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을 떠나면서
이번 여행코스는 작년에 서유럽 여행을 마치고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여행사를 선정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작년에 서유럽을 여행할 때 호텔과 식사에서 큰 불편을 겪었으므로 이번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하나투어로 정했다. 가격이 가장 저렴한 이세이브 팩이지만 그래도 하나투어에 믿음을 가지고 정한 것이다. 마포 아파트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우리 아들딸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나갔다. 이번 여행의 일행은 모두 28명이며 인솔자 한 사람이 따른다. 나와 동년배들인 의왕시의 어느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 9명을 포함한 일행 열두 분, 대구에서 오신 70세 전후의 카톨릭 신자 부부 여덟 분, 우리 부부, 이동수 선생님 부부와 김영섭 과장님 부부, 홀로 오신 전선생님과 삼성 박과장님 등이다. 회사에서 나온 박 과장과 더불어 29명이 무려 10박 12일의 길고 긴 대장정에 오른다.
1일(4월 18일 월요일)
비행기는 카타르항공이다. 따라서 중간 기착지는 카타르의 도하가 된다. 직항은 조금 빨리 조금 편하게 가지만 중간 기착지에 내려 보는 것도 나에게는 나름 큰 의미가 있다. 내가 언제 카타르를 찾을 것인가? 카타르항공 859편은 에어버스라는데 2층 구조로 크기도 엄청 크거니와 좌석이 무려 500여석이다. 창가좌석을 요청하여 받았다. 다른 비행기에 비해 좌석이 한결 편안하다. 1시 20분에 이륙한다. 깜깜한 밤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텐진을 지나 베이징 부근을 날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잠이 들었다가 7시 30분쯤 눈을 떠서 보니 작은 도시들이 보인다. 안내화면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도시들로 여겼는데 뒤에 알고 보니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지역이다.
○카타르 도하
10시 30분쯤에 보이는 것은 온통 모래사막들이다. 그리고 사막에 건설된 도시들이 보인다. 나무도 풀도 거의 보이지 않는 사막에 도로를 내고 거주지역을 만들고 집을 짓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자연환경이 매우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풍부한 석유매장량으로 인해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무려 10만 4,700달러라고 한다. 석유가 아니라면 저들은 삶이 어떠했을까? 저들은 요즘 말로 모두 금수저다.
10시간을 날아 11시 30분에 도하에 도착했다. 시차가 6시간이므로 현지시간 5시 30분이 되었다. 2시간 기착 후 300여석의 카타르항공 149편으로 갈아타고 9시 35분에 이륙한다. 역시 창가석을 받았으므로 밖을 구경할 좋은 기회다. 바레인 위를 나르더니 이내 사우디아리비아 위를 나른다. 온통 사막이다. 원형의 오아시스들이 엄청 많이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인공 오아시스들로 여겨졌다. 아라비아 반도를 반쯤 통과할 무렵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보이더니 아카바만이 나타났다. 아카바만의 끝자락은 이스라엘 땅인데 그곳을 날고 있다. 이내 시나이 반도 위를 나르더니 이젠 수에즈만이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부근을 지나 지중해로 나왔다. 너무 어두워서인지 두 도시는 내 눈에 띠지는 않았다. 날이 밝아져서 지중해가 잘 보이고 있다. 판텔라섬과 반도를 지나 곧 튀니지의 튀니스가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상당히 큰 도시며 회색도시로 매우 아름답다. 농경지도 풍부하게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옛 카르타고이다. 페니키아의 식민도시인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와 아주 가깝다.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말이다. B․C 272년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페니키아의 식민도시로 이미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와 지중해지배권을 둘러싸고 쟁투를 벌인다. 이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으로 2차 포에니전쟁에서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지중해를 건너 히스파니아(스페인의 무르시아지방)로 간다. 이미 이전에 아프리카 북부지역과 이베리아의 남부지역은 페니키아의 세력권에 놓여 있었으니 이는 곧 카르타고의 세력권이 되는 것이어서 쉽게 이곳에서 피레네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로마를 괴롭힌다. 그만큼 고대에 지중해를 둘러싼 무역로가 엄청나게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직접 공격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니발은 급히 귀국하게 된다. 이 역사의 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비행기는 튀니지해안을 따라 비행하더니 이내 다시 지중해로 진입한다. 이어 안익태 선생이 살았던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과 이비자 섬 사이를 거쳐 발렌시아 쪽으로 기수를 돌린다.
스페인
이제 스페인의 모습을 내 눈으로 실감하고 있다. 메세타 고원으로 들어서는 듯한데 3분의 1이 산지라더니 정작 숲은 보이지 않고 거의가 바위산들인지 나무들이 크지 못하고 듬성듬성 자라나 있고 밭으로 일굴 수 있는 곳이면 모두 일구어서 올리브나무 등 과수를 심은 모습이 대단한 농업국가라는 생각이 들고 저처럼 온 국토에 나무를 심어 농사를 짓고 살아온 자연환경을 보며 스페인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여 졌다. 농토는 무한하게 넓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결코 아니라서 조금도 부러울 것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고대부터 이베리아 족과 켈트족이 살아온 이베리아는 기원전 200여 년 전부터 5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415년에는 서고트족이 쳐들어와 서고트왕국(415-711)을 세워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751년 호라산 지방에서 봉기한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조(751-1258)가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대체하자 우마이야 가문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분열된 이슬람 왕국들을 통일하고 후 우마이야(후 옴미아드)시대(756-1031)를 열었고, 8대 원수 압둘 라흐만 3세 때 이르러 대외적으로 칼리프국임을 선언하였다.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압둘 라흐만 3세의 손자인 히샴 2세 시기에 이르러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안달루시아는 1031년부터 1085년까지 분쟁과 협력을 계속하다가, 북부 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1085년, 북부 국경 지대의 톨레도 왕국이 기독교권에 넘어가자 여러 군소 이슬람 왕국들은 당시 모로코 지방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던 모라비드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라비드 왕국은 이를 계기로 안달루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재차 몰아내었다. 그 후 모하드 왕국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6왕국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모하드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무슬림들(알 안달루스)은 남쪽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안달루시아 남부 지방만을 지배하다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의 연합군은 1492년 1월 그라나다를 탈환하고 영토 회복을 완수하였다.
오늘날 스페인으로 불리는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 함께 무역을 통해 16세기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고, 남아메리카는 브라질(포르투갈)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페인이 차지하였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세계 8대 선진국이라면 으레 미국, 소련,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들었다. 그런데 작년도 통계를 보면 GDP가 14위이고 1인당 GDP는 세계 33위로 26,328달러로 되어 있어 GDP 11위, 1인당 GDP 27,513달러로 32위인 우리나라에 뒤지고 있다. 아! 자랑스럽기만 내 조국 대한민국! 후진국에서 태어난 내가 선진국 국민이 되어 스페인에 가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이 요즈음 경제적으로 심하게 어려움을 겪는다지만 중국, 멕시코, 인도, 대한민국 같은 신흥 공업국들에게 점차 경제가 뒤쳐지는 것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젠 스페인 하면 관광대국, 축구의 나라라는 이미지만 떠오를 뿐이다. 세계 최강의 팀인 바로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있는 프리메라리가는 세계최고의 프로축구리그이다. 바로셀로나의 메시, 수아레스, 네이마르 등의 광펜인 우리 양드리는 새벽이면 일어나 챔피언스리그를 본다고 밤을 지샌다. 나도 가끔씩 덩달아 레알 마드리드 호날도의 화끈한 드리볼과 슈팅을 본다고 자다가 일어나지만 도중 다시 잠들기 일쑤다.
준결승 2차전에서 어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바이에른 뮌헨을, 오늘 새벽에는 레알 마드리드가 맨체스터 시티를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바로셀로나는 준준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패했다. 그러나 바로셀로나는 프리메라리가(스페인리그)에서는 우승했다. 정말 대단한 팀들이다.
그 밖에 투우, 프랑코 총통, 우리 세대에게는 중학교 시절 단체관람해서 무지하게 감동한 영화《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이 연상되는 이 나라에 TV에서 재작년에 방영한《꽃보다 할배》덕분에 동유럽에 이어 관광 열기가 생겨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했다지만 우리는 그와는 무관하게 그저 계획한 여행순서에 따라 이곳을 찾았다.
3시에 마드리드에 도착했으니 5시간 반이 걸렸다. 시차가 1시간이므로 오후 2시가 됐다. 한국에서 도하까지 10시간 비행에 시차가 6시간인데 도하에서 마드리드까지 무려 5시간 반을 날아왔음에도 시차가 1시간이라니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2시간인데 썸머타임제 시행으로 여름철에만 1시간이라고 하며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되도록 동시간대로 운영하려는 이유도 있지 않나 싶었다.
●마드리드
수도인 마드리드 역시 다른 유럽의 대도시처럼 고층 아파트나 빌딩들이 보이지 않는 편안한 모습이다. 1561년 필리페 2세(1556-1598)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카스티야의 수도)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인구는 도시외곽지역까지 포함한다면 510만 명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곧 바로 투어가 시작되었다. 현지 가이드는 40대 후반의 김선생으로 목소리가 아주 영락없는 아나운서다. 정확한 지식으로 안내하고 있는데 관광철이 되어 연일 쉬지 못하고 일해서 영 피곤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하루가 지나니 차츰 회복되는 듯 보였다.
○스페인 광장
먼저 스페인을 대표하는 규모가 큰 세르반테스 동상이 세워져 있는 스페인 광장에 가다. 광장은 아주 조그마하며 아담하다.
○마요르 광장
필리페 3세(재위1598-1621)가 1619년에 완성한 광장이라는데 전형적인 유럽식 광장이다.
○푸에르타 델 솔
태양의 문이라 불리는 마드리드의 중심광장인 솔광장이다. 특별한 모습은 아니다.
○왕궁
스페인의 왕실 공식 관저이다. 사실 국왕은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궁전인 사르수엘라 궁에 머물고 있다. 서부 유럽을 통틀어서 2,800여 개 이상의 방과 135,000 m²의 크기로 단연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18세기 필리페 5세(재위1700-1746)에 의해 지어졌다.
○프라도미술관
세계 4대 미술관중의 하나로 스페인 회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미술의 걸작 등 유럽의 다양한 회화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1785년 카를로스 3세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게 자연과학박물관의 설계로 의뢰한 것으로 나폴레옹 전쟁 중에 중단되었다가 1819년 완성되어 왕립회화관으로 공개되었다. 왕궁 및 에스코리알에 있는 그림들을 모아 이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 2세가 추방된 뒤 1868년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으며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프란체스코 데 고야, 호세 데 리베라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20여분 걸리는 외곽에 있는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호텔에 들었다. 작년 서유럽 여행의 첫날밤을 파리 원교에 있는 여행자 숙소에서 고생했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2일(4월 19일 화요일)
●꼰수에그라 마을
경치 좋은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의 깔끔한 뷔페식 아침식사는 나를 매우 행복하게 한다. 부드럽고 깔끔한 빵 두 개, 질 좋은 햄 세 조각, 치즈 한 조각, 맛좋은 커피 한잔이면 최고다. 풍차마을로 유명한 꼰수에그라로 이동한다. 마치 만주벌판 같은 드넓은 평야의 연속이다. 이 나라 특산물로 올리브와 함께 유명한 것이 아르간이라고 한다. 마을에 도착하니 비바람이 거세어서 모두들 당황하고 우산을 받아도 소용이 없을 정도다. 우리 양드리 우산도 뒤집혀 고장이 났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인 《돈 키호테》에서 돈 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하고 싸운 하얀 11개의 풍차들이라고 하나 기실 실제로는 부근의 캄포데 크리프타에 있는 10개의 풍차가 주인공이라고 한다. 풍차는 규모가 매우 큰 건물이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지 맨 위층에 풍차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분소가 있다. 네덜란드에서 본 풍차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마을의 방앗간으로 이용되었다니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물레방앗간인데 대단한 규모의 철골구조로 제작된 방앗간의 기계설비가 나를 매우 놀라게 한다.
●톨레도
비 내리는 꼰수에그라 마을을 떠나 톨레도로 향한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스페인 중부의 도시이다. 톨레도 주의 주도로 서고트 왕국(415-711)의 수도였으며 코르도바 칼리파(후우마이야 : 서칼리프, 수도는 코르도바)지배하에 톨레도는 황금시대를 누렸다. 카스티야 왕국(1037-1479)의 수도였고 1492년의 통일이후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가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1561년에 옮겼다. 톨레도로 가는 길에 영화《엘시드》에 나왔다는 로마시대의 성과 다리가 나온다. 엘시드(1043-1099)는 카스티야왕국의 장군으로 영웅이었다. 영화의 장면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급히 사진을 찍었다. 톨레도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상당히 큰 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고 있는데 영화에서 보이는 전투장면은 바로 이 강에서 찍었다고 한다. 산중턱 여기저기에 집들이 들어서서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비오는 골목길을 가이드를 따라 마을 이곳저곳을 실컷 구경하다.
○산토토메교회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교회 입부에 있는 엘 그레꼬의 그림을 감상하였다.
○톨레도 대성당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 대성당은 1226년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어, 가톨릭 군주 시대인 1493년에 완성되었다. 규모도 크지만 얼마나 입체적으로 설계되고 섬세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건축인지 경이로울 따름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성당 중에서는 바티칸대성당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아닌가 싶고 그 아름다움은 구태여 다른 성당들과 견줄 필요 없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니 성당건축예술의 극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 성당의 역대 추기경들의 영정과 사진이 큰 방 가득 걸려 있는 것이 특이한데 추기경님들 다들 인물이 좋으시다.
톨레도 성당안
저녁에 호텔부근에 있는 마을 대형수퍼를 찾아보니 물가가 매우 싸다. 스페인산 맥주는 500cc캔이 500원 정도라서 놀랍다. 맛은 좋다. 그러나 수입맥주는 3천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형 초콜릿이 1300원, 과자 1봉지는 대부분 1500원 내지 2000원이니 우리나라의 반값이다. 그러나 포장은 최 고급수준이니 역시 선진국이다.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으시기도 하지만 오히려 부모님들께서 우리 양드리 걱정을 더 하시므로 와이파이가 잘 되는 호텔에서는 아침에 우리 아들딸과 통화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도록 했다.
3일(4월 20일 수요일)
●살라망카
살라망카로 가는 길은 과달라마 산맥과 끝없는 벌판이다. 목장이 발달하고 밀밭이 펼쳐지기도 한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상수리나무밭도 보았는데 하몽돼지 사료용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두에로 강의 주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켈틱 부족(바떼오스)의 요새들 중 하나로, 고대 로마 시대 이전에 설립되었다. 살라망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1218년 보르고아의 알폰소 9세가 살라망카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곧, 이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의 대학의 하나가 되었다. 나폴레옹군대의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1812년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는, 프랑스군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대포에 의해 짧은 시간동안 대학살된 역사가 있다.
11시 40분에 살라망카에 도착한다. 멀리 강 건너로 성당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시골마을에 성당이 꽤 크다?라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길을 걸어 올라가니 화려한 조각이 눈에 띠는 장엄한 성당의 중앙 정문이 나타난다. 가까운 곳에 또 다른 성당이 보이기도 한다. 대성당 옆 정원에는 헨리모어의 조각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상당한 규모의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조개의 집
15세기에 지어진 기사의 집으로 건물의 외벽에 가리비 모양의 돌이 박혀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가이드가 알려주니 그러려니 하는데 지금은 도서관과 식당으로 운영된다.
○마요르 광장
도시의 중심광장을 마요르 광장이라고 부른다. 시청사가 있는 광장으로 필리페 5세(재위 1700-1746)가 건설한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보다도 규모도 더 큰 듯하며 아름다운 광장에서 잠간의 휴식을 가진다. 비는 거의 멎었다. 점심을 먹고 포르투갈의 파티마로 떠난다.
살라망카 성당
마요르 광장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작은 나라이다. 면적이 우리 대한민국보다 조금 작고 인구도 1천만 정도이며 경제력도 약해서 서부유럽에서는 가장 어려운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 1139년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로 거듭난다.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대항해 시대 탐험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서양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16세기 전반에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전력을 쏟는 한편, 1530년 동 주앙 3세가 브라질의 식민화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은 1480년대부터 거의 100년 동안 '황금기'를 구가했다.
포르투갈 제국은 사상 첫 세계 제국이었고, 1415년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지 제국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제적 중요성은 19세기, 특히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스페인과는 시차가 1시간이다. 우리나라와는 8시간차가 된다.
●파티마 마을
1917년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큰 성모 마리아 성지가 되어 해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1917년 5월 13일과 그 이후 10월까지 매달 젊은 농부의 자녀들인 루시아 두스 산투스와 사촌 프란시스쿠, 자신타 마르투 등 세 어린이가 자신을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인을 보았다고 했다. 10월 13일 파티마에 운집한 수만 명의 군중들은 성모 마리아가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직후 일어난 '기적적인 태양의 현상'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리아의 주교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다.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가 건축되기 시작했고,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교회당의 양 측면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이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다. 깔끔한 사오조스 호텔에 여장을 풀고 6시 30분에 파티마성당으로 향했다. 광장의 규모가 대단히 크고 예배당에서 예배가 열리고 있어 양드리와 함께 참석하여 경건한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저 ?광장이 커서 시원하구나?하는 느낌인데 양드리는 드넓은 광장과 성삼위성당, 예배당 그리고 파티마 성당이 아주 잘 어울리는 건축이라며 대단히 좋아한다. 광장에 대형 십자가가 있는데 아주 잘 형상화 시켰다며 극찬한다. 호텔저녁식사는 닭고기 요리가 나왔는데 삼례토종닭 맛 정도는 된다. 마침 배정받은 방이 특실이어서 응접세트가 있는 고로 낮에 기념품 가게에서 당첨되어 받은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상품으로 준 것이라서 판매하던 질 좋은 고급와인은 아니다. 이 선생님과 김 과장 내외분과 함께 와인과 소주를 몇 잔씩 나누어 마시면서 친밀감을 더 했다.
성삼위성당 광장
○성삼위일체성당
입구에는 초현대식 건물인 성당 같지 않은 성당인 삼위일체 성당이 있다. 마치 종합경기장 같은 원형 건물은 수많은 대형 철제문들이 있고 닫혀 있는데 어느새 양드리는 마침 열려 있는 뒷문으로 들어가 보았다고 한다. 2007년 지어진 세계에서 4번째 큰 성당이라고 하며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예배당
성모마리아의 기적을 기념하는 예배당으로 파티마 성당 광장에 있다. 우리가 예배에 참여한 곳이다.
○파티마 대성당
네오클래식 양식의 성당이다. 1928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실리카식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여 1953년 10월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로사리오 성당이라고도 하는데, 15개의 제단과 1952년 설치된 대형 오르간이 있다. 건물 앞 거대한 광장에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과 64m 높이의 탑이 있다. 성모마리아가 발현한 장소가 대리석 기둥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성당 묘소에 파티마의 기적을 목격했던 당시 세 사람의 무덤이 있으며 파티마의 기적에 관한 내용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있다.
4일(4월 21일 목요일)
●까보다로까
일찍 출발한다며 아침 식사로 도시락을 준비하여 주는데 빵 2개, 음료수 1병, 작은 사과 1개지만 식사가 된다. 파티마를 떠나 한 시간 쯤 달리니 아름다운 마을들이 자주 보인다. 1인당 GDP는 비록 2만 달러가 채 되지 않아 서부유럽에서는 뒤진 나라라지만 선진국은 역시 선진국이다. 주택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마치 그림속의 마을들 같다. 8시 반에 까보다로까에 도착했다. 유럽 최서단의 땅 끝 마을로 해안 절벽 위에서 드넓은 대서양의 절경을 감상한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해남 땅 끝이 아니라 서유럽 최서단 땅 끝 마을이라 하여 관광차 찾으니 의미는 있기는 한데 이른 아침인지라 우리 한국관광차들만 찾았을 뿐이다. 시원한 대서양 바람을 맞으며 기념사진을 많이 찍었다.
유럽의 땅끝
●리스본
10시에 리스본에 도착하다. 항구도시라서 큰 유람선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선 일행 모두 어느 먹자가게 화장실부터 찾는다. 웬 관광객이 이리도 많은 지 건물 안이 마치 시장바닥 같다. 이곳의 명물이라며 가이드님이 에그타르트를 한 개씩을 사준다. 다들 맛있다고 한다. 리스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리스본을 흐르는 강은 타구스강이라는데 항구에는 큰 공원과 벨렘탑이 있다.
○밸렘 탑
해안(강)가에 아름답게 서있는데 인근을 공원화해서 강과 함께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간을 상당히 주어서 여유있게 감상하며 즐겼다.
리스본의 해안 공원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
○제로니모스 수도원
대항해시대의 번영을 표현한 대표적 건물로 세계문화유산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인근에 위치한 벨렘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수도원과 바로 옆에 있는 성당 그리고 수도원 앞 광장의 규모가 대단한데 공사중이라 돌아다니며 볼 수는 없었다. 부근에 엔히크 왕자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발견기념비가 있다.
○로시우 광장
버스는 바닷가에 있는 어느 광장을 지나더니 로시우 광장부근에서 내려 점심을 먹으러 이동한다. 멋지게 보이는 노천식사지만 음식은 야채위주의 싼 음식이다. 화장실을 찾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식당은 제법 수준급이다. 식사 후 로시우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피곤해서 길가의 벤치에 앉아 휴식하면서 광장을 본다. 페드루 4세 광장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간단히 호시우라고도 한다. 광장 중심에는 페드루 4세의 동상이 있다. 12시에 리스본을 출발한다. 리스본의 가장 화려하고 넓은 길을 버스가 달린다. 도로의 양쪽에는 건물들과 가깝게 키가 크고 아름다운 가로수 나무들이 아주 길게 심어져 있는데 어느 도시에서도 잘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파리의 샹델리제 같은 길이라는데 내 눈에는 오히려 더 낭만적인 길이다. 걸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이다. 리스본을 떠나면서 건너가는 길고도 아름다운 다리에서 리스본 항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 보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같기도 하고 이스탄불의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는 다리 같기도 한데 매우 근사하다. 다음 목적지는 세비야이다. 어느 휴게소에서 잠간 쉬는데 주변의 풀꽃들이 참 아름답다. 우리 시골집 뒤 안도 저런 풀꽃으로 가꾸려니 생각한다. 세비야로 가는 길의 포르투갈의 자연경관도 아름답다. 드넓은 평야에는 끝없이 올리브 밭과 포도밭이 이어진다. 6시에 도착하여 강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플라멩고춤 공연을 관람하다. 관람료가 70유로니 무려 9만원인데 유럽인와 중국인 한국인들이 뒤섞여 있다. 중간에 위스키 또는 음료수나 커피 등을 제공한다. 관객들이 즐겁게 관람하면서 열심히 박수치는데 1시간 30분 공연은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시내를 빠져나가는데 대단히 멋있는 건물이 눈에 띈다. 큰 건물이 아닌데도 시내 어느 곳에서도 잘 보일 듯한 건물로 밤에 켜놓은 네온불빛 때문인지 매우 아름답다. 세비야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4성급 호텔에 여장을 풀다. 9시 반에 역시 늦은 닭요리 식사를 하다.
다시 스페인
5일(4월 22일 금요일)
●세비야
과달키비르 강 어귀에 있는 내륙 항구도시이다. 이곳은 문화 중심지로서,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을 지배했을 때의 수도이며, 스페인의 신세계 탐험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곳이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바로 이곳에서 출발한 역사적인 도시다. 그러나 그는 바로셀로나에 도착하므로써 이에 대한 두 도시의 경쟁은 대단하였고 1992년 올림픽을 바로셀로나가 유치하게 됨으로서 이곳에서는 대신 엑스포 박람회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이 나라 스페인에서 콜럼버스가 이처럼 위대한 인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16세기 스페인의 영광은 바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그에 이어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및 식민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해는 되지만, 이제는 빛바랜 영광이기에 그들의 지난 영광된 역사에 대한 강한 향수가 아닌가 보여진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세빌리아는 바로 이곳 세비야이며,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시간여유가 있다하여 9시15분에야 호텔을 나선다. 아참! 엊그제 세비야팀은 유로파컵 결승에 올랐다. 3연패를 바라보는 팀이니 유럽 프로팀에서는 엄청난 팀이지만 상위 3팀에 가려 우리가 잘 몰랐을 뿐이다.
○과달카마루강 망루인 황금의 탑
강변에 서있는 망루라고 하는데 작지만 아름다운 탑이다. 아침인데 벌써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 김 과장이 멋진 포즈를 요구하며 사진을 여러 장 찍어준다. 1220년 이곳을 지배하던 무어인이 원래 두 개의 탑이 있어 쇠사슬로 걸어 외적을 방어했다고 하며 이곳에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는 탑으로 탑 끝부분에 황금 장식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비야의 강변 망루
○스페인 광장과 마리아 루이사 공원
엄청난 건물들과 넓은 대 광장이다. 1929년 아메리카 박람회 때 지은 건물로 스페인의 중심을 이룬 네 나라(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나바라)를 상징하는 각각의 기념 건물과 시청사가 있다. 바로 옆에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붙어 있다. 마리아 루이사 기념공원은 1893년 미리아 루이사 왕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29년 아메리카 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스페인 광장, 고고학 박물관 등 화려하고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많다. 공원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지나면《세빌리아(세비야)의 이발사》의 오페라의 무대가 된 집이 있고 이발사 피가로가 다니던 골목길이 있으며 부근에는 돈 후안(유럽의 전설상의 인물로 호색한의 상징이다) 이 머물던 호텔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가 모두 보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
스페인광장
마리아 루이사 공원
○컬럼버스 기념탑과 싼타크로스 거리, 유대인 거리, 이슬람식 공원
바삐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귀에 꽂은 인터폰을 통해 설명을 들으며 대충 이해하면서 지나간다. 이슬람식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세비야 성당에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을 선다.
골목길 휴식
○세비야 성당과 히랄다 탑
20여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들어선 세비야 대성당은 스페인의 세비야에 위치해 있는 가장 큰 대성당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관이 있다.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을 부수고 지은 것이며 1402년부터 100여 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슬람 건축과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당 내부는 그리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전시된 화려한 금은 세공품을 볼 수 있다.
사방 14m의 4각형 탑인 히랄다 탑은 이슬람 교도들이 12세기 말에 세웠다. 그 탑 위에 그리스도 교도들은 예배 시간을 알리는 28개의 종을 달았고, 그 위에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
탑의 이름도 풍향계(Giralda)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해서 총 98m의 탑이 1565~68년에 완성되었다. 처음 그리스도 교도들은 탑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반해 차마 부수지 못했다고 한다. 히랄다는 〈돈다〉라는 뜻이다. 히랄타 탑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들지는 않지만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찾아온 관광객이 많아 어깨를 부딪치면서 오르고 내려야 한다. 정상에 오르니 세비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성당의 지붕들이 저 아래 내려다보인다. 이제 아프리카로 건너기 위해 버스는 타리파로 향한다. 7시가 되니 바다가 나타난다.
저 유명한 지브롤터 해협이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해협으로 지중해의 관문이라 할까? 바다를 보고는 모두들 환호성이다. 해협의 저 건너에 가까이 아프리카가 보이니 신기하기도 하다. 이곳은 유럽인데 아프리카 대륙이 마치 강 건너 저편인 듯 눈앞에 보이고 있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아라비아의 이슬람 세력(후 옴미아드, 즉 서 칼리프)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던 역사였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양체와 순복이 한의 서울인 장안에서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조선을 침공한 사실보다도 더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은 그 만큼 아라비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라. 아라비아에서 이집트를 거치고 지중해안을 따라 모로코에 오게 되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로 건너가는 건 마치 식은 죽 먹기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타리파
타리파(Tarifa)는 인구가 2만 여명이나 되는 항구인데 도시 모습을 제대로 구경조차 못했다. 버스가 곧바로 항구로 진입하여 탕헤르로 가는 배를 탔다. 여행가방을 배로 옮기고 짐칸에 넣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2시간 연착하여 8시에 출발한다.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일행이 함께 일사불란하게 내리기 위해 무려 한 시간 이상을 줄을 서서 내리기만을 기다리니 참 힘든 일이었다. 스페인 중년신사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기에 코리아라고 하니 “오! 삼성! 엘지!”하면 반가워 한다. 또 모로코 젊은 아버지와 초등학생 아들이 함께 앉아 있다가 같은 질문을 하기에 코리아라고 해주니 아이가 잘 모르는 듯 하자 아이 아버지는 아이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네 핸드폰을 만든 나라야”하고 알려준다. 갤럭시 안가진 사람없고 삼성 모르는 사람 없는가 보다. 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재벌들의 횡포를 이대로 눈감아 주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대기업의 역할과 공헌을 무시하기까지는 더욱 안되는 일이다. 문제는 경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벌들의 지나친 사업과 시장의 영역확대와 탈세, 외화유출 등 부정행위들은 저대로 가볍게 처벌하도록 둘 수 만은 없다. 언젠가 국민들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법으로 단호히 처단할 것은 처단해야 한다. 어느 대통령이 나서서 국가 경제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불량 재벌들의 윤리를 바로잡고 경영영역의 한계를 확실하게 구분지어 줄 것인가?
●지브롤타 해협
스페인 남단과 아프리카 북서단 사이에 있으며 길이가 58㎞이다. 마로키 곶과 키레스 곶 사이에서는 너비가 13㎞까지 좁아진다. 가까이에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영국의 넬슨제독이 이끄는 군대가 싸운 유명한 트라팔가르가 있다. 전략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남부 유럽, 북부 아프리카, 아시아 서부지역의 선박 항로로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모로코
모로코는 독립을 원하여 자치적으로 통치되는 서사하라 지역을 제외하고도 46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인구가 3300만이나 되는 큰 나라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가 넘어 그리 가난한 나라는 아니다. 아랍-베르베르인들이 사는 나라로 종교는 당연 이슬람교이다. 이곳을 발판으로 아랍의 이슬람교는 스페인으로 밀고 들어가 스페인의 800여년에 걸친 오랜 이슬람 역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은 680년 세우타(Ceuta)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711년경에 무어인(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은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탕헤르
10시에 탕헤르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이 함께 서로 떨어지지 않고 내리기 위해 무려 한 시간이나 배 안에서도 줄을 서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차가 있어 11시가 되었다. 1유로는 10디르함이라고 한다. 버스를 50여분 달려 알 까미야 해안가 호텔에 여장을 푼다. 탕헤르 시는 주요항구이며 무역 중심지로 지브롤터 해협에 맞닿아있으며, 스페인 남단에서 27㎞ 떨어져 있다. 관광 중심지일 뿐 아니라 건축업, 어업, 방직업 등이 발달해 있다.
6일(4월 23일 토요일)
●패스
아침에 일어나보니 알 까미야호텔은 비록 시골 바닷가에 있지만 정원이 아름답고 풀장까지 있는 썩 괜찮은 호텔이다. 오늘 패스를 찾고 수도인 리바트를 거쳐 카사블랑카까지 가야한다며 아침 6시 반에 출발한다. 호텔 가까이 보이는 마을의 규모도 상당히 큰 모양으로 작은 도시인 듯하다. 패스로 가는 길은 넓은 밭들이 이어지는데 보리밭들과 우산소나무도 보이고 선인장으로 밭의 담을 친 경우가 자주 보인다. 아르간 나무도 보이는데 미용과 식용에 쓰인다고 가이드가 또 설명해준다. 양드리는 이미 아르간 오일을 샀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 이름 모를 들꽃들도 밭을 이룬다. 어느 휴게소 뒤편에는 끝없이 넓은 목장도 있고 목장길이 한가롭기도 하다. 11시에 패스에 있는 왕궁에 도착한다.
패스는 모로코에 있는 4개의 황제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곳은 원래 페스 강 양안에 세워졌는데, 789년경에 이드리스 1세가 동쪽 제방에, 809년경에 이드리스 2세가 서쪽 제방에 세웠다. 이 두 부분은 11세기 알모라비데조 의해 하나가 되어 이슬람 도시로 발전했다.
14세기 중엽 마린 왕조 치하에서 학문·상업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맞았고, 그 후로도 종교 중심지로서의 탁월성을 유지해왔다. 1912년 3월 30일에 체결된 페스 조약으로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섭정정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도시는 올리브 숲과 과수원으로 덮인 낮은 언덕으로 거의 완전히 둘러싸여 있으며, 측면에 돌탑들이 있는 페스의 고대 성가퀴가 페스엘발리로 알려진 이 옛 도시를 부분적으로 두르고 있다.
○왕궁
13세기에 마린 왕조가 세운 이 도시의 신 페스 지구(페스 엘자디드)에 왕궁과 13세기 다색 채색의 미나레트로 유명한 대사원이 있다. 왕궁에 다다르기 전 수많은 군인들이 50m 간격으로 지키는 곳이 왕궁이거니 했는데 정작 왕궁에는 두어 명의 병사들이 한가롭게 지킬 뿐이다. 왕궁은 패스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로 황금색과 녹색타일로 되어 있다. 왕이 사는 곳이 아니지만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가 볼 수 없는데 왕궁 앞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어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는다.
○메디나(구 시가지)의 미로
11시 반에 구시가지의 미로 길을 구경하기 위해 들어섰다. 사랑의 미로가 아니라 진짜 세계 최고의 미로라고 불린다. 9,000여개의 미로가 있다. ld처럼 좁은 길 속에 벼라별 가게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이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가죽염색공장
12시쯤에는 가죽가계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염색공장을 바라다본다. 이미 TV에서 구경한 바로 그 집이라서 크게 신기할 것은 전혀 없다. 박하 잎을 물어서인지 냄새도 그리 느끼지 못하지만 어쩌면 공장이 상당히 한가로워서인지도 모른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다. 천년 이상 내려온 옛 방식으로 한다. 원단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비둘기 똥에 손을 담가 무두질을 한다고 한다. 1시에 드디어 식당에 들어서는데 놀랍다. 이 좁은 골목 속에 웬 궁전 같은 식당이 있으니 말이다. 천정은 높고 밖은 상당히 더운데도 식당 안은 시원하고 청정하다. 우리가 마치 중세 어느 이슬람나라의 작은 궁궐에 들어온 것 같다. 이 미로 같은 좁은 길목 속에 있는 답답할 것 같은 집안에서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패스를 떠나면서 보니 도시 밖은 꽤나 지저분하며 흙산이어서 나무들도 별로 없다. 그러나 산 주위는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수도인 리바트로 향한다.
●라바트
리바트에 가까워져 가니 어려운 나라지만 농촌도 아름답고 주택건설들이 한창이다. 수도인 리바트는 역시 공원이 많고 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어 깨끗하고 아름답다. 시내를 걸어 다니는 시민들의 모습도 깔끔하고 여유들이 있어 보인다. 라바트의 인구수는 100만 명이 넘는 모로코 제2의 도시이다.
○모로코 왕궁
버스는 먼저 4시 50분에 왕궁으로 들어선다. 왕궁이라는데 아무런 제재도 없이 무사통과한다. 나는 아직 청와대도 들어가 본 일이 없는데 아프리카의 모로코 왕궁에 버스로 마음대로 들어가니 재미있는 일이다. 이곳은 현 국왕의 왕궁으로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는 호화롭고 장대한 왕궁이다.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
○모하메드 5세 묘
현 국왕인 핫산 왕의 할아버지인 모하메드(1956년 독립, 독립영웅)의 영묘이다. 입구에는 말을 탄 병사들이 있어 분위기를 잡는데 관광객 참 많기도 하다. 외국인들뿐 만 아니라 이곳 시민들이 가족단위로 특히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데리고 나와 놀기도 한다. 광장에는 수많은 돌기둥들이 서있는데 모스크를 짓기 위한 미완성 기초석들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1960년대에 지었다는 영묘에 입장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저 광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양새였다.
○핫산탑
모하메드 5세 영묘와 함께 있는 탑이다. 12세기말 알 모하드 왕조의 제 3대왕 야쿤 엘 만수르가 지브롤터 해협 건너 스페인 원정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이슬람 최대 높이의 붉은 미나렛(첨탑)을 세울 목적으로 시작했으나 착공 4년째 되는 해인 1199년에 왕이 사망하여서 높이 44m에서 중단되었다. 지금도 마치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있어 가까이 가지 않았다.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대서양에 위치한 모로코의 최대 도시이다. 도시 이름은 스페인어로 《하얀 집》을 뜻한다.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아름다운 노래인 비키의 《화이트 하우스》와 이 도시를 연결시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노래의 가사를 보면 그저 어느 소녀가 살던 추억속의 하얀 집이었으니 서로 특별한 관계는 없는 것이다.
약 33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의 주요한 항구일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마그레브(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내에서도 가장 큰 도시이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 기준으로는 여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모로코의 실제 수도는 라바트이지만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는 카사블랑카로 여겨진다. 카사블랑카 항구는 인공 항구 중에서 마그레브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한다.
○핫산 2세 메스키다 사원
7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대서양 바닷가에 있는 이 사원은 규모도 엄청나거니와 바닷가에 있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일품이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카사블랑카 최고의 명소라 할 만한 핫산 모스크로 높이가 200미터이며,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가 가능하다. 세계 세 번째 규모로 큰 모로코 사원 건축 양식과 전통문양(아라베스크)의 집대성이 이루어진 사원이다.
메스키다 사원
○모하메드 5세 광장
메스키다 사원에서 호텔로 이동하는 중에 이 광장을 지난다. 가이드가 ?내려서 보실거냐??는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아니요?라 합창한다. 오늘 매우 피곤하다. 버스에서 그냥 광장임을 확인만 하고 버스는 달린다. 시내 중심지의 또 다른 큰 광장에서 밴드공연이 요란하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그 앞에 모여 있고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가보다. 이슬람교를 믿는 이 모로코 젊은이들도 역시 노래는 팝을 좋아하고 부른다. 그들은 젊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오움 팔라스 호텔에 묵게 되었다. 원래 3성급에서 자게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변경되어 오히려 4성급 호텔에서 자게 되었다면서 가이드님의 생색이 크다.
7일(4월 24일 일요일)
아침 6시에 탕헤르로 이동을 시작한다. 4시간 만에 그저께 묵었던 반가운 알 카미야 호텔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먹고 마침 시간여유가 있어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양드리와 나는 신발을 벗고 대서양 물에 발을 넣는다. 가만있자!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에는 이미 발을 담가보았는데 대서양은 처음인가? 모로코에 오던 그대로 유람선을 타고 타리파로 이동한 뒤 다시 스페인 여행을 계속하게 된다. 오던 때와는 달리 이미 올 때 학습해서인지 선실에서 김과장과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자유스럽게 보내며 승선도 하선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탕헤르는 생각보다 번화하고 타리파는 항구 뒤편에 큰 성채가 보인다. 타리파 시내를 통과하는데 비교적 깨끗하고 가로수도 잘 정비되어 아름답다.
선실에서
또 다시 스페인
●미하스 마을
4시에 탕헤르를 떠나 두 시간을 달려 미하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스페인의 자연을 감상한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의 산과 들이 매우 아름답고 어디가나 보이는 픙력기와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우리가 여행하는 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이 바로 이곳 말라가 지역이 아닌가 여겨졌다. 미하스 마을은 하얀 마을이다.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 서쪽 산기슭 마을로 붉은 기와지붕과 햇빛을 반사시키기 위한 하얀 회벽이 칠해져 있고 예쁜 격자무늬 창틀과 아기자기한 골목이 이어진다. 주차장에서 내린 뒤 가이드는 약 20여 분간 주변에서 구경하다 모이십사 했으나 나는 작년 남프랑스의 에즈마을이 생각이 나서 기념품 상점에 있는 양드리를 부리나케 불러 미하스 마을 안쪽 길을 급히 찾아 나섰다. 다행이 아기자기한 미하스 마을의 아름다운 골목 풍경을 세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젊은 관광객들은 카페에서 맥주 한잔씩을 마시는 여유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는 또 빨리 내려가야만 했다. 일행중 우리 이외에는 누구도 미하스 마을의 안쪽 골목길을 보지 못하고 나온다.
미하스 마을
●말라가
피카소가 태어난 곳이다. 말라가는 스페인 남부의 항구 도시로 지중해를 마주하고 있다. 말라가 주의 주도이며 위성 도시의 인구를 합치면 60만 명에 달하는데 스페인의 대도시로는 그 규모가 6위에 해당한다. 말라가는 과달메디나 강의 왼편 둑에 자리하는데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므로 온화하고 살기 좋은 기후가 나타난다. 하늘이 파랗고 넓은 항만을 끼고 있어 흔히 나폴리에 비교되기도 한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말라가 산기슭 큰 로타리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다. 저녁식사 후 호텔 밖에 나오니 8시 반인데도 아직 해가 남아 하늘이 푸르다. 이동수 선생님 내외분도 산책하러 나오셨다.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찾는 도시면 저리도 비행기 오르고 내리는 게 그치지 않고 줄을 서나? 그저 1-2분이 안되어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저 아래 시내의 비행장으로 연달아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8일(4월 25일 월요일)
●론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주인 말라가 주의 산속에 있는 도시이다. 8시에 말라가를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만에 산속에 있는 작은 관광도시인 론다에 도착한다.
○봉세수도원과 협곡
작고 편안한 봉세수도원을 지나 공원에 들어서니 협곡이 나온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여서 고공공포증이 있는 나는 함부로 밖을 내다보지는 못한다. 삼성 이과장이 우리 내외 사진을 마치 작가처럼 연속하여 찍어 대는데 나중에 보니 10장이 넘고 대부분 사진이 정말 멋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인가?
협곡이 있는 공원
○투우장
이 투우장은 1784년에 지어진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스페인에서도 실제 투우경기는 자주하지 않아 관람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이곳은 오랜 경기장으로서 관광객들에게 투우장 모습과 전시관을 통해 유물들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누에보 다리
다리 건축은 1735년 펠리페 5세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8개월 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공사 중에 무너져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다리의 높이는 98m이며, 타호 협곡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다. 얼마나 높은지 다리 아래를 보면 아찔하다.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이 방은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쓴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물었다고 하며 영화를 이곳 다리에서도 촬영하였다고 한다. 저 만치에 헤밍웨이가 머물었다는 집이 있어 찾아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감자와 돼지고기 그리고 빵이 있는 이른 점심을 먹고 코르도바로 출발한다. 가는 길은 온통 올리브 바다였다.
헤밍웨이가 살던 집 가는 길
●코르도바
코르도바 시는 코르도바 주의 주도이다.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있으며 고대 로마 시대 때부터 도시가 형성됐다. 인구 40여만 정도의 도시이다. 오늘날 코르도바는 대도시는 아니지만 오래된 유적이 산재하고 있는 문화의 산실이다. 오래된 구도심에는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나 코르도바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때에 수도의 구실을 했으므로 이슬람과 스페인 후대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히스파니아 베티카 속주의 주도였다. 지금도 로마 신전과 다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후에는 서고트 왕국에 지배하에 들어가고, 6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된 적도 있다.
711년,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다. 756년에 성립된 후우마이야 왕조(서 칼리프)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는데, 그 중심지는 메스키타(모스크)였다. 10세기에 아브드 아르라흐만 3세와 알 하캄 2세의 치세 때가 전성기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40만에서 100만 권에 이른다는 장서를 자랑하는 대도서관이 세워져 수많은 학자들이 활약하여, 톨레도와 함께 서방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손꼽혔다. 크리스트교 세력에 의한 레콩키스타가 전개됨에 따라, 1236년 6월 29일,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에게 정복당했다. 1492년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자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소되어, 메스키타도 가톨릭교회로 개조되었다. 바로 코르도바 성당을 말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코르도바 출신이다.
○유대인 거리등 구시가지 관광
코르도바 대성당에 들어가기 전, 꽃의 길과 유대인의 길을 찾아 나섰다.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꽃이 많이 걸려 있는 예쁜 골목 거리이다. 1315년에 지어진 시나고그 교회가 있다.
○코르도바 대성당
남북 180m, 동서 130m의 거대한 이슬람 사원 즉 메스키타이다. 서칼리프시대에 지어진 거대한 메스키타이지만 스페인이 정복하자 르네상스양식을 중앙에 지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다. 성당 내부의 하층에서는 이슬람식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전시되고 있다. 원래는 모스크이지만 현재 카톨릭 성당으로 이용되는 대표적인 성당이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사원은 동로마 시대에 본래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그 뒤 이슬람이 정복하여 오늘날 모스크로 이용되고 있으니 매우 대조적이다. 성당에서 나와 성당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고 있노라니 수학여행을 온 남녀 중학생들이 물장난들을 치며 행복하게 놀고 있다. 저리들 예쁜 아이들인데 우리나라 중학생들은 학교가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행동이 건전하고 바르지 못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부 학생들 때문에 생활지도 문제로 무척이나 피곤하고 힘든 시절이지만 그래도 공부도 열심히 하고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대다수 착하고 예쁜 학생들과 모두 함께 행복한 학교생활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선생님들부터 아이들에게 공부보다는 아이들을 무조건 사랑해주고 함께 동행하며, 아름다운 감성과 인성을 강조하고 모든 아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면 우리도 행복한 중학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당을 빠져 나오면서 코르도바를 상징하는 형상의 조형물이 특이하고 다리를 건너오니 큰 성루가 남아있는데 로마지배시대의 역사적 유물이라고 한다.
●그라나다
《그라나다》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1970년대 말 우리 대학의 총장님이 타시던 차가 그라나다였기 때문임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현대가 고급차로 포드의 그라나다를 수입하여 조립한 차인데 당시 가격이 무려 2140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 초임 월급이 10만원이 안되었으니 오늘 날 가격으로 치면 2억 내지 3억 원 정도 되겠다. 그런데도 당시 구입자가 줄을 섰다고 하니 국민소득이 1,500달러였는데도 그만큼 부자들은 많았다는 것이겠다. 공산주의가 아닌 한 가난한 나라에도 당연히 부자들은 있는 법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법칙이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그라나다 주의 주도이다.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마지막 근거지였으나, 1492년 이사벨 여왕에 의해 결국 함락되었으며, 이로서 레콩키스타(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가 완료되었다.
4시 반에 코르도바를 출발하여 거의 2시간 반을 달려 그라나다에 도착하여 알 함브라 궁전 앞에 있는 너무나 예쁜 2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궁궐이 어디에 붙었는지 모르나 유명한 알 함브라 궁전 앞 울창한 숲속의 언덕위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아주 좋다. 궁전건물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 일부러 8시 입장권을 끊었기 때문이라 한다. 별도로 입장료를 내지 않고 궁정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가이드가 생색을 많이 낸다.
○헤메랄리페 정원
알 함브라 궁전에 입장하고는 궁궐건물에 앞서 그라나다왕의 여름별궁이었다는 정원으로 들어선다. 아주 잘 정돈된 이슬람식 정원으로 아기자기한 모습인데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연못이 잘 가꾸어져 있다. 건너편에는 왕국이 보이고 있다. 양드리 무지하게 좋아하면 사진을 자꾸 직어댄다.
알 함브라 궁전의 정원에서
○알 함브라 궁전(나자리에 궁전)
그라나다로 오는 도중에 가이드가 유명한 기타 곡인 파레가의《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알 함브라 궁전에서의 데이트의 추억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젊은 시절에 이 연주를 들으면서 상상했던 그 상상속의 알 함브라에 왔다. 찾아와보니 노래는 궁궐건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덕위에 있는 이 궁전 모두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라나다를 한눈으로 바라보는 구릉 위에 세운 주위 3.5km의 이슬람시대의 성보 가운데 매우 좁은 부지에 세워졌다.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에 창립하기 시작하여 역대의 증축과 개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현재 이 궁전의 대부분은 14세기 때의 것이다.
대리석 · 타일 · 채색 옻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장식의 방이 2개의 커다란 파티오(중앙정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천장과 벽면은 아라베스크의 아름다움으로 알려진 ‘두 자매의 방’을 비롯해 주위의 각 실과 함께 매력이 넘친다. 변화가 많은 아치, 섬세한 기둥, 벽면 장식 등 모두가 정교하고 치밀하여 이슬람 미술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다. 색깔의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한 문양의 아름다움이다.
이 궁전은 에스파냐가 그리스도교도의 손으로 빼앗은 뒤에도 정중하게 보존되었고, 18세기에 한때 황폐되기도 하였으나 19세기 이후에 복원, 완전하게 보전하게 되었다.
궁궐을 나와 카를로스 1세가 자주 와서 머물었다는 궁궐에 들어갔다. 신성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왕위에 관여하게 됨에 따라 카를 5세(1500-1550)는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1세가 된다. 이 집은 스페인 왕인 카를 5세가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이곳에 자주 거주하였다는 것인데 마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인상을 준다. 가이드는 카를로스 1세를 찰스라고 부르며 웃긴다.
내 핸드폰은 궁궐 입장 때부터 바데리가 나가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는데 양드리마저 마지막 날 그동안 찍어 놓은 모든 사진이 실수로 삭제되는 바람에 알 함브라 궁전 내부에서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9일(4월 26일 화요일)
○아랍인 마을이었던 알바이신 지역
그라나다의 변두리 호텔이지만 아침식사는 최고다. 햄, 소세지, 베이컨, 빵, 키위, 수박, 파인애플 등 풍성한 식사를 한다. 9시 반에 알바이신 지역의 언덕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전망대에 도착하니 단체 여행으로 온 이곳의 대학생들이 요란스레 떠들며 가득하다. 저 멀리 언덕에는 알 함브라 궁전이 보이고 있다. 거리를 걸으면서 마을 이곳저곳을 구경했는데 관광지라서인지 아주 아주 깨끗하고 인도에 깔아놓은 벽돌 하나도 정성들여 예쁘게 깔았다. 예전 이슬람 시대에 주로 아랍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며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11시에 그라나다의 중심지인 듯한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는다. 다른 여행사 한국인들도 우리 뒤를 따른다. 시간 여유가 있어 식당 앞 공원에서 쉬면서 사진도 찍다. 12시에 출발하여 무려 5시간을 달려야 목적지인 발렌시아에 도착한다. 오늘도 멀고먼 버스여행이 시작되었다. 도시를 빠져 나가면서 산기슭 곳곳에 집시들이 산다는 동굴들이 있다. 실제로 집시들이 살고 있다고 하며 코르도바 대성당 앞에서는 젊은 집시여인이 어린 아이를 안고 돈을 구걸하는 모습도 보았는데 보기에 영 좋지 않다. 그들은 그저 아이가 생기면 낳고 구걸하며 사는 것을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아간다고 한다. 발렌시아가는 길에 너무나 가뭄에 황폐한 곳이 있어 지도를 찾아보니 무르시아주이다. 황무지로 변하는 듯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판이 애처롭다. 연 강수량이 300mm 정도라고 하며 가뭄에 강한 오렌지나 석류를 재배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메마른 지역은 누가 주지사나 시장에 나서서 일을 하는 것일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난다. 혹시 올해에만 저런 가뭄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련만.
●발렌시아
발렌시아로 가는 중에 라 파라다 휴게실에 들렀는데 도시도 아닌 시골 길가에 벤츠대리점이 있어 들여다보니 벤츠 클라스C가 5만 2천유로(6천 800만원), 클라스 GLA가 4만 2600유로(5천 5백 5십만 원)다. 인터넷을 찾으니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더 싸다. 아무튼 준중형 벤츠가 생각보다는 그리 비싸지는 않다. 나는 아직도 12년 된 SM5를 타고 있지만 아무런 불만이 없는 것을 보면 남들과 뭔가 다르다. 15년은 타고 난 후 새 차를 사려한다. 발렌시아에 가까워지니 그래도 비가 어느 정도는 온 지역인지 자연 풍경이 무르시아보다는 훨씬 낫다. 오렌지, 뽕나무를 재배하고 있고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쌀농사도 짓는다고 한다. 발렌시아는 발렌시아 주의 주도이다. 도시 인구는 약 80만 명으로 제지·담배·식료품 공업의 중심지이며 마요르카 섬과 함께 보양·관광지로 되어 있다. 중세 스페인의 전설적 인물 엘 시드가 마지막으로 지배한 곳이다. 6시 20분에 도착했으니 예정보다도 더 걸렸다.
○시청사 및 시청광장
먼저 시내중심에 있는 시청광장에 들러 시청사를 보다. 대도시가 아닌데 건물들이 고풍스럽고 풍요가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지나다니고 있어 마치 세종로에 온 것 같다.
○발렌시아 대성당
한참을 걸어서 발렌시아 대성당을 찾았다. 안에 들어가 보니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오히려 지금까지 본 성당에 비해서는 소박하다. 이제 스페인에서는 카톨릭 신자들이 아주 적고 또 신자라 해도 주일날 예배를 보러 오지는 않는 실정이라서 수입이 없으므로 관광객들의 입장료를 받아 겨우 건물을 유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를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고 또 한국의 카톨릭은 오히려 신자가 증가하고 있다. 시간이 허락되어 뒷골목을 찾아 구경하다가 와인 한 병을 사려고 찾아다녔으나 정작 수퍼는 찾지 못하고 어느 공방에 들러 양드리는 접시 한 점을 구입하였다.
대성당 앞
○예술과 과학의 도시
7시 반이 되었는데 일정에 없는 건축박람회장으로 간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아니다! 발렌시아가 야심차게 기획한 사업이라는데 다양한 건축술을 통해 세워진 많은 건물들이 정말 인공호수 주변에 아름답게 펼쳐져 세워져 있고 그 아름다움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원래 일정에는 없으나 누구나 좋아하고 볼만한 곳이라서 가이드가 일정에 넣어 찾은 것이라고 하니 《不敢請 이언정 固所願》이라, 지극히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스페인의 성당투어를 온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설명을 찾아본다.
《고도 발렌시아에 첨단 건축술이 동원된 복합문화예술단지가 조성되어 건축계의 관심은 물론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이 넘쳐난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 복합문화공간에는 여러 채의 문화예술과 과학기술 관련 시설들이 일관된 디자인 컨셉과 건축 형식을 통해 조화롭고 아름답게 모여 있다. 마치 2천년 고도에서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의 미래도시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한 색다른 도시풍경이 조성된 셈이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는 발렌시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투리아 강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강은 오래 전부터 강의 물줄기가 끊어지고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메말라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다가 시 정부의 주도로 대대적인 개발이 이뤄지게 된다. 이 개발계획에 따라 10㎞에 이르는 투리아 강 유역을 대규모 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그 끝에 바로 예술과 과학의 도시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이강의 하류 지점, 집단 주거지가 들어선 신도시에 조성된 ‘예술과 과학의 도시’는 1,800m 길이로 길게 펼쳐진 35만㎡의 터 위에 오페라 하우스, 국제회의장 겸 천체관측관, 과학박물관, 해양박물관, 옥외공원 등이 인공으로 조성한 수변 공간위에 떠 있는 듯 무리지어 군집을 이루며 세워져 있다.
이 복합단지는 이미 말라버린 강에 물줄기를 재생시키는 대신 버려진 지형을 이용해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는 새로운 땅으로 재활용한 것이 주목된다. 이 프로젝트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이 도시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이며 또 조각가이기도 한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의 설계로 완성된 단지라는 것이다. 칼라트라바는 기하학적 단순미를 통한 역동성 있는 건축을 잘 표현해내는 건축가로 근대 건축의 대표 건축가 르 코르뷔제의 조형적 표현의지를 시대문명의 기술과 과학으로 조화롭게 반영하며 독특한 형태를 양산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 프로젝트도 비록 ‘방치된’ 자연환경에 인공적 환경을 덧붙이는 작업처럼 보지만 주변 지형의 맥락을 살리고 모티프를 찾아 조화를 이룬 건축가의 안목이 녹아 있다. 그런 이치를 염두에 두고 ‘예술과 과학의 도시’가 발산하는 풍경을 보면, 지중해를 상징하는 수면에 비치는 동물형상의 구조물에서 다양한 영감을 발견하게 된다. 또 과학박물관은 거대한 공룡의 골격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면에 비치는 천체관측관 건물은 하늘을 관찰하는 인간의 눈처럼 보이는 등 대부분의 생물학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98년에 개관한 이 천체관측관은 길이 1,300미터, 폭 200미터의 인공호수 위에 세워져 마치 거대한 조개껍질과도 같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 건물에는 900㎡ 크기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4개 국어로 동시통역이 가능한 대강당이 있어 국제회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넓이 56m, 높이 110m 규모의 투명 콘크리트 셀 아래 떠 있는 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메탈 구조물도 이채롭다. 전면의 유리 부분은 접히면서 열리는 첨단 기술이 적용되기도 했다. 이밖에 과학박물관, 음악당, 또 스틸 부재가 여러 켜의 포물선을 그리는 지붕구조가 돋보이는 해양박물관이 있다. 2003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연구와 체험학습, 교육 그리고 레저 기능을 수용하는 바다를 주제로 한 다목적 박물관으로 유럽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는 이름 그대로 예술과 과학을 위한 공간인데,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이 함께 있다는 것을 도식적인 접목으로 보거나 역사성과 장소성의 부조화를 지적하는 시선도 없지는 않지만, 요즘 회자되는 통섭과 융합의 시대정신을 생각하면 역사도시 발렌시아의 선택은 매우 선구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새로움은 주변 자연지형과 도시 맥락에서 발견되는 모티프가 단지조성의 주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내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론다2 호텔에 들었다. 식사가 좋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의 인공호수에서
10일(4월 27일 수요일)
●바르셀로나
8시에 발렌시아를 출발했다. 오늘도 바르셀로나까지 5시간이 걸리는 강행군이다. 지중해안을 따라 버스는 달린다. 타라고사 부근에 이르니 산과 숲이 많이 보인다. 정확하게 한 시간 빨리 12시에 도착한다. 항구에는 요트들이 많이 보인다. 선진국 상류층들이 즐기는 스포츠인데 우리나라도 항구도시에서는 많이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항구의 식당에서 빠에야를 먹는다. 빠에야는 밥과 오징어 홍합 비빔밥으로 먹는 식사다. 점심을 먹고는 항구 중앙광장에 세워진 어마어마한 콜럼버스 동상을 흉내 내며 오른손을 높이 들고 사진들을 찍는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부터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과 접경지역을 아우르는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인구는 약 200만 정도라고 한다. 바르셀로나가 유명한 것은 1992년 하계 올림픽이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정귀우 선생은 필드하키 임원으로 올림픽에 다녀왔는데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화가 호안 미로와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1289년에 시작해 15세기말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는 6세기에 지은 바실리카가 있으며 이밖에도 산타마리아 델마르 교회를 비롯한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루냐 지방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하며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마치 독립국가처럼 자신들의 기를 가지고 있고 중앙정부로부터 반독립적이며 강한 자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들의 독립에는 절대 반대하는 상황이다.
○까탈루니아 광장
큰 광장이고 사람들이 엄청나다. 광장 부근에 차를 세우고 내려준다. 먼저 옷가게인《자라》에 들어가서 양드리가 6천 원짜리 T셔츠와 2만 5천 원짜리 원피스를 산다. 정말 값싸고 예쁘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자라매장이 있지만 이곳이 훨씬 싸다고 한다. 이 회사의 사장이 스페인 최고 부자이며 세계적 갑부라 한다.
○람블라스 거리
까탈루니아 광장에서 바로 통하는 바르셀로나 최대의 번화가 거리다. 마치 사람구경하는 것 같은데 한참을 걸어 다니며 거리를 감상하고 모이는 장소에서 양드리가 깜빡 착각하는 바람에 광장 너머로 건너가게 되었다가 기억을 더듬어 급히 다시 모임장소를 찾았다. 하마터면 일행에게 창피당할 뻔(? )했다. 구 시가지에 위치하며 시내 중심에서 임해 지역까지 이어지며 길이 1.2km의 가로수길이다.
○성 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버스에서 내리니 가랑비가 내린다. 아! 저 유명한 가우디 성당이다. 그냥 대로변에 접해 서 있는 그림으로만 보던 가우디의 성당이다.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입장하고 있다.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으로 1884년에 착공한 이 건물은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공사가 진행중이며, 완성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계속 작업을 하고 있으며 어쩌면 일부러 완공을 늦추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가우디의 설계로 지어지지만 실제 그가 작업을 지휘한 곳은 전면부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주제로 한 옥수수 모양의 탑 4개가 유명하다. 4개의 탑(높이 107m)은 그 전체 곡선도 볼 만하지만 그리스도의 강림을 표현해 놓은 생동감 넘치는 조각들이 더욱 눈길을 끈다. 큰 성당들은 대부분 뛰어난 건축미와 내부 장식이 아름답지만 이 성당은 마치 동화속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신비롭고 행복한 색깔들을 보여주고 있다. 뒤편에는 자그마한 학교가 있는데 건축 당시 인부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던 학교라고 한다. 들어가 보니 당시의 교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고 책상의 모습과 구조가 대단하다. 책상과 의자가 서로 연결되어 밀어서 붙일 수 있으며 책상위에는 연필을 놓는 곳까지 섬세하게 제작되어 있다. 지금 우리나라 학생들의 책상보다도 더 예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1852-1926)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건축가이다. 74세를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단명한 것은 아니나, 젊어서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쓸쓸한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19세기말 카탈루냐 지역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그의 건축에는 자연을 중시하며 곡선, 모자이크, 철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한다.
성 가족성당 앞
○구엘공원
구엘 공원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공원이다.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 중 하나이다. 바르셀로나 교외 카르멜 언덕에 있는 구엘 공원은 원래는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설계된 곳이다.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 구엘 백작이 평소 동경하던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했다. 구엘 백작과 가우디는 이곳에 60호 이상의 전원주택을 지어서 스페인의 부유층에게 분양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구엘 백작과 가우디의 계획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었지만, 실패한 계획이었다. 공원 부지는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서 땅을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공원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고 마치 뱀들이 휘감고 있는 모습들이 당시의 부자들에게는 불만이었는지 분양이 되지 않아 실패했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14년에 걸쳐서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자금난까지 겹치면서 몇 개의 건물과 광장, 유명한 벤치 등을 남긴 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가우디가 살던 집이 남아 있고 입구에 있는 계단의 벽면의 모자이크가 매우 아름답고 관리동으로 지었다는 건물 두 채는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 한 생각을 하게하며 당시 지은 큰 건물 한 채는 초등학교로 쓰이고 있었다.
구엘공원
○시내 야간투어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소주 한 병을 시키니 2만원이다. 우리 팀 외에 다른 한국팀이 식사를 마치고 있는데 아니 정광윤 교육장님과 임주동 교장이 계신다. 익산에서 퇴임 교직자 내외분들이 오셨는데 그 중에는 양드리가 함께 근무한 선배 선생님들도 계셔서 반갑게 인사했다.
7시부터 시내 투어를 시작했다. 50유로(6만 5천원)씩 내고 하는 투어인데 워낙 여행비가 저렴하므로 여행사의 수입을 보전해주는 행사가 아닌가 여겨지지만 일행 전원이 참가하여 정신없이 가이드를 따라다닌다. 람블라스 거리를 한참 걸어가고 골목길에도 들어서서 오래된 건물들에 들어선 온갖 상점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상한 그림이 있어 무슨 모양인지 헷갈리는데 그 앞에서 부부들이 사진을 찍으면 제 형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신비한 그림이다. 일곱 부부가 차례로 나가서 키스포즈를 취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가 사진을 찍고 보니 과연 키스하는 입술모양이다. 양드리가 아주 멋진 포즈를 취하여 일행의 큰 박수를 받았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보고 상가로 쓰이거나 아파트로 쓰이는 18세기에 지어진 수많은 건물들도 보았다. 시청사와 주청사가 앞뒤로 있는 광장을 지나 또 다른 예쁜 광장을 지나니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해안 중심광장이다.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음료 한잔씩을 마신다. 야간투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는데 맥주 300cc라니 시원찮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양드리와 러브 샷이다. 버스로 이동하여 내려주는 곳에는 사거리를 건너로 가우디가 설계한 아파트인 카사 바트요와 역시 그가 설계한 까사 밀라가 있다. 카사 바트요에는 불을 밝혀 멀리서 보아도 가우디 작품임이 직감되는데 벽면에는 흰색의 원형 도판을 붙이고 초록색·황색·청색 등의 유리 모자이크를 가미해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며, 아침 해가 비추면 마치 지중해의 파도 속에 떠다니는 해초와 작은 동물들처럼 보인다고 한다. 카사 밀라는 건물 바로 아래서 보게 되니 기둥만 보아도 가우디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난 건물인데 1층은 은행으로 쓰인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주거 프로젝트이자 지금까지 세워진 건축물 중에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건물 중 하나이며,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간주되는 그런 작품이라고 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사업가 로제르 세지몬 데 밀라와 그의 아내 로세르의 의뢰를 받아 카사 밀라를 설계하였다.
넓은 모퉁이 공간에 위치한 카사 밀라의 구조는 지탱하는 기둥이 있는 오픈플랜으로 덕분에 하중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외부는 거대한 조각 돌덩어리에서 동굴처럼 솟아난 발코니와 창문이 만들어내는 물결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발코니 중에는 제멋대로 비틀고 꼬는 추상적인 철 난간도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의 최고의 영광은 그 지붕이다. 거대한 모래 언덕처럼 솟아오르다가 작은 다락방 창문이 꿰뚫고 나오고, 그 뒤로는 색색깔의 모자이크로 덮인 괴상하고 추상적인 굴뚝을 쌓아올렸다. 실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두 개의 안뜰이 건물을 가로지르는 중앙축 역할을 하며, 아파트는 비어 있는 공간 주위로 들어갔다. 다락방은 마치 배의 용골 모양의 일련의 벽돌 아치로 이루어져 있어, 바로 위의 테라스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9시 40분에 야간 시내투어가 끝났다. 그리고 20여분을 달려 교외 조용한 시골마을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11일(4월 28일 목요일)
○몬주익 언덕과 올림픽 경기장
몬주익 언덕을 오르면 도중에 까탈루냐 미술관이 나온다. 그냥 지나가면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이 미술관은 1929년 개최된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몬주익 언덕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감동어린 언덕이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 다음인 1992년의 하계올림픽은 바로 이 바로셀로나에서 열렸다. 황영조 선수가 이 언덕에서 일본 선수를 제키고 마라톤 우승을 함으로써 2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감동의 장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제 그 몬주익 언덕이 어떻게 생긴 언덕인지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오르면서 확인한다.
바르셀로나는 당시 국제 올림픽 위원회 의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으로 1986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총회에서 결정되었고 대한민국은 금 12개 은 5개 동 12개로 총 29개의 메달을 따서 7위를 했다.
몬주익 언덕은 해발 213m로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다. 이 올림픽 주경기장은 1936년에 조성되어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으나 베를린이 유치하려하자 당시 집권한 프랑코 총통은 히틀러에게 양보함으로써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게 되었고(프랑코가 1936년에 집권했고 베를린 올림픽은 이전에 결정되었을 터이므로 신빙성은 좀 떨어지는 설명) 당시 마라톤 우승자는 손기정 선생이었다. 56년이 지난 후 이곳 바로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고 우리나라의 황영조 선수가 우승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곳에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기념비가 있는데 이는 경기도가 바로셀로나와 자매결연을 맺고 요청하여 이루어진 일이라 한다. 비가 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여 부랴부랴 주경기장의 기념사진만 찍고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몬세라트로 출발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몬세라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산이다. 아서 왕의 성배 전설에 등장하는 베네딕트의 산타 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다. 기독교 성지로 되어 있어 우리 같은 관광객들까지도 찾는 유명한 곳이다. 화장실을 찾아 휴게실에 들어가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있는지 완전히 시장바닥이다. 수도원의 성당을 찾아 도착하니 비는 여전히 내리는데 하늘에는 온통 구름이라서 아름답다는 주변의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달랑 성당 건물만 보인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조용하게 예배를 보고 있어 깜짝 놀라 나왔다. 이 수도원에는 13세기에 조직되어 스페인에서 가장 역사 깊은 최초의 성가대인 소년합창단이 있어 유명하다고 한다. 잠시 후 비가 개이고 구름이 걷히는데 경치가 장관이다. 거대한 바위들이 산을 두르고 있다. 저 멀리에는 큰 폭포도 보인다. 내려올 때는 선택관광으로 30유로를 내고 케이블카로 하산한다. 다시 바로셀로나로 나오는 길에 보이는 시골의 아파트들은 매우 낡고 또 보수도 되지 않아 어려운 경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시내에서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서니 또 어제 져녁에 만난 익산팀이 식사를 끝내고 막 나가신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생선구이를 직접해주는데 우리 팀들이 아주 포식들을 하신다.
수도원 광장
도하로 가는 카타르항공 비행기는 오후 5시50분에 이륙했다. 다행이 부탁한대로 도하까지는 창가좌석이다. 갈 때는 발렌시아 위를 날아 마드리드로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바로셀로나이니 비행노선이 달라진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 위를 나르고 있는데 밖은 구름이 덮여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이탈리아의 큰 섬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나라이고 바로 윗 섬은 나폴레옹이 출생한 코르시카 섬이다.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재상이었던 카부르 백작은 마치니,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이다. 이제 바다와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고 비행기는 이탈리아의 구두끝자락인 시칠리아 섬의 윗자락을 지나 7시 반에는 어두워지는데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 섬 사이를 지난다. 8시 반이 되니 알렉산드리아 부근이다. 이어 큰 도시가 나타나는데 꼭 카이로로 보인다. 수에즈만을 한 참을 나르고 있는데도 저 편의 도시 불빛은 끝이 없다. 짐작컨대 저 이어지는 불빛은 카이로에서 룩소르까지 나일강을 따라 발달한 곡창지대의 도시들이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도시처럼 보이는 것이리라. 나는 카이로에서 룩소르까지 비행기로 갔으므로 얼마나 도시가 발달된 상태인지 전혀 본 기억이 없지만 틀림없이 내 짐작이 맞을 것이다. 시나이 반도 끝을 지나 홍해에 들어가는 데 이젠 아주 어두워서 해안의 작은 마을들 그리고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지대의 마을 불빛만 가끔 나타난다. 11시 30분에 도하에 도착한다. 낮에 본 도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갈 때 보았던 도하는 사막과 황토와 정돈되지 않은 어설픈 도시 모습이 괜히 안타깝고 답답한 느낌이더니만 밤에 보이는 도하는 불빛이 휘황찬란한 아름다운 도시다. 규모도 큰 도시로 건물들까지 아름답게 보이고 있다. 전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부자나라이니 밤에라도 저렇게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사는 모습까지 저리 밝을 수 있을까하는 괜한 걱정을 한다.
12일(4월 29일 금요일)
도하에서 2시 50분에 역시 대형 카타르 항공소속 비행기는 이륙한다. 서울은 8시 50분이다. 도대체 우리가 나르는 유라시아 대륙노선이 궁금하여 잠을 자지 않고 안내화면을 주시한다. 페르시아만을 나르는 비행기는 이란의 남쪽 섬인 케슘섬을 나른다. 올 때는 전혀 몰랐던 곳이다. 그리고 이란의 자헤딘 부근 상공을 지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위를 통과하는 것을 알았다. 이어 아마도 중국의 신장 위그르 자치구위를 지나 내몽골의 바오터우시 부근을 지나서 베이징과 텐진 상공을 날아 오후 5시에 갈 때보다는 1시간은 빠르게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여행을 마치면서
이번 여행은 작년의 서유럽여행에서 느꼈던 큰 감동과 희열도, 떠날 때의 벅찬 기대와도 달리 그저 무사히 여행을 잘 마쳤다는 안도감이 크다. 매우 후련하다. 이미 스페인을 비롯한 세 나라에 대해서는 TV를 통해 익히 보아온데다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문화면에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특히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나 네덜란드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거의 볼 수 없어 만족감이 조금 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자연 속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고 여행기간 내내 도시와 성당만 찾아다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년에 찾게 될 북유럽도 비슷한 여행이 되겠지만 이제는 국내 여행을 통해 아주 여유 있는 여행을 즐기고 가끔은 중국이나 라오스 같이 5일 이내의 짧은 일정의 해외여행을 해서 느긋하게 찬찬히 잘 보고, 잘 마시고 잘 먹는 여행도 곁들이고 싶다. 금년은 해외여행은 그만하고 우선 2박 3일 정도의 국내의 여유로운 여행을 한번쯤 하려한다. 12일 동안 아무 불편이나 부족함 없이 건강하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하나여행사와 박 과장, 그리고 내내 웃음과 배려로 함께한 일행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긴 해외여행을 마치니 후련한데 도착한지 3일 만에 기침 감기와 몸살에 걸려 거의 일주일이나 고생했는데 내심으로는 메르스가 아닌가 걱정되었으나 질병관리본부에 신고전화를 하니 ?너무 걱정말라?하여 적이 안심하고 곧 나았다. 이 여행기를 정리하는 일이 이처럼 늦게 된 연유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시골집을 찾아 가꾸고 기르는 개인 해피와 초코와 놀고 과일정원을 가꾸고 있다. 어제부터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시작했는데 겨우 네 마리만 성공했다. 어미가 병아리들을 데리고 나와 모이를 주도록 조치해 놓고 왔다. 내일부터는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면서 또 마냥 행복 하련다. 2016.5.15.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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