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기묘록보유(안 로)

청담(靑潭) 2016. 1. 10. 16:50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안 로(安 璐)(1635-1698)


안로는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성거(聖車)이다. 일찍이 병자난과 정묘난을 겪은 후 세사(世事)에 관심을 끊고 산림(山林)에 들어가 수신(修身)하면서 지냈다. 더욱이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仁顯王后)가 궁에서 쫓겨나고, 이어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김수항(金壽恒, 1629-89)이 화를 당하자 격분하여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 책은 기묘당적(己卯黨籍)을 補遺(빠진 것을 보탬)한 책이며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한 사람들의 사적을 엮은 책으로 상·하 2권에 100여 명의 전(傳)을 싣고, 상권 끝에 추록(追錄)이라 하여 30여 명을 더 수록하였다. 인용한 기사는 대개 출처를 밝혔다.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정광필 전(鄭光弼傳) 안당 전(安瑭傳) 최숙생 전(崔淑生傳) 이장곤 전(李長坤傳) 김안국 전(金安國傳) 이자 전(李耔傳) 김정 전(金淨傳) 김세필 전(金世弼傳) 유운 전(柳雲傳) 문근 전(文瑾傳) 권벌 전(權橃傳) 조정암 전(趙靜庵傳) 박영 전(朴英傳) 이윤검 전(李允儉傳) 최명창 전(崔命昌傳) 윤세호 전(尹世豪傳) 이계맹 전(李繼孟傳) 신상 전(申鏛傳) 이사균 전(李思鈞傳) 유인숙 전(柳仁淑傳) 신광한 전(申光漢傳) 정순붕 전(鄭順朋傳) 이성동 전(李成童傳) 유용근 전(柳庸謹傳) 김구 전(金絿傳) 공서린 전(孔瑞麟傳) 한충 전(韓忠傳) 윤자임 전(尹自任傳) 박세희 전(朴世熹傳) 김정국 전(金正國傳) 이청 전(李淸傳) 최산두 전(崔山斗傳) 장옥 전(張玉傳) 이희민 전(李希閔傳) 김광복 전(金匡復傳) 정응 전(鄭譍傳) 기준 전(奇遵傳) 박상 전(朴祥傳) 이충건 전(李忠楗傳) 양팽손 전(梁彭孫傳) 이약빙 전(李若冰傳) 윤개 전(尹漑傳) 구수복 전(具壽福傳) 윤구 전(尹衢傳) 심달원 전(沈達源傳) 조언경 전(曹彦卿傳) 임권 전(任權傳) 안처순 전(安處順傳) 채세영 전(蔡世英傳) 정원 전(鄭源傳) 이구 전(李構傳) 허백기 전(許伯琦傳) 박소 전(朴紹傳) 권장 전(權檣傳) 김필 전(金珌傳) 성수종 전(成守琮傳) 이약수 전(李若水傳) 조광좌 전(趙廣佐傳) 윤광령 전(尹光齡傳) 의사 안찬 전(醫師安瓚傳) 하정 전(河挺傳) 홍순복 전(洪舜福傳) 심풍 전(沈豐傳) 박연중 전(朴連中傳)

 

■추록(追錄)

구수담 전(具壽聃傳) 이준경 전(李浚慶傳) 

●천거과(薦擧科)

(홍패(紅牌)에 다만 별시 현량(別試賢良)이라고 적은 것은 당시 조정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

당시 논의에,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과거 한 길뿐이다. 구두(句讀)만 아는 선비를 모아서 조금 나은 것을 비교하는 까닭으로, 큰 덕을 가진 뛰어난 학자는 봉필(蓬蓽)에서 생을 마치면서 문달(聞達)하기를 구하지 아니한다. 유일(遺逸)된 인재를 찾아서 조정에 포치(布置)한다면 비록 3대의 아름다운 정사가 이루어졌다고 이를 것이나, 선왕의 법을 경솔하게 변경할 수는 없는 즉 논사(論思)하는 임무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구애되는 바가 많다. 그러니 추천으로 뽑아 시취(試取)해서 한(漢) 나라 때의 좋은 법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온 조정이 합청(合請)하였다. 조정암(趙靜庵)도 또한 논계(論啓)하기를, “전하의 지극한 다스림이 오래도록 아직도 효과가 없는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한 까닭입니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하면 인재 얻기를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임금이 서울과 외방에 명하여 재예와 행검을 겸비하여 임용할 만한 사람을 심사하였더니 총 1백 20명이었다. 기묘년 4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을 과시(科試)한 다음 28명을 취하여 순위를 따지지 않고 서용하였는데, 홍문관에 채용된 자는 18명이었다. 11월 사화가 일어난 뒤에 당시 재상이 생각하기를 청의(淸議)하는 사람은 천과(薦科) 출신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하나씩 잇달아서 탄핵하고 제거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대간을 부추겨서 그 과거를 혁파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보통 문과에는 초시(初試)를 뽑아 전시(殿試)에서 친림(親臨)하는 것이니, 천과에서 다만 문과를 파방(罷榜)하라.” 하였다. 을사년 6월 인묘(仁廟) 말년에 이 과거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과거에 오른 사람으로서 생존한 자가 14명인데, 파방된 뒤에 혹은 다른 과거에 올랐거나 혹은 외관에 보임되었고 한직에 있는 자가 11명이었고, 교리(校理) 이연경(李延慶), 칠원(漆原) 김대유(金大有), 한림(翰林) 신준미(申遵美)는 마침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문정왕후(文正王后)가 수렴(垂簾)하게 되자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이 인심을 수합하고자 왕명을 사칭하여 복과(復科)한 것이라 하였다. 드디어 우의정 이기(李芑)를 부추겨서 10월 10일에 계청하여 그 과거를 도로 파방하였는데, 실상은 인묘(仁廟)를 미워한 것이었다. 무진년 10월 8일에 뇌성벽력이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삼공(三公) 이준경(李浚慶) 등이 재변(災變)으로 인해 복과하기를 청해서 곧 윤허되었다.

(무인년 6월 5일. 문과 천거 사목(文科薦擧事目) 중종 13년이다.)

전지(傳旨)하기를, “정사를 하는 급무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 첫째이니, 현인을 추천하는 책임은 오직 재보(宰輔)에게 있다. 사방으로 준예(俊乂)를 부르는 데에는 입에 먹던 것을 토하고 감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 잡고서 맞이하였으니, 옛날 어진 정승은 모두 이것을 급무로 하였다. 구하는 데에 길이 있는 것이지 어느 세대라고 어찌 사람이 없으랴. 나는 정사에 임하여 잘 다스리기를 원하여 어진 이 구하기를 목 마른 데 물 구하듯 급하게 하였다. 지금 1기(紀 12년)나 되었으나 치적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진 인재를 혹 빠뜨림인가, 주의(注擬)할 때에 매양 사람이 모자란다는 탄식이 있으니 어찌 깊이 개탄할 바 아니리오. 여러 현철한 신하의 보좌를 힘입어서 거의 태평한 다스림에 이르고자 하나니 정부에서는 나의 마음을 알아서 널리 순방하여 내가 급하게 여기는 뜻에 부응하라.” 하는 이 말을 의정부에 내렸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함께 논의한 계목(啓目)에, “역대의 인재를 취한 법은 규모와 제도가 각자 달라서 다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서한(西漢) 때의 효렴(孝廉)ㆍ현량(賢良) 등 과거가 가장 근고(近古)한때의 일이며 또 선거하는 방법은 사책(史策)에 상고할 수 있습니다. 원삭(元朔) 5년에 군국(郡國)ㆍ현관(縣官)에게 조서를 내려, ‘문학을 좋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정교(政敎)를 공경하게 받들고 향리 사람에게 순하며, 나가고 들어감이 들은 바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영(令)ㆍ상(相)ㆍ장(長)은 바삐 소속한 이천석에게 알려 신중히 살피게 하고, 어사(御史)ㆍ사예(司隸)ㆍ주목(州牧)은 해마다 재능이 훌륭한 사람과 사행(四行)을 갖춘 사람 각 한 사람씩을 천거하라.’ 하였습니다. 사행이란 것은 순후(醇厚)ㆍ질박(質撲)ㆍ겸손(謙遜)ㆍ절검(節儉)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국의 훌륭한 인재가 모두 경사에 도착하면 천자가 난간에 임하여 친히 책문(策問)한다.’ 하였습니다. 선발하는 절차가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지금도 이 법을 본받아서 재예와 행검이 겸비되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명망과 실덕(實德)을 심사하여 널리 천거하게 합니다. 서울에서는 4관(館)에서 전적으로 주관하여 유생이나 조사(朝士)를 물론하고 다 성균관에 천거하며, 성균관에서는 예조에 전보(轉報)합니다. 중추부(中樞府)ㆍ육조ㆍ한성부ㆍ홍문관에서도 또한 아는대로 들어서 예조에 이문(移文)합니다. 외방(外方)에서는 유향소(留鄕所)에서 본읍(本邑)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면 감사는 다시 잘 살펴서 예조에 이문하도록 합니다. 예조에서는 서울과 외방에서 천문(薦聞)한 바를 수합하여 성명과 행실을 갖추어 정원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며, 전책 집사(殿策執事)가 때에 맞추어 계품(啓稟)합니다. 그 사이에 명망과 실덕이 어긋나는 사람을 속여서 천거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스러우니, 그 사람을 천거하도록 주장한 사람의 성명도 아울러 기록하여 후일 검토할 때에 증빙이 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여,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기묘년 1519년 4월 10일(중종 14년)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거둥하여 책문 제목(策文題目)을 명하였고, 서울과 지방에서 천거된 이가 1백 20명이었다.

●책문제(策問題)

왕이 이르기를, “내가 덕이 적고 일에 어두워서 간난(艱難)하고 원대한 기업(基業)을 받들기를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도 능히 부하(負荷)하지 못할까 두렵다.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당(唐)ㆍ우(虞) 시대의 다스림과 같은 경지에 이르도록 기약한 지가 지금까지 14년이다. 그러나 아직 그 공적이 나타나지 않아, 인심은 점차 경박해지고 민생은 나날이 곤궁하여지기만 하니 내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리오. 그 연유를 궁구하면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그 효과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민물(民物)을 은성(殷盛)하게 하고 풍속을 변화시켜서 당ㆍ우 시대의 다스림을 회복하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제왕의 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그대 대부(大夫)들은 반드시 그 큰 것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각자 온축(蘊蓄)한 바를 다 말하라. 내 장차 보리로다.” 하였다.

4월 14일

독권관(讀卷官)들이 김식(金湜) 등의 책문에 차례를 매긴 시권을 가지고 들어와 아뢰었다. 전지하기를, “옛 시에도, ‘훌륭한 많은 인재가 있어서 문왕(文王)이 편하게 여긴다.’ 하였다. 지금 마땅히 어진 인재를 널리 뽑아서 조정에 등용하는 것이 옳다. 게다가 김식은 어진 사람이라, 이 사람을 꼭 얻어서 장차 선비의 스승이 되는 벼슬을 시키고자 하였는데, 시취(試取)하는 데 참여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었다. 이제 장원의 서열에 있으니 내가 더욱 기뻐하는 바이다.” 하였다. 독권관이 장령 김식 등 28명을 뽑아 문과 급제로 하여 방(榜)을 내고 계하기를, “김식뿐이 아니고 명망 있는 선비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니 신들도 매우 기쁩니다.” 하였다.

4월 15일

정원에 전지하기를, “이번에 뽑은 사람은 모두 현사(賢士)이나, 내가 더욱 기뻐하는 것은 김식이 첫째로 된 것이다. 어제 독권관들이 계한 데는 뜻이 있는 것인데, 내가 미처 답하지 못 하였고 이제야 말하는 것이다. 정원에서는 그리 알아서 독권관을 시켜 계문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2월 16일 천과를 파방하다.

전지하기를, “우리 조종조 적부터 선비를 뽑는 길이 넓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선비를 뽑는 법도 본래 정한 규정이 있었다. 얼마 전에 언(言), 본체(本體)에 밝고 용(用)에 알맞은 인재를 얻으려면 옛날 현량(賢良)ㆍ효렴(孝廉) 등 과거 제도를 본받는 것이 옳으니, 중외에 널리 재예와 행검을 구비하고 덕기(德器)가 성취된 자를 천거하게 하여 별도로 한 과거를 베풀면 거의 실용할 만한 인재를 얻어서 나의 다스림을 도울 것이고, 직책을 닦는 데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간과 대신이 모두, 천거는 조종의 제도가 아니고 당초 천거할 때에 자못 공평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시취하던 날에도 또한 사정(私情)에 치우친 일이 있었다고 하는 바, 국가에서 과거를 베푼 본의에 비추어 볼 때 명실(名實)이 크게 그릇되었다. 천거과에 문과를 파방하고 무과는 그대로 두고 파방하지 말라.” 하고, 그 전지를 의정부에 내렸다.

(가정(嘉靖) 을사년 6월 29일, 천거과를 회복하다.인묘(仁廟) 원년)

전지하기를, “조광조(趙光祖)의 관작을 회복할 일과 현량과에 합격한 자의 자격을 도로 주는 일을 조용하게 하려 하였으나, 지금 내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조광조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현량과를 회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시행하라.” 하고 이조에 내렸다.

(10월 10일 다시 파과(罷科)하다. 명묘(明廟)가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했을 때이다.)

우상 이기(李芑)가 계하기를, “기묘년의 사람들이 한갓 자기들이 아는 사람만을 현량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정당하지 못한 과거로서 쓸 수 없습니다. 중묘(中廟)께서 파하신 바이고 인묘께서 비록 회복하도록 명하셨으나 또한 쓸 수 없으니, 그 과거는 파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이 계하기를, “유인숙(柳仁淑) 등이 평소 말하기를, ‘현량과는 속히 아뢰어서 회복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으나, 신은 중묘께서 파하였던 것이고 주상께서 즉위하신 지 한 해를 넘기지 못 하였으니 반드시 회복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승하하신 뒤에 갑자기 과거를 회복하라는 명이 있어 인심에 혹 미편(未便)하게 여기기도 하였고 혹 의심하는 자도 있었는데, 그 뒤에 또 흉도(兇徒)의 공초(供招)도 있었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기와 이것을 논의하였는데 의심이 없지 않으니 파과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전지하기를, “현량과는 계한 것과 같이 파하고, 그 중에도 쓸 만한 사람은 그대로 임용하라.”고, 이조에 내렸다. 이 과거 당시에 무함하였던 윤임(尹任)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을 그들의 벼슬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는데, 또 윤임이 인심을 수합하려고 교지(敎旨)를 꾸몄다 하여 도로 파하도록 청하였다.

(융경(隆慶) 무진년 10월 10일 과거를 회복하다. 지금 임금 원년)

교(敎)하기를, “기묘년 천거과는 전전(殿前)에서 과거를 보여 뽑아 명의(名議)가 매우 중하였는데, 뭇 소인들이 묵은 원한을 풀고자 과거가 공평하지 못했다고 지목하여 파과하였다. 그러나 간사한 실정을 덮기 어렵고 공평된 논의가 저절로 격화되어 인묘 말년에 그 과거를 특별히 회복하도록 명하였던 것인데, 을사년 간신이 착한 사람을 미워하고 또 간사한 의론을 세워 혁파하게 하였으므로 사림이 오래 분함을 품었었다. 이제 남곤(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여서 그 흉특함과 착한 사람을 해친 죄를 바르게 했다. 옳고 그름이 이미 정해졌는데 이 과거를 아직도 회복하지 않은 것은 극히 온당하지 못하니 과거를 회복하라.” 하고, 이조에 내렸다.

김식 전(金湜傳) 조우 전(趙佑傳) 이연경 전(李延慶傳) 안처근 전(安處謹傳) 김명윤 전(金明胤傳) 안정 전(安珽傳) 안처겸 전(安處謙傳) 권전 전(權磌傳) 신잠 전(申潛傳) 정완 전(鄭浣傳) 민회현 전(閔懷賢傳) 안처함 전(安處諴傳) 박훈 전(朴薰傳) 김전 전(金錢傳) 신준미 전(申遵美傳) 김신동 전(金神童傳) 강은 전(姜㶏傳) 방귀온 전(房貴溫傳) 유정 전(柳貞傳)

박공달 전(朴公達傳) 이부 전(李阜傳) 김대유 전(金大有傳) 도형 전(都衡傳) 송호지 전(宋好智傳) 민세정 전(閔世貞傳) 김옹 전(金顒傳)

 

기묘록 보유 하권(己卯錄補遺 卷下)

경세인 전(慶世仁傳) 이령 전(李翎傳) 파릉군 전(巴陵君傳) 시산 부정 전(詩山副正傳) 숭선 부정 전(崇善副正傳) 장성수 전(長城守傳) 강녕 부정 전(江寧副正傳) 최운 전(崔澐傳) 노필 전(盧㻶傳) 이사검 전(李思儉傳) 송호례 전(宋好禮傳) 박수량 전(朴遂良傳) 이영부 전(李英符傳) 신변 전(申抃傳) 유성춘 전(柳成春傳) 고운 전(高雲傳) 성세창 전(成世昌傳) 정 충량 전(鄭忠樑傳) 이홍간 전(李弘幹傳) 박광우 전(朴光佑傳) 신명인 전(申命仁傳) 최수성 전(崔壽城傳) 이종익 전(李宗翼傳) 목세평 전(睦世枰傳) 윤수 전(尹壽傳) 봉천상 전(奉天祥傳) 성수침 전(成守琛傳) 이중 전(李中傳) 오희안 전(吳希顔傳) 윤광일 전(尹光溢傳) 김덕수 형제 전(金德秀兄弟傳) 조변 전(趙抃傳) 김귀천 전(金貴千傳) 백인걸 전(白仁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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