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광해조일기(작자 미상)

청담(靑潭) 2016. 1. 3. 10:25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1623

작자 미상

 

 

광해조일기 1(光海朝日記一)

●1608, 선조 41, 광해군 즉위년 2월 14일

장령(掌令) 윤양(尹讓), 지평(持平) 민덕남(閔德男), 헌납(獻納) 윤효선(尹孝先), 정언(正言) 이사경(李士慶)과 임장(任章)이 아뢰기를,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 오랫동안 딴 뜻을 품고 사사로이 군기를 감추어 두고 몰래 결사대(決死隊)를 기르더니, 지난해 10월 대행대왕(大行大王)이 편찮으실 때부터 도적의 무리들을 많이 모았을 뿐 아니라 또한 장신(將臣)들과 결탁하고 무사(武士)들을 소집하여 밤낮으로 남몰래 반역을 꾀한 것을 국민들이 모두 밝게 아는 바이며, 선왕(先王)께서 승하하시던 날에는 발상(發喪)하기 전인데도 공공연히 자기 집에 나갔다가 한참 뒤에야 비로소 달려 들어왔는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가병(家兵)을 지휘한 흔적이 뚜렷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궐과 지척인 곳에 있으면서 집을 짓는다고 핑계 대고, 철퇴(鐵椎)와 환도(環刀)를 빈 섬에 싸서 많은 수량을 자기 집에 들였으니, 예측할 수 없는 환난이 조석에 임박하였습니다.

청하옵건대,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빨리 대신과 병조에 명을 내리시어 속히 처치하여 외딴섬으로 귀양보내어 전하의 우애하시는 지극한 정을 보전하게 하시고, 중외(中外)의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는 것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형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계사(啓辭)를 보고 민읍(悶泣)함을 견딜 수 없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비망기(備忘記)에

“나라가 불행하여 이런 공론이 있으니, 동기간으로서 어찌할 바를 몰라 스스로 통곡할 뿐이다. 선왕이 남기신 말씀이 정녕 귀에 쟁쟁하니, 나는 차마 그 말씀을 저버릴 수가 없다. 여러 대신들이 잘 상의해서 선처하여 힘써 그의 목숨을 보전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다.”

하였다.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판부사(判府事) 허욱(許頊)등이 아뢰기를,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목숨을 보전시키는 지극한 뜻이오니, 그렇게 속히 처결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는 일은 차마 못하겠으나, 이미 나갔으니, 당상 무장당상(堂上武將)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집을 지켜 뜻밖의 일을 막도록 하시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다시 아뢰어 이진을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고언백(高彦伯)ㆍ박명현(朴名賢)이 몰래 딴 뜻을 품고 있으니,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고언백 등을 잡아다 국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옥당에서 세 번 연달아 차자(箚子)를 올려 이진을 외딴섬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전한(典翰) 최유원(崔有源)이 주로 논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진이 방금 옷으로 얼굴을 싸서 부인 차림을 하고 사람에게 업혀 빠져 나가는 것을 본조 낭청(郞廳)이 멀리서 보고 알아차려 급히 붙들어다가 비변사(備邊司)에 들여다 두고 장수를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삼사(三司)에 말하라.”

하였다.

 

15일

금부(禁府)에서 아뢰기를,

이진의 배소(配所) 정하는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이산해(李山海)는, ‘진도(珍島)가 좋지만, 지키기를 굳게 하여 민해(民害)를 없애고, 나루터를 엄히 경계하여 국인들의 의심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은, ‘교동(喬桐)도 외딴섬이니, 멀고 가까움은 관계가 없고, 또 생각하면 이진이 난폭하고 방종함은 익히 들었지만, 딴 음모를 하였다 함은 아직 그 자세한 것을 모르니, 내쫓아서 사람축에 들지 못하게 한 것은 이미 공론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 이진을 안전하게 할 바를 생각하여 우애의 정을 펴도록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니, 만약 수토(水土)가 맞지 않고 찬 안개와 이슬을 맞아서 놀라 걱정하거나, 지키는 신하가 삼가 보호하지 못하여 약을 써도 소용이 없게 되어서 성상(聖上)의 우애하시는 정에 한없는 슬픔을 안게 한다면 어찌 유사(有司)의 죄가 아니랴. 지금 계책으로는 관가의 가까운 곳에 두고 의식을 풍족하게 하여 고생스러움을 면하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고, 판부사 기자헌(奇自獻)은, ‘옷과 처첩(妻妾)을 보내어 서로 의지하고 살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0일

임해군(臨海君)의 진도(珍島)로 가는 길이 이미 호서(湖西)를 지났을 때, 전교하기를,

“남쪽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급히 선전관을 보내어 교동(喬桐)으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이진(임해군)이 교동(喬桐)에서 죽었는데, 사람들 모두 현감(縣監) 이직(李稷)이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사신 이호민(李好閔)ㆍ오억령(吳億齡), 서장관 이호의(李好義)를 모두 파직시켰다.

좌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삼공이 인퇴한 것이 자기가 올린 소 때문이라 하여, 소를 남겨 두고 영남으로 돌아갔다.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 간곡히 타일러 돌아오게 하였으나, 정인홍은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이 자문(咨文)을 보내오기를,

“우리 나라가 비록 귀국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똑같이 중국에 대해서 신(臣)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모두 천지 안에 있어서 마음으로 서로 비춰 주고 정신으로 서로 오간 바로, 여러 번 후하게 주시는 은혜를 받았고 해마다 문안함이 끊이지 않으니, 우리 나라가 무엇을 잘하여 이렇게 귀국에게 훌륭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까. 우리 나라가 근년에 중국 조정에서 관복(冠服)을 나누어 주고 왕의 벼슬을 계속 봉해 주신 은덕을 입었습니다. 만약 귀국과 형제의 의를 맺게 되어 함께 중국 조정의 번병(藩屛)으로서 고굉(股肱)의 신하가 될 수 있다면 지금 이후로는 영원한 동맹을 맺어 귀국이 형이 되고 우리나라가 아우가 되어 우러러 중국 조정을 섬기고, 화목하게 빙문(聘問)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고, 이어서 각색의 베와 비단 등을 보내 왔다.

 

●1609, 광해군 1년

책봉 주청사(冊封奏請使) 이덕형(李德馨)ㆍ황신(黃愼) 등이 인준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3월

명 나라 황제가 태감(太監) 유용(劉用)을 보내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라는 고명(誥命)과 왕비 유씨(柳氏)의 고명(誥命)을 내렸다.

창덕(昌德)ㆍ창경(昌慶) 두 궁의 중수가 완공되었다.

 

8월

배신 신흠(申欽) 등을 보내 세자를 책봉해 주기를 주청하였다.

 

●1612, 광해군 4)

8일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차자(箚子)는 이러하다.

...아, 기축년(1589, 선조 22) 역변(逆變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이후로,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 모함하여 역적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과 역적을 놓아 주라는 논의가 그들이 싸우는 기치가 되어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이런 습관이 점점 고질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위에서 통촉하시고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셨더라면 사람마다 모두 자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이니, 어찌 완전한 사람이 있게 되겠습니까.

현재 인심은 날로 이산하고 조정은 날로 어지러우며 외적의 침입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형편인데도 군비는 털끝만큼도 믿을 데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물이 새는 배를 바다 가운데 띄워 놓았는데 돛대는 부러지고 닻은 끊어졌는데도 멍하니 수리할 줄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으므로 한번 풍랑을 만나면 장차 어디에 정박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로 사람들이 무서워 떨고 있는 일입니다. 조정에 이 일을 깊이 염려하여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고 서로 논쟁하는 것만을 훌륭한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신이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의 일컬음)으로 벼슬에 나와 지금까지 34년이 되었사온데, 그 동안에 두 임금님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일찍이 조정의 온갖 폐단이 모두 사대부가 붕당(朋黨)을 지어 싸우는 폐습에서 일어난 것을 보고, 매양 개탄(慨歎)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범순인(范純仁)이 자신을 책망함에는 분명치 못할까 두려워하고, 남을 책망함에는 너그럽지 못할까 두려워하라고 말하였는데, 벼슬하는 이는 이로써 스스로 힘쓰고, 또 친구에게 권하면 자기 당파만을 두둔하는 폐습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일 양사(兩司)의 합계(合啓)는 이러하다.

...《대명률(大明律)》과 우리나라의 《대전(大典 경국대전)》에는 다만 일반적인 법률만을 논하고 특수한 경우의 형벌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으므로 추형(追刑)에 대한 조문이 실려 있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반역한 역적에 대해 살아 있을 적에 처형하지 못한 것을 죽은 뒤에 추형하지 못한다면 죽은 뒤에는 죄를 논하지 말라는 조문이 어째서 법전(法典)에 밝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조정의 역대 임금께서 단행하셨으며, 선왕 때에도 정여립(鄭汝立)의 시체에 정형(正刑)을 실시하셨고, 전하께서 김척(金滌)ㆍ유팽석(柳彭錫)을 추형하신 것도 실로 옛 법을 따르신 것입니다. 정형을 가하지 않고 역적의 괴수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난신적자의 무리가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장차 반역을 꾀할 자가 김직재(金直哉)에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속히 추형할 것을 명하시어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풀어 주소서.”

 

●계축년(1613, 광해군 5)

이에 앞서, 죽은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 박응서(朴應犀),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심전(沈詮)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인(朴致仁)과 박치의(朴致義) 등이 사우(死友 죽음을 같이하는 벗)가 되어 여강(驪江)에서 같이 살면서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자칭하고, 몰래 도적질을 하였으나, 오래도록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다. 계축년 봄에 박응서가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으므로 상인의 집에서 포도청에 고발하여 박응서 등이 잡혀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때 한희길(韓希吉)ㆍ정항(鄭沆)이 포도대장이었는데, 박응서를 유혹하기를,

“네가 만약 이러이러하게 진술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세울 수 있다.”

하니, 박응서가 드디어 다시 진술하기를,

“우리들은 절도가 아닙니다. 장차 큰일을 일으키려고 식량과 기계를 준비하려 한 것입니다. 일찍이 일곱 친구와 함께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습니다.”

하였다. 한희길 등이 드디어 흔연히 공초(供招)를 받아 가지고 들어가 아뢰었다.

 

칠서지옥(七庶之獄)

'칠서'란 '일곱 명의 서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이 현실 개혁의 뜻을 품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1608년에 제기한 서얼허통(庶孼許通, 서얼들도 관직에 등용되도록 요구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있었다. 1613년 봄, 서인의 영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위시하여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 일곱 명의 서자들이 조령에서 은상(銀商, 은을 사고파는 장사꾼)을 살해하고 은 700냥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문(鞠問) 도중 이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일곱 명의 서얼들을 중심으로 거사 자금을 확보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이 역모 계획은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역모의 수창자로 지목된 영창 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이 화를 당한 것은 물론이고, 집권층 북인의 반대 세력이었던 서인들이 대거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결국 영창 대군까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광해조일기 2(光海朝日記二)

●1613, 광해군 5

□일 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상소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신의 나이 70에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몸은 마르고 정신은 쇠약해져서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부르심을 받고도 곧장 달려가지 못하여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하온데도 꾸지람이나 벌을 내리지 않고, 성지(聖旨)가 또 내려 바깥의 근심을 걱정하고 난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고, 나라 일에 힘써 임하라고 분부하시오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올라가서 성은에 보답하는 것이 신의 직분입니다마는, 듣자옵건대, 역적이 추대한다고 말한 것 때문에 대군이 지금 여러 신하들이 죽이기를 청하는 중에 있다 합니다.

아, 대군이 무슨 죄가 있기에 여러 신하들이 죽이고자 하는지 그 뜻을 신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대군에게 법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은 전날 역적 이진에게 전은(全恩)할 수 없던 것과 같습니다. 저 역적 이진은 평소에 죄악이 가득 차 있고, 역모가 뚜렷하여 은폐하기 어려웠으며, 왕실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도 신하들이 감히 전은이란 말을 꺼냈습니다. 지금 대군은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라고 합니다.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니 필시 역모가 무슨 일인지 몰랐을 것인데, 어찌 참여하여 알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군에게는 털끝만큼도 죽여야 할 죄가 없음은 온 나라 인민이 모두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천지 귀신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인데, 조정에서 죽이기를 청하는 말을 합니다. 전에는 큰 죄인을 놓아 주자고 하였고, 지금은 죄 없는 이를 죽이자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신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비망기에 ‘선왕의 유명(遺命)이 바로 오늘을 위해서 염려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시는 영령이 여기에 오르내리시는데, 어찌 차마 마음을 쓰겠느냐.’ 하셨다 하오니, 위대하도다, 성명의 말씀이시여! 어질도다, 성명의 마음이시여! 이 마음을 넓히시고 이 말씀을 실천하시어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시고 백성을 사랑하시와 민심이 모두 기뻐하게 되면 국운의 무한한 발전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온 조정의 신하들이 성상의 뜻에 순종하여 전하를 허물없는 곳으로 인도할 줄을 모르니, 신은 참으로 마음아픕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영창대군을 죽이면 인목대비께서 반드시 참지 못하실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혹 자결이라도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천하 후세에 무슨 말로 변명을 하시겠습니까. 신은 여러 신하들이 장차 전하로 하여금 큰 불의(不義)에 빠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만일 대군이 자라서 마음과 행실이 역적 이진과 같이 되어서 반역을 꾀하게 된다면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죽여도 가합니다. 그리고 역적이 추대하였다는 말이 비록 대군에게 관여된다 하더라도 만약 그 추대의 모의를 한 자가 조정에 있으면서 혹 형벌을 면하고 있다면 겨드랑이 밑의 벌이나 소매 속의 뱀이나 전갈 같아서 앞으로 다가올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고 죄가 없으면 반드시 용서하소서. 죄가 있는데도 벌주지 않고, 죄가 없는데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닐 것입니다. 신의 하는 말이 매양 여러 신하들과 같지 않습니다. 말이 같지 않으면 마음이 같지 않으니 마음이 같지 않으면서 서로 용납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데 어찌 나라 일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관직을 빨리 갈아치우시고 시골에 내치시어 평소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신은 지극히 감격하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1615, 광해군 7 2월

6일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의 차자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수년 전부터 노병(老病)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한 번도 국청(鞫廳)에 참석한 적이 없고, 또한 문을 열고 손님을 만나본 적도 없으므로 추국(推鞫)한 전말과 바깥의 말에 대하여 그 자세한 것을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유생들이 대비를 동요시킨 대간을 죄주기를 청할 때에 조정의 의논을 듣자오니, ‘대신(臺臣)은 다만 따로 거처하게 하라는 일을 말했을 뿐이고, 실로 동요시키려는 뜻은 없었다.’고 합니다. 경연(經筵)에서도 그러한 말이 없었으므로, 신이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나중에는 그쳤습니다.

저번 해조(該曹)에서 교서를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의견을 수렴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이 일은 추국하는 곡절에 관계된 것이므로 병으로 누워 있던 신의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고, 해조의 공사에 이의(異議)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길거리의 뜬소문을 들으니, 인심이 흉흉하여 머리를 맞대고 ‘이 일로 말미암아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하니, 신이 놀라서 간이 떨어지고 혼이 날아갈 듯합니다. 어머니가 비록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사이는 명분이 지극히 크고, 윤기(倫紀)가 지극히 중하오며, 성인은 인륜의 지극하심입니다. 성명하신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혹 조정에서 과연 이런 의논이 없었다면 신이 길거리의 뜬소문을 경솔히 믿고 미리 지껄인 죄를 피할 수 없사오니, 신의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리어 국인의 의심을 안정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는 것같이 해야 하니,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그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마음입니다. 신이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하여 조만간에 죽을 것이온데, 깊고 두터운 은혜를 받고도 갚을 길이 없사와 차자를 올리면서 떨리고 황송하여 글을 이루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1616, 광해군 8년 12월

25일 합계(合啓)하여 아뢰기를,

“행사직(行司直) 윤유기(尹惟幾)는 본래 간사하고 악독한 자로서 그 성질은 독사와 같고 그 욕심은 개돼지처럼 탐욕스러워 그 집안에서의 행실로 말하면 어미가 죽었어도 장사를 지내지 않았고, 아비의 첩을 팔아먹었으며, 재물을 다투어 그 형을 죽였습니다. 그 처신하는 것으로 말하면 백성의 논밭을 억지로 빼앗았고, 벼슬자리에 있을 때에는 탐욕스럽고 더러웠으며, 권세에 아부하여 혼인을 부탁하는 데에 한평생 마음을 쓰는 등 만 가지 죄악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여러 번 대관의 논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버림을 받아 뜻을 잃고 늘 불평 속에 지내면서 앙심을 품고 있다가 간사한 사람의 뜻을 받들어 그의 아들 (윤)선도(1587-1671)를 꾀어서 소를 올려 조정을 모함하고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려고, 이첨을 공격하는 체하면서 실상은 임금을 모함하였습니다. 경방(京房)이 한 원제(漢元帝)와 문답한 말을 인용하여 임금을 방자하게도 주(周) 나라 때의 폭군인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두 임금에다 비유하고 결론 내리기를, ‘반드시 한 원제의 소견만도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모욕하고 우롱하여 임금의 마음을 떠보기를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부도(不道)한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또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弑害)한 악명(惡名)을 역적을 다스리라는 사류에게 씌워서 한 함정을 만들어 모조리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영경(永慶)을 위하여 복구(復舊)를 도모하고, 제남(悌男)을 위하여 옥사를 뒤엎으려 하였으며, 사특한 논의를 선동하여 주창한 원익(元翼)을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하였고, 역적 이의(李㼁)를 두둔한 덕형(德馨)을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다 하였으며, 사사로운 글로써 전하를 비방한 희수(喜壽)를 ‘도리어 우뚝이 서서 굽히지 않았다.’고 하여 세 간사한 사람에게 부회(附會)하여 그들을 칭찬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무적(茂績)ㆍ택뢰(澤雷)ㆍ효성(孝誠)에 이르러서는 모두 임금을 속이고 위협한 역적으로서 종묘사직에 죄를 지었는데도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냈는데 그가 감히 나라에서 이미 정한 벌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두둔하기를 이렇게까지 하였습니다.

임금을 잊어버리고 역적을 두둔한 자를 가리켜 충현(忠賢)이라 하고,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사람을 도리어 역당(逆黨)이라 하여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섬멸하여 나라가 텅 비게 하고야 말려고 하오니, 그 뜻이 장차 전하를 어떤 처지에 놓으려는 것입니까. 그 임금을 업신여기고 국법을 멸시하며, 역적의 무리를 두둔하고 조정을 모함한 죄는 아비와 자식이 똑같습니다. 청하옵건대, 유기와 선도를 모두 외딴 변방(邊方)에 안치(安置)하소서.”

 

 

광해조일기 3(光海朝日記三)

●1617년

우찬성 허균(許筠)(1569-1618)이 이이첨(李爾瞻)과 합소(合疏)하여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무뢰한들을 불러모으자, 시골 비렁뱅이들이 날마다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허균이 옷과 밥을 대고 유건(儒巾)과 유복(儒服)을 갖추어 주니, 이들은 번갈아 무도(無道)한 소를 올렸다. 허균은 또 그의 도당인 김언황(金彦滉)으로 하여금 경운궁(慶運宮 대비가 계신 곳)에 시서(矢書)를 던져 넣고 사람을 시켜 이를 고발하게 하니, 그 가운데 상을 배척한 것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또 유언비어를 만들어 ‘이 시서는 아무와 아무가 삼청동(三淸洞)에 모여 한 짓으로 짐작된다.’고 하여 먼저 조희일(趙希逸)을 죄에 몰아 이산(理山)에 안치시켰으며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상이 이것을 알고 놀라서 대신들과 세 대장(大將)을 불러 의논하니 수상 기자헌(奇自獻)은

“이것은 간사한 사람이 화를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계책이니, 반드시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간쟁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자, 다음날 새벽 드디어 필마로 성 밖을 나와 곧장 강릉(江陵) 산사(山寺)로 가서 누워 버리고 일어나지 않았다.

상이 승지 이홍주(李弘冑)를 보내어 그를 부르자, 기자헌은 차자를 올려 시서의 변괴를 저지른 자는 따로 있음을 극력 주장하였으니 곧 허균을 지목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의 마음도 약간 풀리게 되고 사건이 드디어 잠잠하게 되었다. 허균은 이미 기자헌과 적이 되었으므로 모사(謀事)는 더욱 급하게 되었다.

무릇 대비의 죄를 성토함에 있어 극도로 기율에 맞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의(李㼁)가 본래 선묘(宣廟)의 아들이 아니고 민간 집 아이를 데려다 궁중에서 길렀다고까지 하였다. 또 서응상(徐膺祥)이 궁중을 드나들면서 바깥 사람들과 몰래 통모(通謀)한다 하여 서응상을 죽이었으며 유생들을 사주하여 잇달아 소를 올려 직접 대비를 배척하게 하면서, 토역(討逆)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허균의 도당인 김개(金闓)와 원종(元悰) 등이 그의 막하에 들어가 모사한 것이다.

 

5월

형조 판서 허균이 화심(禍心)을 품고 먼저 공을 세워 나라의 권력을 잡으려고 항상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조야(朝野)를 현혹시키더니, 이번에는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중국의 《임거만록(林居漫錄)》이란 책에 종계피무(宗系被誣)의 사실이 지금까지 씻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광해는 이 말을 듣고 당황하여 즉시 허균에게 맡겨 변무(辯誣)하도록 위임하였다.

허균은 금은보화를 많이 싣고 갔다 온 듯이 하고 피차의 어보(御寶)와 문적을 위조하여 회보하니, 광해군은 크게 기뻐하여 특사를 내리고 증광과(增廣科)를 보였으며, 존호(尊號)를 올려 서륜입기 명성광열(敍倫立紀明誠光烈)이라 하였다.

원임대신(原任大臣) 심희수(沈喜壽)가 역적 허균의 정상을 알고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이전 기축년에 벌써 분명히 씻어졌는데, 오늘에 와서 또 무엇을 변무한단 말이냐.’고 하였는데, 허균이 이 말에 매우 앙심을 품고 곧 없는 죄를 꾸며서 축출하니, 심 정승은 드디어 서울을 떠났다.

 

24일 영의정 기자헌(1562-1624)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유생들 소장을 묘당에 내릴 것을 청한 일에 대하여 계하하셨습니다.

신이 본래 학식이 없고 재주가 비열하며 인망이 가벼운데, 마침 사람이 모자라는 시기를 만나 정부에 수만 채웠습니다. 신이 만약 주장하여 갑자기 모후를 폐하였다가 국사(國史)에 기록되기를, ‘아무가 제 마음대로 폐하였다.’ 하면 만세의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성명(聖明)도 반드시 신 등을 죄주시고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전일 대간들은 단지 ‘모후와 별처하소서.’란 말만으로도 삭직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오늘 만약 이런 일을 하였다가 그 뒤에 신들을 죄주라고 청하는 자가 있다면 전하의 인자하심으로도 용서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영부사 이항복(李恒福),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은 밖에 가 있고, 전 우상 정창연(鄭昌衍)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우상 한효순(韓孝純)은 병으로 휴직한 지 여러 날이 지났으므로 대신들 중에 신 혼자만이 서울에 있습니다. 이런 막중막대한 일을 혼자서 어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또 계축년에 모든 대신들이 말씀을 드릴 적에 신 역시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 비록 자애(慈愛)롭지 못한 말이 있었지만, 말을 전후로 달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해 이원익(李元翼)이 견책을 받을 때 삼사들은 ‘조정에서는 본래 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원익이 늙고 망령되어 오명을 임금께 입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경자 연간에 전하에게 충성을 극진히 한 이원익이었지만 도리어 죄를 면치 못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성상이 우순(虞舜) 같으신 효행이 있다.’ 하여, 대성인의 성덕을 흠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25일

영상 기자헌(奇自獻)이 도당에 앉아 조정 백관의 의론을 봉상(捧上)하였다.

○ 이날에 양사가 중학(中學)에 같이 모였는데, 영상을 논계하기 위함이었다. 백관의 수의(收議)는 다음과 같다.

○ 영중추 이항복(1556-1618)(李恒福 그때 동교(東郊)에 있으면서 의론을 올렸다) : 신이 8월 초 9일에 거듭 중풍병을 얻어 죽지는 않았으나 정력이 이미 탈진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며 죽음에 임박한 것을 안 지 반 해가 되었습니다. 공사(公事)에 관한 것을 대답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 일은 국가의 대사이므로 남은 목숨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병을 칭탁하여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획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 앞에는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이 옛 성인의 밝은 훈계입니다.

우순(虞舜) 임금이 불행하여 그의 완악한 아버지와 어리석은 어머니는 항상 순을 죽이려고 우물을 파라, 곳간을 수리하라 하여 위태한 경우가 극도에 달하였으나, 부르짖어 울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부모님을 사모하였으며, 부모님에게 잘못된 곳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부모가 설령 자애를 베풀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는 효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의 의리에는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급(伋)의 처된 사람은 백(白 자사의 아들)의 어머니가 된다.하였으니, 진실한 효의 중함이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제 바야흐로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시어 점차로 교화될 가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임금 계신 곳에 이르렀습니까. 지금 하실 일은 순 임금의 덕화를 받아 효도로써 화합하게 하되, 간단없이 하여 노여움을 돌려 자애스럽도록 하시는 것이 우매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북청(北靑)에 귀양가다.)

 

12월 18일

금부에서 기자헌을 정평(定平)에, 이항복을 용강(龍岡)에 각각 정배하였다고 아뢰었다.

○ 지평 정재중(鄭再重)과 정언 이강(李茳)이 아뢰기를,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 등은 다 임금을 저버리고 종묘 사직을 잊어버린 죄인입니다. 먼 곳으로 옮겨 정배함으로써 엄중히 처벌하시기를 청합니다. 또 금부에서 사정(私情)을 따라 제 마음대로 정배하였으니, 금부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시키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함께 추고하라.”

하였다.

○ 금부에서 기자헌을 삭주(朔州), 이항복을 창성(昌城)에 각각 고쳐 정배하였다고 아뢰었다.

 

●1618, 광해군 10년 1월 7일

○ 우참찬 허균이 상소하기를,

“신이 초4일 이경에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둠 속에서 어떤 장정이 울타리 사이에 엎드렸다가 폭행을 하려고 할 즈음 말 뒤에 따르던 종이 마침 그것을 보고 도적이야 고함을 치자, 그는 곧 도망쳐 인가에 숨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수색한 끝에 결박하고 물으니, 처음에는 문창(文昌 유희분(柳希奮)의 봉호) 집 종이라 하다가 다음에는 정승댁 종이라 하기에 어느 정승댁이냐 물었으나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께 포도청에 넘겼더니, 어제 일선위(一善尉)의 여비가 와서 놔주기를 청했고 또 모의장(毛衣匠)으로 문창 집에 출입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신은 제가 이 대론을 단독으로 담당하였으므로 원수진 사람이 미워하여 마치 이사도(李師道)가 배도(裵度)를 해치려던 것과 같이 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어찌 그녀의 말을 듣고 놔 주겠습니까. 그런데 대장(大將)들은 서로 미루고 지금까지 국문을 하지 않으니, 그들이 권세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은 이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외롭고 약한 처지로 화근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론을 주장하자, 이의를 가진 자들이 신을 죽이려 한 것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날 기(奇)의 집에서 나에 대한 원망으로 그를 사주하여 흉한 소를 올리게 한 것이며, 이영은 신과 본래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전번에 그가 계사(啓辭)를 올리는데, 임금을 위태롭게 하기를 모의한다는 말로 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그러나 준격의 소가 아직 안에 있고 조정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영이 어찌 알고 불측한 죄명을 신에게 씌웠겠습니까. 신이 곧 국청(鞫廳)에 나아가 이영에게 너는 어떻게 내가 임금을 위태롭게 하기를 모의한 곡절을 아는가고 물으려 하던 차에, 성상께서 다만 서서히 결정을 짓겠다 하시므로 신은 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기만 하였고, 기(奇)가 귀양갈 때에도 다시 혈소(血疏)를 올려 그와 대질하려 하였으나 대계(臺啓)가 있어서 아직 처치하지 못하였으므로 천천히 결정을 짓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신은 입대하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자객이 횡행하여 먼저 신을 제거하려 합니다. 신이 한번 죽은 뒤에는 다시는 신의 지극한 원통을 씻을 수 없으므로 대론이 바야흐로 일어나는 날에 감히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간곡한 정성을 아뢰니, 죄상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자헌이 신을 꼭 죽이려는 것은 신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계축년 변이 일어나자마자 서궁의 패악한 역적의 사실이 다 드러났을 때 신이 기자헌에게 말하기를, ‘이는 신자로서의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찌 지극히 높은 대비의 지위에 두어 인륜의 기강을 멸하려 하는가.’ 하자, 기자헌이 말하기를, ‘자네는 그런 말을 하지 말게. 김제남은 혼약(昏弱)한 사람이다. 어찌 그와 같은 비상한 도모를 할 수 있겠으며, 궁중에서 저주한 일은 나인들이 저들끼리 하고 대비에게 화를 전가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하물며 우영의 초사에는 다른 말은 없었고 양갑은 응서(應犀)의 꾀에 빠져 횡사하게 될 것을 분하게 여긴 끝에 국가에 화란을 일으키려고 일부러 그런 흉악한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이 비록 역적을 도모하였다 한들 누가 따르겠는가. 울요자(尉繚子)의 말에, 엄중한 형벌에는 아무리 지사(志士)라 할지라도 없는 죄를 자복할 수 있다 하였다. 지금 임금께서는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도 아직 아들이 없으니, 만세 뒤에 바른 의론이 일어나면 오늘날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비록 자손일지라도 또한 어떻게 낯을 들 수 있겠는가. 나의 외조는 바로 임백령(林百齡)인데, 을사년 일을 말하면 나는 낯이 붉어지게 되니, 자네는 그런 의론을 하지 말게.’ 하였으니, 그는 김(金)은 임류(任瑠)에 비하고, 양갑 등은 없는 죄를 자복했다는 생각이었으므로, 신은 한심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자질(子姪)들이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므로 뒷날 일을 위하여 이런 의론을 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기자헌은 이 말이 누설될까 매우 겁을 내었고, 신도 또한 입밖에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밖에도 전하를 원망한 말이나 화란을 요행하게 여긴 말로서 신의 귀에 들어온 것은 아울러 다 진술할 수 없습니다. 준격의 상소는 신이 알지 못하나 준격은 신에게 수학하였으니, 교훈의 말밖에는 하지 않고 나이 어린 자와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물며 그의 흉한 소에 불측한 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가 만약 들었다면 어찌 일찍 전하께 고하지 않고 그의 아비가 죄를 받은 뒤에야 발설하겠습니까. 그 죄만 해도 또한 매우 큽니다. 더구나 없는 것을 무고하여 남을 모함한 말은 신하로서 들을 수 없는 것인데, 문자로 쓰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천륜을 혼란하게 하는 상습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전하께 드리겠습니까. 그는 하늘을 거역하고 임금을 거스르는 말을 마음대로 지어 냈으니, 그 죄상은 역적보다 더합니다. 신은 통탄하는 바입니다.

병오년 겨울 신의 형 허성(許筬)이 이판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허성에게 말하기를, ‘홍로와 이영이 광주(廣州) 경주인(京主人) 집에서 밤낮으로 모여 면밀히 계획을 도모하되 못 할 짓이 없다 하니, 동궁을 위하여 외직으로 전보시키는 것이 옳겠다.’ 하자, 허성은 곧 그를 외직에 의망하여, 마침내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어서 지방으로 나갔는데, 그 후 무신년에 홍로의 심복이라는 탄핵을 받아 5년 동안 관직이 삭탈되었으니, 홍로의 도당인 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에게 붙어 요행히 죄를 면하고 좋은 벼슬자리를 얻은 다음 밖으로는 대론을 빙자하고 안으로는 관망만 하고 있습니다.

초4일 계사에 대비의 폐출이란 두 글자는 말도 아니하고 폄삭 절차를 들어 말하면서 내택(內宅)에 옮겨 두라고 하였으니, 그 본래의 속내가 여기에 다 드러났습니다. 이영이 남의 사주를 받아 보복하려고 악명을 신에게 덮어씌우니 신은 더욱 원통합니다. 신하로서 이런 역적이란 이름을 쓰고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니, 청컨대 속히 신을 기자헌과 이영 등과 같이 하옥시키어 그들과 대질하되 자헌에게는 어찌하여 음모를 일찍이 고하지 않았고 화근을 어찌 제거하지 않았는가라고 추궁하고 이영에게는 신이 임금을 모해할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서 두 사람의 간악한 죄상을 적발하여 신이 모함받은 원통함을 씻게 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임금을 위하여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종묘 사직을 붙들려 하다가 마침내 망측한 참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자객도 신을 미워하는 자의 소행이 아닐 리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통쾌하게 분변하시어 신의 원통함을 씻어 주심으로써 간사한 무리들의 도모를 누르지 않으신다면 곧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여생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은 넘치고 말은 움츠러들어 아뢰올 바를 모르겠으니, 전하께서는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자세히 살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광해조일기 4(光海朝日記 四)

●1618년 2월 10일

좌상 한효순(韓孝純)의 뜻으로 사록이 아뢰기를,

“정청(庭請)에 참여한 사람과 시종 불참한 사람을, 정원에 명령하시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살펴 분명하게 서계하라고 전교하셨기에, 낭청을 시켜 각 사(各司)의 거안(擧案)에 따라 낱낱이 조사해 보니, 당상 이상으로 참여한 사람이 2백 45명이고 시종 불참한 사람이 38명인데, 그 중에 김권(金權)과 박동선(朴東善)은 거안 중에 참여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말이 ‘병으로 시종 불참하였는데, 하인이 잘못 적어…….’ 하기에 그 하인을 즉시 잡아 가두고, 우선 조사된 것만 먼저 서계합니다. 그 나머지 당하관은 거안(擧案)의 권수가 방대하여 지금 조사중이니, 조사가 끝나면 곧 서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20일

20일 좌의정의 뜻으로 검상이 아뢰기를,

“낭청을 시켜 병조의 관안(官案)을 조사해 보니, 정청(庭請)할 때 거안(擧案)이 없습니다. 당상 군직은 부록(付祿)인 사람이 44명, 무록(無祿)인 사람이 1백 18명이요, 당하 군직은 부록(付祿)인 사람이 33명, 무록인 사람이 2백 82명인데, 일일이 분류하여 별도 단자에 서계합니다.

대개 군직이란 것이 정식 관직과 달라 조사할 근거가 없습니다. 비록 당상 이상이라도 무록(無祿)인 체아(遞兒)는 본래 한정된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그 이름이 오르게 되면 여러 해가 되어도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 상(喪)을 당한 자도 있고 혹은 파직되어 흩어진 자도 있어, 그 허다한 사람을 더욱 다 조사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당하 무록(無祿)의 무리 중에는 내삼청(內三廳)에 승진되기도 하고, 청백리 자손은 헛이름만 군직에 부쳐 놓고 사방으로 흩어져 집에 있는 사람이 극히 적고, 잡류(雜類)들에 있어서는 또한 그 중에 있기는 하나, 이들은 모두 늘 공회(公會)에 불참하는 사람들이므로, 일찍이 현직(顯職)을 지나 드러난 사람 외에는 상고할 데가 없기 때문에, 관안(官案)만 가지고 서계합니다.

 

●윤4월 29일

합사의 신계(新啓)에,

허균은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慶運宮)에 투서하는 등 온갖 반역의 죄상이 이미 민인길(閔仁吉)의 고변에서 발각되었고, 이홍로(李弘老)와 결탁하여 동궁을 모해하려는 것이 또한 기준격(奇俊格)의 소장에 나타났습니다. 균이 짊어진 죄명(罪名)이야말로 오늘날 신하인 사람으로서는 함께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초봄에 2품(二品) 이상이 정청(庭請)한 일과, 근일 의금부가 별도로 아뢴 것 역시 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죄명을 졌으니, 그 몸뚱이를 수레에 찢어 죽여도 오히려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그가 감히 초헌(軺軒)을 타며 하인을 거느리고 벽제(辟除)하는 등 마치 보통 재상과 같이 하고 있으니,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분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만약 그가 이런 죄악이 없다면, 언관이 국문을 청하기 전에 자진하여 옥에 들어가 기필코 변명하기에도 겨를 이 없을 터인데,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하고 도리어 천지간에 용납되어 교묘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죽을 상황에서 살 궁리를 찾느라 못할 짓이 없이 하고 있습니다. 대론(大論)을 가장하여 간사한 계획을 이루려고 하니 사류(士類)들은 속임을 당하였고 모든 유생들은 그의 술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전후에 올린 소장은 그 자신이 지은 것입니다. 온 나라의 공통된 논의를 가지고 자기의 공을 세울 터전으로 삼아 위로는 임금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조정을 교란시켜 공경대신을 자리에서 불안하게 만들고 삼사를 공갈하여 제 명령에 따르게 하여, 다 되어가던 의론이 이 때문에 다시 동요되고 정론을 주장한 사람이 도리어 몰리게 되었습니다.

폐출이 어떠한 의론이며 반란이 어떠한 죄상인데, 그가 감히 도당을 모아 이해로 유혹하여 대론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이 일개의 괴이한 도깨비 같은 놈을 용납하여, 제 멋대로 야유하며 변덕부림을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허균이 일생 동안 한 행위는 오만 가지 죄악이 구비하였습니다. 풍기를 문란케 하고 행실을 더럽게 하여 다시 사람의 도리라곤 없고, 요망한 일을 일으키고 참언을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인데, 이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대질하여 변명하게 되기 전에 유생들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려 요동(遼東)으로 가기를 감히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 훤하여 불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허균과 민인길및 기준격을 먼저 삭직하소서.”

하였고, 전계(前啓)는, ‘서궁(西宮)을 폐출하시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대개, ‘합사로 합계한 공론에 따라 하시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절목(節目)을 내려주기를 재촉하는 일 때문에 조용히 조섭하는 동안에 번거롭게 한단 말인가.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허균에 대한 일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완강하게 다투지 말라.”

하였다.

노적(奴賊)이 요동무원진(撫遠鎭)에 침입하여 진장(鎭將) 및 군사 수만 명을 죽이고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갔다. 황제가 진노하여 군사를 대대적으로 충돌시켜 북으로 토벌하고, 이어 본국에 조서를 내리되 군사를 동원하여 후원하라고 하니, 조정에서 홍문관 교리 이잠(李埁)을 경략군문(經略軍門) 이때 양호(楊鎬)가 경략으로 요양에 와서 진무(鎭撫)하고 있었다. 에 보내어 군사 기밀을 수집하여 듣게 하고, 또 박정길(朴鼎吉)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지휘를 받게 하였다.

참판 강홍립을 경기ㆍ호남ㆍ호서ㆍ평안ㆍ황해 등 5도(道) 도원수(都元帥)로, 평안 병사 김응서(金應瑞)를 겸부원수(兼副元帥)로, 이민환(李民寏)ㆍ이정남(李挺男)ㆍ정응정(鄭應井)을 문무종사관으로 삼아, 5도(道)에서 병마(兵馬) 2만여 명을 징발하였다.

허균이 비밀리에 그 도당을 시켜 밤마다 남산에 올라가 외치기를, ‘서적(西賊)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유구(琉球)가 또 바다 섬에 와 있는데, 성안 사람들은 어찌 피하지 않느냐.’ 하고, 또한 동요를 지어 부르기를, ‘성안이 들판만 못하고, 들판이 달아나는 것보다 못하다.’ 하니, 성안이 흉흉하여 밤낮으로 흩어져 달아나, 저잣거리가 거의 빌 지경이다.

참찬 허균이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자, 그 도당 김개(金闓)ㆍ하인준(河仁俊)ㆍ김우성(金宇成)ㆍ황정필(黃廷弼)ㆍ김윤(金胤)ㆍ우경방(禹慶邦)ㆍ현응민(玄應旻) 등을 체포하여 모두 베어 죽이고 처자까지 연좌시켜 죽이는 법을 시행하니, 조야가 고무되었고 도성 안이 안정되었다. 허균이 일찍부터 참서(讖書) 여러 천 자를 조작하여 세상에 비밀리 전파되었는데, 모두 흉참하고 상서롭지 못한 뜻이었다. 근일의 과거(科擧)의 폐단과 남산에서 밤에 외친 일이 모두 이 역적에게서 나온 것이다. 누차 임금을 권유하여 서쪽으로 용선(龍船)을 타게 하여 임금을 해치려는 음모를 이루려다가, 하늘과 신명이 도와 일이 실패되어 탄로된 것이다.

 

●1619, 광해군 11년 1월

천장(天將 중국의 장수)양호(楊鎬)가 여러 장수들과 북벌(北伐) 계책을 의정하여 각 진(各鎭)에 분부하였다. 강홍립(姜弘立) 등이 창성(昌城)에 있다가 12일에 모든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건너가 이틀 만에 탄현(炭峴)에 이르러 천병(天兵)과 만났다.

때마침 눈이 지독하게 얼어붙어 산길이 막혔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상의하기를, ‘지금 이 요동 변두리에 눈이 이처럼 쌓였는데, 더구나 깊이 들어가서는 단연 군사를 출동하여 전투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우선 후퇴하여 차차 눈이 녹는 시기를 기다려 다시 기일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곧 대군을 후퇴하였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탄현(炭峴)으로부터 바로 창성(昌城)에 와서, 대포 쏘는 기술을 시험하여 각각 은(銀)으로 상을 주고, 하루를 머물렀다가 요양(遼陽)으로 돌아갔다.

3월 4일에, 제독 유정이 강홍립(姜弘立)을 거느리고 되놈과 싸우다가 유정이 전사하니 강홍립의 군사가 항복하고, 좌영장(左營將)인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김응하가 끝까지 힘껏 싸웠는데 나무 밑에 의지하여 수검(手劍)으로 적을 무수히 죽였다. 두터운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화살이 구더기 모이듯 하여도 끝까지 부상하지 않다가 적이 창으로 찌르자 대도(大刀)를 손에 잡은 채 쓰러지면서도 끝내 칼을 놓지 않고……. 본조(本朝)에서는 호조 판서를 증직(贈職)하였고, 천조(天朝)에서는 요동 백(遼東伯)을 증직하였다.

평안 감사의 장계(狀啓)는 ‘도원수(都元帥) 강홍립등이 이미 신하의 절개를 잃었으므로, 각각 그 가족을 도내에 나누어 가두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장만(張晚)을 도원수로, 우치적(禹致績)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강홍립 등이 오랑캐에게 도착하자, 만주(滿住)의 유첩(諭帖)에 이르기를,

“한(汗)은 조선 장수에게 선유하여 알게 한다. 지금 너희들은 생각하라. 네 나라 임금이 결국 너희들을 버리겠는가. 아니면 너희들을 찾아가겠는가. 네 나라 국왕이 또다시 남조(南朝)를 도울 것인가. 이 일이 장래에 어찌될 것이며, 너희들이 지금 빨리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여기에 있으면서 날짜나 보내기를 원하는가. 너희들은 명백하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선유……”

하였는데, 강홍립이 답하기를,

“유첩(諭帖)을 받아 보고 후의에 감사합니다. 수천 명의 사람을 우리 본국이 어찌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 군사 출동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무슨 병력이 있어 다시 또 도울 수 있겠습니까. 집에 빨리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다 같은 것이지만, 오직 한(汗)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 말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4월

강홍립이 오랑캐에게 있으면서 장계하기를,

“신들이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지난 2월 21일에 강을 건너, 26일에 유 도독(劉都督)을 진자두(榛子頭)에서 만나보고 조용히 담화하였는데, 본국 군량이 오기를 기다려 전진하려 한다 하였더니, 도독(都督)의 대답이, 출동 기일이 이미 확정되어 결코 지체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3월 4일에 행군(行軍)하는데, 교 유격(喬游擊)ㆍ강 부총(江副總)ㆍ조 참장(祖叅將)이 앞서 가고, 유 도독(劉都督)이 그 다음에 가고, 장 도사(張都司)가 그 다음에 가고, 아군의 좌영(左營)ㆍ중영(中營)ㆍ우영(右營)이 뒤따라서 부차지(富車地)에 당도하였는데, 호병(胡兵)이 돌진해 오니 명 나라 군사가 크게 무너지자, 오랑캐의 기마병이 진중에 들어와 좌우에서 마구 죽여 잠깐 사이에 좌영장인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 천총인 영유 현령(永柔縣令) 이유(李有), 우영 천총인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이 모두 피살되고, 우영장인 순천 군수(順川郡守) 이일원(李一元)이 탈출하여 중영으로 들어오자 오랑캐 기마병이 뒤따라 와서 중영을 포위하였습니다.

신 등이 사졸들을 격려하여 사방으로 방비하였으나, 사졸들이 좌영과 우영이 무너진 것을 눈으로 보고 당황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어,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물도 없고 식량도 없고 또한 구원병도 없어서, 신이 부득이 화해를 청하여 호장(胡將)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와 귀국이 조금도 혐의나 원한이 없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 나라 의사가 아니라, 반드시 서로 싸우기로 한다면 우리 군사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귀국에 무슨 이득될 것 있겠는가. 강화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더니, 호장(胡將)이 승낙하고, 말하기를, ‘성중(城中)에 가서 만주를 본 뒤에 집에 돌아가게 하겠다.’ 하고, 이어 철기(鐵騎)로 사방을 포위하고 가니 부득이 오랑캐의 성으로 갔는데, 지나가는 지역의 도독(都督)과 모든 장수들이 전패한 곳 30여 리에, 쓰러진 시체가 삼대와 같이 흩어져 있었는데,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 등이 성에 도착하자 곧 뜰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좌우에 수은빛 갑옷을 입은 호위병이 세 줄로 서 있었습니다. 신 등이 계단에 올라가 두 번 읍(揖)하였더니, 만주(滿住)가 분노하여 무례하다고 책망하기에, 신 등이 부득이 두 번 절을 하였더니, 신 등을 인도하여 한 집에 머물게 하고 군사를 시켜 둘러싸 지키게 하였습니다. 소위 유대해(劉大海)란 자가 국서를 가지고 와서 신 등에게 보였는데, 그 뜻이 전적으로 상통하여 화친하는 데에 있었고, 허다한 말은 별로 따르기 어려운 청이 없었습니다.

 

●11월

강홍립 등이 장계하기를,

“지난 8월 11일 밤중에, 신 등 남아 있는 원역(員役) 19명을 협박하여, 노성(老城)을 떠나 편성(片城)에 도착한 뒤에, 목책으로 에워싸고 감시가 엄밀한데, 하루에 좁쌀 두어 되를 얻을 뿐, 나무와 물도 얻기 어려워 얼고 굶주려 고생하는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모두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기에, 그르치고 실패한 뒤에도 혀를 놀려 병화를 완화시켜 결초보은하려 하고, 또한 견제하는 계획이 혹 성공되면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될까 하여 고통을 참고 구차하게 살아온 지가 아홉 달이 되었습니다. 이곳 사정을 비록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때때로 파다하게 장차 우리 나라를 침입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만, 신 등이 화해를 재촉하여 살아 돌아오려고 이런 말을 지어냈다고 할까 두려워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근자에 이 적(賊)의 상황을 살펴보면, 국경 지방에 걱정이 극도에 달하였기에 부득이 들은 대로 아룁니다. 금번에 다시 오랑캐 사신을 보내어 만포(滿浦)에 가서 화해 여부를 적실하게 알고 즉시 돌아온다는 것은 음흉한 수작이어서 추측할 수 없으나, 묘당에서 기회를 보아 대책을 세워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당초에 신 등이 진중에서 강화하기로 약속한 것은 변방 걱정을 완화시키려던 것인데, 오늘날 사세가 이렇게 급박하고 보니, 오직 원통하고 분할 뿐입니다. 따라서 생각건대, 견제할 대책을 묘당에서 반드시 난숙하게 토의하였을 터인데, 지금까지 결정을 짓지 못한 것은 요동에서 힐난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 오랑캐가 우리 나라와 강화하려는 것은 다시 병력을 도와주지 말고 각기 국토만 지켜 영원히 침범할 뜻이 없기를 바라는 데 불과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기왕 군사를 출동하여 요(遼)를 구원하기가 다시는 어렵다고 여긴다면, 그 실정에 따라 견제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병교사(兵交使)가 그 중간에 있으니, 일시적인 강화를 언약하면 초미의 급박한 화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요, 대국을 섬기는 성의에도 조금도 결함이 없을 것이니, 요동에서도 또한 힐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망령되게 소회를 진술하여 말을 억제하지 못하고 보니, 더욱 죽을 죄가 더하였습니다.

신들의 실낱같은 남은 목숨이 차츰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오랑캐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는 날이 곧 신들의 목숨이 다하는 때입니다. 마음에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맹세하여 내려주신 밀부(密符)ㆍ인신(印信)을 조금도 실수 없이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죽게 될 때에 함께 부서지더라도 결코 감히 들판에 내던져 국가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 차례로 다 아룁니다.”

하였다.

비밀 비망기에,

“어제 강홍립의 글을 보니, 저 적(賊)이 우리에게 침범할 계획을 환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전후에 여러 차례 전교하였는데, 하루 이틀 날만 보내고 끝내 잘 처리하지 아니하여, 앉아서 종묘사직을 위태하고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니, 경(卿)들이 과연 안심되는가. 급히 잘 처리하라. 속히 강홍립의 어미ㆍ처ㆍ숙부ㆍ아우에게 사사롭게 일을 비밀리 통하게 하되, 사적인 편지에는 비록 기묘한 꾀를 부리더라도 그다지 해로울 것 없을 것이다. 여진 족속은 탐심이 많아 보화와 뇌물이 아니고서는 꾀를 쓰기가 어려우니, 강홍립의 집에서 준비하여 보내게 하는 것이 무방하리라. 강홍립 등의 죄가 중하지마는, 만일 군사를 멈추게 하여 병화를 완화시킨다면, 또한 가련하게 여길 만하다.

 

●1620, 광해군 12

조정에서 만과(萬科)에 뽑힌 사람 중에 과장에 가지도 않고 이름이 방(榜)에 들은 자가 많다고 하여, 복시(覆試)를 초시로 삼았는데, 복시가 더욱 나빴다. 다음 신유년에 모두 급제시켰다.

 

●1621, 광해군 13

3월 20일

노적(奴賊)이 요동성을 함락시켰다.노적(奴賊)이 황제라 자칭하고, 우리나라에서 조공하라는 호서(胡書)를 보내 왔다.

 

5월

삼사가 합계하기를, 이때 중북인(中北人)들이 삼사(三司)에 있었음

이이첨(李爾瞻)은 크게 간특한 자입니다. 평생 행실이 거짓으로 꾸며 세상을 속이는 짓을 능사로 알아 조심스럽게 죄악을 덮으면서 선비들의 공론이라 칭탁하니, 충신같이 보이는 간신이요, 바른 것을 어지럽히는 아첨꾼입니다. 비록 당(唐) 나라의 이임보(李林甫)와 송(宋) 나라의 가사도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 제 마음대로 당파를 유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말하면 사정을 앞세우고 공정을 망각하며 남이 저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여 곧은 절개 있는 선비의 말이 조금이라도 침범하면 엄중한 형벌로 위협하고 아부하는 무리가 드러내고 면전에서 아첨하면 좋은 벼슬로 복되게 하였으며, 그 권세가 극도에 달하여서는 기세를 돕기 위하여 눈으로 글도 볼 줄 모르는 자제 두세 사람을 연달아 과거 시험을 보게하여 좋은 벼슬자리를 역임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저의 당파가 번성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교묘하게 과거 시험의 샛길을 개척하여 미리 글제를 내고 남의 손을 대신 빌려 사사로움을 행하고 강경(講經)도 글자를 표시하여 서로 호응하므로, 일곱 대문 통과를 자기 원하는 대로 한다 라는 구절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으며, 압도(鴨島)의 노른자위를 개간하여 기름진 토지를 점령하고 능침(陵寢)의 나무를 발가벗겨 자기들의 집을 우람하게 지었습니다. 이 밖에도 남을 해치고 정사를 요란케 한 죄상이 하나뿐만이 아니니, 이이첨 전에도 이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없었고, 이이첨 뒤에도 이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일생 동안 역적 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하면서, 죄의 경중을 마음대로 속이고 꾸며 다른 사람은 얽어 매고 저의 당파는 옹호하였으며, 경희(景禧) 사건은 종묘 사직에 관한 죄인데, 문에 가서 사사로이 말하였고 뒤에서 곡진하게 덮어 주었으니, 그의 의도를 단연 알 수 있습니다.

역적 허균으로 말하면 천고에 없는 역적으로 오만 가지 악행을 하였기에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였는데 이이첨이 무엇을 취할 것이 있어서 그 집을 보호하기를 이렇게 친밀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흉한 격문의 초안을 잡아 주었다는 말이 그의 사위 입에서 나왔고, 남문(南門)에 방을 붙인 일이 역적 하(河)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모든 역적의 초사에서 나온 말들을 허균에게 추궁해야 할 것인데, 매 한 대도 때리지 않고 바로 처형하기를 주장하여 악행이 천지에 가득 차고 만고에 없는 흉하고 극도로 악한 역적으로 하여금 끝내 입을 다물고 죽어 가게 한 것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는 그의 초사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서 한 짓인데, 괴수는 이미 죽었지만, 남은 역적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원종(元悰)이 또한 하나의 허균입니다. 허균에게 문초하지 못한 것을 당연히 원종에게 문초해 보아야 할 것인데, 거짓말로 다시 의론한다 하다가 돌아서기가 바쁘게 정계(停啓)하였고, 옥당의 공론이 떼지어 일어나 공격하자, 그가 탑전에서 사나운 소리로 비국(備局)의 모든 신하들을 날쌔게 공격하였으니, 전후에 같은 수법입니다.

성상께서 위에 계시고 간사한 죄상이 모두 탄로나게 되어, 하늘이 죄주고 귀신이 죽일 것을 벗어나지 못할 줄 알게 되자, 강화(講和)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린다고 속여 남모르게 임금을 팔아먹는 흉계를 부려 그 마음이 지극히 교묘하고도 참혹하니, 천조(天朝)에 말을 올려 우리 나라에 화를 전가하게 하는 것은 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성상과 같은 대국을 섬기는 정성을 전에도 이미 모함을 입게 하고 또한 오늘날에도 팔려 넘어가게 하였으니, 임금이 욕을 당하는데 신하가 죽지 못하는 것은 신 등의 수치입니다.

이이첨이 심복인 역관을 시켜 은(銀) 7백 냥을 사사로이 사용하여 사신 양(楊)씨의 환심을 사서 양(楊)씨를 좋아하게도 하고 노하게도 하여, 이이첨은 기쁜데 전하께서는 노하시게 되었으니, 이것은 양(楊)씨가 전하를 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이첨이 시킨 것입니다. 이이첨의 죄상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간흉을 치는 일을 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를 늦추면 하루 더 화를 받게 될 것이니, 악한 놈은 미워하면서도 그것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곽공(郭公)이 망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어찌 큰 간신이 제 집에 편안히 앉아서 간사한 꾀를 못 할 것 없이 부리도록 한단 말입니까. 외딴 섬에 위리안치하소서.” 하였다.

합계에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이이첨의 매이며 개가 아니었던가. 일찍이 비굴한 모습으로 치질을 핥고 종기를 빠는 아첨을 하다가 이제 와서는 역습하여 죄주자고 하니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구나.”

하였다. 이 뒤에도 합계가 연일 올라갔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하(批下)하였다.

 

※이런 글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승정원에 근무하는 위치에 있던 관료일 가능성이 크다. 왕에게 올리는 유생들의 상소, 지방에서 올리는 장계, 삼사에서 올리는 합계 등을 능히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북파가 집권하고 있는 광해군 집권기에 상당히 공정한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이 글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는 모함과 집요함, 권신인 이이첨, 허균 등의 권력투쟁, 이원익, 기자헌, 곽재우, 이항복, 이덕형 등의 충정과 인간됨, 강홍립과 정벌군의 비참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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