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 플라스
JISAN PLACE
채소밭(채전)
내가 사는 익산에서 불과 30리 떨어진 김제의 시골 고향집에 50여 평 채전 밭이 있다. 15년 전 부모님께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시고자 시내로 나가신 이후에도 봄부터 가을까지 다니시면서 채소들을 가꾸어 오셨다. 수년 전부터 어머니께서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다니시기에 힘이 드시자 이후로는 아버지 혼자서 다니시면서 가꾸셨다. 나 역시 거의 매 주말이면 시골집을 찾아 부모님들께서 가꾸신 채소를 따거나 뜯어 갔고, 그 일은 내게 큰 행복이었다. 그만큼 고향을 가까이 하고 자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가진 대단한 특권이다.
10여 년 전부터 내가 장차 은퇴하면 아버지와 함께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온갖 채소들을 두루두루 심을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은퇴한 첫 해인 금년에도 여전히 채소는 전적으로 아버지께서 가꾸셨다. 나는 집짓는 일에 치중하기도 했지만 채소 가꾸는 일에 너무나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도와드리는 일밖에는 하지 못했지만, 지난 11월 말 아버지와 함께 배추와 무를 뽑아 리어카로 나르고, 다듬고, 씻고, 간을 내고, 뒤적이고 김장을 했고 동치미(신건지)까지 담금으로서 채소밭 일을 마무리 지었다.
내년에는 여러 채소들의 씨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며 병충해 방지며, 거름 주는 일등을 꼼꼼히 챙겨 커다란 달력에 적어가면서 배우고 익혀야겠다. 언젠가는 나 혼자 힘으로 일구어 나가야 하니까요.
과일(실)정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 은퇴를 10여 년 앞둔 2002년경 고향집 뒤편에 있는 280여 평의 밭에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 매실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었다. 아버지께서도 나무 가꾸시기를 대단히 좋아하시므로 당신께서는 밭 주위에 복분자를 심으셨다. 이후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살구나무, 보리밥나무, 복숭아나무 등을 심고 작년에는 포도나무와 사과나무까지 심었다. 그러나 병충해로 인하여 도저히 따 먹을 수 없는 정자나무처럼 커버린 자두나무를 잘라버린 데다, 매실나무도 병이 들어 여러 그루가 죽어서 아직은 내가 그리던 과실밭 모양은 아니로되 내년 봄에 여러 과실수를 사서 빈 자리에 심게 되면 머지않아 곧 아름다운 과실정원이 될 터이다. 은퇴 후를 겨냥하여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바로 과실밭 만들기였던 셈이다.
소나무 재배
2004년에 현직 공무원이면서 소나무를 재배하는 친구가 나에게 소나무 심기를 권하였다. 마침 400여 평의 밭이 있어 부모님께서 경작하기에 힘이 드셔서 친척에게 거의 공짜로 빌려주고 있기에 과감하게 소나무 500여주를 심었다. 2년생 적송 400여주와 3년생 반송 80여주를 심었는데 내내 거의 아버지께서 풀을 치우시며 가꾸셨지만, 워낙이 전문성이 없는 나인지라 전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르고 커버려서 이젠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작년에 친구인 전교장과 함께 强整枝를 해버렸다. 전문가들이 판매를 목적으로 잘 가꾼 소나무가 천지에 가득하니 판매는 꿈도 못 꾸지만 그렇다고 후회랄 것 까지는 없다. 가망 없는 나무들을 과감히 잘라서 땔감으로 이용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나름 잘 키워서 보기 싫지는 않은 소나무 정원이 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적절한 이용방안이 잘 모색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내년 봄엔 썩 괜찮은 나무 몇 그루를 골라 지산하우스에 심으련다. 우선 두 그루를 선택하여 전지를 하고 삽질로 간단히 뿌리돌림을 해 놓았다.
고향집 가꾸기
200여평의 내 고향집 터는 1880년경 나의 5대조 옥석 이옥연공이 분가하여 집을 짓고 일가를 이룬 곳이다.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갓집이라 불리었고 나의 조부 지산 이문환공께서 1936년에 새 집을 지으셨으며, 그 집에서 내가 태어났고 자랐다. 우리 집은 비록 초가 3칸으로 지어졌으나 마당에서 50cm 정도의 높이에 지어졌으며, 마루는 그 보다도 더 높아서 어린 시절에는 오르내리기에 힘들 정도였고, 나무기둥이 크고 처마 또한 높아서 마치 대갓집 같은 느낌을 주는 잘 지은 집이었다. 1972년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초가집이 기와집이 되었고 1990년대에는 리모델링을 해서 어느 정도는 살기 편하게는 만들어 졌으나 모양새는 전형적인 초가집도, 전형적인 기와집도 아닌 어설픈 집 모양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정년퇴임을 하시고 2000년에 김제시내의 아파트로 이사하심에 따라 고향집은 빈 집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아주 빈 상태는 아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부모님께서 채전밭을 가꾸러 오셨고 아버지는 거의 매일 다니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가을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울동안 만큼은 빈 집이 되었다. 내가 익산으로 전입해온 2012년 이후에는 개 두 마리를 키웠는데 2년 동안 새끼를 두 번이나 낳았다.
수년 전부터 내가 은퇴를 하면 그동안 살지 않아 흉해진 집을 허물고, 작고 예쁜 집을 지을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내가 태어나 살아온 집인데다 80년 된 집을 부수기가 아까워 원형은 그대로 살리면서 리모델링을 할까도 생각했으나 오히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 말씀에 다시금 『적은 돈으로, 작고, 예쁜 집을 짓는다』는 처음 생각을 지키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은퇴 후 3월부터 3개월간은 준비기간이 되었다. 인터넷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전원주택들을 살펴서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정했다.
○아버지와 내가 봄부터 가을까지 찾아와 쉬는 공간이므로 집은 작게, 데크는 크게 짓는다.
○오직 내가 살아있는 동안 찾을 집이므로 되도록 적은 예산으로 짓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조주택으로 예쁘게 짓는다.
○나무는 적게 심고 대부분 잔디로 꾸민 후, 나의 정성으로 아름다운 집을 가꾸어 나간다.
6월에 토지측량, 철거작업, 지하수 보수, 과실밭에 작은 창고 설치, 가축집 짓기, 7월에 건축업자 선정, 건축 설계, 건축허가, 상수도 설치가 이루어지고, 8월에 화장실, 방 1개, 응접실로 이루어진 12평짜리 조립식 집(데크 포함 18평)이 지어졌다. 담장은 하얀 펜스를 쳤더니 하얀집과 그럴듯하게 어울려 최소한의 예산으로 지은 작은 집 치고는 그런대로 예쁜 모양새를 갖추었다.
나의 별서(別墅) 지산 플라스
고향집에 구태여 새로이 집을 짓는 첫 번째 이유는 은퇴한 내가 사회적 명예와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 편안한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함이다. 퇴직한 후 그저 무료하게 소일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그렇다고 실버 복지관을 찾는 일도 그리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다. 또 할 일을 찾아 지나치게 대학의 사회교육원으로, 동사무소 교육원으로, 도서관으로, 체육공원으로 이리저리 우왕좌왕 방황할 일도 아니다. 적어도 한 나절은 집에서 불과 12km 거리에 있는 고향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인 채소 가꾸기, 과일밭을 일구고 닭과 칠면조 등을 키우는 등,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독서와 교육기관에서 배우는 일과 스포츠에 시간을 할애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둘째는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나의 옛 고향집을 쇠락한 모습으로 추하게 두지 않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이다. 부모님 살아계시는 동안 자주 찾으시고(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채소밭을 책임지셔서 이틀거리로 오신다) 다섯 동생들도 자신들의 생가를 찾아 언제라도 하룻밤 묵어가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분명 別莊은 아니다. 별장(別莊)이란 ?살림을 하는 집 외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이니 아니다. 별서(別墅)란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어 별장과 비슷하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 지은 집?이다. 내가 지은 집은 결코 경치 좋은 곳이 아닌 내 고향집터에 지은 것이고, 채소밭과 과일밭을 가꾸고 닭이나 칠면조 몇 마리를 키우기 위해 지은 집이므로 별서가 더 맞다. 다른 표현으로는 세컨드 하우스(Second house)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살림하는 집은 따로 있고 낮 동안 찾아 노작하며 머물다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등록을 옮기고 농업경영채를 등록하여 나는 엄연한 농업인이 되었다.
이 집의 이름은 어디서 그 의미를 찾을까를 많이 고민했다. 고심 끝에 나의 어린 시절 나를 사랑해 주신 할아버지에게서 찾았다. 할아버지의 號를 붙여 짓기로 했다. 할아버지의 호는 芝山이다. 그래서 지어본 이름이 芝山莊이다. 莊은 농가, 별장의 뜻이 있다. 이승만 박사의 이화장이 있고 김구선생이 계시던 경교장이 바로 그런 이름들이다. 그런데 새로 짓는 집은 할아버지가 지으시고 사시던 옛 집도 아니고, 아주 작은 조립식 오두막에 불과한데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라서 다름 이름을 모색하였다.
그러다 지난 5월에 찾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있는 광장으로,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며 감탄한 그랑 플라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랑 플라스는 ?대광장(Grand Place)’이란 뜻이고, 플라스는 영어로 플레이스이며 ?장소?,?곳?, 터?의 뜻이다. 영어의 플레이스와 같은 스펠링인데 다만 프랑스어로 플라스(쁠라스)로 읽는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집을 지으시고, 아버지와 내가 태어나 살아온 터』라는 의미를 담아 지산 플라스(JISAN PLACE)라 명명하고 한쪽 벽면 전체에 택호를 쓰기로 했다. 집 이름은 글씨의 기획에서부터 물감작업까지 전적으로 양드리님이 맡았다. 미술전공은 아니나 준 전공 정도는 되어서인지 너무 예쁘고 흐뭇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벽 글씨 장식이 탄생하였다.
전원생활의 꿈
채소밭은 나 혼자서도 능히 지을 수 있도록 익히고 열심히 가꾸어서 수확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건강한 채식을 하겠다. 금년에 아버지께서 배추, 양배추, 무, 상치, 쑥갓, 고추, 대파, 작은파, 양파, 메밀, 토마토, 가지, 오이, 아욱, 취, 부추, 딸기, 당귀, 마늘, 도라지, 토란, 호박 등등을 재배하셨다.
과일밭은 전적으로 나의 관리다. 자두나무, 매실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복분자 나무, 배나무, 보리밥 나무, 포도나무, 은행나무, 석류나무, 두릅나무 등이 한두 그루씩 있는데 작년에 앵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병이 들었는지 죽어버렸다. 그동안 병충해 방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년부터는 조심스럽게 농약을 사용할 생각이다. 이제 병해충 방제를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과일들이 수확이 안 된다. 아름다운 과실수 정원이 되도록 잘 가꾸어 보련다.
가축도 이미 기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는 온갖 가축들을 키운 바 있고 내가 20대일 때 혼자서 수 십 마리의 토끼를 기른 경험도 있다. 우선 6월에 동네에서 작은 애완용 개 한 마리를 얻어 기르고 있다. 해피는 하루 종일 오직 주인인 나 하나만 기다리며 사는 건지 내가 가면 제 정신이 아니다. 과일밭에 작은 창고와 가축을 기를 작은 축사를 지었다. 먼저 6월에 토종수탉 한 마리와 토종암탉 세 마리를 사왔는데 암탉은 겨우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항생제를 먹여 키운 닭들이라 자생력이 약한 탓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암탉이 지난 9월에 느닷없이 겨우 알 두 개를 품고 말았다. 예기치 않은 일이라 미처 유정란을 남겨놓은 게 없어 그냥 두었더니만 한 개는 실패하고 병아리 한 마리를 깠다. 그 놈이 이젠 세 달이 지나 제법 컸다. 이후에 사온 암탉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살아남아 모두 다섯 마리가 되었다. 요즘은 늦게 사온 암탉들이 알을 낳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내년에는 암탉이 알을 품어 10여 마리의 병아리를 까게 되면 닭은 금방 열 댓 마리가 될 것이다. 욕심으로는 토끼 두 마리와 염소 한 마리, 칠면조와 거위 한 쌍씩을 길러보고 싶은 생각이다.
소나무는 이제 판로가 없다. 그나마 잘 가꾸지를 못해 예쁘지도 않으니 더더욱 처치가 곤란해 졌다. 하지만 묘목 값만 들었을 뿐 내 소유의 밭에 심어놓은 것이어서 큰 손 해볼 일이 없으니 별 걱정일랑은 없다. 과감하게 가치 없게 된 것들은 끊어서 땔감으로 쓰고, 썩 괜찮은 것들만 남겨서 잘 키워볼 생각이다. 언젠가 다른 용도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므로 나름 예쁜 소나무 밭을 만들어 나가려 한다.
지산 플라스 내부는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었다. 장롱도 있고 침대도 있고,식탁도 있고, 시계도 걸고, 그림도 걸고, 김치냉장고도 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남은 일은 외부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다. 지금도 울안에는 대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 층층나무, 목련, 매실나무, 석류나무, 꽃사과나무, 배롱나무, 장미 등이 있으나 내년 봄에 마당 삼면에 잔디를 심는 일, 언덕을 잘 정리하여 국화를 비롯하여 여러 꽃나무를 심는 일, 풀이 우거지는 아주 자연스런 연못을 만들어 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는 일, 적송 두 그루와 반송 두 그루를 옮겨 심어서 기왕에 집 앞쪽에 심어져 있는 감나무 대추나무와 함께 여름 그늘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얄팍하지만 금년 한 해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조경관리를 공부한 실력으로 필요한 재료만 구입하여 내 손으로 직접 해 볼 생각이며, 비록 남들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어설픈 정원이 된다 할지라도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내년에 정원관리를 또 이수할 생각이니 배워가면서 차츰 더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나가면 많은 돈을 들여 전문업자를 시켜 만든 정원보다 더 애틋하고 자랑스럽지 않을까? 미래의 나의 아름다운 시골집을 그리며 기대해 봅니다. 혹자는 이 글을 읽으시고 제가 부티 나는 전원생활을 자랑한다고 여기실지 모르나 그건 전혀 아닙니다. 실제로 보시면 그저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텃밭이요, 볼품없는 과일밭이요, 엉터리로 키운 소나무 밭이요, 돈 안들이고 지은 자그마한 조립식 주택일 뿐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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