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나의 號를 정하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웬만큼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성명(姓名)외에 자(字)와 호(號)를 가졌고, 또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은 생전에 임금이 내린 봉호(封號)나 사후에 내린 시호(諡號)도 가지게 되었다. 임금의 시호는 묘호(廟號)라 일컬었고, 무덤에는 능호(陵號)가 따랐다. 이렇듯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옛날의 한 습속에 말미암은 것이다.
자(字)는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일종의 이름으로 실제의 이름(實名, 本名)이 아닌 부명(副名)이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호(號)는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으로, 사람의 별칭이나 필명 또는 별호(別號)나 아호(雅號) 등을 가리킨다. 호는 오늘날 전통학문(한문학, 국문학, 역사학 등)을 하시는 분들이나 그림을 그리시는 화가들, 또는 스님들에게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나의 고조부이신 李玉淵 公은 字는 云叔이요, 號는 玉石이시다. 나의 증조부 李根郁 公은 字는 善汝요, 號는 竹下이시다. 나의 조부 李文煥 公은 字는 在浩요, 號는 芝山이시다. 나의 아버지 李判基 先生은 字는 基斗요, 號는 淸谷이시다.
나 李錫翰은 字도 없고 號도 없었다. 그런데 20대 시절, 언젠가 나의 號를 재미삼아 만들어 보았었는데 그때 지어진 것이 淸露다. 『맑은 이슬처럼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용한 일도 아니 사용할 일도 없었다.
정년퇴임하면 평생을 두고 반드시 배우고 익힐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을 때, 그래도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는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이 서는 것이 서예였다. 작년 한 해는 시골집을 짓는 일과 경제적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일 등으로 서예를 배우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우선 운동으로 테니스 레슨을 받으면서 전북대 평생교육원 익산캠퍼스에서 조경관리과정을 수료하고 조경관리 2급 자격증을 받았다. 금년에는 1월초부터 익산문화원에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두 달이 되었다.
익산문화원 서예반의 이름은 硯友會인데 50대가 두 분, 나를 포함한 60대가 두 분, 70대가 예 닐곱 분이고 80대가 두 분이 계시는데 모두들 號를 가지고 있고 서로 간에 호를 부른다. 평생 경험해 본 일이 없어 상당히 당혹스러운데 모두들
?어서 호를 지으세요, 서예를 시작했으니 호가 있어야지...? 라고 하신다.
그래 20대에 지었던 號인 淸露를 사용할까 생각하다가 우리 양드리에게 말하니
?60년을 너머 산 나이에 무슨 《이슬》이예요? 너무 작고 맑기만 한 이슬은 여유롭지 않고 약하기도 해서 자기에게 잘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말로 바꾸는 게 좋겠어요.?한다.
맑다는 의미를 가진 淸자는 굳이 고집하고 싶기에 淸江, 淸泉을 생각하여 커피타임에 여럿이 계시는 데서 호 이야기를 꺼냈다. 淸泉을 말씀드렸더니 지도하시는 如松 김계천 선생님은
?청천은 이교장 선생님 이름과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淸潭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신다.
생각해보니 청담은 의미는 좋으나 청천에 비해 역동성, 생동감이 떨어지고 고매하신 청담스님(1902-1971)이 계시는데다가, 청담사상, 서울에 청담동이 있어 희소성이 적은 것 같아 조금 망설여졌다.
그런데 우리 양드리가 여러가지 정보를 찾아보고 말한다.
?맑을 淸이 아니라 푸를 靑으로 합시다. 靑潭은 《깊고 푸른 못》이라는 뜻이니 이미 맑음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샘보다는 넓고 편안한 느낌을 주지 않아요??
靑潭으로 결정하고 서예실 명렬표에 나의 號인 靑潭을 당당히 적었다. 이로써 나도 졸지에 號를 가진 예술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할아버지 호를 딴 나의 시골집 지산쁠라스에 이번 달에 완공할 두 평짜리 촌스런 작은 연못이름은 대나무 아래에 있으니 竹潭이라고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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