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삼성아파트 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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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아파트는 1957년에 서울에 지어진 종암아파트라고 한다. 3개동 152가구인데 건설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직접 낙성식에 참석하였다고하는데 이 아파트는 1995년에 철거되었다. 우리 익산에는 모현동의 옥창산에 있는 철도아파트가 효시인데 1961년에 지어졌고 지금도 16세대가 살고 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재해민을 입주시키기 위해 서둘러 공사가 진행된 모현아파트는 1978년 말에 준공되었으나 먼저 시작한 어양아파트는 조금 늦어 1979년 8월말에 준공되었다. 중소도시인 이리시에도 아파트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당시 친구인 재원이를 따라 처음 들어가 본 모현아파트는 겨우 13평 남짓 했는데도 그 구조와 청결한 화장실이 그리도 부러웠다.
“내 반드시 저처럼 깨끗한 아파트에서 살리라.”
나이 든 대학 4학년생으로 아르바이트로 오후에는 학원강사를 하며 순위고사(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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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후인 1987년, 고창에서 익산으로 옮겨와 1981년에 준공된 신동주공아파트 16평에 입주하게 된다. 작은 아파트임에도 근사하게 응접세트까지 놓고 할머니와 아이들과 함께 다섯이서 살았다.(1986년에는 고창에서 새로 지은 20평 연립에 살았으니 아파트가 처음은 아니다. 연립이나 아파트나 모두 연탄 보일러여서 가스중독이 염려되고 냄새 맡는 일이 고역이었다.)
1991년 좁은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부러움의 대명사인 『맨션』으로 이사한 것이 지금 살고 있는 동산삼성아파트이다. 당시 이리시에는 남성맨션, 전원맨션, 동북맨션, 모현현대, 영등현대, 동산우성 등의 맨션아파트가 있었을 뿐이었다. 가난하던 시절 아파트문화가 열렸지만 대개 16평 내지 24평 미만의 아파트나 연립에 살다가 80년대 경제발전에 힘입어 32평 이상의 넓은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맨션』이라 통칭했다. 이전의 아파트와 명백하게 다른점은 맨션은 가스보일러라는 점이다. 이제 비로소 60년대 중반부터 사용한 연탄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가히 주택의 혁명이라 할 만 했다. 저축한 돈을 다 털어 삼성아파트를 신청하고 우리는 자주 신축현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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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삼성아파트에 입주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맨션』에 입주하는 것은 중산층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져 친지들을 초대하는 풍속이 있었다. 270세대인 이 아파트는 경제적으로 우리가 저축금을 찾게 되는 시기와 중도금 불입 시기가 맞아떨어진 이유도 있었지만, 심정적으로 고향인 김제와 가까운 곳이기에 선택한 측면도 있다.
우리는 승수가 2학년, 승원이가 유치원생일 때 이사 와서 무려 23년을 살았다. 우리 부부의 40대와 50대를 완전히 이곳에서 보냈고 아이들은 이사 온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서울로 가고 할머니께서도 아버지 집으로 가시면서부터 10여년은 둘이서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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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한지 15년이 지나면서 신동아파트부터 함께 살던 김종관 교장이 근무지인 전주로 떠나고, 친구인 신홍규 교수도 영등동으로 미련 없이 떠났다. 재작년엔 길하나 사이 아파트에 사는 전경욱 교장마저 영등동으로 과감하게 떠났다. 중산층 가정들은 다들 떠나는 추세에도 영등동으로 가자는 아내의 요구를 묵살(?)하며 버텨온 나도 드디어 결심을 한다. 퇴직 후에는 배산 앞 새로운 주택지의 대세로 떠오른 모현동에, 그것도 공원형 아파트인 배산모현오투그란데에서 앞으로의 삶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 당근(?) 고향집 다니기엔 쬐금 더 가까워졌다. 모현주공아파트는 34년 만에 헐리고 1581세대의 e-편한세상이 2012년 12월부터 입주했고, 우리가 살았던 신동아파트는 33년 만에 헐리고 금호어울림아파트 732세대가 들어서 지난 8월에 입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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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도시는 대개 대동소이하지만, 우리 익산은 1980년경에 아파트 주거문화가 시작되었다면, 10년 후인 1990년경 맨션아파트 문화가 조성되었고, 이제 30년이 넘은 소형아파트는 맨션아파트로 재건축되고, 20년이 넘는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최근들어 무수히 신축되는 (편리한 실내구조와 지하주차장, 그리고 마치 공원처럼 조성되는) 고급형아파트로 대거 이주하고 있다. 모현동에만 2010년 이후 5개(3500세대)의 주공임대아파트가 들어선 이후 최근 2013년 초에 e-편한세상(1581세대), 2013년에 에코르(676세대), 2013년에 배산사랑으로부영(1044세대), 2014년에 배산제일오투그란데(870세대)가 현재 입주하고 있고 근처 송학동에 금년 5월 더 샵(676세대)이 들어섰다. 오투그란데 뒤에 부영이 임대아파트를 짓고 있어 내년에는 모현동과 송학동의 인구가 4만 5천여 명이 되어 영등동(어양동과 합하여 7만 명) 못지않은 소비지구가 형성될 전망이다. 모현동(3만 7천)은 영등동(4만 5천)보다 규모는 약간 작지만 그 대신 주택지역으로서 영등동이 가진 단점인 시끄럽고 부산하고 질서가 없는 모양이 아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고 마치 공원 같은 마을환경이 잘 유지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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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23년간 살던 집을 떠나자니 서운하기 그지없습니다. 같은 라인에 30호가 살지만 모두 함께 모여 본 일이 없습니다. 당연히 친목 모임도 없습니다. 최근에는 떠나신 분이 많아 우리처럼 처음 입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겨우 서너 집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모두들 말없이 이사 가고, 새로 오신 분들이 많아 생소한 얼굴들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5-6년 전 평소 가까이 인사하고 지내는 남자 분들만 7-8분을 모셔 식사대접을 한 적이 있었고, 어제는 이사 가는 신고를 하고 싶어 자주뵙는 네 분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8년 전 이천만원을 들여 맘에 들게 리모델링한 집이고, 단 둘이 살았기 때문에 아직도 새 집 같고 정이 들어 떠나는 마음이 아주 개운하지는 못합니다. 미련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어쩌다 무슨 일로 동산동에 오게 되면 꼭 삼성아파트를 찾을 것 같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한바퀴 휙 돌아보고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집을 사서 입주하시는 40대 초반의 부부가 우리 집이 마음에 든다면서 어찌나 흡족해 하는지 우리의 서운함을 조금 덜어주어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앞으로 23년은 내가 80대 중반이 되는 긴 세월인데 그때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을까요?
아침이면 배산으로 운동하러 가고, 오전에는 고향집으로 가서 채소와 과일밭을 가꾸고, 토종닭 알도 거두렵니다. 오후에는 사회교육원으로 무엇인가를 배우러 다니고 사회와 남을 위한 적절한 봉사도 하렵니다. 휴일이면 산과 강, 그리고 시골장터를 찾으며 건강하고 건전하고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을 살아보렵니다. 자연과 사람과 동물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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