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작자 미상
조선 중기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의 전기와 사화의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기묘록 己卯錄≫·≪기묘록보유 己卯錄補遺≫와는 달리 기묘년(중종 14, 1519)에 화를 입은 인물들의 전기뿐 만 아니라 그 사건을 꾸며낸 사람들의 전기도 수록하였다. 또, 체계를 달리해 당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의 사실을 계통적이고 종합적으로 분류, 정리하고 있다.
■별과시 천거인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좌당인원(坐黨人員)
1. 찬축류(竄逐類)
대사헌 조광조ㆍ부학 김구ㆍ응교 기준ㆍ전한 정응ㆍ수사(水使) 한충(韓忠)ㆍ정랑 윤광령ㆍ유생 김윤종ㆍ주서 안정ㆍ판서 김정ㆍ승지 윤자임ㆍ승지 박훈ㆍ사인(舍人) 최산두(崔山斗)ㆍ파성군(巴城君) 경(璥)ㆍ유생 이중(李中)ㆍ생원 이약수ㆍ검열 신잠(申潛)ㆍ대사(大司) 성금식(成金湜)ㆍ승지 박세희(朴世熹)ㆍ병사(兵使) 유용근(柳庸謹)ㆍ정랑 정완(鄭浣)ㆍ의학교수 안찬(安瓚)ㆍ유생 오희안(吳希顔)ㆍ유생 박두남.
2. 삭탈류(削奪類)
좌찬성 최숙생ㆍ교리 양팽손(梁彭孫)ㆍ현감 송호례ㆍ지평 조우ㆍ숭선 정(崇善正) 총(灇)ㆍ정랑 노필(盧㻶)ㆍ우찬성 이자(李耔)ㆍ정랑 이약빙(李若氷)ㆍ지평 이연경ㆍ사인 이청ㆍ강녕 부정(江寧副正) 기(祺)ㆍ현감 이사검ㆍ지평 이희민ㆍ교리 송호지ㆍ정랑 이충건ㆍ시산 정(詩山正) 정숙(正叔)ㆍ장성 부수(長城副守) 엄(儼)ㆍ부사 하정(河珽)
천거과(薦擧科) 출신이 28명인데, 기묘년에 귀양간 사람이 3명, 신사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귀양간 사람이 2명, 죄를 입은 사람이 3명, 처음으로 벼슬한 사람이 2명, 다시 등과(登科)한 사람이 1명, 한가히 지내는 사람이 15명이다.
3. 파직류(罷職類)
좌의정 안당ㆍ관찰사 김정국ㆍ검열 이구ㆍ좌랑 윤구(尹衢)ㆍ참의 이성동ㆍ찰방 윤내신(尹來莘)ㆍ현감 안처순(安處順)ㆍ좌랑 유성춘ㆍ참봉 유맹달(柳孟達)ㆍ참판 유운(柳雲)ㆍ좌찬성 이장곤ㆍ봉교(奉敎) 조구령(趙九齡)ㆍ좌랑 구수복(具壽福)ㆍ관찰사 문근ㆍ찰방 김태암(金兌巖)ㆍ현감 박수량(朴遂良)ㆍ찰방 윤상림(尹商霖)ㆍ참봉 김석홍(金錫弘)ㆍ우참찬 김안국ㆍ지평 이영부ㆍ부사 권벌(權橃)ㆍ봉교 채세영ㆍ참판 김세필ㆍ참봉 봉천상(奉天祥)ㆍ현감 최운(崔澐)ㆍ참봉 노우명(盧友明)
4. 피척류(被斥類)
영중추 정광필ㆍ참의 정충량ㆍ생원 박광우ㆍ찬성 이계맹ㆍ좌랑 윤개(尹漑)ㆍ판서 신상(申鏛)ㆍ박사(博士) 임권(任權)
이상 열거한 사람들은 약간 조정에 용납되었다.
관찰사 윤세호(尹世豪)ㆍ검상 장옥(張玉)ㆍ관찰사 공서린(孔瑞麟)ㆍ급제(及第) 고운(高雲)ㆍ한림(翰林) 정원(鄭源)
이상 열거한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파직되었고 어떤 이는 서용되었다.
부사 유인숙ㆍ부사 박영(朴英)ㆍ부사 정순붕(鄭順朋)ㆍ부사 신광한(申光漢)
이상 네 사람은 경진년에 파직되었고, 신사년에 삭탈되었다.
부사 이윤검(李允儉)ㆍ도사 김광복(金光復)ㆍ수찬 심달원(沈達源)ㆍ급제 허백기(許伯琦)ㆍ현감 조언경(曺彦卿)ㆍ참의 최명창(崔命昌)ㆍ부사 박상(朴祥)ㆍ급제 김필(金珌)ㆍ현감 권장ㆍ부제학 이사균(李思鈞)ㆍ평사(評事) 이홍간(李弘幹)
이상의 어떤 이는 반(班)이고 어떤 이는 산관(散官)이었다.
5. 피죄류(被罪類) 생략
■구화사적(構禍事蹟)
이때 왕의 은총을 받던 여러 현인들은 매양 경연에 나아가 한 장(章)을 강할 때마다 의리를 이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출입하여 미묘한 곳까지 관철하였다. 이때 기준(奇遵)ㆍ박세희(朴世熹)ㆍ양팽손(梁彭孫)ㆍ최산두(崔山斗) 같은 이는 말이 경솔하였고, 그 나머지 재주 있고 날카로운 선비들도 경솔한 결점이 있었으나,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건의하여 사뢴 것에 대하여서는 기어코 왕의 동정을 얻고자 아침에 강연(講筵)을 시작하면 해가 늦은 뒤에야 파했다. 그래서 임금의 몸이 피로해지고 권태를 느끼며 때로는 하품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용상에 기대어 신음하는 소리까지 있었다.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두 사람은 이 강연에 대하여 임금이 싫어하는 눈치를 알고 드디어 모의하여 서로 결탁했다. 그리하여 심정이 몰래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본가로 문안 보내는 계집종을 통하여 조광조(趙光祖)가 나라를 도맡아서 정치를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여 왕을 삼으려 한다는 말을 하게 하고, 또한 항간의 무식한 사람들의 말처럼 꾸며 궁중에 전파시키니, 궁중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홍경주(洪景舟)는 일찍이 찬성(贊成)이 되었다가 논박을 당하여 체임되었으므로, 그는 항상 조광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곤ㆍ심정과 곧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를 시켜 그의 딸 희빈(熙嬪)에 이르기를,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아침저녁으로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의 뜻을 흔들어 놓게 하였다 그리고 또 산벌레는 나무 열매의 달콤한 즙(汁) 들쥭여 늛물 을 잘 먹으므로 그 즙으로 ‘주초가 왕이 된다〔走肖爲王〕’는 네 글자를 궁중의 동산에 있는 나뭇잎 위에 써 놓게 하였다. 혹은 뽕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산 벌레가 갉아먹어 자국이 나니 도참(圖讖)의 글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리고 궁녀를 시켜 그 잎을 따다가 임금께 바치어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니 박빈의 친정집 종의 말과 서로 같아지게 되어 겉과 안이 서로 부합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더욱 의심을 나타내어 사사건건 놀라고 두려워하여 밀서를 경주에게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곤은 시국의 의논이 과격하고 바르지 못하다는 말로 신 문경(申文景)을 찾아가 말하고 그의 뜻을 떠보니 문경은 한 말로 그 간사한 속임수를 꺾어 버렸다. 그래서 남곤은 속으로 풀이 죽었으니 대개 신 문경이 일을 처리하는 데 판단을 잘하기 때문에 남곤은 그 간사한 꾀를 팔지 못한 것이었다. 10월 초3일에 문경이 세상을 떠나니 이미 꺼릴 것이 없었다. 이보다 먼저 정암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이욕(利欲)이란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요, 국가의 병폐의 근원도 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 하여, 반정 때에 공이 없어 허위로 책록된 사람을 삭제하여 그 욕심을 징계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여 드디어 폐기된 일이 있었다. 그후 정암이 다시 대사헌이 되자 대사간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양사(兩司)를 합하여 상주하고, 홍문관도 이에 동조하고 정부와 육조(六曹)도 모두 한결같이 앙청하였다. 그래서 11월 초9일에 마침내 윤허를 받은 일이 있다. 남곤ㆍ심정은 이번의 기회 탄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굽히고 있는 재상들에게 함께 조광조 일당을 해하자는 뜻을 말하니, 지중추(知中樞) 안윤덕(安潤德)은 자기는 능력이 없다고 대답하고, 권균(權鈞)은 지위가 낮다고 사양하고, 여성부원군(礪城府院君)ㆍ송일(宋軼)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그 밀서에, “광조의 무리가 정국(靖國) 공신을 삭제하기를 청한 것은 강상(綱常)을 중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공이 없었던 자를 삭제하고 그 후에 겨우 20여 명만을 남겼는데, 명색이 연산군을 폐한 죄를 천단(擅斷)하자고 하는 것이니, 경의 무리가 어육(魚肉)이 될 것이고 내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주초(走肖)의 무리들은 간사하기가 왕망(王莽)ㆍ동탁(董卓)과 같다. 그래서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관의 첨앙(瞻仰)하는 바가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송 태조(宋太祖)와 같이 황포(黃袍)를 몸에 걸치는 변이 있다면 비록 사양하려 하나 사양할 수 있겠는가. 광조 등이 현량과를 두자고 청한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반드시 우익(羽翼)을 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제거하려 생각하나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또한 그 속에 끼어 있으므로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심복이 몇 사람이 있는가. 광필(光弼)은 왕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장곤(長坤)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소아배(小兒輩)에게 붙었으니 믿을 수 없다. 심정은 비록 근일에 논박을 당하였지마는 재간이 있으니 대임(大任)을 맡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광조 등을 제거하려는 뜻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고, 남곤ㆍ심정에게 물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용근(庸謹)ㆍ한충(韓忠)ㆍ세희(世熹)ㆍ자임(自任)은 모두 무예(武藝)가 있어 두려운 자들이니, 아침에 이 무리들을 없애면 저녁에 죽더라도 반드시 걱정이 없겠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광조 같은 이야말로 정승의 자리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에게 나오는 것이므로 나를 반드시 임금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한갓 자리만 지키고 있는 존재로 알 것이다. 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용모가 온순하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수년 동안에 순서를 뛰어 발탁하여 등용했으므로 현달하게 되었는데 도리어 내가 주초(走肖)의 술책 가운데 떨어졌다. 그래서 드러내 놓고 죄를 주려 하나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ㆍ육조 유생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할 터이니, 내가 능히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근일 이래로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베개를 편안히 하지 못하여 야윈 뼈만 앙상히 튀어나온다. 내가 명색은 임금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인즉 나 자신 임금인지 알 수가 없도다. 옛날에 용근(庸謹)이가 나를 거만한 눈초리로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경 등은 이들을 먼저 제거하고 뒤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화매(禍媒)
심정전(沈貞傳) 남곤전(南袞傳) 홍경주전(洪景舟傳) 이항전(李沆傳)
이빈전(李蘋傳) 성운전(成雲傳) 이신전(李信傳) 송사련전(宋祀連傳)
정상전(鄭瑺傳)
■신원소장(伸冤疏章)
○기축년에 생원 이종익이 찬적의 원통함을 신구함.
...유자광(柳子光)이 또한 간사하여, 김종직(金宗直)에게 원한이 있다고 속으로 죽여 없애려는 뜻을 품었다가 그 일을 모함하게 되매, 드디어 당세 임금의 살벌한 화단(禍端)을 만들어 내어, 사직이 거의 동요할 뻔하였습니다. 아, 종직이 전연 그른 것이 아니고 자광이 옳지 못한 것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함께 격물(格物)의 학문을 의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번 내세우면 신더러 미쳤고 어리석다 하겠으나 10년 동안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 스스로 믿는 바가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앞으로 올 화가 종직의 때보다 더 클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렵니까.
처음에 전하께서 김식(金湜)ㆍ김정(金淨)ㆍ조광조를 전혀 잘못 시험하시어, 즐거이 왕을 보좌할 신하인데도 서로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전하께서 인재를 볼 줄 아시는 명성을 세인의 이목으로부터 어긋나게 하시고, 오늘날의 쇠퇴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그것은 실로 김종직으로부터 잠재해 내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밝게 보는 임금과 때를 구제하는 대신이 없다면 거의 위태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벌을 감하여 지나치지 않게 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이 함육(涵育)할 뿐이겠습니까. 후일에 젖내 나는 무리들이 당시 대신들에게 허물을 돌리어,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큰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은 신이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광조의 마음 쓰는 것이 원래 그러하지 않았는데 조두(俎豆 예의(禮儀))를 잘못 배워서 그 화가 이러한 것이니, 신하된 자로서는 거울삼을 만한 일입니다. ...
○가정 정유 십이월 태학생 등 상소(嘉靖丁酉十二月太學生等上疏) 중중
○중종에게 정암ㆍ충암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소[上中宗請復靜庵冲庵官爵疏] 경자 신축 연간
...지난번에 조광조(趙光祖)의 무리가 대대로 흔하지 않은 예우(禮遇)에 감격하여 비상한 은총에 보답하고자 생각하였으니, 전하를 인도한 것을 보면 학문은 정일(精一)의 학문이요 사업은 요순(堯舜)의 사업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정치를 새롭게 하려면 반드시 경장(更張)하는 도(道)가 있어야 하는데 탐하고 더러운 것이 풍속이 되었으므로 개혁하기를 생각하여 염치를 숭상하였고, 투안(偸安)하고 위미(萎靡)한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진흥시키기를 생각하여 절의를 숭상하였고, 촌락사이의 작은 백성들이 예로 사양하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향약(鄕約)의 예전 법을 행하였고, 과거 이외에 재주와 준걸이 혹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현량(賢良)을 천거하는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습니다. 집마다 효제(孝悌)의 행실을 두텁게 하고 선비는 의리의 학문을 익히어 착한 데로 향하고, 도(道)로 나가는 자가 발꿈치를 접하여 성하게 일어나고 풍기를 상하게 하고 습속을 망치는 자가 자취를 감추어 가만히 사라졌습니다. 백성의 어른이 된 자는 맑게 근신함을 임무로 삼고, 베고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자는 공사를 받드는 것으로 직책을 삼고, 자기 개인을 살찌게 하는 것으로 꾀를 하지 않으며, 삼공 육경의 문에는 뇌물을 바치는 길이 끊어지고, 사대부 사이에는 벼슬을 구하여 다투어 경쟁하는 풍기가 종식되었습니다. 한 착함과 한 능함이 모두 그 적시(適時)에 나타나고 폐단과 작은 결점이 모두 그 묵은 것을 고쳐서 급급하여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고 면려하여 조금도 게으른 것이 없었으니, 가히 나라만 생각할 뿐 집은 잊어버리고 공사에 따르며 사사는 잊고 임금에게 따르며 몸은 잊고 뜻은 이윤(伊尹)ㆍ주공(周公)을 따른 것입니다. 다만 세상을 경험한 것이 오래지 못하고, 근심에 대비하는 것이 미숙하여 ‘반드시 한 세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모르고, ‘빨리 하면 통달하지 못한다’는 경계에 어두워서 점점 물젖듯 하고 오랜 시일을 거쳐 태평의 정치를 이루지 못하고, 곧 시급히 바람 움직이듯 하는 교화와 화하고 빛나는 풍속을 가져오려 하였습니다. 때문에 옛스럽고 일반적인 것에 습관이 된 자는 괴이하다고 지목하고, 두루뭉실한 데 습관이 된 자는 꾸미고 과격하다고 비방하며, 전날에 자리만 차지하고 밥만 먹던 자도 능히 그 녹과 지위를 보전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혹시 용납되지 못하자 질투하는 마음을 품고, 당시에 아양부려 웃고 유순한 말을 하는 자가 진취하는 데는 빨랐는데 지금 와서 혹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해칠 꾀를 품어서, 여럿이 얽는 것이 비단같이 짜여지고[萋斐成錦] 여럿이 불어대는 것이 키질하는 것같아[哆侈成箕] 성상께서의 허락이 한 번 대궐로부터 옮겨지자 북문이 갑자기 밤중에 열리어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호리(狐狸)의 아양을 부리고 사훼(蛇蚖)의 해를 방자하게 해서, 착한 것을 해치고 바른 것을 더럽히는 말에 그 교묘함을 다하고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정상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조정의 위아래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한때의 충성되고 곧은 선비가 모조리 참소하고 해치는 손아귀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하늘 운수가 돌기를 좋아하여 성상의 마음이 한 번 돌이켜지자 심정과 이항이 죽음을 당하였고, 세 간흉이 뒤를 이어 죽고 기묘 사람들이 서로 연하여 등용되어 함께 나라 정사를 다스리어 정치의 교화를 도모하는데, 광조만이 홀로 우로(雨露)의 은택을 입지 못하고, 남곤만이 홀로 부월(鈇鉞)의 베임을 받지 않았으니, 공론이 분하고 답답하여 오랠수록 더욱 격동합니다. 한 나라가 모두 전하께서 시비를 결정하여 인심을 쾌하게 하는 것을 바라는데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니, 앎이 있는 선비로 누가 한심낙담하여 전하께 유감이 없겠습니까. 근자에 시종(侍從)의 소장(疏狀)과 대간의 차자가 가히 한때의 공론을 다하였다 하겠는데, 전하께서 굳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도리어 광조더러 시초에 난을 열어 놓았다 하니, 광조가 그 난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정 을사 춘 태학생 등 상 인종 소(嘉靖乙巳春太學生等上仁宗疏)
...지난번 중종(中宗) 초년에 조광조가 세상에 드문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로서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의 전함을 얻어, 도덕을 나타내고 밝혀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고, 덕이 뛰어난 한 임금을 만나 충성과 정성을 다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밝히고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중종이 또한 그 어짊을 알아서 말을 들어 주고 계교를 받아들여 좋은 보필(輔弼)로 삼았으니, 옛적 흥성한 세상의 다스림을 거의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신 남곤ㆍ심정ㆍ이항은 강함을 분하게 생각하고 자기들보다 나은 것을 꺼려, 교묘하게 흉한 꾀를 자아내어 홍경주와 결탁하여 불측한 말을 꾸며 임금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조광조를 귀양보내어 죽이는 데 이르게 하였으니 다만 죄 없이 원통함을 품게 했을 뿐 아니라, 충성의 분노가 지하에서 수백 년 동안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국가의 원기가 여지없이 깎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림들이 분히 여기고 한탄하는 것이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
■만력 기묘 좌참찬 백인걸 소(萬曆己卯左參贊白仁傑疏)
그 대강에 이르기를, 조광조(趙光祖)가 어질기는 어질지만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은 그 일이 중대합니다. 신이 감히 다시는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만 우선 광조의 일과 공적을 들어서 대강 한두 가지만 진달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가르침을 베푼 이후로 수천백 년 동안에 유자(儒者)로서 세상에 이름난 자로는 두드러진 사람이 별로 없고, 다만 정몽주(鄭夢周)가 도학을 비로소 창도하고, 김굉필(金宏弼)이 능히 그 실마리를 이었으나 오히려 크게 나타나지 못하였고, 조광조에 이르러서 나이 17세로부터 학문에 뜻을 독실히 하여 행동할 때에는 법도에 따르며 하루 종일 엄숙한 자세로 꿇어앉아 있는 것은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 같았으며, 매양 이경말(二更末) 삼경초(三更初)에 이르면 혹 옷 입은 채 조금 자기도 하고 혹 옷을 벗고 자기도 하며, 사경(四更) 중간에 이르면 소세(梳洗)하고 의관을 정제(整齊)하여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진흙으로 만든 사람 같았습니다. 글을 읽는 데는 《소학》ㆍ《대학》ㆍ《논어》ㆍ《근사록(近思錄)》과 성리(性理)에 대한 여러 가지 책으로 급선무를 삼고, 실천에 있어서는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으로 근본을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경오(庚午)에 이르러 진사 장원에 뽑히니 명성이 드날리고,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동방의 성인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부를 쌓기를 오래 힘써 진실로 가운데에 차서 밖으로 드러난 자입니다. 이때에 안당(安瑭)이 전형(銓衡)을 맡아서 처음에 사지(司紙)를 제수하여 벼슬길을 통하게 하였고, 그 뒤에 을해년 과거에 올라 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으로써 자기 임무를 삼고, 도를 행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것으로써 자기 책무를 삼아서, 조정에 선 지 다섯 해 동안에,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고 아래로는 유림(儒林)을 용동(聳動)시키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 거의 정치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사람마다 향할 곳을 알고 효도와 공경을 숭상하여 관학(館學) 유생(儒生)이 서로 예법을 좇을 뿐만 아니라, 시정(市井)의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또한 모두 사모하고 본받아서, 부모를 지성으로 섬기어,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애통하고 3년동안 시묘(侍墓)하는 것을 위아래가 모두 행하고, 북망산 언덕에 표석(標石)이 별 늘어서듯 하였으니, 또한 모두 광조의 덕화가 미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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