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록 속(己丑錄續)
작자 미상
-정개청에 대한 논란-
1. 정유년(1657) 9월 27일 일기
...임금이 이르기를, “정개청ㆍ곽시ㆍ전팽령 등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하니,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정개청은 본래 무안의 관속으로, 고(故) 정승 박순(朴淳)의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박순이 파직되어 물러간 후에는 도리어 박순을 공격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붙었습니다. 박순을 공격하고 배척한 사람들이란 곧 정여립(鄭汝立)의 무리입니다. 작고한 신의 스승 김장생이 마음속으로 항상 이를 통탄하였는데, 하루는 공회(公會)에 갔다가, 마침 정개청과 장막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는데, 김장생이 장막을 들고 정개청에게 묻기를, ‘그대는 박정승을 아는가.’ 하니, 답하기를, ‘그 집에 책을 많이 쌓아 두었다는 말을 듣고 문장을 상고하기 위하여 왕래하였다.’ 하였으니, 그의 마음씨가 이와 같았습니다.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도 정개청은 역적의 초사에 보이며 정개청이 언젠가 절의를 배척하는 논문을 쓴 일이 있었는데, 문서를 수색할 때에 발각되었습니다.
※정개청(1523-159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년시에 보성군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 년간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의 잡학을 강구하였다. 그 뒤 산에서 나와, 서울에서 박순(朴淳) 등과 종유하며 학문을 강구한 뒤, 만년에 전라도 무안의 엄담(淹潭)에 이주해 윤암(輪巖)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예학(禮學)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74년(선조 7)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지만, 수차의 관직 제수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그의 관직생활은 46세에 북부참봉을 지낸 이후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쳤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 때 이의 처리과정상 연루자의 색출이 지방 사류에게까지 확대되는 와중에서, 1590년 5월정여립과 동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7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가문이나 관직생활은 평범해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사상(史上)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피화된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 그를 봉사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엄담에 건립된 뒤 1694년(숙종 20)까지 집권세력의 당색에 따라 몇 차례 치폐(置廢)를 반복,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산서원의 치폐는 남인의 집권시에 건립, 복설되고, 서인의 집권시에는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도 기복을 겪는다. 또한,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되어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2. 무술년(1659) 정국헌ㆍ경헌 등의 소
●...삼가 생각하건대, 신의 증조부 곡성 현감(谷城縣監) 정개청은 선조 대왕께서 배양(培養)하여 주시는 덕화(德化)에 힘입어 뜻을 가다듬어 글을 읽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道)를 강론하여 이름이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 불행히 기축년에 역적의 옥사가 도내(道內)에서 일어나자, 이로써 무함하여 죽일 계획으로 삼으려 했으나 트집 잡을 것이 없으므로 이 글이 절의를 배척하였다 하여 마침내 원통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원통함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3. 이해 4월 6일 전 참의 윤선도의 소(1659)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들으니 수일 전에 정개청의 손(孫) 두 사람이 그 선조의 원통함을 씻기 위하여 천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소를 품에 지니고 우러러 호소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퇴각을 당하여 상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신이 마침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그 소의 초고를 얻어 보니 그 말이 차서가 있고 조리가 있으니, 이른바 천지에 지극한 원통함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 말에, “고 상신 유성룡이 기축년 옥사의 설원을 청하는 계사에 이르기를, ‘정개청은 호남 사람 중에서 더욱 명성이 있고, 평소에 학술과 품행으로 자임(自任)하였다.’ 하였는데, 신은 아직 유성룡의 문집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타인에게서 들으니 유성룡 문집에 이 말이 실려 있는데 이 소와 같다.” 하였으니,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유성룡은 선조 때의 어진 재상이었습니다. 그 학문과 사업이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니, 어찌 반드시 지난날의 김장생이나 지금의 송준길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유성룡은 정개청과 동시대의 사람이요, 김장생은 그때보다 조금 뒤졌으니, 정개청의 일에 대하여 듣고 아는 바가 자세하고 간략함이 반드시 같지 않을 것입니다. 또 김장생이 들은 말이 실로 지극히 공정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동색(同色)에 편들고 이색(異色)을 공격하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이도 또한 알지 못할 일입니다. 정개청은 성조(聖祖)의 시대에 있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명재상으로 포장(褒獎)되었으며, 성조의 예우(禮遇)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불행히 누명을 입었으나 다시 원통함을 풀 수 있게 되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무함 받은 것이 기축년보다도 배나 더하니 그 자손이 칭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아마도 사림의 공론이 당시에 공평하지 못함이 있은 듯하니, 청사(靑史)의 기롱하는 평론이 천추에까지 애석해 함이 있을 듯합니다. 이는 곧 조정에서 명백히 조사하고 신중히 분변하여 유가의 행실을 권장하고 풍교(風敎)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니 실로 조정에 관련된 일이요, 그 자손에만 관계될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자손이 선조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은 예전부터 이러한 규례가 있고, 근자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으니, 정원에서는 마땅히 받아들여 성상의 재결에 맡기고, 조정의 처치에 맡길 따름인데 그것을 퇴각한 것은 무슨 일입니까. 이러고서야 당시의 공의에 따라 좌우하였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
4. 이해 6월 모일 전 참의 윤선도가 국시를 논한 소(1659)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절후는 찌는 듯한 더위를 당하였으나 찬 바람이 여러 달 동안 불고, 시절은 장마철이 되었으나 가뭄이 날로 심하여 가니 이 무슨 징조입니까. 시절과 기후가 순서를 잃은 것이 어찌하여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제 비록 비가 오더라도 가을이 임박하여 아직 옮기지 못한 모와 이미 병든 벼는 다시 바랄 것도 없으니, 죽음이 가까이 다가와 살 길이 없는 농촌 백성들의 불안한 정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깊이 근심하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살펴 보건대, 전하께서는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마음은 날로 간절하나 요령을 얻지 못하셨고, 예지는 하늘에서 나왔으나 강건함이 부족하여 위복(威福)이 위에서 일어나지 않고 정권이 모두 아래에 있으니, 예전 《사기(史記)》에 이른바, “태아검(太阿劍)을 거꾸로 잡고 한갓 헛 지위만 가지고 있다.”는 말에 불행히도 가까우니, 신은 가만히 뼈가 떨리고 마음속으로 놀라워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둔하고 염치가 없이 이해(利害)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성인이 이른바 비부(鄙夫)요, 겉으로는 온갖 착한 일을 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자기 일신의 이익만 도모하는 사람은 성인이 이른바 정도를 흐리게 하는 무리와 간사한 사람들인데, 지금 세상에 쓰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부류들입니다. 전하께서 위에 외로이 서 계시면서 몽매하게 바깥 일을 보지 못하시어 나랏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그러한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니, 신은 진실로 전하를 위하여 한숨을 쉬어도 부족하여 통곡을 하고 싶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정직한 사람을 들어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다.” 하였고 ...
지난날의 옳고 그른 것은 알기 쉬우나 눈앞의 옳고 그른 것은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난날의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한다면 눈앞의 옳고 그른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째서 그런가 하면 지난날의 일은 내 몸에 진실로 거기에 관련되지 않았고, 또 그 일들이 이미 모두 드러난 것이며, 눈앞의 일은 내 몸이 거기에 관련되어 있고, 그 일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러므로 옛사람이 지난날의 어질고 간사함과 옳고 그른 것을 반드시 분별하고자 했던 것은 눈앞의 어질고 간사함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려는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어질고 간사함을 분별하지 못하고, 옳고 그른 것이 전도되면 어찌 나라가 되겠습니까. ....정개청의 본관은 영남 철성(鐵城)이며, 정개청의 7대조 몽송(夢松)은 고려 말엽에 영동정(令同正)의 벼슬로 있다가 나주로 귀양갔는데, 당시에 귀양가는 사람은 반드시 관아(官衙)에서 부리게 되었으니, 지금 이른바 향리가 이것입니다. ...
※서론은 거창한데 결론은 역시 정개청에 대한 자신의 변론이자 주장이다. 두산백과사전에 윤선도(1587-1671)는 이렇게 실려 있다. 뛰어나지만 존경하기는 힘든 인물이다. 정철도 그렇고 송준길도 그렇다. 국가발전이나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방안이 아니라 오직 형이상학적 논쟁이나 집권과 권력을 위한 당파싸움에 매몰되어 있던 인물들이다. 2016년 1월 29일 현재 느끼는 오늘날의 야당 정치인들이라는 사람들 대개가 모두 그렇지만 말이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5. 유학 나적 등의 소(1675)
... 삼가 바라건대, 먼저 신들의 말을 윤허해 주시고, 다음에 신들의 죄를 다스려 주십시오. 예전 선조 때에 호남에 정개청(鄭介淸)이란 유자(儒者)가 있어 힘써 배우고 옛것을 좋아하며 실천하는 것이 진실하여 명성이 퍼지고 높아져서 경(卿)ㆍ재상(宰相) 들이 서로 추천하여 여러 번 참하직(參下職)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더니, 병술년에 선조께서 전생 주부(典牲主簿)로 승진 임명하시고는, “일찍이 들으니 정개청에게 늙은 어버이가 있어 멀리 떠나서 격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하니, 인근 고을의 수령을 제수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하교하셨습니다. 정개청이 이로 인해서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제수받아 관직에 있은 지 8개월 만에 사면하고 돌아오니,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를 쉬이하는 풍도는 역시 옛사람들에게 뒤지지를 않았습니다. 기축년 역옥(逆獄) 때에 위관 정철(鄭澈)이 그 기회를 타서 앙심을 풀려고 제 맘대로 죄를 얽어 만들어 무고한 이들이 법에 걸려들었으니, 한(漢) 나라 명제(明帝) 때에 있었던 초옥(楚獄 한(漢) 나라 명제(明帝) 때 있었던 초왕(楚王)의 역옥(逆獄)) 때에 허다히 죄를 마구 만들어 내었던 정도뿐이 아니었습니다만, 정개청은 원래 털끝만큼도 간여한 일이 없었습니다. 흉인(兇人) 정암수(丁岩壽)가 정철(鄭澈)의 비위에 영합하여, “정개청이 일찍이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었다.”는 설(說)을 주창하여 정철의 뜻을 맞추어, 이것저것 갖가지로 얽어 죄안(罪案)을 성립시켜 마침내 한 차례 형문(刑問)을 받고 북변(北邊)에 귀양가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계해년 반정(反正) 뒤에 통쾌히 신설되어 관작이 회복되자 많은 선비들이 용동(聳動)하여 정개청이 살던 무안현(務安縣)에다 사우(祠宇)를 지어, 이로써 인조(仁祖)의 성덕을 빛내고, 이로써 많은 선비들의 경앙(景仰)하는 마음을 부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유년에 고 판서 신(臣) 송준길(宋浚吉)이 정개청이 고 상신 박순(朴淳)에게서 교육을 받고 나중에 도리어 박순을 공격 배척하는 자들에게 붙었다는 등, 그의 이름이 기축년 역옥의 공초(供招)에 나온다는 등, 그가 일찍이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었다는 등의 말을 어전에서 계달하고 그 사우(祠宇)를 훼철(毁撤)하기를 청하여 본읍(本邑)이 그 위판(位板)을 불사르고, 그 제기(祭器)를 부셔버리고는 그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마굿간을 만드니, 마치 역적의 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아! 역시 너무 심합니다. ...
6. 이해 4월 10일 유학 안민유ㆍ한유ㆍ경증ㆍ선유 등의 소(1675)
...신 등이 삼가 살펴보니, 근일 전라도 유생 나적(羅襀) 등이 유신(儒臣) 현감 정개청의 지극히 억울하고 원통한 일 때문에 천리 길을 싸매고 와서 대궐 문을 두드린 것은 다만 선비들 의견의 공통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성대(聖代)의 일대 성사(盛事)일 것입니다.
7. 병진 4월 생원 오상옥 등의 소(1676)
...아! 정개청은 학식과 덕망이 있는 선비입니다.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닦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행실이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 공부가 앞날 어진 이에게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상들에 의해 번갈아 여러 번 추천되었으니 인정받고 추천되는 비중을 알 만하옵고, 여러 번 선조(宣祖)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지우(知遇)의 융성함을 볼 수 있으며, 당시 그의 가르침으로 찬란하게 학문을 성취한 이들이 많으니 교육의 감화(感化)를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 시골에서 효도하며 우애하고 돈독히 공경함이 전파되고 있으니 그가 끼친 은택이 원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윤선도의 이른바, “이황(李滉)의 다음이다.”라고 한 말이 할 말을 다한 것이므로 신들이 반드시 여러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철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변방에 귀양가 죽었으니, 그 죄명의 허실(虛實)은 앞서 상소에도 다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그들 귀신과 물여우들의 음흉하고 간사함은 말하자니 끔찍하고 참혹합니다. ...
8. 정사년 5월 22일 일기(1677)
...정개청이 일찍이 정철의 소인된 정태(情態)에 대하여 말했는데, 정철은 정개청이 명망(名望)이 높은 사람으로서 말하는 바가 이와 같으므로 매우 노하였습니다. 기축년 옥사가 일어난 뒤 은밀히 친한 무리 몇을 꾀어 정개청이 역적들과 내왕이 밀접했는데 국청(鞫廳)에 빠졌다고 무고하고는 잡아서 문초하기를 청하여 형벌을 받아 멀리 귀양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
9. 정사년 봄 생원 양몽거 등의 소(1677)
...신들이 들으니 고 상신(故相臣) 정철은 바탕이 단정하고 어질지 못하며, 성격이 본시 음침하고 가벼워서 거짓을 꾸미고 없는 일을 지어 내었는데도 선조의 은혜와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입었으며,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성품을 억누르지 못하여 그 질투의 해독이 이에 번졌는데, 마침 기축년의 적신(賊臣) 정여립(鄭汝立)의 변란을 만나 그것을 기화로 삼아 드디어 어진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는 참극을 일으켰습니다. ... 저 정개청과 같은 이는 학문이 있고 몸을 공경하여 당시 추중을 받았는데, 일찍이 정철을 실상을 꾸미고 행동을 속이는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 여겼고, 또 당시 사람들이 정철의 방탕함을 다투어 본받을까 근심하여 절의(節義)와 청담(淸談)에 관한 설을 지어 주자(朱子)의 유지(遺志)를 추술(追述)하여 경계시키니, 정철이 그것에 원한을 품고 함정에 빠뜨릴 바를 생각하였으나, 그 구실을 얻지 못하다가 이에 정개청이 지은 〈절의론〉 위에 억지로 배(排) 자를 더해 죄목을 만들어 드디어 먼 변방으로 쫓아 죽게 하였습니다. ...
10. 무오년 겨울 유학 서국빈 등이 사액을 청한 소(1678)
...고 유신 정개청은 우리 선조대왕께서 학문을 숭상하실 때 인재를 즐겨 교육시키는 덕화를 입어 민간에서 일어나 학문을 다스리고 도를 닦아 식견이 높이 빼어나고 행실이 돈독했습니다. 선조께서 그 이름을 아시고 또 당시 재상이 그 어짐을 천거하였으며, 백성들이 그 빛나는 덕에 화하고 사림들이 즐거이 의지하였으니, 이는 당대의 호걸스러운 선비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백세(百世)의 표준이 될 만한 스승이라고 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진위(眞僞)와 사정(邪正)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 처음에는 정철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헐뜯고 마침내는 송준길이 이미 신설(伸雪)된 뒤에 또 크게 무고하니, 한 번 펴고 한 번 굴함에 군자 소인의 행 불행이 그에 달렸습니다. ...
11. 그해 11월 5일 회계(1678)
...전라도 유학 서국빈(徐國賓) 등의 상소문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상소문을 살펴보니 정개청의 학술과 품행은 세상에서 추앙을 받았는데, 두 번이나 날조된 무고로 참화를 입었다가 다행히 원통함을 푼 뒤에 이미 은명(恩命)을 받아 사당을 다시 짓고 유생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곳으로 삼았다면, 마땅히 편액을 내려주시는 은전을 특별히 내려주시어 여러 선비들 기대에 부응(副應)해야 할 것이나,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상(上)의 재가(裁可)는 어떠합니까.” 하니, 특별히 사액한다고 하였다. ...
※효종 때 시작한 논쟁이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일단 끝이 난 듯 하나 다시 시작된다.
12. 경신년 모월 모일 전라도 관찰사 임규의 장계 대략(1680)
...도내의 풍속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게 된 것은 정개청의 서원을 창설하여 윤휴(尹鐫)를 원장으로 삼아 원장이 실은 정승 민국희(閔國熙) , 호남 여러 선비들을 위협하고 제어하자는 계책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선비로써 이름한 자는 개청의 마음과 행동을 익숙히 듣지 않은 자 없건마는, 윤휴의 흉악하고 패덕함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서원을 보면 요망스러운 사당과 같아서 문을 바라보고 피하여 하나도 받드는 자가 없자 이로 말미암아 윤휴는 도내 몇몇 아부하는 무리들을 끌어 당겨 그 기세를 빌려, 이(利)로써 꾀어 불러 모았는데, 거기서 키운 것은 모두가 대북(大北)의 남은 무리 및 곁가지들이라, 개청의 서원이 도리어 도망친 무리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13. 이해 가을 진사 유경서 등의 소(1680)
...이제 역적 윤휴(남인)가 이미 패하고, 준길(서인)이 복관되었으며, 선도(남인)에게 내려주었던 벼슬과 시호를 아울러 거두어 들였으니, 선악과 맑고 더러움의 구별이 여기서 크게 밝혀졌는데, 개청의 참월한 사당을 어찌 홀로 둘 수 있겠습니까. 아! 군자와 군자는 비록 세상은 다르나 길은 같고, 소인과 소인 또한 세상은 다르나 한 무리이니, 준길과 정철은 같은 길이요, 윤휴와 개청은 한 무리입니다. 자연히 영향이 서로 다른 까닭은 선악을 타고난 성품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
14. 그해 예조의 회계(1680)
...이것으로 보면 조종 양성(선조와 효종)의 처분이 전후 같은 것이니, 간곡하신 임금의 말씀은 마치 금석과 같은 법전일 뿐만 아니거늘, 나적의 무리가 윤휴의 뜻을 이어 개청의 서원을 세울 것을 청하므로 당시 대신들이 윤휴와 나적 등의 거짓말을 왜곡되이 따라 경연 가운데에서 여쭈어서 드디어 다시 세우고 말았습니다. 이미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은 여러 선비들의 공변된 의견이 아니며, 울분은 오래될수록 더욱 격렬해지니 결코 그대로 조두를 벌려 놓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안현 정개청의 서원을 즉시 철거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할 것이나 사액하신 서원이므로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셔서 재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15. 기사년 4월 11일 유학 나두하 등의 소(1689)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각별히 밝은 빛을 드리우시고, 전말을 살피시어 다시 개청의 사당을 세우고 전과 같이 편액을 내리셔서 선비들의 소망을 위로해 주시고, 간교한 무리로 하여금 다시 그 계책을 행하지 못하게 하소서. 만약 불가하다고 하신다면 이것은 신 등이 또한 임금님의 총명을 속였다는 허물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 죄는 정말 만 번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에 궁궐 문 밖에서 청하는 것이니, 급히 부월의 죽음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은 매우 황공하고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시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상소한 내용은 해조에 내려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6. 기사년 4월 11일 유학 나두하 등의 소(1689)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건의가 이러하니, 그 서원을 다시 짓도록 하라.” 하셨다. 예조에서는 아뢰기를, “대신과 경연신(經筵臣)들이 아뢴 말에 따라서 고 유신 정개청의 서원을 다시 짓도록 허락하여 명령을 내리셨으니, 액호(額號)는 이전에 내리신 바와 같이 자산서원(紫山書院)으로 하고 교서(敎書)는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짓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7. 신미년 11월 22일 유학 정무서 등의 소(1691)
... 아! 우리 국가에서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운 지 수백 년 이래에 일찍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일이 없는데, 정철은 조그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선비들의 변고(變故)를 다행하게 여기고 임금의 총명을 속여 숨김으로써 터무니없는 옥사를 만들어 베어 없애고 무찔러 죽여 버리기를 방자하게 제 마음대로 하여, 끼친 해독과 남은 불꽃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으니, 비록 정철의 머리털을 다 뽑더라도 정철의 죄를 다 속죄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또한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급히 본도(本道)에 명령하여 방준의 사당을 다 철거케 해서 일도(一道)의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17. 신미년 11월 26일 일기(1691)
...이조 참판 이현일(李玄逸)이 아뢰기를, “고 정승 정철은 사람됨이 간독(奸毒)하여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무고하여 죽인 죄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요, 모두가 마음속으로 다 분개하는 바인데, 지금 호남 유생들이 천리 길을 와서 대궐에 호소하며 그 관직을 삭탈할 것을 청하자, 성상께서, ‘세월이 오래되어 뼈가 썩은 뒤에 추삭한다면 너무 심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비록 지극히 관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정철의 간사한 모습을 선조께서도 통렬히 지적하신 바요, 성상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니, 그의 벼슬을 추탈함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
※기축옥사가 있은 지 100년이 넘었다.
18. 남평 생원 홍최일 등의 소(1694)
...전하께서는 두 신하가 전후에 무고를 당한 원한을 굽어 살피시어 고 증참판(故贈參判) 안방준에게도 고 상신(故相臣) 정철에게 관작을 추복하신 은례(恩例)대로 헐어버린 사당을 다시 세우도록 명하시어 한편으로는 시비를 정하시고, 한편으로는 사(邪)와 정(正)을 가리신다면 사문(斯文)에도 매우 다행일 것이고, 국가에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 보고 잘 알았다. 여러 선비들의 한결같은 호소가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왔으니, 감히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숙종 때 당파싸움(붕당정치라고 미화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의 분규사태와 상호 공방, 뒷전인 민생법안 처리의 지연, 대통령의 비 민주적 작태 등을 통해 정치와 정치인들을 가장 혐오하는데 그런 모습들을 정당정치에서 비롯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미화시킬 수 없듯이 말이다.)은 가장 치열하였다. 앞의 글들을 통하여보면 숙종의 무능이 불러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다시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1689), 서인중 소론이 집권한 갑술환국(1694)등을 통해 당시의 당쟁의 치열함을 알 수 있다.
19. 갑술년 10월 광주 진사 박논 등의 상소(1694)
...가만히 삼가 생각하니, 정철은 천성이 충성스러우며 맑고 정직하여, 스승과 벗의 좋은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젊어서 학문을 받은 자로는 고 학사 김인후(金麟厚)ㆍ기대승(奇大升)과 같은 훌륭하고 큰 학자들이요, 커서 사귄 자로는 선정신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박순(朴淳)과 같은 절개가 곧은 바른 학자들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늙을 때까지 중단함이 없었으며,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등 여러 서적에 가장 많은 힘을 썼고, 비록 경황이 없고 뿔뿔이 흩어지는 사이에도 손으로 《대학(大學)》 한 권을 쓰고 아울러 주해(注解)해서 아침저녁으로 외우니, 여기에서 그의 평소의 실지(實地)를 볼 수 있어서 청송(靑松)의 비유와 큰 절개의 포상으로 성조께서 칭찬하셨던 것이며, 효유(孝友)로운 행실과 청백한 지조는 여러 선비들이 추앙하고 인정하던 바입니다. 그 정책을 의논하고 생각하는 소임에 있어서는 성의껏 임금을 교도함이 많았고, 지방을 다스리는 소임에 있어서는 혜택이 백성들에게 흡족하였으며, 재상으로 발탁되어서는 정성을 다해 몸을 바쳤습니다.
20. 임오년 5월 26일 일기(1702)
...무안현(務安縣)에 정개청의 서원(자산서원)이 있는데, 헐었다 다시 지었다 함을 두세 차례나 하였으매, 당시의 곡절은 다 문서에 실려 있으니 성상께서도 더러 알고 계시겠지만, 오래된 일이라 이에 다시 갖추어 아뢰려 합니다. 옛날 인조 때 선정신 김장생이 개청을 향사(享祀)함이 부당하다는 장계를 올리니, 인조께서 급히 그 사당을 철거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중간에 그대로 두고서 즉시 거행하지 않다가 효종조 정묘 연간에 이르러 고 상신 민정중이 시강관으로 입대해서 개청의 서원을 빨리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효종께서 개청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시자, 찬선 송준길(宋俊吉)이 대답하기를, “개청은 무안 관속으로서 고 명상(名相) 박순(朴淳)에게 교육을 받아 그 문하에서 의탁하고 있었으나, 박순이 물러난 뒤에는 다시 정여립에게 붙었으므로, 신의 죽은 스승 김장생이 마음속으로 늘 애통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날 공회(公會)에서 만나 그에게 묻기를, ‘그대는 박정승을 아는가.’ 하니, 개청이 대답하기를, ‘그 집에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므로 문자(文字)를 상고하러 다녔다.’ 하였으니, 그 마음의 자취가 이와 같았고, 그 후 여립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개청은 역적의 공초에서 나오고, 그 저서인 배절의론이 역적 문서를 찾아 모으는 가운데 나오니, 선조께서 보시고 크게 놀라시며 문신들에게 명령해서 반배절의론(反排節義論)을 지어 중외(中外)에 반포케 하시고, 여립에게 준 글도 발각되었는데, 글 가운데 이르기를, ‘당대에 도를 높고 밝게 본 이는 오직 존형 한 분뿐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선조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른바 도(道)라는 것은 무슨 도인가.’라고 묻고, 한 차례 형신(刑訊)을 하여, 곧 바로 북변에 귀양보냈으나, 그 뒤에 다시 역적의 문초에 나와 압송해 오기 전에 이미 죽어버렸으니 이러한 사람이 어찌 예를 갖춘 제사에 합당하겠습니까. 선사(先師) 김장생도 일찍이 상소를 올려 통렬히 배척하였고, 선조(先朝) 때 이미 헐어버리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 서원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정말 통한할 노릇입니다.” 하므로, 효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찬선(賛善)이 이와 같이 상세히 말하고, 찬선의 스승 또한 일찍이 상소를 올려 윤허를 얻었으니,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거듭 선조의 명을 밝혀서 즉시 거행한 뒤에 장계를 올리도록 관찰사에게 분부하라.’ 하셨습니다. 그 뒤에 무오년에 윤휴(尹鐫)와 허적(許積) 등이 거짓 속여서 상달하여 또다시 그 서원을 세웠고, 경신년에 시세가 바뀐 뒤에 감사 임규(任奎)의 장계 보고로 인해서 대신과 의논하니, 성상께서 양조(兩朝)의 하교대로 철회하라던 명령이 있었으나, 얼마 후 기사 연간에 김덕원(金德遠)이 호남 유생들의 상소를 일컬어 다시 중건할 것을 청했으나, 개청을 위해서 변명한 말은 별로 없고, 다만 일찍이 정철이 꾸민 화망(禍網)에 잘못 걸렸다는 등등의 말을 방자하게 덮어씌우고, 이기만(李耆晩)에 이르러 개청이 지은 배절의론에 배(排) 자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조께서 어찌 명령을 내리셔서 배절의에 대한 반대되는 논문을 지을 것을 말씀하셨겠습니까. 기만의 이 말은 더욱 지극히 근거가 없습니다. 예를 차려 조두의 향사(享祀)를 지내는 것은 극히 중대하니, 진실로 개청을 함부로 올릴 것이 아니며, 더구나 양조(兩朝)의 성명이 이미 저와 같으니, 전하께서도 진작 처분하여야 할 일이니, 어찌 여러 번 세우고 여러 번 철폐한 것으로써 혐의를 삼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호중(湖中) 인사들 다수가 이 때문에 울분하니, 사림의 공의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도신(道臣)들로 하여금 이전의 명령대로 속히 철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성상께서 이르시기를, “유신이 상달한 것이 진실로 그러하니,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6월에 사당이 헐렸다.
21. 임오년 9월 17일 무장 유학 오정훈 등의 상소(1702)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급히 아울러 살피시는 밝음을 회복하시어 도로 사당을 헐라는 명령을 정지시키고, 이미 뼈가 된 원한을 다소 펴게 하시어 여러 선비들의 소망을 위로하신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또 개청의 학문의 고하(高下)와 도덕의 정도는 그가 지은 《우득록(愚得錄)》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정무를 보는 여가에 혹시 보아 주신다면, 그 조예의 깊음과 행실의 돈독함이 반드시 성상의 안목 아래에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
22. 동일 정원 계사(同日政院啓辭)(1702)
...도승지 조태채(趙泰采) 등이 아뢰기를, “방금 전라도 유생 오정훈(吳鼎勳) 등이 와서 한 통의 상소를 제출했는데, 말한 내용을 살펴보니, 곧 정개청 서원의 철훼를 정지시켜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개청을 향사(享祀)함이 부당함은 비단 선배들의 정론(定論)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당을 철거함은 또한 양조(兩朝)의 명이었는데, 지난 번 아첨하는 무리들이 거짓을 상달(上達)하여 다시 세우기를 청함에 이르러서는 사림의 분함이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유신들의 건의한 청으로 도로 철훼할 것을 명한 것은 실로 중외(中外)의 공공된 의론에 의한 것인데, 지금 여기 오정훈 등이 방자하게 상소를 올려, 개청을 변명하여 구원하려 하여 간사한 이론을 본뜨고, 선현들을 속이고 훼손하며, 말뜻이 극히 도리에 어긋나니 만약 조정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이러한 물귀신 같은 무리들이 어찌 감히 제멋대로 하고 무엄하기를 이처럼 하겠습니까. 신 등이 보고 통탄함을 금치 못하여, 물리칠 것을 서로 상의하였으나, 여러 선비들의 상소라 하면서 자꾸 들여 밀고 물러나려 하지 않으니, 이러한 상소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