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기축록(황혁)

청담(靑潭) 2016. 1. 29. 22:08

 

■기축록 (己丑錄)

 

 

작자 황혁(黃赫 1551-1612)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80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의·사간을 역임한 뒤 우승지가 되어 1591년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위리안치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삭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등용되어 아버지 정욱과 함께 사위인 왕자 순화군 보(順和君0x9A45)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 회령으로 갔다가 모반자인 국경인(鞠景仁)에게 붙잡혀 왜군에게 인계되었다.

그 뒤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어 갖은 고초를 받다가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끌려나가 선조에게 항복권유문을 쓰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몰래 별도로 아버지 정욱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적어서 보냈다. 1593년 부산에서 두 왕자와 함께 송환되었다.

그 뒤 항복권유문을 썼다고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이산(理山)에 유배되었다가 신천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612년, 전날에 이이첨(李爾瞻)을 시로써 풍자한 일 때문에 미움을 받아, 순화군의 아들 진릉군 태경(晉陵君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복관, 좌찬성에 추증되고, 장천군(長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저서로 『독석집』이 있다. 다음 기록 중 기축록 상은 황혁이 쓴 것이다.

 

1. 기축록 상(己丑錄上)

1. 기축록 상(己丑錄上)

○만력 기축년(1589, 선조 22)

10월 2일. 황해 감사 한준(韓準)이 올린 비밀 서장(書狀)을 입계(入啓)하니, 그날 밤에 삼공ㆍ육승지ㆍ금부당상ㆍ입직(入直)한 도총관(都摠管)과 옥당을 불러서 대면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재령(載寧)ㆍ안악(安岳)ㆍ신천(信川) 등에서 모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전관(宣傳官)과 금부도사(禁府都事)를 황해도와 전라도 등으로 나누어 보냈는데 전라도의 모역은 정여립(鄭汝立)이었다.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은 정여립의 생질이라서 입시하지 말라 하고 곧 하옥하였다.

○ 선전관 이용준(李用濬)과 내관(內官) 김양보(金良輔) 등이 정여립을 체포하기 위해 전주(全州)로 달려갔는데, 정여립이 그의 아들 옥남(玉男)과 도당 2명과 함께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숨었다는 말을 들었다. 관군이 포위하여 체포하려 하니 정여립이 도당 변후(邊侯)를 죽이고 또 그 아들을 죽이려 했으나 죽이지 못한 채 자기 목을 쳐서 죽으니 그 아들 옥남을 체포하여 왔다.

○ 7일. 양사에서 우상 정언신(鄭彦信)과 이조 참판 정언지(鄭彦智)가 역적과 교분이 두텁다고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 8일. 정철을 우상으로, 성혼(成渾)을 이조 참판으로, 최황(催滉)을 대사헌으로, 백유함을 헌납으로 임명하였다.

○ 8일. 예조 판서 유성룡(柳成龍)이 자기 이름이 백유양의 초사에 나왔다 하여, 소를 올려 스스로 무리에 끼었다고 하니, 답하기를, “역적의 초사가 경에게 무슨 상관이냐. 경은 금ㆍ옥과 같은 아름다운 선비라 경의 마음과 뜻은 백일(白日)에 물어 볼 만함을 내가 안 지 오래이니 전지(前旨)를 따르고 조금도 개의치 말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고(故) 집의(執義) 이경중(李敬仲)이 이조 좌랑(吏曹佐郞) 때에 역적의 이름이 있자 그가 무상(無狀)하다고 극력 배척하다가 청환현직(淸宦顯職)의 길에 통하지 못하고 필경은 논핵을 당하였다. 그의 선견(先見)한 충성은 옛사람들에 못지않으니 그에게 판서를 추증하고 좋은 시호를 주어 표창하라.” 하였다.

○ 11일. 우상 이산해(李山海)에게 전교하기를, “역적이 진신(搢紳) 사이에서 나온 것은 큰 변 중에서도 크게 불행한 일이다. 언관이 관계된 사람을 논핵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지마는 요즘 되어가는 형편을 보니 점차 파급될 것 같은데 내가 매우 기뻐하지 않는 바이다. 더러 두루 상종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만약 이런 기회를 타서 혹 평소 자기와 언론이 같지 않은 자를 지탄하고 배척한다면 그 해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미치지 않을 사람에게 미치면 어찌 온당하게 되겠는가. 만일 이러하면 경은 힘써 말려야 하며 힘껏 말려도 듣지 않으면 면대하여 직접 아뢰라. 이것이 금일 경이 주선하고 진정시켜야 할 바이다.” 하였다.

지평 황혁(黃赫)이 피혐(避嫌)하는 말이 매우 장황하고 또 대사헌 최황(崔滉)과 대립하니, 대답하기를, “최황의 의견이 체통에 맞는데 너는 어찌 감히 이렇게 부정(不靖)한 말을 하느냐. 만약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일이 생기니 말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집의 성영(成泳)을 처치하였다. 최황과 황혁이 모두 출사(出仕)하니, 황혁을 체차(遞差 다른 사람으로 직위를 바꿈)하라고 답하였다.

○ 15일. 조헌(趙憲)이 석방되어 돌아오면서 소를 올렸고, 호유(湖儒) 양산도(梁山濤)와 김광운(金光運) 등이 소를 올렸는데 모두 당시의 재상들을 가리켜 배척하는 것이었다. 전교하기를, “인심이 어그러져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리들은 소를 올려 조신들을 모두 배척하면서 유독 우상 이하 수 명만을 찬양하고는 스스로 직언(直言)이라 여기는데, 이것은 도리어 그 정상을 노출시킨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조헌은 간귀(奸鬼)이다. 그는 아직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정을 업신여기며 더욱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으니 이 사람은 장차 반드시 마천령(摩天嶺)을 다시 넘을 것이다. 그러니 승지들은 이 뜻을 알고 있으라.” 하였다. (우상은 정철(鄭澈)이다). 또 전교하기를, “조헌은 간귀이다. 그 마음이 매우 참독한데 현륙(顯戮)을 면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벼슬이 언관에 관계되어 있고 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기에 특명으로 석방되었는데 임금의 뜻을 여쭙지도 않고 서둘러 받아들여 서용하였음은 인심을 현란시킨 것이니 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날 사진(仕進)한 당상을 체차하고, 낭청은 추고하라.” 하여, 판서 홍성민(洪聖民)을 체차하였다.

○ 16일. 좌상 이산해(李山海)가 대죄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간인이 사주하여 내 마음을 몰래 시험하여 조정을 쓸어버리려는 계략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내가 그 사람을 찾고자 하였을 뿐이다. 다만 그 말이 따질 만한 것이 못 됨은 이미 그대와 면대하여 타일렀거늘 이렇게 그 일을 아뢰니,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경은 개의치 말라.” 하였다. 이 좌상이 다시 차자를 올리니, 대답하기를, “어제 경이 먼저 나간다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은근히 놀라고 애통해 하였는데, 그 후에 소장(疏章)을 보니 나주(羅州)에 있는 간적(奸賊) 수 명이 몰래 조정을 배척하였는데 그들의 뜻이 실은 경에게 있었으니 나는 너무도 분통하였다. 경은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너그럽고 후덕하여 도량은 만석을 실은 배와 같아 옛날 대신의 기풍이 있고, 유성룡(柳成龍)은 학문이 순정(純正)하고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니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공경심을 일으키게 되고 또 재주와 지혜가 비범하여 실로 속유(俗儒)들은 만분의 일에도 미치치 못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고 사림의 영수(領袖)가 될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내가 평소에 의지하고 소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간사한 사람들이 나라의 우환을 틈타서 경 두 사람을 쳐서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는데 나를 어린애로 보고 손바닥 위에 놓고 희롱하는 것이니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누워도 자리가 편하지 않다. 반드시 사주하는 간사한 사람을 잡아야만 마음을 달래겠기에 비록 정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더라도 달리 돌볼 겨를이 없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대죄하지 말고 마음놓고 안심하라.” 하였다.

○ 경인년(1590) 2월

심수경을 우상으로 배명(拜命)하고 곧이어 위관(委官)으로 삼았다. 그때 조대중(曺大中)이 신문을 받고 옥에 있다가 죽음에 임하여 시를 짓기를,

지하에서 만일 비간(은의 충신, 주왕의 숙부로 주의 음란한 것을 간하다가 죽음)을 따라가게 된다면 / 地下若從比干去

그때에는 웃음을 띄우지 슬픔은 띄우지 않겠네 / 此時含笑不含悲

하였는데, 위관은 죄인이 죽음에 임하여 황란(荒亂)한 말을 한 것은 번거롭게 진달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고, 또 후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버려두고 아뢰지 않았거늘 판의금부 최황(崔滉)이 탑전에서 아뢰니, 임금이 끌어들여 마주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심수경이 대답하기를, “무릇 죄수는 원정(元情)을 공초한 이외에 다른 일을 수리(受理)한 예가 없는데 하물며 죽음에 임하여 하는 황란한 말을 수리하겠습니까. 신은 대신의 반열에 끼어 있으니 법을 받드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매우 노하니 심수경이 면직해 줄 것을 힘써 요구하며 세 번이나 사직을 구하자 체직시키고 정철을 도로 위관으로 삼았다.

○ 3월 18일.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영중추부사 노수신은 갑신년에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고 김우옹(金宇顒)ㆍ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ㆍ정여립(鄭汝立)을 천거하였는데, 이 천거를 찾아보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끝이 빳빳해졌다. 이 경을 내가 평소에 우대하였지만 흥망에 관계된 일이니 나는 덮어 줄 수가 없다. 대신들은 조정의 공론에 따라 처치하라.” 하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파직시켜라.” 하였다. 노수신이 4월 7일에 졸하였다.

○ 5월,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조정의 분부로 인하여 역적과 절친한 사람을 수소문하여 장계하게 한 일을 각관(各官)에 알리니, 나주(羅州) 향소(鄕所)와 교생(校生) 10여명이 고하기를, “정개청(鄭介淸)이 유생 조봉서(趙鳳瑞)와 함께 정여립에게 가서 집터를 보아 주었습니다.” 하므로, 감사가 낱낱이 들어 징계하니 정개청을 즉시 잡아오라 하였는데...이 몸은 비록 정여립과 같은 도에 있었으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을유년에 교정랑(校正郞)으로 있을 때 처음 얼굴을 보았으며, 공청(公廳)의 강교(講敎)는 불과 10여 일이었으니 어찌 친밀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1591년 6월 23일.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전 영돈녕부사 정철과 백유함ㆍ유공진ㆍ이춘영 등은 서로 편당을 지어 조정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하였으며 자기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여 호남 유생으로 하여금 소를 올리게 해서 명경사부(名卿士夫)를 모두 역당으로 몰아 넣어서 죄를 주어 섬멸하고자 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정철은 강계(江界)ㆍ백유함은 경흥(慶興)ㆍ이춘영은 삼수(三水)로 갔으며 유공진은 경원(慶源)으로 갔다. 그때의 대사헌은 이원익(李元翼)이며 대사간은 홍여순(洪汝諄)이라 한다.

○ 17일. 전교하시기를, “간신 정철에게 모함을 입어 배척당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 발탁하여 쓰라.” 하였다.

○ 20일. 정철을 압송하던 도사(都事) 이태수(李台壽)가 순안(順安)에 도착하자 정철의 병이 중태에 빠져 때맞추어 압송하지 못했다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태수가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사한 역적을 압송하기를, 엄격하게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배회하고 계속 머무르게 해서 7일의 일정이 거의 20일이 되었으니 잡아다가 추국하라. 정철은 천성이 교활하고 간독하니 배소에 도착하여 잡인과 상통하게 되면 어떠한 죄를 저지를지 모르니 엄하게 가시 울타리를 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9일.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신들은 매번 최영경의 원통함을 생각하고 바로 임금에게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따를 길이 없었습니다. 대개 최영경은 평일에 항상 정철을 철저한 소인이라고 하니, 정철은 항상 마음으로 원망하더니 마침 역적의 변을 만나자 무뢰한 그의 무리를 사주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 냈는데 처음에는 길삼봉(吉三峯)이라 하더니 두 번째는 최삼봉이라 하였고, 나중에는 ‘삼봉은 바로 최영경이다.’고 자창자화(自唱自和)하면서 심상한 이야기처럼 만들어 나라 안에 퍼뜨려 사람들에게 선입감을 준 뒤에 옥사를 일으킨 것을 임금께서 밝게 보시고 원통함을 살피시어, ‘석방하라.’고 특별히 명하였사온데 백방으로 옭아매어 마침내 죽게 하였고, 죽은 뒤 에도 오히려 통쾌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이치가 꿀려 자살했다고 말을 했으니, 비록 조정(祖挺)이 백승(百升)의 요(謠)를 이은 것과 남곤(南袞)이 주초(走肖)의 참서(讖書)를 만든 것도 이렇게 음험하고 참혹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사냥에 비한다면 짐승의 발자국을 찾아서 사건을 지휘한 자는 정철이온데 혹자는 그 죄를 사냥개에게 돌리고자 하나 그 사냥개라는 것은 어찌 말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최영경(1529-1590)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 번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으로 1572년(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도사·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안민학(安敏學)이 자주 찾아와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만나볼 것을 권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다.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오건(吳健)·하항(河沆)·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1576년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배향하였다.

이듬해에는 외아들 홍렴(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다. 1581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이 상소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1585년 『소학』·사서(四書)의 언해를 위한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0년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년(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 11월 일. 양사에서 정철을 삭탈 관작하여 왕법을 바르게 하는 일로써 합계하니, 아뢴 대로 하다.

○ 전지(傳旨)에, “고 영돈녕부사 정철로 말하면 사갈(蛇蝎) 같은 성질로 귀역(鬼蜮)의 음모를 품고 독기를 부려 오직 사람을 상하고 물(物)을 해치는 일만을 일삼았다. 지난날 역변이 일어나자 들어와 조정의 권한을 손아귀에 넣고 국가의 화를 요행으로 하여 자기의 사감을 푸는 기반으로 만들었다. 당초 임금께서 역변의 파급을 경계하였으나 정철은 감히 팔을 걷어 올리고 입을 놀려 널리 심복의 부하를 두고 많은 곳에 그물을 쳐, 혹은 초야에서 소를 올리게 하고 혹은 대성에서 글을 올리게 한 것은 정철이 모두 직접 지시하였거나 혹은 상소 내용을 손수 초한 것인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타진(打盡)하기 위해 나라 안에 함정을 만들어 사람을 모함하는 도구로 삼아 무릇 눈을 한번 흘겼다 하여 해를 당한 자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미 드러난 것으로 말하면, 최영경은 한 산림의 선비로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다만 평생의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했고, 항상 정철을, ‘옹색한 소인’이라 하니, 정철이 항상 그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추부에서 회의하던 날, ‘영남의 유명한 선비중에 역적의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최영경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큰 옥사를 일으켜 한 도(道)의 선비를 모두 모함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힘써 변명하는 가가 있어서 그 말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 12월 10일. 지평 황혁(黃赫)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임금께서 정승에게 내리신 교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하시는 뜻이 지극하시옵니다. 근래 역적이 소위 명류 속에서 나왔으니 평소에 그와 서로 결탁하고 서로 추장(推獎)하여 성세(聲勢)를 조장하여 이런 변을 조성한 자는 왕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자연 그 죄가 정해질 것이오며, 언관들이 소문에 의거하여 차례로 따지는 데는 파급될 후환이 없지 않으므로 신들은 일찍이 이를 염려하여 한 사람이라도 죄 아닌 죄로 당할까 염려했사옵니다. 게다가 4ㆍ5년 전부터 조정이 깨끗하지 못하여 다스리는 법률은 갈수록 더욱 까다로워서 사제지간이나 사돈의 집안까지도 모두 중상을 당하게 되니 사람들은 팔을 낀 채 감히 말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시 유신(維新)하는 초기에 누가 감히 의견의 차이로써 이런 때에 서로 다투어 스스로 소인의 전철에 빠지겠습니까. 그 사이에 탐욕스러워 남을 해치는 아주 못된 사람은 부득불 죄에 따라 탄핵해야 할 것이므로 신은 사유를 갖추어 아뢰고자 대사헌 최황(崔滉)에게 통문(通門)하였던 바, 대답하는 말이 불손하고 동료를 낭리(郞吏)처럼 대하니 신은 벼슬에 있기 어려워 사직을 청하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최황의 뜻이 체통을 얻은 것이다. 너는 어찌 감히 이렇게 부정한 말을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일이 생겨날 것이니,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이 글의 저자인 사헌부 지평(정5품) 황혁이 자신의 상관인 대사헌(종2품) 최황을 비난하는 말이다. 조선시대 삼사 대간들의 강력한 위상를 바로 보여주고 있다. 지평은 일개 정5품의 하위직이지만 삼사의 위상이 워낙 높고 따라서 사헌부 지평은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최 지평(1551-1612) 전(崔持平傳)

...기축년에 정여립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었는데, 전라도 유생 홍천경(洪千璟) 등이 권신의 교사를 받고 최영경(1529-1590)을 역당이라고 무고하였다. 감사 홍여순(洪汝諄)에게 말하니 홍여순이 경상 감사 김수(金晬)에게 최영경을 체포하라고 공문을 보내는 한편 조정에 치계(馳啓)하여 마침내 그 아우 최여경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옥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바야흐로 옥사가 급하게 되자 감히 그 억울함을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홀로 안성(安城) 유생 김경근(金景謹)이 상소하여 억울함을 아뢰었으나 승자가 보고하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최여경은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이때에 좌의정 정철(1536-1593)이 위관이 되어 옥사를 살폈는데 내가 하루는 우연히 대궐 밑에서 정철을 만났기에, “최영경의 옥사가 어떻게 되었느냐.” 물어보고 또, “이 사람은 고결한 선비라는 이름 있으니 불가불 상세하게 살피시오.” 하였다. 정철은 평소 경솔한데 또 이 날 술에 취해서 문득 왼손으로 자기 목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찌르는 형상을 하며 연달아 말하기를, “이 사람은 평일에 나를 이렇게 하고자 했다.” 하였다. 판부사 심수경이 옆에 있다가 해명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의 말을 어찌 모두 믿겠소. 원컨대, 대감은 사람의 말을 믿지 마오.” 하였고,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하여도 공은 지금 옥관이 되었으니 그 품었던 바를 마땅히 잊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렇습니까.” 하니, 정철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도 어찌 이것을 생각하겠소. 이미 추안에다 극력 해명하였으므로 오래도록 형을 가하여 심문하지 않고 오직 가둬 두기만 하였소.” 하고, 또 말하기를, “나도 분명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고 있으니 다른 일은 걱정 없소.” 하였는데, 과연 수일 후에 석방되어 옥에서 나왔다. 사헌부에서 계청하여 다시 가두었는데 그때 윤두수가 대사헌이 되어 발론한 것이나, 그 실은 장령 구성(具宬)이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다. 사람들이 정철이 비록 밖으로는 공의를 따라 풀어주는 것같이 하고 안으로는 자기 당으로 하여금 논의하게 한다고 의심하였다.

최영경은 전에 옥에 있을 때에 이미 폐(肺)를 앓아서 피고름을 토했는데 악취가 났다. 친구 이연춘(李連春)을 통하여 나에게서 약을 구했는데 재차 옥에 들어갔을 적에는 병이 더 심해져 오래지 않아 죽었다. 사헌부에서 또 아뢰기를, “최영경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약을 마시고 죽었사오니 당직 도사(當直都事)를 파면시키소서.” 하니,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정철이 죄를 얻었고 여러 신하들 가운데는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최영경에게 대사헌을 증직하고, 대간 구성 등을 귀양보내어 축출했으며 정철도 죽은 뒤에 벌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고 하였다. 최영경은 평소에 성혼(成渾)과 친하게 지냈는데 성혼이 정철과 결탁하자 최영경이 언제나 정철은 형편없는 소인이라고 말했으며, 술을 마시고 취하면 두 무릎을 내놓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이 무릎이 끝에 가서는 정철에게 고문을 당할 바가 될 것이나 내 무엇이 무섭겠는가.” 하고, 큰 소리를 하며 마지않했다. 이 때문에 성혼과의 교제도 끊어졌으니 이때에 사람들이 이 옥사가 정철에게서 일어난 것이나 성혼도 방조함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임진년 가을에 안주(安州)에 있었는데, 정철이 행조(行朝)에서 체찰사가 되어 남쪽으로 떠나면서 백상루(百祥樓) 위에서 나와 만났다. 정철이 술이 반쯤 취하여 홀연히 말하기를, “너는 내가 최영경을 얽어 죽였다고 말하였다는데 그러하냐.” 하기에, 나는 천천히 답하기를, “공의 마음을 알 수 없으나 형적을 보니 그런 것 같아 과연 그런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하니, 정철이 노하여 술잔을 땅에 던지고 일어나 몇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돌아와 앉아 말하기를, “너는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성호원(成浩源)의 구해서(救解書)가 나에게 아직도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느냐.” 하니, 나와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파했다. 무술년 겨울에 내가 동성(東城)에 있었는데 이귀(李貴)가 한 장의 종이를 갖고 와서 나에게 보였는데, 정철이 위관 때 최영경을 구하여 풀어주려고 한, 아직 임금께 올리지 않은 소문(疏文)의 초안이었다. 이귀는 놀라 말하기를, “정상(鄭相)의 본심이 이러한데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너무 심하게 의심하기 때문에 그 자제들이 가지고 왔기에 보여주는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덧붙여 말하기를, “성혼이 정철을 교사하여 최영경을 죽였다.” 하여 성혼도 함께 관작 삭탈하였는데 이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2. 기축록 하(己丑錄下)

■곤재(정개청)전(困齋傳)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선생이 본래 정철(鄭澈)의 사람됨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청백한 지조가 취할 만하다고 말하여도, 선생은 답을 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그 사람이 가식적으로 행동을 하니 바른 사람이 아니다.” 하니 정철이 이 말을 듣고 몹시 노하였다.

그후에 얼마 안 되어 정여립(鄭汝立)을 상변(上變)하는 일이 있어 옥사(獄事)가 이미 이루어지자, 정철이 군읍에 영을 내려 죄인들과 친한 사람으로 잡아들일 자를 몰래 염탐하라 하니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랐는데, 나주 사람 5, 6명이 정개청이 죄인과 서로 통한 정상을 고발하였다. 선생은 죄인과 잘 알지 못하며 다만 경의(經義)를 교정할 때 서로 대한 것뿐이었다. 정철의 집에 드나드는 정암수(丁岩壽)ㆍ홍천경(洪千璟) 등이 없는 죄를 얽어서 꾸몄으나 심문하여도 실상이 없으므로 임금의 뜻이 비로소 풀려 있는데, 정철이 아뢰기를, “정개청이 아무리 죄가 없다고 스스로 말하나 일찍이 배절의논(排節義論)을 지어 인심을 현혹케 하였으니 그 폐해가 홍수와 맹수보다 심합니다. 고문하소서.” 하였다.

 

■서찰 뒤에 부친 국청의 계사

위관 정철 등이 아뢰기를, “이 서찰을 보면 정개청이 역적과 두텁게 사귀고 체결하였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일찍이 덕의(德義)를 흠앙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하였고, 또 ‘도를 고명하게 본 사람은 오직 존형(尊兄)뿐이다.’라는 대목은 심히 놀랍고 또 《배절의논》을 지어 당시 백성을 현혹하였으니 그 사특한 말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미 절의를 배척하면 반드시 절의와 상반되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절의와 상반한 일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님이 전교하기를, “법대로 적용하라.” 하시니, 의금부에서 위원(渭原)으로 귀양을 정하였다가, 위관이 다시 아뢰어 북쪽 끝 경원(慶源)으로 다시 고쳐 정하였는데 6월에 아산보(阿山堡)에 이르러 7월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서애 유성룡의 계사(西厓柳成龍啓辭)

정개청은 호남 사람 중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평생을 학술과 행실로서 자임하였는데, 우연히 한 편의 저술한 논설로 인하여 몸을 멸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나덕윤(羅德潤)의 무리가 천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대궐문을 두드리고 원통함을 호소한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대개 큰 병란과 큰 옥사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가 망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옥사가 있은 후에 반드시 난리가 있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인심이 지나간 일에 징계하고 근신하여 나라의 운명이 장래에 일신하는 이때에, 죄없는 서민이 만약 황천에서 원통함을 머금고 신설함을 보지 못하면 억울한 원기가 또한 위로 하늘의 화기(和氣)를 막을 것이니, 국가의 형정(刑政)에 누(累)가 될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들의 뜻은 정개청ㆍ유몽정ㆍ이황종 등에게는 특별히 유생의 소장을 윤허하시어 모두 신설의 은전을 내리시고 이밖에 소장과 차자 가운데, 이름을 열거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임진년의 하교에 의하여 법에 마땅히 연좌되는 자 외에는 모두 석방의 문을 열어 의금부로 하여금 상세히 기록하게 하고, 그 관련된 실상의 경중을 따라 일체 석방하여 그물을 풀어주는 은혜를 궁극한 황천(黃泉)과 엎어놓은 동이 아래까지 고루 입게 하여주시면, 그 유신의 정사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황공히 아룁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후일에 마땅히 면대하여 의논하리라.” 하였다.

 

4월 25일 합계(四月二十五日)

이제 부묘(祔廟)가 이미 끝나고 혜택이 널리 흐르니, 지하에서 원통하게 죽은 백골이 죄를 씻기는 은전(恩典)을 입는 것이 바로 이때일 것입니다. 이발ㆍ이길ㆍ백유양ㆍ정개청 등의 죄안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관작을 회복하여 주시고 적몰한 가산을 돌려주시어, 이밖에 원통한 사람들을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모두 조사하여 일체 시행하소서.

비답하여 말하기를, “따르기 어려운 뜻을 이미 효유하였으니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대신 수의(大臣收議)

1610년 5월 28일에 정철의 관작을 회복하고, 그 이듬해 을축년 2월에 곤재(困齋 정개청의 호)와 이발ㆍ이길ㆍ유몽정ㆍ조대중도 모두 관작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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