개발 라운드’의 최초 정부 수준의 만남을 했던 장소였으며, 2006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 도시이기도 하다.
■한국과 3개국의 경제력 비교(2015년)
국가명 | GDP | 1인당 GDP | 삶의 질 | 살기좋은 나라 |
한국 | 11위 | 32위 27,513달러 | 15위→14위 | 25위→28위 |
스페인 | 14위 | 33위 26,328달러 | 27위→20위 | 26위 |
포르투갈 | 41위 내외 | 42위 18,984달러 | 40위 내외 | 27위 |
모로코 | 55위 내외 | 129위 3,077달러 | 129위 내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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