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잡록(亂中雜錄)
저자 조경남(趙慶男)1570-164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전라북도 남원 출생. 아버지는 사직 벽(璧)이며,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됐으나 기상은 활달했다. 1579년(선조 12) 10세에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해 글을 써 남을 놀라게 했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격장으로 활약하며 10여 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7년에는 남원부사의 막하에서 서기로 일하였고,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왜적에 포위되자 명나라 장수 양원을 찾아가 성을 방어할 계책을 전달하였으나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후 의병장으로서 뛰어난 계책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159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의 막하에서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608년(선조 41) 39세에는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1614년(광해군 6)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1623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장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瀋陽) 순절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13세 때인 1582년(선조 15)에서 1610년(광해군 2)까지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亂中雜錄)』4권 2책이 있다. 『속잡록(續雜錄)』4권 2책과 더불어 의병활동의 생생한 기술과 명·청과의 외교활동의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산서잡록으로도 기록됨.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사료(史料)로 참고 되었다.
※이글을 통하여 의병장 조경남 선생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교과서를 통하여 휴정, 유정, 정문부, 고경명, 곽재우, 조헌, 정인홍, 김천일 등 수많은 의병장들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지만 그들은 대부분 상당한 규모의 의병장이었고 국가로부터 벼슬도 받았으며 후세에 그 이름이 알려 내려와 많은 존경도 받았다.
이 글을 쓴 주인공인 조경남 선생은 그 지위가 비록 남원부사나 전라 병사 막하에서 활동하거나, 작은 규모의 의병장애 불과했으나 그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 자신의 공이 있다하여 벼슬을 탐하지 않는 고매한 인품, 민초들을 사랑하며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애민정신, 전투지휘자로서의 뛰어난 용기와 전술은 어느 의병장 못지않은 존경의 대상이다. 이 글을 통하여 당시 산야에서 왜병들과 악전고투하는 의병들의 활동상을 마치 스크린을 통하여 보듯이 자세히 그릴 수 있다. 우리 전북 남원 출신인 선생이 남원에 살면서 정유재란시 전주와 남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쟁의 모습과, 왜란을 겪으면서 죽어가는 민초들의 참혹한 삶도 자세히 그려놓아 우리 후손들이 왜란의 실상을 잘 알 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위안부 문제로 인하여 한․일간의 민족감정이 고조되는 미묘한 시기에 이 글을 통해 알게 된 선생에 대해 삼가 존경을 표하며, 한낮 남원지방에서만 추앙하는 의병장이 아니라 이 민족의 사표로써 선생을 널리 알려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면서 우선 블로그에 올린다.
1. 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난중잡록 서
...그런데 저 사대부들은 동인ㆍ서인ㆍ남인ㆍ북인이니 한 것이 과연 무슨 명목(名目)인가. 창과 칼은 되놈을 무찌르기에 쓰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창을 갈아 가지고는 자기 당을 지키고 다른 편을 치려고만 하였고, 계획과 책략(策略)을 세우는 것은 적을 제어하려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획과 책략을 남의 공을 세우는 데 방해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해치려는 데만 쓰려고 하여, 아무리 좋은 말과 깊은 모책(謀策)이라도 좋은 것이 되지 못함은 자기 당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이 죄가 되지 않음은 자기 당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물의 실정을 보면, 합하면 힘이 강하고 나누어지면 힘이 약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의논이 이처럼 네 갈래로 나누어지고 다섯 갈래로 찢어져 있으니, 저 악독한 왜적이 쳐들어 오고 중국이 병난에 피폐되었음을 기다릴 것 없이 약할 대로 약해졌을 것이다. 하물며 원기(元氣)가 벌써 허약하여졌으니 외부의 사기(邪氣)가 침입하여 올 것은 역시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동서로 붕당이 나누어지자 바다 건너 왜적이 밀려들게 되고, 대북(大北)이니 소북(小北)이니 하는 싸움이 벌어지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미리 서두르면 자립할 수 있고 미리 서두르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니, 아무 준비 없이 창졸에 급한 사변에 부딪친다면 비록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재가 있다 해도 손을 묶고 아무런 방책을 쓸 수 없을 것이며, 다만 충성과 신의가 있는 의사(義士)들과 아무런 죄없는 백성들만이 간(肝)과 뇌가 깨어져서 들에 널리고 신성한 국토가 허물어진 빈터로 되는 것이다. ...이 뒤로 시국의 모든 일은 날로 그르쳐지기만 하여 격렬한 근심과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이 기록을 쓰기로 하여 선조대왕(宣祖大王) 임오년(1582)부터 인조(仁祖) 신사년(1641)까지 전후 60년 간의 천재지변과 요괴한 물상, 조정의 상황과 민간의 풍속, 난중의 공문과 의병의 격문서, 변방 이외의 모든 일들을 다 모았는데, 그 중에 혹 소루한 것도 있는 것은 듣고 본 것이 미처 못 미친 때문이지 고의로 빼버린 것은 아니다. 숭정(崇禎) 후 4번째의 병진년(1856) 동짓날,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은 삼가 쓰노라.
●난중잡록 자서(自序)
...천성이 매우 강개하여,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책망을 당할 것인데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임오년(선조 15년, 1582) 왜란이 싹튼 초기부터 비롯하여, 경술년(광해군 2년, 1610)에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까지 끝냈는데, 내가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피난하고 왜적을 토벌한 일을 그 다음에 다 엮어 넣어 나눠서 네 편으로 만들고 ‘난중잡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뜻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 자고 심심풀이로 읽는 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만력(萬曆)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가을 7월 16일.
한양인(漢陽人) 조경남(趙慶男) 씀.
2.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오년 선조(宣祖) 15년(1582년)
겨울 12월 20일. 3개의 해[日]가 동쪽에서 돋고 쌍무지개가 그 3개의 해를 함께 꿰뚫다. 내 나이 열세 살, 시사(時事)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나날의 기록을 쓰기 시작하다.
●무자년 선조 21년(1588년)
서울의 선비들이 무려 백명 천명으로 떼를 이루어 미친 짓, 괴이한 짓들을 하는데, 그것이 천태만상으로 해괴하기 짝이 없다. 때로는 무당 흉내를 내면서 덩실거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혹은 초상과 장사지내는 일을 꾸며 껑충거리고 흙을 다지기도 하며, 동으로 갔다 서로 달렸다 웃었다 울었다 하였다. 그리고는 저희들끼리 묻기를, “무슨 일로 웃느냐? 무슨 일로 우느냐?” 하고는, 큰 소리로 스스로 답하기를, “장상(將相)들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어서 웃는다. 국가가 위태롭고 망해 가고 있어서 우는 거다.” 하면서, 다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곤 하다. 한때 이것을 ‘둥둥곡[登登曲]’이라고 부르다.
●기축년 선조 22년(1589년)
○...통신사 보내기를 청해온 것이다.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여 그 득실(得失)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이 또 곧은 말을 하였다 해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가면서 상소하기를, “이적(夷狄)의 신의 없음이 개 돼지와 같으니, 지금 화친을 청하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만약 이번에 온 왜인을 목 베고 명 나라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면, 황제가 깊이 살펴서 끝내 우리에게 문책(問責)해 올 근심이 없을 것이고 왜적들이 위엄에 겁내서 침략할 뜻을 마구 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더욱 미친 소리라고 물리치다.
●가을 9월. 홍문관 수찬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주살(誅殺)되다. 정 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덮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있으면서 고매(高邁)하고 자중(自重)하는 체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士林)에서는 달려가서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는 황해도 안악(安岳)ㆍ재령(載寧) 사람들과 몰래 반역을 모의하고 요사스러운 중 법연(法涓)을 시켜 왕래하면서 연락하게 했다.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이 고변(告變)하는 글을 올리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전주에서 정여립을 잡았다. 그때 정여립은 금구(金溝) 별장에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자기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그의 도당 변숭복(邊崇福)ㆍ지경함(池景涵) 등을 거느리고 진안(鎭安)으로 도피하였다가 본현(本縣)의 원 민인백(閔仁伯)에게 잡히는 바 되다. 정여립과 변숭복은 곧 목을 찔러 자살하다. 민인백은 정옥남과 지경함을 생포하고 역적의 시체들을 운반하여 모두 서울로 보내다.
●겨울 12월. 전라도 생원 정암수(丁嵒壽)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정 여립이 반역한 정상을 상세히 진술하고, 또 전에 정여립이 지리산에 들어가 열병(閱兵)할 때, 옥과(玉果)의 선비 양형(梁泂)이 문서를 맡아 보았다는 내용이다. 양형은 벌써 잡혀서 죽었다. 그런데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역적 모의의 전말을 너희들이 이토록 자세히 알았다면 왜 일찍 와서 고변하지 않았느냐.” 하고, 금부에 명해 체포하여 심문하게 하였으나, 도사가 정암수 등을 잡아서 천안(天安)까지 오자 석방하라는 특명이 내리다. 남원 사람으로 역적 사건에 연좌되어 잡혀 심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정자(正字) 조유직(趙惟直)과 선비 신여성(申汝成) 두 사람뿐이었으며, 역적 명부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잡지 못했고, 진주 사람 최영경(崔永慶)의 호가 삼봉(三峯)이라 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3.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선조 25년(1592년)
●8월 3일. 김면(金沔)이 지례(知禮)에 둔친 적을 토벌하여 거의 다 태워 죽이다. 전라도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적에게 포로되어 있다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함께 다 태워 죽이다.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도 5천여 명이다. 남은 적이 도망하여 성주(星州)로 향하였는데 성주의 군사가 무찔러서 남김 없이 멸하다. 이때에 김면은 거창(居昌)에 주둔하여 지례ㆍ금산(金山)의 길을 막고 정인홍(鄭仁弘)은 성주에 주둔하여 고령(高靈)ㆍ합천(陜川)의 길을 질러 막았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서 함안(咸安)ㆍ창녕ㆍ영산(靈山)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방비하니 우도(右道) 일대가 보존될 수 있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무서운 일이다. 임진왜란의 참혹상을 대변하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 아녀자들을 태워 죽였다는 것 뿐 만 아니라 적군이라도 저럴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의 삼국시대나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시대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교육목적으로라도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 당시 일본군들이 우리의 예쁜 여자들을 찾아 포로로 잡아 간 것을 확일 할 수 있는 자료이다.
○8월 4일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치보(馳報)에, “적세(賊勢)를 정탐하기 위하여 사람을 경상도 고성(固城) 감치[柹峙]에 보내었더니 복병장(伏兵將)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회답하기를, ‘사천(泗川)의 도훈도(都訓導) 최막금(崔莫金)이라고 하는 자가 고성의 적중(賊中)에 들어가 있었는데 제 집에 왕래하다가 복병이 있는 곳에서 잡혀 공술(供述)하기를 「적중에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왜놈을 만나 포로가 되어 살려 달라 애걸하고 인하여 적중에 들어갔더니, 적이 먼저 진주의 창고에 있는 곡식이 얼마인 것과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과 얼굴 예쁜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으므로, 아름다운 여자는 모르고 진주의 곡식은 대충 말해 주고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은 하동(河東)이라 하였다.」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그 사람을 방금 진주의 관(官)에서 가두어 두었다는 것을 통보한다.” 하다.
○김수(金睟)를 불러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하고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순찰사를 두어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성일의 장계(狀啓)는 다음과 같다.
5월 이후에 신이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행재(行在)의 기별을 알 길이 없어 밤낮으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 좌도의 적세를 말하면, 6월 초순 이후까지도 흥해(興海)ㆍ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영해(寧海)ㆍ진보(眞寶)ㆍ청송(靑松)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풍기(豐基)ㆍ영천(永川)ㆍ예천(醴泉)ㆍ용궁(龍宮)등 10여 고을이 아직 적을 겪지 않았는데, 이제는 용궁ㆍ예천ㆍ안동ㆍ예안ㆍ봉화가 이미 함몰되어 대개 30여 성(城)에 한 치도 깨끗한 땅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동쪽으로 강을 건너도 다시 발을 붙일 곳이 없으니, 변이 난 뒤로부터 좌우도가 나뉘어 호령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좌도에는 앞장서 일어나 적을 치는 이가 없었으므로 적이 더욱 거리낌이 없어 땅을 저들이 차지하여 각기 고을의 원이라 칭하고, 집을 짓고 농토를 가꾸어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 등이 서해로 해서 십생구사(十生九死)로 행조(行朝)에 도달하여 표문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방의 소식을 묻고 두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인하여 전라도의 사민들에게 내리는 교서를 선포하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는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적병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 사직은 폐허가 되고 신하와 인민은 어육이 되었다. 창창(蒼蒼)한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깊도다. 서쪽과 남쪽이 멀리 떨어져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가,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붕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는 남쪽에서 구원병을 기다릴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곽현 등이 수로와 육로를 거쳐 도달하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이 의병 수천을 모집하여 절도사 최원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쳤다고 보고하니, 덕이 없는 나로서 남이 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줌이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는고. 우리 조종들의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되어 맺혀진 것이, 아! 지극한 것이로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여 곧 양산숙 등을 보내어 너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노니, 그대 다사(多士)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이제 25년째이다. 비록 사랑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통하지 못하였고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여 정사에 조치를 잘못함이 많았으나, 본심인즉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물정을 알려는 데에 뜻을 두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변방에 허술함이 많고 군정(軍政)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는, 오직 성이 높고 참호가 깊으며 갑옷만 견고하고 칼날만 예리하면 왜적을 막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여 중앙과 지방에 신칙(申勅)하여 엄하게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이 더욱 견고할수록 국세는 더욱 약해지고 참호를 더욱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일찍이 가을 뽕잎이 떨어지고 기왓장들이 풀어지듯이 점차 이 지경에 이를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더구나 궁중의 사람들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이권까지 그물질하고 형벌이 정당함을 잃어서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였다. 왕자(王子)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점령하자 세민(細民)들이 생업을 잃어 걱정하였다. 백성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니 내가 무슨 변명이 있으리오. 이에 유사로 하여금 모두 파하여 돌려주었다. 이러한 일들 역시 어찌 내가 다 알았던 것이리오. 내가 몰랐던 것 역시 나의 죄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차라리 내 몸을 희생으로 삼아 천지 종사 모든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미 이러하니, 바라건대 너희 사민들은 나에게 허물을 고치어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도록 허락하여다오. 나의 잘못은 대략 이미 진술하였거니와 이번의 전란은 실로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미련한 저 오랑캐가 감히 하늘을 쏘려는[射天] 꾀를 내어, 혹은 우리더러 저의 반역에 편당이 되기를 요구하고 혹은 우리더러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므로 내가 대의에 의거하여 배척하고 거절하였더니, 올빼미의 성질이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분을 풀려하였다. 나는 종사가 망하고 신민을 버릴 수가 있을지언정 군신(君臣)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보신다 하여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가슴속을 해와 별에 밝게 헤쳐 위아래 신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고자 할 뿐이다. 곤궁과 위축을 당하면서 천조(天朝)에 달려가 호소하였더니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유격장군(遊擊將軍) 등 병마 1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진격도록 허락하여 서울까지 이르러 왜적을 소탕하려고 기약하니 천병의 소식이 미치는 곳에 사민들은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나의 행전(行殿)이 비록 한구석에 궁박하게 있으나, 천조에서 또 호(湖)ㆍ절(浙) 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경험이 있는 6천을 징발하여 아침 저녁으로 압록강을 건널 것이며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이 또한 수만이 모였으니 응당 다시 실패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너희 경명(敬命) 등이 이미 경기도에 이르렀으니 부디 기회를 보아 힘을 합하여 경성을 수복하라. 금성(金城)과 평양을 점령하였던 적도 기세가 이미 꺾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이 두 곳의 적만 제지하면 나머지 지엽의 적은 싸우지 않고도 절로 평정될 것이다. 지금 각 도가 모두 왜적의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오직 호남 한 도가 온전하니, 너희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또 어디를 믿으랴. 군량이 모자라거든 경(京)ㆍ호(湖)의 국고를 너희들이 먹도록 맡길 것이요, 무기가 다되거든 너희들이 쓰도록 맡기리니 각기 힘쓸지어다. 이제 경명을 공조 함의에 제수하여 초토사를 겸하고, 천일을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승진시켜 창의사(倡義使)를 겸하며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도 각각 차등 있게 벼슬을 주노라.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忠義)는 벼슬과 상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가 은혜를 베푸는 데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도착하거든 받고 더욱 힘을 다하라.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로 하여금 충청ㆍ전라도 등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나의 뜻을 선유(宣諭)하고 군무(軍務)를 감독하게 하노니, 너희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각기 용감함을 뽐내라. 용만(龍灣 의주) 한구석에서 국세가 위험하여 땅의 한계가 이미 다되었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사람의 일이 이미 극도에 다다랐으니 이치가 마땅히 회복함을 구할 것이다. 가을의 서늘함이 동하자마자 국경은 일찍 차가워지는구나. 저 장강(長江 압록강)을 보건대 역시 동으로 흐르니,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나의 한 생각이 물처럼 흐르누나. 이 교서가 이르거든 각기 나의 뜻의 슬픔을 불쌍히 여김이 있으리라. 아!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도성을 수복하도록 기대하고, 날로 장소(張所)가 능묘에 탈이 없다고 보고하기를 바라노라.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하는 바람에 어서 부응하여 내가 서리와 이슬을 맞고 있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아마도 잘 알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일(郭)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 너희 사중(士衆)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운운. 군사들이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광포한 왜적이 죄악을 쌓아 이미 가득 찼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더구나 평양의 적이 여러 번 야습(夜襲)을 당하여 세력이 쇠하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곧 맑은 가을이 철을 재촉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아서 우리 군사의 머무는 곳에 살기가 이미 응하니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랴. 너희 사민들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비록 고경명 등과 힘을 합쳐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본도에 유둔(留屯)한 적 또한 많고 왕래하는 자 또한 많아서 길에 잇달았다 하니, 마땅히 서로 요해지를 끼고서 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나누어 무찌르도록 하라. 또한 마땅히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좌우로 서로 응하여 혹 맞아서 치고 혹은 뒤밟아 쳐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한 놈도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온 지방을 깨끗이 하고 평정시켜 노약(老弱)을 불러들여 살게 하라. 그런 뒤에 힘을 합하여 경성으로 나의 행차를 맞아 돌아가면, 너희 사민들이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정인홍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면 합천 군수, 곽일 예빈시 정(禮賓寺正), 박성 공조 정랑, 곽재우 유곡 찰방(幽谷察訪), 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노니,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과 상을 기대하지 않겠지마는 운운.
○심유경이 평양의 적진에서 나와 순안(順安)에 와서 본국이 일본과 국교를 통하여 변란이 일어난 사실을 역관(譯官) 진효남(陳孝男)에게 물으니, 유경이 적장들의 말을 믿고 들었으므로 이 물음이 있었으니, 슬프도다. 효남이 대답하기를,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는 땅이 가까우므로 저들이 개시(開市)를 위하여 때로 혹 왕래하나, 우리나라에서는 백여 년 동안 일본에 일체 사신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일에 일본이 근년 이래로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천조에 범하려 한다는 풍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교린(交隣)한다 칭하고 일본에 가서 사정(事情)을 탐지한 일이 있으니, 전일에 아뢴 글 가운데 또한 진술하였습니다. 그 후로 영원히 서로 배척하고 끊어서 길이 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원한을 맺었습니다.” 하다. 유격(遊擊) 유경(惟敬) 이 데리고 갔던 무리가 다 나오고 다섯 사람만을 성중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달 5, 6일 사이에 유격이 두 번째 입성할 것이라 하다. 유격이 곧 송 시랑(宋侍郞 응창(應昌))에게 글을 보내어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7, 8일에는 마땅히 도착하게 하고 요동의 양향(糧餉)을 운반하여 평양에 주둔하여 뒷날의 계책을 하게 하였다. 또 효남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장과 말을 많이 하였는데 행장이 국왕을 보고자 하였다. 내가 도리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거절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노야(老爺)의 말이 이치가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장부가 식언(食言)하지 아니할 터이라. 50일 안에 가정(家丁)을 보내고 나 역시 뒤이어 와서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평양성을 우리에게 돌릴 일은 어찌할 터인가?’ 한즉, 행장이 지도를 내어 보이며, ‘조선 팔도에 평안도 또한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평양의 서쪽만이 천조의 지방이 되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본시 천조의 지방이므로 조사(詔使)가 올 적에 국왕이 이 땅에서 영접한다.’ 하였다. 행장이, ‘비록 천조의 지방이 아니더라도 이미 의정(議定)된 것이니 평양 서쪽은 곧 노야(老爺)에게 돌리고 마땅히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아서 서쪽은 대명(大明) 지방이 되고 동쪽에는 일본 지방으로 할 것이나 다만 이 성을 어느 군사로 지키겠는가?’ 하였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겠다.’ 하니, 행장이, ‘노야의 견해가 옳다. 조선 군사로 지켜서는 안 된다. 나는 노야의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경성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왜장이 함경도에 있는 자가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하고 있다 하니, 지금 통지해 타일러서 돌려보내고 포로된 사람들 또한 모두 풀어주게 하며, 각처의 왜인들은 모두 돌아가라.’ 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관백이 나를 평안도로 보냈으니 평양성은 내가 주장하지마는, 다른 도는 내가 관장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노야와 함께 관백에게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조정이 나를 시켜 다만 이 성에 갔다 오라 하고,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어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한즉 행장이 생각을 한참 하더니, ‘노야의 말이 이치가 있다. 노야는 두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 한 통을 써서 관백에게 보내고, 나는 열 사람을 시켜 구봉(求封 명(明)에서 관백을 봉해 주기를 구함) 문서를 가지고 노야와 함께 북영으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내가 허락하였다.” 하다. 효남이 말하기를, “왜적이 언제 평양성에서 물러갑니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천병이 크게 오면 적이 물러갈 것이다.” 하다. 이때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수상(首相) 김귀영(金貴榮), 판서 황정욱(黃廷彧), 승지 황혁(黃赫),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 및 여러 조신(朝臣) 허명(許銘) 등과 그의 내권(內眷)들까지 함께 몰래 회령(會寧) 땅에 모여 있었는데, 본도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본부의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과 공모하고 청정(淸正)에게 밀통하여 불시에 야습하여 모두 포로로 잡아 경성으로 들여 보냈다. 그러므로 유경이 왜장과 말하다가 끝에 왕자를 돌려 달라는 일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12월
행재(行在)에서 동요로 불리는 시가 있으니,
부슬비 서울 거리에 버들빛이 푸르니 / 細雨天街柳色靑
봄바람이 불어들매 말발굽이 가벼워라 / 東風吹入馬蹄輕
전일 대관들 환도하는 날에 / 舊時名宦還朝日
즐거운 개가 소리 한양성에 가득하리 / 奏凱歡聲滿洛城
○ 주상전하께서 먼 변방에 오래 체류하니 비감하여 시를 읊기를,
국사가 창황한 날에 / 國事蒼黃日
누가 곽ㆍ이의 충성을 능히 하랴 / 誰能郭李忠
빈을 떠남은 큰 계책을 위함이요 / 去邠存大計
회복은 제공을 믿네 / 恢復仗諸公
관산의 달에 통곡이요 / 慟哭關山月
합수의 바람에 상심일세 / 傷心鴨水風
조신들아 금일 후에도 / 朝臣今日後
오히려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하려나 / 尙可更西東
●계사년 상 선조 26(1593년)
●1월 8일
이여송이 평양에서 군사를 쉬어서 장차 경성으로 향하고자 하면서 군량과 말 먹이를 마련하는 문제로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니 다음과 같다.
천조 제독부(天朝提督府)는 국법을 신칙하고 태만한 것을 경계하여 타이르노라. 성천자(聖天子)의 명령을 공손히 받들어 생각건대 너희 작은 나라가 왜구에게 함몰되어 임금과 신하가 파천하고 인민이 도망하여 피하였으므로, 특히 대장에게 명하시어 가 진(鎭)의 관군을 거느리고 멀리 산과 바다를 넘어서, 위태롭고 빠진 것을 건져주려고 12월부터 강을 건너왔다. 그런데 조선국 체찰사(體察使) 수신(首臣) 유성룡ㆍ윤두수(尹斗壽) 등이 복수의 일념으로 섶에 눕고 쓸개 맛보는 것을 마음으로 삼지 아니하고, 수치를 씻고 흉한 것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사사 집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마음대로 술을 먹고 스스로 즐기니 천조에 대하여 태만할 뿐이 아니라 또 국왕으로 하여금 예법에 어긋나고 위엄을 없어지게 함이 자못 심한 바가 있다. 또 관군이 들에 둔치고 노숙하면서 목숨을 버리고 몸을 바쳐서 평양을 탈환하였으니, 너희 나라는 나라가 없다가 나라가 있게 되고 집이 없다가 집이 있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만약 죄를 따진다면 군량이 부족하고 말먹이가 없어도 가만히 앉아서 관망하기만 하여 군기(軍機)에 어긋나고 태만하였으니, 천자에게 상소하여 아뢰고 군사를 철수하여 요동으로 돌아가서 너희들로 하여금 죽어서 나라가 있다가 다시 나라가 없어지는 데 이르고 집이 있다가 다시 집이 없는 것을 슬퍼하도록 할 것이나, 본부(本部)는 충정(忠貞)한 성질을 타고 났으므로 마음을 위주(爲主)로 하여 작은 허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국가의 대체를 단단히 지켜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백성을 어루만져 계책을 내어 때를 따라 진퇴하고 기회를 헤아려 행동하여 너희의 국가를 안정시켜, 바로 일이 타첩(妥帖)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기다려 천자께 훈령을 청하여 복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 패문(牌文)을 내니 조선의 대소 배신(陪臣)은 수상(首相)에게 전해 알려서 빨리 부(府)로 달려와서 진격할 계책, 소용될 군량과 말먹이를 마련할 의론을 들어라. 만약 다시 어기고 태만하면 정히 중한 법에 부쳐 결단코 어름거리지 못하도록 할 것이니 모름지기 받아보도록 하라.
●2월
각 도의 인민이 유리(流離)하고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서로 잇달았고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이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ㆍ느릅나무의 껍질ㆍ뿌리ㆍ줄기도 모두 다 없어졌다.
○12일 전라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산성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이 때에 서북의 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서 세력이 더욱 치성하였다. 적이 호남 군사가 강을 건어 요해지에 있다는 것을 듣고 쳐부수려고 생각하고 길을 나누어 나오는데 그 수효가 헤일 수도 없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척후병이 경보(警報)를 알렸다. 권율이 군사들로 하여금 의혹하지 말게 하고 사람을 시켜 탐지해 본즉 성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적병이 가득 차서 호호탕탕하게 세력이 바람과 불길 같았다. 권율이 여러 군사들과 꾀하기를,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다가 문득 적을 만났는데 군사가 서로 대적이 못 되니 어찌 이겨내랴. 만약 한 번 죽지 않으면 국가에 보답할 수가 없다.” 하고, 또 마음을 합쳐 죽음을 같이하기로 모든 장수에게 타이르고 부대를 엄정히 하여 활을 당기고 기다리니 적이 이미 임박하였다. 선봉 1백여 기병이 먼저 이르러 위세를 뽐내더니 조금 있다가 대병이 덮치는데 세력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적이 세 패로 나누어서 나며 들며 번갈아 싸우는데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우리 군사가 죽도록 싸워서 화살과 돌이 비처럼 내렸다. 권율이 친히 밥과 장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며 배고프고 목마름을 막아 주었다. 묘시부터 유시까지 적병이 세 번 나왔다가 세 번 물러가더니, 마른 달대를 가지고 바람 따라 불을 놓아 목책(木柵)을 태우매 성중에서는 물을 가지고 막아냈다. 적병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며 외성(外城)으로 돌진하매, 승병(僧兵)이 붕괴되어 내성으로 들어와 일진(一陣)이 헤져지고 쓰러졌다.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여러 장수를 꾸짖으매 여러 장수들이 앞다투어 적을 맞아 싸우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저희들의 송장을 모아서 불사르고 달아났다. 머리를 벤 수가 1백 30여 급이 되고 기ㆍ투구ㆍ갑옷ㆍ칼ㆍ창을 버린 것이 수가 없었다. 한창 싸울 때에 화살이 거의 다되어 진중이 위태롭고 답답하였는데 정걸(丁嵥)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바다로부터 성중에 들여와서 이어 쓰게 되다.
○ 이때에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선봉장 사대수 등이 행주의 대첩(大捷)을 듣고, 다음날에 그 부하를 보내어 싸운 자리를 둘러보았다. 또 수일간 권율을 만나고자 요청하므로 권율이 진을 정비하여 영접하니 대수가 이르러서 보고는 탄식하기를, “외국에 이렇게 참된 장수가 있구나!” 하다.
○16일 이여송이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용산(龍山)에 들어가서 행장(行長)과 강화를 약속하니, 적이 경성에 쌀 2만 석을 남겨 두고 부산(釜山)에 도착한 뒤에 두 왕자를 돌려보낼 것을 허락하다
○ 경략 송응창이 의주로부터 나와 평양에 머물면서 시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화살과 돌 사이에서 스스로 몸을 보존하여 / 矢石之間得自完
풀밭을 걸어 이슬에 자고 또 바람 앞에 밥 먹었네 / 草行露宿且風湌
이웃집에 싸움이 있어도 몸을 버리고 막는데 / 隣家有鬪捐身救
한 집에 다툼이 많은데도 팔짱을 끼고 보는구나 / 同室多爭袖手看
예부 시랑은 어찌 숨으며 / 禮部侍郞安可隱
장단 부사는 어찌도 그리 차가운고 / 長湍府使一何寒
모두 중국을 높일 줄을 모르는 때문이니 / 捴緣不識尊中國
누가 능히 거꾸로 매달린 것 풀어 주는가를 생각하라 / 也念誰能解倒懸
●4월
경성에 합하여 진쳤던 적이 퇴각하여 내려가기로 서로 의론하고, 비밀리 명령하여 항복하였던 백성을 모두 죽이매 미처 피하지 못한 자는 다 죽다.
●6월
심유경(沈惟敬)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김귀영(金貴榮) 등과 더불어 왜적의 진영에서 나와서 본국으로 돌아오다. 행장이 양산(梁山)에서 유경을 전송하면서 작은 기를 주며, “후일에 전장에 임할 때에 이것으로 표(標)를 하라.” 하다. 또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연전에 군사를 보내었다가 진주에서 좌절을 당하였으므로 여러 장수로 하여금 힘을 다하여 그 성을 쳐서 무찌르라 하는데, 나는 중지시키고자 하나 청정이 듣지 않으니 일본 군사가 진주로 향하거든 성을 비워서 부딪치지 말고 사람들을 살리라.” 하다. 유경이 오다가 선산에 이르러 본국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29일 적병이 진주를 함락시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이상 3인은 삼충(三忠)이라 하는데 그 뒤 8년 만에 진주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워 제사지내다., 전라 복수 대장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 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 부장 장윤, 적개 의병 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영광 의장(靈光義將) 심우신(沈友信), 태인 의장(泰仁義將) 민여운(閔汝雲), 해남 의장(海南義將) 임희진(任希進), 도탄 복병장(陶灘伏兵將) 강희보(姜希甫), □□의장 이계련(李繼璉),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김준민(金俊民), 남포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 진주 목사 서예원 등이 다 죽다. 충남 수령을 따라온 병사 중에 죽은 이가 심히 많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적이 매일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하자, 속이기를, “사창대고(司倉大庫)에 피란하여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운운”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협박을 당하여 앞다투어 창고에 들어갔더니 적이 한번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다. 남원 사람으로 여러 의병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던 자가 3백여 명인데 남강(南江)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뿐이었다. 적이 성과 참호를 다 헐어버리다. 군사의 죽은 수효는 아래에 상세히 보인다. 적이 바야흐로 성에 들어올 때에 최경회ㆍ김천일이 달아나 촉석루(矗石樓)에 오르매 장수와 군사들이 다 모였다. 적병이 죽이며 나아오는데 이잠ㆍ김준민 등은 화살이 이미 다되어 바로 죽창을 가지고 육박전으로 싸우매, 적병이 잠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되어 죽다. 천일 등은 서로 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4.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계사년 하 선조 26년(1593년)
●7월 4일
명 나라 장수 부총병(副總兵)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가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서 낙상지 등의 유부(留府) 관가(管家)를 문초하여 진주를 미처 구원하지 못한 죄를 책하였다. 명 나라 군사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숫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을 쓰며 생채(生菜)를 먹지 않고 닭을 가장 즐겨 먹어 피도 버리지 아니하였다. 송대빈의 군사는 기병이요, 낙상지의 군사는 보병이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송군은 북방 군사로서 북적(北狄)을 방어하기 때문에 기마를 타며 활과 창을 쓰고, 낙군은 남방 군사로서 왜를 방어하기 때문에 도보(徒步)를 하며 총과 칼을 익혔다.” 한다.
●8월
권율이 비밀리에 운봉 현감 남간(南侃)에게 명령하여 남원 좌수(座首)를 베고 최경지(崔敬止)와 도훈도(都訓導) 고경우(高景佑)와 정오장(定伍長) 등. 쌀 10말을 속(贖)으로 성주(星州) 팔거(八莒)에 스스로 갖다가 납입하게 하고, 또 비밀리에 군관(軍官)을 보내어 석주(石柱)의 복병장(伏兵將) 왕경조(王景祚)ㆍ노종령(盧從齡)을 베게 하였더니 노종령은 베임을 당하고 왕경조는 망명하였다.
○송응창ㆍ이여송은 심유경과 왜(倭) 사이에 강화 조건으로 명 나라 황실녀(皇室女)의 혼인을 청한 데 대하여 평민의 딸로서 대신 보내려 하고, 또 명 조정에 아뢰기를, “왜놈들이 이미 모두 바다를 건너가고 다만 1ㆍ2진(陣)이 부산에 남아 있으면서 왕으로 봉해 주고 조공을 허락하는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리를 치른 나라에 군마가 오래 머물기 어려우니, 청컨대, 요양(遼陽)으로 철환(撤還)하여 비상시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명 군사를 돌리고, 다만 유정(劉綎) 등의 군사 만여 명을 남겨서 우리나라에 주둔해 지키게 하였다.
○22일 송응창ㆍ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돌아갔다.
●9월
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또 구혼(求婚)ㆍ활지(割地)ㆍ봉왕(封王)ㆍ망포(蟒袍)등 일곱 가지 조건으로써 천조(天朝)에 요구하였다 한다. 이것도 역시 당시의 소문이다. 대개 할지(割地)라는 것은 우리 한강 이남의 3도를 베어 달라는 것이다. 통분하다. 전에 이미 7도를 짓밟고 만백성을 도륙하고 임금의 욕됨은 파천하기에 이르고 종묘는 비참하게 잿더미가 되었으니, 귀가 있는 자는 적괴(賊魁)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자 하고, 눈을 가진 자는 적괴의 죽음을 보고자 하고, 입을 가진 자는 적괴의 고기를 먹고자 하고, 코를 가진 자는 적괴의 비린내를 맡으려 하고, 손을 가진 자는 적괴의 머리를 베고자 하고, 발을 가진 자는 적괴의 창자를 짓밟으려 하여 이 땅에 신하나 백성이 된 이는 죽기 전에 원수를 갚기를 생각하여 칼을 어루만지며 쓸개를 맛보면서 잠시라도 잊지 않고, 어리석은 남녀라도 모두 호미와 따비를 던지고 한 왜놈이라도 죽여서 만고에 없던 원수를 갚기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흉악하고 추한 적은 죄악을 자꾸 쌓아 그치지 아니하여 오히려 엿본다. 말이 이에 미치니 이것은 일시 힐난할 원수가 아니라 만세에 잊지 못할 적이다. 그런데도 사실(私室)에서 잠자고 밥을 먹으며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찾는 자가 있고, 백성을 토색(討索)하고 학대하며 원수 갚기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어 저 적의 견디기 어려운 말을 듣고도 국사에 무심하니, 아! 통분하다. 죽여도 모자란다.
●10월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적추(賊酋) 평행장(平行長)에게 글을 보내어 타일렀다.
명 나라 황제[天皇帝]께서 너희 일본이 조선을 침범함으로 인하여 바람과 번개처럼 진노(震怒)하시어 장수를 보내어 출정하였다. 너희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왕경(王京)에서 퇴각하여 모두 해변에 주둔하고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 왜인 내등여안(內藤如安))을 시켜서 대궐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공납(貢納)하기를 빌고 봉작(封爵)해 주기를 청하니, 너의 공순한 마음을 보겠도다. 그러므로 경략노다(經略老爹)와 제독노다(提督老爹)께서 너희를 위해 천황제에게 아뢰어 세시(歲時)로 공물(貢物)을 바치게 하고 우리 군사를 멈추고 추격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우리 중국이 너희 외이(外夷)를 대접하는 은혜와 신의가 지극한 것이다. 너희는 모름지기 마땅히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듣고 바다를 건너 돌아가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다시 미친 짓을 방자히 하여 진주를 공격해 함락시켜 도륙(屠戮)하기를 심히 혹독히 하였다. 황제께서 들으시고 더욱더 노하시어 구병(舊兵) 20여만 외에 정예(精銳)한 군사 60만과 해선(海船) 2천 척을 새로 내어 특별히 본부(本部)의 총독(總督)으로 하여금 너희들을 무찔러 동방을 안정시키려 하신다. 뜻밖에 너희가 이미 공물을 보내겠다 하므로 곧 추격하여 무찌르지 않고 일단 은혜와 신의를 생각한 것인데, 어찌하여 또 도리어 급히 경주를 공격하였느냐? 그 때문에 군사를 내어 무찔러 죽였다. 너희들이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고 도리어 대장군(大將軍)으로 하여금 외이(外夷)에게 실신(失信)하게 하였으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본부의 말을 듣겠다면 앞서 포로로 잡아간 조선의 남녀 노유(老幼)를 모두 놓아 주어 사람을 시켜 그들을 호송하여 오면 본부에서는 중한 상을 주되 1백 명을 보내면 1백의 공(功)이요, 1천 명을 보내면 1천의 공이다. 본부에서는 다시 너의 공순한 마음 바친 것을 경략노다에게 보고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너의 청함을 허락받고 너희들이 살아 돌아가서 부자 형제를 다시 보게 되리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혹시 두 번째 앙심을 품고 그릇된 소견을 고집하고 깨닫지 못하여 천병(天兵)이 자리를 둘둘 말아가듯 길이 몰아가면 너희들은 목숨을 잃는 화를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 그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두 번 세 번 이해를 생각하여 조심하고 조심할지어다.
○ 행장(行長)이 답하였다.
일본 차래사(差來使) 풍신행장은 진실로 황공하여 대명 총병 유노다(劉老爹) 휘하(麾下)에 삼가 아뢰나이다. 간곡하게 회답하신 글을 두 번 세 번 정중하게 읽었습니다. 먼저 편지에 천사(天使)와 심다(沈爹)와 우리 소서비탄수가 북경에 갔는지 안갔는지를 물었는데 왜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은 천사와 심다의 입으로 자세히 전할 것이므로 거듭 말하지 않나이다. 온 편지에, “구병 20만 외에 새로 정예한 웅병(雄兵) 60만을 내어 특별히 본부의 총독으로 하여금 너희들을 무찔러 동방을 안정시키려 하신다. 운운.” 한 말은 내가 잘 들었습니다. 천병이 비록 우리 선봉(先鋒) 이하 수십 만을 다 죽인다 한들 두 나라의 싸움이 태평해질까요? 화친(和親)을 제외한 외에는 태평이 될 기이한 계책이 따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의 생각은 여기에 있는데 다만 휘하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동래(東萊)에 있던 왜병이 경주를 범한 일은 아마도 일본이 명령한 것이 아니요, 사병(私兵)이 범한 것일 것입니다. 대군(大軍)을 일일이 제어하지 못하고 화친이 만약 지연되면 성가신 일이 반드시 많을 터이니, 알고 계십시오. 천사(天使)와 심다(沈爹)의 서약한 뜻대로 왜병은 태반이 귀국하였고 지금까지도 수십 만을 남겨서 포구(浦口)마다 병영을 두고 천사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병의 뜻에 따라 군사를 일본으로 돌려갈 것인데, 이것은 천사와 심다의 서약한 바이니 귀하도 들어서 알 것입니다. 웅천(熊川)의 좌우에는 들 곡식을 약탈하고 짓밟는 일을 내가 엄하게 제지하였는데 적도(賊徒)가 틈을 엿보아 화를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엄한 방비를 태만하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또 조선의 남녀들을 돌려보내라 한 말은 화친이 결정되면 일본에 두어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역시 알고 계십시오. 이 뒤에 왜의 여러 장수에게 보내는 글은 내가 반드시 전달할 것입니다. 때는 늦가을이라 바람이 세차고 물결이 급하므로 머물렀던 사절(使節)을 먼저 돌려보냅니다. 사절이 태만치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나와 세 부장(副將)을 제외하고는 별로 두 나라 화친의 일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후일에 다른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지 말고 또 다른 장수가 휘하에 편지를 보내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믿지 말 것이어늘 하물며 거기에 회답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머지는 사자(使者)의 혀끝으로 전할 것입니다.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선조 27년(1594년)
●4월
민간에서 곤궁하여 큰 소 값이 쌀 3두(斗)에 불과하고 세목(細木)값이 수승(數升)에 차지 않고, 의복과 기물은 팔리지도 않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여자와 고아는 출입을 못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그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의 뼈를 발라서 즙을 내어 삼켰는데 사람의 고기를 먹은 자는 발길을 돌리기 전에 모두 죽었다. 슬프도다! 처음에는 왜적의 분탕질을 당하고 나중에는 탐관오리가 긁어 먹고 겸하여 흉년이 들고 부역은 중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5월
○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골육(骨肉 부자형제(父子兄弟))이 분리되어 길가는 사람 보듯 하였다. 내가 마침 성중(城中)에 이르렀을 때에 명 나라 병사 한 사람이 취하고 배가 불러 지나가다가 길 가운데서 구토를 하자,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모아 주워 먹는데 약한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물러서서 눈물만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독부(督府) 유정(劉綎)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쌓인 것을 보고 참혹히 여겨 진소(賑所)를 동문 밖에 설치하니, 굶주린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백 명의 무리가 거기에 힘입어 조금 연명하다가 그 뒤에 모두 그 옆에서 죽었다.
○ 각 도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서 천만 명씩 떼를 지은 것이 몹시 많았다. 남원 사람 김희(金希)ㆍ이복(李福)ㆍ강대수(姜大水) 등이 동촌(東村) 추동(楸洞) 깊은 골에 당을 모아 우도(右道)의 도적 고파(高波) 등과 서로 호응하여 대낮에 횡행하여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여 무산(毋山) 북촌의 인민과 연결하여 저들에게 따르지 않는 자나 길가는 자나 촌사람이 관청에 가는 자나 거리에서 머리를 모아 의논하는 자는 가만히 그 도당을 보내어 묶어서 진중으로 끌고 가서 모두 죽였다. 백성들이 겁내어 거리에서 서로 눈짓하고, 길이 막히어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고 군사가 날로 성하나 관이 능히 금하지 못하니, 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의 지경에 길가는 사람이 끊어졌다. 이때에 양맥(兩麥)이 성숙하였는데 큰 도적에게 붙지 않은 자가 함부로 도적질을 하여 밭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살해를 당하였다
●6월
영남 여러 둔(屯)의 왜적들이 오랫동안 수자리[戍]에 노역하는 것을 싫어하여 우리나라에 항복하여 붙는 자가 많이 있었는데 김응서(金應瑞)가 항복받은 것이 거의 1백여 명이 되었다. 그 괴수는 김향의(金向義)인데 그 무리들과 더불어 전공을 많이 세워 벼슬이 통정(通政)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그 뒤 30년간에 항왜(降倭)들이 밀양 지방에 모여 살아 농사와 길쌈에 힘쓰고 자손을 길렀는데, 그 마을 이름이 항왜진(降倭鎭)이다. 항복한 왜구로서 우리 나라에 공이 없는 자는 서북 지방에 놓아 살렸다가 뒤에 다 베어 죽였다.
●8월 2일
도독 유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향하였는데 접반사 김찬(金瓚)이 따랐다. 중군(中軍)이 다만 1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부에 머물렀다. 처음에 명 나라 병사가 각기 우리 여자들에게 장가들어 호남ㆍ영남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이번에 철수할 때 모두 따라갔는데 산해관(山海關)에 가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방자(房子)들과 짝을 맞추어 살았다. 전후에 이와 같은 것이 거의 수만에 이르렀다. 그 뒤 만력 36년(1608) 기해(己亥)에 모두 찾아왔다. 독부(督府)가 본시 아들이 없었는데 대구에 주둔할 때에 선산 사노(私奴)를 얻어 살았다. 이번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갔는데 유상공(劉相公)을 핑계하고 기찰(譏察)에서 벗어났다. 사천(泗川)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정실(正室)이 받아 길렀다. 뒤에 무술년 봄에 동정(東征)할 때에 그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은 수백 냥을 본주인에게 속납(贖納)하였다.
●11월 왜장 평행장(平行長)ㆍ의지(義智) 등이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의 진으로 보내어 기일을 정하여 함안(咸安)에서 서로 만나 화친을 의론하자 하므로 김응서(金應瑞)가 원수에게 보고하자 권율이 조정에 급히 아뢰어 김응서로 하여금 가서 왜적의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21일 김응서가 정예한 군사 1백여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먼저 함안 지곡현(地谷峴)에 이르니, 행장이 사람을 시켜 문안하더니 조금 있다가 현소(玄蘇)ㆍ죽계(竹溪)ㆍ조신(調信) 등이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와서 먼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서 정청(正廳)에 들어와 서로 읍(揖)하고 초상(超床)에 앉았다. 현소 등이 먼저 말하기를, “성화(聲華)를 오랫동안 사모하여 매양 한 번 뵈옵고자 하였는데 오늘 외람되이 뵈옵게 되니,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대인(大人)들이 전일에 우리나라에 내조(來朝)하였을 때에는 나는 마침 북도의 임지(任地)에 있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지금 다행히 서로 만나니 매우 감사합니다.” 하였다. 현소 등이 답하기를, “오늘날 여기 온 것은 대명(大明)이 우리의 조공(朝貢)하기를 허락한 일을 의론하고자 한 것이니 사또께서는 성사할 도리를 가르쳐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대명에서 조공을 허락하는 일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행장ㆍ의지가 와서 참석한 뒤에 일을 의론함이 가합니다.” 하니, 그들은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침묵하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병사는, “당신들이 모두가 당관(唐冠)을 썼으니 마음도 당체(唐體)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찌 마음에 없이 당례(唐禮)를 본받겠습니까? 사또 앞에 와 뵈오려고 이렇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진시(辰時)에 행장ㆍ의지가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앞에서 인도하는 창검이나 조총을 든 사람, 짐꾼이 거의 3백여 명이 길에 가득하게 이르러 장막 50보 밖에서 말에서 내려 대포를 세 번 쏜 뒤에 행장ㆍ의지가 일시에 칼을 풀고 걸어서 정청에 들어와서 서로 읍하고 초상(超床)에 앉았다. 3천 왜병이 일제히 연포(連炮)를 쏘고 일시에 고함을 치니 뭇 왜인들은 숨어 엎드려 고요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사또께서 추위를 무릅쓰고 먼저 이르렀으니 황송하옵고 황송합니다.” 하였다. 병사는 답하기를,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다행히 서로 보게 되니, 실로 우연함이 아닙니다.” 하니, 손을 모아 답례하고 말하기를, “오늘 아침은 매우 추워 상(床)에 앉기가 좋지 않으니 평좌(平坐)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그 말을 따라서 평좌하니, 현소ㆍ죽계ㆍ조신은 꿇어앉고 행장은 간혹 위좌(危坐)하고 의지는 옴[疥瘡]이 올랐으므로 앉기가 불편하여 다리를 세우고 기우뚱하게 앉았다. 여러 왜추(倭酋)는 모두 두려운 마음이 있어 말도 잘 하지 못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오늘 어려운 위험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사또를 뵈옵는 것은 우리의 소회를 진술하고자 함이니 터놓고 말씀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나는 별로 털어놓고 말할 일이 없고 다만 대인의 말을 들어 그 가하고 불가함을 채택하여 원수부(元帥府)에 보고할 뿐입니다.” 하니, 행장ㆍ의지ㆍ현소ㆍ죽계ㆍ조신과 왜통역 요시라 외에는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병사의 앞에 머리를 모으고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天朝)에 대하여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한 지 3년이 되도록 결정을 얻지 못하여 멀리 타국에 와서 장수와 군사가 모두 고국을 그리워하여 하루를 보내기가 삼추(三秋)와 같습니다. 전일에 심유경(沈惟敬)이 천조에 왕래하여 이미 조공과 봉왕(封王)할 것을 허락하여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즈음에 조선과 유 총병(劉總兵)이 아뢰어 중지시켰다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병사는 답하기를,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대명 석노야(石老爺) 이름은 성(星)인데 이때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었다. 가 요동에 있는 대인과 편지로 소식을 통하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원컨대, 조선에서 천조에 아뢰어 힘을 도와주면 세 나라가 화평해져 남은 백성이 편안히 살고 우리들도 귀국할 것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데, 더구나 천조에서 일본에 조공을 허락하는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나온 것은 본시 조선을 공격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명에 대하여 조공을 트고 화친을 청하려 하는 뜻인데, 조선의 장수들이 군사로 대항하므로 부득이 서로 싸워서 해를 끼친 것입니다. 이러한 곡절은 평화롭던 전일에 현소ㆍ조신ㆍ의지 등이 예조 판서 및 선위사(宣慰使)이던 이덕형(李德馨)ㆍ오억령(吳億齡)ㆍ심희수(沈喜壽)와 부산 첨사(僉使) 이의(李艤)ㆍ통신사(通信使) 여러분 앞에 이 뜻을 극력 진술하였는데도 귀국의 장수나 정승들이 다 신청(信聽)하지 아니하고 병기도 갖추지 않아 이렇게 패하였으니, 우리들도 역시 탄식하고 한하는 바입니다. 일본이 장차 조선에 의탁하여 대명에 아뢸 일로 군사가 건너오는 날에 문서를 부산 남문 밖에 걸었는데, 부산 첨사가 보지 않고 응전하여 우리 일본 군사를 죽이므로 부득이하여 그 성을 함락시켰고, 동래에 이르러 또 문서를 보여도 또한 답하지 아니하고 한갓 무기만 허비하여 일본 군사를 마구 쏘므로 또한 부득이하여 성을 함락시켰더니, 동래 부사가 갑옷 위에다 홍단령(紅團領)에 사모(紗帽)를 쓰고 손을 모아 교의(交椅)에 앉아 일본 군사가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여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목을 베려 하는데도 조금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한 번도 눈을 들지 아니하고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므로 무지한 왜병이 머리를 베어 나에게 바쳤습니다. 나는 동래 태수에게 전부터 은혜를 입었으므로 곧 염습(歛襲)하여 동문 밖에 묻고 기둥을 세웠으니, 이것은 요시라가 자세히 압니다. 만약 유족이 있어 해골을 찾는다면 가리켜 드릴 생각입니다. 그의 첩은 여종 네 사람ㆍ 남종 두 사람을 거느렸는데 더러운 욕을 보이지 않고 대마도로 들여보내었더니 관백(關白)께서 말씀하시기를, ‘재상의 첩을 데려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도로 동래로 보내어 조선에 넘겨주려 하였으나 그때에는 조선 사람이 하나도 출입하지 않으므로 통지할 수가 없어 그대로 부산에 두었다가 금년 3월에 관백이 도로 데려 왔습니다. 이 여인은 나이 30여 세인데 아들이 있다 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관계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재상의 고물(故物)이라 하여 더럽혀 욕보이지 아니하고 그 노비(奴婢)를 시켜 보호하고 있으면서 다행히 만약 화친이 되면 내보낼 생각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동래성이 함락할 때에 울산 군수로 이름은 모르나 수염 많은 자가 일본 군사에게 잡혀서 항복을 빌며 살려 달라 하므로 내가 일본이 요구하는 일과 조선의 화복(禍福)을 말한 서한(書翰)을 주어 내보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조정에 전하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후회 막급입니다. 그 사람이 살았는지요? 이것은 우리가 조선을 괜히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3국이 화친할 일을 지시함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로 향하려고 길을 빌려 달라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대명 섬기기를 자식이 아버지 섬기듯 하므로 일이 되지 않은 것이니, 강화(講和)가 더딘 것도 우리나라의 허물은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이 전처럼 좋게 사귀는 것도 오히려 어렵거늘 하물며 천조에서 조공을 허락하는 일이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대명이 왕을 봉하는 것과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다 일본의 허물입니다. 심유경이 두 번째 강화를 약속하자 일본 군사가 해안으로 물러왔으니 이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뜻이요, 또 전날 이웃 나라 사귀던 의리를 잊지 않은 것이니, 두 대인이 사리를 살펴 잘 처치하는 것에 깊이 감복합니다. 이미 천조와 더불어 동래에서 강화를 약속한 뒤에 우리 진주를 함락시키고 우리 농민의 벼를 짓밟고 우리 남녀를 죽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가 두 대인의 강화하자는 말을 믿지 아니하여 비록 군사가 피곤하고 양식이 다 되어 스스로 세력이 약한 줄 알면서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과 들에 있는 백성들이 다 죽은 뒤에야 말려고 합니다. 내가 전일에 좌도(左道)에 있을 때에 동래 사람에게서 세 대인이 우리나라에 성의를 표시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이홍발(李弘發)을 보내어 뜻을 알아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전쟁하는 데는 사자(使者)가 그 중간에 왕래한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천병이 역시 두 대인과 청정에 서로 연락한 것이며, 지금 우리나라 조관(朝官)도 역시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좌도에 있는 이는 혹 청정과 서한(書翰)으로 연락을 통하고 우도에 있는 이는 혹 두 대인과 통하는 것입니다. 나도 두 대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적지 않으므로 좌도에 있을 때에 웅천(熊川)으로 사자를 보내었고, 지금 또 편의를 취하여 우도로 자리를 옮겼으니, 두 대인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일에 유 독부(劉督府)와 더불어 함께 팔거(八莒)에 있을 때에 청정에게 여러 번 서한을 보내고 청정의 사자를 통하여 들으니,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모두 두 대인 때문이요, 또 왕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모두 청정의 공이라 하므로 우리 나라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 청정을 고맙게 생각하여 말을 통하려 합니다. 대인들이 우리나라에 대명을 통하는 길이 있는 줄을 알았고, 또 관백이 우리나라를 칠 수 있는 줄 아는 것도 대인 등이 말한 것으로 관백이 군사를 발동시켰다 하는데, 이것도 또한 청정의 말입니다. 청정이 또 유 독부에게 말하기를, “행장은 관백을 속이고 심유경은 황제를 속였는데 행장이 관백에게,‘천자가 마땅히 공주(公主)를 관백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것이다.’ 하고, 심유경은 황제를 속이기를, ‘행장이 이미 모두 철병하고 다만 1ㆍ2진(陣)만이 부산에 머물면서 명 나라에서 왕으로 봉해 주고 조공을 허락하는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는데 지금까지 웅거하여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대인이 만일 바다를 건너 가지 않으면 천자도 또한 왕으로 봉해주고 조공을 허락할 리가 만무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다만 화친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대인이 반드시 관백에게 죄를 얻을 것입니다.” 하니, 청정의 이 말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종묘 사직의 원수를 잊고 두 나라 백성을 생각하여 이와 같이 목숨을 내놓고 왔습니다. 만일 일본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지 아니하여 천자께서 왕을 봉해주고 조공 허락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마땅히 대명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 7월에 천자께서 일본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지 않는다 하여 절강 영파부(浙江寧波府) 장파총(張把摠)으로 하여금 배를 타고 수전(水戰)할 길을 살펴 보았으며 명년 4월에는 민(閩)ㆍ광(廣)ㆍ호(湖)ㆍ절(浙)ㆍ천진(天津) 등지의 수군을 거느리고 올 것인데, 다만 우리나라가 양식이 다 되었고 천조에서 배로 운반하는 남경(南京) 곡식이 아마도 4월 전에는 미처 오지 못할 것이니, 다행히 그때가 되기 전에 혹 담(潭) 나는 의심컨대 지금 왜영에 가 있는 담 도사(潭都司)인 듯 하다 으로 하여금 손노야(孫老爺)이름은 헌(憲)인데 지금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동정군무(東征軍務)를 경략(經略)하는 분이다.의 군문(軍門)에 글을 보내어 다시 화친을 청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대마(對馬)ㆍ일기(一岐) 등 섬은 우리나라와 서로 가까우므로 풍속과 언어가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전쟁이 났을 때에 우리나라의 난을 피한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살고 다른 섬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하며, 우리나라 사람도 역시 그리하여 비록 한창 싸울 때에 있어서도 대마도 사람인 줄 알면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비록 천백 년 뒤에라도 일본 사람들은 두 대인이 군사를 철수하여 사람들을 살렸다고 할 것이며, 조선서도 역시 우리들이 교섭하여 나라를 편안케 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두 대인이 우리나라에 성심을 다한 일을 우리 전하(殿下)께 아뢰었으니, 이 뒤에는 비록 비밀리 말할 일이 있더라도 다만 나에게만 통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세 대인은 모름지기 마음으로 깊이 알아 두시오.” 하였다. 행장이 답하기를, “진주를 함락시킨 일은 관백의 명령인데 전진만 있고 퇴각은 없다 하므로 사세가 부득이하여 나아가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을 비워서 백성을 살리라고 내가 심 유격(沈遊擊)을 통하여 미리 알렸는데도 조선이 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것은 내가 공순하지 못한 죄가 아니요, 조선을 정벌하는 일도 역시 내가 주장한 일이 아닙니다. 일본 여러 장수들이 관백 앞에서 의론하여 정한 일인데 청정이 나를 헐뜯어서 무함하여 말했으니 극히 통분합니다. 또 황녀(皇女)에게 구혼(求婚)한 일도 역시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대명은 천하의 대국이요 일본은 바다 귀퉁이의 작은 나라인데 어찌 감히 천조에 대하여 혼인하는 일을 구하겠습니까? 관백이 비록 허무하여 설사 이런 마음이 있어 대명에게 말을 전하더라도 대명에서 딸이 없다고 답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중간에서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지어낸 말인 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청정이 본시 나와는 매우 좋지 않은 사이이니, 반드시 이 사람의 말일 것입니다. 듣자하니 전일에 조선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청정의 진중에 갔을 때에 청정이 혼인을 요구하고 땅을 베어 달라는 말로 명 나라를 공갈하였다 하니, 그 문서가 있습니까? 비록 서명한 문서는 없더라도 예조(禮曹)에서 이 일을 가지고 문서를 만들어 나에게 보내주면 곧 관백에게 보낼 터이니 청정으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하고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대[竹]를 베고 뽕나무를 베어 경계를 나누고 공갈하였다는 문서를 찾아 보내시오. 두 왕자를 호송한 공으로 청정이 스스로 생색을 낸다 하니 그렇습니까? 청정이 장차 죽이려고 하는 것을 내가 극력으로 관백에게 여쭙기를, 왕자의 있고 없는 것이 승패(勝敗)에 관계가 없는 것이니 속히 조선 전하에게 돌려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더니 관백(關白)이 그렇게 여기었으며, 명나라 사신 이 명 나라 사신이 누군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은 한 때에 내가 해상에서 친히 모시고 김해에 이르러 호송하였으니, 나의 공 있고 없는 것은 모두 두 왕자와 황 승지(黃承旨)황혁(黃赫) ㆍ이 병사(李兵使)이영(李榮)이다. 이들은 계사년에 살아서 돌아왔다. 의 심중에 있습니다. 조선의 종묘 사직을 헐고 부순 것은 우리들도 역시 부끄러워합니다. 그때에 서울을 지키던 왜장이 군사를 단속하지 아니하여 무덤을 팠다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명 나라가 수군을 발동하여 일본 군사를 소탕하겠다 하니 이것은 잘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비록 다 죽더라도 관백이 반드시 분노하여 대군을 발동하여 해마다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 있어 절로 다 될 형세가 있을 것이니 큰 걱정이 아닙니까? 조선이 힘써서 봉공(封貢 조공을 허락하고 왕을 봉하는 것)의 일을 아뢰어 군사를 풀어 환국하게 한다면 일본은 조선의 은덕을 알 것이요, 조선은 일본이 분노를 풀었다 할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조선에서 들은 말로는 일본이 강화(講和)한 뒤에 거년 11월에 경주 땅에서 왜적이 충돌하여 천병을 많이 죽였는데도 심 유격이 황제를 속이기를, ‘일본 군사가 다 철수하고 다만 행장ㆍ의지만이 부산에 남아 있어서 봉공을 허락할 시기만을 기다린다.’ 하여, 황제는 일본이 공순한 것을 기뻐하여 곧 봉공을 허락하였다가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즈음에, 또 일본 군사가 한 진(陣)도 바다를 건너간 것이 없고 조선의 지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40여 진이 주둔하여 천병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곧 봉공의 명령을 회수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행장은 말하기를, “어찌하면 성사가 되겠습니까?” 하자, 병사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일도 오히려 상세히 알지 못하는데 천조의 큰 일을 어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서는 세 대인이 의론해서 모든 진의 군사가 다 건너가고 다만 1ㆍ2진만 남아 항복하겠다고 청하는 글을 올린다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군사로 매우 악한 자는 청정의 임랑(林浪)ㆍ두모포(豆毛浦)ㆍ양산(梁山)ㆍ구법곡(九法谷)ㆍ거제(巨濟)의 진이니, 이 진의 사람들은 악한 자끼리 서로 어울려 자주 백성을 노략질합니다. 이러므로 조선의 장수들이 통분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사하는 도리는 여러 장수가 마음을 맞추고 힘을 같이한 연후에야 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내가 듣기로 청정과 대인 두 사이에 어긋나는 일이 많이 있다 하니 청정이 있고는 대인의 바라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청정과 모든 진을 다 들여보내고 대인들만 남아 있어 도모한다면 거의 성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내가 청정을 극히 나쁘게 생각하여 죄주려 하나 죽일 만한 일이 없으니, 분(憤)대로 할 수 없어 극히 절통(切痛)합니다. 조선 전하께서 청정의 죄를 가지고 나에게 글을 내려주시면 어느 진이나 들여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연유를 갖추어 원수부에 급히 보고하여 원수가 전하께 아뢰면 전하께서 힘껏 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1ㆍ2진만 남아서는 외롭고 약할 듯합니다. 타국에 군사가 나왔는데 어찌 뜻밖의 염려가 없으리요. 좌우도에 별처럼 벌여 결진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본 군사의 양식을 싣고 나올 때에 바람이 순하지 못하면 배 닿을 곳을 정할 수 없으므로 거제 서생포(西生浦)로 한계를 삼고 있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약속을 정한 뒤에 일본 배가 비록 표류되어 전라도에 도착하더라도 잡아 죽이지 아니하고 대인의 진으로 반드시 보내줄 것이니,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여러 진을 들여보내면 명 나라에서 일본의 뜻을 알고 허락하는 명령이 곧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장차 생각하여 급히 관백에 아뢰려고 하니, 조선이 일본 봉공의 일을 명 나라에 아뢰어 주면 그 은덕은 천추(千秋)에 어찌 잊으리요. 성사한 뒤에는 나를 신하로 삼더라도 나는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원수를 봉공하여 주라고 아뢰는 것은 결코 시행할 수 없는 일이나 대인들이 전일의 잘못을 진술하여 항서(降書)를 만들어 나에게 와 원수부에 보내주면 그대로 급히 전하께 아뢰어 대명에 아뢰게 하면 혹시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이 밖에는 별로 다른 묘한 계책이 없으니 대인들이 상의하여 급속히 선처하시오.” 하였다. 행장이 답하기를, “우리들의 항서(降書)를 명 나라에 바치는 것은 비록 죽을지라도 그대로 좇겠으니 항복하는 조건을 사또께서 초고를 만들어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당신의 항복하는 글을 어찌 내가 초고를 만들겠습니까? 당신들이 상의하여 편의하도록 함이 옳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말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만일 왕으로 봉한다면 명나라의 정삭(正朔)을 쓰겠습니까? 일본의 정삭을 그대로 쓰겠습니까?” 하니, 행장은, “어찌 명 나라에게 봉함을 받고서 명 나라의 정삭을 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해가 저물어 일일이 말하지 못하고 병사가 원수부의 공문과 타이르는 조목과 재상(宰相)의 자제로 포로가 된 사람의 성명과 어느 날 어느 날에 적병이 나와서 분탕질했는지의 기록을 내보였더니 현소(玄蘇)가 혼잣말 하기를, “재상의 자제로서 포로가 되어 여기에 있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서 내보내겠으며, 일본에 들어가 있는 자도 역시 찾아 보내겠으나 죽은 자는 할 수 없고, 일본 사람이 몰래 산막(山幕)에 출입하여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들이 몰랐던 일로 통분하기 막심하니, 이로부터는 엄하게 단속하여 그 폐단을 막아서 귀국의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옛터로 돌아와 안정을 찾아 농사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항복하는 일은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비록 천조에 항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일본 관백이 더욱 분노하여 대병을 들어서 해마다 침범하면 그 걱정을 어찌 감당하렵니까? 이와 같이 도리에 당치 않은 일로 권유하는 것은 미안한 것 같습니다. 원수가 항복하기를 권유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3국이 강화하여 각기 그 나라를 지켜서 국가를 억만 년 동안 편안케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 중간에는 빠진 말이 많다. 병사는 진으로 돌아오고 여러 왜추들은 소굴로 돌아가는데 읍하고 작별할 때에 세 왜졸이 대포 세 발의 소리를 따라서 일제히 연포(連炮)를 놓고 일시에 고함치며 엎드렸다. 여러 왜추가 걸어 나가서 처음 내렸던 곳에서 말에 오르니 뭇 왜인들이 높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일시에 일어서서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옹위하여 차례로 갔다. 그 뒤 만력(萬曆) 39년 신해(辛亥 1611, 광해군 3)에 김응서(金應瑞)는 세 소인에 들게 되어 전라 병사로서 파면을 당하였다가 43년 을묘(乙卯 1615, 광해군 7)에 용서하는 은혜를 받아 함경도 북병사에 임명되었다.세 소인은 심유경ㆍ김응서ㆍ요시라이다.
○ 명 나라에서 낙타 10여 마리로 물건을 실어 내보냈는데 높이는 한 길이 넘고 길이는 3ㆍ4파(把)요, 모양은 염소와 같은데 뿔은 없고, 발은 소와 같은데 털이 많고, 등의 살안장[肉鞍] 앞뒤에 혹이 났고, 한 번에 소금 세 말을 먹는데 혹의 강하고 약한 것은 염분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다. 짐을 실을 때에는 엎드려서 기다리고, 다닐 때에는 말을 달려야 따라갈 수 있고, 쌀 여섯 섬의 무게를 싣고 영남ㆍ호남으로 내왕한다. 또 삼생(三牲) 소(牛)ㆍ양(羊)ㆍ돼지 1만여 마리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가축의 종자로 삼도록 하였는데 몸뚱이는 우리 나라의 것과 같고 성질이 자못 순하고 느리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을미년 만력 23년, 선조 28년(1595년)
●1월
통제사 이순신이 장계하기를, “각 고을 수령들이 적을 방어하는 데 뜻이 없어 수군[舟師] 수병(水兵)을 전혀 들여보내지 아니합니다. 운운.” 하였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근실하고 태만한 것을 사찰하여 죄와 벌을 정하여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남원 병사 양순세(梁順世)와 이승서(李承緖) 등을 통영(統營)으로 잡아들여 연달아 처참(處斬)하였다.
●3월
○ 심유경이 소서비탄수와 더불어 천조에 오래 머물면서 봉공(封貢)을 표(表)로 청하였는데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그 계책을 맡아서 관백 수길을 봉하여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여 임회훈위도독첨사(臨淮勳衛都督僉事) 정삼품(正三品) 이종성(李宗城)으로 책봉 일본정사(冊封日本正使)로 삼고 첨사(僉事) 양방형(楊邦亨)을 부사(副使)로 삼아 책보(冊寶)와 금백(金帛)을 싸 가지고 우리나라로 내보내어 이내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심유경이 먼저 강을 건너왔다. 본국에서 문학(文學) 황신(黃愼)으로 심유경의 접반관(接伴官)을 삼고, 호조 판서 김수(金晬)로 정사의 접반사를 삼고, 이조 판서 이항복으로 부사의 접반사(接伴使)를 삼아서 의주에 가서 영접하게 하였다.
○ 계사ㆍ갑오년 이래로 수병(水兵)들이 몹시 고생하였고, 연변(沿邊) 곳곳에 전염성 열병이 배나 치성하여 한산도를 지키는 군사들이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다. 이러므로 간 자는 돌아오지 않고, 남아 있는 자도 도망치고 흩어져서 허다한 군선(軍船)이 장차 다 비게 되었다. 이순신이 걱정하여 이에 수군[舟師]에 속한 각 관(各官)으로 하여금 촌백성을 수색하여 잡아서 군사를 채우고, 군관과 모든 장수를 연해(沿海)의 시장(市場)에 나누어 보내어 장사꾼을 덮쳐 잡아서 배에다 실어서 군사를 만드니, 이로부터 연로(沿路)의 시장이 다 파하고 마을이 황량해져서 사람들이 모두 풀 속에 엎드리고 구멍에서 살다가 틈을 엿보아 농사 짓고 수확하니, 마치 밭에 있는 제비[燕]의 괴로운 생활과 같았다.
●7월
○ 권율을 갈고 우의정(右議政) 이원익(李元翼)을 사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 임명하고 겸하여 원수부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김륵(金玏)으로서 부사(副使)를 삼았다. 이원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관대(寬大)하여 나랏 일 걱정하기를 자기 집안 일같이 하고 백성 생각하기를 제 자식처럼 하여 묘당(廟堂)에 깊이 있으면서도 민폐를 환히 알았는데, 본직(本職)에 임명되어서는 나라를 붙들고 백성을 구제함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조정과 민간에서 흡족히 여기며 태평한 다스림을 기대하였다.
●10월
○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왜중(倭中)에 있는 귀천(貴賤)한 남녀가 이제 피차의 통행으로 인하여 비로소 편지를 전하는데 처참한 사연은 사람이 차마 볼 수 없었다.
○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윤근수가 진주관(晉州官)으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두고 조정에 아뢰어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시켜 잡아갔다가, 다음해 2월에 석방되어 진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만력 24년, 선조 29년(1596년)
○당학(唐瘧)이 전국에 전염되어 사람마다 앓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3일
책봉상천사 이종성(李宗城)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5일 밤에 정사(正使 상천사(上天使))의 답응관(答應官)이 부산으로부터 나와서 달려서 남원에 이르러 부중에 머물던 호 도사(胡都司)와 더불어 달려서 서울로 향하였다. 6일 아침에 왕 중군(王中軍)이 혼자서 말을 타고 남원에 도착하니 부사(府使) 최염(崔濂)이 낭청방(郞廳房)에서 영접하였다. 중군이 말하기를, “상사(上使)과 밤중에 흩어져서 생사와 간 곳을 모르고 나도 또한 여러 날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는데 다만 흉한 적이 상사를 추적하여 올 것이다.” 하고, 밥을 다 먹자 곧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에 온 나라 인민들이 강화의 약속을 믿고 다시 살아날 길이 있는가 바라다가 이 변고를 듣고는 내지(內地)가 술렁이며 두려워하였다.
○ 배신(陪臣) 심우승(沈友勝)을 보내어 천사가 도망한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황제가 각국에서 조공(朝貢)하러 온 배신들을 궁정(宮庭)에서 연회를 열어 대접하는데, 본국의 사신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엎드렸다. 황제가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흉한 적이 국경에 눌러 있어 군부(君父)가 경황이 없는데, 초국(楚國)을 위해 우는 소신이 어느 겨를에 즐거워하오리까?” 하니, 황제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짐(朕)은 요망한 기운이 싹 사라져 동방이 맑아진 줄로 알았으니 어찌 짐을 속임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을 알았으랴.” 하였다.
22일 이종성(李宗城)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북경에서 국문(鞠問)을 받고 은 3만 냥을 속(贖)으로 바치고 용서를 받았다 한다.
●5월
○ 청정이 철병하여 바다를 건넜다. 경상 좌병사가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본월 10일에 두모포 적장 청정이 영책(營柵)을 모두 불사르고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서생포(西生浦) 등지의 적이 연달아 철거하였습니다.” 하였다.
●7월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군사가 일어났다. 이몽학은 본시 흉하고 교활한 무리로서 처음에 편비(褊裨)가 되어 종군하였다가 국사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알고 감히 하늘을 쏠 꾀를 내어 동료 한현(韓玄) 등과 가만히 반역을 도모하여 도당을 모았다. 이때에 백성들이 난리와 온갖 침노에 곤궁해졌다가 한 번 풍문을 듣자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여 수일이 못 되어 군사가 만여 명이 되었다. 6일에 나아가 임천(林川)과 홍산을 함락시키고, 그 길로 청양(靑陽)ㆍ정산(定山)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다. 임천 군수 박진국(朴振國)이 아전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늘 적중에 머물렀다. 이때 이시언(李時言)이 본도 병사(兵使)로서 군사를 발하여 잡으려 하다가 관군이 두 번이나 무너졌다. 이에 원수에게 위급함을 보고하니 권율이 전주에 있다가 곧 전라 감사로 하여금 군사를 전주에 모이게 하였다.
○ 충용장군 김덕령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처음에 역적 이몽학이 잡혀 죽은 뒤에 문서를 수색하여 보니, 김ㆍ최ㆍ홍 삼성(三姓)이 있었다. 한현이 생포를 당하자 원수가 물으니, 공술하기를, “김덕령ㆍ최담령ㆍ홍계남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곽재우(郭再佑)ㆍ고언백(高彦伯)도 다 우리의 심복이다.” 하였으므로, 권율이 곧 갖추어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어 김덕령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역적을 토벌하라는 원수의 명령을 받고 진주로부터 운봉(雲峯)에 도착하였다. 충청도가 평정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원수에게 휴가를 청하여 광주(光州)에 갔다 오려 하였으나 권율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김덕령이 본진으로 돌아왔다가 곧 진주 옥에 잡혀 갇히었다. 임금이 원수의 계를 보고 조정의 신하에게 의논하게 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김덕령은 용기와 힘이 뛰어나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사람을 체찰부에 보내어 일이 있다고 핑계하여 덕령을 불러와서 그 자리에서 사로잡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불가합니다. 김덕령은 일개 미친 자이니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간사한 꾀를 써서야 어찌 아랫사람을 통제하겠습니까? 법대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옴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선전관은 무인이라 위임하여 보낼 수 없으니, 근신(近臣)을 보내라.” 하고, 승지(承旨) 서성(徐渻) 등을 보내어 선전관과 도사를 거느리고 가서 김덕령을 잡게 하였더니, 당도한즉 덕령이 옥에 갇힌 지 며칠이 된 상태였다. 27일에 서성 등이 김덕령을 잡아서 남원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곽재우 등도 또한 잡혀서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어 진으로 돌아갔다.
●10월
○ 통신사 황신이 일본에 있으면서 먼저 밀계(密啓)를 보내기를, “행장 등이 천사를 따라 들어가 수길을 보았는데, 수길은 조금도 봉(封)함을 받을 뜻이 없었습니다. 천사가 조칙을 받들고 그에게 절하고 꿇어앉아 받으라 하니, 수길이 말하기를, ‘무릎 사이에 상처가 있어서 절을 할 수 없다.’ 하고, 이내 구류하고 욕보일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에게 대하여는 모욕이 더욱 심하여, 도리에 어긋난 오만한 말로 자꾸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네 가지 큰 죄가 있으니, 왕자가 석방되어 간 뒤에 아직까지 와서 사례를 하지 않고, 사신(使臣)도 역시 벼슬이 낮은 사람으로 수만 채워서 들여보내었다. 너희 작은 나라가 전부터 나를 무시하여 세공(歲貢)을 바치지 아니하고,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오지 아니하고, 또 책사(冊使)가 도망하여 돌아가서 다 너희 나라에 머물렀다. 운운.’ 하고, 또 행장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조선에 오랫동안 있었어도 성공한 일이 없으면서 지금 화친을 약속하고 군사를 돌리고자 하니,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청정이 말하기를, ‘다시 출동하여 조선을 평정하고 오겠습니다.’ 하니, 가강(家康)과 행장이 힘껏 만류하여도 안 됩니다. 운운.” 하였다.
●11월
○ 조정에서 황신의 밀계를 보고 일본에 갔다 온 사람들을 통해서 청정이 다시 나온다는 소식을 탐지하였으나 피하자니 갈 땅이 없고, 방어하자니 상대가 안 되어 이에 청야(淸野)할 방책을 세워 급히 각 도의 대소 인민들로 하여금 부모 처자가 모두 부근 산성으로 들어가고, 가재(家財)와 곡식을 모두 실어 들이고, 수량이 많아 옮길 수 없는 것과 길이 멀어 운반하기 쉽지 아니한 것은 근처의 깊은 산중에 단단히 묻어 감추고 청야하고서 기다리게 하였다
※淸野 :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앰.
●12월
○ 적장 평행장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조선에서 대신(大臣)으로써 일본에 인질(人質)을 두겠다는 문서를 만들어 들여보내면, 내가 마땅히 도로 건너가서 관백(關白)에게 이롭고 해로움을 놓고 힘껏 진술하여 청정이 건너오기 전에 중지하도록 하려 한다.” 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힘을 다하여 청정의 오는 길을 막으려 하니, 각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진력하여 수병(水兵)들을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 부체찰사 한효순에게 수군의 일을 전담하게 하여 3도의 수병 및 격군(格軍), 격량(格糧)을 밤낮으로 조발(調發)하여 들여보내고, 병선(兵船)과 기계를 급히 수리하여 이순신이 적을 막는 힘을 부추겨 주게 하였다.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1월 5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11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인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ㆍ장수ㆍ진안ㆍ임실ㆍ구례ㆍ곡성 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 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 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을 성내에 설치하여 장차 모두 아문의 관할로 들이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지어 가속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원수(元帥)의 분부로 남원 판관 이덕회(李德恢)가 부(府)에 있는 총통(銃筒) 1천 자루를 대구에 가져다가 바쳤다.
○...또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어 먼저 적정을 탐지하게 하므로, 심유경이 중도에서 돌아와 서울에 이르렀다.
●2월
○ 요시라(要時羅)가 우리 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만한 일이다.
15일 심유경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접반사 이광정(李光庭)과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따랐다.
○ 황제가 총병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서 선대(宣大)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양원(楊元)은 요동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은 밀운(密雲)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은 연유(延綏)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잇따라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특히 계요총독군문(薊遼總督軍門) 형개(邢玠)로 하여금 다 통솔하게 하고,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으로 하여금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호부 낭중 정5품(正五品) 동한유(蕫漢儒)는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다.
●4월
○ 임금이 이순신(李舜臣)의 공과 허물이 서로 똑같다고 하여 놓아주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원수부(元帥府)에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6월
○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
●7월 16일
적병이 수군을 습격하여 통제사 원균이 죽었다. 처음에 원균이 원수(元帥)에게 곤장을 맞고는 분을 품고 물러나와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달려서 부산에 이르렀는데, 적선 1천여 척이 또 본토로부터 나왔다. 원균이 노 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져서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수령(水嶺)을 이미 지나서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천만의 수병이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오늘의 일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하였다. 원균이 듣고 드디어 배를 돌리게 하였으나 배가 역류를 넘느라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어,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이 동해로 표류하여 떠내려갔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ㆍ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써 원균이 그들의 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고.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 도로 이순신(李舜臣)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시켰다. 이때에 이순신이 영남에서 원수(元帥)의 막하에 있었다.
●8월 7일
적병이 구례에 들어왔다. 이때 심유경이 요동에 있다가 일이 급한 것을 듣고 관하의 우파총(牛把摠)으로 하여금 집에서 부리는 병정 5명과 통사 1명을 거느리고 행장의 진으로 보내자, 이날 우파총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본부에서 군관 하원서(河黿瑞)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여 구례 성 밖에 이르니, 적병이 우루루 나오다가 심유경의 성명을 쓴 표기(標旗)를 보고는 그쳤다. 이때 의홍 등 여러 추장(酋長)이 악양에 있으므로, 파총이 악양으로 가서 여러 추장을 보고 심유경의 뜻으로써 물러가라고 타이르니, 행장 등이 말하기를, “관백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반드시 전라도를 함락시키라.’ 하니, 사세가 중지할 수 없소.” 하고, 금ㆍ는ㆍ칼을 보내었다. 우파총이 이에 돌아와서 서울로 향하였다. 의홍 등이 구례에 이르니 적의 선봉이 남원 지경에 들어가 분탕(焚蕩)질하였다. 양원(楊元)이 성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원천(原川)으로 향하는데, 정기원(鄭期遠)ㆍ임현(任鉉)이 따랐다. 숙성령(宿星嶺)에 이르러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왔는데, 이날 밤에 성중에 있던 우리 군사는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청정 등 적이 이미 창녕ㆍ초계ㆍ합천ㆍ삼가를 지났는데, 지나간 각 고을은 불모지가 되어 남긴 것이 없었다.
○9일 흉악한 적이 둔산령(屯山嶺)을 넘어서 산안의 여러 마을을 불질렀다.
○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에, “적병이 진주ㆍ구례로부터 산에 들어와 수색하는 놈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때 내가 부사의 서기(書記)로 성중에 있으면서 가족을 먼저 산중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지금 흉악한 적이 연일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는 충성할 마음도 비록 간절하나 노모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부득이 동문으로부터 나와서 집에 와보니 동리는 텅 비었고 다만 두어 명 하인이 산에 숨어 내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고, 처자는 영(嶺)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함께 상룡추(上龍湫) 가에 있는 산막에 들어갔다. 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모에게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외조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16일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19일 적병이 전주로 들어와 모두 분탕하여 없애고 성과 참호를 헐어버렸다.
○20일 청정의 군대는 운봉으로부터 장수로 향하여 남원의 동천(東川)을 지나 번암(番岩)ㆍ철천(銕川)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差山)에 가 대수색을 벌였다. 근읍의 사람들은 이 산이 군읍과 거리가 약간 멀고, 또 적병이 서울로 향하는 직로가 아니라 하여 피해 들어간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씨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적병은 장수(長水)와 진안(鎭安)을 지나 그대로 전주로 향하여 갔는데, 거치는 촌락과 산골짝에서 분탕질하고 해치고 노략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주에 이르러 양정포(良正浦)에 주둔하고, 행장 등의 군대와 같이 시장을 열고 남원에서 얻은 중국 물건을 뽐내 보였다. 적의 괴수들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에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조선이 이때까지 부지(扶持)해 온 것은 수로(水路)로 서로 통하여 호서ㆍ호남 양호의 힘이 서로(西路)에 미친 소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대를 수륙으로 나누어서 응원하는 길을 막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고, 그날로 군사를 나누어 청정 등은 경기로 직행하고, 수가(秀家)와 행장(行長) 등은 회군하여 도로 내려가고, 의홍 등의 적은 나누어 우도로 내려가 열읍(列邑)에 주둔했다.
○ 적의 경보가 대단히 급하기 때문에 중전(中殿)과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 관서(關西)의 강계(江界)길로 향했다.
○22일
적병 16명이 몰래 은신암의 산막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살해하므로 내가 그들을 격파하고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과 같이 월락동(月落洞)으로 넘어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谷城)으로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 하원서(河黿瑞)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요시라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요시라는 주관하는 왜장을 불러 물어 보니, 하씨의 딸은 금법을 내리기 하루 전에 붙들려 왔다고 하여, 원서는 찾아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ㆍ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돌진해 왔기 때문에 살해 당하고 약탈 당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2일
내가 왜적 5명을 불우(佛隅) 부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지 않았다. 이때에 정사달ㆍ양덕해 등 제형과 함께 한 곳에 있으면서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막사로 모여 날마다 왜적의 동태를 바라보는데, 도로에 그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세력이 큰 왜적은 그래도 간혹 하루 걸러 내려오지만, 세력이 작은 왜적은 항상 내려왔다. 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에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인지, 행군함에 있어서도 정돈된 항오로 습격에 대비하는 태도가 없었다. 내가 여러 형들에게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흉한 적들이여! 부끄럽도다, 우리 나라여! 영남에서 당초에 사변을 당하였을 때, 사람들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못하여 각자가 살길을 도모하는데, 곽재우(郭再祐)는 한 빈한한 서생으로 남보다 앞서 자진하여 일어나, 혹은 공격하고 혹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을 베니, 우도의 여러 고을이 12일 동안에 수복되었소. 이것은 국사(國士)의 기풍이 감발한 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소? 오직 우리 도는 본래부터 예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났으니 임금께서 오늘날에 바라는 것은 호남과 영남이 다를 바 없는데,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한 사람도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베어 바치는 사람이 없소. 비록 혹독한 왜적이 득실거려 어떻게 할 만한 방책이 없다 하지만, 임금님의 수복(收復)하려는 소망을 생각하고 신민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꼭 한 번 죽어야 할 처지인데 그대로 산 숲속에 매복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자신만을 도모해서야 되겠소. 이것으로 논하면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라도 참으로 나아가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할 것이니, 한 몸의 화복을 어찌 헤아릴 겨를이 있겠소? 더욱 지금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왕래하는 것이 고약(孤弱)하고, 우리 인민은 사변에 익숙해져서 밤을 이용하여 서로 통하니, 만일 이때에 밝게 깨우쳐서 장정을 모집해서 복병을 설치하여 왜적을 사로잡고,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하면, 곽의사(郭義士)가 우도를 수복한 공적을 우리도 오늘에 쉽게 얻을 것이오. 고군(孤軍)을 이끌고 뱃전을 치며 강을 건너가면 용맹을 날릴 수 있거니와, 초수(楚囚)가 되어 산중에서 서로 마주앉아 우는 것이 어찌 충성이 될 수 있소. 어떻게 하면 적당한 사람을 얻어, 여러 형과 같이 그를 도와 대사를 도모하겠소? 이 서투른 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고, 오직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힘을 합쳐 그것을 도모하면 다행하겠소.
여러 형들은 모두 충의를 가진 선비라 내 말을 듣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러한 사람이 적격자가 가까이 있는데 하필 멀리 가 구하겠소?” 하고, 동시에 바로 나에게 한 번 죽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분한 나머지 마음을 스스로 누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토벌한다고 소리쳤으나, 오활한 썩은 선비로 일찍이 향리에서 믿음을 받지 못하여 한 사람도 같이 일하겠다고 응모해 오는 사람이 없고, 말하기를, “간신히 생명을 보존하여 오늘까지 왔는데, 아무개는 무슨 꼴로 또 남은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 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기를, “근일에 피살된 사람들이 모두 의병 때문이란 말이오? 붙들려서 죽는 것보다는 순국(殉國)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소. 나 역시 이들 왜적의 천심(淺深)을 알지 못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써 시험하여 사인(士人)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원하오.”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식구들을 풀속에 은신시켜 두고 단지 두 사람의 종만을 인솔하고 성부(城府)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언량(朴彦良)은 사람됨이 강개하여 실로 충용한 사람인데,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佛隅)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흉적(凶賊) 5명이 성중으로부터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우리는 의리에 분발한 신예병(新銳兵), 저들은 바로 멀리 와 싸워 피곤한 군사다. 더욱 그대는 일당백할 용사요, 내 또한 한 번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이것으로서 헤아린다면 적은 바로 안중에 들어온 것이다. 힘써 싸우라.” 하고 말이 끝나자,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곧 거꾸러지고 세 놈은 검을 던지고 살려주기를 구했다. 나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쳐죽이게 하니, 하인은 내가 수급을 필요로 하는가 여겨 귀를 베고자 하므로 내가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수급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된 직책을 다하는 것 뿐이다.” 하였다. 휴식하는 사이에 포성이 들리므로 잠깐 산 위로 피하여 망보니, 적병 수백 명이 부(府)로부터 오다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게 가리키며 부오(部伍)를 정돈하고 높은 데 올라가 망 보다 달아났다. 나는 고갯길에서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군사는 고단하고 화살도 다 없어져 분개하며 산으로 돌아왔다. 제형이 왜적을 섬멸한 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자정(軍資正) 유지춘(柳知春)이 오차산(於差山)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달려와서 내가 왜적을 친 것을 기뻐하며 말하기를, “흉한 왜적들이 가득 퍼지자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도모하니, 비록 크게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나 군사를 모집하기가 극히 어렵소. 참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정위(精衛)도 나무를 물어 나르면 큰 바다도 메울 수 있고, 노계(老鷄)도 알을 품을 때에는 미친 개도 쫓는 법이니 다만 진력함에 있는 것이지 어찌 수효가 많음을 일삼겠소.” 하였다.
○23일
우리 군사가 왜적 36급(級)을 궁장현(弓藏峴)에서 죽였다. 이날 새벽에 또 가족을 숲속에 숨겨 두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멸한다고 성명하니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 명이 되었다. 선달(先達) 김완(金完)은 영암(靈巖)인인데 새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영남좌방어사(嶺南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진중으로 가다가, 본도가 대패함을 듣고 노모(老母)가 있는 까닭에 말을 바치고 나와 남원에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마침 서로 만나게 되어 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기뻐하여 함께 일어났고, 정사진(丁士進) 군은 강개(慷慨)한 선비로 나의 뒤를 따르니 박언량 등과 아울러 28명이 되었다. 송림으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요천(蓼川) 위의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망을 보니 흉적 50여 명이 임실(任實)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축천정(丑川亭) 성 북쪽 5리에 있으며 금우정(金牛亭)은 물 가운데 있다.을 지나 곧장 동도역(東道驛) 앞 소로를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군한테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행보가 별운교(別雲橋) 부의 동쪽 7리쯤에 있다. 로 들어가니 반드시 무산(母山)으로 향할 것이다. 궁장현은 길이 좁고 좌우에 막힌 곳이 많아 방연(龐涓)을 잡을 만한 곳이다. 이제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무산으로 향한다면 여원곡(女院谷)에서 추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이 끝나자 망을 보니 적병이 과연 궁장현으로 향했다. 내가 달려가며 약속하여 말하기를, “군대란 정(精)한데 있지 수효 많은 데 있지 않소. 적을 만나 후퇴하여, 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이용하게 하면 많은 것이 더욱 해로움이 있소. 그대들 가운데 만일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제 뒤로 처지시오.” 하니, 말을 듣고 물러난 자가 7ㆍ8명이었다. 단지 수십 명을 거느렸는데, 궁시(弓矢)를 가진 자는 나와 김완ㆍ정사진ㆍ박언량 네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몽둥이를 들고 산 위로 해서 달려 궁장현에 당도하니 왜적은 이미 요긴한 길목을 지나갔다. 우리는 이미 형세를 잃어버려 용맹을 쓸 만한 곳이 없어 적을 버리고 헛되이 돌아오게 되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함치며 활줄을 세게 당겨 전진하니 적병이 칼을 뽑고 총을 안고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먼저 형세를 타지 못하였다 하여 겁을 먹고 모두 후퇴하고 들어가지 아니하니, 나를 따라 죽기로 나선 자는 6명뿐이었다. 싸움이 한창 붙게 되자 구릉을 한계로 삼아 왜적으로 하여금 난입할 수 없게 하고, 또 먼저 총 가진 자 3ㆍ4명을 쏘아서 죽였기 때문에 멀리서 덤빌 염려는 제거되었으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 힘이 서로 대적이 안 되었다. 비록 활 쏘는 것을 정확하게 한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모두 맞칠 수는 없었다. 왜적의 전봉(前鋒)인 5명의 적이 그 자리에서 죽은 뒤로 나머지 왜적이 일시에 포위하고 들어오니, 우리들은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 사면으로 발사하였다. 얼마 동안 치열하게 싸우자 왜적은 더욱 목숨을 내걸고 먼저 정군(丁君)은 쳐서 왼발 복아뼈를 찍어 대고 그 다음으로 박언량을 치니, 박언량이 활과 살로 그것을 막아서 활은 쪼개어지고 사람은 죽음을 면했다. 박언량은 맨손으로 포위를 뚫고 나와 모난 몽둥이를 들고 다시 들어가니 정군도 자기 상처를 돌보지 아니하고 굳게 서서 난사하였다. 나와 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하는데, 뜻밖에도 김군의 활이 또 부러졌다. 한 놈의 왜적이 김군을 쫓아가서 일이 매우 위급하므로, 내가 돌아서며 그를 쏘니 한 살에 바로 죽었다. 나는 살을 뽑아 난사하고, 또 박필남(朴弼南)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김군을 추격하던 왜적이 내가 쏜 한 살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봤는가?” 하니, 박필남은 뒤에서 따라 오면서 대답하기를, “그것을 봤습니다. 봤습니다.” 하였다. 박언량이 급하게 김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홀로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도 죽기로 결심하고 물러가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하였다. 이때에 적병으로 죽은 자가 15ㆍ6명이 넘었는데, 모두 싸움을 경험해 본 놈들이라 감히 결사적으로 싸워왔다. 그런데 나도 화살이 떨어져 급하게 경계(庚癸)을 부르니 박필남이 뒤에 처졌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던져 주므로 나는 살을 계속 주워서 쏘아 댔다. 진시(辰時)부터 교전하여 날이 신시(申時)ㆍ유시(酉時)에 이르자 여러 왜적이 모두 죽었는데, 그 수효는 36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포로된 사람들이라 다 거두어 돌아오니, 부북(府北)의 둔덕촌(屯德村) 사람 고한전(高漢傳) 등이었다. 두 왜적이 개울가에서 짐을 지키며 관망하다가 도망쳤는데, 날이 어둡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앉아서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니, 넘어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비린내 나는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곧 노획한 왜놈의 행장을 나누어 군인에게 주고 뒷날의 거사에 미끼로 삼게 하였다. 밤중에 산에 돌아오니, 여러 사람이 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파목(頗牧)이 우리들 가운데 계셨소. 만일 조정에서 이런 줄을 알게 된다면 충갑(沖甲)의 공은 여실(麗室)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뿐만이 아닐 것이오. 운운.”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완과 박언량 등 몇 사람이 궁장(弓藏)으로 머리를 베어 왔다. 바야흐로 난투할 때에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었는데, 나만 홀로 종 대손(大孫)이가 모난 몽둥이를 가지고 곁에 있으면서 타격하는 것을 힘입어서 마침내 완전하게 이겼음.
●11월 4일
내가 섬진에 이르러 높은 데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왜적이 놓은 불이 산을 태워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잠깐 동안 있는데 몇 놈의 왜적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별안간 습격하자 왜적은 말을 버리고 도주하므로 그 말을 거두었다. 초저녁에 하동현으로 들어가 숲속에다 군대를 숨기고 박언량과 같이 나아가 성중을 탐색하니, 성중이 고요한데 단지 금오산(金鰲山) 북쪽 한 곳에서 불빛이 밝았다. 박언량이 말하기를, “성중에 도적이 없으니 산 북쪽의 적을 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이 한다는 기묘한 병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대낮에 멀리서 본성을 바라보니 살기가 등등하고 밥짓는 연기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숨을 싹 감추고 영영 인기척을 끊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교활하고 속임수 잘하는 왜놈이 우리를 속이려는 계책이다. 내일 자세히 망을 보아서 거사함이 옳겠다.” 하였다. 새벽이 되어 성의 서산으로 올라와 정탐하여 보니, 과연 성에 머무른 적이 그 수효가 대단히 많고 인가와 왜군의 군막이 성내에 그물코처럼 연락되어 소ㆍ말ㆍ닭ㆍ개ㆍ거위ㆍ오리 등의 소리가 진동하였다. 박언량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아마 우리 장군님이 적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즉시 군인과 같이 물러와 숲속에 매복하여 소수의 왜적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적병이 많이 흩어져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겸하여 날이 오래되니 양식이 떨어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 돌아왔다.
○8일 화정(花亭)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은 정장(鄭將)의 종제인데 피란했다가 처음 돌아와 의병대에 입속하였더니, 내가 적진으로 싸우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나와 같이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정장과 김식과 다 같은 재종간이다. 비록 오랫동안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곤란과 고생이 막심했지만 다정한 벗의 두터운 바램을 홀로 저버릴 수 없어 적을 토벌함에 성심껏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바로 군사를 연합하여 다시 구례로 향하여 노전촌(蘆田村)에 이르렀다.
○11일 본현의 자모장(自募將) 강보기(姜甫起)와 합군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순천으로 향하여 삽령(鍤嶺)에 이르러 앉아 쉬면서 먼저 박언량 등 10여 명에게 정혜사(正惠寺)ㆍ강청(江淸)ㆍ죽전(竹田) 등지로 들어가 염탐하라 하였다. 왜놈의 권농(勸農) 왜놈은 지진리(止珍里)라 부른다. 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倭橋)에 부역(赴役)할 승군(僧軍)을 일으켜 보낼 양으로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내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서 절에 가니 김식(金軾)이 유수복 등을 보자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내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이놈들이 왜적에게 가 붙어서 심부름을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이니 다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아성(亞聖)의 교훈도 있소. 비록 난리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써서야 되겠소. 원수부(元帥府)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 않소.” 하였다. 김식(金軾)은 잔인한 사람이라 듣지 아니하고 무부(武夫) 박만귀(朴萬貴)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수복 등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며 말하기를, “곤궁하여 왜적에게 부역하였지만 본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각각 소와 말이 10여 마리씩 있으니 의병에 바쳐서 목숨을 대속받기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지극히 그들이 죽음에 나아감을 민망하게 여기고, 김식한테 말하기를, “군수품을 보충해 쓰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니, 마땅히 그들의 말을 들어 피차의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소.” 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와 말이 비록 만 마리라 하더라도 지금 왜적 가운데 있사온데 누가 그것을 잘 가져 오겠소.” 하므로, 나는 쾌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담당하여 끌고 오겠소.” 하고, 그 자리에서 절의 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형세가 급박하여 민패를 받았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련하다. 숨어 있어도 소용 없으니 모두 와 내 명령을 들어라.” 하자, 중들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울면서 배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금 수복 등 세 사람이 바야흐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소와 말이 많이 있다 하여 그것을 바칠 터이니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한다. 너희들 가운데 이 사람과 서로 절친한 자가 있으면 군인을 인솔하고 들어가 소와 말을 끌어 오라.” 하니, 한 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저와 절친합니다. 제가 명령에 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박언량 등 8명을 중과 함께 내려보냈다. 이때에 순천 광양 외촌에 주둔한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과 이쪽 저쪽에 나뉘어 막을 치고 있었다. 중은 박언량 등을 인솔하고 인가(人家)에 몰래 들어가서 우마 27두를 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만귀는 김식의 밀부(密符)로서 벌써 세 사람을 절 아래에서 베어 죽였다. 나는 김식과 같이 일할 수 없음을 알고 한참 동안 통탄하였다. 다음날 나와서 노전(蘆田)으로 돌아와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박언량 등을 모두 김식에게 넘겨주고 단지 5ㆍ6명과 같이 우마를 몰고 돌아와 정장(鄭將)을 만나니, 정장도 역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또 나한테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공은 전적으로 그대가 일을 먼저 시작함에 있는데, 그대는 공을 헤아리지 아니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겠소?” 하였다. 정장과 양덕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추(中秋)로부터 왜적 토벌에 마음을 다하느라고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얼마 안 되는 가을 곡식도 거둬들이지 못하여 노모와 처자가 앞으로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싸워서 얻은 우마를 그에게 두어 의사(義士)의 많은 식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하니, 정장이 흔연히 그것을 허락하고 또 즉각 표창하도록 원수부에 보고하려 하므로 나는 모두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 이광악(李光岳)과 원신(元愼)이 본도에 이르러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며, 부(府)의 주포촌(周浦村)에 유진(留鎭)하였다.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ㆍ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산음(山陰)과 사천(泗川)의 왜적이 함양ㆍ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어 미칠 듯이 분격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단신으로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출발하여 운봉으로 향하니, 양ㆍ박 두 선비도 또한 의기가 솟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훌쩍 날듯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그는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安先達) 사제(嗣悌)였는데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왜적을 죽여서 조금이라고 원통함을 풀고자 하였으나 맨손뿐이라 계책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왜적과 싸우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裴義重)은 날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향도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 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 하였다. 음리(陰里) 건너편의 냇가에 얼음이 살짝 얼어 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보니,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계속 이어서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炭九之)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과의 거리가 서로 가까워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대부분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달아 쏘아대므로, 나와 안선달ㆍ박군이 돌을 의지하고 마구 쏘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나고, 나는 사람을 시켜 물을 건너가 거두어 오게 하였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이 가까이 들리고, 고함치는 소리가 진동하므로 급히 달려가 망을 보니 본현의 원 남간(南侃)이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아병(牙兵)과 산장이 수십 명을 산내로 보내어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는데, 적병 30여 명이 마천곡(馬川谷)으로부터 나와 의탄(義灘)에서 서로 만나 방금 접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크게 싸웠다. 날이 저물자 우리와 놈들이 각각 동서로 후퇴하였다. 황현촌(黃峴村)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적의 야습을 염려하여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군(孤軍)이 머물러 있어봐야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적은 수백 명의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지르며 우리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이 떠난 곳을 물었다. 드디어 운봉을 지나 몰래 남원의 동촌(東村)ㆍ번암(蟠岩)ㆍ견천(肩川)으로 들어가서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防禦使)와 원수부의 별장(別將)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이 왜적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인솔하고 운봉에 이르렀다가 왜적이 간 곳을 놓치고 바로 진으로 돌아왔다.
●12월 7일
아군이 적 1백 23명을 산음의 사촌(蛇村) 현 서쪽 30리에 있음. 에서 죽였다. 이때에 정이길(鄭以吉)은 친상에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여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고 병권을 내놓았다. 내가 당초에 모집한 박언량의 무리는 모두 관군에 이속하였고 음리(陰里)의 싸움에는 단지 새로 얻은 약간의 군대로 적을 추격하였는데, 집에 돌아가자 그마저 모두 흩어졌다. 의분을 떨쳐 왜적을 치려는 정성은 지금도 변함 없으나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는 계책이 서지 아니하니, 처음에 같이 도모하던 사람들은 통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 또한 어느 것이 복이 되며, 어느 것이 화가 되랴 하여 비록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는 하나, 왜적을 죽이려는 마음은 언제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다. 마을 노인 진사 유인옥(柳仁沃)이 나의 뜻을 알고 박ㆍ양 제군과 같이 동리 사람을 뽑아 내니 장정이 거의 60여 명에 이르러서 단결시켜 편대를 만들었다. 나보고 거느리고 가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행하라 요구하므로,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시 그 군대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산음과 진주의 땅에는 왜적의 주둔처가 바둑같이 포진되었고, 함양ㆍ운봉ㆍ안음ㆍ거창ㆍ장수 등의 고을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여러 번 약탈을 당했고, 관군은 먼 곳으로 물러가 큰 화가 만연하여 우리 동촌(東村)도 위험이 조석에 다달았으므로, 여러 동지들은 내가 적을 막아 주기를 원하였다. 이달 3일에 나는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 운봉으로 향하니, 박대호(朴大虎)ㆍ유정진(柳挺震)ㆍ홍충갑(洪忠甲)이 다 의분을 떨쳐 이 일에 따랐다. 4일에 본현의 남면 가장동(加藏洞)에 이르니, 어두울 녘에 어떤 사람이 왔으므로 탐문하니
바로 본현의 원 남간이 보낸 사람인데, 전언하여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북촌에 머물러 계시는데, 오늘 낮에 적병 수백 명이 장수로부터 돌연히 이르러 각 촌을 수색 약탈하고 산막을 분탕하니, 나으리도 역시 쫓김을 받아 겨우 몸만 부지하여 달아나 삿점[簟店]에 와서 생원님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면담하고자 하오니, 내일 꼭 만나 보신 후에 떠나가십시오.” 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남간이 편비 몇 사람을 거느리고 왔다. 내가 전날 군대를 거느리고 현을 지날 때에 현하(縣下)의 아전들이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므로 나는 군령으로써 곤장 수십 대씩을 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남간이 나와 만나 안부와 왜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다음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를 허물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왜적을 토멸하는 일은 공사요 국사인데, 본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사사로운 일로 간주하고 오만 무례하므로 그 죄에 대해 죄를 준 것인데, 영감은 어찌 그것을 탓하시오?” 하니, 남간이 그 말을 그만 두고, 아병(牙兵) 3명을 붙여 주며, “적의 정보를 탐지하는 대로 그들을 시켜 연락해 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이 성하고 날래어 형세를 당할 수 없으니 진퇴를 헤아려 하시고 부디 경솔하게 대적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영감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법에 어렵고 쉬운 형세가 있는데, ‘어려움을 범하면 패전하고, 쉬운 것을 이용하면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나를 알고 남을 아는 기틀이니, 많고 적음은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1지대의 군사가 구등령(九等領)으로부터 오는데, 바로 본부 서면의 자모장(自募將) 박경춘(朴景春)이었다. 달려와 절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합(烏合)의 졸병을 가지고, 왜적을 치고자 하오나 의뢰할 곳이 없어 여러 달을 지내오다가, 마침 의병장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서 목숨을 버릴 마음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왜적을 치기 위한 것이고, 왜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것이다. 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줄 아니, 이른바 철(鐵) 가운데서도 쟁쟁한 것이 아니겠느냐? 나의 지휘를 따라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말아라.” 하였다. 박경춘이 말하기를, “오직 명령에 따라 생사를 결판 짓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사람을 황산(黃山)의 봉우리 위로 보내어 적병을 정찰하게 하니, 적병이 벌써 산내로 들어가 원효(元曉)ㆍ실상(實上) 등 마을을 분탕질하였다. 두 대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군하여 비도현(非道峴)에 이르러 적의 행방을 정탐하니, 적병은 황현(黃峴)으로 내려가 함양의 등구현(登丘縣)을 향하여 갔다. 나는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적을 뒤밟아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적을 죽이고자 함이요, 적을 죽이는 요결은 싸움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니, 강성하고 날래어 범하기 어려우니, 승패의 형세를 싸우지 아니하여도 결단할 수 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어렵고 쉬운 형세를 가려서, 적을 제어할 만한 형세를 타서 화(火)로 할 만하면 화로 하고, 경(驚)하게 할 만하면 경하게 하고 이것은 화공(火攻)과 야경(夜警)을 말한 것인데 글을 생략함은 군기(軍機)라 비밀로 함. 혹은 낮에 혹은 밤에 하여 반드시 옛사람이 많은 적을 대적하던 기계(奇計)를 내 연후에야 거의 희망을 있을 것이오.” 하니, 제군이 말하기를, “그러하온데, 적병이 곧장 내려와 대병이 점점 가까이 오니, 야경(夜警)이나 화공(火攻)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자 백장사(白丈寺)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는데, 문득 1대의 군사가 본사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본부 북면의 자모장(自募將) 출신 구희로(具希老)였다. 그는 보고하기를, “제가 오늘 일찍부터 적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 강성하므로 서로 교전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환하였다가 다시 출동할 생각입니다.” 하므로, 나는 기뻐서 말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모인 군사가 3군(軍)이 되니 오늘의 일은 하늘이 진실로 도운 것이다. 각각 마땅히 힘써서 전진하며 후퇴하지 말라.” 하니, 구희로는 대단히 난색을 하며 말하기를, “왜놈의 자취가 벌써 멀어졌는데 물러나지 않고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적병이 벌써 다 바다를 건너간 줄 아느냐? 산음과 함양 땅에 적진이 바둑처럼 깔렸다. 이 왜적이 비록 멀리 갔다지만 중지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면 수일 내에 반드시 그놈들을 만날 것이다. 오직 힘을 다하여 싸우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요, 물러나서는 안 된다.” 하자, 구희로는 말하기를, “저는 비둔하기 때문에 행보를 잘하지 못하고, 군사 역시 마구 긁어모은 것이라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멀리가 싸우는 데는 같이 따르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한번 죽음을 늦추려 합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백면서생으로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치느라고 여러 달 분주하게 다니며, 험한 고생을 꺼리지 않고 바람과 서리와 굶주림을 골고루 맛보며 오늘날까지 구사십생(九死十生)하여 온 것은, 상을 바래서도 아니고 벼슬을 바래서도 아니다. 국가가 위급하여 임금께서는 소간(宵旰)의 근심이 있으시고, 생민은 어육(魚肉)이 되고, 원수 왜적은 세력이 성하게 뻗었다. 이때를 당하여 진실로 신하와 백성된 자가 참으로 몸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조그마한 힘이라도 다해야겠기에 마침내 피를 땅에 바르기로 결심하고 불공대천의 원한을 풀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물며 너는 명색이 없는 데서 뽑혀 이름이 홍지(紅紙)에 드러나 은혜가 지중하니 의리상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예를 소집하여 왜적을 추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을 보고서 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떳떳한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하여 한 번 적병을 만나자 바로 은혜를 저버릴 꾀를 내느냐? 또 병법에, ‘적에 임하여 군사를 후퇴시키는 자는 목 베이고, 싸움에 임하여 구원하지 않는 자도 목 베인다.’ 하였다. 네가 비록 무식하여 이것을 잘 모르지만 나는 대강 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하니, 구희로는 이에 항거하여 말하기를, “주장(主將)은 제가 당신 군사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진퇴의 자유가 있는데, 어찌하여 망령된 말씀을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병법에 물러나는 것을 곧다 하고 전진하는 것을 굽다 하였느냐? 진퇴의 사이에서 곡직(曲直)이 판단되는 것이다. 나는 공(公)과 직(直)을 가지고 논할 뿐이니, 주장의 소속이고 아니고는 따질 것 없다.” 하니, 구희로는 말이 수그러져 마침내 백장사(白丈寺)로 따라 들어왔다. 이날 밤에 그는 병을 핑계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군인으로 하여금 모두 도망가게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구희로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 심장은 개 돼지와 다름이 없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 같은 무리에게서 바랄 것이 못 된다. 마음대로 해라. 너 같은 놈을 어찌 책하겠느냐.” 하였다. 구희로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다음날 새벽에 아군이 등구현(登丘縣)에 이르니 적병이 이미 지나갔다. 배의중(裴義重)이 또 산골짜기로부터 와 나를 보고 기뻐하며 다시 전도(前導)가 되었다. 박경춘(朴景春)은 깊이 들어가는 것에 겁을 먹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핑계대어 굳이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나는 의리로서 회유하여 말하기를, “현군(縣軍)으로 깊이 들어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며 마음에 맹서하고 힘을 합하여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기약하였는데, 어찌하여 생각이 잘못 들어 구희로의 그릇된 자취를 밟고자 하느냐? 당초에 기병(起兵)한 것은 바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의를 떨친 것이니, 오늘 적을 대하는 것은 선등(先登)의 용맹을 부릴 만한 기회이다.” 하고 즉시 아군이 운반하는 양곡 10여 두를 그에게 주면서 다시 격려를 하니 박경춘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이튿날 엄천촌(淹川村) 앞에 진군하니, 박경춘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억지로 고군(孤軍)을 이끌고 깊이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가 혹 불리함이 있게 되면 누가 그 허물을 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를 꾸짖기를, “무기란 흉기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함은 인지상정이니, 너 같은 용렬한 사람이 어찌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줄을 알겠는가? 다만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본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니 왜적을 탐지하여 힘껏 싸우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살 뿐이지, 어찌하여 기가 꺾여지고 또 군대를 철수할 뜻을 나타내느냐? 아! 마음대로 하라. 우리 군사는 너 같은 놈들에게 의뢰할 것이 못 된다.” 하였더니, 박경춘이 즉시 이끌고 돌아서려 하다가 적군을 중도에서 만날까 두려워서 산골짝에 들어가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고군(孤軍)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전진하여 모곡촌(毛谷村)의 뒤에 이르니, 척후병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건너편에 적이 있습니다.” 하므로, 나는 군사들을 일제히 입에다 재갈 물리고 엎드리게 하고, 박생과 같이 자취를 감추어 엿보니 왜놈의 기병 6ㆍ7명이 막 산음의 자례촌(子禮村)에서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박경춘에게 급히 보내어 부르니, 박경춘이 즉시 산골짜기로부터 나오므로 나는 아군 10여 명을 박생에게 주어 박경춘과 군대를 합쳐 대진(大陣) 사이에 매복케 하고, 이때에 산음의 방곡ㆍ저품(宁品)ㆍ흑석(黑石) 등 마을에 모두 적이 주둔하였는데, 여기와의 거리가 10리도 안 되었고 방곡(方谷)은 4ㆍ5리쯤 되었다.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곡의 앞 못을 거쳐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가 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적병이 달려 흑석으로 향하는데, 이때 여울에 살얼음이 얼어 박생과 박경춘은 건너지 못하였다. 나는 추격하여 쌍현(雙峴)에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와 군사를 모곡의 뒷산에 주둔시켰다. 얼마 있다가 정찰하니 미시(未時)에 적병이 함양의 남촌 유등포(柳等浦)로부터 나와 바로 아군을 향해 오고 있었다. 사람마다 그 수효를 세었는데, 혹은 1백 25명이라 하고 혹은 1백 23명이라 하였다. 군사들이 중과(衆寡)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을 보자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박경춘의 병사는 아직도 왜놈과 전투한 경험이 없어서 두려워함이 더욱 심하였다. 나는 군정(軍情)이 이와 같음을 살피고 용인(龍仁)의 사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거짓으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궁장(弓藏)에서의 싸움에 우리들 세 사람이 50여 명의 왜적을 다 섬멸하였는데, 오늘은 아군이 70여 명이라 각각 한 놈씩만 당하게 되면 그 가운데 또 어찌 10명을 당하고 20명을 당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힘을 다하는데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라.” 하고 재삼 효유하니, 군심(軍心)이 약간 안정되었다. 여러 군사와 같이 활을 가득 당긴 채 기다렸다. 군사 가운데 김대호(金大好)란 자가 있어 정예라 자칭하면서 항상 싸우고 싶다고 말하며 여러 차례 군사를 나눌 때, 반드시 선봉이 되기를 원하더니, 이번 왜적을 만나서는 넋이 벌써 나가 활을 끌고 살을 던지고 산으로 달아났다. 유생(柳生)이 은밀히 말하기를, “김대호가 도망쳤습니다.” 하므로, 나는 급히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자, 유생은 말하기를, “왜 그러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가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죽이지 아니하면 군사는 반드시 해체될 것이고, 그 죄를 다스려 형률에 처하게 되면 군사 기밀이 반드시 탄로될 것이니,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공과 죄를 따질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 적병이 산밑으로 돌아 내려와 바로 큰 개울을 건너 사촌(蛇村)으로 흩어져 들어가 수색하면서 왁자지껄 하였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자 사방이 어둑하게 되니 여러 왜적이 머뭇거리면서 밤을 지낼 계획을 했다. 나는 박생에게 말하기를, “먹는 것이 군사에서는 첫째이니, 그대와 배의중이 여기에서 적을 기다리면 나는 마땅히 이러이러하겠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게 하여 밥을 지어 나누어 준 다음 다시 그전 장소로 돌아왔다. 배의중이 말하기를, “적병이 한 곳으로 소집되어 불을 밝히고 왕래하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불이 꺼졌으니 무엇을 하는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군사를 물가로 진출시켜 군사로 하여금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달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모래밭에 군사를 멈추었다. 배의중에게 말하기를, “군사는 기지는 없으나 신속한 것을 귀히 여기고 기지는 있으나 행동이 더딘 것을 숭상하지 아니한다. 다만 모든 일을 미리 서둘면 군색하지 아니하고, 주밀하면 근심이 없는 법이니, 먼저 탐지하고 나중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더니, 배의중은 그 뜻을 알고 두 박씨와 함께 가서 망을 보니, 적병이 세 개의 토막집으로 들어갔는데 같은 담장 안이었다. 돌길은 험악하여 형세가 매우 어려웠다. 세 사람이 와서 보고하자 여러 군사는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나아갈 듯 물러갈 듯하며 두려워하였다. 박생이 말하기를, “깊숙히 이곳에 들어온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이제 만일 적을 버리고 도망하여 돌아간다면 어린애 장난과 같은 것이니, 어찌 남이 보고 들을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군인을 깨우쳐 말하기를, “저놈들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고, 우리는 기세를 탔으니, 화공(火攻)으로 하고 야경(夜警)으로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종사하라.” 하니, 군인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 박씨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세 막사로 나뉘어 들어갔으니 일제히 행동하지 아니하면 갑이 을을 구할 것이다.” 하고, 즉시 아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박생이 거느려 북쪽 작은 막사를 맡고, 박경춘은 남쪽의 작은 막사를 맡고, 나는 서쪽의 큰 막사를 맡았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시종 행사를 이리이리하라.” 하였다. 그리고 각각 군인을 거느리고 몰래 담 안으로 들어가 맡은 군막을 포위하였다. 내가 휘파람을 세 번 소리내어 부이 3군이 마름과 막대기를 늘어 세우고서 막 안에다 불을 지르고 또 이엉을 말아서 계속 던지니, 막사 안에서 불이 활활 일어났다. 적들은 놀라 뛰므로, 우리는 어두운 곳에 서서 무수하게 난사하며 어쩌다가 뛰어 나오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나오건 안나오건 간에 계속 두들겨대고, 또 마름과 막대기 등으로 군막을 둘러싸서 공격하게 하여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을 대비하니, 적이 어찌할 방법이 없이 앉은 채로 재가 되었다. 마침내 불이 화약과 조총에 붙어 토막은 공중으로 날고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큰 고함소리를 한 번 울리고 군인들은 약간 퇴각하여 그 불을 피하였다. 이때에 눈이 얼어 붙고 심하게 추웠는데, 밤새도록 힘을 쓰고 나니 군졸들이 피곤하여 바로 물러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이튿날 새벽에 귀를 베어 오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도로 들어가니, 문득 포성이 땅을 흔들고 고함 소리가 하늘로 이어졌다. 적병 수백이 저품(苧品)의 대진(大鎭)으로부터 쇄도하여 오는데, 형세가 실로 범하기 어려우므로 이내 좌차(左次)하여 물러나 실상촌(實上村)에 이르니, 김식(金軾)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와 나에게 다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나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번 거사에서는 적을 기만하고 가지만 이 뒤에는 적에게 기만당할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니, 김식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를 따라오다가 중도에서 분산하였다. 김식의 사나운 졸개들이 산막을 출입하면서 숨어있는 사람들의 소와 말과 잡물을 노략질하여 수없이 탈취해 오니 그동안의 해는 왜놈들보다도 더 심하였다.
●무술년 만력 26년, 선조 31년(1598년)
●2월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강진(康津) 에 유진하니 피난하는 뱃사람들이 모두 모여 들어 한 달도 못 되어 한산진(閑山鎭)과 같았다.
●4월 10일
곤양(昆陽)의 왜적 4백여 명이 하동(河東)ㆍ악양(岳陽)을 경유하여 지리산의 쌍계(雙溪)ㆍ칠불(七佛)ㆍ연곡(燕谷)의 여러 사찰로 들어가 수색하며 도둑질하다가,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黃嶺)ㆍ운봉(雲峯)의 대암(臺嵓) 등의 절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구례의 원 이정남(李挺男)이 적이 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가서 석주성(石柱城)을 정탐하다가 길에서 정탐하는 적을 만나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정남이 그대로 석주성에 있으면서 망을 보는데 왜병 수백 명이 돌진하여 성 밖에 이르러 오니, 정남이 후퇴하여 달아나자 적병이 용두까지 추격하여 왔다. 평안도 군사가 본도 병사와 같이 막아 싸우는데 명군이 계속하여 이르니 군세가 매우 성하였다. 적은 벌려서서 시위하다가 저녁 때에 이르러 물러갔다. 이광악ㆍ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돌아왔다.
○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ㆍ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 석을 우리 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ㆍ전주ㆍ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
●5월 24일
요시라를 잡아 서울로 올려 보내고, 인하여 명 나라에 보내어 베게 하였다.
●8월
6월 나는 오찬조(吳纘祖) 등과 함께 곤양(昆陽)ㆍ길안(吉安)으로 가서 정찰하고 돌아왔다. 이때에 본도 병사 이광악은 첨지(僉知) 정이길(鄭以吉)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나도 또한 허명(虛名)으로 추천을 받아 막사(幕士)로 종사하였다. 중군 김식(金軾)이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서울로 부임한 뒤에 중군은 작년에 내가 모집한 정예 박언량(朴彦良) 등으로 따로 한 부대를 만들어 중군에 소속시키고 더 군사를 뽑으니 모두 70여 명이었다. 이에 이르러 곤양 사람 정인(鄭麟) 등이 본진에 소속되어 와서 자세하게 본군의 소식을 전하고 각 지방에 있는 왜진의 쇠잔하고 치성한 형편을 말하는데, 그중 길안도(吉安島)에 머무른 왜적은 겨우 수십 명으로 대진(大陣)과도 거리가 머니, 만일 일거에 진격하면 적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용이한 일이며 소와 말도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였다. 이광악은 일찍이 본군의 군수가 되었던 사람이라 그 말을 기뻐하여 중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하여 들여보내는데 중군은 별장 오찬조와 나를 장수로 정하고, 소속한 정예를 거느려 길안으로 가게 하였다 이달 초하루에 우리들은 군사를 이끌고 백평(白坪)의 진중으로부터 출발하여 구례 남전(藍田)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악양(岳陽)으로 향하니, 구례 현감 이정남(李挺男)이 연곡천(燕谷川)까지 호송하였다. 행군하여 흑룡판(黑龍坂)에 이르러 잠깐 쉬고 있자니, 문득 한 떼의 인마가 뒤에 있었는데, 닥치고 보니 바로 진주의 화개동(花開洞) 산막장(山幕將) 출신 이상(李祥)이었다.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말하기를, “군사가 어느 쪽으로 향합니까?” 하므로, “망을 보러 왔다.” 하니, 이상이 안색을 고쳐 말하기를, “명병 대 부대가 지금 경주와 상주에 이르러 울산과 사천을 도모하고 있으니, 경계를 넘어 멀리 나가 왜적으로 하여금 소문을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우리들은 웃으며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인하여 밤을 우령(牛嶺)에서 지내는데 초경(初更) 때부터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인가도 없는데다가 또 우구(雨具)도 부족하여 비가 살갗까지 스며들어 젖었으며, 모기와 등에가 번갈아 물어뜯어서 간신히 날을 샜다. 그렇게 되니, 활과 살은 모두 녹아서 풀어졌다. 3일에 비를 무릅쓰고 해현(蟹峴) 숲속으로 나가 주둔하니, 바로 하동 땅이었다. 낮이 되어 비가 멎자 고개에 올라가 순천ㆍ남해ㆍ곤양ㆍ사천의 각 진을 바라보니 왕래하는 왜선이 바다에 잇따르고, 총소리가 때때로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정인에게 묻기를, “길안(吉安)이 어느 쪽에 있으며 거리는 얼마요?” 하니, 정인이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동남해 가운데로 뻗어 들어가 언덕을 이룬 것이 바로 길안입니다. 여기와의 거리는 80여 리쯤 됩니다.” 하므로, “왕래하기에 형세가 어떠하오?” 하니, 답하기를, “길이 험하기가 끝까지 한결같으므로 꼭 곤양의 율현(栗峴)을 넘어서 가야 합니다. 율현은 성과의 거리가 5리도 못 되고 또한 매복한 왜병 10명이 한참 고개에 서서 우리 사람을 망보다가 밤이 되면 진으로 돌아가니, 날이 밝으면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나는 정인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너는 사세가 이 같은 줄 알면서 어찌하여 주장하게 무고하여 아군의 낭패(狼狽)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느냐?” 하였더니, 정인이 말하기를, “빨리 달려 진군하면 내일 동트기 전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길안의 왜적이 가만히 묶여만 있다고 누가 말하더냐? 분주하게 갔다가 돌아오면 언제 싸우겠느냐?” 하고, 중술(仲述)오찬조의 자(字) 에게 말하기를, “길안은 여기에서 거리가 대단히 멀고 왕래하기에 형세도 대단히 어려우니 병법에 비록 ‘죽을 지경에 버려둔 뒤에야 살아난다.’ 하였으나, 이를 두고 한 말을 아닐 것이오. 군사는 만전을 귀히 여기는 까닭에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요, 적의 꾀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 병서에 나타나 있으니, 이제 아군이 저기에 도착하여 왜적을 공격하더라도 한밤중의 싸움이라 급하게 결전이 날 수 없을 것이오. 머뭇거리는 때에 왜적이 대진과 통하여 곤양 성중에서 북을 울리며 고함쳐 나오고 율현의 복병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진실로 휴리(携李)의 싸움에 오사(吳師)가 위태로울까 염려되오. 중술의 성이 오(吳)씨이기 때문에 이를 비유함. 형과 나는 한 번 죽는 것이 직책이지만 무고한 군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밤에 율현으로 들어가 먼저 아군을 매복하였다가 왜적이 오기를 기다려 포위 공격해서 베어 죽이고 돌아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중술이 이 말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즉시 군인을 시켜 진군하여 율현에 이르러 가니 밤 2경(二更)이 되었다. 정인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주장의 명령을 감히 어기고자 하니 군율을 어찌할 터인가?” 하고, 즉시 그 도당 최홍붕(崔洪鵬) 등 4ㆍ5인과 같이 소매를 휘날리며 갔다. 정인의 자매 형제가 대부분 길안의 왜적에 붙은 까닭에 매양 이와 같이 출입하였다. 중술이 나한테 말하기를, “저들은 가고 우리들은 머물러 있게 되면 곡직(曲直)이 있을 듯하고 또 길잡이도 없으니 여기에 있기도 또한 난처하니 어찌하오?” 하므로, 나도 옳게 여겨 즉시 중술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갔다. 밤에 80여 리를 행군하자니, 바다 굽이가 험하여 가기가 어려웠고, 밤은 캄캄하게 어두워 어떤 때에는 서로 잃어버리기도 하고, 피로와 갈증이 점점 심했으나 우물물도 얻지 못하였다. 길안에 이르러 정인은 우리들을 밖에 머물러 두고, 스스로 몇 사람과 같이 탐정한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밤이 새려하여도 정인 등이 돌아오지 않자 중술과 같이 후퇴할 것을 의논하고 군사를 먼저 떠나가라고 명령할 때 정인 등이 왔다. 전언하여 말하기를, “진중으로 들어가 옛 친구를 불러 적의 형편을 물으니, ‘남자 장정은 전부 구랑포(九郞浦)로 돌아가 소금을 굽고, 새로 왜병 50여 명이 대진(大陣)으로부터 다시 더 와서 우마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일이 만일 누설되면 우리들은 초류(噍類)도 없을 것이니, 먼저 상관에게 보고하고 왜적의 막사로 가는 것만 같지 못하여 우리들이 달려왔습니다.” 하므로, 즉시 중술과 같이 후퇴해 돌아왔다. 조수를 타고 나와 바로 곤양의 미래교(米來橋)를 건너 하동의 서랑곡(西郞谷)에 이르러 누워서 쉬었다. 문득 망보던 장정이 소리쳐 말하기를, “적이 온다.” 하므로, 우리들은 몽둥이를 가지고 그들을 기다리니, 왜적 6명이 과연 오다가 아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장졸들은 몸이 고달파 쫓아가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며칠 동안 망을 보았다. 7일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는데 길에 많은 발자국이 있었다. 나는 의심하여 군사로 하여금 대오를 정돈하여 서로 놀라 혼란되지 말라 하고, 전진하여 해현(蟹峴) 밑에 이르니 화병(火兵)이 풀속으로부터 나와 보고하기를, “왜적 40여 명이 오늘 아침에 곤양으로부터 와 고개 위에 매복했다.” 하였다. 나는 중술(仲述)에게 말하기를, “적은 이미 앞길을 막아 기다리고 뒤에서 또 적이 오면 벗어나기가 어려우니 급하게 앞의 적을 공격하고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모두 마름 막대기를 메고 고함치며 곧장 올라가니, 적병이 조금 피했다. 나는 왜통사(倭通使) 서득남(徐得男)으로 시켜 왜놈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대군의 선봉은 하나가 백 명을 당하는 병사로 먼저 탐색하러 여기까지 왔으니, 적은 빨리 내려와 결전하라고 하라.” 하니, 적병이 이 말을 듣고 점점 더 산으로 올라가 회피하고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천천히 행진하여 석교에 이르러 돌아다 보니, 적도 또한 가고 없었다. 8일에 진으로 돌아왔다.
●7월 16일
통제사 이순신이 적병을 고금도(古今島)에서 크게 무찔렀다. 하루 앞서 이순신이 진인과 같이 연회를 벌였는데, 문득 탐선(探船)이 달려와 적의 침범이 매우 절박하다고 보고하니, 곧 연회를 정지하고 제장에게 분부하여 복병하고 망을 보라 하고, 엄한 방비를 두 배로 더하고 군기를 정돈하고 기운을 가다듬고서 기다렸다. 한밤중에 바람결에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 오더니 동틀 무렵에 적의 배가 많이 이르렀으므로 곧장 앞으로 나가 교전하였다. 이순신이 진인으로 하여금 높은 데 올라가 내려다 보게 하고 자신이 여러 배를 거느리고 적중으로 뚫고 돌입하였다. 한 번 바라 소리가 나자,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덮고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화포가 함께 발사되어 50여 척을 잇달아 불태우고 백여 명의 머리를 베니, 왜적이 도망쳐 본진으로 돌아갔다. 진인이 크게 기뻐하며 칭찬하기를, “임금을 호위하는 울타리라고 이를 만합니다. 옛 명장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하였다.
●8월
○ 명 나라 조정에서 양원(楊元)ㆍ진우충(陳愚衷)을 베어 머리를 우리 나라에 전했다.
○27일 제독 유정(劉綎)이 친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부터 임실(任實)에 도착하였다. 군졸이 먼저 남원에 이르러 사방으로 흩어져 나아가 목재를 흑성(黑城)의 용두산(龍頭山)으로 날라다가, 장수의 사관과 군막을 안배하여 짓고, 책(柵)을 설치하고 참호를 팠다. 이튿날 유정이 용두채에 이르러 유진하니, 전후 군대가 총합 4만 7천여 명이었고, 그 가운에 우지개(牛之介) 3명이 있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요,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고, 초원(楚猿) 4마리가 있었는데 말을 타고 놀리는 것이 사람과 같고, 몸뚱이가 큰 고양이를 닮았고, 낙타ㆍ생노루ㆍ3희생과 잡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흥판(興販) 장사꾼이 먼저 오는데 그 수도 또한 많았다. 적과 대치해서 다급한 때에 이르러서도 파는 자가 앞에 있어 소를 죽이고 돼지를 잡아서 찢어서 불에 익혀 놓으면 군졸이 은을 주고 사서 먹었다. 흥판도 또한 소속된 진이 있어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제독의 일행에 배신(陪臣)ㆍ반신(伴臣)과 본도의 감사가 따랐다. 원수 권율이 백평촌(白坪村)에 와 진을 쳤다. 동로 제독(東路提督) 마귀는 상주로부터 경주로 진군하고, 동일원(蕫一元)은 성주로부터 삼가(三嘉)로 진군하였다.
●9월 15일
좌협병은 광양(光陽)으로 향하고, 우협병은 낙안(樂安)으로 향하니 반신(伴臣)과 소속 제장이 수행했다. 이날 양원(楊元)과 진우충(陳愚衷)의 머리가 본진에 전해 왔다. 제독이 전(奠)을 베풀고 그를 제사하였다.
○20일
4로병(四路兵)이 진군하여 도산(島山)을 포위하고, 군사를 독려하여 공격하고 채책(寨柵)을 불태웠으나, 적의 형세는 배나 성하여 계책을 쓸 수가 없었다. 동장(董將)은 진주로부터 제군을 독려하여 전진시켜 먼저 사천 본성의 왜적을 공격하니, 적들은 우리의 군세를 보자 대진(大陣)으로 달려들어갔다. 동일원이 군사를 놓아 추격하며 죽이고 이어 법질도(法叱島)를 포위하였다. 유장(劉將)은 제장을 거느리고 구목정으로부터 순천의 불우(佛隅)로 나아가니, 행장이 벌써 강화청(講和廳)을 비단 장막 안에 설치하고 먼저 몇 왜놈을 시켜 보검 한 쌍을 제독에게 받들어 올리고 인하여 맞이하여 강화하기로 약속하니, 제독이 이것을 허락하였다. 행장이 대병을 출동시켜 왜교(倭橋) 5리 밖에 진을 치고, 자신은 3천의 병력으로써 나아왔다. 제독은 유중군(劉中軍)으로서 제독의 위의(威儀)를 꾸미고, 원수는 병영우후(兵營虞候) 백한남(白翰南)으로서 병사의 복장을 갖추어 각각 수백 명을 인솔하고 맨손으로 들여보냈다. 의례(儀禮)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귀환할 때 삼협 장병이 합하여 공격하였다. 이때에 의지는 유산(流山)으로부터 와서 왜교에서 연회 준비를 함께 설비하고 장차 강화청으로 오려 하였는데, 우협의 군사가 서쪽에 있으면서 적이 엄밀하지 않은 것을 엿보고, 먼저 화전(火箭)을 쏘며 고함을 지르면서 돌연히 일어나니, 행장 등이 놀라 후퇴하여 달아났다. 제독이 마침내 화포를 놓으며 군사를 독려하여 추격하고 좌협장 이방춘이 기병으로 먼저 적의 길을 막으니, 외진(外陣)의 적병이 두 괴수를 보호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적으로 아직 입성하지 못한 자는 도중에서 부딪쳐 싸웠다. 모두 참수가 98급이었는데, 명군의 피해도 또한 많았다. 대군이 인하여 나아가 왜성(倭城)을 포위하고 진인은 수병 천여 척을 독려하여 이순신으로 선봉을 삼고, 와두(瓦頭)ㆍ묘도(猫島)를 경유하여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기를 휘두르며 전진하여 바다에서 둘러쌌다. 배마다 모두 흑삼생(黑三生)으로서 풍석(風席)을 만들고 각색의 기치가 그 사이에 가로 세로 펄럭이니 보기에 매우 웅장하였다. 적을 추격할 때를 당해서도 삼위군(三衛軍)은 아직 오지 못하였다. 권율이 대노하여 병사(兵使)를 붙잡아서 형벌을 주려 하자 배신이 이것을 말렸다. 이때에 나는 전봉(前鋒)에 있다가 주장(主將)과 서로 엇갈려 헤어졌는데 성을 포위한 뒤에야 서로 만나게 되었다.
○27일
성을 포위한 지 열흘에 적의 세력이 날로 성해 갔다. 어느 날 이 부총병이 절구(絶句)를 병상(兵相)에게 지어 보내기를
조개와 황새처럼 오랜 날을 서로 버티니 / 蚌鷸持多日
우리 군대는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하누나 / 王師久未旋
어찌하면 이 왜적을 쳐 없애어 / 何當除此賊
변방을 맑게 했다는 승전보를 임금에게 상주할 수 있을꼬 / 露布奏淸邊
하였다. 병상이 이것을 받고, 막하 사람들에게, “이 시에 화답할 자가 있느냐?”고 캐물었으니, 중군(中軍) 정이길(鄭以吉)이 고하기를, “진중에 별장 조(趙) 아무개가 있는데 본래 선비로서 의(義)에 분발하여 일어나 왜적을 토멸하기 위하여 종군하였으니, 이것을 화답하는 것은 어렵지 아니합니다.” 하여, 병상이 나를 불러 이 시를 보였다. 나는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군막으로 돌아와 바로 차운(次韻)하여 정서해서 바치기를
적의 형세가 쓰러진 지 오래이니 / 賊勢披靡久
어느 달에 돌아갈까를 어찌 근심하리 / 何憂曷月旋
흉악한 괴수가 목을 바치는 날 / 鯨鯢授首日
공업은 반드시 끝이 없으리 / 功業定無邊
하였다. 병상이 즉시 군관 박광국(朴光國)을 시켜 전달하였다. 부총병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본도의 총병은 문무를 겸했다 이를 만하다.” 하였다. 박광국이 돌아와 보고하니, 병상이 나를 불러 그것을 말하며 극구 칭찬하므로 나는 허리 굽혀 사례하고 물러나왔다.
●10월 2일
동틀 무렵에 유정이 대장기를 세우고 산대(山臺)에 올라가 전령하며 지휘하였다. 한 번 바라 소리가 나자 대군이 전진하여 성에 다다르고 선봉은 벌써 성밑으로 들어갔다. 기병 만여 명은 갑주를 갖추고 벌려 서서 후원이 되었다. 적이 포루에 올라가 대포를 수없이 쏘아대니 목석(木石)으로 지탱할 수 없었다. 선봉이 서북쪽 성 아래에서 윤거를 목책에다 바짝 붙였으나 일보도 들어갈 수 없어 성을 공격할 계책이 없었다. 아침 해가 높이 뜨고 장무(瘴霧)가 처음 걷히자, 문득 성의 서쪽 호두(狐頭)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명군이 흩어져 엎어지고 자빠졌다. 왜적이 죽이고 혹은 사로잡아 끌고 성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탈주하는 자는 총알에 맞고 능철(菱鐵)을 밟아 한 사람도 온전히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낮이 되자 성 북쪽의 전봉(前鋒)도 함께 기가 죽었고, 방위하는 군사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수비할 것을 잊어버리고 곤하게 졸고 있었다. 왜적은 성 아래 머물고 혹은 성 구멍으로 나와 칼을 휘두르며 마구 찍었다. 또 성안으로부터 섶과 풀을 던져 윤거(輪車)와 대로 엮은 여러 기구를 불사르니 죽은 시체가 다 타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이날 명군의 죽은 자가 8백여 명이었다. 적은 어지럽게 성밖으로 나와 마음대로 왕래하여 조금도 의심하고 꺼림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 대군이 잠간 후퇴하니 적병이 또 따라왔다. 얼마 안 되어 몇 명의 왜적이 두 사이로 달려와 섶에다 불을 지르니, 토석(土石)이 불 붙어 연일 끊이지 아니하였다. 제독이 여러 군사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장한 우리 병력으로써 이 조그만 적을 토멸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이제 잠깐 싸움을 멈추는 것은 적의 형세를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본도의 병사는 조부총병(曹副摠兵)에게 소속되어 진군하여 성 아래 이르렀는데, 내가 선봉에 있으면서 성으로 나오는 적을 마구 쏘았다. 적의 탄환이 우박과 같이 쏟아져 곁의 사람이 많이 죽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병사 이광악(李光岳)에게 고하니, 화살을 낭비했다고 허물하고 내주지 않았다. 본영이 점점 퇴진하는데, 천병파총(天兵把摠) 이유(李兪)는 내가 힘을 다하여 적을 쏘는 것을 보고, 병사에게 극언하여 편전(片前) 2부(部)를 얻어서 나에게 보내며, 계속 쏘게 하였다.
○4일 진인이 분이 나서 수군을 죄다 이끌고 다시 들어가 성을 침입하니, 적이 대포를 선창에다 많이 설치하고 무수히 난사하였다. 수군은 지탱할 수 없어 다시 퇴진하였다. 진인이 대노하여 육지로 올라가 유정의 진에 이르러 수(帥) 자 기를 손으로 찢고 그에게, “배짱이 좋지 못하다.” 책하고, 즉시 유정의 앞에서 사실을 갖추어 군문에 자문을 보내니, 유정의 얼굴빛이 흙처럼 되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손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며 크게 부르짖기를, “장관(將官) 중에 사람이 없는데, 어찌 나 홀로 당할 수 있소,” 하였다. 이날 낮에 적이 스스로 그들의 서쪽 성을 10여 척이나 헐고 군사를 성밖으로 내보내 토석(土石)을 날라가니, 그것은 무엇을 함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그곳을 바라보니, 벌써 대문을 만들어 마군(馬軍)이 난출(亂出)하는 길로 삼았다.
○16일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지난 7월 17일에 하늘의 벌을 받아 죽자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수가와 여러 괴수들이 이 때문에 다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
○19일 진인ㆍ이순신이 적병을 노량에서 무너뜨리고 9백여 급을 베었는데, 이순신도 순국(殉國)하였다. ...병옹(病翁)도 또한 남쪽 사람이다. 통제사의 전후의 행동을 낱낱이 아는 까닭에 감히 비감(悲感)을 가지고 졸렬한 시구에다 표현하기를
6년 동안 한산에서 호랑이 위엄을 지녔으니 / 六載閑山擁虎態
몇 번이나 거북선은 적의 소굴을 갈겼다 / 幾時龜船剪孤叢
언성 금패는 붕거를 부르는데 / 偃城金牌招鵬擧
하상의 외로운 군사는 위공을 돌아오게 하였네 / 河上單師返魏公
세 번이나 벽파에서 이겨서 생전에 절개를 다하고 / 三捷碧波生盡節
하루아침 와해에서 죽어 충성을 바쳤네 / 一朝瓦海死輪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산을 두고 맹세한 말은 / 揮旗鳴鼓盟山說
영웅에게 물려 주어 눈물이 한없이 흐르네 / 留與英雄淚不窮
5.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기해년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
●4월
○ 전라도 남녀 김정인(金丁仁) 등 13명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대마도(對馬島)에 갔다가 배를 타고 도망쳐 돌아오면서 표류되어 등주부(登州府)에 이르렀다. 그곳 차관(差官)이 경리아문(經理衙門)으로 압송하였다가 우리 나라로 보내왔으므로 배신 이호민(李好閔)을 보내어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고사(攷事)》
●경자년 상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1월
제독 이승훈(李承勳)이 요동(遼東)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왔다. 이내 호남으로 내려가 남원(南原)에 머물렀다가 영남으로 향하는데 접반사가 따라갔다.
○ 하지 배신(賀至陪臣) 한덕원(韓德遠)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은 두터운 은혜로 보답하는 일로 우리 사자인 장사(長史) 정도(鄭道) 등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조공하고, “감히 토산물을 받들어 북경에 와 있는 귀국 사신에게 수교하여 변변치 못한 정성을 전합니다. 또 소속되어 있는 칠산도(七山島)에서 온 보고에 의하면 관백(關伯)이 26년 7월 6일에 죽었다 하오니, 귀국을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로 생각합니다.”라는 자문과 보내준 토하포(土夏布)ㆍ파초포(芭蕉布) 각 20필과 배초(排草) 20근을 보내 왔다.
●2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곽재우(郭再祐)가 돌아가겠다는 소를 올리고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명하니 곽재우가 말을 달려 서울에 올라와서 죄를 기다렸다. 드디어 의금부에 하옥(下獄)시키고 비방한 죄로 다스려 전라도 영암군(靈岩郡)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그의 소에 이르기를 ...곽재우는 영암(靈岩)에서 1년 동안 귀양살이하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길이 인간사를 끊어버리고 곡식을 먹지 않고 도인(導引)을 행하였다. 여러 번 함경도와 전라도의 감사로 임명되었으나 한결같이 사절하면서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의 솔잎이 푸릇푸릇 다함이 없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한 신이 이것으로써 여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그 뒤 임인ㆍ무신년 사이에 과감히 나라 일로 여러 번 소를 올렸으며, 왕명으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혹은 방장산에, 혹은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을 한 알의 쌀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시 억지로 권하면 잠깐 수저를 대었다가 곧 귀와 코로 토해 버렸다. 만력(萬曆) 45년(1617, 광해군 9) 정사년 6월에 객과 더불어 강가의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놀다가 대낮에 고래를 탔다[騎鯨].
●5월
전 좌랑(佐郞) 강항(姜沆)전라도 영광(靈光) 사람으로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으며, 정유년 난리에 온 집안이 잡혀 갔다. 도 일본으로부터 전 가족이 바다를 건너 돌아왔는데, 따라온 선비가 10여 명 있었다.
●8월 27일
나는 이름난 호랑이를 잡았다. 이에 앞서 기해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양남(兩南)의 경계에 사나운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밤낮으로 사람을 물어 갔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남원(南原)의 수성령(宿星嶺)ㆍ구례(求禮)의 석주(石柱)ㆍ순천(順天)의 송치(松峙)ㆍ장수(長水)의 수분원(水分院)ㆍ함양(咸陽)의 팔량(八良) 등지 같은 곳에서는 호랑이의 피해가 더욱 심하여 넉넉치 못한 인원에 매일 5ㆍ6명씩이나 해를 입어 마침내 사람과 물자가 통하지 못하게 되고, 산 밑의 여러 고을에서는 몇 달 동안에 피해자가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다. 금년 여름부터는 산골 사람들이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그물을 치고 한 집에 모여서 잤는데, 호랑이는 역시 흉측하여 그물을 찢고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마구 들어와 해를 입혔다. 한 마리의 범이 날뛰었으므로 그놈이 남원에 있으면 운봉(雲峯)에 해가 없고, 송치(松峙)에서 해치면 팔량(八良)에서 자취가 끊기고, 이렇게 차례로 7일 만에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잇따라 두 사람이 물려갔으므로 감사 이홍로(李弘老)가 여러 고을에 공문을 내어 잡게 했으나 여러 고을에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그 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을 부사에게 알리니, 부사는 전 방어사가 범을 잡던 폐단에 물려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나는 걱정한 나머지 따로 활과 쇠뇌를 이문(里門)에 설치하여 집을 보호하는 계책으로 삼았다. 이날 밤 삼경에 사나운 호랑이가 함부로 덤벼 들어오다가 마침내 쇠뇌에 맞아 뜰에 고꾸라졌다가 서서히 달아났다. 범을 꾀어 쇠뇌가 있는 데까지 오게 한 것은 그 사이에 꾀를 썼던 것이다. 이튿날 나는 종들을 데리고 범이 있는 곳을 추적하였더니 범은 집 남쪽 산 숲속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종일토록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점점 가까이하였더니 범은 달려들어 종 한 사람을 죽이고 곧 쓰러졌다. 내가 그것을 방어사에게 바쳤더니 방어사는 감히 숨기지 못하고 감사에게 바쳤다. 그 뒤로부터는 호랑이에 대한 염려가 영원히 없어지고 고갯길도 무사해졌다.
●경자년 하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9월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과 감군(監軍) 두잠(杜潛)이 대군을 거느리고 모두 명나라로 돌아갔다.
○ 명 나라 군사가 철수해 돌아간 뒤에 명 나라 군사 가운데 도망하여 우리 나라에 와 머물러 있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명 나라 조정에서 보낸 관원이 뒤를 이어 와서 모두 데려가니 도망병들은 도당들을 불러모아 위관(委官) 이 승총(李承寵)ㆍ섭 정국(葉靖國) 등을 잡아묶어 때리고 칼로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옥문을 부수고 옥에 갇힌 도망병 15명을 빼앗아 흥화문(興化門) 밖으로 뛰어나가 한데 뭉쳐 진을 쳤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붙잡았다. 경리 및 요동 등 아문에 자문을 보내어 이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호군 박정량(朴廷亮)을 보내어 그들을 압송해 갔다. 그후에도 뒤에 떨어져 있는 자가 전후 수백 명이었는데 차례차례 잡아서 요동 및 진강(鎭江) 아문으로 호송하였다.
●신축년 만력 29년, 선조 34년(1601년)
●6월
왜의 사신이 또 와서 잡혀간 사람 전 현감 남충원(南忠元) 등 2백여 명을 바쳤다. 본도 좌수영 우후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달 21일에 황령산 봉수군(黃嶺山烽燧軍) 송기필(宋己必) 등이 달아나는 자를 잡아가지고 돌아왔다고 고하는데, 전 현감 남충원 등의 공초(拱招)에 “우리 나라 사람 남녀 모두 2백 50명과 왜인 8명을 네 척의 배에 나눠 싣고 나왔다.” 하므로, 적의 정세에 대하여는 뒤에 문초하여 수사가 곧 장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남충원을 다시 문초한 공초에, “이 몸은 젊어서 임금의 은혜를 특별히 받아 청산 현감(靑山縣監)에 임명되어 전후 8년이나 근무하였고, 경질되자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에 종사하다가 얼마 안 되어 진천(鎭川) 본가로 내려왔습니다. 정유년의 난리에 온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문경(聞慶)과 상주(尙州) 등지를 왕래하면서 피란을 가다가 적병이 도로 내려갈 때에 자식 두 사람과 함께 청정(淸正)의 군사에 붙잡혔습니다. 얼마 안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는데, 왜의 우두머리 수길(秀吉)이 적장 증전우문위(增前右門衛)에게 저를 주어 그 왜인의 집에 한때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매일 우리 나라 사인(士人) 하동(河東) 사람 정창세(鄭昌世)ㆍ서울 사람 박언황(朴彦璜)ㆍ이산(尼山) 사람 송정수(宋廷秀) 등과 더불어 상의하여 늘 도망해 나올 것을 꾀하던 차에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조신(平調信)ㆍ평의지(平義智) 등이 지난해 우리 나라의 사자 박희근(朴希根)이 가지고 온 글의 사연을 가강(家康)의 처소에서 직접 의논하기 위하여 대판(大阪)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 만나보기를 청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조신(調信)과는 전날 통신사로 왕래했을 때에 제가 청산 현감으로 있으면서 지응(支應)하는 차사원(差使員)으로 인하여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조신은 말하기를, ‘조선의 전성시기에 우리들이 화친을 맺어 서로 통하여 작록(爵祿)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므로 평소에 한결같이 마음속에 새겨져 잊히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임진년의 싸움으로 해서 이웃나라와 사귀는 도리를 크게 잃었습니다만, 관백(關白)이 임종할 때에는 마음으로 뉘우치고 화친을 구하려는 뜻이 듣고 보는 모든 일에 나타나 있었음은 여러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일찍부터 이 뜻을 조선에 전달하려고 한 것이 벌써 여러 해 되었습니다. 우연히 지난 여름에 조선에서 박희근(朴希根)으로 하여금 그가 예조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전하고 곧 바다를 건너 돌아간 뒤로는 두 나라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오래도록 답서를 보내지 못했으니, 당신들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왜 사신과 함께 보내어 예조의 공문에 답하게 하고 왜인 8명을 같이 내어 보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달 21일 부산 앞바다에 상륙하였습니다. 같이 나온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더러는 임진ㆍ계사ㆍ갑오 혹은 정유년에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일본 적의 상황은 관백이 죽은 뒤 관동대장(關東大將) 가강이 관백의 아들 수뢰(秀賴)를 세워 주(主)를 삼고, 가강이 임시로 정권을 잡고 나라일을 마음대로 주무르기를 관백과 다를 것이 없이하여 한 지방을 통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관동 중납언(關東中納言) 경승(景勝)이 성을 점거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지난해 6월에 가강이 대병을 일으켜 바로 관동으로 향한 뒤에 서경 유진대장(西京留鎭大將) 모리휘원(毛利輝元)이 왕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서로(西路)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강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이내 바로 관동으로 향하여, 가강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도리어 크게 패하여 서로의 여러 장수 석전치보부(石田治甫部) 및 승장(僧將) 안국사(安國寺)ㆍ소서비(小西飛)ㆍ평행장(平行長) 등이 모두 참살을 당하였습니다. 가강은 관동으로부터 바로 서경으로 향할 때에 여러 고을을 모조리 도륙하였으나 휘원(輝元)만은 죽이지 않고 머리를 깎아서 중을 만들고 그의 식읍을 모조리 빼앗고 성밖에 안치하였다 하며, 그 밖의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공초에 들어있는 잡혀간 사람 2백 50명을 이제 다시 이름을 대조하여 조사하니 2백 31명이었는데, 체부(體府) 종사관의 분부에 따라 가까운 고장 사람은 곧 고향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는 만호 손문욱(孫文彧)이 거느리고 체부로 보내기 위하여 어릴 때의 이름과 그들이 살던 고향을 열거하여 올리게 하였습니다.
●임인년 만력 30년, 선조 35년(1602년)
●4월
조정의 의논에 좇아 수군으로 고생한 사람들에게 상과(賞科)를 보이기로 하였다. 21일에 시험 장소를 경상도의 부산ㆍ거제와 전라도의 경도(鯨島)ㆍ고금도(古今島)에서 열었다. 철전(鐵箭)은 다섯 개 화살로 3순씩을, 편전(片箭)은 세 개 화살로 3순씩을, 조총은 세 자루로 2순씩을 쏘아서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만이라도 각각 한 번씩만 적중하면 합격으로 쳐서 모두 1만 7천여 명을 뽑아서 6월중에 발표하였다.
●11월 27일 양쪽 좌도(左道)의 해과 회시를 보았는데, 다음해 1월이 되어 함께 합쳐 발표하니, 모두 1천 6백여 명이었다.
●계묘년 만력 31년, 선조 36년(1603년)
●6월
전 참판 유희서(柳熙緖), 전 부사 황극중(黃克中)이 도적들에게 살해되었다.
●을사년 만력 33년, 선조 38년(1605년)
●4월
유정(惟政)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 나라 남녀 3천여 명을 데려왔다. 유정은 처음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들어갔는데,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산천을 완상하겠다 청탁하니, 왜인들이 더욱 기특하게 생각하고 견여(肩輿)로 맞이하기를 거의 매일처럼 하였다. 마침내 대판(大坂)에 당도하여 처음으로는 화친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일을 말하고, 다음으로는 우리 나라 포로의 송환에 대하여 말하였다. 가강(家康)이 말하기를, “임진의 싸움에 대하여는 나는 실로 알지 못하오만 양국이 아무 일 없이 서로 태평한 것이 좋지 않겠소.” 하고, 즉시 영을 내려 포로들을 송환하여 같이 귀환토록 하였으나, 다만 요시라(要時羅)의 일로 허물을 잡았다. 유정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와 일본은 비록 영원히 잊지 못할 원수지만 교린(交隣)의 언약에 대하여는 본래 그대들을 저버린 일이 없다. 한 왜인의 있고 없음이 승패에 무슨 상관이 있어서 군사가 이미 후퇴한 뒤에 왕래하는 사신을 죽이려 했겠는가? 모년 모월 요시라가 중원에서 돌아왔기로 우리는 전처럼 접대하였고, 모년 모월 일에 부산에 호송한 것이 이미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이 이것을 가지고 허물을 우리에게 돌린다면, 필시 사실을 숨기고 기어이 불화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편주(扁舟)로 바다를 건너다가 사고가 났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왜의 추장 등이 옳게 여기고 다시는 말이 없고, 유정더러 재차 와 주기를 요청하였다. 유정은 귀국하기에 앞서 먼저 정탐선을 보내서 지난 일을 자세히 조정에 보고하고, 겸해서 바다를 건너오는 날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부산에 모이도록 하여 군대의 기세를 성대하게 해서 따라온 왜병들의 눈에 위엄이 있어 보이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래서 이날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수군을 인솔하고 부산으로 가다가 역풍을 만나 지체되어 제때에 대지 못하고 말았다. 유정은 송환된 사람들을 이경준에게 넘기고 형편대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고 하니, 경준은 여러 선박에 분부하여 그들이 가자는 대로 가라 하였다. 그런데, 선장들은 남자와 여자들을 맡게 되자 서로 뒤질세라 앞을 다투어 얽어 매기를 약탈하고 포로하는 것보다 심하고, 혹 연고 관계를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은 다만 조선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자기의 계보나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자기의 종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면 그 남편을 묶어 바다에 던지고 멋대로 자기의 것을 만드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세상 천지에 숨길 수 있는 일은 없는 법이니, 이 사실이 모두 임금께 알려져 이경준은 즉시 파직되고 이운용(李雲龍)이 대신하였다. 따라서 각도의 수사(水使)들에게 명하여 이 일을 자행한 변장(邊將)들을 적발하라 하였으나, 수사들은 형식적인 일이라 보고 끝내 고발하지 않았다.
●병오년 만력 34년, 선조 39년(1606년)
●4월
황제는 한림원 수찬 주지번(朱之番)과 형과도급사중(刑科都給事中) 양유년(梁有年)을 보내어 황태자 탄생의 조서를 내렸다. 인하여 내린 칙유에, “그전에 왜국의 정세가 자못 수상하므로 짐이 요동무진(遼東撫鎭)에 영을 내려 사람을 그대의 나라에 파견하여 염탐하게 하라 했는데 지금까지 3년이 지났는데도 독무(督撫)의 말이, ‘근래 해상에는 다른 동정이 없다.’ 하니, 관원을 보내면 한갓 번거롭고 요란스러울 뿐이므로 앞으로 그대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염탐 보고하여 공응(供應)에 수요되는 것을 절약하도록 하라. 왕은 마땅히 여유가 있을 때 힘써 닦으며, 그 마음을 돈독히 하여 착실하게 수행할 것이며, 따라서 멀리 정찰하고 세밀히 탐지하여 경계가 있건 없건간에 매양 2개월만에 한 차례 보고하여 진강(鎭江)의 유격아문(遊擊衙門)으로 하여금 전하여 보고하게 하되 만약 중대한 상황이 있으면 수시로 즉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의 세자 상녕(尙寧)이 우리 나라의 후의에 대한 보답의 글을 가져 왔다. 그 내용은, “관백이 함부로 반역한 것은 귀신이나 사람이 다 같이 분해할 일입니다. 하늘이 교만한 놈들을 망하게 하였으니 해내(海內)가 뛰며 기뻐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지금 명 나라의 무덕(武德)이 크게 떨치고, 귀국의 위령(威靈)이 새로 경장(更張)하여 나머지 요물들은 이미 초멸되었으니 저 추악한 오랑캐들이 정신이 빠지고 간담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뒤에 어찌 또 관백과 같이 요량 없는 놈이 생겨날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 반역이 싹틀 때는, 우리는 직분으로 말하면 변방의 울타리요, 의리로는 우방에 속할진대 장차 정성을 다하여 공공의 책임으로 알고서 멀리 망보고 미리 살펴서 명 나라에 아뢰고 또 귀국에 알리도록 하겠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하고, 비단 20단, 황석견(黃石絹) 10단, 화문견(花文絹) 10단, 그리고 토산물 부채 2백 자루를 보내왔다.
●10월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오래 권력을 쥐고 국권을 마음대로 하여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한손에 달려 있으니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졌다. 남변(南邊)의 수장(守將)은 한 배 가득 실은 쌀을 유영경에게 직접 상납하다가 모두 훈련도감에 뺏기고, 또 만호들이 그 문하에 재물 바치기를 다투고 있으나, 유영경은 숙배할 사람을 정하는 일이 없었다.
●정미년 만력 35년, 선조 40년(1607년)
●8월
회답사 여우길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잡혀갔던 사람 1천 2백 40여 명이 송환되었다. 그리고 가강(家康)이 평씨(平氏)를 혁파하고 국정을 스스로 주도하여 수길(秀吉)이 하던 일을 모두 뒤엎고, 자리를 그 아들 수충(秀忠)에게 전한 것 등의 사정을 낱낱이 위에 알렸다.
●무신년 만력 36, 광해 원년(1608년)
●7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이 자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저희 나라는 귀국과는 비록 멀어 상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나 똑같이 중국에 신이라 하고 있는 처지를 보면 함께 천지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고 정신이 서로 빨리 전달되어 여러번 후대한 은혜를 받았고, 세문(歲問)도 중단된 일이 없었습니다. 저희 나라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고 이러한 것을 집사에게 얻게 된 것입니까? 저의 나라에서는 근년 들어서 중국 조정이 내려주신 관복으로 왕작(王爵)의 봉을 받게 되어서 비로소 귀국과 서로 형제의 친함을 맺고, 중국 조정을 울타리처럼 호위하여 수족같은 신하가 되었으니, 지금부터 뒤로는 영구한 동맹국이 되어서 귀국은 형님이 되고, 저의 나라는 아우가 되어 아우와 형으로서 위로 중국을 섬기기를 청합니다. 즐겁고 화목하게 오고가게 되어서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각종의 베와 명주 등을 보내왔다
●기유년 만력 37년, 광해군 2년(1609년)
●8월
인삼을 캐러 들어온 중국 사람 40여 명이 전자동(田子洞) 지방에 와서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권관(權管) 홍인성(洪仁成)이 군대를 거느리고 쫓아 잡으려다가 중국 사람에게 얻어맞아 죽었고 병사들은 모두 타박상을 입었다. 자문을 진강아문(鎭江衙門)에 보내어 강 건너는 금법을 강화시켜서 폐단의 걱정을 근절시키라고 거듭 밝히었다.