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기묘록 별집(작자 미상)

청담(靑潭) 2016. 1. 6. 10:01

 

■기묘록 별집(己卯錄 別集)

 

작자 미상

 

 

이 책은 다른 기록과는 달리 제현봉사(諸賢封事)라 하여 6편의 봉사문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 5편 소장(訴章:상소한 글)은 기묘사림파(己卯士林派)에 속하는 인물들이 기묘사화 직전에 올렸던 것들이다.

그 내용은

첫째, 1517년(중종 12) 조광조와 쌍벽을 이루는 개혁파인 김식(金湜)(1482-1520)이 짓고 눌재 이충건(李忠楗)(1491-1521)과 연명(連名)으로 제출한 것으로, 폐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봉사문이다.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는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인데,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의해 폐출되었다. 이에 사림파는 신씨의 복위를 주장해 명분을 회복하면서 공신세력을 견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이 봉사문이 제출되었다.

둘째, 1517년 송재 한충(韓忠)(1486-1521)이 지평직을 사임하면서 당시의 폐단을 임금에게 상소한 것이다. 내용은 사임의 이유를 먼저 말하고, 농촌의 피폐한 상황을 개진(開陳)한 뒤, 그 이유가 조정의 정치가 정도(正道)로 나가지 않은 데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충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작폐를 비난하면서 성리학적 통치질서 수립을 요청하고 있다.

셋째, 1518년(중종 13)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홍문관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도교적 사전기관(祀典機關)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자는 주장을 상소한 것이다. 상소를 통해 조광조는 소격서가 이단(異端)과 괴설(怪說)에 근거한 기관이므로 ≪주자가례≫에 의거한 사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 역시 당시 사림파가 추진했던 개혁정치의 한 갈래로서 구제(舊制)의 혁파를 통해 ‘지치(至治:왕도정치를 지칭함)’를 실현하려던 그들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넷째, 1519년(중종 14)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 ?) 이하 사림파 계열 사간원 관원의 상소이다. 당시의 각종 천재지변과 그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을 말하고, 이러한 문제점은 임금이 중정인의(中正仁義)의 도를 지킬 때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 역시 개혁정치의 한 갈래인 현철군주론(賢哲君主論)을 실현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다섯째, 1539년(중종 34) 준암 이약빙(李若氷)(1489-1547)이 중종에게 폐첩 박씨와 그 아들을 죽임이 부당함을 논한 상소로서 역시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해 있다.

여섯째, 1517년 생원 권전(權碘)(1490-1521)이 짓고 성균관 학생이 연명으로 올린 것으로 정몽주를 공자묘에 같이 배향하자는 주장이다.

 

 

 

제현봉사(諸賢封事)

1. 정축년(1517)에 눌재와 충암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다.

이제 신씨는 폐출할 만한 사유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폐출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 때문이었습니까. 정국(靖國) 초기에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 등이 신수근(愼守勤)을 제거하고 나서 생각하니, 신비(愼妃)는 신수근이 낳았는지라,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우면 다음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자신을 보존하려는 사심에서 신비를 폐출하려는 모략을 꾸며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이유도 명분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씨는 전하께서 세자가 되시던 첫해부터 점괘에 잘 맞아 좋은 배필로 삼으시고 의식을 갖추어 자전(慈殿)께 뵈었을 때, 고부(姑婦)의 분의(分義)는 이미 정해졌던 것이며,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받드시게 되자 중곤(中壼)에 정위(正位)하여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으셨고 종사의 주부(主婦)로서 응하였으니, 전하에 대해서는 유적(䄖翟 꿩 무늬가 있는 황후의 제복)의 존엄함이 세워졌고, 조종(祖宗)과 신지(神祗)에 대해서는 빈조(蘋藻 제사 음식)를 받들게 될 희망이 있게 되었으며, 국민에 대해서는 모후(母后)로서의 명분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전께서는 어기고 거슬러 꾸지람을 받으실 만한 일이 없었으며, 제주(第稠)에는 쫓겨 갈만한 허물이 없었으니 귀신과 사람이 슬퍼하고 원망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강포한 신하들의 억제를 받아 항려(伉儷 부부)의 중함을 보전할 줄 모르셨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말에 ‘빈천할 때의 친교는 잊을 수 없고, 조강지처는 내쫓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신씨는 대저(代邸)에서 몇해동안 주장(酒獎)을 갖추었고 쇄소(洒掃)를 받들었습니다. 사생을 같이 하기로 맺고, 의기(義氣)로 서로 믿어 암울한 조정의 변란도 함께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귀하게 왕비의 몸이 되어 천승(千乘)을 차지하였건만 미련도 없는 버림을 받았으니, 높고 낮아 환경을 달리함이 한때 높은 하늘에 오르는 듯하다가 다시 아홉 길 못에 빠진 격이옵니다. 지존(至尊)의 배필이며 금슬(琴瑟)의 벗으로서, 임금의 정전(正殿)을 멀리 떠나 여염집에 섞여서 기상(氣像)이 쓸쓸하니, 이 소식을 듣는 자 눈물을 흘리고 그 앞을 지나는 자 탄식합니다.

...《한서》〈유향전(劉向傳)〉에, “화평(和平)한 기운은 상서를 이루고, 괴상한 기운은 재앙과 변이[災異]를 이룬다. 서녀(庶女 빈천한 여자)라도 원통함을 품고 죽으면 6월에도 서리를 날려 제비[燕]를 친다.” 하였습니다. 저 빈한한 마을 미천한 여자가 하늘과 아무런 간여도 없을 것 같지마는 그 원통한 것으로 맺힌 기운이 오히려 서리를 날리는 재변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존의 배필로서 천지와 묘사의 주부였으니, 신인(神人)과 상제(上帝 하느님)도 당연히 돌봐야 할 터이건만, 연고도 없이 폐출하여 적막한 집안에서 길이 그윽한 고민을 맺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천지의 화평한 기운을 해롭게 하였으니, 여러 가지 요사스러운 기운이 거듭 잇달아 오는 것도 괴이할 것이 못 됩니다. 성상(聖上)께서도 여기까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 기왕의 잘못은 할 수 없거니와 어찌 다시 바로 할 수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 한 번 돌리시는 데에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내정(內政)에 주장이 없으니 이때를 틈타서 꺼림없이 결단하시어 신비를 다시 곤전(坤殿)의 위(位)에 바로잡으신다면 천지의 마음이 편할 것이요, 조정의 신령이 마땅하다 여길 것이며, 신민의 소망에 부응(副應)하는 바가 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자리(왕후의 자리)를 누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미 떨어진 근본을 보존하고 이미 어긋났던 옛 은의를 온전하게 하시면 이것은 바로 큰 의리와 정당한 도리에 합치되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령 어떤 자가 이미 폐출되었다는 이유로 망령되게 이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전일에 폐비하자고 주장하던 신하에게 아부하여 형편을 관망하고 다시 전하의 가법(家法)을 어지럽히려는 데에 불과합니다. 원종이 비록 왕실에 큰 공이 있었다 하나 그 당시에 천명과 인심이 다 전하에게 귀속하였으니, 이 무리가 아니더라도 신기(神器 왕위)는 딴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 천명과 인심의 기회를 타서 힘을 썼던 것인데, 그 공을 자부하여 방자하게 군부(君父)를 겁박하고 국모를 추방하여 천하 고금의 대의를 범하였으니, 이는 만세의 죄인입니다. 공으로써 죄를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발호할 때에 전하께서는 확고하게 폐비하라는 청을 듣지 않으시고 협제(脅制)한 죄상을 살피어 명백하게 형법(刑法)을 바로하였더라면 옳았을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못하시고 그들을 본디와 같이 영귀(榮貴)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공에 대해서는 흡족히 포상한 바가 되었습니다. 지금 원종이 비록 죽었으나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서 관작을 추탈하고 중외(中外)에 효유하여 당세나 후세에게 큰 명분은 절대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환하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 가지 일에 대하여 의리를 바탕으로 처리하고 제정하여 지체하고 의심하는 바가 없으시다면 이왕의 잘못을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 온릉(溫陵)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능이다. 중종은 아홉 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중 왕비는 3명이지만 모두 제각각 홀로 묻힌 흔치않은 경우이다.

ㅇ조선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7일간의 왕비

단경왕후는 (당시) 이조판서 신수근의 딸로 태어나 12살 나이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후일 중종)과 결혼하여 부부인이 되었으며 이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으로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반정군들은 역적의 딸을 왕비에 둘 수 없다하여 단경왕후를 7일 만에 폐비시켜 사저로 쫓아낸다.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고모 연산군 부인과 함께 19살에 폐비가 된 그녀는 겨우 7일을 왕비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신수근은 누이동생을 연산군에게 시집보내고, 딸을 이복동생(중종)에게 시집보내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딸은 왕비가 되자 누이를 생각하면 딸을 버려야하고 딸을 생각하면 누이를 버려야함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중종반정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누이와 딸 모두가 폐비가 되고 마는 비극을 택하고 말았다.

ㅇ 치마바위의 전설

조강지처를 사랑했던 중종은 매일 부인의 사가(私家)쪽을 바라다보고 그리워하니 신씨 집에서는 부인이 입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임금에게 화답하였다는 바로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이다. 과연 중종은 그녀를 사랑했고 못 잊어 그리워했을까?

그러나 중종은 이후 여러 왕비와 후궁에 빠져 지냈으며 폐위 후 새로이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그녀의 복위가 거론(상기 글을 말함)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557년(명종 12년) 음력 12월 7일에 자식 없이 71세로 승하하였다.

심지어 복위를 거론한 신하들이 귀양(김식은 유배 후 자결, 이충건은 유배가다 사망)을 가기도 했다고 하니 중종은 그녀를 못 잊거나 그리워하지는 않은듯하며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은 스물에 쫓겨나 50년 넘게 중종을 그리워한 단경왕후의 기구한 삶을 안타까워하여 그저 꾸며낸 이야기뿐인 듯하다.

오히려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6일만에 죽자 흰 상복을 입고 애통해하였다고 하며 (왕은 국상을 당해도 흰 상복을 입지 않는다.) 대모산 아래 장경왕후릉(희릉)을 잘 조성하고 그 옆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하니 중종은 조강지처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왕비에게 빠져 산듯 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180년이나 지난 영조 때인 1739년(영조 15년) 에서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비로소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이라는 능호를 받고 왕후로 복위되었다.

다만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폐위된 왕비 신씨(단경왕후)를 찾았다고 하며, 신씨를 만난 뒤 중종은 유시(酉時·오후 7~9시)에 환경전에서 승하했다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조강지처가 생각이 난 것은 아닐까?

ㅇ 왕비의 릉으로 추존

단경왕후는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난 후 자식도 없이 죽었기에 친정인 거창 신씨의 묘역에 묻혔으며 숙종 24년에서야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영조 15년에야 복위되어 왕릉으로 추가 상설하였다.

새로이 상설을 설치하면서 추봉된 왕비릉인 정릉(태조 계비 신덕왕후), 사릉(단종비 정순왕후)의 상설을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능침 주위로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고 혼유석 1좌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으며 3면에 곡장을 설치했다

한단 아래 문인석과 석마 1쌍씩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난간석과 무인석은 없다. 조선의 왕비 중 가장 슬픈 여인을 꼽으라면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비 단경왕후를 꼽을 수 있다. 현재 온릉은 비공개 지역이다.

 

 

2. 정축년(1517)에 한송재가 지평을 사직하고 바로 당시 폐정을 진소하다.

...신이 처음 올 때가 마침 초가을이었습니다. 지나온 고을이 하나뿐이 아니었고 만나본 사람도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는 벼농사 형편을 살폈고 백성을 만나면 민간의 급한 실정을 들었사온 바, 참으로 말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밭에 풀만 있고 쟁기질도 하지 않은 것이 있기에 물었더니, “지난해에 가물었고, 봄에 양식이 떨어져 자력(資力)이 모자라 심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묘종(苗種)은 있는데 김매지 않은 사람은, “금년 보리가 여물지 않아 양식이 떨어져 호미질을 못하였다.”는 것이었고, 모종은 있으나 이삭이 빼어나지 못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힘이 탈진하여 때 늦게 심었고, 가을 들어 김매었다.”는 것이었으며, 이삭은 있어도 알이 들지 않은 사람은 말하기를, “우박도 오고 가물기도 하였으며 바람을 맞아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민간 중에는, 혹은 묵은 곡식이 떨어졌는데 햇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아서 의창(義倉)에 조곡(糶穀 장리곡식)을 말하는 자가 있기도 했으며, 지아비는 병역에 나가고 지어미만 남아서 봄이 와도 밭갈이를 할 수 없고 가을이 와도 수확할 것이 없는 자도 있었고, 혹은 저녁 끼니를 못 먹고 혹은 아침 밥도 못 먹은 채 푸른 밭에서 옷자락을 들고 이삭을 가려 뽑아 낱낱이 따는 자도 있었으며, 봄에 천연두를 앓고 여름에는 염병을 앓게 되니, 겨우 두어 이랑에다가 조[粟]를 심었으나 아직 타작도 하기 전에 죄다 공부(公府)에 실어가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혹 토양이 비옥하고 못이 깊으며 벼가 무성하고 열매가 실한 경우도 있기에 물어 보니, 이는 대체로 보아 부호의 집과 세도하는 무리들의 전지(田地)라는 것이었으며, 땅이 메마르고 묘종이 피어나지 못하고 황무(荒蕪)하여 벼가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피폐한 백성의 전지였습니다. 토양의 성질에는 걸고 메마름이 있으며 백성의 재력에는 넉넉하고 모자람이 있겠지마는, 백성들 중에 곤란하고 굶주리는 것은 모두 서민이었고, 전지의 겉흙이 깊고 비옥한 것은 모두 부호들이 겸병하고 있어서, 수재가 있거나 한재가 있거나, 경우에 따라 농사 방법도 또한 다르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본 바로써 백성들의 말을 듣고 들판을 자세히 살피면서 백성들의 슬픈 심정을 생각하니, 슬퍼지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납니다.

신이 일찍이 조정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금년도 풍년이라 하기에 신도 그런 줄로만 여겼더니, 이제 와서 본 바로는 조정에서 듣던 것과 너무 다릅니다. 아, 신이 젊었을 때, 초야에 살면서 민간의 어려움을 고루 겪었건만, 잠시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이미 그 근본을 궁구하지 못하고 남들이 옮기는 말에 속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비단옷을 입고 자라 화려한 집에 출입하며, 풍족한 진미(珍味)를 먹는 자가 어찌 민간의 형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지 않으면 실상을 밝힐 수 없고 듣지 아니하고는 그 실정을 짐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호세(豪勢)하는 집은 재력이 넉넉하고 전지마다 못이 있어서, 깊이 갈고 여러 번 김매니, 벼농사가 풍년 아닐 때가 없으며, 이로 인해서 남에게 자랑하는데 그 말이 저자 거리와 조정에까지 전해져서 벼가 이미 실하다는 등 연사(年事)도 풍년이라는 등 하는 것입니다. 무릇 전해 듣는 자는 진실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엄연하게 풍년들었다라고 말하니, 어찌 크게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민들은 힘이 모자라고 재력이 이미 다하여 때가 지난 다음에야 심고 미처 김도 매지 못하니, 비록 바람이 조화롭고 비가 순조로운 때를 만난다 하더라도 오히려 흉년이란 말은 면치 못합니다. 하물며 지난해 봄엔 매우 굶주려서 갈고 심는 일을 거의 자력으로 못하였고, 드디어 4,5월에도 눈이 오고 서리도 내렸으며, 요찰(夭札 젊은 사람의 죽음)마저 생겼고, 6월에도 우박이 왔으며, 7월에는 가물었습니다. 더구나 기후는 숨막힐 듯 추위가 절박하고 바람은 미친 듯 차가워서 만물이 윤택하지 못하지 벼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수확할 만한 전지가 있더라도 끝내 훼손된 것까지는 메꾸지 못합니다. 이러므로 백성은 본업을 잃어 새가 수풀에 흩어지듯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러면서도 애달파하고 원망하는 심정을 윗사람에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고을이 이와 같으니 저 고을을 알 수 있고, 한 도(道)가 이와 같으니 여러 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한 가지만 들어 말하여도 만 가지에 통하고, 한 쪽만 보아도 천하를 다 짐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남방(南方)은 금년 농사에 재변이 심하지 않다.” 하는데도 제가 본 바는 이와 같으니 평안ㆍ황해 몇몇 도는 짐작만으로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재변이 극심하고 백성의 원성이 사무치기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기는 정사를 좀먹고 나라를 망쳐버릴 근원이 폐부(肺腑) 사이에 심어져, 움이 자라고 가지가 뻗어나서 이런 재변을 나게 한 것인가 합니다. 만약 이런 것을 살피지 아니하고 도리어 뜬말을 믿어서 시절이 이미 순조롭고, 연사도 풍요하다 하여 백성에게 조세를 거두면서 재량(裁量)할 줄 모르고 백성을 부리면서 쉬게 할 줄 모르면, 하늘은 변괴로써 더욱 꾸짖고 백성은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천재(天災)와 세려(歲沴 해마다 오는 요기(妖氣))는 이미 구할 수 없으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기근을 구휼하는 정책은 진실로 모르는 척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계책과 조정의 의논에서 이를 간과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오나, 신도 또한 관견(管見)이 있습니다. 무릇 백성들의 근심은 재상(災傷)을 명백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거나 등분(等分 수확량의 등급을 매기는 것)을 공평하게 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바, 조세를 부과하는 문호와 공물(貢物)을 바치는 길이 모두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오니 진실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監司)가 수령(守令)을 가려 보내서 답사하게 하면, 수령은 수확이 줄었는지 열매가 실한지를 돌아보지 않고 큰 길만 따라 가다가 위관(委官)에게 부탁하면, 위관은 또 서리(胥吏)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서리는 또 길 걷고 물 건너는 것을 꺼리어서 편하게 몇 동리만 다니면서 닭을 잡고 밥을 짓게 하여 백성의 재물과 짐승만 없앱니다. 하물며 서리는 뇌물 바치는 자를 이(利)롭게 여기는 까닭에, 세력이 강하고 교활한 자에게는 혹 실한 것인데도 재해를 입었다고 보아 주고, 빈천한 자에게는 혹 재해를 입은 것인데도 실한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수령들이 힘쓰는 것은 추렴[出斂]을 많이 하는 데 있는 까닭으로 흉년이 들어도 흉년이라 하지 않고, 조금 풍년이 들면 크게 풍년이 들었다고 등급만 높이 매기어 그 나누임을 분명히 하지 않습니다. 애닯게도 이 어리석은 백성은 극도에 달한 곤란을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심지어 김매지도 여물지도 아니한 전지를 가지고, 처음에는 서리에게 침해를 당하고 끝에는 수령에게 곤란을 당합니다. 혹은 환상곡(還上穀)이라는 명목으로 금년과 지난해에 누적된 바가 있다 해서, 혹은 공물이라는 명목으로 방납(防納)과 직납(直納)이라는 구별이 있다고 해서, 전세(田稅)는 순열(順列)에서 벗어나고, 거두어 가는 품목은 고슴도치 털같이 많아 백성들은 따를 길이 없으매, 혹 전지를 팔아 공가(公家 관청)에 갚기도 하는데, 이익은 부잣집에 돌아가니, 집에 남은 양식이 없어, 혹 사방으로 흩어져 가면 곧 일족(一族)을 내쫓아 사방으로 나누어 놓고는 반드시 명목을 세워 교묘하게 수탈한 다음이라야 그만두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염(閭閻 동리)은 점점 비게 되고, 군정(軍丁)이 날마다 줄어들며, 전지는 더욱 황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 된 자는 바라만 보고 어쩔 줄 몰라 연사만을 탓할 뿐, 애석하게 여기고 나가서 살피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묵은 밭에 조세를 거두는 것은 묵은 밭을 개간하는 데에 게으른 자를 징계하려는 한 가지 일이었건만, 지금은 혹 자력이 모자라서 심지 못했거나, 양식이 떨어져 호미질을 못한 것, 도망쳐서 묵게 된 것, 묵어서 황무하게 된 것인데도 굶주려 부황(浮黃)난 백성한테 감히 게으름을 책망하며, 죽은 사람을 잡고서 억지로 조세를 요구하여, 이웃과 마을이 피해를 받고, 골육끼리 이별하는 바, 이것은 묵은 밭을 개간하는 것을 권장하려는 당초의 본뜻이 아닙니다. 대개 조종께서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한 것은 착한 정사를 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제도가 통하지 않아서 다스림이 성공할 수 없고 법령이 흔들려서 백성이 편하지 못하면 고치는 것만 못합니다. 혹 논의하는 자는, “조종께서 창시(創始)한 제도를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여, 이런 병통을 보면서도 눈을 딱 감고 구제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막아 버리니, 참으로 다스리는 체통을 알지 못함이 심하기도 합니다. 같은 제도라도 때에 따라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며, 다스리는 데에 따라 그대로 두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는데, 변혁해서 통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시행하는 것이 하늘의 도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지러운 세대를 이어 맡아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대저 난세(亂世)를 이어받고 치세(治世)를 이어받음에 따라 형세가 다르고 도도 같지 아니합니다. 만약 치세를 이은 임금이라면 삼가 조종의 성헌(成憲 일정한 법)을 지키는 일이 옳겠지만, 어지러운 세대를 맡은 세상에서는 물정(物情)이 바뀌어졌고 인심이 변했으며 법은 해이하고 도는 변했으므로 진실로 일률적인 기강과 규칙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먼저 묵은 밭에 거두는 조세를 혁파하여 조금이나마 빈궁한 백성의 원통함을 위로하고 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으로서 명민하고, 정성스러운 자를 가려, 어사(御史)라는 호칭으로 농촌에 드나들게 하여, 그 해의 풍흉을 살피고 피해를 조사하며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널리 탐문하여, 서리들이 농간하지 못하게 하고 수령들도 그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수령으로서 매우 삼가지 아니하고 공정하지 못한 자는 특별히 죄로 유배하든지 죽이든지 하고, 아울러 그들의 자손도 금고(禁錮)하며, 서리로서 침탈하여 백성을 병들게 한 자는 그 중에서 가장 악질인 자를 효수(梟首)하여 사방에 회시(回示)하면, 사람들이 징계할 줄 알아서 간사함이 전혀 번지지 못할 것입니다. 또 백성이 가엾고 슬프다는 조서(詔書)를 감사와 수령에게 하유하여 지난해의 환상곡은 거두지 말 것이며, 또 사채(私債)로 인한 침탈을 엄금하고, 다만 당년(當年)에 나누어 준 곡식만을 수납하여 다음해에 대비하게 하시되, 곡식이 여물지 않았거나, 수확이 없는 고을은 혹 수량을 감해 주고 혹 거두지 못하도록 하신다면, 백성들이 거의 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정당(政堂)에 납시어 백관을 거느리시고 아침부터 강론하시고, 늦게 수라를 잡수시는 것은 다만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곤란은 이런 형편에 이르렀는데, 진작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아니하니, 상하가 서로 퇴미(頹靡)한 경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마침내 구제하지 말아야 옳습니까. 대저 물은 격류(激流)가 아니면 멀리 흐르지 못하고, 명령이 엄하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 두어 가지 일을 만약 앞으로 열흘 동안을 넘기면, 벼는 반드시 다 수확될 것이나 서리(胥吏)들은 벌써 간계를 부리게 될 것이니, 사후에 비록 적발하여서 죄를 처단하더라도 다만 그 사람만 죄받았을 뿐이고, 백성에게는 아무 혜택도 미치지 못합니다. 간계를 막으려면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하는 것이 낫고, 덕을 입히려면 일찍 도모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니, 전하께서는 다시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제의(提議)하는 자 중엔, “연사가 그렇게 흉년은 아니니 국가 수용(需用)을 여유 있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관용물자(官用物資)를 저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창고에 비축할 것을 반드시 다 거두고자 하며, 수확량 등급을 엄하게 하려 들어, 백성에겐 각박하더라도 공용(公用)은 풍부하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손발의 살을 깎아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굶주리더라도 손발이 남아 있으면 그래도 구할 수 있거니와, 손발이 없는데 배만 남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정안에서의 경우, 일 없는 관직과 필요 없는 비용은 없애야 하고, 외방(外方)에서는 고을마다 정해져 있는 공물의 명목과 액수를 감해야 하며, 심하게 말한다면, 위로는 후궁(後宮)의 수효를, 아래로는 경ㆍ대부의 녹봉도 모두 감해야 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장구한 계책은 생각지 않고 백성만 들볶으면 이것은 백성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신하이며, 백성은 굶주리는데 흉년이 아니라고 하면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신하입니다. 아, 조정은 사방의 근본이건만 서리는 수령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수령은 감사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며, 감사는 조정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만 있습니다. 아, 지금 조정에는 좋고 나쁨이 명백하지 않으며, 간사함과 정직함이 뒤섞였고, 옳고 그름이 혹 흐려지고 있으며, 공적으로 사적으로 서로 속여, 높은 벼슬에는 반드시 군자가 있지 않고, 낮은 반열에는 반드시 소인(小人)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선비는 일정한 뜻이 없고 습속은 정해진 방향이 없어, 동쪽을 배반하면 서쪽으로 달려갑니다. 혹은 의기(義氣)에 따라, 혹은 세도(勢道)에 따라, 혹은 술잔에 따라, 혹은 잡박(雜駁)한 대로 떼지어 모여들어서 경술(經術) 있는 사람을 오활하다 지목하고 충신을 가식(假飾)한다 비웃으며, 학문이 밝은 사람을 꺼리고, 행검(行檢)을 닦는 사람을 그르게 여겨서, 겉으로는 활달한 행동을 하는 척하면서 남모르게 자신만을 이롭게 하려는 욕심을 구상합니다. 그 중에 혹은 몰래 딴 배짱을 품어 말은 해도 충심을 다하지 아니하고, 기미(機微)를 감추어 형편만 살피는 자가 있으며, 혹은 교묘한 말과 상냥한 낯빛으로 이쪽저쪽 양편을 오가면서 선동하고 시기하는 자도 있습니다. 사대부의 버릇이 이와 같으므로 거짓과 그릇된 일만 자라나고, 나라 일은 날로 무너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만 어진 자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불초한 자가 능히 번성하지 못함은, 얼마 전에 큰 난리를 겪었기에 사람마다 잘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며, 전하께서는 착함을 좋아하시고, 공경(公卿)은 어진 사람을 몹시 꺼리지 않기 때문인가 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마음에 강대(强大)한 뜻이 없으시고, 대신은 일을 계획하면서 모두가 고식적인 병폐가 있어, 비천한 관습만 따르고 도리어 원대한 계획은 싫어하며, 잘하려는 자는 의심을 받고, 나쁜 일을 하는 자는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이는 식견 있는 자가 남모르게 슬퍼하고 남모르게 눈물짓는 까닭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서 덕을 함양하는 데에 태만하여 어짊을 숭상하는 길이 막히고, 대신은 뭇사람의 깔깔거림만을 즐겨하여 사사로운 지모(智謀)가 앞선다면, 임금은 믿을 곳이 없고, 아랫사람은 지킬 바가 없어져 간사한 무리들이 궐내에서 거드럭거리고 충실한 무리들은 산림(山林)에서 눈물 지어 나라는 거의 전복될 것입니다. 대개 물건을 옮기려면 자루를 잡아야 하고 백성을 교도(敎導)하려면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도학(道學)을 밝혀 마음에 통하고, 사랑함과 미워함을 공정하게 하여 시행하는 데에 응하며,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을 권면하여 순리를 따르게 하옵소서.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것도 잘 살피고, 옳은 말을 들으며 행동도 보옵소서. 착한 일을 좋아하되 따르지 못할 듯한 태도로 노력하고, 악한 일은 나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라도 꺼리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군자인 줄을 알면 심복같이 친하시되, 친할 뿐 아니라 반드시 높은 관직에 둘 것이며, 그 사람이 소인인 줄을 알면 독사같이 버리시되, 버릴 뿐 아니라 반드시 귀양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것을 밝게 보여서 감동하여 일어나는 길을 활짝 열면, 조정에서는 온 집사(執事)들이 외방에서는 모든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착한 일을 본받아야 하고, 악한 일은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충심으로 공사를 행하여 양심껏 백성을 구휼할 것이니, 사대부의 바르지 못함을 왜 걱정하며, 백성을 보살피지 못함을 왜 염려하겠습니까. 사람은 정해진 성품이 없으므로 가르치면 착한 데로 옮길 수 있고, 세상에는 일정한 습속이 없으므로 변화시키면 아름답게 고칠 수 있는 것이어서, 어둡고 어리석은 자를 현명하게, 간사한 자를 충직하게 할 수도 있으니, 변화시키는 기틀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청구(靑丘 우리 나라의 별칭)는 중국의 동쪽 연변지대(沿邊地帶)로서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3국(三國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이전은 말할 수 없거니와 3국으로부터 고려를 거치면서 세상은 더욱 허탄한 것을 숭상하며, 법망이 엉성하고 절목(節目)이 소루하고 제도가 간략하여 부끄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본조에 이르러서 아름다운 예악과 착실한 인의(仁義)는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미개한 풍속을 면하지 못했고 사대부는 염치와 사양을 숭상하지 않아서 윤리를 다 펴지 못했고, 교학(敎學)도 그 방향을 못 찾아 임금과 신하 사이엔 정이 막혔고, 조정의 예절은 옛날 같지 못합니다. 나쁜 것은 털어 버리고 착한 것은 보태어서 새롭게 해야 할 기회는 바로 전하의 손에 달렸는데, 정사를 도모하고 다스림을 힘쓴 지는 벌써 1기(紀)가 지났으나 아직도 나타난 효과가 없습니다. 세월은 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기회는 또 잃기 쉬운 것이어서 신은 그윽이 슬퍼합니다.

아, 소신은 시골 출신으로서 외람되게 차제 아닌 발탁(拔擢)을 받아왔으나 학문이 얕으면서 뜻은 소탕(疏宕)하고 지위는 낮으면서 말은 고항(高亢)하니, 임금에게 버림받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한테 화(禍)를 받을 것입니다. 하물며 신의 아비는 늙었고 어미는 벌써 병중이며 신도 또한 위장에 병이 있어서 살이 빠지고 뼈가 드러났으니, 조정에 어찌 오래 있겠습니까. 바라는 바는, 신의 말을 오활하다 마시고, 때로 마음에 반성하시며, 다스림이 족하다 하여 게으르지 마시며, 악을 제거하였다 하여 방심하지 마시고, 뜻있는 사람은 그 재주를 다하게 하고, 백성을 본성대로 이루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말라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신은 마음속에 격절(激切)한 바 있어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면서 삼가 죽을 줄 모르고 아뢰나이다.

 

※참고 : 한충(1486-1521)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고, 1513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전적에 등용된 뒤 정언·이조정랑·응교를 역임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왕이 고려의 중신 李仁任의 후예라고 기록된 명나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해명)를 위한 주청사(奏請使) 남곤(南袞)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으나 남곤과 의견이 충돌하여 그의 미움을 받았다. 아아! 이 글은 서른 두 살의 젊은 수재이자 개혁주의자인 한충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애절한 내용을 피력하고 있다. 당시 개혁파들의 의지를 이 글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 명문장을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 조광조 등 개혁파의 정신과 의지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1519년에 전한을 거쳐, 직제학·동부승지·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520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임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가 평소에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다 하여 거제로 유배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이 일어나자 그의 자가 황서경(黃瑞慶)이라는 자의 이름과 ‘음(音)’이 같아 남곤의 책략으로 투옥되었다가 중종의 친국 후 풀려났으나 남곤이 보낸 하수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3. 무인년(1518)에 홍문관에서 소격서를 혁파하기를 청하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지금 소격서를 설치하여 도교(道敎)를 선포하는 것은 백성에게 사교(邪敎)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성대히 이를 좇아 받들고 있지마는 실지로는 머뭇거리며 따르지 않고 있으니, 밝고 밝은 의리에도 어긋나고 분명히 허탄하고 망령된 형상입니다. 이는 진실로 군신(君臣)에 있어서 사(邪)와 정(正)의 나누어지는 바이고 정치에 대해서는 순조로워지거나 어지러워지는 이유가 되며, 상제(上帝)께서 기뻐하고 성내는 조짐에 해당하는 것이니, 왕자의 정사라면 없애고 막아야 할 일입니다만, 이제 도리어 높이고 숭상하여 관청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받들며 제사[醮祭]하여 섬기면서 제향(祭享)해야 하는 신(神)이나 되는 듯 공경하고 있습니다. 번성한 축도(祝禱)로 간귀(奸鬼)를 제사하고 있으니, 허탄한 가르침으로 백성을 인도하여 온 세상을 괴이한 곳으로 몰고 가려는 것입니까. 아, 백성들이 변치 않고 덕(德)으로 여기는 것은 없으니 오직 임금의 교화를 덕으로 여길 뿐입니다. 임금이 천명을 받들고 하민(下民)을 거느리는 일에 있어서 자기 몸부터 솔선하는 방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의의가 어떻습니까. ...

 

 

4. 기묘년(1519) 7월 대사간 이성동ㆍ사간 이청ㆍ헌납 송호지 정언 김전ㆍ권전 등의 소

...지극히 밝은 사람은 일이 생기기 전에 알고, 그 다음의 사람은 생기려 할 때에 알며, 또 다음의 사람은 이미 생긴 다음에 압니다. 생기기 전이라면 손바닥을 뒤엎는 듯 아주 쉽게 해소할 수 있고, 생기려 할 때라면 힘을 들여야 해소할 수 있지만, 이미 된 다음이면 마음을 태우고 힘을 다해도 혹은 구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을 생기기 전이라 하면 속임이요, 있으려는 중이라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이런데도, 마음을 태우고 힘을 다해서 구하지 아니하면 뒤에는 아무리 잘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이 엎드려 보옵건대, 전하께서는 인자하고 명철하며 깊고 고요하신 자질을 지니시고, 격치(格致 격물치지)와 성정(誠正)의 학문을 궁구하셨으며, 멀리 요(堯)ㆍ순(舜)ㆍ탕(湯)ㆍ문(文)을 본받아 급급히 도를 바라고 계시면서 오히려 아직도 부족하다고 하시니, 정말 이러한 태도로 다스리신다면 햇빛을 가까이하면 그림자가 생기고, 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늦어지기만 하여 다스림은 날로 멀어지며 나라는 점점 병들어 가는 속에 방치하고, 온화하고 태평스럽게 선양할 일은 살피지 아니하십니까. 그윽이 전하를 위해서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신 등은 진실로 전하의 마음이 편안함만 구하여 구차하게 여기에 구애되어서가 아니라, 사세가 그렇지 못한 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세가 구차하고 뜻이 없어 용기를 떨쳐 매진하지 못한다면, 또 누구를 기다려서 다스린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임금이라는 중한 위치에서 사세 때문에 할 일을 못한다는 것입니까. 전하의 단점은 지성과 측달(惻怛)한 마음으로 신하와 백성을 거느려 분려(奮勵)하지 못함입니다. 무릇 정치를 하는 데에 겉치레만 따르고 굳은 결단으로써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옳고 그른 사이에 가부(可否)가 어지러워집니다. 매양 형세만 중하게 여겨서 지당한 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전하의 마음이 중정(中正)과 인의(仁義)의 극(極)에 합치되지 않았음인가 합니다.

...정광필(鄭光弼)(1462-1538)은 굉후(宏厚)하고 광대(廣大)한 도량이 있어, 일찍부터 공보(公輔 정승)가 될 만한 촉망을 받았는데, 성희안(成希顔)이 당시 인재를 뽑을 때 첫머리에 광필을 정승으로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광필은 암랑(岩廊 의정부)에 있게 되면서 여러 사람의 마음에 영합하기에 힘을 쓰며, 세속과 같이하기만을 즐겨하고, 개연히 옛적 성왕(聖王)의 다스림을 회복해 보려는 데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세속에서 초탈할 줄 몰라 전하를 광명 정대한 지경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과격한 행동이나 흑백을 가려야 할 언론은 피하여 억제하려고만 노력했으니, 잘못된 것도 몽롱하여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용개(申用槪)(1463-1519)는 영걸(英傑)스럽고 초매한 기상이 있어서, 젊었을 때부터 재망(才望)을 차지하였고, 또 성품이 너그럽고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 한계를 긋지 않았고,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친숙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을 당하면 쉽게 판단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하여 계획하는 데는 삼가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조정으로부터 중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안당(安瑭)(1461-1521)은 몸가짐이 진중하였고 마음씀이 밝고 신중했으나 젊었을 때부터 스승과 벗의 도움이 없었으며, 학식과 역량이 원대하지 못하면서 자기 소견에만 사로잡혀 겸허한 태도로 국론을 받아들일 줄 몰랐기 때문에, 정부에 들어와서 이부(吏部)에 잘못하여 명망이 손상되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걱정이 없을 때에 경계하라.” 하였고 또, “보이지 않을 때에 도모하라.” 하였는 바 모두 미리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을 하는 그러한 시기는 아닙니다. 다만 미리 한다기보다는 더욱 급해진 시기입니다.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의논이 강구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정령(政令)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는 이러한 때이건만 저축한 곡식은 두어 해를 지탱할 수 없고, 사마(士馬)는 백승(百乘)을 감당하지 못하며, 군정(軍情)은 지구전(持久戰)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만약 창졸간에 사변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믿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염려도 않고 있고, 아래에는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려는 사람조차 드물어서, 논의(論議)하는 동안에도 전연 언급되지 않고 혹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묵살해 버리니 필경에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 ...

 

 

5. 기해년(1539) 준암이 끊어진 대를 잇도록 중종에게 올리다.

...옛적에 맹손(孟孫)씨는 사냥하다가 사슴 새끼를 잡아서 진서파(秦西巴)에게 들려 가지고 돌아오는데, 어미 사슴이 울면서 따라오기에 서파는 사슴 새끼를 놓아 주었답니다. 맹손은 크게 노하여 서파를 축출하였으나 석 달 만에 다시 불러서 아들의 스승으로 삼고, “사슴 새끼에게도 못 할 짓은 차마 하지 못했는데 내 아들에게 못 할 일을 차마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오당(吳唐)이 아이를 데리고 사냥 나가서 사슴 새끼를 쏘아 죽였는데, 어미 사슴이 놀라 돌아와서 슬피 울기에 또 어미 사슴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다른 새끼 사슴을 만나 쏘려는 참인데, 화살이 갑자기 나가면서 그 아들을 맞추어 버렸습니다. 당이 아이를 안고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궁중(宮中)에서 불러 “오당이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슴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였습니다. 당이 듣고 놀라서 몸 둘 곳을 몰랐다 합니다. 그 당시의 무리들도 누군들 자식이 없었겠습니까만, 이런 일을 차마 하여 전하를 도리어 한낱 필부였던 진서파(秦西巴)의 소위보다도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오당이 통곡하던 일이 그 사람들에게 앞으로 있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대저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한 번 후회하시는 단서를 베푸시어 사람들이 마치 일월과 같이 우러러보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묘당 암랑(廟堂巖廊 의정부)와 제제(濟濟)한 관각(館閣 홍문관과 대각)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지난일이라고 핑계하여 어쩔 수 없다거나 자질구레하여서 덕으로 보아서 경(輕)하다거나 중하다거나 할 것이 못 되며 정사로 볼 때도 크다 작다 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그때로써는 숨길 바이며, 후일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말을 하는 자가 반드시 허물이 되기 때문입니까. 신도 전일에는 말하지 못하다가 오늘을 기다려서 말하니, 제 몸을 아끼는 일이 아니요, 전하를 사랑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말을 해도 안 해도 죄는 같으므로, 감히 미친 말을 내어서 전하의 귀를 더럽히는 것이옵니다. ...

 

 

6. 정축년(1517)에 태학생들이 포은 정 문충공을 부자의 묘정에 배향하기를 청함. 8월에 생원 신 권전 지음.

...우리 동방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外地)이어서 단군 시대는 아득하여 징험할 수조차 없고, 기자(箕子)가 봉해지면서 겨우 문자(文字)는 통했으나 삼국 이전은 대개 논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고려(高麗)는 건국하여 4백여 년을 지났으나, 겨우 구차스럽게 평정하였을 뿐, 오히려 이전의 풍습을 인습하였고 불교가 성행하여 이적(夷狄)을 끌어들였습니다. 아, 하늘이 덮고 땅에 실려 있기로는 같은 나라이며 같은 사람이니, 무슨 간격이 있겠습니까마는, 풍토와 기후에 국한되어서 비루한 습속에 우물거리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사도를 계발하고 창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동방의 수치였습니다.

다행히 황천(皇天)이 돌보시어 고려 말기에 종유(宗儒)인 몽주(夢周)(1337-1392)를 나게 하였습니다. 걸출한 재질이 빼어났고, 경세제민하는 재주를 품었으며,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자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강론한 학설이 발월(發越)하며 묵묵한 중에 심오한 뜻을 알아 낸 것이 선유(先儒)와 합치하였고, 충효의 큰 절행은 당세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상례(喪禮)를 제정하고 사당(祠堂)을 세운 것도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하였으며, 문물(文物)과 의장(儀章)을 모두 고쳐 정하였습니다. 학교를 세워서 가르침을 베풀고, 유술(儒術)을 진흥하였으니, 사도를 밝히고 후학을 계발한 것은 동방에서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학문을 주렴계(周濂溪)와 정자(程子)에 비교한다면 실로 차이가 있다 하겠지만 공을 주(周)ㆍ정(程)에게 견준다면 거의 같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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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 년 동안은 조정과 여염에 명인(名人) 길사(吉士)로서 일컬을 만한 자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도를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서 은연중에 멀리 몽주의 유서(遺緖)를 이은자로서는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곧 그 사람입니다. 굉필은 기국(器局)이 방정하고 성행(性行)이 단결(端潔)하여 성학(聖學)에 독실하여 노력하고 실천하였습니다. 행신(行身)은 포용성이 있었고, 처사(處事)하는 데에도 도량이 있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에 공경함이 없는 데가 없었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순순하여 지성으로 하였습니다.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먼저 《소학(小學)》과《대학(大學)》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규모가 일정하고 절목(節目)에 질서가 있으며 유도하고 제휴함에 조금도 게으른 적이 없었습니다. 어지러운 세대를 만나 여러 차례 환난을 겪었으나 고요하게 처신하였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하에서 종유하며 배우던 자들은 사도가 극히 순박하다는 것을 들어 알고는 태산과 북두성같이 우러러 받들었습니다. 지금의 학자 중에도 덕행을 귀하게 여기고 문예(文藝)는 천하게 여기며 경술을 높이고 이단을 억제할 줄 아는 것과, 전하께서 호오(好惡)를 밝히고 취사(取捨)를 살피며 기강을 정돈하고 풍화를 선양하시려는 것 등은 실상 굉필의 힘에 관계된 바가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이 두 사람의 덕택을 입었건마는, 두 사람의 공을 아는 자는 온 세상에서 찾아도 아마 적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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