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기옹만필(정홍명)

청담(靑潭) 2016. 1. 19. 13:21

 

 

■기옹만필(畸翁漫筆)

 

 

작자 정홍명(1582-1650)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또는 삼치(三癡). 아버지는 우의정 정철(鄭澈)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유강항(柳强項)의 딸이다.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어려서 송익필에게 글을 배우고 약관에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주역』·『근사록』 등을 배웠다. 김장생의 아들 집(集)은 그를 중히 여겨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반대당들의 질시로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의 정자·수찬이 되었다. 이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공주까지 몽진 갔다 돌아와 사간원의 정언·헌납과 교리,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의 사인으로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 머물면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7년에 사헌부집의·병조참지·부제학·대사성을 역임하고, 자청해서 김제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인렬왕후(仁烈王后) 상을 마친 뒤 예조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을 사양하다가 다시 함양군수를 지내고, 1646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곧 병이 들어 귀향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억지로 불려 나왔다가 돌아갈 때 다시 대사헌·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두루 정통했으며, 고문(古文)에도 밝았다. 하지만,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다. 저서로는 『기옹집』·『기옹만필(畸翁漫筆)』이 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대동야승을 읽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책을 비로소 만난 것이다. 정철의 아들인 저자가 자신이 보고 들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정사 못지않은 야사는 바로 이런 기록을 말함이다.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과 주변인들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율곡(1536-1594) 선생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氣)를 이(理)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

하고, 《대학》소주(小註) 중 진북계(陳北溪)의 설명에 대해 반박하여 말하기를,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합함이 있지는 않다.”

하였다. 또 들으니, 항상 의논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묘하게 합하여 엉긴다.’는 것은 주자의 ‘한 덩어리가 되어 간격이 없다.’는 설명만 못하다.”

라고 하였는데, 훗날에 반드시 그 뜻을 알 자가 있을 것이다.

율곡의 사서(四書)의 토와 주석 및 소주(小註)의 평정(評訂)이 극히 정밀하고 자세하여, 후학들을 감발하게 할 만하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그 일을 경전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 당세에 널리 전포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자가 보면 버리고 거두지 않는 일이 없다고 기필하지 못하겠다.

●일학(一學) 노숙(老宿)은 불문(佛門)의 종사(宗師)이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입정(入定)한 지 근 50년이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율곡을 따라 산놀이를 하였는데, 어떤 곳을 지나다가 돌구멍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물을 마셨다. 율곡도 물을 길어오라고 하여 한 모금 마시고는 ‘이 물은 둘도 없는 맛이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을 몰랐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저 물은 맑은 것이 좋은데, 맑으면 무게가 무겁다. 흐린 물은 비록 모래와 진흙이 섞였더라도 무게는 맑은 물을 따르지 못한다.’ 하니, 같이 가던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니, 과연 무게가 다른 물의 두 배나 되었다. 마침내 철인(哲人)은 만물의 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음이 다 이런 줄을 알았다.”

하였다.

●오래 전에 우연히 늙은 중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용문산(龍門山)에 있을 때에 우계(牛溪 성혼(1535-1598 成渾))선생과 여러 날을 함께 거처하여 그 분의 일상생활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조석으로 무엇을 하던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팔짱을 끼고 바로 앉는다. 오정 때쯤 되면 또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빗고 앉으며 때로는 책을 펴 본다. 생각할 것이 있으면 곧 책을 덮고 엄숙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였다.

우계(성혼)는 집에 거처할 때에도 일처리가 세밀하였다. 이른 아침에 그날 일을 시키는데, 비록 농사짓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인들에게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계산하여 분부하는데 조금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 거처할 때에도 집안이 가난하고 궁핍한 적이 없었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 성혼의 父) 선생은 평생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드리고 손님 대접하는 준비는 모두 우계가 마련하였다. 혹 서울 객중에 있을 적에도 매양 친구들이 찾아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청송은 이것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율곡(1536-1584)우계(1535-1598) 및 우리 선인(정철1536-1593)이 함께 진사 이희삼(李希參)의 집에 모였을 적에, 주인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석개(石介)가 당시의 이름난 기생으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술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려 하자 우계가 갑자기 일어섰으나 좌중에서 감히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평생에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

퇴계(1501-1570 退溪)는 남명(南溟 조식(1501-1572 曺植))과 시대가 같고 동갑이며 같은 도에 함께 있었지만 끝내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 ‘천고의 옛 사람을 벗 삼는다.’ 하였으며 ‘천리 길을 가서 만나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이었던가?

●김하서(金河西 인후(1510-1560 麟厚))는 풍채가 맑고 빼어나며 골격이 기이하여 세속 사람들보다 특출하였다. 젊을 때에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을사년 이후로는 인간사의 생각을 끊어 그 모습이 마른 나무나 식은 재와 같았다.

매년 7월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기일에 앞서 술을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한없이 통곡하였다. 선인(先人)이 평소 깊이 사모하여 시를 지었는데,

해마다 7월이 되면 / 年年七月日

일만 산중에서 통곡하네 / 痛哭萬山中

이라 하였으니, 그 사실을 읊은 것이다.

토정(1517-1578 土亭)의 소설(小說)에,

“악한 범은 사람의 작은 몸을 엿보고 사특한 생각은 사람의 큰 몸을 먹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악한 범은 무서워하고 사특한 생각은 무서워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포천 군수로 있을 때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재주대로 하여야 한다.’는 조목에서는,

“해동청(海東靑)은 천하의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게 한다면 늙은 닭만 못하고, 한혈구(汗血駒)는 천하의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게 한다면 늙은 고양이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닭으로 사냥을 할 수 있겠으며, 고양이로 수레를 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토정은 행적이 탁월하고 기이하며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천성은 순수하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선산(先山)이 바다 가까이 있어 백 년 뒤에는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몸소 밭 갈고 소금을 팔면서 노고를 싫어하지 않고 산을 옮겨다 바다를 메울 계획을 하였다.

형이 죽으니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르고, 성현의 글을 읽되, 길을 가나 자리에 앉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외웠다. 학도들과 함께 다닐 때마다 이따금 갑자기 경서와 역사에 대해 물어 혹 잘 대답하지 못하면, 반드시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길 다니는 것이 괴롭다고 여겨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할 것이냐.”

하였다. 다만 토정이 강해(江海)에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조중봉(1544-1592 趙重峰 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

중봉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여관에 들었는데, 밤이 깊고 인정(人定)이 된 뒤에도 관솔을 태워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옆집에 마침 어떤 선비가 엿보았는데, 손에 들고 보는 책은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으로 거의 닭이 울게 되어서야 글 읽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천고(天鼓)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

중봉은 젊었을 때부터 이씨 집 형제와 친근하게 교제하여 정분이 형제와 같았는데, 만년에 와서 이씨 집 형제가 정적(鄭賊 정여립(鄭汝立)을 말함)과 서로 친근하니, 중봉이 간절히 절교하라고 주의시켰지만, 이씨는 친구 간에 까닭없이 절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중봉은 그들이 끝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남평(南平) 이씨의 집으로 가서 수일 동안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로 비유하며 타일렀지만, 이씨가 끝내 듣지 않았다. 중봉은 떠나가면서 칼을 뽑아 앉은 자리를 베어 칠언시(七言詩) 한 절구를 써 주며 작별하였는데, 끝 구에,

나는 가고 그대는 머물러 각자 닦을지어다 / 我去君留各自修

하였는데, 그 후로 그만 절교되었다.

●《중용》 첫 장의,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에 대한 훈고에서,

“교(敎)는 예악 형정 교화(禮樂刑政敎化) 같은 등속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계곡(谿谷 장유(1587-1638 張維))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의견을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성현이 남긴 말이나 문장은 마땅히 먼저 받들고 믿어 바탕을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잘 연구하여 그 뜻을 깨달은 뒤에 평해야 할 것인데, 어찌 간단히 자기 생각으로 단정할 수 있으랴. 하물며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극히 정밀하여 후학들이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계곡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다.

사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이 학문을 논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말일지라도 이내 그 가부를 알 수 있는데, 문장의 잘못은 시골 학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잘 알 수 없다.”

하였다. 아마도 공부하는 것이 한 곳에만 치우쳐서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인가?

율곡이 고봉(高峯)과 같은 때에 벼슬하였고, 비록 나이의 차이는 있지만 원래 도학으로도 서로 통할 만하였는데, 끝내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학》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하는데, 어찌 그래서 그렇겠는가?

퇴계는 고봉을 극히 존중하였는데, 이는 왕복한 서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인은 고봉보다 아홉 살 아래요, 소시부터 글을 배우며 선생으로 불렀다. 평상시에 고봉ㆍ윤월정(尹月汀 윤근수)과 함께 호당(湖堂)에 숙직할 때에 고봉이 기세를 올려 율곡에 대해 흠을 잡자, 선인이 조용히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이모(李某 : 율곡을 말함)와 도의(道義)의 교제를 허락하였으니, 매양 헐뜯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으나, 고봉은 더욱 분이 풀리지 않았다. (월정 윤근수의 말임)

월정(윤근수 : 1537-1616)이 매양 말하기를,

“평상시 고봉(기대승 1527-1572) 및 황강(黃岡) 김계휘(1526-1582 金繼輝)ㆍ이산해(1539-1609 李山海)와 같은 당번이 되어 호당에 숙직하였는데, 예전부터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가 벽 위에 걸려 있었다. 고봉과 황강이 우연히 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산천의 형세와 거리의 원근, 인물의 출처, 주군(州郡)의 연혁을 담론하는데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두어 밤이 새도록 쉬지 않았다. 아성(鵝城 이산해)이 나와서 나에게 ‘우리들이 저 사람과 함께 벼슬하는 것이 어찌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다.”

하였다.

●정해 연간(1587, 선조 20)에 선인께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노소재(盧蘇齋 노수신(1515-1590 盧守愼))를 찾아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때 소재는 수상이었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들면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사간의 정으로 보아서 물러갈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절구의 시를 부채에 써 주었다.

언덕 위의 풀은 해마다 늙어지고 / 壟草年年老

뜰 앞의 가시나무 날마다 쇠해지네 / 庭荊日日衰

한 평생 충효로 자임하던 그대 / 平生任忠孝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려 하시나 / 持此欲何之

평소 책 광우리에 간직해 두었기에 나도 보았다.

퇴계가 남쪽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하는 사람이 배 위에 가득 찼다. 선인은 공무로 좀 늦어 뒤에 강가로 나갔더니, 배는 벌써 강 가운데로 나갔다. 뱃사람 편에 시 한 절구를 노선생에게 드렸다.

광릉(廣陵)까지 따라 이르렀지만 / 追到廣陵上

타신 그 배 벌써 아득하여라 / 仙舟已杳冥

가을 바람에 수심 가득 안고 / 秋風滿腔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퇴계가 배 위에서 손을 들어 사례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차운(次韻)하여 붙였었는데, 지금 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

●소시에 체소(體素) 이공(李公)춘영(春英)이 해서(海西)의 중씨(仲氏) 처소에 들렀는데,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각자 읽던 책을 가지고 와서 앞에 벌여놓고 좌우에서 묻고 논란하였다. 체소가 술잔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노련한 법관이 송사 처리하듯 척척 대답하였으니, 역시 유쾌한 일이었다.

●오산(五山) 차천로(1556-1615 車天輅)는 백가서(百家書)를 다 통하여 학식이 매우 풍부하였다. 그러나 유쾌한 기분으로 휘둘러 써두고는 고치지를 아니하고 끝내 어지럽게 쓴 초고를 광주리 속에 던져두고 다시 꺼내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후세에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삼았는데, 당시 선배들이 대부분 그 장래를 염려하였다. 그리고 큰일을 하는 것이나 현량과(賢良科)를 설립하는 등의 일은 대부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1507년 급제)에게서 나왔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실패하게 된 뒤에는 모재만이 큰 화를 면하여 파직을 당하는 데에 그쳤다.

모재는 젊어서 김안로(金安老 1481-1537, 1506년 급제)와 친절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김안로가 모재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모재가 취한 김에 농담으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문형을 주관하는 것은 인재가 없어서 그런 것뿐인데 무엇이 귀할 것인가.”

하니, 김안로가 웃고 갔다. 자제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언이라고 여겨 그가 반드시 매우 유감을 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안로와 가장 친하여 그 사람됨을 잘 아는데, 반드시 한때의 농담으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과연 무사하였다.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모재는 변함없이 철마다 그 집을 돌보아주었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대사성 김식(1482-1520 金湜)이 도망하여 지방으로 나가 있었는데, 밤에 눌재(訥齋) 박상(1474-1530 朴詳)을 광주(光州) 촌가로 찾아가서 함께 자며 여러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세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오늘날의 화는 반드시 주상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조만간에 자연히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눌재가 대답하기를,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간악한 계교는 깊고 세밀하니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전대의 권신이나 판관들이 임금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것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니, 이승에서는 다시 전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식은 비로소 실망하고 뉘우쳤다. 이날 새벽에 작별하고 가다가 길가의 다리 아래에서 목매어 죽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1462-1538 鄭光弼)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서울 하인이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여러 간신들이 모두 실패하고 어르신께서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는데, 몇 가지 서신이 여기 있습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우선 그대로 두라. 밝은 날에 뜯어 보겠다.”

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화가 일어나자, 월정(月汀 윤근수)은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는 데 그쳤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평소 이가(李家)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자제들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때에 한 번만 가서 보면 다른 우려가 없음을 보증하겠다.’ 하였으나, 나는 대답하기를 ‘옛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 때문에 의리를 구차하게 할 수 없다.’ 하였고, 당대의 친구들이 모두 잘못되었는데, 나만 편안한 것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인(정철)은 평생에 꿈이 반드시 맞았다. 신묘년에 화를 당하여 남양(南陽) 구포(鷗浦)로 나가 살았는데, 새벽녘에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꿈에 내가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었으니 그곳이 유배지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진주로 정배(定配)되었다고 하니, 선인께서 탄식하기를,

“평생에 꿈을 믿었는데, 늙으니 꿈도 맞지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간 지 며칠 만에 대간의 논쟁으로 강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세도에 아부하고 장사 수단으로 교제하는 자를 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더위와 서늘함의 차례가 바뀌어 영욕(榮辱)이 자리를 바꿀 때에는 평일에 지기(知己)라고 하던 사람들도 문 앞을 지날 때는 목을 움츠리고 한 번도 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물에 빠지면 돌을 던지는 자도 많다.

●말세의 사람들은 원래 의리를 아는 자가 적지만 이해를 아는 자도 적다. 일생을 부귀에 뜻을 두어 온갖 계책을 다 쓰며 시세에 따라 아첨하면서 오히려 못 미칠까 염려하던 자들도 나중에 화란을 기어이 만나고, 간혹 분수를 편하게 여기고 본 뜻을 지켜 일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안색을 바로 하여 조정에서 일하면서 꼿꼿하게 지내던 사람도 반드시 모두 함정에 빠지지는 않으니, 이런 것은 불선한 자들의 경계가 된다.

●안정된 자는 조급함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이루게 되고, 내실이 없이 과장하는 자는 분쟁만을 일삼기 때문에 끝내는 실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제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조용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부릴 때에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여 나중에는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치게 되는 것이 전후에 잇달았지만 뉘우칠 줄을 모른다. 지금 보아도 이런 경우가 많다.

●조정암(趙靜庵 조광조 1482-1519)은 8~9세 때 김한훤(金寒暄 김굉필 1462-1538))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한훤을 모시고 있는데, 한훤이 고양이가 포육을 훔쳐가는 것을 여종이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 성을 내어 꾸지람하여 마지않았다. 그 포육은 어머니에게 반찬으로 드리려던 것이었다.

정암이 천천히 말하기를,

“선생님의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합니다만, 고양이는 그런 것을 모르고 여종들 역시 일부러 범한 것은 아닌데, 선생님이 이로써 너무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한훤이 놀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네가 어린아이로 내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 배웠다.”

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권여장(權汝章 권필 1569-1612)이 궁류시(宮柳詩)한 편으로 인하여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옥에 갇혔다. 옥문을 나와서도 상처가 아파서 곧 귀양길을 떠나지 못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민가에 유숙하였다. 하루는 친구들이 와서 문병을 하고 전송하는데 와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장이 누워 있는 방안의 벽을 보니 옛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청춘이요 날은 저물려는데 / 正是靑春日將暮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누나 / 桃花亂落如紅雨

권하노니 그대여 온종일 진하게 취해 보소 / 勸君終日酩酊醉

술이 많다 해도 유령의 무덤 위엔 이르지 못한다네 / 酒不到劉伶墳上土

대개 이것은 어떤 시골 훈장이 아무렇게나 전에 썼던 것인데, 권(勸) 자를 잘못 권(權) 자로 쓰고, 유영(劉伶)을 잘못 유영(柳聆)으로 써놓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놀랐다.

좀 있다가 여장이 목마르다고 하면서 술을 찾아서 큰 그릇으로 하나를 마시고는 그만 눈 감고 마니, 이날이 바로 3월 그믐날이었으며, 창 밖의 풍경이 그 시중의 풍경과 같았다. 조물주가 인간의 생사에 대한 처분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슬픈 일이다.

궁류시

권필은 1569년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나 송강 정철(鄭澈)의 문하에서 활동하였다.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구속받기를 싫어하였고, 평생을 야인으로 살다가 삶을 마쳤다. 동료문인들이 더러 벼슬자리를 추천하였으나 번번이 이를 마다하였으며, 한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책에 임명됐으나 윗사람에게 굽힐 수 없다며 사양했다. 그는 절개가 높아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또 시류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시재(詩才)가 뛰어난 그는 시대의 울분과 갈등을 시(詩)로써 토로하였고, 또 부패한 권력에 맞서서 이를 비판, 풍자하는 데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초의 일이다. 당시 권세가 이이첨(李爾瞻)이 그에게 교제를 청해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태생적으로 권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세가들은 이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이이첨은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시절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가르쳤으며, 게다가 선조에게 광해군이 세자로 적합하다고 주장하다가 유배를 다녀왔다. 광해군이 등극하자 이이첨은 ‘실세’가 됐고, 과거(科擧) 업무도 주관하였다. 그 시절 권세가가 한 사람 더 있었다.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이었다. 광해 3년, 즉 1611년에 과거가 치러졌는데 이 때 ‘사건’이 하나 터졌다. 별시문과에 응시했던 임숙영(任叔英)이 지은 대책문(對策文)이 말썽이 됐다. 임숙영은 유희분 등 왕실의 외척들이 정사를 그르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보기 나름으로는 ‘대역죄’에 해당할만한 중대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이첨 정권에서 우의정을 지낸 심희수가 어렵게 급제시켜주었다. 그러나 이걸로 ‘임숙영 사태’가 마무리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인 광해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임숙영의 급제를 취소시켰다. ‘절개의 선비’ 권필이 이를 그냥 보고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세태를 꼬집었다.

宮柳靑靑花亂飛 궁궐 버들은 푸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滿城冠蓋媚春暉 성 안에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을 떠네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서는 태평하고 즐겁다고 서로들 치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 그 누가 위험한 말이 선비에게서 나오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여기서 ‘궁류(宮柳)’, 즉 ‘궁궐의 버들’은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항간에서는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즉, 성씨가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간신’으로 지목된, 당대의 권세가 유희분이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 없다. 유희분은 ‘궁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인 왕비를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해가 노여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광해는 이 시를 지은 사람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특명을 내렸고, 이 시를 지은 권필은 마침내 광해 4년 의금부에 붙잡혀 들어갔다. 권필은 의외로 ‘변명’하였다. 자신의 시는 임숙영이 포의(벼슬 없는 사람)로서 위험한 말을 한 것을 읊은 것이라고. 권필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여러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치 역적 대하듯 궁궐에서 형(刑)을 가했다. 그리고는 권필을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 보냈다. 원래 몸이 약했던 권필은 들것에 실려 도성(都城) 문을 나왔다. 사람들은 이 사연을 알고 슬퍼하며 한잔 술로 그를 위로하였다. 그 술잔을 받아 마시고 취해 누운 그는 장독(杖毒) 때문에 그 길로 죽고 말았다. 권필의 나이 44세였다.

윤광계(尹光啓)는 자가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인데,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으며 명예나 이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봉(仁王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으며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내는데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일찍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온 지 3년 동안에, 친척집 조상(弔喪)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간 적이 겨우 두 번이었다.”

하였다.

●옛 친구 정봉(鄭韸)은 자(字)가 상고(尙古)로 사람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사귈 만하였다. 귤옥(橘屋) 윤광계와 외사촌 형제간이며 일생을 서로 추종하며, 세상을 등진 생활에 날마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윤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고도 더욱 살 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나이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에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술을 가져오니 멀건히 보다가 술잔이 작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을 마시겠느냐.”

하며, 다시 명하여 큰 술잔을 가져다 둘을 마시고 쓰러져 베개에 누워 가고 말았다.

양응락(梁應洛 1572-1620)은 자는 심원(深源)인데,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장원 급제(1606)에 뽑혔지만 벼슬은 낭관에 그치고 세상을 떠났다. 젊었을 때 조인보(趙仁甫)와 서로 친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도 서로 떠나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말이 더듬거리는 듯하였지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스스로 꿋꿋하여 흔들리지 않고 섞여도 물들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계곡(谿谷) 장지국(張持國 장유)이 그 묘도문(墓道文)을 지을 적에 그의 평생을 자세히 서술하였다고 한다.

이경탁(李慶倬 이산보(1539-1594)의 아들로 보임)은 자는 덕여(德餘)인데, 나보다 열 살이 위이다. 일찍이 집안 대대로 교분이 있는 관계로 아우처럼 나를 보아 정리가 친형제나 같았다. 풍도가 넓으며 재주가 뛰어나 한때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지위를 기대하였다. 광해군 때에 관서 감사 막하에 좌관(佐官)으로 나가 있으면서 몸을 많이 축내었는데, 하루아침에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40 남짓 되었다. 나는 외로운 신세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이 친구만이 기개가 서로 통하여 종시 막역한 심정이었는데, 존망을 달리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프게 가슴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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