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위대한 역사도시 70

청담(靑潭) 2015. 7. 30. 22:15

 

 

위대한 역사도시 70

 

                                                     펴낸이 존 줄리어스 노리치

                                                     펴낸곳 (주)위즈덤하우스

 

 

 

서언

 

 엊그제 익산시에서 우리 《익산의 맛집》17곳을 지정하여 발표하였다. 음식의 분야별로 오랫동안 인정을 받아온 대표적인 식당을 선정한 것이라서, 1987년부터 30여년을 계속 익산에서 살아온 내가 과연 몇 집이나 가보았는지 살펴보니 9군데다. 나머지 여덟 집은 차츰 한 집씩 찾아보려니 생각했다.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이 책에는 위대한 역사도시가 65곳이다.(로마, 파리, 런던, 이스탄불, 멕시코시티 중복) 과연 나는 지금까지 몇 도시를 찾아보았으며, 장차 얼마나 많은 도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현재 다녀온 도시는 19군데(멤피스, 테베, 아테네, 린쯔, 로마, 콘스탄티노플, 장안, 앙코르, 카이로, 파리, 베네치아, 피렌체, 베이징, 교토, 암스테르담, 런던, 싱가포르, 도쿄, 상하이)이다. 언젠가 평생의 꿈인, 그러나 반드시 꼭 실현하고 싶은 미국, 인도, 동부유럽, 러시아및 북부유럽, 남부유럽 등을 여행하게 되면 인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역사도시를 훨씬 더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여행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고대세계

 

1. 우르크

세계 최초의 도시인 우르크는 수메르 인의 도시국가로 기원전 3000년경에 인구 3만 명 내지 5만 명이 살던 도시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이루는 삼각주의 북쪽 강변, 지금의 바그다드 남쪽 300 킬로미터 지점에 있었다. 오늘날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바스라의 중간지점이라고 한다.

 

2. 모헨조다로

지금은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유역 스쿠르 지방에 있었던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3500년 전에 농부들과 유목민들이 범람원에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청동기시대에 계획적으로 건설했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3. 멤피스

고대 이집트의 수도인 멤피스는 카이로 부근에 있다. 파라오시대(기원전 3000년경)부터 아라비아에 정복될 때(기원후 641년)까지 350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수도(고왕국시대 : 제1왕조-제10왕조)이자 정치적 중심이었으며, 이후 카이로로 대체된다. 기자의 대형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며 람세스 2세 석상이 있다. 2010년 이집트 여행시 찾았다.

 

4. 테베

그리스의 테베와 다르다. 오늘날 이집트의 룩소르지역을 말한다. 테베는 기원전 3000년경 상이집트 제4지구의 수도로 역사에 등장한다. 멤피스정권에 반기를 든 멘투호테프 2세(기원전 2010-1960)가 유혈승리를 거둔 이후 1500년 동안 테베는 이집트의 중심이 되었다. 중왕국(제11왕조-제17왕조)과 하왕국(제18왕조-제26왕조)시대의 도읍지였다. 카르나크 신전과 하트셉수트 신전, 왕들의 계곡이 있다. 2010년 이집트 여행시 찾았다.

 

5. 하투사

히타이트 왕국(기원전 17세기-기원전 12세기)의 수도였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160킬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6. 바빌론

고바빌로니아(기원전 20세기경 성립)와 신바빌로니아(기원전 625년-기원전539년)의 수도였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최대의 고대 거주지였다. 현재의 이라크 알 히라에 있는 유적으로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에 위치한다.

 

7. 니네베

현재 이라크 북부 모술의 붐비는 교외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흙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시리아(기원전 911년~기원전 612년)의 수도였으나 세계적인 이 대도시가 번영한 것은 한 세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8. 카르타고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스 일대에 위치해 있던 페니키아인 계열의 고대 식민도시로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와 패권 다툼을 벌였으며,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 패배하여 로마 공화정의 아프리카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하여 북아프리카 일대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5세기 경에는 반달족의 침입을 받았다가 698년 다시 아랍인들에게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과 아주 가깝다. 2016년 카타르에서 마드리드로가는 비행기에서 카르타고 지역을 확실하게 눈여겨 보았다. 장차 튀니스를 여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이에 만족한다.

 

9. 아테네

아테네에 그리스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0년경이다. 아고라의 정상에 파르테논이 서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그립다. 2010년 1월 21일 단 하루 머물렀던 아테네여서 오히려 정겨운 도시인데 오늘날 그리스가 경제위기에 빠져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21세기 산업구조에 맞는 경제의 틀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복지만 앞서가다가 당한 재앙이라고 할까? 그저 잘살아보려고 땀 흘려 일하고, 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공부한 우리 대한민국과 너무 대조적인 나라라고 할까? 오늘의 그리스 경제위기를 보면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성장을 무시하며 무조건 복지만을 주장하는 정치꾼(소위 진보라 하는 사람들)들을 경계할지어다. 오늘날 청년들의 취업대란시대에 그대의 자녀들이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고 치자. 부모가 가정복지를 주장하는 아들딸들에게 막 돈을 주어가며 마냥 함께 즐길 것인가? 아니면 그럴수록 더욱 가정 경제를 잘 지켜가며 미래의 자신과 자녀들의 경제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잘 준비할 것인가? 그리스 현상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며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이 쌓아온 경제와 내 가정의 경제를 잘 지켜나가야만 한다.

 

10. 린쯔

현재 중국 산동성 쯔보시의 한 지역이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다. 당시 가구수는 약 7만이었으며 큰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백성들은 피리를 불고 비파를 퉁긴다. 닭싸움, 개경주, 장기, 공차기를 즐긴다. 거리는 부지런히 오가는 수레와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다니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그들의 옷이 마치 한 폭의 커다란 병풍과도 같다. 2002년 산동성 여행시 쯔보시를 들러, 제경공순마갱( 薺景公殉馬坑)에 갔던 기억이 있다. 이 묘는 춘추시대 제나라 제경공의 묘로 600여필의 순마갱인데 105필의 숫말을 전시하고 있었다.

 

11. 알렉산드리아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가 창건한 뒤 단기간에 지중해 세계의 주요도시로 떠올라 900여 년 동안이나 그 지위를 유지했다. 학문이 발달하였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파로스 등대가 유명하다. 카이로에서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에서 행여 알렉산드리아를 볼 수 있을지 창밖을 보며 크게 기대했으나 짙은 구름에 가려 전혀 볼 수 없음에 꽤나 안타까웠었다. 지중해에 접해 있는 이집트의 대도시다. 카이로에서 아테네로가는 비행기에서나마 꼭 이 도시를 보고 싶었으나 날씨가 흐려 실패했다.

 

12. 메로에

이 고대도시는 수단의 나일강 동편 지금의 셴디 부근, 나일강과 아트바라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에 있다. 기원전 5세기에 왕이 거처하는 도시였으나 왕의 모듬이 자리잡은 것은 기원전 3000년 경 부터이다. 규모가 큰 피라미드가 있다.

 

13. 예루살렘

기원전 로마정부가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헤롯은 예루살렘 성전을 전에 없던 규모로 화려하게 증축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기단의 일부를 이룬 《통곡의 벽》뿐이다. 기원후 70년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있다.

 

14. 로마

로마의 부유한 지배층은 팔라티노 언덕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았지만, 대다수의 인구는 조악한 자재로 지은 불결하고 위험한 임대 건물에 살았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하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진적 발전을 통해 세계 각국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발돋움 했다. 지난 5월에 서유럽 여행을 다녀왔고 그중 로마에서 3일을 보냈다. 이탈리아의 수도이다. 2015년 행복한 서유럽여행시 찾았다.

 

 

 

기원후 1000년까지

 

15. 테오티우아칸

테오티우아칸 계곡은 멕시코 계곡의 북동쪽 일부다. 멕시코시에서 북동쪽으로 52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2세기경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 후 4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다. 전성기 인구는 대략 12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테오티우아칸은 광범위한 교역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해 중미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티우아칸은 건설 초기부터 완벽한 구상 하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였으며, 종교적인 상징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넓은 길이 계획의 중심에 있다. ‘죽은 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폭이 40~100m, 길이가 5.5km나 된다.(현재 복원된 것은 2.5km까지다.) 이 길 좌우로 많은 석조 구조물, 피라미드와 사원, 광장, 주택 등이 건설되었고 그 끝에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달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많은 피라미드다. 이곳 피라미드들도 중남미 전역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계단식이다. 가장 큰 것은 해의 피라미드로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m, 높이 66m에 24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16. 티칼

1696년 프란체스코회수도사 안드레스 데아벤다뇨는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며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야 숲속에서 방대한 유적을 발견한다. 1800년이나 존속한 티칼은 기원전 800-600년 고지에 자리 잡은 두 촌락과 늪지 주변의 또 한 촌락으로 출발했다. 오늘날 티칼은 작은 과테말라의 국립공원안에 있으며 현지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야문명은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 온두라스 · 엘살바도르 일부를 아우르는 문명권이며 티칼은 과테말라 페텐 주 북서부에 있는 마야 유적지로 최전성기인 700년경에는 핵심부에 약 1만여 명, 외곽지대에 약 5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석조물의 연대는 292년이며 가장 최근의 석조물의 연대는 889년이다. 이후 약 100여 년간 소집단들이 살았으나, 10세기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17. 콘스탄티노플

기원후 10세기가 끝날 무렵 콘스탄티노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시였다.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새 수도로 창건했으나 역사는 7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늘 로마를 불신했다. 그리스의 옛 식민지 비잔티움인 이 도시는 아시아의 관문이자 넓은 삼각형 곶의 동쪽 끝자락이다. 황실 예배의 중심은 성소피아성당이었다. 실로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스포러스 해협도 아름다웠다.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이다. 1910년에 찾았다.

 

18. 메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메카는 역사시대 초기부터 아라비아반도의 주요도시였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명성을 얻었으나 실은 고대부터 신성한 도시로 간주되었다. 메카는 6세기에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 마호메트는 570년경 메카의 상인가문에서 태어났다. 메카는 왕조의 수도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오랫동안 독특한 지위를 누려왔고 지금도 그 지위는 계속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남부 홍해에 접한 도시다.

 

19. 다마스쿠스

다마스쿠스는 신성한 카시온 산기슭에 있다. 사막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인근에는 건조한 산맥을 적시는 기적의 강이 흐른다. 동쪽으로 뻗은 시리아 사막의 넓은 고원은 수많은 대상행렬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지나치는 아시아무역의 길목이며, 남쪽과 동쪽 방면의 길은 이집트, 예멘, 인도의 항구로 이어진다. 조로아스터교의 사산조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도 정교회의 비잔티움 제국간의 국경다툼이 끝없이 이어진 중세초기에도 시리아는 여전히 번영했다. 옴미아드왕조(661-750)왕조의 수도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제국의 수도에서 시리아의 일개 무역도시로 전락했고, 그 대신 바그다드가 이슬람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시리아의 수도이다.

 

20. 장안

위수 중류의 관중에 위치한 장안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구가한 당나라의 수도였다. 현재는 시안(서안)이라 부른다. 이전에 서주(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년), 진(기원전 221- 기원전 206년), 전한(기원전 206년-기원후 9년)등 세 나라의 수도였다. 742년 장안의 인구는 100만 명이 되었다. 2007년 가족여행으로 장안을 찾았다. 진시왕릉, 병마갱을 보았으나 일정상 시내의 관광은 형식적이어서 매우 아쉬웠다.

 

 

21. 바그다드

바그다드는 이슬람세계가 전성기를 누린 8-13세기에 이 세계의 수도였으며, 고전기 아랍 이슬람 문명의 전형이다. 천일야화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도시는 762년 티그리스 강 서안에 아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 알만수르가 창건했다. 아바스의 바그다드는 규모면에서 콘스탄티노플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나 1258년 몽골의 훌라구는 칼리프 왕조를 타도하고 마지막 칼리프를 살해했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의 중심지인 이라크의 수도이다. 

 

22. 코르도바

코르도바는 에스파냐의 빛나는 아랍수도이다. 750년 다마스쿠스의 옴미아드 왕조가 붕괴하자 왕자인 아브드 알라만은 가족의 학살을 피해 에스파냐로 가서 새 칼리프를 창건했다. 서 칼리프라 불리는 이 왕조는 1031년까지 존속했다. 코르도바는 아랍인, 베르베르인, 이베리아인, 유대인등 10여 만 명의 혼성 인구가 어울려 사는 문화의 도가니였다. 세비야와 그라나다의 부근에 있는 작은 도시로 인구가 30만 명 정도이다. 현재 코르도바 프로축구팀은 프리메라리가 리그 최하위(20위)이다. 2016년 이 도시를 찾았다.

 

 

 

 

중세세계

 

23. 앙코르

캄보디아 북서부에 위치한 중세도시앙코르는 1860년대에 프랑스탐험가 앙리 무오가 발견한 이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앙코르는 기원후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창건했다.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는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건축물로 생각하는 앙코르와트를 건축했다. 2006년에 나는 위대한 앙코르 와트를 찾았다.

 

24. 팔레르모

12세기 중반 유럽의 도시 중에서 가장 화려한 곳은 단연 팔레르모였다. 노르만인이 시칠리아를 정복했을 때 이곳은 이미 인구 25만 명의 대규모 상업 중심지였으며, 모스크 300개와 그만큼의 교회가 있었고 수많은 시장과 거리에 기술자와 장인이 득시글거렸다. 이탈리아 남부에 노르만인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015년경이다. 노르만왕국은 64년 만에 망하고 곧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된다. 후일 시칠리아가 나폴리왕국에 병합되자 팔레르모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25. 카이로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유린한 뒤 카이로는 아바스 칼리프왕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이로의 위치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인근의 멤피스처럼 나일 삼각주 바로 남쪽,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접점이자 중요한 교역로였다. 카이로는 원래 두 개의 도시로 출발했다. 641년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인이 수도로 삼은 푸스타트, 10세기에 파티마왕조(909-1171)의 궁전도시로 삼은 카히라이다. 1250년 집권한 마물르크왕조(1250-1517)는 십자군과 몽골군을 물리친 것을 권력의 정통성으로 삼아 유례없는 규모로 종교적 후원에 발 벗고 나섰다. 마물르크 시대가 막을 내렸을 때 카이로는 예전의 다섯 배로 규모가 커졌고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다. 2010년 1월에 찾은 카이로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아주 낙후되고 생기가 없는 초라한 도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하게 1년 뒤인 다음해 1월에 시민혁명이 일어나 많은 희생을 견디며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혁명은 성공했다. 이집트의 번영을 기원한다.

 

26. 사마르칸드

세계의 모든 대도시 가운데 사마르칸드는 바다에서 가장 멀다. 대신 이 도시는 실크로드라는 인간의 강을 끼고 있다. 기원전 329년 이곳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단연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공언했다. 기원후 712년 아라비아에 정복된 사마르칸드는 새로운 역할을 했다. 중국인 전쟁포로에게서 배운 제지술을 서양에 전한 것이다. 1220년 징기즈칸에게 유린당하고 50년 뒤 마르코 폴로는 사마르칸드가 거의 망했다가 복구되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여행가 이븐 밧투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그러나 1366년 투르크 몽골계의 티무르가 이끄는 기병대에게 짓밟혔다. 이때 티무르(1370-1507)의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1990년에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의 중요도시이다.

 

27. 파리

14세기 초 파리의 주민은 파리가 그리스도교 권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라고 믿었다. 그 예술적 건축의 고딕적 취향은 서유럽의 풍경에 영향을 미쳤다. 파리대학은 유럽의 다른 대학들보다 훨씬 앞섰다. 파리의 기원은 그리스도 탄생 전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기원전 53년에 직접 목격했다. 400여년이 지난 후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인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파리에서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파리가 크게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카페왕조가 12세기부터 파리를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파리의 도심에 우둑 솟아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파리의 영화를 가장 생생하게 대변하는 건축물이다. 2015년 5월 1일 오후에 찾은 세느강변에 자리한 노트르담 성당은 정말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28. 뤼베크

한자동맹의 도시인 뤼베크는 독일의 북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주(州)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함부르크로부터 북으로 60km지점에 있다. 한자 동맹의 중심지였던 뤼베크는 16세기까지 북유럽 무역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손실되었어도 16세기 건축물의 양식의 기본 구조가 남아 있다. 트라베강이 발트해로 흘러드는 어귀에 위치한 뤼베크는 중세(14~15세기) 독일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중심 도시로 ‘한자동맹의 여왕’으로 불리던 곳이다. 17세기 이후 북유럽 무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한자동맹이 쇠퇴하면서 뤼베크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으나 뤼베크 구시가에는 지금까지도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문과 교회를 비롯한 과거 한자도시 시절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구시가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9. 크라크푸

폴란드의 남부에 위치한 크라크푸는 1040년 폴란드의 수도가 되었지만 황금기는 카지미에시 3세가 왕위에 오른 1333년부터였다. 15세기 중반 크라크푸는 문화의 도가니였다. 1만 5천명의 이 도시는 그다지 큰 도시라고 할 수 없지만, 활기는 그 이상이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이 도시는 지적, 문화적, 정치적 활동의 폭발로 인해 유럽세계의 주류로 확고히 입지를 굳혔다. 크라쿠프(영어로는 크라카우)는 1039년부터 1596년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58년간 폴란드 왕국의 수도이었으며, 현재에도 인구 80만의 폴란드 제3의 도시로서 관광과 교육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크라쿠프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서, 1978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12대 유적지'로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유럽의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크라쿠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중심부에 있는 중앙광장(Rynek Glowny)이다.

 

30. 베네치아

15세기 초에 베네치아(베니스)는 전성기를 누렸다. 1000년 전 이곳은 다른 도시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도망쳐온 난민의 집결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베네치아는 지중해의 연인, 세계 최대 무역국가가 되었으며 무역 식민지는 중동과 극동까지 확산되었다. 중세 내내 이탈리아는 전쟁터였다.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야만족의 침입이 잇따르자 이탈리아반도는 분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교황령, 비잔티움 영향권, 카알대제가 세운 새 제국, 밀라노, 베로나, 파도바 은 북부도시, 북부의 제노바와 피사, 남부의 나폴리, 아말피, 가에타 같은 해양도시 공화국은 서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1400년 베네치아는 3300척의 선박과 3만 6000명의 선원을 보유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은 1000년이 지난다 해도 베네치아에 범접할 수 없고 그와 같은 부를 누릴 수도 없었다. 2015년 5월 9일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찾았었다.

 

31. 피렌체

이 작은 도시에서 르네상스는 시작된다. 12세기에 자치도시로 성장하고 1300년경에 이르면, 규모면에서 유럽의 5대도시에 속한다. 피렌체는 금융과 양모산업을 기반으로 부를 쌓았다. 중세 피렌체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를 배출했다. 14세기 후반 피렌체는 유럽의 지적, 예술적 중심이 되었다. 영리한 상인 코시모 데메디치는 1434년 망명지에서 돌아온 후 도시의 비공식적 지배자가 되어 1464년 죽을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이자 기업가였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예술 후원자였다. 피렌체 르네상스는 코시모의 손자로 재능이 뛰어나고 현명한 로렌초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1512년 로렌초의 아들 줄리아노(후일 교황 레오 10세)가 메디치가문을 부활시켰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2015년 5월 8일 나는 피렌체에 있었다.

 

32. 베냉

나이지리아 남부에 있는 서아프리카의 유서 깊은 도시 베냉은 19세기 후반 아름다운 청동과 상아 예술품이 아프리카 검은 문명을 부정하던 서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6세기 유럽인들은 베냉이 유럽의 도시에 뒤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높이 20미터에 달하는 성벽, 대로와 많은 사람들, 식품과 의약품이 풍부한 시장, 진흙으로 벽을 쌓고 달팽이 껍데기로 장식한 붉은 대리석처럼 빛나는 주택이 있었다. 나이지리아와 인접한 나라가 바로 베냉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베냉은 나이지리아 남부의 한 도시라고 하는데 지도나 인터넷에서 도시《베냉》은 찾을 길이 없다.

 

33. 팀북투

사하라 남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도시로 3분의 1은 역사, 3분의 2는 신화로 이루어져 있다. 서아프리카의 말리 공화국 내 니제르 강가에 있는 도시로, 사막의 민족인 투아레그(Tuareg) 족의 도시이다. ‘통북투(Tombouctou)’라고도 한다. 코란 상코레(Koranic Sankore) 대학과 이슬람교 고등 교육 시설인 마드라사(madrasa)가 있는 팀북투는 지적·영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15세기와 16세기 아프리카 전역에 이슬람교를 전파의 중심 도시였다. 유명한 이슬람 사원인 징가레베르(Djingareyber) 사원, 상코레(Sankore) 사원, 시디 야히아(Sidi Yahia) 사원은 팀북투의 황금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지속적으로 복원이 시행되고 있지만, 이러한 유적은 오늘날 사막화의 위협을 받고 있다.

 

34. 쿠스코

잉카제국은 신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복잡하게 이어진 안데스 사회의 막내에 해당하는 잉카는 페루 중남부 산악에서 탄생해 서쪽 고원지대와 남아메리카 해안으로 점차 세력을 넓혔고, 나중에는 지금의 콜롬비아에서 칠레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기원후 1532년 유럽과 접촉할 무렵의 잉카는 쿠스코를 수도로 800여만 명의 인구를 거느렸으며 에스파냐인이 올 때까지 열 한명의 왕을 배출했다. 쿠스코는 넓고 비옥한 계곡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 잡았다. 도시는 두 개의 작은 강 사이에서 발달하였고 잉카인은 강둑에 벽을 쌓고 도시 내부에 운하를 만들어 멀리서 물을 끌어왔다. 고지대에 건설한 쿠스코는 대규모 단지들이 좁은 거리로 구분된 격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단지의 벽은 뛰어난 석축 기술을 보여주는데 높이가 4-5m나 되는 부분도 있다. 이 외부 벽은 지금도 온전히 남아 있다. 쿠스코는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지점의 분지에 있는 잉카제국의 수도로서 오늘 날 페루의 주도이며 가까이에 마추피추와 핀켄 등의 유적지가 있다.

 

35. 테노치티틀란

아스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당시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였다. 테노치티틀란은 호수 위에 떠 있는 둘레 10여km의 장방형 섬으로 건설되었으며 동쪽으로 티오판, 서쪽의 아차코알코, 남쪽의 묘트란, 북쪽의 쿠에포판 등 방위에 따라 네 구역으로 나뉘었다. 당시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으며 1521년 디아스가 에스파냐군대의 코르테스와 함께 입성했을 때 도시는 이미 석 달간 이어진 포위공격으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은 고대 아스텍 문명의 수도로, 현재의 멕시코시티이다.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에 멕시코시티 예술가와 작가들은 도시의 현대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바깥세계에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에스파냐인은 옛 지배자들의 건물을 거의 허물고 도시를 재건함으로써 과거 아스텍과의 결별을 강조했다.

 

 

 

 

 

 

근대 초기의 세계

 

 

36. 리스본

포르투갈의 서울인 리스본은 로마인이 타호강 북쪽 기슭의 언덕에 세운 도시로, 그곳에 유럽 대서양 연안에서 가장 큰 천연항구가 있다. 500년 동안 그리스도와유대인이 많이 사는 무어인 도시로 존속했으나 1147년 영국 십자군이 점령한 후 새로 생긴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노예무역으로 리스본에는 아프리카인인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주로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리스본은 해군력으로 대서양을 제패하려는 필리페의 계획에 부합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1588년 5월 이곳에서 150척의 무적함대를 꾸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아래 잉글랜드로 출발했다. 리스본은 필리페의 제국에서 여전히 제2의 도시였으며 해군기지이자 동방무역의 출발지였다. 역병이 빈발했음에도 리스본의 인구는 1521년 6만 5천이었으며 17세기 초에는 16만 5천으로 늘어났다. 2016년 리스본을 찾았었다.

 

37. 로마(생략)

 

 

38. 이스탄불(생략)

 

 

39. 아그라

인도의 타지마할의 도시이다. 현 수도인 뉴델리에서 가깝다. 1643년 2월 6일 화려한 묘 타지마할이 완성되었다. 황제 샤자한이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의 묘로 지은 이 웅장한 무굴제국의 마우솔레움은 특별히 장소를 따로 정해 세운 게 아니라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의 도시 풍경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아그라는 1648년 샤자한이 궁정을 신도시 샤자하나바드로 옮기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인도여행을 하게 되는 날 거의 틀림없이 아그라는 찾게 될 것이다. 타지마할 앞에서 샤자한이 뭄타즈 마할을 사랑한 것처럼 이석한도 양드리를 그만큼 사랑하노라고 고백할까요? 농담속에 진실이 담겨질 수 있답니다.

 

40. 이스파한

이란의 이스파한은 현 수도인 테헤란에서 가깝다. 사파비 왕국(1501-1736)의 샤아바스 1세(재위 1587-1629)가 창건한 이 도시는 금새 규모가 커졌고 웅장한 건축물을 선보였다. 신도시의 중심인 세계 광장의 지도는 광장의 네 방향에 네 개의 문이 있고, 그 뒤에 최근에 시작한 개혁을 상징하는 네 개의 웅장한 건물을 배치한 구조였다. 알리 카푸(높은 문)은 광장의 서쪽에 있었다. 이 5층 건물은 황궁의 입구, 대사와 관리들을 맞는 접견실, 아래쪽 풍경을 내려다보기 위한 높은 발코니 등 몇 가지 기능을 갖추었다. 알리카푸의 뒤에 있는 황궁은 넓은 저택단지, 접견실, 정원, 마구간, 침소로 구성되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건물은 치힐 수툰(40개의 기둥) 접견실과 하슈트 비히슈트(여덟개의 낙원) 저택이었다.

 

41. 베이징

이곳에는 2000여 년 전부터 도시가 있었으나 1409년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재위 1403-1424)의 공식선언으로 새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첫 수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할 작정이었다. 영락제는 원나라가 멸망한 곳으로 터가 좋지 않다는 주장을 일축하고 1406년 궁전을 지을 건축재를 모으라고 명한다. 마침 대운하를 개량해 궁전을 지을 건축재와 식량을 북쪽으로 수송하기에 편했다. 1404년에는 1만여 가구가 산시성에서 동쪽의 베이징으로 이주해 도시인구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동남아시아에서 7000여명의 기술자를 잡아와 노동력도 풍부했다. 1550년 베이징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다.

베이징 중심에 자리 잡은 쯔진청(자금성)은 천단단지의 북쪽에서 북쪽 성벽까지 남북방향으로 1000미터에 걸쳐 뻗은 도시의 주축이었다. 자주색 외벽으로 둘러싼 경내에는 9000여개의 방이 있다. 자금성은 1912년 청나라가멸망할 때까지 황궁의 지위를 유지했다. 나는 2002년 8월 2일부터 4일까지 단 한 번 베이징을 방문했다.

 

42. 교토

교토는 1000년 동안 그냥 미야코, 즉 수도라고 불렀다. 교토가 권력의 중심이었던 시기는 불과 수백 년에 불과하다. 그래도 교토는 신성한 혈통의 천황이 사는 곳이므로 신성한 도시, 수도로 간주되었다. 교토는 794년 간부천황이 창건했다. 이곳을 헤이안쿄(평화와 안정의 수도)라고 이름 지었다.

1194년 영주들이 교대로 정권을 장악하자 헤이안쿄는 전란에 휩싸였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영주들을 물리치고 4세기에 걸친 js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천황은 그에게 쇼군이라는 직함을 내리고 일본 전체의 지배자로 인정했다. 평화와 함께 번영이 시작되었다. 이에야스는 에도의 작은 어촌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이곳이 나중에 성장해 지금의 도쿄가 되었다. 그러나 수도는 여전히 신성한 교토였다. 1691년 교토를 방문한 네델란드 의사 엥헬베르트 캠피르는 인구 300만 명의 이도시를 보고 ?일본의 모든 공업과 상업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썼다. 1990년 12월에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사회과 교사들의 《일본속의 한국사》탐방시에 교토를 방문하였고, 2007년 8월 12일에도 교토에 있었다.

 

43. 프라하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이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 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드디어 1989년 프라하 시민들은 자유를 얻었다. 1583년 신성로마제국의 왕자 루돌츠 2세는 프라하가 빈에서 먼 곳이며 오스만제국에 가까운데도 이 도시를 제국의 수도로삼겠다고 결정했다.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루돌프 2세는 프라하성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그가 고독하게 지내는 궁정은 유럽 전역에서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의 관심을 끌었다. 2017년 3월에 프라하를 찾았다. 볼거리가 많은 아름다운 도시다.

 

44. 암스테르담

사실 물과 역사에 익숙한 곳은 베네치아보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다. 자위더르의 넓은 구역을 매립하고 배수해 경작과 거주지가 가능한 동플레볼란트를 만든 덕에 홍수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00년 경 3만 명이던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한 세기가 지나 20만 명으로 늘었으나 1900년에도 그 정도를 유지했다. 암스테르담이 번영기를 누린 17세기에 이 도시는 실제로 《세계의 시장》이었다.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다. 2015년 5월 12일에 나는 암스테르담을 찾고 있었다.

 

 

45. 멕시코시티(생략)

 

 

46. 런던

17세기는 런던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다. 1608년 존 밀턴이 태어나고 셰익스피어가 말년을 보낸 런던은 아직 작은 중세도시였으나 인구가 상당히 증가한 상태였다. 1599년에 지은 셰익스피어의 글로브 극장은 관객을 3000명이나 수용했으나 화장실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국제무역에서 많은 이득을 보았고 , 악취에 개의치 않고 기업활동에 매진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과 중국의 도시는 발달한 오물수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에 런던은 단지 무역과 많은 인구를 특징으로 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아주 짧은 기간에 영국의 상징으로 발돋움했다. 나는 2015년 4월 29일에 런던의 템즈강변에서 비를 맞으며 런던을 구경했다.

 

47. 스톡홀름

2012년 5월말에 북유럽에 갔으나 교육현장시찰로 한국과 함께 교육선진국이라는 핀란드에만 다녀왔다. 당시 노르웨이와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 중에서 선택하는데 나는 핀란드를 선택한 것이다.

발트해 서부의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14개의 섬으로 뻗어나간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지배자 비르레르 알이 1252년에 창건했다. 수백 년 동안 스톡홀름은 독일이 지배하는 한자동맹에 속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무역기지였다. 1520년에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귀족 여든 명을 학살하는 대 참극이 일어났다. 간신히 탈출한 귀족 구스타브 에릭손 바사는 3년 뒤 여름에 스톡홀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오랜 치세(1523-1560)기간에 그는 루터파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고 무역을 스톡홀름으로 일원화했다. 1718년 카를 12세가 전사한 뒤 평화가 찾아왔으나 스웨덴은 해외영토를 전부 잃고 핀란드와 스코네 속주만 보유하게 되었다.

 

48. 더블린

1662년 아일랜드의 신임총독 오먼드 공작은 찰스 2세의 명령으로 아일랜드를 다스리기 위해 더블린만으로 들어갔다. 1172년 잉글랜드 최초의식민지 수도가 된 이후 한 세기 동안 간헐적인 내전에 시달렸다. 오먼드는 런던의 어느 광장보다도 더 큰 광장을 조성했다. 강북쪽에 대규모 시장과 자선학교를 지었고 리피강에 아름다운 다리를 놓았다. 그는 또 영국인 젊은 건축가 제임스 갠던에게 와서 북쪽의 매립지에 개 간세청사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더블린서 가장 큰 공공건물 세 개를 차례로 지었다. 1800년경 조지시대 더블린의 윤곽이 완성되었다.

 

49. 코펜하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멋진 도시라고 한다. 바이킹의 후예인 여왕과 왕족은 18세기에 프레데리크 5세가 도심 한복판에 조성한 왕실 구역 프레데리크슈타트에 살고 있다. 크리스티안 4세(재위 1588-1648)때 코펜하겐은 첫 번째 변화를 겪었다. 높은 탑과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섰고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로센보르 궁전과 원형탑이 국제적 운치를 더해 주었다. 17-18세기에 건설한 아름다운 지역이 많다. 1890년대 코펜하겐은 도시 성벽 너머까지 팽창했다.

 

50.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여 년 전인 1703년 차르 표트르대제는 한 젊은 병사에게 도끼창을 받아들었다. 네바강 북안의 황량한 땅에서 그는 바닥에 표시를 하고 ?이 곳은 장차 도시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북부의 얼어붙은 늪지에 자리 잡은 새 수도를 우아한 유럽식 낙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다. 상태페테르부르크는 온갖 역경을 뚫고 창건되고 존속한 도시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51.

18세기 초 어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2세기쯤 뒤에는 완전히 멸망한다. 지친 투르크 대상들이 헝가리 중부에서 남쪽으로 물러나자 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도시는 사실 유쾌하고 매력적인 이미지와는 무관했다. 번영기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도 예술적, 지적 대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빈은 삶이 고달픈 요새 도시였다. 투르크가 사라지자 빈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곳을 기점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1717-1780)와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의 치세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빈은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도시였고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서울이다. 2017년 3월 빈을 찾았고 쇠부른 궁전은 아름다웠다.

 

52. 에든버러

1878년에 그려진 에든버러는 대다수 여행자들이 이전 세기에 본 불결하고 오물이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넓은 대로와 광장, 웅장한 신고전주의 주택이 즐비한 도시였다. 양국은 1603년 스튜어트왕가 성립 이후 한 군주 밑에 있으면서도 각각 별개의 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양국 사이를 통과하는 상품에 대한 통행관세 등 여러 문제로 불만이 고조된 결과 1707년 앤 여왕(1665∼1714) 때 통일법이 성립되어서 한 사람의 군주와 하나의 의회로 통합되고 스코틀랜드 사람도 의회에 대표를 보내며, 무역 ·관세 등의 법도 동일하게 되었다. 1801년 합동법에 따라서 대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성립되었다. 그 뒤 50년 동안 에든버러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지성의중심지로 발전해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떨쳤다. 새로운 자신감은 르테상스를 일으켰다. 그 주역은 에든버러시장을 네 차례 역임한 조지 드러먼드였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광장이 들어섰다.

 

 

 

 

현대 도시의 세계

 

53.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면서 모스크바의 위상은 급속히 추락해 지역의 중심도시로 전락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모스크바는 생기가 없는 도시였다. 표트르대제보다 모스크바를 더 싫어한 예카테리나 여제는 1770년 초에 흑사병이 덮쳐 수천 채의 가옥을 불태운 것을 계기로 도시 전체를 쇄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유럽식 이미지로 재건하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1812년 이후 모스크바 도심은 결국 유럽식으로 재건된다. 19세기에 모스크바는 상업 중심지로 발달했다. 러시아 혁명 후 소련의 수도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수도이다.

 

54. 파리(생략)

 

 

55. 런던(생략)

 

 

56.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는 기본적으로 19세기 도시다 실제로 1873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다뉴브 강 서안의 부다와 오부다가 강 맞은편의 페스트와 통합되는 과정은 간단치가 않았다. 16세기 초 이래 부다페스트는 오스만의 지배아래 쇠락을 거듭해 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들은 갈수로 줄어들고 오스만 사람들이 제국을 가로질러 두 도시로 이주해왔다. 더구나 1686년 합스부르크가가 오스만을 몰아낼 때 제국군은 부다와 페스트를 거의 초토화했다. 두 도시는 헝가리 민족주의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물리적으로 통합되었다. 사실 1849년 거둔 승리는 합스부르크의 최종 패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67년 프란츠 요제프 2세는 어쩔 수 없이 제국 내에서 헝가리의 지위를 제고했다. 이후 부다페스트에는 건설이 끊일 날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할 무렵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우아하고 활기찬 수도가 되었다. 2017년 3월 찾은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놀랍게 아름다웠다.

 

57. 몬트리올

1497년 영국인이 최초로 뉴펀들랜드를 발견하였고, 1553년 프랑스인이 상륙한 이래 영국·프랑스간 세력 확대 분쟁이 계속되었다. 1534년 브르타뉴의 선원 자크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만으로 들어가 새 프랑스를 발견하고 그 땅을 프랑수아 1세에게 바쳤다. 그 뒤 모피 독점업체에서 일하는 사뮈엘 드상플랭이 강 상류로 수천 킬로미터를 더들어가 퀘백과 라플라스 루아얄에 정착촌을 세웠다. 세인트로렌스강과 오타와 강의 합류지점에 있는 섬이었다. 1642년 최초의 선교사가 그 섬에 도착해 원주민을 개종시켰으며 몬트리올이라는 말은 고립된 미지의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초기 프랑스 주민은 무척 용감하고 강인했다. 1701년 이후 몬트리올은 번영을 누렸다.

1756∼1763년의 7년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파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북미합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미국측의 합병을 위한 움직임을 견제해야만 하였으며, 1867년 영국은 캐나다식민지를 정치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캐나다자치령이 인정되었다. 1931년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국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정식국명을 캐나다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1970년 10월의 위기는 언어적 분리를 더욱 심화시켰다. 몬트리올 주민이 정치 불안을 피해 대거 이주한 탓에 불과 몇 년 만에 토론토는 캐나다의 최대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몬트리올은 여전히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다. 두 문화의 충돌이 이도시의 활기차고 독립적인 정신을 만들어내며, 나아가 그 도전은 캐나다의 청체성을 형성한다.

 

58. 워싱턴

워싱턴 DC만큼 도로가 쓸데없이 큰 도시가 있을까? 행정도시의 도로치고는 지나치게 넓은 감이 없지 않다. 독립전쟁당시 정부의 통합성과 효율성을 위해서는 방어가 가능한 단일한 장소가 절실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결정을 내렸지만 어디가 좋을지를 두고 긴 토론이 이어졌다. 결국 조지 워싱턴이 직접 선택했는데 그가 초지일관 선호한 장소는 바로 포토맥 강변이었다. 도시외곽의 포토맥 강과 그레이트폴스가 물길의 역할을 해주어 워싱턴은 파리만이 아니라 베네치아나 로마와도 닮은 도시가 될 수 있다. 1800년경 제퍼슨이 대통령 관저에 들어갔을 때 연방 지구의주민은 겨우 3000명 이었고 그들의 3분의 1이 노예와 흑인 자유민이었다. 워싱턴은 의사당과 백악관만이 아니라 그런 건축물이 어우러져 미국의 중심으로 만든다.

 

59.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하면 올림픽이 생각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선수가 몬주익 언덕을 치고 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중세에 바르셀로나는 천연 항구가 없는데도 해양제국의 중심지로 발돋움 했다. 19세기에 바르셀로나는 경제와 문화면에서 제2의 도시가 되기에 충분했다. 바르셀로나는 세계의 인정을 놓고 마드리드와 경쟁했으며 이 경쟁은 민족주의의 여러층과 중첩되었다. 마드리드는 에스파냐의 국가적 중심이었고,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의 정서적 중심이었다. 2016년 4월 이 도시를 찾았다.

 

60. 뉴델리

뉴델리는 워싱턴DC나 캔버라처럼 계획도시며 행정수도이다. 1640년대에 무굴 황제 샤자한은 제국의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기고 샤자하나바드, 보통 올드델리라고 부르는 도시를 창건했다. 샤자한의 붉은 요새는 무굴궁전가운데서 가장 크고 화려했다. 1739년에는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도시를 공격하여 15만 명을 학살하고, 붉은 요새의 공작 옥새를 가져갔다.

뉴델리는 대영제국의 권력이 정점에 있을 무렵 인도의 수도로 창건했다. 1911년 인도를 방문한 영국왕 조지5세는 델리에서 공식접견을 하면서 영국령 인도의 수도를 캘커타(콜카타)에서 이곳으로 옮긴다고 선언했다. 뉴델리는 올드델리에 통합되어 하나의 도시를 이루었다. 새 지배층이 보기에 뉴델리는 지상낙원이었다.

 

 

61. 베를린

황금의 20년대에 베를린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였다. 유렵의명망높은 예술고와 공연가, 퇴폐적인 쾌락주의자가 이곳에 모여 기묘하고 자극적인며 복잡한 사건을 엮어냈다. 바르샤바까지 뻗은 늪지 평원에 위치한 중세 베를린은 미개척지였다. 이곳에는 12세기까지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1871년 베를린은 독일제국의 수도가 된다. 번지르르한 전시용 도시, 위압적이기만 할 뿐 보기 흉한 건물이 가득한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은 베를린은 네 구역으로 나누었다. 스탈린은 베를린과 독일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1948년 그는 미국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해 베를린은 봉쇄했다. 1989년 소련의 지배력이 느슨해지자 마침내 장벽이 열렸고, 몇 년 뒤 완전히 철거되었다.

 

62. 시카고

미국의 엔진 시카고는 1871년 10월 8일부터 9일까지 거의 하루 만에 파괴되었다. 남서부 초라한 거리의 창고에서 시작된 화재가 원인이었다. 시카고는 그렇게 파괴되기 30년 전에 생겨난 도시다.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200여 년 전이다. 1850년 인구 3만 명에서 1870년대에는 30만으로 급증했다. 급성장의 그에 따른 여러 사회문제를 낳았다. 화재 후 시카고의 부활은 건축, 기초공학, 메탈 프레임 구축, 조명, 스팀 난방과 내화재, 빠르고 안전한 엘리베이터의발명과 때를 같이 했다. 1889년 이웃 신흥지역 주민이 표결을 통해 시카고에 편입되면서 시의 면적은 하루 만에 네 배로 늘어나고 인구도 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시카고의 문화와 역사는 거의 이주민이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63. 로스앤젤레스

1781년 에스파냐가 로스앤젤레스 강변 아메리카 고대 촌락 양나 부근에 세운 도시 로스앤젤레스는 그 동안 다양한 정체성과 명칭을 거쳤다. 미국의 해군과 육군이 멕시코전쟁에서 캘리포니아를 점령한 1846년부터 로스앤젤레스는 캘리포니아 남부 축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870년대에 도시는 자리를 잡고 외형적 발전을 이루었다. 187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철도로 연결되었고 1880-1890년대에는 중서부와 동부도 철도로 연결되어 건강을 챙기는 중산층이 대거 유입되었다. 20세기 초에 로스앤젤레스는 인구밀도가 높은 소도시에서 지역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일찌감치 영화를 도입했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은 금새 기업적 가치를 증명했다.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1910년에 시(市)의 일부가 되었다. 1920년 영화촬영소가 설립되면서 발전하였다. 미국의 주요 영화회사에 대한 중앙배역사무소(中央配役事務所)와 영화박물관 등이 있어 미국 영화계의 총본산 구실을 한다. 할리우드볼(Hollywood Bowl)이라고 불리는 1919년에 건설된 유명한 야외극장과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연극 원형극장, 콘크리트 앞뜰에 많은 배우들의 손바닥 또는 발바닥 도장이 찍혀있는 중국극장 등이 있다. 할리우드 지구 서쪽에 인접한 비벌리힐스 일대는 부호나 영화배우가 많이 사는 고급주택지이며, 선셋 대로가 할리우드를 동서로 관통하여 비벌리힐스와 이어진다. 또 주변의 관광휴양지로 롱비치가 있다. 20세기말에 이르자 로스앤젤레스는 시와 군을 합쳐 지구상에서 멕시코인과 한국인이 두 번째로 많은 도시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주는 면적 40만 ㎢로 일본보다도 넓으며 인구는 3800만으로 지구상의 웬만한 나라보다도 많다.

 

64. 부에노스아이레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신흥도시였다. 1870년대에 도약하기 직전 인구 20만 명의 이 도시는 문병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1880년대에 로카장군은 팜파스의 인디오를 기관총으로 굴복시키고 황야를 농토와 목장으로 개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주민의 도시였다. 이탈리아인이 절반, 3분의 1이 에스파냐인이었다. 1899년 매춘부의 5분의 1은 러시아인이었으며 3분의 1이 유럽출신이었다. 낙후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0세기 말에는 민주주의, 시카고 경제학, 세계화가 도시의 활기를 되살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영원한 희망의 도시지만, 그 희망은 마냥 유보되고 있다.

 

 

 

65. 싱가포르

1819년 1월 29일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가 첫발을 디뎠을 때 이곳이 장차 하나의 국가가 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열대 우림이 섬을 뒤 덮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국가는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모나코와 바티칸은 가까스로 주권을 지키고 있으며, 몰타와 지브롤터는 근근이 도시의 면모를 유지하는 정도다. 고대 아테네나 중세 베네치아 같은 도시국가는 페르시아만에서나 만나 볼 수 있고 이제 싱가포르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관점에서 이 도시의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법원, 시청, 박물관의 당당한 파사드가 유럽풍의 도심의 거리를 빛내주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경종이 울렸다.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국도 동요하지 않았다. 1942년 2월 말레이 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은 둑길을 폭파하는 수고조차 필요가 없었다. 도시는 일주일 만에 함락되었다. 싱가포르의 함락을 영국은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수치로 여겼다. 5만여 명의 싱가포르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되었다. 리콴유의 지도아래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고수준의 경제부국이 되었다. 리콴유는 한국의 박정희와 함께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을 진정으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낸, 진정으로 빛나는 역사를 창조해 낸 찬란한 별들이다. 1997년 첫 해외여행시 이 도시를 방문했다.

 

66. 뉴욕

현대의 그 어떤 대도시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뉴욕에 견줄만한 곳은 없다. 뉴욕을 신화로 만든 것은 뉴욕의 축도, 즉 맨해튼 섬이었다. 맨해튼섬은 길이 20킬로미터에 폭은 4킬로미터를 넘는 곳은 없으며 여러 개의 다리와 터널로 본토와 연결된다. 하지만 그 섬에는 다양한 인종 190만 명이 살고 있다. 1940년대에 이르면 항구의 기능보다 세계 최강대국의 부유하고 활기차고 위풍당당한 대도시라는 지위가 중요해진다. 해외에서 이 빛나는 도시는 당연히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부유한 나라이든 가난한 나라이든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뉴욕에 감탄했고 그 마천루의 그늘에 발을 딛고자 했다. 김제에서 태어나 익산에서 살고 있는 지방 사람인 내가 기어이 서울에 근거지를 하나 마련한 것은 같은 이유였다. 이제 세계의 서울인 뉴욕에도 꼭 발을 디뎌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유엔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우리 세대에게는 대단히 크게 각인되어 있다.

 

67. 상파울루

브라질의 상파울루는 창건한 지 450년이 지나 포르투갈 제국의 조용한 오지에서 남아메리카 최대이자 세계 4위의 대도시로 발돋움했다. 남아메리카는 거의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오직 브라질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오늘날 에스파냐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위치를 간신히 지키고 있으나, 포르투갈은 우리 대한민국에게조차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나라로 변했다. 커피산업이 발달한 상파울루는 급속히 성장하여 이내 리우데자네이루를 제치고 브라질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상파울루는 미래와 과거를 복잡하고 다양하게 반영한 도시다.

 

68. 시드니

1788년 아서 필립 선장은 영국의 죄수들을 태운 초라한 함대를 이끌고 세계의 남단 울퉁불퉁 튀어나온 두 갑 사이를 항해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여러 달을 보낸 터라 죄수들은 환호했다. 이후 시드니는 급속히 성장했다. 불과 두 세기만에 판자촌에서 세계의 도시로 발돋움 했다. 뉴사우스웨일스 지사 로버트 에스킨(임기 1965-1975)의 10년에 걸친 전성기에 시드니에서 눈에 특징들이 나타난다. 부패, 빈곤, 조직범죄, 인종갈등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2000년 올림픽을 치르고 막대한 부와 더불어 광란의 여피족이 사는 도시가 되었다. 1901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조직하고 오늘날에는 세계 12대 경제 강국이 되었으며 1인당 GDP가 6만 달러가 넘는 경제 선진국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17년 11월에 다녀왔다.

 

69. 도쿄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활기 넘치는 도시다. 그러나 우리의 서울은 더 활기 가 넘치는 도시다. 그런데 이 책에 서울은 빠져 있다. 엮은이가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정했겠지만 아무튼 아쉽고, 그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류문화까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여긴다.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슈 섬 북부의 에도 마을을 근거지로 삼았다. 뒤편에 산이 있고 한쪽으로 강이 흐르고 앞에 방어하기 쉬운 만이 있어 풍수지리와 실용적인 여건에 두루 알맞은 곳이었다. 그는 곧 쇼군이 되고 그의 치세에 에도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1868년 쇼군이 패배하고 천황은 교토에서 에도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도쿄로 이름이 바뀐다. 1964년에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최초의 고속열차가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했다. 신주쿠에는 마천루가 들어섰다. 신주쿠는 도쿄의 활기와 모순이 모인 곳, 일본의 옛날과 지금이 어우러진 곳이다. 2007년 8월 11일 나는 도쿄에 있었다.

 

70. 상하이

상하이는 중국의 도시 가운데 드물게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지금도 거리를 걷다 보면 그 역사가 느껴진다. 2001년 1월 17일 나는 상하이를 방문하고 있었다. 우리의 임시정부를 찾아 김구선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모습을 그렸고, 훙커우 공원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애국정신을 느꼈다. 1930년대에 영국의 관광 안내 책에는 동양의 파리라고 소개했으나 그전까지는 사실 갯벌 어촌 정도였다. 현재 상하이의 인구는 2천 4백만을 넘어섰다. 황푸강과 바다사이에 위치한 푸등지구는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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