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과 옥산서원
익산문화원에서 매년 문화답사를 갑니다. 올해는 양동마을에 간다고 하기에 기대가 컸습니다. 작년 5월에는 소수서원과 부석사를 다녀왔는데 여러 번씩 다녀온 곳이기에 답사기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가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은 처음입니다. 양동마을이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유명해졌고 물론 나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단체 답사가 아니면 자가용을 타고 가야하는데 경주까지 차를 몰고 가는 일은 그리 쉽게 계획이 서지 않습니다. 핑계야 어떻든 문화원의 답사 계획에 따라 문화원 수강생 회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고 나는 서예반 회원이므로 1차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현충일 아침 7시 반에 출발하여 저녁 7시 반에 도착하는 12시간의 긴 버스여행이 되었습니다. 왕복 4시간 씩 8시간은 버스를 타고 4시간은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는 시간입니다. 자가용을 가지고 하루여행으로는 너무 벅찬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走馬看山격으로 돌아보았으므로 나의 소감을 몇 자 적고 나머지는 사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옮겨서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옥산서원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이 경주에 있다더니 정작 와보니 오히려 포항이 가깝습니다. 그러나 행정구역으로는 경주시 안강읍입니다. 나는 중학교때부터 이 먼 곳의 일개 읍인 안강을 알았습니다. 1965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우리 시골마을의 우리 밭 근처에 목장이 하나 생기고 입구에는 《안강목장》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졌습니다. 무슨 뜻을 가진 목장이름인지 젼혀 관심이 없다가 고등학교 시절인가 우연히 지도에서 안강을 발견하였고 주인이 안강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연유로 우리 마을까지 왔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옥산서원은 안강읍에 소재하고 양동마을은 바로 옆에 있는 강동면에 소재합니다. 그러나 두 곳은 아주 가깝습니다. 위례대학교가 근처에 있고 포항시가 아주 가까운데도 행정구역이 경주라니 조금 이상합니다.
사적 154호인 옥산서원은 규모가 크고 경치가 좋은 곳에 잘 지어졌습니다. 서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서원 오른편에는 세심대라는 큰 바위가 넓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이곳 양반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제사도 지내고 온갖 권력을 부리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을 터입니다. 경상도에는 옥산서원말고도 소수서원등 유명하고 큰 서원들이 잘 보존되고 있어 답사객들이 많이 찾지만 우리 전라도의 서원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향교들은 잘 보존되고 있지만 서원은 관리하는 주체가 없어 모두 쇠락하여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 볼만한 서원은 아예 없습니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므로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처지가 못 됩니다. 그냥 일행 대부분이 우산도 없이 건물을 대충 둘러보고 바로 옆에 위치한 세심대까지 다녀왔습니다. 이언적을 기려서 세워진 유명한 서원이며 이언적은 그 행적이 아름다운 존경스러운 참된 선비입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곳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할 때에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그 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조선조 도학(道學)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회재의 고향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 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곳은 옥산서원으로부터 약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고 합니다.)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淸絶)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서·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에서 정면인 서쪽 앞으로 마주보이는 산은 무학산(舞鶴山)으로, 북쪽의 자옥산(紫玉山)에서 갈라져나온 맥이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이다. 역락문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무변루는 정면 7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의 각 1칸에는 퇴칸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되어 서원 쪽으로는 강당 앞마당이 처마 사이로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와 건물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없는 듯하다.
무변루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를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공간의 트임과 막힘을 제한하는 한편, 강당 쪽으로는 창호를 달지 않고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무변루는 외삼문에서 보면 2층이지만, 강당 쪽에서는 위층만 보인다.
무변루를 마주보고 있는 강당 건물인 구인당(求仁堂)과 그 앞 좌우의 동재와 서재가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구인당은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이고, 왼편과 오른편 협실은 온돌방이다. 구인당에서 앞마당을 가로질러 무변루 밖으로 멀리 무학산을 바라보면 자연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인당의 '구인(求仁)'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求)'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다.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이며,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이다.
(1839년에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가 다시 썼다고 합니다. 원래의 이산해가 쓴 편액은 강당 안에 걸려 있는데 이 글씨가 더 좋아 보입니다. 전혀 김정희의 추사체와는 거리가 먼 글씨라서 헷갈리기 십상입니다. )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체인묘(體仁廟)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묘의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다. 사당 담 밖 왼쪽으로는 경각(經閣)이, 오른쪽으로는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고, 서원 영역 왼쪽으로는 고직사, 포사, 문집판각 등이 있다.
옥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정문에서 차례로 문, 누, 강당, 사당 등이 일직선을 이루는 중심축 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며 공간의 켜를 만들고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면서도 주변 자연 경관과 어울리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 일대의 외부공간은 전체 배치의 구심점이 되어 개별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영역 사이로 스며드는 공간의 엇물림, 그리고 중첩되는 지붕선과 담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은 옥산서원 건축공간의 특성을 읽게 해준다.】
■이언적(1491-1553) 선생
○개설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수회(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소(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는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九經: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양동마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을 잘 간직한 유명한 양반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이곳 양동마을입니다. 하회마을은 이미 여러 차례 다녀온 바 있으나 양동마을은 처음이라서 기대가 크고 오늘 여행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강읍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오늘은 버섯쇠불고기탕입니다. 겨우 회비 2만원을 냈을 뿐인데 이런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으니 익산문화원 아주 좋은 문화센타입니다. 양동마을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듯하여 부리나케 매점에 가서 김계천 선생님과 김호길 선생님 것까지 우비를 사가지고 왔더니만 비가 이내 그쳐버립니다. 김이 샘니다.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해설사를 따라 마을을 두루 구경합니다. 산 안쪽 두 산의 기슭에 위치하여 안강들판 바람을 막아내고 양 언덕의 높은 곳에는 양반들이 잘 지은 집에서 살고 수많은 외거노비들의 집이 곳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약 520여 년 전에 형성된 이 마을은 한국 최대규모의 동성취락으로 원래 양반가옥 220호와 초가 190호가 집중되어 있었고, 마을인구는 2,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100여 호에 약 150여명의 노인들이 살고 있다는데 집집마다 농사짓고 사는 흔적들이 보입니다. 기와집은 원래의 집들로 인정되지만 초가집들은 거의 대부분 똑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일시에 만든 집들입니다. 아주 오래된 초가는 별로 본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수많은 같은 모습의 초가집들을 일시에 지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낙안읍성이나 하회마을도 예외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시는 분들의 자가용들도 대문 앞에 많이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처럼 큰 양반마을이니 과거급제자의 수가 엄청나고 현대에도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양동마을 앞에 있다가 30여 년 전에 水災로 없어진 마을에서 황수관박사(1945-1912)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마을은 아마도 틀림없이 양동마을 양반들의 소작인 마을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황박사는 내 기억으로 사범학교를 나와서 의대로 편입하였고 <신바람 건강법>전도사가 되었으나 아깝게도 4년 전에 급성 패혈증으로 68세의 나이에 타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人命은 在天>이란 말이 맞습니다.
【월성 손씨(월성 孫氏)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두 가문에 의해 형성된 유서 깊은 양반마을이다. 15세기 중반 조선시대 문신 손소(孫昭)가 양동으로 이주하고, 이번(李蕃)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오늘과 같은 양성 씨족마을의 틀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외손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조선중기 중앙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손중돈(孫仲暾)과 사후 동방5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된 성리학자 이언적(李彦迪)이 있다.
마을 북쪽으로는 설창산이, 남쪽에는 약 100m 높이의 성주봉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양동천이 흐른다. 서쪽 산 너머에는 양동마을의 경제적 토대였던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마을 바깥에서는 마을의 전체적인 규모나 가옥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한자로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이라고 전해진다. 즉,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설창산의 산줄기가 물(勿)자 모양으로 내려와 능선을 이루고, 능선이 이루는 세 골짜기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손씨와 이씨의 양 가문은 각각 서로 다른 골짜기에 자신들의 종가와 서당, 정자 건물을 두고 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지형이 높은 곳에 양반가옥이 위치하고 낮은 곳에 외거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듯 형성되어 있다.마을 가옥의 대부분은 ㅁ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은 ㄱ자형, 서당은 ㅡ자형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과거 노비들이 살았던 초가집도 보존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 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에는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줄다리기와 연날리기 등 다양한 전통놀이가 마련되어 있다. 주변 명소로 이언적이 거주하였던 독락당(獨樂堂)과 사후에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 손중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동강서원(東江書院)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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