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계해정사록(작자 미상)

청담(靑潭) 2015. 12. 29. 18:57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1623

작자 미상

 

필사본. 1권 1책.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서인(西人)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최명길(崔鳴吉) ·신경진(申景稹) ·심명세(沈命世) ·이서(李曙) ·이괄(李适) ·이중로(李重老) ·장유(張維) 등이 반정(反正)을 모의하고 궐기하여 광해군을 폐출(廢黜)하고,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옹립한 사건의 경위를 적었다. 서인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요직(要職)에 대한 포열(布列), 공신(功臣)의 책봉(冊封), 북인(北人)들의 숙청 등을 단행한 일련의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 인조반정 때 북병사(北兵使)로 임명을 받고 임지로 가기 전에 반정모의를 알고 이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이괄이 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에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난’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작자가 어떤 인물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역사가 이덕일 선생에 의하면 이 기록은 쿠데타 세력측이 작성한 것이라 한다.

 

●1623 3월 14일

〈왕대비(인목대비)가 중외의 대소 신료ㆍ기로ㆍ군민ㆍ한량인 등에게 내린 교서〉

소성정의(昭聖貞懿) 왕대비전은 이렇게 이른다.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내시고 제왕을 세운 것은 떳떳한 인륜을 펼치고 기강을 세워서 위로 종묘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함이다.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불행히도 적사(嫡嗣)가 없어서 일시의 권도로 장유(長幼)의 차례를 건너서 광해를 세자로 삼았는데, 동궁에 있을 때부터 실덕(失德)이 뚜렷이 드러나서, 선조께서도 늦게 현저하게 후회하시었다. 왕위를 이은 뒤에도 도리를 배반하고 거스름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우선 그 큰것만 들겠다.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천자(天子 중국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필이 되어서 한 나라에 국모 노릇을 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모든 선조(宣祖)의 아들된 자는 나를 어미로 대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광해는 참소하는 적신들의 말만 듣고 스스로 시기와 간극(間隙)을 일으켜서 나의 부모를 참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었으며 강보에 있는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거나 유폐하여 곤욕을 보였으니, 사람의 정리가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유감을 한껏 갚은 것이니, 그 미망인에게야 무엇이 어렵겠는가? 형을 해치고 동생을 없애버리며 여러 조카들을 잡아 없애고 서모를 잡아 죽여서 여러번 큰 옥사를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무고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였으니, 민가 수천 채를 헐어서 두 곳에 궁궐을 세워, 토목의 공사가 10년이 넘어도 그치지 않았다. 선왕 때의 원로 대신들을 거의 다 귀양 보냈거나 배척했고, 단지 인아(姻婭)ㆍ환관ㆍ궁녀들과 못된 일에 앞장서는 무리들만을 높이고 믿었다. 정치는 뇌물로 이루어졌으며 어둡고 탐욕있는 것들만 조정에 꽉 차서 돈을 싣고 와 벼슬을 사고 팔기를 거간하는 장사꾼들 같이 하였다. 부역이 번거롭고 주구(誅求)가 대중이 없으며, 백성들이 견디어낼 수 없어 도탄에 빠져 걱정하는 소리가 들끓었고, 종묘 사직의 위태함이 실오리로 달아 놓은 구슬과 같았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긴 지 2백여 년이나 되어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이고, 은혜로는 부자와 같아서, 임진년에 구원해준 은혜는 만대를 가도 잊을 수가 없기에, 선왕께서 재위하신 지 40년 동안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평생에 북쪽을 등지고 앉은 일이 없었다. 광해는 이러한 은덕을 저버리고 천명도 두려워함이 없이 속으로 두 마음을 품고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쳤다. 기미년 북로(北虜)를 정벌할 적에 비밀히 대장에게 ‘형편을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 하교하여, 마침내 전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하여서 추함이 사방에 퍼지게 하였다. 명 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 가두고 구속하기를 짐승 취급하듯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 나라의 칙서가 여러 번 왔지만 구원하는 군사를 보내지 않아서, 삼한(三韓) 시대부터 예의를 지켜 오던 우리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마음과 머리가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서 위로는 중국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하였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조종의 군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며,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폐출한다.

능양군(綾陽君) 모(某 이름은 종(倧))는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정원군(定遠君) 모(某 이름은 부(琈))의 첫째 아들이다.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워 비상한 의표가 있었으므로 선조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궁중에서 기르셨다. 이름을 지어준 뜻도 숨은 뜻이 있으며, 승하하실 때에는 손을 잡고 탄식하고 슬퍼하시어 뜻을 붙임이 매우 중하여 여러 다른 손자들과 달랐다. 이번에 분연히 대의를 내어 혼란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갇히어 곤욕당하던 나를 벗어나게 하고 나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게 하여 윤기가 바뤄지고 종묘 사직이 다시 안정되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신(神)이나 사람들이 모두 귀의하는 바이니, 왕위에 나가서 선조 대왕의 뒤를 계승하고 부인 한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을 만하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의당 자세히 알지어다.

 

〈중외의 대소 신료ㆍ군민ㆍ기로ㆍ한량인 등에게 내린 교서〉

은 이렇게 이른다.

우리 나라는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 가법이 가장 바르다. 인(仁)으로 정치를 하고 효(孝)로 다스려서 거듭 밝고 누대로 흡족한 교화가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의 시호)에게 이르러서 극도에 이르렀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비색한 운수가 들게 되어 지나간 10여 년 이래로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임금의 마음을 현혹하게 하고 국가의 권력을 독차지하여 모자간에 틈이 생기게 만들고 끝내 떳떳한 인륜의 변괴를 이루어서 별궁에 유폐하고 곤욕을 극도로 하였다. 옛날 진(秦) 나라 소양왕(昭襄王)이나 진(晉) 나라 혜제(惠帝)의 화(禍)보다 더할 뿐 아니라, 더군다나 중국조정의 부모와 같은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나라 예의의 풍속을 멸망시켜, 삼강이 쓸어버린 듯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사치스러운 욕심이 한량없고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게 되어 백성은 곤궁하고 국고는 바닥이 드러나 중외가 흉흉하여서 나라를 망치고 사직을 끊어지게 할 뻔했다. 소소한 일 같은 것은 대왕대비의 교서에 다 하였으니, 군더더기로 열거할 것이 없겠다.

내가 덕이 박한 사람으로 선왕께서 남기신 훈계를 받들어 종실이나 잘 지켜서 평생을 마칠까 하였는데, 다행하게도 충성과 의리있는 두세 신하들의 힘을 입어, 종묘 사직이 위태함을 민망히 여기고 인륜이 끊어질까 염려하여 분연히 큰 계책을 내어 내란을 평정하였으며, 이미 왕대비의 위호(位號)를 회복하였다. 따라서 이 몸을 추대(推戴)하고자 하니, 내가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의 뜻을 어길 수 없고, 위로는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려 하나, 마치 구렁에 떨어지는 것 같다. 어찌 감당해내랴!

적이 대위(大位)에 오르는 시초임을 생각해서 반드시 혁신의 정치를 거행해야겠다. 무신년(광해가 즉위한 해인 선조 41년, 1608) 이래로 모든 얽어 놓은 죄수들과 연루된 죄인들이나, 언사(言事)로 죄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다 탕척한다. 여러가지 건축 중이거나 경영하려는 토목의 역사와 이것을 맡아보는 각 관리와, 가혹한 세금으로 축재한 무리들을 모두 물리친다. 그 밖에 백성들을 침탈했거나, 나라를 병들게 한 권력있는 귀척(貴戚)들이 점령하고 있는 여러 곳의 둔전(屯田)과 장재(藏財), 감세(減稅)와 복호(復戶) 등의 일을 함께 하나하나 조사해서 개혁한다. 내수사 대군방(大君房)에 빼앗긴 토지와 노복들을 일일이 돌려주고, 이달 13일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형수 이하는 모두 사면해서, 유신(維新)의 뜻을 보이도록 한다.

아! 비상한 거조가 있었기에 비상한 은택이 미치었고,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자면 다시 끝없는 근심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의당 그리 알지어다.

상이 즉위하자, 백관들이 진하(陳賀)하고, 대사면을 중외에 교시하였다.

 

●19일

○ 종루 길거리에 진을 치고 백관들이 죽 늘어서서 역적 괴수 이이첨(李爾瞻)ㆍ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이위경(李偉卿)ㆍ이홍엽(李弘燁)ㆍ이익엽(李益燁)ㆍ조귀수(趙龜壽)ㆍ박응서(朴應犀)ㆍ한희길(韓希吉)의 목을 베었다.

 

●20일

대비전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역적 괴수 포악한 혼(琿 광해군의 이름)이 지금도 궁궐 뜰안에 있소. 천지간에 일각이라도 대역한 적신을 살려 둘 수 없는데, 무슨 연고로 편안하게 앉혀 두었소? 경 등은 위로는 종묘 사직을 위해서 빨리 귀양보내게 하오. 그래야 내가 옮겨갈 것이니, 경 등은 나를 위해서 소홀하게 마오. 내가 경 등에게 두 번 절하고 이를 청하는 바이오.”

 

●4월 3일

정인홍을 참형에 처하는데 백관이 늘어섰었다.

 

●10일

○ 전교하기를,

“광해(光海)의 죄악은 비록 중하나 선왕의 후손이다. 그가 적소에 있으면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지금은 옷을 갈아 입을 때이니, 베와 모시를 넉넉하게 내려 보내라.”

하였다.

 

●17일

〈책봉주청문(冊封奏請文)〉

조선국(朝鮮國) 소경왕비(昭敬王妃)인 첩 김씨는 삼가 주문하나이다.

독부(獨夫 폐주를 가리킴)가 스스로 하늘을 끊었습니다. 간절하게 애걸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특히 사손(嗣孫 능양군을 말함)에게 책봉하는 명호(名號)를 내리시어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여 번방을 견고하게 하소서.

첩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선신(先臣) 소경왕(昭敬王 선조)이 불행히도 적사(嫡嗣)가 없이 죽어서 후궁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 혼(琿)으로 승습(承襲)시킬 절차를 진주해서 황제의 특별한 윤허를 받자와 봉전(封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도의와 덕의를 위배하고 민심을 오래 잃어서, 첩이 항상 훈계하여 혹시나 잘못을 징계해서 다음을 경계할까 하였더니, 참소하는 말을 곧이듣고 제 스스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식된 도리로 첩을 섬기지 않고, 저의 부모를 형륙(刑戮)하고 저의 형제를 어육으로 만들고 저의 어린 자식을 학살하여 한집안이 도륙을 입어서 한 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 미망인을 별궁에 유폐시킨 지가 11년이나 되도록 문호를 잠그고 한 모금 물, 한 술 밥도 모두 명을 받아서 넣어 주게 하였으며, 군졸을 엄명으로 둘러 지키게 하여 첩이 자결하도록 압박하였습니다. 혹은 나군(儺軍)을 궁내에 몰아넣어 박살하기를 꾀하며, 혹은 무당과 부적으로 저주하여 해독을 입히려 하였습니다. 모든 방법으로 첩을 죽일 만한 일이면 끝까지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무도한 마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소경왕의 후궁을 혹은 간통하기도 하고 혹은 죽이기도 하니, 그 죄악을 말하자면 옛날 양광(楊廣)보다도 심합니다.

소경왕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 충성과 공경을 시종변치 않아서 신종(神宗) 황제께서 극도로 가상히 여겨서 칭찬하셨습니다.

임진년에 왜구들이 기회를 타서 침범할 때에 수만 명의 구원병을 보내고, 수만 냥의 국고 은(銀)을 축내 가면서 왜구를 소멸하여 바다를 건너게 하고 동쪽 번방을 다시 회복하게 하였으니, 빠진 것을 건져 주고 안전하게 하여 주신 은혜는 천지나 부모와 같을 뿐만 아니오라, 삼한(三韓) 백성들은 아비가 자식에게 훈계하고 형이 동생에게 일러서 재생케 해주신 크나큰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황제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소방(小邦)에 칙령하시어 의분을 분발하여 적개심을 가지도록 하고, 하사하신 물품이 풍성하며, 분부하신 윤음이 간절하시며, 전후에 하사하신 은이 수만 냥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혼은 선왕의 대국을 섬기던 의는 본받지 않고, 황상께서 칙려하신 칙지는 생각하지 않고, 하사받은 은을 사사로이 허비하고 도리어 노적(奴賊)들과 잇달아 화친하여 통교하는 폐백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미년(1619, 광해군 11) 심하(深河)의 전쟁 때는 비밀히 장수에게 부탁해서 적에게 투항케 하여 불측한 일을 도모하였습니다. 신유년 선천(宣川)의 사변 때에는 심복과 변방 신하들로 하여금 싸우지 못하게 하여 군사를 끌고 들어가서 도독 모문룡(毛文龍)을 결박하여 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니, 그 계책이 참혹하였습니다. 이것은 도독 모문룡이 오랫동안 국경에 주둔해 있어서 듣고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이 천명을 어기고 황상을 기망하여 선왕의 뜻을 허물어 버린 것은 첩이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필시 황상의 귀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황제께서 보낸 칙서는 중도에 머물러 둔 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오라, 왕인(王人)의 사신이 나오면 꼭 구금하도록 하여 출입을 제한하게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황상의 명을 업신여김은 물론, 역시 그 숨긴 일이 황상께 알려질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선국왕(先國王)의 후손인 종실과 원로 대신들을, 여러번 큰 옥사를 일으켜서 거의 없애고 귀양보내거나 배척하였습니다. 폐희(嬖姬)ㆍ행첩(幸妾)ㆍ외척(外戚)ㆍ권간(權奸)들과 안팎으로 연결하여 정치는 뇌물로 이루어지고 옥사는 돈으로 팔려서 궁궐문은 저자 같았고, 포학한 불꽃은 하늘을 그을릴 듯했습니다. 탐관 오리들은 각 고을에 펴져 있어서 살을 베어 먹고 뼈를 갉아먹어 백성들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혼은 멋대로 궁궐 건축에만 뜻을 두어, 밤낮으로 거들먹거리면서 인가 천여 호를 허물어 버리고 궁궐을 지어서 누대와 정사가 한없이 사치스럽고, 도성 가운데는 관청집이 죽 늘어 있었습니다. 공사의 번거로운 일이 10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아서 국가의 용도가 텅 비어 있었고, 지출할 것을 대지 못해서 세금의 명목을 널리 세워 받아들이고 거두어들이는 것이 대중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다가 삯군에게 쏟으니 미려(尾閭)와 마찬가지로 못할 짓이 없었습니다. 무당의 요망한 말로 인하여 소경왕의 무덤을 뚫어서 거의 광중(壙中 시체를 묻은 구덩이)까지 이르렀으며, 요망한 점장이와 요망한 중들을 궁궐 내에 길러서 그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서 천리와 인륜이 함께 끊어졌습니다. ...

 

●5월 23일

○ 강화 부윤의 장계는, ‘이달 21일 3경쯤 폐세자(지祬 1598-1623)가 담장 안에서 땅을 파서 구멍을 70척이나 뚫고 구멍으로 도주하는 것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25일

○ 강화 부윤의 장계는, ‘24일 미시에 폐빈(廢嬪)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 의금부 도사의 장계는, ‘폐세자를 다시 위리 안치하였다.’는 것이었다.

 

●6월 3일

○ 우참찬 이귀(李貴)가 상소하기를,

“옛날 영웅들이 그 시대를 만회(挽回)한 것을 보오니, 모두가 한때의 인재들을 거두어 쓰는데 있었습니다. 선왕조 때부터 사림들의 논의가 나뉘어 동인과 서인이 되고, 폐조에 와서는 대북(大北)ㆍ중북(中北)ㆍ소북(小北)의 당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소위 대북이란 것은 다 흉악한 역적의 무리들이니 본디 말할 것조차 없으며, 중북ㆍ소북도 역시 사류(士類)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쓸만한 인재가 없다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소소한 흠을 버리고 등용하소서. 서인과 남인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류이지만 역시 정의가 서로 맞지 않아서 부딪치면 의심을 사게 되어 시국의 어려움을 같이 구제할 수 없으니, 어찌 국사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25일

폐인 지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전교에, ‘의복ㆍ금침ㆍ관곽을 폐빈(廢嬪)의 예대로 하라.’ 하였다.

 

■인조 15년(1637)

인조는 왕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감지하고 왕권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광해군 : 출생1575-폐위1623(49세)-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이배 1637(63세)-사망1641(67세) :을 죽이지는 않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서 끝냈다. 이후 제주도로 이송된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가시울타리 안에 위리 안치되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종들에게 영감이라 불리는 수모를 받았지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유난히 광해군을 모질게 대하는 궁녀가 있어서 참다못한 광해군이 질책을 한마디 하였다. 그러자 그 궁녀는 광해군에게 ''영감이 제대로 왕노릇을 했어도 이런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하면서 되려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는데, 광해군은 모든 것을 달관한 듯, 아니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숙인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을 하방에 두는 등의 모욕적 처사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시점에서 이미 인생무상을 느끼고 달관했던 것일지도. 그러한 성품은 그가 유배지에서도 천수를 누리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해당 유배처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의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로 비정되며 현재 그곳에 광해군 적소 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제주도로 가기 직전 광해군이 남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인조실록 42권의 인조 19년 7월 10일 1번째 광해군 사망 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시를 짓기를

 

風吹飛雨 過城頭 / 풍취비우 과성두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瘴氣薰陰 百尺樓 / 장기훈음 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 來薄暮 / 창해노도 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山愁色 帶淸秋 /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 王孫草 / 귀심염견 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洲 /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 消息斷 / 고국존망 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烟波江上 臥孤舟 / 인파강상 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다만 위의 시는 그가 제주도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것은 아니다. 보안을 위해 교동도에서 이송하기 전부터 이송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이동 과정에서는 배에 장막을 둘러쳐서 향하는 장소를 알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에야 이원로의 말을 통해 새 유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광해군은 매우 당혹해하며 "어째서 이런 곳에! 도대체 어째서!"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당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오지였다.

이후 제주목사였던 이시방(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 광해군의 신변을 맡았으며, 결국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석해하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손수 염습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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