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사초(寄齋史草)
작자 박동량(1569-1635)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 해(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서 시중해 대중 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했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 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 이르렀다.
28세인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 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해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渻)·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 7신의 한 사람으로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추관(推官)으로 있을 때, 김직재 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 뒤 자주 탄핵을 당해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 해 계축옥사 때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해 극형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반역 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 : 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릉 저주 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 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 4년 뒤 다시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 기재사초 상(寄齋史草上)
1591년 신묘년(선조 24년, 만력 19년)
●2월 3일
○《통감강목(通監綱目)》을 강하게 되어서진(西晉) 회제기(懷帝記) 및 순희(荀晞) 등의 대목이다. 글을 보며 상이 묻기를,
“실 사(糸) 변에 새 을(乙) 한 자가 무슨 자며 풀이하면 무슨 뜻인가?”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이 글자는 규(糾) 자와 같고 뜻도 같습니다.”
하고, 황혁도 아뢰기를,
“두보(杜甫)의 시에 ‘만사가 얽히고 뒤섞여 절식하였노라’(萬事糾紛惟絶粒)이란 것도 역시 이 글자입니다.”
하였다. 이어 진언하기를,
“제왕의 학문이란 마땅히 대의를 주장하여 옛날의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보면 귀감으로 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을 보면 경계로 삼을 것이요, 구구하게 자의(字義)나 음석(音釋)과 같은 지엽만을 토론함은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였다.
○신입(申砬)이 나아가 아뢰기를,
“군기시(軍器寺)의 전투 기구를 거의 사슴 가죽으로 장식하는데 군기시에 현재 남아 있는 양이 바닥이 났습니다. 삼가 듣건대, 전라도 해변 관원들이 한번만 사냥해도 그 소득이 많은데 마침내는 사용(私用)에 돌아간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본시(本寺)에서 어피(魚皮)ㆍ치우(雉羽) 같은 등속의 전라도에 책임지웠던 그리 필요하지 않는 공물 일체를 녹비(鹿皮)로 바꾸어 바치게 하면, 본시의 사용에 반드시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4월 29일
진시(辰時) 초에 상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인정전(仁政殿)에 납시니, 문무관 2품 이상이 각각 차례대로 입시하였다. 예조 판서 정탁(鄭琢)이 일본 사신 현소ㆍ평조신을 인도하여 들어오자, 현소와 평조신이 함께 종이품(從二品)의 끝에 엎드렸다. 현소 등의 일진(一進) 일지(一止)를 정탁이 반드시 선도하였다. 재신(宰臣)이 잔을 드린 다음에 현소도 차례대로 잔을 드렸다.
상이 도승지 한응인(韓應寅)을 시켜 현소에게 이르기를,
“옛날 이웃나라끼리 서로 내왕함에 있어서 예 아닌 것이 없었다. 이제 일본과 다시 옛 우호를 닦으니, 한 집안과 같구나. 그러므로 특별히 너희들에게 친사(親賜)의 술을 주는 것이니, 너희들도 이 뜻을 알아야 한다.”
하니, 현소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정탁이 또 평조신을 인도하여, 잔을 드는 자리에 나오자, 상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평조신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승지가 명을 전달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승지는 전달하지 않고 예조 판서는 전교도 기다리지 않고, 미리 인도하여 나온 것은 어쩐 일인고”
(주상의 뜻은 진작(進爵)하는 날에 석차를 무시하고 올라오게 하여 그들을 감동시키고자 한 것임)하였다.
●5월 4일
미시(未時) 정각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납시니 부제학 김수(金睟)가 《강목》〈동진원제기(東晉元帝記)〉를 진강하였다. 지경연 병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선비 가운데 명색이 문장을 한다는 사람들이 다만 대문이나 찾고 구절이나 따는 것만을 일삼고,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보기를 힘쓰지 않으며 노장(老莊) 등의 서(書)에 있어서는 보는 사람이 더욱 적습니다. 다만 그 말이 여러 책 가운데에 많이 나오는 까닭으로 선비들은 노장의 말인지도 모르고 쓰게 되니, 그것을 일일이 금하는 것이 안 될 듯 싶습니다. 선유(先儒)들도 많이 썼으니, 금하여야 할 것은 그 도를 숭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때에 상이 예조로 하여금 선비들이 과장에서 노장의 말 쓰는 것을 금하였다. 정욱이 이때 문형을 맡았으므로 강목의 노장 있는 곳에서 아뢴 것.
하였다. 강이 끝나자, 부제학 김수가 나아가 아뢰기를,
“평수길은 미치고 패악한 필부에 불과합니다. 그가 한 말이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 나온 것 같은데 이런 실없는 말을 명 나라에 아뢰는 것은 진실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정사 황윤길 등이 돌아올 때 일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가정(嘉靖) 연간으로부터 명 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허락하지 않으니, 이것은 큰 수치이다. 다음 해 2월에 바로 명 나라로 향하겠으니, 조선도 우리를 도와 대명궁(大明宮)에 날아 들어가지 않으려는가?”
하였다. 말은 많지 않으나, 패악하고 거만함이 극심하였다. 황윤길이 부산에 돌아와 먼저 서계를 올렸는데, 서계가 도달하는 시각이 마침 석강(夕講)이었다. 그래서 상감께서 서계를 보시고 나서 바로 입시한 사람들에게 보게 하였다.
판서 윤두수(尹斗壽)도 그 자리에 있다가 다 보고나서 먼저 나아가 아뢰기를,
“이런 것은 곧 명 나라에 상세히 아뢰어야 하고, 우리 나라와 통신한 자초지종도 아뢰야 합니다.”
하니, 임금도 동의하였다.
그 뒤 정사 황윤길 등이 돌아와 보고하자 상감께서 자세히 물으니 윤길이 답주(答奏)하기를,
“그 사장(事狀)을 보면 침범하지 않을 리 만무합니다.”
하였다. 부사 김성일(金誠一)이 답주하기를,
“수길의 출입과 기거가 조금도 위용이 없고, 신들을 보는 날에도, 손에 어린애를 이끌고 동작이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보기엔 한 광포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한 말이 모두가 마음속에 있는 말은 아니며, 비록 마음속 말이라 할지라도 기백도 없고 지략도 없는 일개 어리석은 도적에 불과한데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서장관 허성(許筬)은, 그 중간을 잡아 말하였지만, 약간 윤길의 말을 두둔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사람의 소견이 이렇게 다른 것은 어떤 까닭인가?”
하자, 조정도 가려내지 못하였다.
김성일은 유성룡과 본래 서로 친하므로, 유성룡이 그의 말을 믿고서 말하기를,
“설령 수길이 침범해 온다 해도, 그 행동거지를 들어 보건대, 두려울것이 없을 것 같다. 하물며 그 서계의 언사도 겁주기 위한 것에 불과한데, 만일 그 실제를 탐지하지 않고 앞질러 명 나라에 보고하여 변방의 소요가 있게 하여도 온당하지 않음이 대단할 것이다. 복건(福建)과 일본이 그리 멀지 아니하니 만일 이 보고가 일본 사람의 귀에 들리게 되면, 의심의 틈이 생겨 벌의 독을 불러 들이는 일이 없을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피차 모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을 것이므로, 결단코 주문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상감의 의견은 윤두수와 합치되어 이르기를,
“피차의 이해는 논할 것 없고, 소(小)로서 대(大)를 섬김에 대의가 있는데, 어찌 보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정이 어쩔 수 없이 보고하기로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부제학 김수(金睟)가 유성룡의 이런 뜻을 알아 차리고, 이날 석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교리 심대(沈垈)를 대신하여 입시하였다가, 먼저 언급하였던 것이다. 상이 황정욱을 돌아보고 묻기를,
“병판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병조판서 황정욱이 아뢰기를,
“김수의 말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가 명 나라를 섬긴 지 2백년 동안 충성과 정성을 다하여 왔는데, 지금 이런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고, 어찌 버려 두고 보고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다. 부제학 김수가 아뢰기를,
“대의로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다만 서계의 말이 비록 그렇다지만 사신 세 사람의 의견이 각기 다르니, 이것이 실상이 없는 증거가 아닙니까?”
하였다. 상이 반문하기를,
“사신 세 사람이 모두 ‘침범해 올리 없다.’고 말하더라도, 서계의 말이 이러하면 마땅히 그대로 보고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어떤 이는 반드시 침범할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반드시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이것은 소견이 다름에 불과할 뿐이라.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범한다는 말을 듣고서 편안히 앉아 있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김수가 아뢰기를,
“일은 경(經)과 권(權)이 있습니다. 만일 만분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안다면 진실로 신하로서 급히 아뢰야 하겠지만 그 실제의 형편을 알지도 못하고 급히 보고하여 한갓 황상에게 근심만을 끼쳐드리고, 인하여 변방에 틈이 생기게 한다면 어찌 매우 후회할 일이 아닙니까?”
하였다. 병조판서 황정욱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국가가 복이 많아서 저 오랑캐가 큰 소리만 치고 말더라도 우리 나라와 명 나라는 이로 인하여 방비를 하게 되어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국가가 불행하여, 과연 서계의 말과 같이 된다면 신하된 자로서 알고도 말하지 않아 명 나라에서 막연히 알지 못하고 있다가 졸연히 본토를 침략당하는 욕을 보게 되면 이때에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제학 김수가 아뢰기를,
“이것은 모두 공연히 만드는 말입니다. 어찌 이렇게 되겠습니까? 복건 지방과 일본은 다만 바다 하나가 막혔을 뿐 장사꾼이 서로 통행하니, 만일 우리 나라에서 보고하게 되면, 저들이 알지 못할 리 없고, 만일 보고한 뒤에 과연 침범하는 소식이 없으면, 비단 명 나라에서 반드시 우리를 실없다 하여 웃을 뿐 아니라, 일본에게도 반드시 이 일로 원망을 사게 되어 훗날의 근심이 많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소견은 진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복건이 과연 일본과 가깝고 장사꾼도 통행한다면 일본이 우리에게 보낸 서계가 벌써 복건 사람들에게 건너가, 황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일본에게 원망을 받는 것보다는 명 나라에 일일이 주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니, 어찌 보고가 일본에 전해질 것만 염려하고 서계가 벌써 명 나라에 알려질 것은 우려하지 않는가? 설사 왜가 침범하는 일은 없을망정, 서계는 명 나라에 알려졌을 터인데 만일 명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묻기를, 일본이 너희 나라와 함께 중국을 침범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하는데 너희 나라에서 그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은 어쩐 까닭인가고 한다면, 왜적에게 길을 안내하여 상국을 침범하려 한다는 누명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일에 윤두수의 의견 또한 이와 같았고 오늘 병판의 말도 이러하니, 불가불 보고해야 한다.”
하였다. (황정욱의 의견이 윤두수와 같으므로 극력 논쟁하였음)
병조판서 김수가 아뢰기를,
“대의의 소재를 신이 모르는 바 아니라 나라의 이해도 염려되는 바가 있기에 마침 연석(筵席)을 대하였다가, 우연히 말하였습니다. 다만 반드시 보고는 하여야 하지만 일본의 출병 시기를 분명히 보고하는 것은 아주 사리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였다. 예부터 전해오는 일로 홍문관 입직 관원은 으레 2, 3일 전에 진강할 책자의 문의를 강정(講定)하여야 하고, 훈고, 음석(音釋)도 반드시 기일 전에 정정하는 까닭으로, 비록 같은 홍문관 관원일지라도 경연의 당번이 아닌 사람은 순차를 빼앗지 못하는 법이다. 김수가 주문이 출발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교리 심대(沈垈)에게 말하기를 ‘오늘에는 보고함이 옳지 않다는 뜻을 직접 아뢰겠다.’고 하고, 또 수찬 박동현(朴東賢)에게 말하기를, ‘이번 일은 국가의 중대한 의론이므로, 내가 역설하여 기어이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수찬도 내 말에 조력하여 달라.’ 하였다. 이에 박동현이 말하기를 ‘대의의 소재이므로 조력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자, 김수가 말하기를, ‘연중(筵中)에서 나의 아룀을 들어 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입대하여서, 병조판서 황정욱은 거듭 말하였고 상감께서 엄숙한 말로 도리에 의거하여 반드시 보고할 뜻을 보였다. 부제학 김수는 그제서야 자기 주장을 바꾸어서 우연히 언급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경연관으로서 순차에 따라 입시한 자 같이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왕 왜의 정세를 보고하기로 한다면 출병의 시기 역시 확실하지 않은데 어찌 그것을 뺄 것인가?”
하자, 부제학 김수가 아뢰기를,
“출병의 시기를 분명히 말함은 온당치 않을 것 같습니다. 보고하는 말에 있어서도 누구에게서 들었다고 할 것입니까? 만일 통신한 사실을 곧바로 드는 것도 난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들은 꼭 심사숙고하여 처결하소서.”
하였다. 상이 좌승지 유근(柳根)을 돌아보고 묻기를,
“승지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유근이 아뢰기를,
“신이 내의원에서 마침 좌상 유성룡과 더불어 이 일을 언급하였는데, 성룡은 말하기를, ‘대의에 관계된 바이므로 비록 어쩔 수 없이 아뢰어야 하겠지만 국가의 이해도 생각해야겠으니, 수길이 비록 미치고 패악하나 반드시 명 나라는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아주 가까운 데에 있으니 뜻밖에 그들의 화를 받을까 지극히 우려된다. 더구나 통신사의 말을 들어 보면, 반드시 출동할 형세도 아닌 것 같고, 비록 출동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 없다고 하니, 만일 이러한 부실한 말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명 나라를 놀라게 하고 한편으로는 이웃나라에 원망을 갖게 한다면, 수길의 노여움이 이 일로 말미암아 싹틀 것이다. 통신한 일만 하더라도 바로 보고한 다음에 만일 명 나라에서 그 곡절을 캐어 묻는다면 반드시 난처한 걱정이 있을 것이다. 만일 부득이하여 보고하기로 한다면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온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말해야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이르기를,
“내가 묻는 것은 승지의 의견을 듣자는 것이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으로서는 대의의 소재이므로 어쩔 수 없이 보고해야 하나 다만 일일이 사실대로 보고한다면 혹 난처한 걱정이 있을 것이므로 대충 보고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유근은 황정욱과는 사제(師弟)의 분의(分義)가 있고, 또 유성룡ㆍ김수와는 사이가 좋은데, 대개 권세 있음을 보고 따라 붙은 것이다. 이날 황정욱과 김수의 말이 각각 달랐었는데 상은 정욱의 의견을 옳다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유근이 그들 사이에서 시비를 밝히지 못했고, 마침 상감께서 그의 의견을 차례차례 물었으나 또한 감히 자기 의견을 대답하지 않고 적당히 유성룡의 말만 아뢰어 회호(回互)할 데만을 만들려 하였는데, 대개 두 사람에게 거슬리게 될까 두려워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상이 굳이 물은 다음에야 겨우 두 사람의 말을 절취하여 대답하였고, 상도 그의 말을 경하거나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유근은 성격이 경솔하고 얕아서 비록 심상한 의론이라도 자기 의견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와 같은 일이 많았다.
상감께서 수찬 박동현(朴東賢)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연관의 의견은 어떤가?” (임금이 신료에 대해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참하관(叅下官)에 이르러서는 이름도 부르고, 너라고도 부름)
하니, 수찬 박동현이 아뢰기를,
“신하로서 상을 범한다는 말을 듣고도, 어떻게 편안히 앉아 그대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보고함은 두말할 것 없사오며 다만 보고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곡절에 있어서는 경솔히 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대신에게 명하여 널리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심이 지극히 타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그 말이 옳다’고 하시고 유근에게 이르기를,
“승지는 연석(筵席)의 말을 일일이 기록하여 내일 이른 아침에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계가 끝나자 차례대로 물러나왔다. 이때는 날이 이미 어두웠음.
○5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이 아뢰기를,
“어제 연석(筵席)의 말을 보건대, 김수(金睟)가 우려한 것이 비록 깊이 일을 염려함에서 나왔을 것이나, 신하로서 임금을 범한다는 말을 듣고, 어찌 차마 묵묵히 황상에게 주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주문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두말할 것 없으나 다만 그 주문 가운데 아뢸 말을 만일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후일에 난처한 근심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근의 ‘경미하게 대충 보고하자’는 주장이 자못 일리 있는 듯하니, 잡혀갔다 도망해 온 사람 김대기(金大機)김대기 등 30여 명은 일본에서 쇄환(刷還)된 자 등에게서 들은 것으로 말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서계에 회답할 말에 대해서는 군신의 대의를 들어 통렬하게 논란하여, 여지없이 거절하여야 하되, 글의 내용에는 또한 화를 돋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대개 미워하지 않으면서 엄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대제학(오류이다. 전에 대제학을 역임한 바 있으나 당시는 병조판서이다) 황정욱에게 명하여 급히 지어 바치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이때에 윤두수ㆍ황정욱 등은 보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유성룡 이하는 보고할 필요없다고 말하였다. 상은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성룡 등이 바야흐로 조정의 의론을 잡고 있는 까닭으로 마침내 내용의 대략만을 보고하자는 말이 나왔으나 출병의 시기 및 통신사의 내왕 등의 곡절은 빼버리고 보고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둘 사이에서 우물쭈물하여 가부가 없었고, 이양원은 본래 나약한데다가 또한 술에 빠져 논의할 즈음에는 다만 남의 입만 믿고, 팔장 낀 채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 기록은 내내 꼭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던 내용이다.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일행의 각기 다른 정반대의 보고와, 이에 대한 대신들의 뚜렷한 시각 차, 국운을 결정짓는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사사로이 의견을 같이하는 당쟁의 엄청난 폐해와, 긴요한 국정운영에 대한 일부 관료들의 무사안일하고 극도의 사대주의적 사고와, 더 할 나위없는 무능한 판단능력 등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정사인 황윤길, 판서 윤두수, 병조판서 황정욱, 수찬 박동현등은 현명한 판단과 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한편으로 선조의 명철한 판단력과 지혜로움을 엿볼 수도 있다.
부사인 김성일의 무능한 보고는 즉결 처형 감이었고, 부제학 김수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은 역시 즉결 처형감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현명하게 정국을 이끌었다지만 유성룡의 우유부단하며 연약한 사대주의자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끄는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를 비롯한 다양한 의견을 통하여 심사숙고한 연후에 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함에도, 항상 이미 결론 내버린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거나 자신들을 추종하는 무리들하고만 소통하고 있다. 내가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바로 그 이유다. 문재인 더 민주당 대표나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가 당을 이끄는 방식도 전적으로 비민주적이다. 당내 민주적 절차는 온데 간데 없고, 당의 중요한 방향과 결정을 혼자서 하고 혼자서 발표해 버린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당은 대통령의 하수인 집합체가 되고, 야당은 사분오열하여 개인사당화 되어 버렸다. 남북문제는 꼬여가고, 정치인들은 부끄럽지만 그래도 우리 대한민국에는 현명한 국민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5월 8일
상이 교리 이유징(李幼澄)ㆍ수찬 박동현 등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소대하였다. 이유징이《강목》의 강의를 마치고 아뢰기를,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위한 분들 가운데 창업한 임금은 규모를 세워 자손에게 계책을 남기고, 《속록(續錄)》수성(守成)한 임금은 제도를 준수하여 빛나는 치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나라《경국대전》이, 두루 자상하고 완전 세밀하여, 사정을 상세히 하였고, 전후《속록(續錄)》의 저작도, 미진한 것을 더할 수 없이 수록하여 자세하게 갖추어져, 한 가지 일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조정의 정사에《대전》을 따라 써서 유실됨이 없게 한다면, 일대의 정치를 하는데 훌륭한 법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수백년 이래 세월만 허송하였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도 심상히 보아 넘기며 오직 인정(人情)의 천심(淺深)만으로 그 법을 재려고하여, 삼일공사(三日公事)란 꾸짖음과 녹피대전(鹿皮大典)이란 조롱이 있게 되었으니 고려 때 공사(公事)가 사흘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함이요, 숙녹피(熟鹿皮)라는 것은, 혹 가볍기도 혹 무겁기도, 혹 넓기도, 혹 좁기도 하여 오직 사람의 당기는 대로 됨이 녹피의 부드러움과 같다는 것인데, 모두 속담임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위를 반드시《대전》에 실린 대로 인용하여 못된 버릇을 통쾌하게 개혁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박동현이 아뢰기를,
“임금이 치안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닦는 것을 극진히 하는 방법은 신하에게 언로(言路)를 넓히어 자기 과실을 얻어 듣고 빨리 스스로 고치는 데 있기 때문에 비방목(誹謗木)과 간쟁정(諫諍旌)이 설치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 이래로 간언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함에 있어 그 방법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경연으로 말하면 하루 동안에 조(朝)ㆍ주(晝)ㆍ석(夕) 삼강(三講)이 있으니, 이것은 어진 사대부를 접하는 시간이 많고 환관이나 궁첩을 대하는 시간은 적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고도 조관(朝官)들에게 널리 미치지 못할까 하여 상참(常叅)ㆍ조참(朝叅)ㆍ조하(朝賀) 등의 일을 둔 것은, 육조의 관원이 모두 듣고 본 바를 진언할 수 있게 함이었습니다. 이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또 윤대(輪臺)를 설치한 것은, 비록 소소한 각사 아문의 한미한 말단 신하라도, 생각한 바를 진언할 수 있게 함이었고, 혹 광간(狂簡)하여 적중하지 않는 말이 있더라도, 일찍이 폐기하거나 그 거행을 막아 버리지 않은 것은, 그것이 조종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진언하는 길을 막게 될까 혐의한 까닭이었습니다. 지금에는 비록 조ㆍ주ㆍ석 삼강이 있기는 하나, 한 달 동안 있을 적도 있고 없을 적도 있어 문식(文飾)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상참 등의 일도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은 지가 이미 20년이 넘었고, 윤대를 폐지한 지도 20년에 가깝습니다.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 모두 땅에 떨어진 채 거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오늘날 더욱 속히 다시 설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상감께서 만일 성심으로 실행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치도(治道)에 도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아룀이 끝나자 차례대로 물러 갔다.
이번 소대에 이유징(李幼澄)의 녹피 등의 옛말이 비록 천근하고 거칠어서 상감께 들려 드릴 것이 못 되는 듯하나《대전》을 준수하여 사용하자는 말은 실로 약석(藥石)의 공세였다. 반복하여 아뢴 말이 수십 번이었으나 상이 특별히 받아 들이시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끝내 한 말씀도 없었다. 그리고 박동현이 언사가 적절하고 조종조의 옛일을 인증하여, 자못 간곡함을 더할 수 없이 할 동안, 정한 시간이 두어 번이나 지났다. 상은 더욱 피로한 기색으로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박동현 등이 다시 아뢰려 하였으나, 상은 묵묵히 한숨만 쉬어서 어쩔 수 없이 물러 갔다.
우승지 황혁(黃爀)이 아뢰기를,
“검토관 박동현이 아뢴 윤대를 다시 설치하자는 일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알았노라.”
고 할 뿐이었다. 대개 따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상감의 총명과 재예(才藝)가 특출하여서 군신 중에서는 비슷하게나마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상감은 이들을 평소부터 경시하였다. 경연관 등이 항상 고문(顧問)할 즈음에 도와서 성취시키는 유익은 없고, 도리어 소견이 넓지 못하다는 꾸지람만 들었다. 또 비록 옛사람의 문의(文義) 같은 것도 한갓 임금의 학문이 고명하다고만 핑계대고 조금도 개발하여 드리지 못하고서 입을 모아 칭찬할 뿐이었다. 간혹 노성(老成)한 사람이 있어 언어가 실질적이고, 행동거지가 순박하면 거의 우활하다고 지목되었다.
윤대를 설치하자는 날도 하찮은 각사 관원들의 하는 말이, 항간의 속된 말에 불과하고 더구나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당시의 이름 있고 거물인 벼슬아치들을 야비하게 비방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상이 이런 일들을 정치에 유익함이 없고, 때로는 소란하게 될 폐단만 있다고 여기시어 드디어 일체 거행하지 않았다. 그 폐단이 당초에는 신료들을 경시하는 데서 생겼는데, 마침내 근본 취지를 지켜 아름다운 예를 보전하려는 의의마저 없어졌기 때문에, 박동현이 힘써 이것을 말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대개 우활하다 하여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5월 12일
부마간택단자(駙馬揀擇單子) (공주나 옹주의 나이가 출가할 만하면 예조에서 아들 있는 사대부와 내외 사족(士族) 등을 거두어, 모두 단자를 갖추어 바치면, 임금이 친히 간택하였다. 이때 숙의(淑儀) 김씨의 딸이 나이가 차서 출가하게 되었음) 에 대해 전교하기를,
“국가의 사람 취택하는 규정이 너무 좁다. 혼인에 있어서도 성은 비록 같더라도 관향이 같지 않다면 어찌 모두 같은 성이라 핑계하여 취택하지 않을 것인가? 금번 부마단자 속에 성이 이(李)가인 사람이 없는데, 전주 이씨가 아니라면, 취택한들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예조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산해의 소자(少子)에게 있는 까닭으로 이런 전교가 내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덕형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의 성씨가 본래 어디서 생긴 것인지 밝히기 어렵습니다. 혹은 처음에는 한 성이었다가 뒤에 그 이주한 곳을 따라 무슨 지방 무슨 씨로 된 사람이 있고 혹은 당초에 이름을 나타내지 않던 사람이 중간에 의탁하여 무슨 지방 무슨 씨의 씨족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등의 유(類)를 다 상고하기 어려우니, 사람 취택하는 규정이 실로 좁습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온 뒤 국혼(國婚)할 때에 이런 등속의 일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기록을 들추어 상고하여도, 의거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청컨대 널리 조정의 의논을 수습하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이때에 예조 판서 정탁(鄭琢)이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昆壽)가 사대부 족보를 널리 보았고 또 전고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편지로 물었으나 또한 의거할 만한 것을 얻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의거할 데가 없다고 대답하고 널리 조정 의논을 수습할 것만을 청하였다. 대개 상감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만일 곧바로 안 된다고 청한다면, 상감의 노여움을 살까 두렵고, 만일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또 청의(淸議)에 죄를 얻게 될까 두려웠다. 이런 까닭으로 그 대답은 다만 성명과 본관을 상고하기 어렵다는 말만 하였고, 또 사람 취택하는 규정이 실로 좁은 것 같다는 말만 하였다. 그 모호하고 비천한 모양을 어떤 이는 가련한 인생이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내 보건대, 사대부 집에서는 이것을 협의하는 일이 없는데 유독 국혼에 있어서는 이런 잡된 말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물며 세종조(世宗祖) 때에 이숙의(李淑儀)라는 이가 있었으니, 이것은 우리 조정에도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방금 상감의 전교를 받고 비로소 이숙의의 전례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조정 이래로 이런 일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대전》을 상고하여 보면, ‘같은 성씨에게 장가들지 말라.’는 조문이 있습니다. 이숙의의 전례는 반드시《대전》을 반포하기 이전의 일이요, 그 숙의가 처음부터 숙의가 되었는지 혹 궁인으로 있다가 숙의가 되었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세에서는《대전》으로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이지 이 밖에 다른 의논은 용납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종은 성인이시니, 성인의 하신 일은 후세 자손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요,《대전》의 선후는 논할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 일이 비록 고례(古例)가 없더라도 우리로부터 고례를 만들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과 의논하라.”
하였다.
○13일
우의정 유성룡이 의논드리기를,
“혼인함에는 물론 성씨가 한 본에서 나왔으면 고금을 통하여 서로 혼인을 맺지 않는 것은 대개 혐의를 멀리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국가에서 같은 성을 취한 예는, 오직 당 나라 말기에 이무정(李茂貞)의 아들 계엄(繼曮) 한 사람뿐입니다. 무정의 본성은 송(宋)이었는데, 그가 공이 있기에 국성(國姓)으로 준 것이지, 처음에는 이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는 오히려 그를 조롱하였습니다. 한주(漢主) 유총(劉聰)이 궁인 유(劉)씨로 비를 삼으려 하자, 그의 신하들은 선성(先聖)의 훈계를 들어 반복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명확한 증거입니다. 오직 상감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는, 해조의 전후 계사가 소견이 없지 않다고 대략 아뢰었고, 우의정 이양원은 주의(奏議)한 말이 난잡하여 가닥이 없다 하였다. 이는 전교의 말에 무리한 이유를 붙여서 일부러 돌려 대어 규각이 없이 하려 한 것이다. 답하기를,
“해조에서 이미 널리 정의(廷議)를 수습하고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대개 유성룡의 말이 반복하고 명백한 것은, 조정 신료 가운데 혹 승순(承順)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려서 이것을 공론으로 삼아 시행하려 한 것이다.
○15일
참판 구사맹(具思孟)이 의논드리기를,
“배필을 지어줌과 혼인의 예는 인륜의 시초이니,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사람이 동성과 결혼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금수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천하의 넓음을 가지고서, 자녀을 위하여 사위를 가릴 때, 천하의 인재를 다 들추고 싶지마는 모든 사책(史冊)을 보아도, 동성을 취한 예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 성자(姓字)가 같음을 혐의한 것이요, 오늘날과 같이 본관의 동이(同異)만을 따져서 그 성이 같고 같지 않음을 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대부 집에서 동성이 아님을 자세히 알고 혼인한 사람이 있으나, 식견 있는 사람의 조롱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당당한 국가로서, 무식한 자들이 한 일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물며 세종조의 사례(事例)에 대해서는 비록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잘못된 일에 불과합니다.《대전》의 저작이 그 뒤에 있었으니, 또한 세종께서 숙의(淑儀)의 일을 후회하고 법령의 수장(首章)에 기록하여 금석(金石)의 법전을 정하였는지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본받아야 할 것은《대전》뿐이요, ‘우리로부터 고례(古例)를 만든다.’는 말씀에 있어서는, 만세의 의혹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 참판 이성중(李誠中) 등의 의논이 대체로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이때에 헌의(獻議)한 군신 가운데에 모호하게 둘러 대어 명백히 말하지 않는 사람이 몇 사람 있었다. 그런데 구사맹은 지면에 가득한 간곡한 말을 지극히 순절히 하여 힘을 다하였고, 유홍ㆍ이성중도 힘써 말하였다. 해조에서는 이유를 들어 중지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몹시 경악스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전교하기를,
“해조의 관원은 각기 의견대로 모두 아뢰라.”
하였다.
○16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불초하고, 학식도 없어서 국가의 중대 의논에 당해서도, 전례(典禮)를 불러 널리 상고하여 천청(天聽)을 열어 들이지 못하였으니, 헌의하는 신하들이 혹 허물을 돌려 보내는 말이 있을지라도 진실로 달게 여겨야 할 바요, 어찌 다시 의논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대전》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은 전일에 모두 말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직 놔 두라.”
하였다.
※구태를 벗고 잘못된 관행은 타파하려는 왕과, 전례를 찾아 왕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어이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조선 관료들의 보수주의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기록이다.
2.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1. 임진년(선조 25년, 만력 20년)
●6월 18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치계(馳啓)하기를,
“중국 군사 1천 명이 벌써 강을 건넜는데도 전방에 있는 각 고을은 모두 텅텅 비어, 창고의 곡식은 분산되고 군졸은 도피하여 결코 응접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비록 이윤덕(李潤德) 등과 함께 공문을 보내 조회하려하나, 또한 심부름할 사람조차 없습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여 만 번 죽더라도 달게 여길 뿐입니다. 이일(李鎰)ㆍ이천(李薦) 이천이 대탄(大灘)에서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이빈(李薲)일 것이다. 이 있는 곳을 듣지 못하였으나, 격문을 전해 재촉하여 그들에게 중국군을 인도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명원은 활을 잘 쏘고 기풍과 도량이 있어, 어릴 때부터 장수감으로 지목되었다. 마침내 여러 변방의 고을을 맡고 관서(關西)의 총융(摠戎), 영북(嶺北)의 방백(方伯)으로 일시에 순서를 밟지 않고 올라갔다. 다만 그는 누구에게나 거슬림이 없이 해이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는 인물이어서, 결코 3군의 사명(司命 각 영의 대장ㆍ유수ㆍ순찰사ㆍ통제사의 총칭)이 될 수 없었다. 국가에 인재가 없어 다급한 시기에 상중에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부절을 주게 되었으니, 비록 훌륭한 장수일지라도 수삼 일 동안에 공효를 나타내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큰 도적이 한강에 가까이 오자 만사가 분열되니, 한강으로부터 임진강ㆍ대동강 곳곳에서 패하여 도망하던 사정을 모두 이 사람에게 책임 묻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평양을 지키지 못한 뒤 서계(書啓)한 사연에, 오직 만번 죽어 마땅할 따름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하물며 이일(李鎰)은 여러 번 패한 나머지 정신을 잃어버렸고, 이빈(李薲)은 더욱 노둔하고 겁쟁이인 편이어서 임진강의 패전은 실로 이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먼저 도망가 거처가 막연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거늘, 무엇을 괴이하다고 하겠는가.
감사 송언신(宋言愼)은 한 도의 주인으로 처음부터 넋을 잃고 한 가지 일도 조처하지 못하였으며, 평양을 벗어나서는 곧 가족이 도망가 있는 희천(熙川)으로 가서 마침내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았는데, 김명원의 장계는 단지 이일 등 반쯤 죽었다고 할 무부(武夫)만을 거론하였으니, 일에 소원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의 행동이 족히 웃을 만하다
●6월 21일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ㆍ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ㆍ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치계하기를,
“신 등이 기마병과 보병과 시종군(侍從軍) 6만여 인을 인솔하고 본월 3일에 수원(水原) 땅에 결진(結陣)하였습니다. 양천(陽川)의 북포(北浦)로 군사를 건너고자 하오나, 경성에서 앞뒤로 협공하는 형세가 없지 아니하니, 조정에서 급속히 지휘하소서. 신 등도 또한 이미 한응인(韓應寅)에게 통문하여 그 회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김수 등이 올 때에 질서없이 행군하여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응하지 않아서 마치 양을 몰고 목장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선봉 백광언(白光彥), 이지시(李之詩)가 적의 초급(樵汲 취사병)을 베니, 여러 군사가 날뛰며 더욱 적을 가볍게 보고 교만한 기색이 있었다. 김수는 이미 군대가 없어 기운이 꺾였고, 이광은 본래 용렬하고 겁쟁이여서 대응할 바를 몰라, 명령을 조정에 청하여 진퇴를 결정할 계책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 처음 임금이 서울을 떠날 적에,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나라의 형세가 반드시 떨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유식한 벼슬아치들도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 생각하여, 음관(蔭官 선대의 은덕으로 벼슬한 사람)과 한산(閑散 벼슬을 내놓고 노는 사람)ㆍ문관으로 호종(扈從)하는 자가 백에 한둘도 없었다. 대체로 인심이 이미 떠나버려 다 책할 수 없었다. 수찬 임몽정(任蒙正)은 하루 앞서 피하여 숨고, 정언 정사신(鄭士信)은 겨우 반송정(盤松亭)에 이르렀다가 달아나고, 지평 남근(南瑾)은 연서(延曙)에 이르러서 달아나고, 그 나머지의 낭서(郞署)와 백사(百司)의 소관(小官)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가버렸다.
대가가 평양에 당도하자, 대사성 임국로(任國老)는 어미가 병이 들었다 칭탁하여 소를 올리고 명을 기다리지 않은 채 가버렸다.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그의 친근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소모관(召募官)이 되어서는 가족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한림 조존세(趙存世)와 김선여(金善餘), 주서 임취정(任就正)과 박정현(朴鼎賢) 등은 선전관 성우길(成祐吉)을 유인 협박하여 안주에 도착하기 전에 달아나고, 헌납 이정신(李廷臣)은 영변에 이르러 달아났다. 판서 한준(韓準)은 낙상하였다 칭탁하고 도망쳐서 양덕(陽德)에 이르러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대가가 이미 요동으로 건너갔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였다. 순찰사 홍여순(洪汝諄), 병조 좌랑 김의원(金義元)은 북도에서 이곳으로 와서는 한준의 말을 듣고, 상하의 관원이 일시에 통곡하고 흩어져 갔다. 지평 이경기(李慶祺)는 명을 받들어 군사를 모은다 하고는 곧 도망가고, 승지 민준(閔濬), 참판 윤우신(尹又新)은 정주에서부터 이미 흩어져 갔다. 그래서 이때 호종한 자는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고, 세자를 시종한 자도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경상우도 수사(慶尙右道水使) 원균(元均)이 군관 이충(李冲)을 보내 아뢰기를,
“신이 전라 좌ㆍ우수사(全羅左右水使)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거제(巨濟) 앞 바다에서 적선 5백여 척을 격파하고, 목을 베고 수급(首級)을 얻어 크게 이겼습니다.”
하였다. 이충이 왔을 때, 상이 영남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감사 김수는 함안(咸安) 등지에 있다고 하옵는데, 뭇 도적이 곧은 길을 따라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좌도와 우도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호령이 서로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병사 김성일(金誠一)이 군관을 인솔하고 졸지에 적을 만났는데, 군관들이 흩어져 달아나려 하자, 김성일은 마침내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 뒤에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걸터 앉아 길을 막고 있었는데, 적이 그의 당돌함을 보고 복병이 있나 의심하고 서성대다가 곧 물러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경기 여러 고을의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도적은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이다.’ 하여, 마침내 피하지 아니하고 나왔는데 그 때문에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2.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
●4월 13일
일본 국왕 수길(秀吉)은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嘉)와 평행장(平行長)ㆍ정성(政成)ㆍ청정(淸正) 등을 보내 대거 침범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첨사 정발(鄭撥)과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을 죽이며 성중의 사람들을 도륙(屠戮)하였다. 수사 박홍(朴泓)과 병사 이각(李珏)은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진(鎭)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며, 각 고을의 수령들도 소문을 듣고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4ㆍ5일도 못 되어 여러 군이 함락당하였다.
별록(別錄) : 이때에 부산 첨사 정발은 수군을 거느리고 마침 절양도(絶洋島)에서 수렵을 크게 벌였는데, 전날의 취기(醉氣)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13일 사시(巳時)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해종도(海宗島)에 정체 불명의 배가 나타났다고 하자 정발은 말하기를,
“세견선(歲遣船)이 오랫동안 오지 않더니, 이제 오는 모양이다.”
하고, 개의하지 않았다. 배가 가까워짐에 따라 왜선에서는 연달아 총을 쏘아댔다. 정발은 비로소 적임을 알고 정신없이 진(陣)으로 돌아왔다. 성에 들어오자마자 적은 이미 상륙하여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정발은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하고 계책도 내놓은 것이 없었는데 적은 벌써 배에 올라 정발의 목을 베어 매어 달고, 노소 가릴 것 없이 성 안의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앞에는 정발이 성에 들어 왔다고 했으나 뒤에는 적이 배에 올라 정발의 목을 베었다고 하여 전후의 문의(文義)가 모순됨.
○14일
동래가 함락되니,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별장 홍윤관(洪允寬)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절도사 이각(李珏)과 수사(水使) 박홍(朴泓)은 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적은 부산으로부터 동래성 밑에 들이닥쳐서 곧장 저돌적으로 대들어 형세가 극히 창궐하니, 성중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떤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송상현은 원래 선비인데 장수의 재질이 있어 현관(縣官)에서 뛰어올라 본직(本職)을 맡게 되었다. 성(城)과 기계의 수리가 대략 끝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데도 날이 부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성 밖의 사면에 극히 견고히 참호(塹壕)를 파고 목책을 설치하였으며, 그 주위에 잡목을 많이 심었다. 이 날에도 성을 순시하여 부하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남문을 지켰는데 적이 침범하여 성 밖의 잡목 숲속으로 들어 와서는 화살과 돌을 막아내다가 묘시(卯時)에서 사시(巳時)말까지 대거 쳐들어왔다. 별장 홍윤관은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송상현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태가 이토록 험악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府) 뒤에 소산(蘇山)이 있는데 견고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하오니, 나와 함께 나가서 그곳을 지키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송상현은 대답하기를,
“성을 사수하지 않으면 비록 다른 곳을 확보하더라도 조정에서 나를 살려 주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가 보았자 또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
하였다. 홍윤관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도 공과 함께 죽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이 그들을 칼로 치니,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성중 사람 만여 명도 빠져 도망갈 수 없었다.
수사(水使)를 설치한 목적은 수군을 거느리고 적으로 하여금 해안에 침범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수사 박홍은 정발의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와 알리고는 그 역시 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병사 이각은 원래 품행이 불량한 자로 윗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알랑거리기를 잘하여 죄가 있었는데도 방면된 일이 있었다. 적에 관한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왔다가 또 송상현이 성을 지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소산(蘇山)을 지키겠다.”
하였다.
○15일
병사 이각은 소산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은 패주하였다. 박진은 젊었을 때 글을 배워 성공하지 못하고 곧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관직을 옮기다가 마침내 뛰어 올라 본부의 부사(府使)로 오게 되었다. 부임할 적에 사람들은 그가 연소하여 큰 부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는 도중에, 동래도 함락되자 이각에게 말하기를,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은 우리 것이 아니오. 내가 앞에서 적을 견제할 터이니, 공은 뒤에서 점거하였다가 내가 패하면 공이 나를 구원하고 내가 이기면 공은 협공해 주시오. 부디 약속을 저버리지 마시오.”
하니, 이각이 동의하였다. 박진은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전면에 포진하였다. 적은 그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마구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매우 예리하였다. 이각은 박진의 군사가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망가 버렸다. 박진은 후퇴하여도 후원군이 없으므로 역시 달아났다.
○16일
박진은 밀양 앞 강에서 대패하였다. 당시 감사 김수(金睟)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분부하여 잇달아 싸움터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도중에 도망가기도 하고 문 밖에 나가자마자 도망가기도 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은 군사를 놓아 흩어지게 하고, 이어 도망가 버렸다. 울산 군수 이언함(李彥諴)은 동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가 이틀 후에 탈출해 왔다. 병사와 수사가 잇달아 진을 버리니, 그 나머지 첨사ㆍ만호까지 다 기록하기는 어렵다. 부산에서 이곳까지 오도록 맞붙어 싸운 자는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박진이 거느린 3백여 명은 소산에서 패하고 돌아와 밀양으로 달려 와서 앞 강을 지키기 위해 또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응하는 자가 없었으며, 병력을 정돈하기 전에 적은 이미 다가왔다. 이 날은 안개가 크게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박진도 오지 못해 군사들을 흩어져 가게 놓아 주고 마침내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17일
적은 밀양 앞 강에 도착하여 장차 성을 육박할 기세였다. 박진은 동래에서 성으로 돌아온 이후, 군민을 모집하여 원병이 올 때까지 지키려 하였으나 성 안팎의 주민들이 거의 다 분산되었다. 박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드디어 창고를 불태우고, 김수가 주둔한 곳으로 달려갔다.
17일 이 보고가 이르자, 중외가 크게 진동하여 마침내 8도의 좌ㆍ우방어사(左右防禦使) 등을 나누어 보내고 이일(李鎰)을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로 삼아 그날로 선발하여 보냈다.
별록 : 이 날 변방의 보고가 처음 들어오자, 서울의 조야(朝野)는 크게 놀라서 문무 백관이 궐내에 모였다. 모두 말하기를,
“적이 침략한 의도는 하루에 정해진 것이 아니여서 사방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급속히 영ㆍ호남의 좌ㆍ우방어사와 조방장(助防將)을 우선 출동시키소서.”
하였다. 그래서 이일을 경상도 순변사로 임명하여 보내니, 밤 4경에야 조정을 하직하였다.
또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경상 병사 김성일(金誠一)을 잡아오게 하였다. 대개 왜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진술한 말에 대한 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김성일의 어리석은 판단에 의한 주장으로 일본의 침략의도를 무시한 채 엄청난 국난을 당하니, 그의 국가에 대한 충성유무나 이후 임란에서의 공적과 관계없이 통신부사로서 저지른 그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의 간청에 의해 그는 잡혀오다 방면된다.
○18일
변방의 급보가 하루에도 10여 차례나 들어오는데, 모두 적의 세력이 막대하여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도읍내의 인민들은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모두가 붕괴할 기색이었다.
○19일
비망기를 내리기를,
“전란이 급박한 이때 평상시의 규칙만을 지킬 수 없으니, 무릇 사대부로 죄를 짓고 파면되었던 자는 대소(大小)와 구근(久近)을 불문하고 모두 등용하여 소임을 맡겨 보내고, 무사로 상을 당하여 집에 있는 자는 모두 기복(起復)시킨다.”
하였다.
○20일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김응남(金應南)을 부사(副使)로 삼아 그날로 부임하게 하였다.
21일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 낼 자가 없습니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궁중(宮中)도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미투리 등 멀리 가는 도구를 구입하고, 또 사복시에 명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정돈케 하여 비상시의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다.
○22일
신립(申砬)이 출발에 앞서 면대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병조 홍여순(洪汝諄)은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못하여 군중에게 큰 실망을 주었으니, 벌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을 기복시켜 도원수로 임명하여 한강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였다.
○ 23일
상은 내수사 별좌 김공량(金公諒)에게 내수사 노복(奴僕)으로 활쏘기를 잘하는 자 2백 여명을 거느리고 대내(大內)를 숙직하게 하였다. 그때 남쪽에서 점차 긴박해지는 상황을 보고하자 장안의 일반 백성 중에는 외부로 피난하는 자가 많았고, 각사(各司)의 관원 중에도 숨고 출사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과 좌찬성 최황(崔滉)은 맨 먼저 가족을 시골로 내려보냈다. 상은 윤두수를 한 번 쓸 만한 인물이라 하여 석방을 명하니, 대간이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따르지 않았다.
※어진 관료인 윤두수를 다시 기용하려는 왕의 명령에 반대하는 대간들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모두 쓸어버려야 할 인간들이다. 왕은 현명하였으나 대신들은 무능하였고, 장수들은 졸개들 같았으며, 대간들은 정치꾼들에 지나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도성을 굳게 닫고 관민에게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또 미투리 등의 물건을 돌려보내어 서울을 죽음으로 지켜 버리고 가지 않는다는 뜻을 표시하소서.”
하였다.
○24일
부원군 유홍이 아뢰기를,
“미투리는 적을 방어하는 도구가 아니오며, 마필(馬匹)을 대기시키는 것은 인심을 진정시키는 길이 아닙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는 곳에는 적도 올 수 있는 것이오니, 군신 상하가 함께 사직을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의금부에 유시하여 김성일을 체포하여 오지 말게 하였다. 김성일은 직산(稷山)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25일
종실로 총관(摠管)과 위장(衛將)의 칭호를 채워 번을 나누어 궐내에 입직하게 하여 숙위를 갖추었다.
○26일
양사에서 합동으로 아뢰기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직책이 수상(首相)인데도 인심을 안정시키지 못하여 나라를 흙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형세에 놓이게 하였으니, 도당(都堂)을 물러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이 스스로 말하기를,
“결사대 10여 명이 죽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이들과 함께 적진에 뛰어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고 긴박한 국란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킨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오활(迂闊)하다 하여 채용하지 아니하였다.
○27일
생원 구용(具容)과 권필(權韠)이 상소하기를,
“유성룡(柳成龍)의 강화 주장과 이산해(李山海)의 나라 그르침은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이오니, 참수하여 백성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 미처 진(陣)을 펴기도 전에 전군이 모두 패망하였다. 이날 보고를 접하자 거리가 텅 비어서 성을 지키려 하여도 이미 지킬 사람이 없었다.
적이 밀양에 도착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원한다 말하므로 마침내 그를 보냈다.
○28일 광
해군(光海君)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백관이 입조(入朝)하여 하례하였는데 허둥지둥하여 동ㆍ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하고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으며, 궁료(宮僚)들도 오지 않았다.
백사(百司)가 각각 상소하여 도성을 굳게 지킬 것을 요청하였는데, 답하지 아니하였다.
○29일
좌의정 유성룡과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국가에 대란이 있을 때에는 제왕(諸王)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적의 방어를 도모하였으니, 모든 왕자(王子)를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재기를 모색하시기 바라옵니다.”
하니, 드디어 김귀영(金貴榮)ㆍ윤탁연(尹卓然)을 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고, 한준(韓準)으로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강원도로 가게 하고, 또한 이원익을 평안도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로 각각 보냈다. 이들은 예전에 본도의 수령 또는 감사로 있을 적에 대체로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여 이미 행장을 마련하였는데, 대간과 백사가 모두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 중에는 임금이 평복을 착용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빠져 나와 북도(北道)로 향했다는 낭설을 유포하는 자도 있어 떠들썩하다가 한참 만에야 진정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서너 차례 있었다.
○30일
신립이 군사를 중추에 주둔시키고 일처리가 초조하여 아침에 명령한 것이 저녁에 바뀌고, 주야로 잠에 빠져 조령(鳥嶺)을 막을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풀이 우거진 저습한 지대에 포진하여 적에게 포위되어 한 사람도 빠져 나간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날 패전보가 이르자 위로는 조관(朝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서로들 도망가서 성문이 닫히지 않았고 인경도 치지 않았으며, 인마(人馬)가 인정전(仁政殿)의 마당을 메웠다.
하루 전날 상은 유성룡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이성중(李誠中)ㆍ정윤복(丁允福)을 좌우통어사(左右統禦使)로 삼으니, 도승지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제 국사가 끝장났는데 만약 중국에 구원을 청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사이를 주선하고 응대하는 데에 유성룡이 없어서는 안되오니, 서울에 머물러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마침내 이양원(李陽元)으로 대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은 표신(標信)을 병조 판서 김응남에게 주어 임의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김응남은 목에 표신을 걸고 지휘하려 하였으나 누구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이미 밤은 삼경이 되어 대가가 출발하려 하였지만 호위군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는 표신을 가지고 주위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오직 위장(衛將) 성수익(成壽益) 한 사람 뿐이었다. 하늘에선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밤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임금은 단지 두서너 명의 젊은 내시와 함께 마루 방에 앉았는데, 무뢰한들이 대내로 난입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보화를 약탈하였다. 시녀들은 맨발에다가 옷을 벗고, 혹은 눈물을 흘리고 혹은 통곡하면서 궁문을 흩어져 나오니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이홍로는 동강난 초로 불을 밝혀 들고 상을 인도해 나왔다. 곤전(坤殿)에서 비빈(妃嬪)에 이르기까지 모두 옥교(屋轎))를 탔는데, 메는 인원은 혹은 7ㆍ8명, 혹은 5ㆍ6명이 되었다. 4경에야 비로소 궁문을 나와 상은 말을 탔고, 따르며 수행 관원은 순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의 거취에 대하여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우선 아문(衙門) 별로 다음과 같이 열기(列記)하였다.
이날 낮에 대가는 큰 비를 무릅쓰고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한 후,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려 하니, 강물이 불어 범람하고 길은 진흙이며 나룻배는 겨우 5ㆍ6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어 상하가 문란하고 마부와 말이 분산되어 혹은 걷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탔지만 밤새도록 건너가지 못했다. 후궁 민빈(閔嬪)은 가마 멀미로 계속 파주에 남아 있었다.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렸다. 이미 이경(二更)이 되었으나 임금은 저녁 식사를 들지 못해서 내시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니 술을 서울서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차를 가져오라 하니 차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갈증을 참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의원의 용운(龍雲)이란 사람이 상투 속에서 사탕 반 덩어리를 끄집어 내어 강물에 타서 드리었다. 밤중에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하여 사경(四更)에야 비로소 궂은 진지를 들고, 세자 이하는 모두 밥을 굶었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백미 3승(升)을 올리니, 다음 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
●5월 1일
정창연(鄭昌衍)을 예조 판서로 삼고, 홍인상(洪麟祥)을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모두 구두로 제수한 것이다. 그때 대가가 개성을 향하려 할 때 해가 한낮에 가까웠으나 수라를 올리지 못했으며, 군졸과 무부가 모이지 아니하였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은 도망하여 숨고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승지 등이 직접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지휘하게 하니, 집에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승지 등이 노하여 꾸짖어도 응하지 않았다.
○3일
양사가 합계하기를,
“좌의정 유성룡은 나라를 그르치게 한 죄에서 홀로 면하기 어렵사옵고, 병조 정랑 구성은 본래 근시의 신하가 아니오며, 또 명을 받들어 내고 드리는 소임도 아니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입대할 적에 함께 종신(從臣)의 반열에 있어 기거(起居)가 전도되어 조정의 예의를 크게 위배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윤두수로 유성룡을 대신케 하였다.
○8일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니, 감사 송언신(宋言愼)이 군사 3천 여 기를 거느리고 전후로 어가(御駕)를 영접하였는데, 창과 칼이 햇빛에 번쩍이어 기세가 매우 당당하였다. 성중의 인민들의 가옥은 서울과 같아서 수행한 인원들이 비로소 생기를 띠게 되었다.
○14일
양사가 합계하기를,
“이산해는 성질이 사악하고 음흉하여 궁궐과 내통하고, 김공량(金公諒)과 표리가 되어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불러들였습니다. 또 서울을 떠나던 날에도 임금께 그치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청하옵건대 외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3일 만에 윤허가 내려서 평해군(平海郡)으로 귀양갔다.
○대사간 김찬(金瓚),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집의 권협(權悏), 종묘영(宗廟令) 권희(權憘), 이조 정랑 박동현(朴東賢), 봉교 강수준(姜秀俊),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등이 앞뒤로 상소하기를,
“부모들이 계시는 곳에 적이 들어와서 인민을 살해하였으니, 귀성(歸省)하고자 하옵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소하여 귀향을 원하는 자가 어지러이 그치지 아니하니, 조정에서는 아뢰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만일 모두 귀성을 하게 되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하겠습니까. 일체 승낙하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하직(下直)을 고하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1907년 12월 양주에는 8천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의병부대는 서로 기일을 정하고 서울 동대문 밖에 모여서 대오를 정비한 뒤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13도 창의군 총대장인 이인영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문경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쳤다. 그 뒤 여러 차례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의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본인을 소탕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숨어 살다가 다시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으로 옮겼는데,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이런 사람이 의병장이라 하여 국사교과서에 이름이 실려 있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경상좌도 병사 이각(李珏)이 본도에서 이탈하여 임진강의 진중에 나타나므로,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그의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19일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각(申恪)이 주장(主將)의 명령을 어기고 불러도 오지 않는다.”
하니, 조정에서는 베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선전관을 보냈다. 오후에 신각이 해유령(蟹踰嶺)에서 싸워 7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승전의 보고를 접하자 상은 그의 사면을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도착했을 때에는 머리가 이미 진 앞에 매달려 있었다.
○27일 적이 임진 하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로 강을 건널 듯이 하면서 아군을 시험하였다. 부원수 이빈(李薲)이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먼저 도망가서 상하 모든 군사가 일시에 크게 무너졌다. 이양원 등은 적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북도로 달아났다.
3. 임진일록 2(壬辰日錄二)
●6월 2일
상이 또 여러 신하와 거취를 의론할 적에 상의 얼굴빛이 처참하고 말씨가 대단히 비장하니, 신료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정철이 나와 윤두수에게 말하기를,
“좌상의 말씀이 좋기는 합니다만, 임금의 안색을 뵙지 못하였소? 신하된 자로 어찌 차마 만류하여, 억지로 성을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하니, 윤두수는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나라를 그르칠 말을 하오. 만일 일찍 서울을 고수할 계획을 세웠던들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소. 공이 이 성을 지키고 싶지 않다면 대가를 받들고 혼자 여기를 떠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이에 정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9일
9일 이덕형이 강 위에 이르니, 적장(賊將) 평조신(平調信)ㆍ현소(玄蘇)ㆍ세준(世俊) 등이 와 있었다. 양편이 각각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나 술을 나누며 이야기했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오늘날 군사를 거동함은 무슨 명분에서요?”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
“귀국과 서로 통하고자 하나, 동래(東萊)로부터 서울에까지 모두 말을 전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전전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소.”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이제 피차간 서로 통한 셈인데, 어찌하여 군사를 후퇴시키지 아니하오? 옛날의 제후는 군사를 벌이고 맹약한 뒤에는 모두 군사를 후퇴시켰으니, 이제 군사를 물리침이 옳겠소. 천천히 의론할 것이 있소.”
하니, 적이 말하기를,
“이제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한 발자국도 물러갈 수 없소.”
하였다. 마침내 자리를 파하고 돌아올 적에 용사 박성경(朴成景) 등이 곁에 있다가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음을 알고 그를 죽이려 하니, 이덕형이 눈짓하여 말렸다.
○ 이보다 앞서 승지 민여경(閔汝慶)ㆍ노직(盧稷) 등은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야 국사가 이미 잘못 되 가는 것을 보고 맨 먼저 성을 나갔다. 이것을 본받아 도망가려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 10일
대가가 출발하려 할 때 궁인이 이보다 먼저 나간 자가 많았으므로 성중의 인민이 도끼와 막대기를 가지고 길목을 지키다가 마구 두들겨 대니,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부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졌다. 부로와 남녀가 궁문 밖을 메우고 통곡하며 부르짖기를,
“우리들이 성을 나가지 않은 것은 대가를 믿고 사수하고자 함이었소. 적이 문 밖에 이르자 갑자기 우리들을 버리고 가려 하니, 이것은 우리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오. 차라리 임금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에게 죽기를 원하지 아니하오.”
하고, 궁문을 파괴하고 여러 재상을 쫓아내려 하였다. 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이 사세가 급박함을 보고 들어가 승지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심정이 이와 같아 사세를 예측할 수 없소. 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안심시킨 뒤에야 떠나갈 수 있습니다.”
하니, 승지 등이 이 뜻을 아뢰어 드디어 행차를 정지케 하였다. 승지가 나와서 백성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였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도 된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떠들며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유징이 드디어 ‘정행(停行)’ 두 글자를 판대기에 커다랗게 써서 사람을 시켜 지붕 위에 올라가 이것을 두루 보이게 하니, 그제야 차츰차츰 흩어져 갔다.
○11일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였다. ...
○ 조정에서 또 말하기를,
“천조(天朝)에 청병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찌 단지 역관만을 보내서 구원해 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대사헌 이덕형을 보내되, 청원사(請援使)라 칭하여 급히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13일
대가가 영변(寧邊)에 이르니, 성안의 사람과 가축이 모두 벌써 흩어져 도망갔다. 판관 황기(黃沂)도 외촌(外村)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 상하가 모두 밥을 먹지 못했다. ...
상이 드디어 여러 신하를 불러 이르기를,
“오늘날의 형세는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가게 되면 더욱 가망이 없을 것이니, 나누어 가는 것만 못할 것이다. 다만 오늘 향할 곳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하니,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
“상국(上國)은 부모의 나라입니다. 이제 마땅히 의주로 가시어 천조에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그래도 일이 만일 불리하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마땅히 함께 압록강에서 죽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유성룡ㆍ이항복 역시 아뢰기를,
“이 말이 대단히 옳으니 의주로 가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일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나를 따라갈 자가 있는가?”
하니, 이항복ㆍ이국이 울며 아뢰기를,
“신들이 수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최흥원(崔興源)ㆍ이헌국(李憲國)ㆍ이성중(李誠中)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들은 다 늙었으니, 세자를 따라 가야 하오.”
하고, 또 한준에게 이르기를,
“경도 부모가 있으니, 세자를 따르는 것이 옳겠소.”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울고, 임금도 눈물을 흘렸다.
○14일
이 때에 대가와 세자가 길을 나누어 가려 하였는데, 시위하는 관원으로서 친히 임금의 명을 받은 자 이외에는 모두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최흥원이 드디어 성명을 열서(列書)하여 아뢰니, 상이 드디어 낙점(落點)하였다. 상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사람들이 싫어서 피할 것이고, 더구나 늙고 병든 무리는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병 없고 멀리 갈 만한 자를 선택하여 대가를 따르게 하였다. 지평 이정신(李廷臣)은 그가 대가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또 한준이 현재 호조 판서로 있기 때문에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수행하도록 명하니, 한준이 낙상하였다고 칭탁하고 성을 나갔다.
○ 상이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국사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희망이 없구나. 우리 부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갔다가 일이 만일 갑작스럽게 되면 뒤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이제 나는 상국에 가서 호소할 것이니, 세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급히 강계 등지로 가서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라.”
하였다. 이어 서로 마주 보고 울었다.
4. 임진일록 3(壬辰日錄三)
●7월
○ 평안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潤德)이 산협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므로 드디어 두 사람을 체차시키고, 이원익을 감사로 삼고, 이빈을 병사로 삼았다.
○... 상이 이르기를,
“유성룡이 명을 받은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떠나가지 아니하니, 어쩐 일인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성룡이 병이 있어, 곧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은 지난 번 평양에서 공이 없었는데도 구차하게 형벌을 면하였으니, 성룡을 대신하여 가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꼭 갈 것은 없다.”
하였다. 유성룡이 다음 날 떠났다. 이때 유성룡의 병은 더위를 먹은 것에 불과하였다. 전에는 먼저 가서 중국 사람을 접대하라는 명을 받고도 시일을 끌어 뒤로 처졌다가 임금 행차보다 뒤에 가더니, 이제는 진중에 나가서 편의대로 종사하라는 명을 받고도 미적미적하여 빨리 출발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가 일을 피한다고 의심하였다.
○대사헌 이덕형(李德馨)이 요동에 있으면서 중국에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우리 나라의 전후 사정을 말하니, 순안사(巡按使)는 임금이 파천한 상황을 천자에게 전주(轉奏 직접이 아니고 사정을 알아서 소속 관원이 천자에게 아룀)하였다. 천자의 전지로 특별히 은 2만 냥을 마련하여 따로 한 사람의 관원을 파견해서 직접 조선 국왕에게 주어 상하에게 살아갈 방도를 찾도록 하니,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이 은을 가지고 오거늘, 상이 친히 용만관(龍灣館)에서 받고 머리를 조아려 다섯 번 절했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이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적의 배 4백여 척을 만나, 오랫 동안 대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저 적선 위에 3층의 누(樓)를 세우고 금빛과 푸른 빛으로 장식하고서, 한 적이 상(床)에 걸터 앉아 지휘하고 있으니, 그가 반드시 대장일 것이다. 우리의 거북선은 가볍고도 빠르게 가고, 또 총알을 피할 수 있으니, 만일 두세 척의 거북선으로 적선과 바로 충돌시켜 그 적을 목베게 되면 나머지는 반드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장사 백여 인을 뽑아 세 척의 거북선에 나누어 타게 하고, 적의 배 사이로 드나들게 하니, 빠르기가 베짜는 북과 같은지라 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 드디어 3층 누선(樓船)에 접근하여 백여 인이 고함치며 일시에 내달으니, 화살이 비오듯하여 적장은 살을 세 번 피했으나 오히려 피하지 못하고 머리를 맞고서야 비로소 거꾸러졌다. 이순신 등은 싸움이 한창 치열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또한 북을 울리고 고함치며 곧장 전진하니, 적선이 드디어 붕괴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다 기록할 수 없었고, 병장기도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노획했다. 왜적이 이로부터 전라도를 감히 바로 침범하지 못했다. 대체로 원균(元均)과 이순신이 한 곳에서 힘을 합해 싸운 것인데, 원균은 본도의 재물만 모두 탕진하고 있다가 이순신을 만나서 이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에 와서 이런 보고가 오니, 상이 드디어 이순신을 정헌(正憲)의 품계로 올리고, 또 통제사 제도를 설치하고서 이순신에게 그 직을 맡게 하여 3도의 수군을 통제하게 하고, 진(鎭)을 한산도(閑山島)에 설치하여 바다를 거쳐 전라 등지로 향하는 왜적을 막게 하였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도 전공이 있으므로, 원균과 더불어 가의(嘉義)로 승진시켰다. 조정에서는 전라 등의 도(道)와 소식이 통하지 못해, 그들은 반드시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 갔다고 여겨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여, 드디어 대사성 윤승훈(尹承勳)을 보내면서, 선천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가게 하였다.
○ 이때 조정에서는 연달아 사신을 보내 요동에 구원을 청하니, 사신들의 행렬이 길에 잇따랐다. 요동에서 드디어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을 파견하여 7천의 병마를 거느리고 왔다.
7월 초에 관전보 부총병 동양정(佟養正)이 발아(撥兒)라는 무기를 순안(順安)에 설치하고, 우리 군사와 진퇴를 같이하면서 연일 적의 머리를 벤 것이 천여 급이나 쌓였다. 동 총병(佟摠兵)이 순무(巡撫)와 순안(巡按)의 아문에 알리게 하니, 드디어 기병 7천 명을 뽑아 보냈다. 대체로 적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조 총병(祖摠兵)이 군대를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오니, 유성룡ㆍ김명원 등이 말하기를,
“비가 내려 길이 질퍽하니 급격히 공격하는 것은 불리하다.”
하니, 조 총병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3만의 기병으로 10만의 달자(㺚子)를 섬멸했었는데, 왜적을 보니 개미나 모기 같을 뿐이다.”
하고는, 진격하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아군의 척후장(斥候將) 순안 군수(順安郡守) 황원(黃瑗)이 김명원에게 치보(馳報)하기를,
“왜적이 모두 서울로 향하고 머물러 있는 자는 극히 적습니다. 포로가 된 여인이 성 위에서 자주 관군을 부르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성을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 총병은 이 보고를 보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내 군중에 점 잘치는 사람이 있어, ‘17일이면 성을 격파할 것이다.’ 하더니 바로 이 보고와 부합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내일 새벽에 평양성으로 나가 적을 격파하고서 아침밥을 먹을 것이다.”
하였다. 영이 이미 선포되어 드디어 평양성 아래로 나가니, 성문은 닫히지 않았고 성 위에는 지키는 적이 하나도 없었다. 이른 아침에 대군이 보통문(普通門)을 경유하여 들어가고 전초군(前哨軍)은 벌써 대동관(大同館) 앞에 이르러 떠들썩하며 앞으로 진격하는데, 적 하나도 나와서 응전하는 자가 없었다. 대군이 큰 거리를 경유하여 몰려 나가자, 적은 좌우 길가로 연한 방에다 벽구멍을 뚫고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유격(遊擊) 사유(史儒)가 총알에 맞아 죽으니, 조승훈은 그의 죽음을 보고서는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쳤다. 대군도 따라서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추격하여 크게 부수니, 요동군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3천 명이었고, 조 총병은 하루에 3백 리를 달려 왔다. 유성룡이 그를 맞이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그만둔다 치더라도 7천 명의 목숨을 생각하지 아니하오. 이곳에 머물러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조용히 퇴군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허둥지둥 떠나가려 하오.”
하니, 조 총병이 대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가산(嘉山)으로 가서 강을 가로 막고 지키겠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싸움을 늦추려는 것이었다. 인마가 거의 다 없어지고 무기도 남은 것이 없으니, 적이 만일 다시 일보라도 나오게 되면 여러 군사가 담력을 잃은 뒤라, 반드시 한 시각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적 또한 천병의 성세를 보고서 군사를 거두고 피하여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밤낮으로 이기기를 기다렸는데, 조 총병이 용맹만 믿다가 패전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오니, 상하가 낙심하고 서로 모여 발만 구를 뿐이었다.
●8월
...천자가 선정해 보낸 행인(行人 사신을 이름) 설번(薛藩)이 조칙을 받들고 와서 반포하니, 상이 의순관(義順館) 앞길에 나가 맞이하고, 용만관(龍灣館)에서 조칙을 선포하였다. 조칙 중의 말 뜻이 극히 위로하고 면려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굳게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면 마땅히 조처하겠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것은 절개를 꺾어 왜놈에게 항복할까 염려하여 먼저 위로하고 면려하는 말을 보낸 것이다.
상이 손수 조칙을 받들고 목놓아 통곡하니, 위로는 신료로부터 아래로는 천인과 노복에 이르기까지 대성통곡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설 행인(薛行人)도 눈물을 흘렸다. 얼마 있다가 상이 난리를 당한 상황을 자세히 개진하니, 행인이 말하기를,
“귀국에서 충성으로 순종하는 정성은 천조도 이미 아는 바입니다. 머지 않아서 조치하는 말이 있을 것이니, 마음을 놓고 우려하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 날 원접사(遠接使) 이덕형(李德馨), 관반사(館伴使) 이성중(李誠中)이 모두 글을 올려 잘 말해 달라고 하니, 설번이 말하기를,
“내가 복명하는 날 말을 다할 뿐 아니라, 이보다 먼저 글을 갖추어 이 사실을 분명히 써서 상주(上奏)할 터이니, 공 등은 물러가서 직무를 다 하시오.”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에 충청도와 경상도는 모두 잔패(殘敗)를 입었으나, 유독 전라도만은 물력(物力)이 온전하여 병사와 기계와 군대 물자와 짐실은 수레가 40ㆍ50리에 가득 차니, 원근에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에서도 전라도가 꼭 성공할 것으로 여겨 손꼽아 승전의 첩보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수는 패한 나머지 겨우 관군 1백여 명을 인솔하고 이광에게 소속되었다. 이광이 거느린 군대는 모두 정예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로 경상도 사람을 얕보았다. 그래서 김수 이하가 업신여김을 받아,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광은 또 어리석고 겁이 많아 병법을 알지 못했으니, 행군할 즈음에 군사들을 양(羊)을 몰아 풀 먹이는 것같이 하여 흩어져 통일성이 없었으며, 앞과 뒤를 서로 알지 못하였다. 용인현(龍仁縣)의 남쪽 10리 밖에 진을 치니, 적은 처음에 그 군세가 대단함을 보고 감히 나오지 못했다. 선봉장 백광언(白光彦)ㆍ이지시(李之詩) 등은 바로 적의 진루(陣壘)로 가서 적의 취사병 10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더욱 적을 가볍게 여겨 교만한 기색까지 있었다. 이보다 앞서 백광언ㆍ이지시가 이광에게 말하기를,
“우리 병사가 비록 많으나 모두 여러 고을에서 질서없이 모여든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그러니 다소를 따지지 말고 모두 본읍의 수령에게 거느리게 하여 아무 읍이 선봉이 되고, 아무 읍이 중군(中軍)이 되며, 전후 좌우도 모두 분담하는 일이 있어 한 곳으로만 모이지 말게 하여 각자가 진을 만들고 십여 곳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한 진(陣)이 비록 패하더라도 옆 진이 계속하여 들어가서 원근의 여러 진이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들어가 서로 구해주게 하고, 한 진이 비록 이기더라도 원근의 여러 진이 순서를 따라 진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이기면 반드시 대첩(大捷)할 것이요, 비록 패하더라도 또한 대패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광이 대답하기를,
“임기 응변할 내 스스로의 계책이 있으니, 어찌 미리 작정할 수 있겠소.”
하였다.
이 날 밤중에 백광언 등에게 바로 적의 진영을 부수고 들어가게 하니, 백광언ㆍ이지시는 적의 옥상(屋上)으로 돌진하여 올라가고, 여러 군사는 목책을 넘어 들어가 칼을 휘두르며 마구 쳐서 적의 머리 10여 급을 베었다. 때마침 짙은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군영에 머물러 있었던 적은 벌써 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어둠을 이용하여 총을 쏘며 뒤에서 엄습해 오니, 이광언 등이 모두 난병(亂兵)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여러 군대가 무너져 돌아 왔다. 떠들고 고함치는 동안에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혔다. 적병 약 4ㆍ5천 명이 서로 마주 대하고 2ㆍ3리쯤 되는 곳에 하영(下營)하였다. 왜적이 총을 한 번 쏘자 대군은 드디어 무너졌다. 이광 등은 이미 군대를 불러 모을 수 없게 되자, 자기 자신도 흰 옷으로 변장을 하고 뒤따라 도망하니, 사람과 말이 서로 밟히어 도로를 가득 채웠다. 8만의 군대가 잠깐 동안에 다 흩어져 갔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성함을 보고 오히려 감히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궁시(弓矢)ㆍ도창(刀槍)ㆍ양자(糧資)ㆍ기계(器械)ㆍ의복(衣服)ㆍ장식(裝飾)이 낭자하게 버려져서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산골짜기에 숨었던 촌민들이 밤을 틈타 주워 모아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산 자가 매우 많았다.
대가가 아직 서울을 나가기 전에 이광이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금강(錦江)에 도착했는데 대가가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자, 마침내 스스로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패하니, 모두가 사기가 죽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패전의 보고가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상하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길고 짧은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전라감사 이광의 무능함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무능한 인간을 전라감사에 머무르게 하는 조정의 무능 또한 대단하다. 그는 9월에야 처벌을 받는다.
○ 이때 조정에서 말하기를,
“8도가 적에게 화를 입어 모두 분탕질을 당하였으므로, 천조의 병력이 아니면 도저히 이 도적을 평정할 수 없는데, 우리 나라에 온 요동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출병하는 시기가 언제일는지 모른다.’ 하니, 지금까지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은 앉아서 멸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고, 급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자고 청하였다. 이때 마침 사은사(謝恩使) 신점(申点)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요동 순무 순안진(巡按鎭)에서 모두,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할 것을 제청하여 구경 대신회의(九卿大臣會議)에 붙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멀리 번복(藩服)의 밖에 있어 갑자기 왜적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도망하여 숨어다니는 꼴이 되었으니, 반드시 재앙을 자초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나라의 정형에 대하여서도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니,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여 멀리 외이(外夷)에서 싸우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요동의 장령(將領)에게 칙명을 내려 엄하게 그들로 하여금 방비하여 실수가 없게 하라 하옵소서.’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부 상서 석성(石星)만이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 중화(中華)와 비슷하옵고, 2백 년 동안을 한결같이 중국을 받들어 왔습니다. 이 까닭으로 우리 조종(祖宗)께서 조선을 예우한 것이 다른 번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이번에 병란을 당한 곡절은 전에 이미 제주(題奏)에 명확히 차서(次序)가 있어 결코 거짓을 끼고 우리를 넘보려는 계교가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만일 그들이 왜적과 부화하게 되면 변경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빨리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구원하소서.’ 하였습니다. 다만 구원하지 말자는 건의가 나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결정짓지 못하였습니다. 석 상서는 홍순언(洪純彦)을 불러 말하기를, ‘귀국의 일에 나는 힘을 다하고 있지만 여러 사람의 의론이 이와 같으니 이때에 귀국께서 청병하는 사신을 보내오면 내가 마땅히 귀국을 위하여 힘쓰겠소. 황상(皇上)께서도 귀국을 가엾게 여기고 있소. 그러나 영하(寧夏)에서 방금 용병(用兵)하고 있기 때문에 힘이 분산될까 두려울 뿐이오. 귀국은 어찌하여 지금까지 군사를 청하지 아니하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정곤수(鄭崑壽)ㆍ심우승(沈友勝)을 보내어 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게 하였다. 정곤수가 길을 떠날 적에, 상이 손수 술을 부어 주고 보냈는데 어조가 심히 슬프고 참담하였다. 정곤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내가 자기들 의견과 다르다고 하여 멀리 나가게 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오?”
하니, 이성중이 여러 사람 가운데 있다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종신(從臣)은 10에 5ㆍ6이 대개 네다섯 가지 일을 겸하였소. 공은 이미 한가한 관직을 맡았고, 또 몸이 쇠하여 병든 것도 아니니, 오늘의 사행(使行)에 공이 아니면 누가 가겠소. 더구나 이때를 당하여 비록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라 하여도 오히려 감히 사양하지 못할 터인데, 천조는 부모의 나라인데도 오히려 가고자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 분해하는 안색을 나타내니, 반드시 충신 의사의 말은 아닐 것이오.”
하니, 정곤수는 대단히 부끄러워하였다.
○ 금산의 적이 멀리 말을 달려 추격해 와서 웅치(熊峙)에 도착하고, 곧장 전주로 향하니 감사 이광이 말하기를,
“대군이 성안에 들어와 지키고 앉아서 적을 우리 지경에 가까이 오게 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내가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성 밖에 외진을 만들 터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다가 안팎으로 협공하면 성공할 것이다.”
하였는데, 실제로는 도망가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군수 정담(鄭湛)ㆍ현령 변응정(邊應井) 등이 10리 밖에서 적을 맞이하여 싸워서 10여 급을 참수(斬首)하고,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까지 역전(力戰)하였다. 해가 질 무렵 적의 대병이 밀려오니 군사들은 지탱해내지 못하고, 정담과 변응전은 함께 죽었다. 군사들은 그래도 힘을 합하여 싸우고 물러나지 아니하니, 적은 금산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적이 해주(海州)에 웅거하면서 장차 연안(延安)을 치려 하니, 인민이 모두 세간을 짊어지고 길가에 서 있었다. 전 참의 이정암(李廷馣)이 개성부에서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맞이하여 말하기를,
“영공(令公 존대하여 일컫는 말)께서 만약 우리들을 위하여 이 성을 지킨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사수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정암이 드디어 무사 4백여 명과 성안 사람을 합하여 약 수천 명을 얻어서 주야로 성을 수리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그 일이 대충 완성되자, 적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성 안의 사람들이 이정암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은 영공을 위함이요, 영공께서 버리고 가시지 않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입니다. 이제 적이 이미 가까이 왔으니, 영공의 마음이 만일 털끝만치라도 굳지 못하다면 성 안의 수천의 생명을 다 죽여 보내는 것입니다.”
하니, 이정암이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하였다. 마침내 사람을 시켜 초가집 하나를 성 안의 가장 높은 곳에 세우게 하고 사면에 섶을 쌓게 한 다음 영을 내리기를,
“성을 지키지 못하면 너희들은 빨리 여기에다 불을 지르라. 내 마땅히 이곳에서 죽으리라.”
하니,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영공께서 이와 같으시면 우리들도 마땅히 죽겠습니다.”
하였다. 적이 군사를 나누어 성 밑으로 다가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올려다 보며 공격하였다. 성 위에서는 화살과 돌을 비 퍼붓듯 쏘아댔다. 늙은이는 돌을 들어다 던지고, 부인들은 끓는 물을 길어다 부었다. 적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기도 하고 혹은 목판을 쓰고, 혹은 시체를 목에 걸고 성에 닿도록 흙을 쌓아 개미처럼 기어서 올라왔다. 성 안에서는 묶은 불다발을 던지니, 연기가 자욱하여 적은 올라오지 못하였다. 적은 또 성 밖에다 3층 집을 지어 그 위에서 내려다 보며 탄환을 쏘아댔다. 성 안에서는 또 판자집을 세우고서 사면으로 마주 일어나서 대항하였다. 적은 밤낮으로 번을 나누어 교대로 침입하면서 온갖 계책으로 공격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그때 그때에 따라 대응하였다. 크게 싸우기 5일 만에 적은 포위를 풀고 갔다. 성 안의 사람이 말하기를,
“적은 군사를 나누어 번갈아 싸웠으므로 휴식할 시간이 있었으나 우리 군대는 밤낮으로 고전하면서 한 잠도 자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였다. 적어도 하루 밤낮만 늦었더라면 어찌 그들을 막아냈겠는가. 영공에게 감동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이미 총알을 맞아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적은 배천[白川]에 의거하였는데, 하루 길 밖에 안 되어도 다시 연안(延安) 지경을 침범하지 못한 것은 꺼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강화를 경유하여 연안으로 건너가, 서쪽으로는 임금의 행재소에 닿고 남쪽으로는 호남과 영남에 통하게 되었으니, 모두 연안이 함락되지 않은 덕분이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이정암을 가선(嘉善)에 승진시켰다. 세자가 교서를 내려, 초토사라 칭하고 얼마 있다가 순찰사(巡察使)라 칭했다.
※이 연안성 싸움과 이정암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다. 이정암의 인품과 충정, 백성들의 의기를 널리 알릴 만하다. 조사해보니 이정암은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한 공으로 황해도초토사로 임명된 뒤 ‘의병약속(義兵約束)’ 8개 항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과 맞서 싸울 때 패하여 물러나는 자, 민간에게 폐를 끼치는 자, 주장(主將)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 군기를 누설한 자, 배반하는 자 등은 참수형에 처하고 적을 사살한 것을 최고로 치며 적의 재물은 모두 상금으로 주고 남의 공을 가로챈 자에게는 상을 주지 않는 것 등이다.
5. 임진일록 4(壬辰日錄四)
●9월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비로 석 노야(石老爺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높인 말)가 보낸 사람이오. 직접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적의 형세를 살펴야 하니 반드시 한 분의 대신과 동행해야겠소.”
하였다. 상이 친히 용만관(龍灣館)에서 만나 보니, 황응양이 말하기를,
“귀국은 비록 작으나 평소 부강하다 일러 왔는데, 하루 아침에 파천(播遷)하여 여기에 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 조정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귀국의 형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석 노야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가 곧장 친히 적의 진영에 가서 염탐해 보면 조선의 형세도 알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온 것은 실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통곡하며 이르기를,
“연전에 일본이 사람을 보내 함께 상국을 침범하자고 하므로 대의를 들어서 거절하였고, 그 뒤 또 와서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면 요동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므로 또 그것을 거절하였소. 그리고는 곧 전후의 왜적 형세를 갖추어 천조에 주달하였소. 이제 왜적이 우리 민생을 도살하고 우리 종묘를 불태우니,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결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소. 그런데도 어찌 차마 원수를 잊고 원한을 풀고 그놈들과 함께 상국을 침범하는 계책을 세우겠소. 소방(小邦)의 군신이 도망하여 여기에 온 것은 다만 그간의 곡절을 분명히 알려 평소 사대(事大)의 정성을 밝히고자 하였을 뿐이오. 이 미미한 정성을 아직 사뢰지도 못하고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니, 마땅히 압록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이 마음을 나타내겠소.”
하고, 상하가 다 목놓아 통곡하였다. 황 지휘는 상의 손을 잡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이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한 말씀입니다. 천조에서 만일 구원하지 아니한다면 충의(忠義)로운 동한(東漢)의 나라를 원통하게도 기회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 적의 진영에 가 보지 않더라도 조선의 사정은 이미 잘 알았습니다.”
하고, 그날로 돌아갔다. 그 뒤에 우리 사신이 병부로 찾아가니, 병부 관리가 말하기를,
“황응양이 당신 나라에서 돌아온 뒤로 날마다 병부에 와서 석 노야를 만나 뵙고서, 석 노야가 나갈 적에는 멍에채를 붙잡고 통곡하며, 극력 구원해야 하는 정상을 말하여, 석 노야도 눈물을 흘렸소. 출병하자는 의론은 비록 석 노야가 처음부터 주장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황 지휘의 힘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 사람으로 승지 곽규(郭﨣)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업으로 하였는데, 적이 의령 근처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기를,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나룻가 언덕 위에다 매복케 하였다. 또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혀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사면에서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고 언덕 뒤의 복병은 또 마구 쏘기로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드디어 적의 목 백여 급을 베었고, 이 때문에 적은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곽재우를 절충장군 조방장으로 발탁하였다. 이 때에 8도에서 의병이 함께 일어났는데 모두 관군의 절제를 받지 아니하였고,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여 관가의 창고를 공공연히 부수고 곡식을 꺼냈다. 전쟁에 이기면 큰 상을 받고 전쟁에 패하더라도 견책이 거의 없자, 관군으로 죄있는 자는 대부분 그 의병 속으로 들어갔다. 김면이 혼자 말하기를,
“우리는 의로써 일을 일으켰으니, 관군의 절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약탈하지 말고 오직 의로 돌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의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곽재우는 본래 유식한 사람이 아니니, 그가 행한 일은 깊이 책망할 것이 못된다. 정인홍(鄭仁弘)은 현자(賢者)라 일컬어 왔는데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니,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감사 김수(金睟)는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인심을 잃었다. 변란이 일어나자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라도 경계로 피하여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의 나무람을 많이 받았다. 곽재우가 이미 뜻을 얻은 뒤에 법도를 따르지 아니함이 많아서, 김수는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곽재우는 대노하여 드디어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불충 불효라고 나열하여 죽이려 하자, 김면이 극력 이것을 말렸다. 조정에서 드디어 김성일(金誠一)을 감사로 삼고, 김수를 소환하였다. 곽재우는 또 상소하여 김수를 목베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것을 크게 의심하여 비밀히 비변사에 묻기를,
“이 사람이 한 도의 주인을 마음대로 죽이고자 하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그의 행동를 보니, 일개 미친 아이에 불과합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찔러 마을을 잘 보전하고 동서로 달려가 구원하여 험난을 피하지 아니 한다고 스스로 의사(義士)라 자처합니다. 오늘날 상소함에 있어서도 그는 역시 의기의 격동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큰 죄에 빠진 줄을 알지 못하였지만 전쟁이 어지러운 때에 어찌 사람마다 다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나이까.”
하였다. 상이 드디어 답하지 않았다.
○ 애당초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지 않았을 적에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일처리를 잘못한다 하여 윤탁연(尹卓然)으로 바꾸었는데, 윤탁연이 적에게 핍박되어 삼수(三水) 별해보(別害堡) 산중으로 들어갔다. 남북도의 반란민이 크게 일어나서, 강원도로부터 경흥에 이르기까지 5리마다 표목 하나씩을 세워 글을 써 놓기를,
“이덕형은 왕이 되고, 김성일은 대장이 되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여 모든 백성들이 말하기를,
“항복하면 반드시 죽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하여 북도 병사(北道兵使) 한극함(韓克緘),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 등을 포박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병조 좌랑 서성(徐渻)은 잡혔다가 적을 매수하여 탈출하였고, 회령 판관 이염(李琰)은 변을 듣고는 스스로 문루(門樓)에 목매었는데, 그 매달린 줄을 끊은 자가 있어서 마침내 성에서 줄을 타고 도망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은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표(表)를 써서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자 하면서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판관 임순(林恂)과 함께 그 글을 내던지고 도망가려고 했다.
반란민 국경인(鞠景仁)이 북병사라 자칭하며 군사를 영솔하고 적을 인도하여 호지(胡地)로 들어갔다. 그러나 삼일계(三日界)를 넘어서 여러 호인(胡人)에게 유인되어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돌아와 길주(吉州)에 의거하였다. 이에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산골로 도망가, 6ㆍ7명의 수령과 협의하여 기병하고자 하였지만, 어느 사람은 호응하고 어느 사람은 호응하지 아니하여 관망하기로 하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한 방문(榜文)을 보내왔는데,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적을 치고, 천병(天兵) 10만이 조만간 평양에 도착할 것인데, 반은 설한령(薛罕嶺)을 넘었다는 말이 있어, 백성들이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정문부 등은 드디어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의 지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가 천여 명에 달했다. 부대를 편성하여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반란민도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으므로 정문부는 이들을 후하게 대우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璨)이 기병하여 성세(聲勢)를 돋우어 서로 응원하였다. 정문부는 정현룡을 불러 대장으로 삼고 군사를 전진시켜 적을 무찔러 연달아 적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정문부를 절충장군으로 삼고 평사를 겸하게 하였다. 강찬을 판교(判校)로 진급시키고, 갑산 부사(甲山府使) 성윤문(成允文)으로 북병사를 삼고, 이성 현감(利城縣監) 최호(崔胡)로 남병사를 삼았다.
※최호 장군은 선조 9년(1576) 무과 중시에 장원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선조 27년(1594)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다가 선조 29년(1596)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고 정유재란(1597)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선조 37년(1604) 청난공신 2등에 추록되었다. 옥구출신(현 군산시 개정면)으로 고향에는 유지가 세워져 있다.
●10월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우리나라에 왔다. 심유경은 절강(浙江) 사람인데,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일개 포의(布衣)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청하여, 친히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계책을 써서 지원하면서 혹은 군대를 쓰고 혹은 얽어매되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하니 상서는 이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가 용만관에 도착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그를 만났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제가 적의 진영으로 직접 들어가 극력 황상(皇上)의 천위(天威)를 말해서 그들을 제 소굴로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만약 추장이 어리석게 고집하여 물러가지 아니하면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위는 비록 혁혁할지라도 저 왜적들은 하나의 유별난 독종인데, 어찌 근거없는 말만을 듣고 손을 거두고 물러가겠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사체(事體)는 심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다만 보십시오. 제가 마땅히 계교로써 그들의 손발을 옭아매어 마침내는 위엄이 두려워 돌아가게 할 것이오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하여 3일 밤을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먼저 그의 가정(家丁 제집에서 일부리는 남자. 상일군) 심가왕(沈嘉旺) 등 두 사람을 적의 진영으로 곧장 들어가세 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효유하여, 명일에 서로 만나자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가정 6명만을 대동하고 곧장 평양성으로 나갔다. 적의 괴수 소서행장은 칠성문(七星門) 밖에다 장막을 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놓고 심유경이 오는 것을 보자 길 왼쪽으로 나와 영접하면서 경의를 극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갈 때에도 올 때와 같이 하였다. 단 그들이 말을 주고 받을 적에 우리 나라 사람이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들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대화를 나누고서야 돌아왔다. 적의 괴수는 부산원(釜山院)에서 10리 못 미치는 곳에다 나무 하나를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심유경이 나와 김명원에게 말하기를,
“적이 내 분부를 받아 표목을 세워 경계를 긋고 50일 동안 서로 노략질을 않기로 하였다. 귀국에서도 이같이 함이 옳겠소. 군사를 거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하였다. 이 때에 적의 군세는 성대하여 우리 나라 수천 리에 걸쳐서 한 사람도 적과 싸우는 자가 없었는데, 심유경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들어갔고 또 그들이 흉악한 마음을 감춘 채 머리 숙이고 고분고분 명령을 듣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도(沿道)의 선비와 백성들이 곳곳에서 말머리를 모아, 천 사람 백 사람씩 떼를 지어 모두 말하기를,
“오늘에야 우리는 살았다. 노야(老爺)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기 바란다.”
하였다. 촌 백성들이 물결처럼 몰려와 어떻게 생긴 남자가 이와 같은 일을 해냈는가 하여 앞을 다투어 바라 보았다. 심유경이 의주에 다투어 돌아오니, 상이 이르기를,
“8도의 여러 장수들이 마침 군사를 합하여 결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시일을 끌다가 한겨울이 닥치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 흩어져 수습하기 어렵게 될까 염려되오.”
하니, 심유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적을 옭아 놓은 것은 귀국이 이 적을 토멸할 수 없음을 염려해서 입니다. 만일 스스로 강토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면 제가 어찌하여 꼭 적의 진중을 출입했겠으며, 천조에서도 어찌하여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그 날로 강을 건너 갔다.
●12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入對)케 하니, 사간 이유징(李幼澄)이 나와 아뢰기를,
“근래 1ㆍ2년 전부터 궁궐이 엄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이 편안하지 않으며, 뇌물이 성행하고 배척하고 모함함이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왕자로 말하오면 백성의 토지와 노복을 빼앗고, 궁궐로 말하오면 벼슬과 옥사(獄事)를 팔며, 이익을 꾀하고 요행을 노려 인심을 동요시키니,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 차 있습니다. 소인들이 정사를 어지럽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니, 어질고 불초함을 논할 것 없이 오직 의론이 자기와 같으냐 다르냐만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방(椒房)의 천한 자라도 그 누이에게 세력을 의탁하여 조정의 시비까지도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상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붕괴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큰 도적이 연이어 들어오자 배반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북도의 변란 같은 것은 전에 들어보지 못하였던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변을 만나신 이래 한 마디도 스스로 허물을 인책함이 없이 다만 깊은 방에 앉아 오직 안일함을 일삼으시고 여러 신하를 드물게 접견하심이 평일보다 더 심하옵니다. 이런 형세라면 신은 나라의 형세가 결국 망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하니, 상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보니 푸르락 붉으락 하여서, 모두 송구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서 물러나왔다.
○22일
유격 전세정(錢世禎)이 남병(南兵) 3천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오니, 군마와 병기가 매우 정연하였다. 다음 날 군사를 남문 밖에서 사열하였는데 앉고 일어나고 치고 찌르며 종횡과 기정(奇正)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니, 사람마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24일
흠차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 좌군도독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佐軍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과 중협 총병관(中協摠兵官) 양원(楊元)과 좌협 총병관(左協摠兵官) 이여백(李如栢)과 우협 총병관(右協摠兵官) 장세작(張世爵) 등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왔다. 상이 친히 의주관(義州館)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독은 홍금포(紅錦袍)를 입고, 홍명교(紅明轎)를 타고 왔는데, 상을 용만관에서 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인이 나라를 잘못 지킨 죄로 황상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여러 대인이 멀리까지 정벌에 종사하게 하였으니, 비록 심복신장(心腹腎腸)을 쪼갠다 하더라도 어찌 천지와 같은 한없는 은혜를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웃으며 말하기를,
“황상의 천위(天威)는 국군(國君)의 큰 복으로, 왜적은 스스로 궤멸하게 될 것이니, 무슨 감사할 것까지 있겠나이까.”
하였다. 제독은 키가 크고 예절에 익숙하며, 풍채가 뛰어나고 언어가 유창하였다. 상에게는 경의를 다하기를 지극히 공손하게 하였다.
○상이 이 날에 세 총병을 두루 만나보고 돌아왔다. 장관(將官)으로 따라온 자는 총병 이평호(李平胡),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고책(高策)ㆍ이방춘(李芳春), 참장 장기공(張奇功)ㆍ방시춘(方時春)ㆍ방시휘(方時輝)ㆍ이영(李寧)ㆍ곽몽징(郭夢徵)ㆍ사대수(査大受), 유격 곡수(谷燧)ㆍ갈봉(葛逢)ㆍ하왕문(夏王問)ㆍ오유충(吳惟忠)ㆍ척금(戚金)ㆍ한종공(韓宗功)ㆍ이여매(李如梅)ㆍ양소선(楊紹先)ㆍ누대수(樓大受)ㆍ이문성(李文成) 등 40여 원(員)이었다. 상이 모두 만나보고자 하니, 도승지 유근이 아뢰기를,
“허다한 장관을 어찌 모두 만나볼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만 대장만 만나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였다. 윤두수는 여러 번 그들을 만나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은 기력이 몹시 피로할 것 같아서 이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노하였고 제독도 의아하게 여겼다. 임금이 늦게서야 그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이튿날 새벽에 제독이 떠나서 만나보지 못하고 말았다.
○26일 제독의 대군이 성 밖으로 지나가면서 호령이 엄숙하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감히 다치게 하지 않았다.
3. 임진잡사(壬辰雜事)
○시민이 도성의 안팎 산에 모여 술과 풍악을 갖추어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다 돌아가는 것이 봄과 가을에 성행하였다. 경인ㆍ신묘 연간에 서울에서 떠도는 말에, 오래지 않아서 세상이 바뀔 터이니, 살아 있을 동안 실컷 먹고 마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서로 다투어 놀이를 일삼아, 어떤 사람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것을 식자들은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다.
○ 이자정(李子政)이 말하기를,
“임진년에 한가로이 성문 밖에 살았기로, 일찍이 상이 서울을 떠나려는 뜻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이 혹 이런 말을 하면, 곧 그럴 이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루는 새벽에 남녀가 물밀 듯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더니, 이윽고 임금의 행차가 북도로 향했다고 들었다. 이자정은 당황하여 말을 타고 양주(楊州)로 따라 가 길가는 사람에게 두루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기에 돌아왔다.”
하였다. 나는 병조의 낭관으로 밤낮 마영(馬營)에 있었는데, 충주가 무너지게 되자 사람과 말이 궁 안에 뒤섞여 들어오고 상하가 부르짖으며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드디어 여러 동료와 같이 외병조(外兵曹)에 나가 있으면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어떤 아전이 와서 전하기를,
“상은 선인문(宣人門)으로 벌써 나가셨다.”
하였다. 우리들이 허둥지둥 대궐에 들어갔더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궐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된 전달을 받았는데, 이자정이 따라간 것이 어찌 괴이하랴. 기자헌(奇自獻)의 말에는,
“임금의 뒤를 쫓아 안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니, 근사치도 않는 말이다.
○...홍사신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교만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다.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려 하니, 그는 집으로 가 행장을 꾸려 호위하려 하였다. 그 때 길가의 난민들이 큰 막대로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ㆍ옥관자(玉貫子)를 단 도적들아! 평시에는 많은 녹봉으로 잘 살고 있다가, 이미 도둑을 막지 못하더니 또 임금에게 우리를 버리고 가게 하느냐.”
하면서, 마구 때렸는데,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는 다른 이에게 오늘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고는 등을 만지며 아픈 것을 참고 앉았다. 징원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마음은 평양 사람에게 이미 죽은 것이네.”
하였다.
○ 적이 임진강을 건너자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중화(中和)는 평양과 가까우니 수령을 불러들이는 것만 못하다 하고, 바로 군수 김요립(金堯立)을 불렀다. 이 때에 서애는 마침 이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金)이 와서 뵙자, 서애는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도 도주한 것이다.”
하고, 빨리 효수(梟首)하려고 계주(啓奏)하기에 이르렀다. 오음과 여러 재신이 그 곡절을 낱낱이 말하자, 서애가 말하기를,
“수령이 도주를 잘 하는 것은 군률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니, 용서할 수 없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해명했으나 듣지 않더니, 결국은 사형을 감하고 장(杖)을 치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도주하고서 산 자는 무수히 많지만 도주하지 않고 죽을 뻔한 자는 이 사람 뿐이다. 마땅히 도주하는 것이 쌀밥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만하다.”
하였다.
○이자상이 농담을 잘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동인, 서인의 싸움이 결국 왜놈을 불러 들였으니, 매우 가슴 아픈 일이오.”
하니, 이자상이 대답하기를,
“동서의 사람들은 싸움에 익숙한데,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이들더러 왜적을 막으라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공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 얼마 전 인성(寅城 정철)을 만나보았더니, 분당(分黨)하는 마음이 지나쳐 아직도 그치지 아니하니, 민망한 일이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군국(軍國)의 중대사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아니하니, 도리어 오음(梧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에 들은 바와는 크게 다르다.”
하였다. 이공저가 말하기를,
“유독 동서의 말만 끌어내면 언론이 바람일 듯하여 모든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니, 가위 당론(黨論)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 하겠다.”
하였다. 징원(澄源)이 나에게 말하기를,
“인성(寅城 정철)은 청백하고 소탈하나 동서 싸움에 누(累)가 되었고, 서애(西厓 유성룡)는 주밀하고 자세하나 사정(事情)에 너무 찰찰하고, 오음(윤두수)은 천품은 좋으나 사(私)에 지나쳐서, 모두 씀에는 적당치 못한 데가 있다. 그러나 서애에게 규구(規矩)와 제도를 강론하여 결정하게 하면 오음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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